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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민주주의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을 지켜본 후 화들짝 놀란 각국의 학자와 지식인, 관련 전문가들이 무수히 많은 논문과 책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중에서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막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은 두 명의 하버드대 교수들의 자기반성적 고백성사라 할 수 있다. 공동 저자의 자아성찰은 영국과 유럽의 학자들이 영국의 브렉시트에 충격받은 것보다 미국의 학자들이 트럼프의 당선에서 받은 충격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두 명의 교수는 해당 책에서 '인민의 통치'로 대표되는 평등주의에 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지나친 우려와 편견 때문에 치명적인 허점을 지니게 된 미국 헌법의 한계들을 비판하고 구체적인 사례들ㅡ예를 들면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FBI 같은 독립적인 정부 기관을 자신의 측근 인사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달고 있지 않은 것과 긴급조치나 행정명령을 통해서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는 것ㅡ을 열거한 뒤, 인종 차별에 의존해 미국의 정치를 독점해온 공화당과 민주당의 분열상과 직무유기를 까발렸다.

 

 

(주 : 매디슨의 《연방주의자 논설》을 보면 그와 해밀턴, 존 제이 등이 무지한 다수가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 즉 주권재민에 근거한 국민 자치라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를 극도로 경계하는 발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들이 자연귀족에 해당하는 백인남성의 (선출직) 엘리트들이 지속적으로 자유주의적 통치를 할 수 있도록 유권자의 선택을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는 선거인단 제도(지금은 슈퍼대의인제도가 이런 일을 대신한다), 사실상의 귀족계급 집단인 상원에 하원을 견제할 힘과 함께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통제장치들을 설치했다. 한나 아렌트도 《혁명론》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정부를 반대한 이유들로 '고대의 역사와 이론이 민주주의의 '평온치 못한' 성격, 즉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갑작스럽게 소멸할 만큼 단명한다는 말로 압축되는 특유의 불안전성, 그리고 시민들의 변덕과 공공 정신 결핍, 여론과 대중 정서에 휩쓸리는 성향' 등의 이유를 들어 미국 공화국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최고의 역사학자였던 찰스 비어드는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헌법이란 건국의 아버지들이 자신의 재산(동산과 주식, 채권 등)과 미래의 이익을 지키고 키우는 것을 목표로 작성됐음을 밝혀냈다.)  

 

 

저자들은 또한 공화당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뉴트 킹리치가 상대인 민주당을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규정한 이후, 정치가 합리적 경쟁에서 무법천지의 전쟁으로 변질된 것을 지적했다.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거나 굴복시켜야 끝나는 전쟁처럼, 미국의 정치가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극단적인 대립(머독의 <폭스 뉴스>를 정점으로, 이를 부추긴 기성언론의 책임도 크다)으로 치달으며, 헌법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양극화를 막아온 비공식적인 민주주의 규범(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마저 무력된 것이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을 막지 못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고 고백했다. 이런 정치의 양극화는 모든 민주국가와 민주화 과정이 진행 중인 국가에서 발생하는 공통의 현상이지만, 노무현의 참여정부 때부터 '노무현 죽이기'로 통칭되는 보수 진영의 무차별 공격과 집요한 흔들기, 악착같은 발목잡기와 노골적인 비협조 등으로 본격화된 대한민국처럼 미국에서 특히 심각했다. 

 

 

매튜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는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를 통해 미국의 기성정치가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대규모 동원 중심의 미국 대의민주주의가 각자의 문제를 개별적으로 처리하는 개인민주주의로 축소되는 과정을 풀어냈다. 미합중국이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양분된 두 개의 나라와 두 개의 국민으로 갈라선 것은 남북전쟁 직전의 상황에 비견될 만큼 미국 정치를 작동불능의 지경까지 내몰았다. 클린턴 대 부시, 부시 대 엘 고어, 부시 대 케리, 오바마 대 매캐인의 대선과정에서 드러난 극단적 분열상은 트럼프 대 힐러리의 대선과정에서 거짓과 루머, 경멸과 증오, 음모론과 악의적 가짜뉴스 등이 난무하며 선혈이 낭자한 최악의 전쟁터로 비화됐다. 미국 역사상 가장 비열하고 저급하며 더러운 쓰레기들로 가득했던 선거의 분열상은 성문화되지 않은,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보다 오래된 두 개의 규범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뒤늦은) 경험을 제공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두 개의 민주주의 규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물론 경쟁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 주장을 혐오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당한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걱정하고 헌법을 존중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경쟁자가 반역을 꾀하고, 전복을 꿈꾸고, 혹인 민주주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선거에서 이길 때 우리는 그날 밤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거 패배를 재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상호 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뜻한다."

