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겨울 어느 날의 눈처럼

 

 

 


1

하늘에서 버린 것이 내게는 있다

 

예수도 외면하여 떠돌아 가는

 

그래서 인간의 이름으로 묶어놓은 것

 

 


2

또 떠나고 있다

 

이 땅에 흐린 느낌만 남기고

 

노을보다 더 남루한 빛깔로

 

투벅투벅 삼일 밤낮의 혼돈과 피로

 

산 자들의 과잉포장 속으로

 

그저, 겨울 어느 날의 눈처럼 내려오다가

 

문득 깨달은 듯 홀연히 떠나고 있다

 

 

 


3

당신이 자꾸 떠나려 한다

 

세상 밖으로

 

초라한 현실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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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구제(1)

 

 

 

 

 

아직 우리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느낌도 그날 같은데

 

이밤이 지나면

 

나는 너를 잊어야 한다

 

몇 평의 방

 

작은 바람의 스침에도 묻어나는

 

투명한 너의 향기

 

한 뺨의 온기에도 가득히 웃던

 

지금 창가엔 달빛이 내리고 있다

 

저 무념의 하늘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깔았을

 

나는 너의 침상에 들고만 싶다

 

이승처럼 산동네 전세여도 좋고

 

불꺼진 방 긴 겨울 속의 웅크린

 

하루밤이어도 좋고

 

 


이밤이 지나면 너를 잊어야 하는데

 

그날처럼 달빛이 하도 고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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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07 18:21

    비밀댓글입니다

  2. 늙은도령 2014.08.07 19:00 신고

    네, 감사합니다.
    예전의 경험을 시로 옮긴 것이지요.



무영의 수련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던 류심환은 무영이 모든 수련과장을 한달음에 해내면서도 땀 한 방울을 흘리지 않자 그를 위한 다음 안배를 펼칠 시기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는 무영을 지켜보던 시선을 들어 드높은 창공을 바라보았다.

 

 

 

‘천주, 보고 있지요? 무영은 정말 놀라운 아이지만, 선택은 그의 몫입니다. 저는 무영을 천하제일인으로 키우는 일과 그리고 몇 가지 안배는 마련하겠지만, 무영의 선택을 존중할 생각입니다.’

“속혼, 있으세요?”

 

 

 

회상에서 돌아온 그가 무영을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안배를 풀어놓았다. 이는 무영이 천하제일인의 경지에 이른 다음의 상황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검강천과의 약속대로 그를 천하제일인으로 키우는 것은 특별한 변수가 일어나지 않는 한 가능하겠지만 무영 혼자만의 힘으로는 재역천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현실적 장벽을 고려한 또 다른 준비가 필요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해답의 끝에는 삼혼이 있었다. 그중에서 이번에는 속혼의 도움이 필요했다.

 

 

 

“주군! 부르셨습니까.”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람, 가장 어른스러운 삼혼의 막내 속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류심환은 속혼을 볼 때마다 창살이 빼곡한 창살에 갇혀 있는 수인이 떠오르곤 했다, 모든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류심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속혼에게 부탁하는 것은 언제나 죄를 짓는 느낌이었고, 되갚을 수 없는 부담이 하나씩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하명하십시오, 주군.”

 

 

 

속혼은 포권을 취한 채 고개를 조금 들어 류심환의 가슴께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시선이 거기에 고정된 것도 그가 생각하기에 신하로써 주군을 바라보며 올릴 수 있는 시선의 한계점이었다. 속혼은 자신에 대해서는 시선조차도 그렇게 해야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부터 천상천을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6개월 단위로 결과를 알려 주시면 좋겠고, 특별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전서구를 보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영을 위한 류심환의 두 번째 안배는 천상천을 살피는 일이다. 미래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몰라 무영이 복수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무영의 능력으로 볼 때 앞으로 십년 정도면 무공 성취가 천하제일인의 위치에 근접하겠지만, 그때의 천상천도 지금과는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도 무영을 찾아 무림을 뒤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류심환은 이를 대비하기 위해 몇 가지 사전작업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 처음이 속혼으로 하여금 천상천을 감시해 향후 변수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었다.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준비도 필요했다.

 

 

 

‘이는 무영을 위한 것.. 주군은 자신은요?’

 

 

 

속혼은 주군의 명이 무슨 의도인지 금세 이해했지만, 이를 이행하면서도 주군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다. 주군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자신들의 목숨과 바꾼 것이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명을 받들어야 하는 그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특별한 것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주군!”

 

 

 

그는 천상천을 살피라는 주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지만 주군의 명을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되물었다. 그리고 천상천이라는 존재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 살펴야 하는지도 현실적인 판단이 우선돼야 했다.

 

 

 

“장차 무영이 천상천을 상대할 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 무공일 수도 있고 다른 세력의 움직임일 수도 있고, 사전에 알지 못하면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들, 무영의 무공만으로 다루지 못할 그런 것들이 기준입니다.”

“알겠습니다. 주군!”

 

 

 

주군의 의도를 거듭 확인한 속혼은 주군의 가슴께에 머문 시선을 거두면 물러나려 했다. 헌데 주군이 무슨 말인가 할 것이 남은 것 같았다. 주군이 자신에게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것도 주군이 조금 꺼내기 어려운 말인 것이 분명했다. 주군을 이십여 년이나 곁에서 지켜본 그였다.

 

 

 

 

 

“남은 명이 있으시면…”

 

 

 

속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류심환은 그의 말에 잠시 시간을 끌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무엇이신지요? 주군. 명만 내려주십시오.”

 

 

 

속혼은 주군의 명을 기다렸고, 류심환은 속혼을 뚫어져라 처다 봤다.

 

 

 

‘지극히 모순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할 수 없어. 갈 때까지 가보는 수밖에.’

