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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서초동집회 여성참여자의 덕력과 Mnet의 <퀸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모든 언론의 외면 속에 수많은 여성들이 참여한 서초동집회가 열렸다. 아이돌과 가수에 대한 팬덤을 연상시키는 여성참여자의 활력과 열정, 준비 덕분에 조국 대전 때부터 지금까지 진정한 민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KBS의 <저널리즘 토크쇼J>가 그렇게도 열심히 찾고 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한 공공저널리즘 이론과 연구에 따르면 진정한 공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총동집회가 축제의 한마당처럼 진행될 수 있는 것도 잔인무도한 윤석렬의 검찰권력에 맞서 조국 일가를 지키고, 궁극적으로는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여성참여자의 헌신과 열정 때문이었다.

 

 

'조국 가족 끝까지 지키기' '검찰개혁과 윤석렬 구속' '공수처 설치' '언론개혁' '노통과 문통의 가치와 정싱의 민주적 실현' 등이 주된 모토였던 서총동집회의 여성참여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과 가수를 위해 기레기와 악플러와의 길고긴 전투도 마다하지 않던 전투 경험과 막강한 공력(합쳐서 덕력)으로 충만한 엄마와 이모이자, 누나와 언니들로 구성돼있다. 그들의 강력한 덕력은 기득권 카르텔로부터 문통과 조국을 지켜내는 것을 넘어 검찰개혁과 언론개혁까지 이루고 말겠다는 거대한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옳은 것(도덕)을 추구하는 체제가 아니라 좋은 것(개인과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체제이다. 자신이 처한 다양한 환경(사회적 불평등이 만연돼 있는 환경)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시민과 공중의 행동규범이기도 한다. 듀이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체제 중의 한 형태가 아닌 (시민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기초지식과 이해가 바탕이 될 때, 2016년의 촛불혁명과 2019년의 서초동집회의 차이와 공통점이 여성참여자들로 인해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상호강화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공공저널리즘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하버마스는 '진정한 공동 숙의는 시민들이 사회적 불평등을 제쳐두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상호 교류하는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 정체성이나 이해관계를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았다(터니 하스의 《공공저널리즘을 쏘다》에서 인용). 공공선에 대한 합의에 이르기 위한 상당한 토론 능력과 경험, 지식 등이 필요한 하버마스의 공중 개념은 유럽의 선진국에서나 통할 수 있는 한계(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적 접근)를 가지고 있어서, 성장의 이익이 가장 많이 돌아가는 최소수혜자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은 《정의론》의 존 롤스와 비슷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위대한 페미니스트이자 탁월한 정치철학자인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하버마스의 '숙의의 공론장'이 '개인의 능력밖에 있는 시장원리,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사적 소유의 특권(로크에 의해 정립됐으나 그가 허용했던 부의 차이를 훨씬 넘어선 상태), 성과 섹슈얼리티, 젠더 및 장애 여부 등에 따라 종속적 지위로 격하된 사회집단의 동등한 참여 불가' 같은 사회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사회적 불평등을 무시하는 것은 공중의 구성에 제한을 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분명한 현실인 사회적 불평등을 인정하는 다층·다면적 접근을 통해 공중 구성의 다양성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다종다양한 이유로 정치·경제·사회적 영향력과 힘이 떨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이 언론의 의제 설정부터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때, 다종다양한 의제와 이슈, 이해들이 '대화와 숙의의 공론장'에 포함될 수 있다며 하버마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그럴 때만이 '평등과 인권, 자유와 평화, 인정과 분배' 등을 주요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공공저널리즘이, 전통적인 지배적 사회집단이 독점해온 기존의 주류 저널리즘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류 저널리즘의 이런 편향성 때문에 지배적 사회집단에 종속된 사회집단으로 격하돼, 배제되고 무시되기 일쑤였던 수많은 시민들의 이익과 견해가 공적 토론의 장에서 맥을 출 수 없었다. 19세기의 사회적 불평등에 근접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이 정치와 언론의 주요 이슈로 부상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배제와 무시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이 반영되지 않은 공론장은 조중동, SBS와 JTBC는 물론 엠병신 시절의 MBC와 검찰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KBS 같은 부자언론들이 지배적 사회집단에게 유리한 의제 설정과 일방적인 여론몰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 하는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주류 저널리즘은 공익에 헌신하고자 하는 기자와 저널리스트는 물론, 동등한 자격으로 의제 선정에 참여하고 합의된 내용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시민들이 아닌 거대미디어의 오너와 발행인, 편집인의 뜻과 이익을 대변하는데 급급했다. 주류 저널리즘의 신자유주의적 타락은 거대미디어를 부유하게 만드는 대신, 민주주의를 가난하게 만들어버렸다. 거대미디어의 이런 상업주의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사건·사고 보도와 속보·단독·특종 경쟁에 매몰된 주류 저널리즘이 공공저널리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말해준다.      

  

 

노무현 참여정부 5년 동안만 KBS와 MBC에서 시동을 걸 수 있었던 공공저널리즘(우리의 경우 탐사·PD저널리즘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숙의의 공중을 구성할 수 없었다)은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철저하게 망가지며, 정당과 재벌, 세습엘리트 같은 지배적 사회집단의 이익만 대변했다. 촛불시민으로부터 비판받는 '기레기 저널리즘'이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검찰권력과 조중동, 반예수적 기독교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던 이명박이 보은 차원에서 다수의 종편을 허가한 것과 노무현 정부의 검찰개혁을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음 주지의 사실이다.   

