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사랑의 격정이란 3년이 최장의 유효기간이라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첫날의 떨림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 물론 익숙해진 부분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매일 매일이 죽음을 향한 단거리 경주 같은 나에게 수경이 가져다준 기쁨이란 절대 줄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에너지의 양이 늘어났고 정말 열심히 먹고 또 먹었다. 그 덕분에 나는 동생의 염원과 헌신이 수경의 헌신과 심성으로 이어져 세상 어느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무적의 프로그램을 거의 다 완성했다. 아직 가장 힘겨운 장벽인 신경세포인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 틈새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가장 중요한 가상 데이터센터의 메인 알고리즘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지만, 최후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핵심 단초는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났다. 



물론 그 장벽을 넘는 과정에서 소모될 에너지 량을 조절하는 것이 최후의 숙제로 남아 있어 최근에 들어서는 알고리즘 설계가 급격히 늘어진 것은 사실이다. 에너지 사용에 구애받지 않고 모험을 하기에는 내게 남은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볼 때, 내가 넘어야 할 마지막 장벽은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어쩌면 생존에 필수적인 잠재 에너지까지 필요할지도 모른다. 경험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 장벽 앞에서 주저하는 것이다. 지난 3년간은 에너지 사용이 많아져 육체의 기능은 거의 정지해버릴 정도로 느려졌지만, 그래서 24시간 내내 누워서 지내야 했지만 순간순간이 하루하루가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내 옆에는 언제나 수경의 따스함과 사랑이 있었고 동생의 응원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생전 처음으로 삶에 대한 미련과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다. 수경과 동생과 함께라면 단 하루의 삶도 내게는 1년보다 길고 소중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기억이 미치는 최초의 지점까지 돌아가 지금까지 거슬러 올라와 봐도 지난 3년처럼 행복했던 시기는 없었다. 나는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사랑이라는 그 신비하고 설레며 찬란하고 안타깝고 조급해지는 힘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믿음과 희망이라는 작은 돌덩이가 일으킨 파문에서 시작해 끝내 바다에 이르는 그 장대한 흐름을 알게 되었고 빛과 어둠이라는 양 극단이 만나는 지점에 그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수경의 손길이 내 피부에 와 닿았던 그 순간의 충격을, 그 설렘과 떨림, 기쁨과 부끄러움을 잊지 못한다. 지랄 맞은 몇 초간의 시간차는 예외가 없었지만 그것이 육체이건 뇌이건 간에 분출하는 에너지와 삶의 약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무엇도 단절된 채 혼자 있는 것은 없었다. 삶은 에너지의 소비이고 엔트로피의 증가이며, 그 엔트로피가 다시 쌓이면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무한 회귀의 연속된 과정이었다. 거기에 사랑과 내일에 대한 희망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다면.



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것은 늘 그렇듯 일정한 곳에서 멈춰야 하는 것이다. 삶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은 계속되고 쌓여서 커져만 가는데, 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것들에서 마음을 뗄 수 없었다. 뇌와 육체가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의도적인 불균형이 보편타당한 세상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과 소소하지만 마음을 옭아매는 일상에 대한 미련 사이에서 자꾸 트러블을 일으켰다. 나는 철지난 꽃들이 마른 가지 위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자꾸 하루라도 더 사는 것에, 그래서 수경과 동생과 더 많은 감정의 교환을, 그 교환 속의 삶에 착착 감기는 대화를 나누는 것에 마음이 갔다. 온전히 우리 세 명에게만 허락된 그 공간에서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다. 



그렇게 몇 달을 허송세월한 나는 지금 빛과 어둠이 만나는, 아니 서로 갈라지는 그 얇고 수시로 움직이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내게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보장이 줄어들수록 나는 도살 차례를 기다리는 사육된 짐승처럼 수경의 말과 손길, 미소와 격려에서 한 치도 떨어질 수 없었다. 세속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와 집착이 커질수록 나는 한없이 위축되었고 끝도 없는 어둠의 핵심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은 매 순간 폭풍처럼 튀어나갔고 죽음에 대한 성찰은 초라해졌다. 너무나 두려운 것은 동생도 수경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경은 동생을 사랑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내가 아니라.



