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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8장 ㅡ 아저씨 나 괜찮아



역천에 성공한 자들은 무영을 찾기 위해 무림을 속속들이 뒤지고 있겠지만, 이곳을 찾으려면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다. 그 동안 무영을 최대한 강하게 키워야 한다. 무공에 대한 욕심 때문에 기구한 부자의 운명 사이에 끼게 됐지만 나는 무영을 고금제일인으로 키워 약속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내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 어느 햇살 밝은 날 주린 배를 무로 달래고 있던 나에게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다가와 천하를 구해보지 않겠느냐고 세 명의 친구는 제안을 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부모를 떠나 무공을 처음 수련한 이곳에 그때의 나와 비슷한 무영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반복되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영을 고금제일인으로 키워내는 일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천하를 홀로 독행할 수 있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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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은 화북(華北) 지방 북부에 자리한 성이다. 하북성 내 선화(宣化) 분지, 지산(冀山) 산지, 태행(太行) 산지, 하북(河北) 평원과 함께 화북지방의 다섯 개 지형구인 장북(張北) 고원에서 우측으로 백리 이상 들어가면 천애 고지의 비처, 화월곡이 있다. 사람은 고사하고 동물조차 왕래하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류심환과 삼혼, 무영이 자리를 잡았다.

 

 

그 중심에 한 채의 모옥이 자리했고 그 왼편에 조그만 인공호수가 화월곡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새로 물을 받아 넣었는지 그 밑바닥이 보일만큼 투명했다. 인공호수의 수면 위로 바람이 낙엽 하나를 떨어뜨리자 그곳으로부터 물결이 일어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 물결 위로 투영된 오백 장에 이르는 인공절벽이 물결을 따라 요동치며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사실 류심환은 자신이 무공을 수련한 곳이었던 이곳에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검무영을 위해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그들은 가옥의 앞뒤에 자리한 수백 평의 연무장을 보다 다양한 장치로 보수했다. 한 달 동안 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했으며 류심환은 무영의 치료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무영은 이곳에 도착한 이후에도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영의 상태는 잘 유지됐고 삼혼이 류심환의 지시로 화월곡의 심처를 새롭게 단장할 동안 류심환의 보살핌 속에 점차 상태가 좋아졌다. 그동안 류심환은 이틀에 한 번씩 무영의 혈도를 통해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천상무극독에 중독된 그의 신체가 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다행히 검무영은 검강천으로부터 벌모세수와 내력을 전수 받아 그의 신체와 기혈, 맥박 등은 생각보다 기초가 단단했다.

 

 

특히 그의 단전에 자리하고 있는 천상무극진기의 기정은 그 깊이를 알기 힘들 만큼 내공의 보고였다. 어쩌면 검강천의 최후가 너무 허망했던 이유가 이것에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내공을 상당 부분 무영의 단전에 저장시켜 두었음이 틀림없었다. 천양천단의 효능도 능히 그를 절정 고수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천상무극독과 본류가 같아 서로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의 그에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무영의 치료를 막았고 지금처럼 류심환이 빙 둘러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류심환의 세심한 배려와 무영 자신이 부여받은 선천지체의 잠재력 때문에 그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됐다.

 

 

류심환이 판단하기에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보름 정도 지나면 그가 오랜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제대로 된 음식과 물을 먹고 스스로 운신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를 것으로 보였다. 이는 무영이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이 돼야 하는 운명의 첫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그에 따라 류심환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류심환은 무영의 회복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그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가르쳐야 가장 효율적일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일곱 살 때 삼혼이 찾아와 천외천의 문을 열 후인으로 자신을 발탁한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은 어리지만 이 정도의 아이라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리가 없어. 그날의 아이의 눈빛도 그랬어.’

 

 

류심환은 그가 깨어났을 때 무공 수련보다 제일 먼저 그가 처해 있는 현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면 하루라도 먼저 알아야 충격으로부터의 회복도 그만큼 빠를 것이고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아이도 아니었다. 류심환은 정면돌파를 택했다.

 

 

‘고금제일인로 키우려면 어쩔 수 없어.’

 

 

류심환은 그것도 다 아이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조력자나 지원 세력이 없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아이는 천하제일인이 아니라 고금제일인이 돼야 하는데, 그 험난한 길을 제대로 가려면 아이의 흔들림 없는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게다가 그가 복수를 위한 검을 닦는 동안 역천의 주모자들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천상천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기에 아이의 의지는 그의 천재성보다 강하고 커야 했다.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이란 사치나 다름없다.