 

 

최소 2개 이상의 정당과 후보자가 참여한 자유롭고 공정하며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정치적으로 평등한 주권자인 국민이 자유로운 언론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다음 정부를 이끌어갈 정당과 대표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무력이 아닌 민주적으로 교체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면(조세프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참조할 것), '상호 관용'이라는 성문화되지 않은 민주주의 규범은 모든 과정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선행조건이자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선거가 승자독식을 가리는 것이라면 패자는 선거 패배를 인정하기보다는 패배를 부정하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체제의 전복을 꿰할 것인데, '상호 존중'의 규범이 작동하는 한 이런 파국은 피할 수 있다.

 

         

"민주주의 생존에 중요한 두 번째 규범은 우리가 '제도적 자제'라 부르는 개념이다. '자제'란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또한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자제 규범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은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려 들지 않는다. 비록 그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기존 체체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주 : 기존의 정당들이 진영논리에 갇혀 진흙탕 싸움만 벌이고, 이념적 지향이나 당령과 당헌처럼 지속성을 띠는 예측가능한 정치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지도자의 매력이나 대중적 인기에 이끌려다니며 단기 실적 위주의 정치와 선거에 매몰되고, 그에 따라 당원이나 지지자의 소통도 약해지면서 정당정치 기반의 대의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시민행동주의(시민개입주의, 정치행동주의)처럼 직접민주주의의 강화 현상과도 연동될 수 있다. 정당과 언론은 두 개의 규범으로 트럼프 같은 극단적 표퓰리스트를 걸러내고, 시민들은 두 개의 규범처럼 기성정당과 언론 및 정부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이용해 민주주의를 작동불능의 상황으로 내모는 선동가 형 정치인의 수사학에 속지 않는 기준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사용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이 표퓰리즘 정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상호 존중'과 마찬가지로, '제도적 자체'라는 민주주의 규범은 헌법 정신과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선행조건이자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지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려면 정당과 정치인들이 '제도적 자제'라는 개념을 내재화해 습관처럼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듯 두 개의 규범은 밀접하게 얽혀 있을 때 서로을 강화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상대를 존중하는 이런 자세는 정치인들에게 관용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제공하며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것이다.

 

 

반면에 정치인들이 경쟁 상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제압해야 하는 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두 개의 규범은 무력화되고, 승리를 위해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테두리를 넘어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무슨 짓인들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불법과 탈법적인 술수들이 자행되고 종국에는 초법적 행태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과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선거에서의 패배가 곧 정치적 사망을 뜻하기 때문에 헌법도 무시하는 강경한 태도도 불사하려 할 것이며, 선거는 위험천만한 불장난과 반민주적 폭력이 난무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로까지 격상되는 것도 시간의 문제일 뿐이리라.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교체와 승자에 대한 패자의 인정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강령은 '영원히 승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내적 기제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와 문재인의 대선에서 자행됐던 권력기관들과 군의 수많은 불법 선거와 정치 개입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미국 헌법과 법률은 물론 모든 나라의 헌법과 법률에도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헌법과 법률의 해석에서도 진영 간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눠지고 충돌하기도 하는 관계로 '상호 존중'과 '제도적 자제'라는 두 개의 비공식적인 규범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두 개의 규범이 무용지물이 된 것을 넘어 견고하다고 믿어왔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것ㅡ귀족주의를 선호했던 보수적 자유주의자 토크빌이 100여 년 전에 미국을 둘러본 후 일종의 예언처럼 경고했던 것ㅡ이 증명되자 두 명의 하버드대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반성적 고찰을 이어갔다.           

