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 세계를 수백 개의 단층으로 분열시키고 대립하게 만드는 분노와 차별, 증오와 폭력의 소용돌이는 (유권자의 무지와 무관심과 어우러져) 표퓰리즘의 득세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표퓰리즘의 득세는 50~73년까지 지속된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성장을 기록한, 그래서 두 세대 정도만 고성장의 낙수효과를 누릴 수 있었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전성시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면서 그 기간 동안 축적된 온갖 부작용과 외부효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30대까지는 태어나고 보니 모든 분야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불평등과 양극화, 일자리 급감에 따른 소득 감소와 미래에 대한 불안, 핵심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의 외주화, 일자리 질과 양 모두에서의 후퇴, 고도성장의 반대급부로 지구적 차원에서 목을 조여오는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동성의 종말, 신종 질병의 만연과 미세먼지의 역습, 세계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력감, 공동체와 사회안전망의 붕괴에 따른 책임의 개인화,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등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이하는 이런 신자유주의 합리성(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지구와 인간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아이디어의 집합체가 지역과 환경, 이념, 계급, 성별 등에 따라 하위 90%를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착취하는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인 상위 1%와 그들의 보조자와 간수만의 합리성, 우파가 대부분이지만 좌파에도 있다)을 앞세운 자유주의 통치술에 합류한 기억조차 없다. 40대 초반도 지구를 초토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희생자에 속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모든 세대의 동반자 역할에 종지부를 찍자, 전 세계적으로 불만과 좌절, 공포와 분노가 회오리치면서,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지배엘리트와 기성체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은 이들에게 각자의 아우성을 퍼뜨리고 무리를 이루어 수없이 많은 네트워크의 이합집산을 구축할 수 있었다. 모두가 정치권력이 필요했고, 그것만이 자신을 구할 터였다.
그런 가운데 거의 모든 소통의 네트워크를 독식하고 있는 구글과 페이스북, 바이두 같은 플랫폼 기업들은 현재의 먹거리이자 미래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무한대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이른바 빅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이 등장했고, 70억 인구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추적해서 우주적인 차원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70억 인구를 각종 기준에 따라 범주화하고 분류해서 연결하고 유혹하고 선동하며 배제하는 방식으로 개별적이면서도 총체적인 관리와 통제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빛의 속도로 시공간을 압축하는 과정이 정보통신기술이 주도하는 세계화다.
바보상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대중매체를 지향하면서도 기술 자체의 본성이 자본과 권력에 유리한 텔레비전이 정보통신기술의 공습에 극단적이고 급진적이어서 아웃사이더에 머물러야 했던 선동적 정치인과 정당을 걸러내는 게이트 키핑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슈 창출이란 면에서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정치적 아웃사이더에게도 그에 못지 않은 값싸고 제약받지 않는 매체와 수단이 생겼으니, 분노하고 좌절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배엘리트는 당신을 갉아먹는 위선자이지만, 자신은 피해자와 약자들을 위한 진정한 대변자'라고 어필할 수 있었다.
거칠고 짧게 서술했지만, 이것이 브랙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으로 대표되는 '표퓰리즘 세계화'의 핵심이다. 자동화를 늘리는 세계화에 반대하며,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 시장근본주의, 이민과 난민 반대, 전통적 젠더관, 배타적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결혼과 낙태 불법화, 감세와 복지 유지 등을 요구하는 중구난방의 표퓰리즘이 좌우ㅡ우파 민족주의가 50% 이상을 차지하지만ㅡ를 가리지 않고 세를 불리고 정권을 잡거나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이로써 정치판이 개판 5분 전으로 변했다. '자신이 사회경제적 약자와 피해자의 구원자요 대변자고 혁명가'라며 '모든 악의 근원인 지배엘리트를 몰아내 대중의 이익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을 남발함으로써 '도덕의 수사학'을 독점했지만 어떤 검증도 거치지 않은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차베스와 르펜, 치프라스와 트럼프 같은 표퓰리즘 선동가들이 정부와 국회, 정당을 장악하며 정치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바닥으로의 경쟁에 빠져들었다.
