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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미디어는 메시지다 3







재영은 이렇게 해서 취재기획안을 통과시키는데 가장 강력한 힘이 될 X라는 정보원을 확보하게 됐다(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이 사회에 진정한 영웅이 있다면, 죽음보다도 더 질긴 압박과 회유, 정치 검찰에 의한 수사와 고발 및 이해당사자들이 가할 수도 있는 살해위협까지 버텨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압도적인 위협이 가해지면 육체란 초라해지고 죽음은 충분히 선택 가능한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 거기에는 평범한 개인과 전임 대통령이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X가 제공한 제보 내용을 취재기획안에 올리지 않았지만, 재영은 이번의 제보와 뒤에 이어질 폭로내용들을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취재기획안의 승인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나라에서 내부고발자란 조직의 배신자일 뿐이지 공익의 실현자가 될 수 없어. 시스템을 건드리는 자는 철저하게 짓밟힐 뿐이야. 그들이 진정한 영웅인데.’



재영은 악의 근원이 개인의 기질보다 시스템에 있다고 주장하는 『루시퍼 이펙트』의 내용이 떠올랐다. 악의 평범성(히틀러의 핵심 측근이었던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을 학살하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인원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단지 행정적 접근을 찾았을 뿐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 관료적 책임이라는 최소한의 죄만 인정했다. 특히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지식인으로 통할 만큼 대인관계가 좋았고 성품 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거의 없었다. 즉,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평범한 사람도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 거악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의 평범성)에 대한 성찰은 한나 아렌트의 『예수살렘에서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에서 이미 상세히 밝혀졌지만, 재영은 그 평범성 때문에 악은 사라지지 않고 창조주인 신의 말씀처럼 폐쇄된 공간과 지배 시스템 속에 광범위하게 편재돼 있다는 섬뜩한 내용이 새삼 떠올랐다. 세속적인 이익집단처럼 행동하는 대형교회와 대학들, 기성 정치인들, 그들과 결탁한 세력들이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재영은 보수 언론(대통령의 좌 클릭, 우회전에 실망한 진보 언론도 한 목소리였지만)의 집중포화를 받아 자살에 이른 전직 대통령 관련 책들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는 그럼으로써 진보적 성향이 강한 자신의 의견을 철저히 (끝내 가능하지 않았지만) 배제했고 국내 미디어 상황에만 편향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은 기자로써 가져야 할 공평성의 기준이기도 했지만, 가능하면 히든카드를 사용하지 않은 채 취재기획안을 통과시키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레임덕 현상이 여기저기서 보이지만 보수 성향의 팀장에서 시작해 국장을 거쳐 보도본부장까지 돌파하려면 이정도로도 안심할 수 없었다. 어쩌면 결정적인 내부고발자의 제보를 반영한다 해도 취재기획안이 승인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기자의 신분마저 박탈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이 여러 번 특종을 터뜨렸다 해도 그것은 과거의 일 일뿐, 현재의 상황에선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보증수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박에 가까울지 몰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은 부딪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독한 행동주의자 아닌가?



“휴우.”



재영은 허파에 들어있는 산소를 모두 뽑아내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시간 혹사한 등의 근육과 허리에서 묵직한 신음이 새나왔다. 재영은 목을 좌우로 흔들고 손바닥으로 뺨을 밀어 반대 방향의 어깨로 고개를 꺾었다. 우두둑, 좀비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가 연달아 일어났다. 그제야 재영은 모니터 화면 하단에 나온 시간을 확인했다.



‘뭐야? 12시가 지났잖아? 8시간이나 지났어!’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재영은 피로에 지친 두 눈의 반항에 직면했다. 그는 붉게 충혈된 채 제발 좀 살려달라는 두 눈의 항변에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자 점과 선의 어지러운 빛의 잔상들이 절대 어둠에 갇힌 시야를 휘졌고 다녔다. 빅뱅의 순간에 최초의 우주도 그러했으리라. 물질과 반물질을 무한대로 뿜어내며 시공을 뛰어넘는 팽창(과 수축)의 여정을 시작했으리라. 아인슈타인이 그 불변성을 인정한, 열역학 제2법칙(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 엔트로피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과 입자이면서도 파동인 빛의 속도로 시작해 밀도가 커질수록 점점 느려지는 물리학 법칙에 따라(물론 이것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허블 망원경으로 관찰하면 우주의 끝이 더욱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질량이 없어 무엇이든지 통과하는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 도대체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던 거야! 하긴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입자로 만들어진 모든 것이 확률로만 나타낼 수밖에 없으니, 무엇 하나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겠다, 우리의 인생처럼).