                 *



IMF와 세계은행을 앞세워 빈국의 돈을 부국의 자본과 기업으로 빨아들이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회복불능의 벼랑 끝에 몰렸다 해도 아직 그들의 공복을 달래줄 먹이감은 세계 도처에 넘칠 만큼 남아 있다. ‘자기조정 시장’이란 완전한 시장과 완전한 정보, 완전히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허구의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모든 가치를 오직 돈과 권력이라는 독점적이며 배타적인 이익으로 몰아가는 ‘사탄의 맷돌’이 돌아가는 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거의 모든 규제를 거부하고 자유방임적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다자간 무역협정에서 벗어나 쌍방 간, 또는 소수의 국가나 지역 간의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배타적인 방식을 통해 투자자와 초국적기업, 상대적 우위에 있는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가난한 국가의 빈곤은 더욱 심해졌으며 물질적 가치에 우선해 삶과 환경을 망가뜨렸고 민주주의를 저해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많은 패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기준이 된 것은 조금만 노력해도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언덕 위의 도시’이자 축복 받은 천혜의 대지인 미국에서조차 극도의 불평등을 초래한 것도 모자라 전 세계를 대공황으로 몰고 간 신자유주의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것이었다. 



인류와 자연이 그 밑바닥을 드러내며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절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이 이제는 디지털 세계인 사이버 공간으로 침투해 영원한 확장을 실현시키고 있다. 가족과 사회라는 최후의 보루로 지탱되던 아날로그 세계를 초토화시킨 중상주의자의 유물인 ‘사탄의 맷돌’이 이제는 디지털 공간마저 하나씩 점령해가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사람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정보라는 형태로 거래되는 곳에서는 인류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 때문에, 생산을 위한 재투자비용과 자원고갈 및 환경오염 방지라는 사회적 비용 면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디지털 세상에선 독점적 이익으로 귀결되는 ‘자기조정 시장’이 더욱 범람할 수 있다.



특히 정보가 교환되는 모든 곳이 시장인 사이버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실시간으로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장처럼 대부분의 상행위를 감시하고 규제해 바로 잡기도 힘들다. 극도로 파편화되고 익명화된 사이버 공간에서 국가와 역사, 전통과 문화, 계층과 계급 간의 협력과 유대란 갈수록 약해지고 퇴색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행위와 접촉은 ‘생각하고 성찰하는 인간의 두뇌’마저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가치가 전자화폐의 이동과 즉각적 쾌락으로 압축되는 ‘사탄의 맷돌’이 무한증식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특히 모든 것에 우선하는 ‘자유방임적 논리’와 ‘생존권에 우선하는 지적재산권’, ‘사생활의 실종’과 ‘인간의 뇌보다 똑똑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국가와 공동체만이 아니라 전체로써의 사회와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삶마저 더욱 빠른 속도로 파괴시킬 것이다.



사실 세계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가 모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인류 전체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향해야 할 목표라 할 수 있다. 인류 전체의 삶을 고민하고 자본의 독주에 저항하는 세계시민들이 늘어나는 것도 긍정적인 현상이다. 결국 문제는 필연적으로 글로벌 불균형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추진되는 방식과 그것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자유무역’ 이데올로기에 있다. ‘자기조정 시장’의 글로벌 버전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일방적 진행과 폐해를 알거나 경험한 국가의 사람들과 시민단체는 자유무역에 목을 맨 초국적 자본과 기업 및 각국의 통상관료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며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캐치플레이 하에 ‘공정무역’과 ‘사회적 정의’를 목 놓아 외친다.