'표퓰리즘 세계화'에 대한 이상의 개괄이 필자로 하여금 수준 미달의 국회의원들이 또다시 공천을 받고,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듣보잡들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높이는 '순수 연동형 비례제'에 반대하는 이유다. 야3당이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을 들먹이며 '순수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촉구한 것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지지율 하락으로 인해 '야3당의 단식 땡깡이'에 굴복한 이해찬의 민주당이 '순수 연동형 비레제'를 받아들인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작동불능의 상태로 만든 이들은 문제 인물과 정당을 걸러내지 못하는 '순수 연동형 비례제' 덕분에 단독으로 권력을 잡을 수 없는 표퓰리즘 정당들이 제3당, 제4당, 제5당……제9당, 제10당 등에 올라 '그들만의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가짜뉴스와 루머, 음모론 등이 난무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실적 방안이 있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검열이 대표적)'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때 '생각의 시장'은 제대로 작용하며, 그럴 때만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 디지털시대에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는 지금에도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인간은 통념과는 달리 생각을 많이 하지 않으며, 반성적 고찰과 도덕적·윤리적 생각도 거의 하지 않고, 거의 모든 생각을 다수의 견해에 맞추기 때문에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김어준과 아이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며,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고 말했던 이유다.
편파방송 논란에 휩쌓인, 그 덕분에 시청률이 2배 이상 뛰어오른 '오늘밤 김제동'의 진행자 김제동이 초대손님으로 나온 정동영과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주고받으며 유권자의 사표를 없애는 것을 절대명령인양 포장해, '순수 연동형 비례제'의 여론몰이에 나선 것은 (검증되지 않는) 아웃사이더와 (유권자의 뜻에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는) 국회의원을 뽑는 일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비례대표를 늘리는 것은 찬성하지만 그들에 대한 정당 차원이 아닌 국가(국민) 차원의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
'순수 연동형 비례제'는 특정 정당과 소속 정치인의 전체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하는 것을 말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국민 자치'라는 점에서 유권자의 사표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표퓰리스트 정치와 정당이 득세하는 현실에서 '순수 연동형 비례제'는 양극화된 정치를 더욱 세분화된 첨예한 대립으로 몰아갈 위험성이 너무 높다.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대통령 중심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전제 하에 주권의 당사자로 자리매김한 '국민이 선거에서는 그런 전제를 무력화시키기 일쑤라는 현실적 경험에 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최악의 체제로 비판했던 것과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국민 자치'가 '평등한 다수의 독재'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도 민주주의의 주인이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인민이기 때문이었다. 표퓰리즘 정치는 다수의 독재와 같은 말이며, 불평등과 양극화를 양산한 기존의 체제와 정치인, 정당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증오를 바탕으로 기득권을 파고들어 민주주의를 질식사시킨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불평등과 양극화가 19세기 수준에 근접함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이 득세하는 현실에 화들짝 놀란 수많은 정치학자와 정치철학자의 우려도 '필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순수 연동형 비례제'에 집중되고 있다. 텔레비전에 이어 팟캐스트와 소셜미디어, 유튜브 1인방송 등에 무방비로 노출된 '인민(국민)'의 상당수가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의 달콤하고 매혹적인 수사학에 매료돼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가 표퓰리즘의 득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말살시키는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이 주요 정치인(이명박근혜와 이재명이 대표적)과 정당으로 부상해 민주주의를 극단적 위기로 내몰고 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제일 많이 발전(정확히 말하면 퇴행)한 것은 '국민'을 극단적 불평등과 양극화에 따른 분노와 폭력의 화신으로 만든 정보통신기술의 걸러지지 않는 전파성과 전염성, 반민주적 폭력성이다.
표퓰리즘과 정보통신기술 관련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바이러스성 콘텐츠'에 사로잡힌 국민의 잘못된 선택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 터기, 그리스,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포르투칼, 브라질,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인도, 페루, 베네스엘라, 앙골라, 튀니지, 콜롬비아, 뉴질랜드 등등 전 세계적으로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이 집권하거나 제1, 제2야당으로 떠오른 나라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모든 대륙, 모든 수준의 국가에서 표퓰리즘이 득세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양심적인 대부분의 학자와 지식인, 정치인은 민주주의와 인류의 미래를 절망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디지털기술이 낳은 최악의 네트워크 집단인 일베(회원이 최대 100만 명을 넘은 적이 있다고 한다)와 다수의 극우·극좌사이트, 그들을 미러링하려고 모였으나 남성 전체를 향한 대결로 전장의 크기를 넓혀 페미니즘을 파괴하는 메갈이나 워마드 등처럼 사이버공간을 중심으로 표퓰리즘과 극단주의가 득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상위 1%를 위한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희생양이지만, 그들이 무너뜨려야 할 공통의 적에 대항해 연대(향우 60년 이상 영향을 미칠 인구구성상 3중, 4중의 착취에 노출될 20대는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위대한 인권운동이자 인류의 멸종을 구원할 최선의 대안인 페미니즘을 최악의 갈등 요인으로 추락시킨 '이수역 사건'은 자치의 주체인 인민의 합리성과 민주적 경험, 도덕과 윤리적 수양의 깊이, 반성적 사고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재명의 표퓰리즘적 본질을 그렇게도 오랫동안 지적하고 증거를 찾아냈던 소수의 문파들이 극문이니, 문슬림이니, 작전세력이니, 분열세력이니 하면서 얼마나 많은 공격과 비난을 받았던가? 무엇이 가짜인지, 루머고 음모론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빠른 판단과 응답, 전파를 강요하는 정보통신기술에 노출되면 주권재민의 인민 자치는 민주선국국가에서조차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표퓰리즘 정치학의 먹이감으로 전락한다.