“다름이 아니라, 천상천을 살피면서 강호에 어딘가에 있을 삼혼의 뒤를 이을만한 재목을 찾는 것입니다. 많을수록 좋겠지만 명수는 상관없습니다.”

 

“주군! 그 말씀은 천의 율법을 되살리겠..”

 

 

 

속혼이 주군의 두 번째 부탁에 소스라치게 놀라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주군의 명은 무용지물이 된 천의 율법을 다시 살리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율법을 주군 스스로 깼는데, 이제 와서 다시 율법의 일부를 되살리겠다는 뜻이 된다.

 

 

 

‘무영을 위해서..’

“주군, 하명하십시오.”

 

 

 

속혼은 무너져 내릴 듯한 마음을 부여잡았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린 주군이 하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내린 족쇄들을 하나씩 깨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삼혼의 후예를 찾는 기간은 2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천을 다시 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류심환은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다. 무영을 위해 제2의 삼혼을 키울 생각이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폐쇄한 천의 율법을 되살릴 생각은 없었다. 이는 무영을 위함이요, 또 한 편으로는 삼혼을 위한 일이었다. 류심환은 무영을 천하제일인으로 키우면서 몇 가지 일들을 동시에 풀어갈 생각이었다. 그것은 무사가 아닌 인간의 삶에 대한 것으로 삼혼이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것에 관한 일이었다.

 

 

 

“주군을 명을 받듭니다!”

 

 

 

속혼이 류심환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주군에 대한 의문 따위는 그에게 용납되지 않았기에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주군의 명이야. 이유가 있겠지. 난 주군의 명을 행하면 돼.’

 

 

 

그는 주군의 의도에 대해 그 정도에서 생각을 접었다. 주군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속혼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속혼에게 있어서 주군의 명을 이행하기만 하면 그의 일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그 상태로 서있던 속혼은 류심환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몸을 일으켰다.

 

 

 

류심환에게 다시 포권의 목례를 한 후 그대로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화살처럼 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그가 화월곡을 벗어나기 직전 잠시 밑을 내려다 봤다. 이제는 주군의 삶이 되어버린 아이가 밑에 있었다.

 

 

 

‘주군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저 아이란 대체..’

 

 

 

속혼은 불혼이 아이에게 무엇인가 말하는 것을 보면서 화월곡을 벗어났고 있었다.

 

 

-----

 

 

“그만하면 됐다.”

 

 

 

불혼의 말에 수시로 변하는 기둥에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쉴 새 없이 날리던 무영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휴-! 살았다. 할아버지는 밥도 조금 주면서 시키는 것만 엄청 많아.”

 

 

 

무영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억장이 무너지듯 내쉬는 한숨이 마치 노인네의 그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몸 어디에서도 땀이 흘러내리지 않았고, 피로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1년 반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의 신장이 일척 이상 자랐고 아홉 살 중반의 어린 아이 몸이라 하기에는 근육과 뼈, 호흡과 기백이 단단하게 자리했다.

 

 

 

“내일부터는 내가 준비해 놓은 심법을 익히도록 하자.”

 

 

 

불혼이 씽긋 웃으며 말했다. 눈가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 그것만 보면 영락없는 노인으로 손자의 재롱에 기뻐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네! 네? 할아버지가 준비한 심법? 천상무극진기요결이 아니라… 왜? 할아버지가 준비한 심법을 배워야 해?”

 

 

 

무영은 불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주먹만큼 커졌다. 무영에게는 그만큼 불혼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뼈와 살을 깎는 훈련이 천상무극진기를 하루라도 빨리 운용하기 위함이요, 이를 통해 천상무극독을 없애고 본격적인 천상지무의 연공에 들어가기 위함이라 생각했는데, 그 초입에서 불혼 할아버지는 다른 심법을 얘기했다.

 

 

 

“무영아,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봐.”

 

 

 

불혼은 무영의 혼란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그가 수련을 시작한 첫 날에 주군에게 들었던 얘기를 그에게 해주었다.

 

 

-----

 

 

“알겠어. 불혼 할아버지. 그럼, 그걸로 시작해.”

 

 

 

무영의 표정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고, 불혼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내가 준비한 심법은 태극일심제천요결(太極一心制天謠決)이다.”

 

 

 

불혼이 심법의 이름을 말하며, 무영에게 서책을 하나 건넸다. 무영이 태극일심제천요결이라 명명된 서책을 받아 들었다.

 

 

 

“이는 삼혼 할아버지들이 익힌 심법이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아니다, 일단 읽어보고 막힘이 있으면 그때 이 할아비한테 물어봐.”

 

 

 

불혼은 천상무극진기와 파천태극무검의 심결인 태극일심제천요결과의 유사성을 설명하려다 멈추었다. 어차피 그가 심결을 공부하고 파악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무영은 그럴 능력이 넘치도록 남아도는 아이었다.

 

 

 

“알았어. 불혼 할아버지. 그럼, 나 방으로 들어갈게. 좀 피곤해.”

“그래라.”

 

 

 

무영은 서책을 들고 가옥으로 향했다. 헌데 그의 발걸음이 신법의 원리를 저절로 드러냈다. 무척이나 가볍고 중심이동이 완벽한 걸음이었다. 무영은 하나를 배우면 새로운 길을 스스로 찾아나갔다. 무영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하나같이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그것이 불혼을 더 기쁘게 만들었다.

 

 

-----

 

 

현무귀혼진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세 명이다. 헌데 현무귀혼진에 갇히면 진이 만들어낸 혼령 때문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에서 다시 진 밖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이들은 진에 갇혔음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행동으로 봐서는 진에 대해 모르지만 진의 위력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특별한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류심환이 즉시 도혼을 불렀다.

