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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

정말로 대한민국 현대사가 성공한 역사였을까?



오로지 남의 대들보만 눈에 들어오는 박근혜 대통령은, 재보선의 압승에 고무되어 나라 전체를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거의 모든 규제들을 무력화시키려고 하면서도, 윤 일병 집단구타 살인사건과 충격적인 GOP총기난사사건 등의 비극적인 참사의 처방으로 조기교육의 필요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했다. 군대가 갖는 태생적이고 제도적인 한계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한반도, 지정학적으로 열강들이 충돌하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다섯 국가 중에서 한국만 36년이나 식민지 착취와 수탈을 당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식하고 바라보는 군대란 아버지 박정희의 쿠데타로 연결되는 것 때문인지, 군대를 오락거리로 포장해서 여론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MBC의 '진짜사나이'에 나오는 군대인가 보다. 현실과 리얼리티쇼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성찰없는 미디어세대의 전형적이 모습이다. 군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기교육과 인문학적 소양을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일제 강제합병시대 이후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공교육이고, 식민지사관을 추종하는 세력들에 의해 교학사 교과서 사태까지 이어진 것도 박 대통령의 인식이 그녀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추종한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가 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 허구성이 여러 가지 연구와 자료, 통계들로 밝혀졌음에도 현 집권세력의 뿌리가 식민지 36년 동안 부를 축적한 친일 부역과 일제가 구축한 군대에 있으니 대통령이 인지부조화를 드러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최근에 들어서는 최상위 부자들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선행학습을 통해 계급적 차별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유체이탈 화법의 전형이자, 참으로 한가하기 그지없다. 부부의 대다수는 출산을 미루고, 출산 이후에는 맞벌이를 해야 아이를 교육할 수 있는데 조기교육과 인문학적 소양을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삼포세대에 이르면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지고, 대학들은 인문학 강좌를 폐지하고 있는데 이런 뜬구름 잡기식 발언은 어떤 경험과 성찰에 근거한 것일까?



인류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본성에 사랑을 찾도록 만들었고, 후손을 이어가기 위해 사랑의 성행위에 절정의 쾌락을 안배했는데, 아예 사랑을 하는 것조차 힘에 겨운 청춘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설사 조부모의 재력이나 부모의 무관심 때문에 연애를 할 수 있다 해도, 전반적인 섹스의 양은 늘었으되, 서로를 아끼고 보호하는 사랑보다는 하룻밤의 욕망과 쾌락을 위한 소비적 행위처럼 이성교제를 한다. 



그에 따라 피임과 낙태도 비약적으로 늘었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에게 주어지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만남이 쉬웠기에 이별도 어렵지 않으며, 교제기간이라는 것도 극단적으로 짧아짐에 따라 상대를 알기도 전에 사랑의 전 과정이 끝나버리기 일쑤다. 연예와 사랑의 가벼움은 결혼을 할 때에 이르러서는 철저한 계산을 통해 손익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실존과 존재의 모든 형태가 소비하고 계산기를 튕기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현실 체험도 사이버공간에서 첨단 정보통신기술의 통제 하에 진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삶의 편리함은 끝을 모르고 늘어나고 있지만, 그런 편리함을 집요하게 팔아먹는 기업과 자본의 탐욕에 자연과 지구는 물론 모든 생명과 최종적으로는 먹이사슬의 맨꼭대기에 있는 인간마저 사회경제적 위계에 따라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았다. 



