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와 세계은행, WTO라는 불경한 삼위일체를 앞세워 빈국의 돈을 부국의 자본과 기업으로 빨아들이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회복불능의 벼랑 끝에 몰렸다 해도 아직 그들의 공복을 달래줄 먹이감은 세계 도처에 넘칠 만큼 남아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자기조정 시장’이란 완전한 시장과 완전한 정보, 완전히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허구의 논리이다.





정부에 의해서도, 재벌에 의해서도, 독점기업에 의해서도 시장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의 불완전함이 만들어낸 전 세계적 차원의 사적독점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에 의한 공적독점보다 더 큰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무한경쟁에서 나오는 부의 독점과 소득불평등을 허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빨아들인 뒤 돈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내보내는 ‘사탄의 맷돌’을 영원히 돌리려고 한다.


 

거의 모든 규제를 거부하고 자유방임적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다자간 무역협정에서 벗어나 쌍방 간, 또는 소수의 국가나 지역 간의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배타적인 방식을 통해 투자자와 초국적기업, 상대적 우위에 있는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장경제 밖에 있던 사회와 공동체 및 가족마저 경쟁의 논리로 덧칠하니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장논리에 따라 재구축됐다.



그 결과 가난한 국가의 빈곤은 더욱 심해졌으며 물질적 가치에 우선해 삶과 환경을 망가뜨렸고 민주주의를 저해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패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기준이 된 것은 조금만 노력해도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언덕 위의 도시’이자 축복 받은 천혜의 대지인 미국에서조차 극도의 불평등을 초래한 것도 모자라 전 세계를 대공황으로 몰고 갔다.



 


인류와 자연이 밑바닥을 드러내며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이 이제는 디지털 세계인 사이버 공간으로 침투해 영원한 확장을 실현시키고 있다. 가족과 사회라는 최후의 보루로 지탱되던 아날로그 세계를 초토화시킨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산물인 ‘사탄의 맷돌’이 이제는 디지털 공간마저 하나씩 점령해가고 있다. 이들이 전면에 내세운 것은 지적재산권이라는 배타적인 권리로 사이버공간의 본질적인 가치마저 부식시키고 있다. 



사람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정보라는 형태로 거래되는 곳에서는 인류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 때문에, 생산을 위한 재투자비용과 자원고갈 및 환경오염 방지라는 사회적 비용 면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디지털 세상에선 독점적 이익으로 귀결되는 ‘자기조정 시장’이 더욱 범람할 수 있다. 특히 정보가 교환되는 모든 곳이 시장인 사이버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실시간으로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장처럼 대부분의 상행위를 감시하고 규제해 바로 잡기도 힘들다. 



극도로 파편화되고 익명화된 사이버 공간에서 국가와 역사, 전통과 문화, 계층과 계급 간의 협력과 유대란 갈수록 약해지고 퇴색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행위와 접촉은 ‘생각하고 성찰하는 인간의 두뇌’마저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가치가 전자화폐의 이동과 즉각적 쾌락으로 압축되는 ‘디지털 사탄의 맷돌’이 무한증식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민주주의의 바다라는 사이버공간에 나타난 ‘디지털 사탄의 맷돌’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자유방임적 논리’와 ‘생존권에 우선하는 지적재산권’, ‘사생활의 실종’과 ‘인간의 뇌보다 똑똑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내세워 국가와 공동체만이 아니라 전체로써의 사회와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삶마저 더욱 빠른 속도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사이버공간의 본질이 정보 접근의 평등과 자기 표현의 자유, 자율적인 정화 등을 통해 보다 공정한 사회를 창출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세계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가 모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인류 전체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향해야 할 목표라 할 수 있다. 제조업의 발달로 환경과 생태계를 대량으로 파괴하는 일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무게 없는 세상의 도래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먹거리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인류의 능력이면 다음 세대의 먹거리를 찾아낼 것이다.  