 

 

 

“진 안에 누군가 들어 왔습니다. 진의 위력에 영향 받지 않는 특별한 무공을 익힌 자들 같습니다. 상당한 고수입니다. 가세 알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습니다, 주군! 어떤 떨거지들이 왔는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도혼이 류심환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날아올랐다. 더 묻지도 않고 날아가는 것이 속혼과 달랐다. 한바탕 비무거리가 생긴 마당에 속혼처럼 다시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도혼이다. 상대가, 그것도 주군이 인정한 강자가 거기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다.

 

 

 

그런데,. 류심환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도혼을 보면서 오늘따라 유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무영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도혼의 능력을 믿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

 

 

현무귀혼진에 도착한 도혼이 세 명의 침입자를 봤다. 헌데 진 안에 있어 보긴 보는데 도대체 실체가 없어 정말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천하에 이런 자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저 귀신같은 놈들은 대체 누구야? 저 정도의 은신술을 가진 자들이 있다니? 혹시 천상천에서 파견된 놈들?’

 

 

 

도혼의 의심은 정확했다. 그들은 무영을 찾아 무기한 파견된 삼재였다. 검강인의 명을 받아 무영과 그 구원자를 없애기 위해 무림을 이 잡듯 뒤진 그들이 마침내 이곳에 이른 것이다. 정확히 그날부터 1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천상천이라면,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흐흐, 잘 됐어. 이 기회에 확실하게 손 봐줘야지. 그 동안 쌓인 분함을 모조리 털어내야지. 니들 다 죽었어.’

 

 

 

도혼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천하의 현무귀혼진에 갇혔으면서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저들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이유가 그들이 익힌 무공 때문인 것 같았다. 주군의 말이 옳았다.

 

 

 

‘극에 이른 은형술 때문이야. 저들이 진의 위력에 빠지지 않는 것은 어디서든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무념무위의 은형술 때문이야. 진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모습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야. 어쩌면 검강윤보다 한 수 위일 수 있겠어.’

 

 

 

도혼은 현무귀혼진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그들을 보며 약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도 진에 갇힌 자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로 느껴졌다.

 

 

 

‘일단 상대를 확인했으니, 한 바탕 놀아볼까?’

“망혼도 아닌 것이 왜 이곳에 있나?”

 

 

 

도혼이 말했다. 동시에 격발 준비를 했다. 초절정고수와의 대결에서는 추호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기선을 잡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진을 펼친 자냐?”

 

 

 

지독히 무심한 소리와 함께 삼재의 첫째 천(天)이 도혼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현무귀혼진 안에서도 도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

 

 

 

‘한 번에 내가 있는 위치를 알아냈어. 대단한 놈들이야. 오늘 재밌겠어.’

“들어온 놈이 먼저 말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다 벗은 것 같은 자네들이 먼저.”

“예의? 후!”

 

 

 

천을 대신해 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순간 번쩍하고 빛이 일었다. 인이 아닌 천의 검지에서 무음무형지가 발사됐다. 빠른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고 도혼이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일격이었다.

 

 

 

'이게 우리의 예의야!'

 

 

 

천의 회색빛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의 눈에 천의 신형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지(地)와 인(人)의 형상도 흔들렸다.

 

 

 

“크크, 내 그럴 줄 알았어. 영혼이 없는 껍데기 같은 놈들.”

 

 

 

도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발한 착상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이놈이 하고 공격은 다른 놈이 하는 것, 그들의 선공에 도혼이 손목을 짧게 흔들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우측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우측 방향으로 다시 3장을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이는 천의 지풍이 발사되는 순간과 그의 신형이 흔들리는 순간의 사이에서 행해졌다.

 

 

 

펑!

 

 

 

천이 쫓고 도혼이 이동해 좁혀진 거리 중 도혼에게 더 가까운 곳에서 지풍과 장풍이 부딪쳤다. 충돌의 반탄력에 천의 검지가 찌르르 울렸다. 제법 통증도 느껴졌다.

 

 

 

‘보통 놈이 아니야!’

 

 

 

천이 도혼이 처음 서있던 자리로 내려서며 생각했다. 도혼의 손바닥에도 반탄력이 전해졌다. 파르르 손이 떨렸다.

 

 

 

‘생각한 것보다 더 세네?’

 

 

 

도혼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 내려서는 천을 보며, 다시 손에 공력을 모았다. 그제야, 지와 인이 도혼이 첫 번째로 움직인 곳에 내려섰다.

 

 

 

‘우리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어.’

 

 

 

지와 인의 움직임을 예측한 도혼이 두 번 자리를 바꾼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결국 지와 인은 그들이 있던 곳에서 날아올라 이곳으로 이동한 것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공격을 정확히 예상한 도혼을 보며 지와 인은 가슴속으로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허나 그들의 눈빛과 표정 어디에도 이런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다. 일합은 도혼 쪽에 무게가 실린 무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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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무영은 가옥의 앞뒤에 있는 연무장에서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뒤의 분지에는 양의에서 삼재를 거쳐, 사상과 오행, 육합과 칠성, 팔궤를 넘어 구궁과 십방에 이르는 위치에 돌이 놓여 있었고 그는 돌의 배열에 따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날이 그가 화월곡을 오르기 시작한지 육 개월이 흐른 뒤였고, 그가 여덟 살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무영은 달리기와 암벽 오르기 외에 한 가지 수련이 더해진 것이 너무나 신이 났다.

 

 

무영은 자신의 몸에 조금씩 내력이 쌓임을 느꼈다. 그에 따라 일주천의 욕망이 솟아오르곤 했지만 천상무극진기를 움직이면 무조건 천상무극독이 작동하기 때문에 조급한 욕망을 억누리곤 했다. 어설픈 일주천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그는 내력을 쌓는다는 것에 만족했다.