 

 

"민주주의 기반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극단주의 선동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등장하기 마련이다. 미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령 헨리 포드, 휴이 롱, 조지피 매카시, 조지 윌리스와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시험은 이러한 인물이 등장하는가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당이 나서서 이러한 인물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이들에 대한 지지와 연합을 거부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당의 민주주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경쟁 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함으로써 이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가이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극단주의자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성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혹은 판단 착오로 인해 극단주의자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일단 잠재적인 독재자가 권력을 잡으면, 민주주의는 두 번째 중요한 시험대에 오른다. 그 독단적인 지도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제도가 그를 통제할 것인가? 그러나 제도만으로는 선출된 독재자를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정당 체제와 시민사회는 물론 민주주의 규범이 필요하다. 그 규범이 무너질 때 헌법에 명시된 권력분립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민주주의 보호막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독재자는 민주주의 제도를 무기로 삼아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중립 기관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거나 '무기로 활용하고', 언론과 민간 영역을 매수하고자(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정치 게임의 규칙을 바꿔서 경쟁자에게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트럼프만이 아니라, 이명박근혜의 '잃어버린 9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런 역주행은, 기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인물인 이재명을 밀어주는 민주당의 지도부와 의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내가 세월호참사를 철저하게 우려먹은 이재명(그의 실체를 몰랐을 때는 지지했었다)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현실정치에서의 퇴출운동에 참여한 것도 그의 품성이나 언행, 기질 등이 표퓰리스트 선동가인 트럼프와 상당히 닮았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노골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대선주자에도 오르지 못했을 이재명(일개 도시의 시장에 불과한 행정가가 정치판에서 화제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예외적인 경우였다)을 노무현 대통령과 비교할 때마다 분노와 실소를 금하지 못했던 것도 살아온 방식과 품성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두 사람을 쌍둥이라고 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재명을 걸러내기는커녕 비호하기에 급급했던 추미애와 이해찬, 표창원, 정성호, 손혜원 등은 물론 김어준과 주진우, 김용민, 이동형 같은 자들에게도 위의 인용문은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의 주장과 논리가 얼마나 저급하고 선동적이고 편향적이이서 종국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바로미터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정의론(롤스, 드워킨, 벌린, 노직 등)'에 관한 책들과 표퓰리즘 정치학 관련 책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민주주의가 다수의 독재나 우중의 독재로 전락하는 데는 자유의 과잉과 책임의 부재, 정의감의 상실, 도덕적 판단과 윤리적 신념의 결여, 반성적 성찰과 숙고된 합의의 실종 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평등과 자유가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철학적 무지함이 이런 퇴행적 현상들을 초래하고, 그 결과 체제와 사회의 하향평준화가 기성정치인과 정당 및 언론과 지식인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선동가들이 활개칠 수 있는 것도 이런 퇴행적 현상들이 누적된 결과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이명박근혜 9년의 역주행은 이런 퇴행적 현상들의 박람회였으며, 끝을 모르는 민주주의의 역주행(탈민주화)으로 귀결됐다. 이들의 반민주적 통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끝을 낼 수 있었지만, 죽어도 노무현의 참여정부를 인정할 수 없어 민주주의 규범마저 무시한 채 극단적인 흔들기와 무조건적인 반대를 이끌었던 주역들이 아직도 기성 정당과 언론, 대학, 종교집단 등에 여전히 포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정치가 합리적 토론과 협상이 불가능한 극단적인 양극화로 접어든 것도 이들의 반체제 집단 같은 난동과 노골적인 적개심 표출, 조직적인 방해공작 때문인데, 그들을 저격하고 비난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권력화의 단계를 넘어 현실적인 이익까지 챙겨온 김어준과 주진우 등의 나꼼수 멤버들에 열광하고 추종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들에 대한 선호와 인정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은 정치적 양극화의 또다른 말인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해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유지하기 때문이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으며 그들이 쏟아낸 말들과 질문 중에 어떤 것들이 사실이었고 그 비중은 얼마나 되는지 객관적으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책임을 지지 않는 일방통행은 독재의 다른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잉글하트와 달톤처럼 디지털 기술과 시민주권의 조합에 긍정적이어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피파 노리스의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에는 참조할 만한 내용들이 다수 나온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인 17년 전에 출판된 책이어서 한계는 있지만 상당 부분이 현재에 적용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는 점에서 참조할 가치는 충분하다. 디지털 기술들이 일으킬 정치 혁명을 긍정적으로 보다 최근에 들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늘어나는 것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다룬 이런 초기의 연구들이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준다. '촛불혁명'과 '소셜미디어'를 각각의 장에서 다룬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도 디지털 민주주의의 명과 암을 제대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디지털 정치혁명을 낙관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준다.  