꼬르륵!

“이런, 생존의 욕구가 먼저구나.”



재영은 생체시계가 터뜨린 단 한 번의 아우성에 우주를 지배하는 위대한 물리학 법칙도 무용지물로 화했다. 육체의 반응처럼 단순한 것이 가장 강력한 것이 아닐까? 대중 매체의 성공은 오감에 작용하는 생리현상에 충실한 결과가 아닐까? 0과 1, 즉 예스와 노 두 가지의 무한 반복으로 이루어진 비트 이미지와 정보의 전달은 인간의 뇌에 반응해 호르몬을 분비시키고, 이에 따른 화학작용을 통해 오감을 작동시켜 생리적인 욕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재영은 오랜 굶주림에 돌아버리기 직전의 하이에나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를 아무리 넓혀 샅샅이 스캔해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이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 흔해빠진 과자나 사탕 하나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공복을 달래줄 것은 커피를 탈 수 있는 정수기 물뿐이었다. 헌데, 거기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무슨 의지와 힘으로 거기까지 간단 말인가? 피로에 찌든 이놈의 귀차니즘! 사무실에는 신입사원은 고사하고 단 한 명의 후배 기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들, 다 죽었어! 하늘같은 선배가 이렇게 밤을 새고 있는데? 요즘 놈들, 다 빠졌다니까!”



재영은 아우성거리는 위장의 요구를 아예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감지도 않았는데 두 눈에 커피가 두둥실 떠다녔다. 자신을 몰아치는 생리적 이상 반응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어라, 모니터 화면에도 커피가 떠다니네?’

“알았어, 알았다니까! 끙. 영차!”



재영은 계속되는 공복의 침공에, 적에게 끌려가는 노예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로 향했다. 먹다 죽은 놈, 때깔도 곱다 했으니 커피 두 봉지는 기본이었다. 재영은 커피포트에 정수기 물을 넣고, 커피믹스 두 봉지를 머그잔에 털어 넣었다. 먼지투성이인 커피포트의 뚜껑을 보며 후배들을 더욱 굴릴 것(말로만)을 다짐한다.



“확실한 교육이 필요해!”



재영은 저 혼자 떠들며, 물이 끓는 동안 어둠이 견고하게 내려앉은 도시의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취재기획안을 마무리하는 동안 지구를 태울 듯이 이글거리던 태양은 여기저기 솟아 있는 건물 뒤로 사라져버렸고, 창문을 통해 새어나간 빛이 어둠을 밀어낸 채 서늘해진 도로를 덮고 있었다. 재영은 문득 자신의 열정과 고뇌가 거기에 포함돼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미디어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최초로 정립(그러나 미디어 발전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너무 주관적이고 현학적이며,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으로 본 것은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지만)한 마샬 맥루한의 선언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미디어는 빛의 속도로 전해지는 메시지고 메타포다!



인터넷을 포함한 미디어의 속성이 더 위험한 것은, 탈레브의 주장처럼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인간은 많이 생각하지 않는데 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생각하고 있나’를 생각하는 순간일 텐데, 정보의 바다에 빠져버린 인간은 정보를 걸러내는 필터 기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가능하면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권위가 기억력에 의해 나온다 해도 이제는 그 기억마저 책이 아니라 구글이나 네이버의 검색엔진이 대신해주니 앞선 이들의 경험은 홀대 받기 일쑤다. 검색된 내용들은 대부분 평이한 단어로 짧게 요약된 표피적인 수준에 머문다는 것도 두뇌의 계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네티즌이 수용하는 평균보다 조금 길거나 사용된 단어와 문장이 순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는 거의 대부분 외면된다. 이는 수많은 링크가 달린 정보를 끌어오는 검색엔진이 본질적으로 얕고 빠른 이해를 추구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정보를 무료로 제공하는 검색엔진 위주의 인터넷 업체는 광고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그들은 검색을 하는 네티즌이 최대한 한 사이트에 적게 머물게 할수록, 그래서 최대한 단시간 내에 다른 사이트로 넘어가 또 다른 광고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강준만 교수가『대중매체 이론과 사상』에서 폴 비릴리오의 말을 빌려 지적한 것처럼, 네티즌들이 인터넷이 제공하는 ‘속도의 파시즘’에 중독되거나 갇혀버린다. 네티즌들은 그들이 방문한 사이트마다 흔적을 남김으로써 정치와 종교적 편향성, 특정 제품에 대한 기호와 중독 정도, 분야별 콘텐츠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나 본능적이며 생리적인 성향, 그런 콘텐츠를 찾는 횟수와 시간적 간격에서 나타나는 충성도,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는 물론 소셜네트워크와 인맥사이트에서 가족이나 친구, 여가 시간에 대한 정보까지 지극히 사적인 정보까지 실시간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이렇게 노출된 정보와 데이터들은 구글이나 애플 등의 대규모 클라우팅(또는 컴퓨팅) 서버에 축척되고, 끊임없는 마이닝을 거쳐 한 인간에 대한 거의 완벽한 수준의 분석이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각각의 네티즌의 생각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구글과 애플 등은 적재적소적시에 개별적 타깃 마케팅을 실시해 광고주의 상품 판매를 극대화시킨다. 결국 네티즌들은 특별히 생각하지 않고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선정된 상품 정보와 개별 광고를 수동적(반강제적이 더 적절하겠다)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휴대기기를 갖고 변기 위에 있거나 TV나 PC 앞에 있거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등을 통해 무엇을 하고 있든 간에 욕망이 꿈틀거린다. 겨우겨우 눌러온 소비 본능이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마구마구 분출시킨다. 뽕 맞은 것처럼 판단과 사고기능이 마비된다. 신상, 신상, 신상이야! 에라 모르겠다! 변기에서 뒤도 확실히 닦지 않은 채 후다닥 해당 사이트를 방문하거나 통화버튼을 터치한다. 오! 구매할 때마다 느껴지는 달콤한 기쁨이여, 모든 욕망의 카타르시스여!