 

 

'불혼 할아버지가 단계가 있는 법이라 했어. 지금은 새로운 수련에 집중해야지'

 

 

사실 무영이 하는 수련 중 화월곡 오르기가 상하운동이라면 가옥 뒤에서 하는 수련은 수평운동이다. 분지에 놓인 돌을 따라 태극에서 출발해 양의로 움직인 후 삼재를 거쳐 사상, 오행을 지나 육합에 이르고 칠성과 팔궤를 넘으면 구궁에 도달했고 다시 십방(또는 시방)을 통과하니 태극이 다시 그를 맞았다. 이것은 내력을 운용하는 것과 달리 발을 중심으로 한 신체의 일주천이었다.

 

 

“와! 이거 재밌어!.”

 

 

무영이 발로 하는 첫 일주천을 끝낸 뒤 했던 말이다. 지켜보던 불혼도 웃었다. 이러기를 삼개월, 그의 속도는 빨라졌고 그것이 자신의 다리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 느낌이 허리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무영은 빠르게 달리면서도 돌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태극에서 십방까지 달려가는 중에 삼라만상의 조화가 조금씩 그의 몸에 익숙해져 갔다.

 

 

한 달 전부터 무영은 불혼의 지시에 따라 역으로도 달렸다. 바르게 가는 것이 생(生)이라면 반대로 가는 것은 멸(滅)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무영의 몸은 삼라만상에 대한 이해를 넘어 그것의 생성과 파멸에 이르는 이치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무영의 수련이 이에 이르자 불혼은 돌의 높낮이와 위치의 변화를 달리는 도중에도 일으켰다.

 

 

본래, 삼라만상의 조화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런 변화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무영을 보다 높은 단계의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변화는 돌의 높낮이에서 시작됐다. 고저의 변화는 딱딱한 땅에서부터 습하고 잘 꺼지는 땅, 단단한 바위와 힘없는 풀, 두께가 다른 나무와 나뭇가지와 잎, 각종 실내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두 다리가 짚어야 할 다양한 지반을 의미했다. 무영이 이런 변화에 적응하게 되면 그는 실전 시 그가 딛게 될 어떤 지반에서도 제대로 된 평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무릇 무인끼리의 비무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훈련을 통해 무영은 수많은 비무를 거친 강호의 고수처럼 다양한 지반과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졌다. 게다가 그가 신법을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 몸으로만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어서 자신이 최악의 경우에 빠지더라도 최소의 대응을 할 수 있는 신체로 변모해 갔다.

 

 

‘잠재력이 끝이 없는 아이야. 주군의 어린 시절이 이랬었는데, 그에 뒤지지 않아.’

 

 

불혼은 무영이 돌의 높낮이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을 하자 이번에는 돌의 위치에도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이로써 수직에서 수평으로 수시로 움직이는 돌의 변화는 수천 가지의 경우를 만들었다. 이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려면 변화를 따라잡는 빠르면서도 정확한 시선집중이 요구됐고 그에 따른 민첩한 반응이 뒤따라야 했다. 극도의 집중력과 빠른 판단에 망설임이 없는 행함이 이어져야만 변화에 대처가 가능했다.

 

 

수없이 돌의 위치를 놓치고 다리를 헛짚어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무영이 돌의 위치 변화에 따른 순간 반응의 민첩성과 정확한 착지를 통한 이동의 완벽함에 점점 다가갔고, 마침내 육 개월이 흐르자 그는 모든 변화를 따라잡아 일주천에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어. 허면 무영이 눈가리개를..’

 

 

불혼은 무영이 눈가리개를 요구할 것이라는 주군의 말을 떠올렸다. 헌데 그가 생각을 다 떠올리기도 전에 무영이 소리쳤다.

 

 

“눈가리개!”

‘허허허.. 무영이나 주군이나 사람이 아니야. 무술기계야, 기계!’

 

 

불혼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무영의 요구대로 눈가리개를 건넸다. 그 첫날에 눈을 가린 채 돌 앞에 섰을 때, 그의 눈빛은 눈가리개를 뚫고 나올 듯 타올랐고 그는 또 웃었다. 하지만 무영은 그날 하루에만 돌을 제대로 밟지 못해 떨어지기를 수백 번에 이르렀고 그 당혹감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보는 것과 보지 않고 행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간격의 넓었다. 그 많은 변화에 대처하면서 기억 속에 각인시켜 모든 돌의 흐름이 손바닥 같기만 했는데 막상 눈을 가리니 소용없었다. 그저 보고 확인한 것들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것인지 무영은 비로소 깨닫게 됐다. 그는 몸 밖에 위치해 일상 속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눈과 팔, 허리와 다리의 중요성도 깨우쳤지만 돌이 움직이는 소리를 파악해내는 청력의 중요함과 그에 따른 공기의 변화마저 인식하는 나머지 네 감각의 중요성도 깨달았다.

 

 

또한 돌의 변화를 그려내는 상상력과 마지막으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체의 대응에 대한 믿음과 그 신속한 이행을 위한 결단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 같은 수련과정을 통해 무영은 몸과 하나 된 정신과 마음속에 모든 창의성의 원천이 들어 있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무영이 배우게 될 모든 무공의 원리, 일극무원결(一極武原訣)의 시작이었지만 당시의 무영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 후로 무영은 수없이 떨어지고 일어나 다시 올라서고 또 떨어져 다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한 번도 실족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해내고 말겠다는 그의 의지와 집념은 오감을 극대화시켰다. 그 결과 실족하는 숫자가 점점 줄었고, 다시 삼 개월이 흐른 후 처음으로 돌에서 떨어지지 않고 일주천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속도는 느렸지만 무영은 눈을 가린 상태에서 오감만으로 완벽한 일주를 해냈다. 육감은 오감을 거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무영이 이번 수련을 통해 깨닫기를 바라는 류심환의 의도였다.

 

 

“불혼 할아버지, 다음은 뭐야?”