세계화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글로벌 불균형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추진되는 방식과 그것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초국적기업의 독과점'에 있다. 각국 정부도 건드릴 수 없는 사적독점을 만들어내는 이 두 가지는 세계의 부와 권력을 1%를 넘어 0.1%의 수중에 넘겨주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부는 수천 배 이상 늘어났지만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이 15~20억 명에 이를 정도니 인류는 성장해온 것이 아니라 퇴행해온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런 부정적 세계화의 폐해를 경험한 국가의 시민들과 세계 각국의 시민단체는 자유방임적 경쟁만 줄기차게 외쳐대는 초국적 자본과 기업 및 각국의 통상관료완 거대언론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며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캐치플레이 하에 ‘공정무역’과 ‘사회적 정의’, ‘부의 재분배’, ‘기회와 결과의 평등’을 목 놓아 외치며 크고 작은 실천들을 통해 성공사례들을 축적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무모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현실성을 띠려면 IMF나 세계은행, WTO 같은 국제기구들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아울러 초국적 자본과 기업들도 이익 독점의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무역과 국제금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원 독점과 환경오염이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지금보다 적극적인 사회 공헌을 통해 인류의 공존과 상생의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세계 국가는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배타적 자유무역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국내 시장을 키우고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사회 안정망을 강화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세계화는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국가들이 최대한 참여해서 이루어진 국제협약과 민주적인 제도 하에서만 가능하다. 현재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초강대국과 초국적기업 및 거대자본의 일방적 요구를 공존과 공생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아울러 거대 언론들은 극도의 상업화와 선정주의에서 벗어나 ‘권력에 대한 감시견’으로써의 역할을 되살려야만 한다. 지배 엘리트와 집중화된 권력을 감시하는 제4부로써의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이 사적인 이익에 매달리지 않고 공공의 복리에 충실할 때만이 점점 촘촘해지고 상호 연관성이 높아가는 세계화가 더 이상 절대다수의 희생을 담보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병폐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질 것이며, 전혀 예상치 못한 불의의 난관이 닥친다 해도 세계화의 혜택에서 배제된 약자들이 가혹한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생존선 주변에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험에 빠져들거나 아사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래서 그들에게 회생의 발판을 마련해주려면 각국의 언론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권력과 자본의 감시견으로써 본연의 의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시민들의 의식과 실천이 선행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구호는 그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발 심리를 희석시키는 역효과만 만들어낼 것이다. 결과가 없는 외침은 최소한의 메아리도 이루지 못하는 법이기에 작은 결실들을 하났기 쌓아나가야 한다.  



또 다른 세상을 만들려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들은 세계화의 과실이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만큼씩 나눠지고 장기적으로는 기회와 노력과 결과의 상대적 불평등이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내가 현재의 불평등한 체제에 탐욕적 이데올로기에 분노하고 연대해 투쟁하지 않으면 우리와 후대를 위한 또 다른 세상도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의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또 다른 삶이 가능하다(Another Life is Possible)’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인가. 절대다수의 난장이들(그 비율이 99%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이 주인이 되는 또 다른 세상을 가능케 하려면 그들의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 완벽한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적 결정론자, 칼 마르크스처럼 노동계급에 의한 무장혁명과 다수의 독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지난 휴머니스트의 치기 어린 바람이고 여러 층으로 분화된 현대의 계층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그의 주장을 실현하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돼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가 초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악화로 현실적인 양화를 구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대다수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전에는 없었던 무질서한 세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아니한 만도 못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혁명의 핵심은 과다한 에너지 소비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비폭력적인 방식을 찾는데 있다.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역사의 전례를 되풀이한다면 어떤 체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영원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그의 실천에 따라 비약할 수도 있으며 퇴행과 진보 사이에서 요동칠 때도 있다. 무한한 진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지만 보다 많은 인류가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행복을 이룰 수는 있다, 정의와 공정을 향한 우리의 의식과 실천이 선행되기만 하면.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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