하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무모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현실성을 띠려면 IMF나 세계은행, WTO 같은 국제기구들이 미국과 일본, 유럽의 선진국은 물론 그들과 함께 밀접하게 교류하는 민간자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자본집행에 있어 투명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아울러 초국적 자본과 기업들도 이익 독점의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무역과 국제금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원독점에 따른 지역적 불평등과 그에 따른 환경파괴와 오염이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지금보다 적극적인 사회 공헌을 통해 인류의 공존과 상생의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세계 국가는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배타적 자유무역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국내 시장을 키우고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사회 안정망을 강화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세계화는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국가들이 최대한 참여한 가운데 채택된 협약과 제도 하에서만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초강대국의 일방적 요구와 자유무역만이 유일한 신조인 통상관료들과 거대 자본의 끈질긴 담합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거대 언론들은 극도의 상업화에서 벗어나 ‘권력에 대한 감시견’으로써의 역할을 되살려야만 한다. 지배 엘리트와 집중화된 권력을 감시하는 제4부로써의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이 사적인 이익에 매달리지 않고 공공의 복리에 충실할 때만이 점점 촘촘해지고 상호 연관성이 높아가는 세계화가 더 이상 절대다수의 희생을 담보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병폐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질 것이며, 전혀 예상치 못한 불의의 난관이 닥친다 해도 세계화의 혜택에서 배제된 약자들이 가혹한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생존선 주변에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험에 빠져들거나 절대적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래서 그들에게 회생의 발판을 마련해주려면 폭주하는 신자유주의 세력들의 탐욕을 견제하려면 각국의 언론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감시견으로써의 의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이다.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보다 정의로운 세상이 가능하려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지향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행태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구호는 그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발 심리를 희석시키는 역효과만 만들어낼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들은 세계화의 과실이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만큼씩 나눠지고 장기적으로는 기회와 노력과 결과의 상대적 불평등이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외쳐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내가 현재의 불평등한 체제에 탐욕적 이데올로기에 분노하고 연대해 투쟁하지 않으면 우리와 후대를 위한 또 다른 세상도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의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또 다른 삶이 가능하다(Another Life is Possible)’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인가.



문제는 절대다수의 난장이들(그 비율이 99%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이 주인이 되는 또 다른 세상을 가능케 하려면 그들의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 완벽한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적 결정론자, 칼 마르크스처럼 노동계급에 의한 무장혁명과 다수의 독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지난 휴머니스트의 치기 어린 바람이고 여러 층으로 분화된 현대의 계층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그의 주장을 실현하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돼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가 초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악화로 현실적인 양화를 구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대다수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전에는 없었던 무질서한 세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아니한 만도 못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혁명의 핵심은 과다한 에너지 소비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비폭력적인 방식을 찾는데 있다.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역사의 전례를 되풀이한다면 어떤 체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나는 뇌와 육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불균형 때문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형에게 희망을 걸었다. 형도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내 방식에 동의할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가장 형답고 형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형의 생각과 방식은 나와는 달랐다. 형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모든 이들을 깨어 있는 지식인으로 만들어 완벽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공지능 알고리즘 프로그램도 개인에게 주로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형과 생각이 달랐다. 형의 계획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 업체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절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형이 만든 프로그램이 세상에 출시된다면 그것은 기존의 강자들에게 핵폭탄보다 더 한 충격을 가할 것이고, 생존의 위기에 내몰릴 그들이 형의 프로그램을 가만히 나두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형의 계획은 철저히 사용자 친화적이라 업체의 이익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 형은 자신이 만든 완벽한 프로그램을 모든 이에게 무료로 배포하려고 했었다.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그것도 분초를 따지는 디지털 기업환경에서 어떤 프로그램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제품을 무료 배포한다면 기존 업체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아 100%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형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형의 계획에 수정을 가해야만 했고 그것을 이루어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는 영원한 아웃사이더를 자처했고 세속의 때가 전혀 묻어 있지 않은 수경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헌데 지금 형이 흔들리고 있다. 그것도 내가 형의 건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끌어들인 수경이 때문에. 세상에 ‘우영워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형뿐이고 따라서 형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이다. 내가 수경에게 재차 부탁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진행될 수 없다.



헌데 형이 수경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한다. 수경도 형에게 마음을 연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현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을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내게는 그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일상을 덮어버린 시간의 그림자가 어디까지 늘어질지 지켜보고 기다릴 뿐, 달리 할 것도 없다. 그렇게 기다리다 형이 생명을 다한 별처럼 산화하듯 마지막 에너지를 다하는 순간이 도래하더라도, 수경이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가 불연 듯 생을 등지는 모습을 속절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도 나는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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