 

 

이제 막 그 어려운 수련을 넘긴 무영은 일주천이 주는 만족감 대신 불혼에게 다음의 수련을 물었다. 점점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씩 확신이 들기 시작했고 세상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천상천에 이르려면 만족감 따위는 갖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불혼도 단계를 넘어설 때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다음을 요구하는 무영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일상이 됐다. 그때마다 무영의 웃음을 보는 것은 당연했고.

 

 

‘저 웃음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칠 정도야. 도대체 이 아이란..’

“따라오너라.”

 

 

그를 위한 다음 수련은 가옥 앞의 분지에 마련돼 있었다. 뒤에 있는 분지와는 달리 그곳에는 수많은 화강암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주먹과 당수, 손바닥과 팔뚝, 발과 정강이로 수 없이 때리고 차야 할 기둥이었다. 상하운동이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수평운동을 통해 균형 감각이 안정되자 무영은 본격적인 격발의 수련과정으로 접어들었다.

 

 

무영은 기둥을 때리고 차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발과 다리의 피부가 부르텄고 진물이 흘렀으며, 죽은피로 흘러내렸다. 그런 고통이 일상이 되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굳은살이 배기기 시작했다. 굳은살은 수없는 타격의 과정을 거쳐 다시 벗겨지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속살이 돋아나 다시 굳어지는 과정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생겼고 무영은 이것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육 개월이 흐르자 화강암 기둥을 때리고 차는 그의 팔과 다리에 힘이 붙고 속도가 오르면서 격식이 생겼다. 불혼은 그의 성취가 이에 이르자 고정돼 있던 기둥의 위치를 옮기기 시작했고 무영은 그 변화에 따라 다시 주먹과 발을 날려야 했다. 흐름은 일정한 규칙이 없어 그는 기둥의 위치가 변할 때마다 적절히 대처해야 했다. 자연히 지난 육 개월 간 그가 익혀 몸에 자리한 격식이 오히려 방해가 됐다.

 

 

이 때문에 그는 수없는 헛주먹질과 발길질을 날려야 했고 이는 급속한 체력 저하로 이어져 기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그럴 때마다 무영은 어김없이 그 속에 갇혀 움직이는 기둥에 수없이 부딪쳤다. 기둥이 그의 몸을 강타하면 그는 살이 터지고 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악! 틀림없어, 불혼 할아버지는 아예 나를 죽여 버릴 생각인 게야!”

 

 

무영은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서 불혼에게 투정을 부렸고, 그의 고통을 모를 리 없는 불혼이었지만 무영의 투정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다. 차마 입 밖으로는 내보지 못할 말이어서, 안으로 삼켜버렸지만.

 

 

“야, 이놈아!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이 모든 건 내가 아니라 주군이 준비한 거야. 왜, 나만 갖고 그래!”

 

 

그렇게 기둥과 수없이 부딪치며 무영은 앞의 수련에서 단련한 오감을 실제로 사용하거나 응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위험에 빠졌을 경우 제일 먼저 통증을 다스리고 공간을 확보하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는 숨을 크게 쉬어 호흡을 고르게 하여 가능한 한 체력을 빠르게 회복하는 것이 그것 못지않게 중요함도 알게 됐다.

 

 

위험은 초기단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체험적으로 배우게 됐다. 통증은 최대한 분산해 줄여야 하는 것이고 체내에 쌓인 피로는 안정된 호흡을 통해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며 더 많은 공기를 흡입해 몸에 고루 보냄으로써 원기 보충을 서둘러야 하는 것의 중요함도 체득했다. 그렇게 세 번째 수련과정도 고비를 넘고 그는 기둥의 변화에 점차 익숙해졌고 그의 격발은 한 단계 높은 격식을 갖췄다.

 

 

“불혼 할아버지…”

“알았다. 옜다. 눈 가려라.”

 

 

무영의 미소에 불혼이 기다렸다는 듯 눈가리개를 그에게 건넸다. 이쯤에서는 불혼도 지금의 무영이 주군의 어린 시절과 같은지, 주군의 어린 시절이 무영과 같은 헷갈릴 정도였다.

 

 

‘그놈의 장자는 이상한 꿈 얘기를 해 가지고선, 나마저 헷갈리게 만들어.’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꼭 한 달 전이다. 이로써 무영은 각 수련과정마다 기간을 단축하면서 류심환이 마련해둔 일차 수련과정을 끝냈다. 그러나 무영이 느끼고 배웠던 것 이상으로 각 수련과정에는 류심환의 안배가 들어 있다.

먼저 화월곡의 수련과정은 천상무극독 때문에 일반 아이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약해진 그의 기본 체력을 키워주는 것이 일차 목적이었다. 무영은 화월곡을 오르고 내려올 때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손과 발에 온 신경을 집중해 힘을 모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근력이 강화됐다. 아울러 높이에 따른 온도 차와 바람의 흐름, 습기 등을 체험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이해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오를 때와 내려올 때 사용하는 근육과 뼈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힘의 분배와 집중의 중요함을 배움으로써 효율적인 인체 사용에 대해서도 이해를 넓혔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근육은 발달됐고 뼈가 튼튼해졌으며 빠르게 힘이 붙었다. 그것이 바로 축기에 대한 이해였다. 태극에서 시작해 십방에 이르는 돌에서의 수련은 무영에게 발바닥에서 시작하여 다리를 거쳐 허리에 이르고 손으로 이를 보조하는 가운데 인체의 중심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었다. 이를 통해 얻은 균형감각에 대한 이해는 신체 조화의 원리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아울러 돌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삼라만상의 생성원리와 우주의 법칙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터득해 갔다. 이것은 화월곡을 오르며 시작된 자연 원리에 대한 이해와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은 운기로 가는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심법에 들어가기 위해 무영의 상태에 특화시켜 놓은 사전단계들이었다.