 

 

"국가 간 통계자료를 보면, 정보통신 기술을 매개로 시민 관여의 기회를 이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전통적인 통로를 통해 참여했던 적극적인 할동가들이다. 방관자들이나 무관심층이 주식시장에서 게임과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다른 사이트에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면, 디지털 정치는 그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을 것이다…정치적 주제를 다루는 토론 집단과 게시판, 온라인 토론방에 대한 연구는 이런 공간이 진지한 토론의 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대체로 실패하는 반면, 오히려 동질적이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장소가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인터넷이 정치적 행동주의의 동기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매우 미약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디지털 정치는 주로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신화적인 성공으로 2014년이나 2015년까지는 디지털 정치와 소셜미디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낙관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극우 정당의 약진이 심상치 않았지만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을 만큼은 아니었다. 2016년부터 상황이 역전됐다. 캐스 선스타인의 《루머》와 래리 다이아몬드의 《자유화 기술》에서 언급된 경고들이 현실화되는 것을 넘어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까지 이르자 대중의 인식은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가짜뉴스가 차별과 혐오, 증오와 적개심, 폭력을 선동하는 쓰레기 같은 발언들과 함께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까지 뒤덮어버린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가짜뉴스와 루머 같은 '바이러스성 콘텐츠'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파급효과를 산출해냈고, 국민투표의 향배와 선거의 결과까지 바꿔놓았다. 가히 소셜미디어와 표퓰리즘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 4장 <소셜미디어>를 보면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결에서 가짜뉴스로 대표되는 '바이러스성 콘텐츠'의 온상이었던 소셜미디어의 부정적 기능이 승패를 갈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성 언론이 받는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디지털 도구들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과거의 적들을 연결해 주고 해묵은 증오를 극복하면서 지역 맥락을 재구성해 줌으로써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독재 지배를 강화하고 인종적 증오를 부추김으로써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빛의 속도로 퍼진 '바이러스성 콘텐츠'의 범람 때문에 선스타인이 《루머》에서 경고한 '반향실 효과'(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여론의 함정을 말하는데, '크로스 체크'를 하지 않는 확증편향 오류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생각이나 지향이 비슷한 사람에 둘러쌓이면 현실인식이 왜곡되는 인주부조화에 이르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난다)가 미국 유권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여론환경과 정치 판도를 바꿔놓았다.

 

 

"그런 다음,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했다. 미국 정치의 전통적인 문지기를 우회하는 트럼프의 예상을 뛰어넘는 선거운동을 보면, 소셜미디어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는 분명해졌다. 예전이었다면,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이민자, 종교 소수자 및 정적들에 대한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나 비방을 늘어놓는 그를 방송에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트위터 덕분에, 도널드 트럼프는 전통적인 언론 매체의 기반 시설이 필요 없게 되었다. 대신 그는 수백만 명의 팔로워들에게 메시지를 직접 트윗할 수 있었다. 일단 그가 그렇게 하니, 기성 방송사들은 냉혹한 선택에 직면했다. 한창 논의되고 있는 이야기를 팔짱을 끼고 무시하느냐? 아니면 트럼프의 트윗 내용을 마치 정밀조사를 끝낵 내보내는 것처럼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증폭해 주느냐? 당연하게도, 그들은 두 번째를 선택했다. 트위터 피드는 트럼프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념적인 이유 혹은 재정적인 이유로 행동하는, 중견 전문가들의 분산된 네트워크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곳이 〈브라이트바트〉사였는데, 이 신문사의 급부상은…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기성 미디어 조직과 맞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성 언론이 받는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방침이었기에, 진실을 전하기보다 센세이션을 일으킴으로써 대중에게 어필하고자 했다."

