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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창조경제와 참조경제 사이에 이승우와 <명량>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사는 창조경제는 너무나 식상해서 논평거리도 되지 못한다. 정의 내리지 못하는 개념은 혼란만 초래할 뿐, 창조의 개념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박 대통령이 싸이와 <명량>의 성공 결과만 이야기할 뿐, 그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경제가 아닌 조경제라는 얘기도 있다.



싸이의 성공은 숱한 우연이 겹쳐 대박을 터뜨린 개인의 성공이고 전 세계적으로 구축된 인터넷 망의 성공이지, 치밀한 준비와 투자가 선행돼야 하는 창조경제와는 무관하다. 또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유투브를 사들인, 그래서 싸이 덕분에 사상 유례 없는 빅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게 된 구글의 성공이지 창조경제와는 상관없다. 





<명량>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명량>의 성공이 창조경제가 되려면 영화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권력과 방송의 도움을 받은 마케팅과 스크린 독점을 활용한 국내에서의 성공만 조명한다면 제2, 제3의 <명량>은 나올 수 없다. 〈명량〉과 같은 한국적 블록버스트가 보다 쉽고 싸게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산업 전반에 걸친 시스템을 구축해야, 독립영화 제작까지 그 다음의 창조적 재확장이 가능하다. 



〈명량〉이 정말로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에 합당하려면, 해외에서의 성공과 부가 판매를 통한 파급효과의 최대화를 이뤄내야 한다. 또한 〈명량〉이 거둬들인 이익이 제작과정에 참여한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에게까지 골고루 전해져야지, 투자사와 제작사와 배급사의 배만 불린다면 불평등의 창조하는 승자독식에 불과하다. 



이처럼 창조경제가 이미 이루어진 기존의 결과들을 모호한 개념에 억지로 끌어넣는 것이라면, 모든 성공이 창조경제가 돼야 한다. 심지어는 실패가 성공의 어미니이기 때문에 모든 실패도 창조경제가 돼야 한다. 모호한 개념을 압도적 권위를 이용해 진리인 양 호도하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권위를 이용해 개별적 성공에 숟가락을 올려놓는 파괴이자 위압적 갈취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격언이 창조경제의 허구성을 말해준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는 것은 인식이나 관점에서의 변화(패러다임과 기술-경제적 변화가 핵심)에 불과하지 무에서 유를 끌어내는 창조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자기파괴와 혁신이 없으면 무너지는 것도 이 때문이며, 아무리 잘해야 조경제의 끝없는 재구성이다. 



따라서 제2, 제3의 싸이나 〈명량〉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는 것이 창조경제에 가장 근접한 것이듯, 바르셀로나라는 세계 최고의 유소년 시스템을 국내에 정착시켜 국내의 어린 유망주는 물론, 해외의 원석들을 조기에 발굴해 국내에서 이승우 같은 보석으로 키워내는 것이 창조경제가 이룰 수 있는 최대치다. 





가장 자본주의적 스포츠인 축구가 만들어내는 시장을 감안할 때 이승우 같은 선수를 국내에서 키워내 해외로 이적시킬 수 있다면, 천문학적인 이적료(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랐지만)를 챙길 수 있다. K-리그의 활성화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리그로의 도약도 가능해 외국 방송사로부터 고액의 중계료를 끌어낼 수 있다.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 레버쿠젠 등의 성공이 70~80년대의 전성기를 되살려낸 분데스리가의 부활에서 보듯, 국내에서 이승우 같은 선수들을 배출할 수 있다면 K-리그의 국제화(경제영토의 확장도 이것에 불과하다)도 가능하다. 국민과 미래세대의 삶의 질도 높아지고, 관련 산업의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도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너무 개인기에 의존하고 팀으로서의 전술과 심판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 때문에 우승은 놓쳤지만, 필자가 이승우와 백승호,장결희라는 바르셀로나 3총사와 이강민(13, 발렌시아)의 성장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승우는 메시처럼 신체적 조건이 탁월하지도 않아, 바르셀로나 선진시스템이 만들어낸 성공사례로 봐야 한다. 



이는 국내의 유소년 시스템이 선진화되면 제2, 제3의 이승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 이것을 확장하면 국내 기업들 간의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대기업이 중견기업과 중소기업과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협조와 공존의 체제를 모색할 수 있도록 경제시스템을 투명화하는 것이 창조경제가 해야 할 일이다. 지금처럼 재벌과 대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고착화하는 것은 최악의 경제정책이다.   



                                       바르셀로나 삼총사ㅡ백승호, 이승우, 장결희



한류를 만들어낸 시스템이 창조경제의 예가 될 수 있다면 선진 유소년 시스템의 구축이 창조경제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삼성전자의 성공이 패스트 팔로워에 있었다면, 일단 거기까지 이르러야 퍼스트 무브도 가능하다. 창조경제만 떠들어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이해해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이 없는 창조란 허구다. 대한민국은 빨리 가려고만 했지, 기본을 튼튼히 하는 것에는 소홀했다. 단기적 실적에 연연하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제2, 제3의 도약과 진정한 의미의 성장(상생과 공존)을 이루려면 기본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일본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을 제치고 세계최고의 국가로 올라섰을 때, 일본은 총중류사회, 즉 국민 모두가 중산층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란 총중류사회가 소수의 상류층과 다수의 중하위층으로 나눠지는 과정이었다. 신자유주의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불평등의 확대이자 퇴행의 행보였다.



필자가 말하는 튼튼한 기본이란 지난 20년 동안 일본이 걸어갔던 길의 정반대로 가는 것, 즉 총중류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마침 《21세기 자본론》의 저자인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방한했다.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보수에 속하는 피케티 교수는 창조경제의 모호함을 확실하게 채워줄 최적의 경제학자인데,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외국으로 나가버려 모호한 창조경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조경제의 형태로.



그래서 U-16세 대표팀이 월등한 개인기량에도 불구하고 조직력에서 앞선 북한 U-16세 대표팀에게 우승을 내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