 

 

눈을 가린 채 돌을 옮겨 다닌 것은 그의 오감을 극대화시켜 균형감각의 원천이 눈이 아닌 몸과 신경이 반응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흐름에 따라 변하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마저 잡아냄으로써 실전 대결 시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초식의 최대효과를 이끌어내는 기반을 다져주었다.

 

 

가옥 앞의 분지에 놓인 화강암을 주먹과 발로 때리고 차는 것은 발기의 근본인 권과 각에 대한 이해다. 일반적으로 축적된 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발기는 손과 다리를 뻗어 자신의 힘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시작된다. 이를 통해 내부에 있는 힘을 몸 밖으로 내보내 상대에게 충격을 주는 것인데 이는 축기를 발기로 전환하는 원리를 알아야 가능하며 이를 통해 무영은 발기를 위한 기본원리를 익힐 수 있었다.

 

 

기둥의 위치가 변하고 눈을 가린 채 진행된 수련은 실제 비무를 재현한 것이다. 모든 초식이 다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수련을 통해 발달된 그의 오감은 실전의 경험에서도 유효할 것이다. 아울러 기둥의 변화에 갖혀 배웠던 것은 실전 시 위험에 빠졌을 때 당황하지 않고 벗어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런 수련 과정을 통해 무영은 상당한 내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마침내 류심환이 안배한 수련의 두번째 단계에 이르게 됐다. 이 내력은 장차 해독 과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이것이 류심환의 진짜 안배였다. 그렇게 일년 반의 시간이 흘렀고 무영은 다시 불혼을 향해 싱긋 웃었다. 지난 육 시진 동안 모든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그의 이마에는 땀도 맺히지 않았다.

 

 

‘내가 주군의 어린 시절을 보지 않았다면, 무영의 가공할 성취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불혼은 주군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무영을 보면서 자신에게 금지된 영역인 고금제일인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으로 불혼도 한걸음 성장하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무영의 성취가 저러하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점이었다. 불혼은 그런 무영을 보며 수련 첫 날에 주군이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무공 수련을 처음부터 다시 함은 그의 단전에 새로운 내력이 뿌리내려 운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천상무극독에 중독된 내력이 단전에 남아 있고 그렇다고 단전을 하나 더 만들 수 없는 것이기에 단전의 일부를 나눠 쓸 수 있는 새롭되 본인의 것이라 부작용이 없는 내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새 내력의 대부분이 막혀 있는 혈맥을 따라 무영의 몸을 일주천 할 때 곳곳에 남아 있는 천상무극진기와 반응하지 않아 천상무극독의 급격한 준동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입니다. 무영이 새 내력을 통해 그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천상무극진기를 끌어내 새 내력과 합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마침내 무영이 심법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영이 여기에 이르면 1단계 수련의 목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과정을 불혼이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무영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반 시진을 쉬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늘은 한 번도 멈추지 않을 거야!”

 

다시 출발선에 선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팔과 다리, 허리에 철환(鐵環)을 두른 상태로 하루 여섯 시진 동안 몸을 단련했다. 처음에는 걷는 동작 하나에도 팔이 저렸고 다리가 끌렸으며, 무릎과 발목에 피로가 쌓였고, 허리에 충격이 가해졌다. 당연히 걷는 일 이외의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무영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걸을 때 팔을 확실하게 흔들었고 다리도 보폭이 줄어들지 않도록 집중하고 주의하며 걸었다. 첫 날에 그는 삼백여 보(步)를 걸은 후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 몇 십 보 더 걸어간 뒤 완벽하게 탈진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는 불혼에 의해 그 상태 그대로 모옥으로 옮겨졌고 불혼의 품에서 이미 잠에 골아 떨어졌다.

 

 

물론 자는 동안에도 무영은 철환을 풀지 않았다. 숙면을 취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지만 빠른 적응을 위해 한시도 자신의 몸에서 철환을 풀지 않았다. 자신이 이루려 하는 것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맨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작은 것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고금제일인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걷다가 탈진한 채 쓰러져 그 자리에서 잠들지라도 철환은 자신의 몸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이제 시작을 뿐이야. 이 정도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야.’

 

 

철환을 두른 채 잠든 다음 날 아침, 무영이 잠에서 깨어 끊어질 듯 저리는 팔과 다리, 허리를 문지르며 마음속으로 또다시 다짐했다. 그는 매일 아침 그의 눈가에 빛나는 해살에, 깊은 밤에 잠들 때 스르르 감기는 눈에 걸린 몇 가닥 달빛과 별빛에 다짐하고 다짐했다.

 

 

무공수련 과정 중 불혼 할아버지와 나누는 장난스러운 말과 투정에도 어린 무영의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 무영은 가슴 속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아버지가 그리움의 이름으로 떠오르려 할 때면 불혼에게 실없는 말이라도 던졌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그날의 기억들이 튀어나올 것 같으면 불혼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복수에 대한 끝없는 갈증과 초조함, 그러면서도 당장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때 없이 올라와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일각도 복수를 잊은 적이 없어. 내게서 그것을 빼면 나는 없는 거야. 복수의 그날까지 나는 없고 무공수련을 먹고 사는 괴물만 있어. 십 년 아니, 백 년이 걸린다 해도 반드시 내 손으로 원수들을 처단할 거야.'

 

 

이제 이런 다짐은 무영의 주문이 됐다. 일곱 살 아이의 가슴에서 자라는 시뻘건 검이 되고 시퍼런 도가 됐다. 꿈에서든 상상 속에서든 원수의 피가 묻어 흥건해져야 비로소 잠이 드는 검의 울음이 됐고 도의 살의(殺意)가 됐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마음속에 복수라는 감정이 검붉게 쌓여만 갔다.

 

 

‘최대한 빨리 최고가 될 거야.’