    

 

<브라이트바트>말고도 수없이 많은 중소 미디어가 뒤를 이었다. 미국의 대선이 가짜뉴스와 온갖 루머, 각종 음모론이 판을 치는 쓰레기들의 경쟁으로 변질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한민국의 <네이버>와 <다음>처럼, <비데어>와 <인포워즈>, <아메리칸르네상스>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도 '바이러스성 콘텐츠'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다른 이유들로 해서 트럼프 만큼 욕을 많이 먹었던 힐러리를 근소한 차이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권자의 선택을 왜곡할 수 있는 미국 선거제도의 특수성은 별도로 한다고 해도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나꼼수의 성공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이명박근혜라는 두 명의 표퓰리스트 대통령을 배출한 대한민국이었기에 나꼼수의 성공이 가능했다. 디지털 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순기능도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방관자들을 디지털 정치의 장으로 불러냈다는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하고, 많은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종편의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그들은 외면을 넘어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명박을 저격하는 것을 넘어 기성정치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들이 다루기 좋은 대형 사건들과 이슈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 점도 성공의 요인이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불투명성 때문에 음모론적 상상력이 활개 칠 수 있는 상황도 한몫했다. 그들의 영향력이 손석희 사장에 비교되거나 지상파 뉴스의 영향력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들에게 절절매는 것도 이들의 추종자들이 여론을 만들고 선거 판도를 바꿀 만큼 엄청난 표밭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를 쉬운 언어로 풀어간다고 해서 정치의 수준까지 떨어뜨리면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기회주의적 선동가들이 힘을 얻는다(나꼼수의 역설). 음모론의 홍수와 함께, 그들 자체가 권력이 된 것도 심각한 문제다.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는 오래 전에 사망선고에 비슷한 판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정치와 시민행동주의(시민개입주의, 직접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가짜뉴스의 폐해가 아무리 크다 해도 표현의 자유까지 제한할 수 없듯이, 상대 진영을 적으로 지정해 타도의 대상으로 돌리거나 음모론적 접근에 의지해서는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사회적 양극화를 내세워 재벌오너를 공격한다고 해서 재벌이 착해지는 것도 아니다(주진우가 진행하는 MBC의 <스트레이트>가 대표적). 재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법 위에 군림해온 재벌 오너만 공격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도 한국경제에 좋다고 할 수 없다. 자국에서조차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않고 천문학적인 세금을 조세도피처로 빼돌리고 노조도 없는 구글과 애플 같은 초국적기업에 비하면 제조업 중심의 한국 재벌들은 칭찬을 받아도 모자랄 판이다(삼성전자가 싫다고 애플을 찬양하는 진보매체들의 이중적 잣대는 창피해서 고개도 못들 지경이다). 재벌을 한국경제에 좋은 방향으로 개혁하고 4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도 완화시켜야 하지만 오너만 공격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재벌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내부자들과 그들에 기생해서 이익을 챙기는 외부의 조력자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오너를 아무리 공격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진보 진영의 가장 큰 약점은 현장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낮다는 점인데, 이것을 극복하려면 재벌들이 돌아가는 방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것인데, 재벌 오너의 잘못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재벌을 착하게 만드는데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유럽의 선진복지국가처럼 초국적기업들이 진보 진영과도 손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게 중요하다. 그럴 때만이 소득주도성장(최저임금 인상과 일자리 창출이 핵심), 혁신성장(생산성 높은 기업이 핵심), 공정 경제(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과 이익공유가 핵심)라는 환상의 J노믹스가 성공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을 제대로 분석해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은 경제 투톱을 동시에 교체한 것도 최소 2년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는 J노믹스를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인 논리 구조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반대를 위한 반대밖에 하는 일이 없는 자유한국당의 생떼 같은 비난과 정부의 도움이 없으면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는 시장경제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바른미래당의 앵무새 같은 비판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이것을 이용해 온갖 선동과 가짜뉴스를 양산해낼 소셜미디어와 팟캐스트, 유튜브에 올라가는 1인방송의 '바이러스성 콘텐츠'와 전파력을 막을 방법이란 없다. 가짜뉴스처럼 '바이러스성 콘텐츠'에 대한 면역력과 필터링 능력이 약한 사람들이 도처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이러스성 콘텐츠'에 기꺼이 속아넘어갈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아닌가.   

  

 

 

(J노믹스를 비판하는 논리들의 허접함은 별도의 글로 다루겠다. 한국의 언론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알게 되면 문재인 정부가 제대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도 초고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