 

 

‘주어진 운명이 혹독하다면 극복하는 과정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삼혼은 그런 류심환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는 하늘 같은 존재이고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이유다. 주군은 진정으로 천하를 구할 사람이었고 그럴 능력도 갖춘 사람이다. 허나 주군은 하루가 멀다 하고 검무영을 위해 타혈을 하고 진기를 불어넣는 추궁과혈에만 매달렸다. 주군은 오직 아이에게만 집중하니 신하된 도리로써 그들의 속이 타들어 갈만 했다. 게다가 아이는 천상천의 적자였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어. 헌데 저 아이마저 강호로 나가면 주군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의 마음은 신하된 도리로서 어버이 같은 근심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바람은 그저 불어가는 것이었고, 옷깃에 스며들어 서늘함을 남겼어도 가슴에는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됐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주군의 삶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까?’

 

 

그들은 일이 잘못된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이 나이 먹어 죽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가슴앓이로 속이 새까맣게 타서 죽을 것이라 확신했다, 특히 도혼은.

 

 

‘고금제일인이 지금의 주군인데, 하는 일이 검강천 아들의 양육이라니. 이건 말도 안 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아이의 상태에 대해 신경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스스로를 부정해 봤지만 그럴수록 아이를 보는 자신들의 시선이 처음과 같지 않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아이는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매력을 발산했으며 언제부터인가 그들도 자신의 시선이 아닌 주군의 시선으로 아이을 보기 시작했다.

 

 

‘이래서 결혼하면 안 돼. 아이는 골치 아픈 아편 같은 거야.’

 

 

도혼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 주군에 그 신하였다. 부부로 오래 살다 보면 닮는다 했는데 자신들도 주군과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에 아이를 보는 시각마저 주군을 닮아 있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 서로 죽이 잘 맞는 사이를 뜻함)라 해도 이만은 못할 것이니, 그들은 그래서 속이 더 탔다. 주군의 삶이 점점 주변부로 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류심환은 그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했다. 이미 무림에 나서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그들에게 넘칠 만큼 미안했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무공을 익히기 위해 부모님이 돌림병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데도 곁에 없었다. 가난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주려 했던 부모님이었는데 자신은 무공에 대한 욕망 때문에 부모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천하의 불효자였다.

 

 

‘살아 있는 동안 그 대가의 일부라도 치러야지.’

 

 

류심환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천상천을 찾아 검강천에게 비무를 요청하면서까지 무공의 끝에 이르고자 했던 것은, 무공의 완성이 임종마저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무공에 미쳤던 자의 자식된 도리로써 유일한 속죄의 길이라 여겼고, 끝에 이르되 행하지 않음이 자신의 불효에 대한 스스로의 형벌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런 그라고 해도 그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모른 채 할 수만은 없는 일, 류심환은 고민을 거듭하다 한 가지 복안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무영이 본격적으로 무공 수련에 들어가게 되면 삼혼을 그에게 붙이는 것이 복안의 출발이었다. 자신을 고금제일인으로 인도해 혈난의 천하를 구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면, 그는 이 복안이 모든 것을 풀어줄 정답에 가장 근접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자신 대신에 아이를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으로 키워내 천상천의 외도를 막아낸다면 그 과정에서 그들의 타들어가는 속내도 어느 정도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보름 정도만 더 지나면 무영이 깨어날 것이고, 그 며칠 뒤면 무공 수련에 들 수 있다.

 

 

'삼혼에 대한 미안함은 그것으로 대신하자.'

 

 

문득, 시원한 바람 한 점이 얼굴을 스쳤다. 호수 옆에 심어놓은 사과나무에서 잘 익은 향기도 묻어왔다. 청명지수를 거쳐 시원한 기운을 담아오니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잔잔히 퍼지는 물결은 아직도 향기에 빠져 일렁이고 있었다. 그 위로 반짝이는 것은 가을날의 햇살인지, 혹여 검강천이 아이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나 한 것인지, 무영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코끝으로 스미는 아비의 따뜻한 숨결인 것 같기도 했고 저승에서 이승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아비의 걱정 같기도 했다. 바람의 일부는 그의 머릿결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에게서 맑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류심환을 향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공 수련을 하고 싶어요.”

 

 

말하는 아이의 눈에는 깊은 심연에서 솟아오른 듯 차고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고 혼수상태에서 빠져나와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천상무극독에 중독된 까닭에 육체보다 뇌가 최소 일주일은 먼저 깨어났을 터였다. 아득한 어둠의 심연에서 홀로 싸웠을 일곱 살 아이의 엄혹한 의지 덕분에 류심환의 고민이 하나는 줄었다.

 

 

"아저씨, 나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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