 

 

 

철환을 두른 그 다음 날에 그는 삼백오십 보를 나갔고 한 번 일어나 다시 오십 보를 더 걸었다. 그는 물먹은 한지처럼 탈진하여 땅바닥에 퍼져 버렸고 당연히 불혼에게 들려져 가옥으로 옮겨졌다. 그것으로 그대로 골아 떨어졌음은 첫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손과 발,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에 견디기 힘들었지만 하루하루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 만큼 복수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고 가슴 속으로 칼을 갈았다.

 

 

그렇게 한 달을 수련하자 무영은 일 리를 걸어가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팔을 흔들 수 있게 됐고 다리의 보폭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눈에 띠게 걸음이 빨라졌다. 다시 한 달이 흐르자 무영은 일 리를 달릴 수 있었다. 철환을 두른 채 걷기 시작한 첫 날처럼 그는 수없이 넘어지기를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툴툴 털고 일어나 반드시 남은 거리의 두 배를 더 뛰었다.

 

 

그것도 한 달이 또 흐르자 무영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일 리를 달릴 수 있었고 그런 후에도 또 일 리를 달렸다. 그가 탈진해 쓰러지는 것도 사라졌다.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무영의 지독한 복수심과 거기서 자라는 독기에 의해 하나씩 현실이 됐다. 팔과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고 허리는 이를 견뎌냈으며, 무릎과 발목에 피로가 쌓이지 않았다. 몸이 솜처럼 땀에 절 때까지 달려도 한 시진 정도를 쉬면 기력을 회복해 다시 달릴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무영의 호흡도 안정되고 길어졌으며 심장박동도 규칙적이며 줄어들었다. 무영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몸은 단단해지고 체력은 점점 강해졌으며 호흡은 일정하게 유지됐다. 그의 몸에 기초토납법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배기 시작했다. 심법을 본격적으로 수련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점부터 무영은 불혼의 지시에 따라 달리는 것 이외에도 매일 오백여 장 높이의 화월곡을 오르게 됐다. 일리를 전력으로 달린 후 반 시진 쉬고, 다시 일리를 달린 후 한 시진의 휴식이 주어졌고 그 다음에 화월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월곡은 수직에 가까운 까닭에 평지에서와는 달리 무영은 철환을 풀고 절벽을 올랐다. 막상 그가 철환을 몸에서 풀자 팔과 다리가 그렇게 가볍고 편할 수 없었으며 허리는 어떤 자세에서도 무게중심을 유지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붙었다.

 

 

화월곡을 오르는 첫 날에는 몸을 끈으로 묶어 안전장치를 한 상태에서 삼십 장을 올랐는데 그 동안 강해진 팔과 다리를 사용해, 몇 개의 튀어나온 돌과 절벽 사이의 틈새를 이용해 거침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무영은 많이 힘겨워 했지만 그 속도와 안정성이 불혼의 예상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철환을 착용한 채 그가 했던 수련이 이곳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도대체 이 아이의 발전 속도란.. 좋아, 일정을 앞당겨 보자.’

 

 

불혼은 그의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자 십오일로 예상했던 날짜보다 오 일이나 앞당겨 화월곡을 오르는 높이를 십 일마다 두 배로 늘렸다. 그마저도 무영이 거뜬히 해내자 그 다음에는 오 일 간격으로 올라갈 높이를 다시 두 배로 늘렸다. 아울러 무영이 하루에 오르는 높이가 사백 장에 이르렀을 때 그 지점부터 절벽은 지면과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그는 손의 힘으로만 절벽을 올라야 했다.

 

 

허나 그런 정도의 난이도는 무영에게 절벽 곳곳에 핀 잡풀에 눈이 찔리는 정도의 방해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의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놀라운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 발전은 곧바로 무영의 변화로 이어졌다. 한 마디로 그의 성장은 갓 시위를 떠난 화살 같았다. 철환을 풀고 오르기 시작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계곡을 오르는 것은 달리기와 달라 긴장의 강도가 높았고 추락에 대한 두려움도 떨칠 수 없었지만 이제 그것마저 그에게는 지겨운 감정이 됐다.

 

 

처음 손에서 돌부리를 놓쳐 십여 장을 수직으로 떨어져 절벽에 부딪쳐 튕겨진 후 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와중에도 무영은 자신이 실수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에게 두 번의 실수란 용납되지 않았고 그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련 도중에 벽에 손가락을 낀 채 흘러내리며 손톱이 부러지고 발이 삐기를 수십 차례, 손목이 돌아가고 발을 헛디뎌 추락해서 갈비뼈에 금이 가고 발목이 부러질 듯 뒤틀려도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선 실수한 곳만 직시했고, 떨어진 거리만큼의 자책과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는 독기 어린 다짐만 그의 뇌리에 가득했다. 그의 요구에 따라 무영이 하루에 오르는 높이가 이백십 장에 이르게 된 날부터 몸에 묶은 끈마저 풀었다. 위험은 극도로 높아졌지만 그는 끈을 묶은 상태에서 계속 오르는 것은 집중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판단해 불혼에게 끈을 풀 것을 요청했고, 끝까지 고집해 허락을 받아냈다.

 

 

물론 그가 떨어진다 해도 불혼이 있으니 죽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무영의 의지가 그랬다. 죽을 각오로 오르겠다는 것이었고 불혼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독기에 놀라 온몸의 피부에 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독기라는 것은 어린 그에게 마음의 그늘일지는 모르지만 몸에는 보약이었고 불혼도 무영의 오기(傲氣)를 말릴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성장할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육체의 발전에만 집중하자. 정신은 육체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므로, 지금은 무영의 복수심을 걱정할 때가 아니야.’

