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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우리 모두가 주인인 역사를 위해1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평균 수준의 활동력도 지니지 못한 병든 몸이지만, 필자가 공부하고 사유한 거친 결과들을 올리는 ‘늙은도령의 세상보기’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된다. 강자와 승자 위주로 쓰인 역사와 세계사를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깔려 죽은 이름 모를 수많은 약자들의 희생을 되살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건강, 나이에 비해 도무지 이루기 힘든 지난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류의 위대한 석학인 중 두 사람의 글을 통해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어쩌면 끝에 이르지도 못할 길에 나서려 한다. 그 처음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2》의 저자 칼 포퍼의 성찰이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며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치권력의 역사이다...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도대체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주의 신봉자이자 애창자였던 칼 포퍼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학자들의 결정론(진리는 하나며 명백해서 보기만 하면 누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의 진화는 그렇게 안배돼 있어서 결국은 불평등이 사라진 자유의 왕국, 유토피아를 향한다는 주장)이 비과학적일뿐더러 현실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들을 지적(반증주의를 적용한 결과)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물론 칼 포퍼도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하려 했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것을 성찰해냈다는 점에서 위대함은 인정했다. 또한 포퍼의 마르크스 비판이 항상 참인 것도 아니다. 그의 비판은 반증주의라는 그의 과학철학에 기원하는데, 그의 반증주의에도 오류가 존재한다. 필자는 정체된 진보세력이 세상을 바꾸려면 칼 포퍼와 토마스 쿤 사이에서 벌어진 과학혁명에 관한 치열한 철학논쟁을 곱씹고 곱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생각이며,실제 장하석 교수가 하고 있다).



신이 보통 <역사>라고 일컫는 국제적 범죄와 대량학살의 역사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잔인하며 치졸하기도 한 짓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의 삶의 영역 안에서 참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제대로 말해줄 수 있겠는가. 잊혀진 사람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슬픔과 기쁨, 그들의 수난과 죽음, 이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인간경험의 참된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가 모든 시대를 증거하며 온갖 피해와 희생을 감내했던 인류 모두의 역사가 아니면 무엇이랴. 승자나 강자의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적인 신념에 의해 절대다수의 약자들을 동원하고, 소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집단 최면의 거짓된 역사였다. 성공하거나 승리한 사람의 행적과 불확실한 기억만이 유효하다면 인류는 동물 중에 가장 천박한 동물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과거를 비판적으로 돌아봄으로서 새로운 성찰을 얻는 유일한 영장류라는데 있지 않은가. 인간만이 자유의지에 의해 새로운 길을 찾고, 때로는 자연의 흐름에 맞서기도 하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하여, 이성의 지배를 위하여,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국제적 범죄의 통제를 위하여 우리가 벌이는 투쟁의 관점에서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역사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러한 목적들을 역사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주의(통치술이란 권력욕으로 변형된 자유주의와 구별해야 한다. 미셀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조하라)의 보편적 가치(인권의 기본을 이루는)를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들도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휴머니즘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철학자로 내가 꿈꾸는 역사의 재구성에 모범적인 예를 제공한다. 그의 주장처럼 역사의 주인은 소수의 강자나 극소수의 승자가 아니라 대부분이 상대적 약자인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의 필요성을 제시한 루소의 《인류 불평등기원론》과 자연주의 교육, 즉 인간을 선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안내하는 《에밀》의 핵심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을 자연과 함께 하는 삶과 공존하게 만드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다만 루소의 일반의지는 플라톤의 상기설(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의 완벽한 세상인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 인간이 이것을 떠올리기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으로 마르크스까지 연결돼 있다)에 대한 주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 사고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그의 사상을 공부할 때는 반드시 민주주의적 사유체계로 필터링을 해야 한다.


 

자연과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평등권을 위한 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국가와 같은 인간의 제도들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벌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프랑스의 자유주의자였고 《분노하라》는 소책자로 널리 알려진 고 스테판 에셀을 떠올리는 칼 포퍼는 칼 폴라니와 한나 아렌트처럼 ‘신은 승자와 언제나 함께 한다’는 통념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는 무력적인 혁명도 반대한다. 열린사회라는 것이 꾸준한 변화와 혁신들이 쌓여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과 그 적들(궁지에 몰리면 이들은 파레토의 충고에 따라 인도주의적 정감을 앞세운다)과의 항쟁을 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렸다. 사실과 결정의 이러한 이원론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물질이 나의 삶과 관계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과도 상통한다. 하긴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역사결정론(역사주의의 빈곤)을 비판한 것이지 그의 휴머니즘적인 신념과 과학적인 분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극소수의 현자를 내세워 전체주의적 지배를 꿈꿨던 플라톤을 맹렬히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도 초기 기독교의 이론을 제공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월가의 현인으로 등장한 탈레브의 《블랙스완》을 관통하는 주장도 플라톤의 주름지대(권위가 만들어낸 단순성, 다름과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성향)를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변화 자체가 부패라면 열린사회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인류의 진보도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열린사회의 적이 된 것이다.  

 

 

우리는 예언자로서 나서는 대신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오류를 항상 눈여겨보도록 우리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심판자라는 생각을 우리가 내던져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는 버릇을 끊어 버렸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당화를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주인인 역사를 위해2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