                                         인간의 사고를 대체하는 다양한 미디어들



물론 지구와 자연의 어떤 반격에도 살아남을 자들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인 지구 멸망에 나오는 생존자들이 실제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어막을 펼칠 수 있는 최상류층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거대한 부를 이용해 일체의 위험에서 살아남을 공간들을 구축하고 있다. 그런 자기보존의 능력마저 급격한 경사면을 이루며 각종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지만, 최상류층이 잠시도 쉬지 않고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런 궤변에 저항할 여력도 없고,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길들어져 있는 99%의 인류는 하루, 한 시간, 일 분의 만족과 단기적인 생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들이 매일같이 체험하는 것은 생존본능에 충실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라면 삶을 잘게 나누어 지속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그때그때를 넘기다 보면 오늘과 같은 내일이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부만이 지속적인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신의 능력을 대출ㅡ천문학적인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ㅡ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나라라 해도 인간을 움직이는 철학은 단 세 개로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 또한 최종적으로 하나로 합쳐진다. 돈과 성공과 권력.. 그리고 둘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돈으로 귀결된다. 천문학적인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타인의 지갑을 착취해야 하고, 그러려면 천민자본주의가 강화돼야 한다. 



오직 돈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축해야 하며, 무한대의 이자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신용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지닌 자만이 돈이 창출한 권력과 질서에 복종하기 마련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풍요와 행복을 위해 도입된 추상적인 존재들ㅡ화폐와 무한대의 신용 창출을 가능하게 하는 금융공학ㅡ이 이제는 인류의 노동과 목숨을 담보로 신의 권능을 대신하는 자리에 올랐다.  





이런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바꾸려면ㅡ가능성이 조금은 있다ㅡ인간이 자신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수십 년 전부터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철학적 사고를 되살려야 한다. 애석하게도 철학적 사고란 지극히 쿨하지 못한, 개념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그래서 삶에서 배척되기 일쑤인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말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자들처럼, 외국의 노예로 산다 해도 배 부르고 등 따시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주류가 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고의 형태를 말한다. 



때론 자아의 실체를 찾아가는 존재론적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순간순간의 삶에 집중하고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실존론적인 사고에 빠져들기도 하며, 한없이 늘어나는 추상적 사고에 빠져들기도 하다가도 때로는 숱한 경험이 만들어준 번개 같은 직관에 따르기도 하는, 분열적이면서도 통합적이고 다층적이면서도 압축적인 주체의 인식론이 철학적 사고의 핵심을 이룬다.   





물질과 제품, 서비스가 주는 편리함과 욕망 및 쾌락의 충족보다는, 가난할지언정 정신적 영역에서의 치열함과 풍요로움에 빠져들고, 느릴지라도 다양한 가치와 지혜의 세계를 산책하며, 화려한 인공의 조명을 벗어나 자연이 주는 청명한 빛에 나를 맡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저녁 노을이나 황혼이 져야 비로소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같은.. 한 마디로 미친놈 소리 듣기 쉬운 지혜와 성찰의 세계에서 하염없이 배회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타인은 정말 지옥이라면, 타인이 없는 나란 존재할 수 있을까? 나를 정말로 배려하는 것은 어떤 것이며, 그렇게 타인을 대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내가 가는 길은 성지로 이어질까 아니면 지옥으로 이어질까? 내가 가면 길이 되는 것일까, 내 뒤에 누군가가 걸어가면 그때야 길이 되는 것일까? 이런 답이 없는 것들은 끊임없이 물어보고, 끝까지 밀고나가야 가능한 것이 철학적 사고의 본질이다. 이런 과정에서 승리의 배당이란 지극히 초라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리얼킴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헌데 현대의 천민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소비에의 욕망과 쾌락은 이런 것들ㅡ당장의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ㅡ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욕망한다, 오늘에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던 것이 내일에는 저가의 필수품이 되기를. 신용을 통해 분할 구매하면서도, 내일이면 또다른 신제품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며칠 가지 않을 순간의 만족과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불만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악순환은 언제 시작됐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존재하는 모든 분야가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고, 돈이 되지 않는 분야는 버려지고 퇴출되는 이명막근혜의 8년의 대한민국은 필연의 과정이었고,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조중동과 산업화 주역들이 그토록 주장하듯,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였고, 박정희는 압축성장의 지도자였고, 김대중과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었을까? 그래서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은 정말로 성공한 역사였을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