 

 

윤석렬 검찰의 스피커를 자처한 기레기들의 '조국 일가 죽이기' 때문에 국가적 아젠다로 떠오른 '공정과 정의'가 '문재인 죽이기'와 '검찰개혁 좌절'을 위해서만 사용될 뿐, (문통이 시정연설에서 강조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세우기 위한 '숙의하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자한당 놈들과 기레기들이 공정과 정의, 청년의 분노를 떠들어대며 문통과 조국을 저격하는 반동의 전복이 가능해진 것도 이명박근혜 9년 동안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기레기 저널리즘' 때문이다. 

 

 

분열과 정쟁, 혐오와 차별만 유도하는 '기레기 저널리즘'으로 먹고사는 기득권 언론들이 여의도집회와 광화문집회만 보도할 뿐, 서초동집회를 무시하는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들이 독점해온 반칙과 특권, 불공정을 유지하고 늘려가려면 '대화와 숙의가 변증법적으로 상호강화하고 있는 정치적 실천의 공론장'으로써의 서초동집회를 악착같이 외면한 채, 주류 저널리즘으로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여의도집회와 광화문집회만 떠들어대야 한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조국과 그의 가족에게 강요된 공정과 정의가 신처럼 완벽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소화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짐승과 일베처럼 살아온 자한당 놈들과 기레기들, 반예수적 기독교 무리들의 여론몰이와 기레기 저널리즘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조국과 그의 가족이 누려왔거나 잘못했을 수도 있는 작은 흠결들은 목이 터져라 비판하면서도, 황교안·나경원과 그들의 가족들이 누려왔거나 잘못해온 큰 흠결들은 악착같이 외면하는 이중적이며 위선적인 행태도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선택적 정의와 조작된 공정을 떠들어대는 이들에 비해,  문통과 조국에 대한 덕력으로 중무장한 서초동집회 여성참여자들은 1920년대 리프먼과 듀이 사이에서 이루어진 공중 개념에 대한 토론(시민을 언론의 보도에 대한 수동적 존재로 보느냐, 능동적 참여자로 보느냐에 대한 토론)을 되살려내는데 성공했다. 공공저널리즘이론의 기초를 방대한 실험과 연구로 정립한 허친스 위원회의 보고서ㅡ《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과 《언론의 4대 이론》으로 출판됐다ㅡ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서초동집회의 여성참여자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무시한 채 깊은 성찰과 합리적 판단이 가능한 시민들의 숙의를 통해 공공선을 도출하는 하버마스의 공론장이론(공동체주의적 숙의민주주의)과, 계급과 계층, 인종, 성, 장애 유무에 따라 배제된 여성과 하층 계급, 다양한 소수자들을 '숙의하는 공중'에 포함시켜 다면적·다층적 공론장을 형성해야 한다는 프레이저의 주장까지 녹여낼 수 있었다.

 

 

이들의 활약상은 Mnet에서 방영 중인 <퀸덤>의 아이돌들이 여성아이돌에게 덧씌워진 편견과 혐오, 차별들을 통쾌하게 무너뜨리고 있는 것과 오버랩된다.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이들의 변신은 시장의 한계와 승자독식에 따른 무한경쟁 때문에 자신의 재능과 탈렌트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한계를 떨쳐낼 수 있었다. 이들의 변신과 축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지만, 경연에 참가조차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여성아이돌들을 위한 보조시장의 필요성만큼은 확실하게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서초동집회의 방향성을 결정한 여성참여자의 성공에 비견될 수 있다.    

 

 

여성아이돌의 성상품화라는 기획사의 천편일률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자신의 끼와 능력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퀸덤>을 시청보며 주체적인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섹시함이 이렇게도 멋지고 통쾌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프로이트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 '억압된 여자일수록 지적 발달이 뒤떨어진다'는 것만큼 필자에게 커다란 성찰을 준 것도 없다. 남성 위주로 이루어진 모든 사상과 철학, 구조와 체제, 관행과 문화, 차별과 혐오는 여성의 능력 발현에 불리하게 작용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위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지난하고 처절한 노력으로 여성들을 억압해왔던 것들의 상당수가 까발려졌고, 최소한 법과 제도적인 차별이 불가능해진 지금, 대한민국 여성들의 잠재된 능력들이 폭발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많이 늦었지만 당연한 역사의 흐름이며, 문명과 기술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페미니즘 운동 중에서도 대단히 미약한 <82년생 김지영>에 가해지고 있는 찌질한 남성들의 평점 테러가 어떤 역사적·문화적 정당성도 가질 수 없음은 '설리의 죽음'에서 더욱 명백해졌다.     

 

 

기획사와 방송사, 악플러의 억압에 구애받지 않은 <퀸텀> 출연진들의 탁월한 퍼포먼스(노래와 춤, 기획연출력)는 억압받지 않은 여성의 능력이 얼마나 아름답고 창의적이며 주체적인지 말해준다. 여성들을 시기와 질투의 화신으로 만드는 악마의 편집까지 사라진 <퀸덤>은 '남자 아이돌그룹에게는 수없이 주어진 컴백쇼가 (단 하나의 그룹을 빼면) 여성 아이돌그룹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불평등의 근원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서초동집회의 여성참여자들이 이어가고 있는 축제의 한마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