헌데, 구매를 마친 후부터 왠지 모를 구린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항문에서 시작된 찝찝함이 현실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통장(마이너스 통장까지 통틀어)의 잔고가 익사 직전이다. 남편(또는 부인, 또는 애인, 또는 부모)은 언제 정리해고 당할지,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는 또 어떻고! 만날 삽질만 하더니 서민경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간 거야? 그리고 어떤 새끼가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상품 광고를 보낸 거야? 모레까지 각종 공과금과 이자도 내야 하는데.. 결국 사고 나면 아무 쓸데없는 욕망의 소비에 빠져 더 많은 개인들이 파산지경에 이르고 광고주와 미디어 매체들은 떼돈을 번다. 이것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이면동체인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의 정점이다.



“기자라고 다를 게 없어. 허구한 날 인터넷만 뒤지잖아? 발로 뛰는 기사가 진짜인데 쉽게 얻으려고만 하니, 그들이라고 해서 실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겠어? 모든 게 수박 겉핥기식이지.”



재영은 기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에서, 참고할 뿐 이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사고력을 떨어뜨리고 인식의 방식마저 표피적으로 화석화시키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들은 진지함엔 닭살이 돋을 정도로 질색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말장난에 환호했다. 심지어 각 분야의 전문가마저도 모자이크 식의 지식을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제 원전이나 고전을 읽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이해의 폭이 줄고 인식의 방식마저 디지털화해 갈수록 이해와 가치 판단의 기준마저 변했다. 사람들은 깊은 명상을 외면한 채, 미디어가 제시하는 재미에만 몰두해 갈수록 ‘생각이 없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나는 소중하고 하나같이 쿨하니까, 골치 아픈 생각이란 꺼져 버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제기랄! 인류의 발전이란 다 허상이야.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잖아!”



재영은 디지털 시대에서 절대 불변의 위치에 오른 ‘쿨’한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즉각적이면서도 표피적이지만 세련되고 범사에 무관심해, 현실에서는 오히려 관대해 보이는, 어쩔 때는 파렴치한 엘리트 범죄에 대해서도 ‘뭐 그 정도 가지고’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가치 판단의 왜곡현상과 사고의 가벼움이 ‘쿨’한 것이었다. 물론 개념만 있다면 재미만 추구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으리라. 드라마, 오락, 뉴스, 다큐멘터리, 스포츠, 연예정보, 리얼리티로 포장한 각종 프로그램에 몰입해, 허상과 실제의 사이에서 방랑하는 디지털 유목민의 신세가 된다고 해도 내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수동적이면 뭐 어때? 삶은 어차피 내가 선택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니까.



‘사회의 몰락, 지옥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생각을 조장하는 중심에 미디어가 있어. 나도 그 일원이고. 오죽하면 기레기라고 하겠어.’



재영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끔씩 질주하는 차량의 경적과 브레이크 소리가 빛과 어둠의 파편을 만들며 고막을 날카롭게 파고들었지만, 재영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 생각의 연계를 끊어버리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공기를 마구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