시청자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고, 정치를 포함해 모든 것들을 오락화하는 바보상자(텔레비전)의 포로로 추락한 상황에서, 아예 사고능력을 삭제시키는 정보통신기술까지 더해진 21세기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표퓰리즘의 득세를 막을 방법이 없다. 비례성을 강화하는 것은 절대적 시대정신이고, 거대 양당의 독주를 막는 것도 절대적 시대정신이지만 청년과 여성, 장애인, 이주민 비율을 늘리는 것도 절대적 시대정신이다.
하지만 각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자들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제도와 사후에 탄핵할 수 있는 국민소환제 등이 동시에 도입되지 않은 채 '순수 연동형 비례제'를 실시하면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노정된다. 태극기부대와 일베, 손가혁 등은 차치하더라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샤이지지자들이 또다시 결속하면 국회는 극우에서 극좌, 권위주의적 독재 추종자, 급진주의자, 극단적 환경주의자는 물론 무정부주의자들까지 난립하는 난장판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다.
이해찬과 김무성, 박지원 등처럼 다선 의원이라는 선거귀족을 양산하기 일쑤인 대의민주주의와 이념적 동기에 매몰되기 일쑤인 정당정치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필자여서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지만, 전 세계의 정치권을 한 번이라도 살펴보면 '순수 연동형 비례제'는 가뜩이나 위기에 처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불가능한 지점까지 몰고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자치의 주역인 인민의 분열과 반목, 차별이 커질수록 더 큰 이익을 거두고 부와 기호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대화하며, '순수 연동형 비례제'는 이런 퇴행현상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
현재의 헌법이 내각제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대통령 중심제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어설픈 지식과 경험에 기반한 여론몰이식 논의는 대단히 위험하다. 구좌파와 입진보의 국회 진출이 늘어난다면 피해는 더욱 커진다. 시민행동주의라는 참여·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실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실과는 정반대로, 국민으로부터 제대로 된 검증조차 받지 않은 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 수 있는 '순수 연동형 비례제'가 민주주의 정신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제도도 아니다.
민주주의 이해와 시민의식, 도덕적·윤리적 덕목, 디지털기술이 반드시 초래하는 바이러스성 콘텐츠에 의한 '사회적 폭포효과(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이 믿는 것이 규모를 키워 아주 많은 규모의 사람들이 믿게 되는 현상)', 특정 주장과 신념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 속에서 더욱 강화되는 '반향실 효과의 결과인 집단 극단화' 등처럼 우리의 정치적 판단을 왜곡하고 타락시키는 것들에 휩쓸리지 않는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닐 포스트만은 모든 것을 오락화하는 텔레비젼이 시청자의 의식을 어떻게 왜곡하고 길들이는지 탁월하게 다룬 《죽도록 즐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도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영향이 이러했는데(텔레비전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리처드 생크만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를 참조),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늘리는 디지털기술의 총화인 스마트폰이 보편화됐고, 최근에는 나꼼수와 그 아류들로 대표되는 팟캐스트로도 부족해 유튜브를 점령한 1인방송의 범람까지 더하면 '순수 연동형 비례제'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를 양산할 가능성이 높다. 야3당은 이런 문제들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지 여당인 민주당에게 합의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은 적반하장의 극치다.
나경원이 원내대표로 뽑힌 자유한국당은……? 거기에 제대로 된 보수는커녕 제대로 된 인간이 한 명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래서 뺏다. 인적 청산과 교체가 없는 한 자유한국당은 모든 논의에서 제외한다 해도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지만 러셀 커크(커크 러셀은 남성미 넘쳤던 유명한 배우였다)의 《보수의 정신》이라도 읽은 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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