 

 

그렇게 시간이 물 흐르듯 지났고 한 달 전부터 무영은 매일 화월곡의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무영은 화월곡 정상에 오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 화월곡 정상에 올라 두 발로 섰을 때, 한껏 들이킨 공기의 청명함이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었다. 무영의 영혼에 푸른 희망을 안겨준 최고의 선물이자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성취에 대한 뿌듯함이기도 했다.

 

 

들이킨 공기는 가쁜 호흡 때문에 곧바로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갔지만 그 순간의 가슴 뚫리는 시원함이란 무영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곱 살, 그 어린 날의 첫 희열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내려다본 화월곡 안의 풍경은 얼마나 작았던지. 또한 처음 바로 본 화월곡 밖의 풍경이 얼마나 넓고 무한히 펼쳐져 있었던지.

 

 

‘저 너머 어디엔가 천상천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불혼이 죽어서도 잊지 못할 무영의 말이 그의 작은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중얼거리듯 무영이 나직하게 한 말, 류심환이 불혼에게 들어 속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게 만든 바로 그 말.

 

 

“천상천… 이로써 한 발 더 다가섰다.”







무영이 타고난 선천지체는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하고 뛰어난 천혜의 신체지만, 그 혜택만큼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선천지제를 타고나면 열 살 경에 삶의 최대 고비가 온다. 신체에 부여된 능력을 그때까지 다스릴 수 있는 치료를 받거나 무공을 익혀 제거하지 못하면, 신체 본연의 힘이 단전을 파괴한다. 그럴 경우 기혈이 혈맥을 타고 올라 혈도를 폐쇄시켜 사지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일종의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고 스스로 작동하는 그 힘이 뇌에 이르면 기능이 마비돼 가사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전설의 편작이나 화타 같은 의선(醫仙)도 손을 쓸 수 없다. 이것이 선천지체의 치명적 단점으로, 이런 신체를 갖고 태어난 사람의 수가 극히 적지만, 주어진 축복만큼 그 한계를 넘어선 자도 거의 없다. 그래서 선천지체는 천형(天刑)이라고도 했다.

 

 

무영이라고 해서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류심환이 그를 처음 치료했을 때 그의 단전에 천상무극진기의 기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선천지체 본연의 힘을 다스리기 위한 검강천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는 무영의 나이 세살 때부터 벌모세수와 추궁과혈을 시행해 어린 무영의 단전에 기정을 담아둘 수 있었다. 무영이 너무 어려서 이를 다 소화할 수 없었지만, 이 내기의 도움으로 무영은 선천지체 본연의 힘을 막아내면서 신체가 부여한 천부의 재능을 하나씩 실현할 수 있었다.

 

 

선천지체인 그의 재능은 문무를 넘나들었다. 무영은 다섯 살 때 이미 사서오경뿐만 아니라 춘추백가의 주요 서적들을 독파했다. 더 나아가 깊은 지식이 뒤받침 돼야 이해할 수 있는 전문서적도 쉽게 독파했다. 이를 통해 무영은 어린 나이에도 세상을 보는 눈이 어른과 다를 것이 없었고, 상당 부분 사람의 내면을 읽고 그를 다독일 수 있는 미래의 지혜를 넓혀 갈 수 있었다.

 

 

이는 늘 강호출도에 대한 욕망에 힘들어 하는 천년 은둔의 천상천궁인들을 도닥거리고 다스리며 무림 전체를 대응해 가야 하는 천상천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이점에서 무영은 역대 천주들 중 최고였고, 놀라울 정도의 속도를 보여주었다. 어린 무영은 그렇게 내궁의 식솔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미래의 천주로서 그들로부터 마음까지 얻고 있었다. 무영은 천상천 역대 최고의 천재라는 아버지 검강천의 어린 시절을 앞선 성취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무영이 세상의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자 검강천은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무공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우선 천상천의 비전명약인 천양천단을 먹여 자신이 넣어 준 천상무극진기와 조화를 이루게 했고 무영이 천상무극진기를 익혀감에 따라 그 효능이 한 단계씩 풀어져 그의 내력으로 자리 잡도록 조치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벌모세수를 시켜주었고 그의 수련이 10개월에 이르러 진기 운용의 묘리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자 추궁과혈을 거쳐 임독양맥까지 타통시켜주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무영의 내력은 운기를 실시할 단계에 이를 만큼 충만해졌고, 일곱 살에 이르자 천상무극진기의 심결을 익힐 단계에 이르렀다. 그때 역천이 일어났다. 무영의 단전에 자리한 내력의 일주천에 성공한 후 천상무극진기를 익히기 시작한 지 정확히 삼 일 후였다.

 

 

그렇게 운명의 날은 그에게 닥쳤고 무영은 그날 일어난 일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자신과 아버지가 어떻게 천상무극독에 중독된 것인지는 몰랐지만 누가 했는지는 분명히 기억했다. 아버지의 어깨를 관통한 검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역천의 주역이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천상무극독에 중독된 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천상천을 빠져나올 때 무영은 울지 않았다. 이유도 묻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 없어 미칠 듯이 가슴이 뛰었지만 그냥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하나의 기억만 떠오르지 않기를 기원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곱 살 나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품속에서 무영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뿐이었다. 지금 그가 기억하는 것도 거기까지다.

 

 

그런 무영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류심환에게 처음 묻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생사였다. 자신은 혼수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수면상태로 들어섰고, 깨어서도 기억할 수 있는 꿈을 꾸기 시작한 후에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꿈속에서조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무영은 깨어나는 순간에 아버지의 생사를 물으려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됐다. 무영은 그것만 알면 어떤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무슨 일이든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헌데 깨어나 다시 아저씨를 보니 꿈속에서도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령움의 마음이 커 꿈에서조차 아버지가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기원했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 무영은 물어볼 수 없었다. 자신의 물음에 대한 아저씨의 답이 아버지의 죽음이라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무영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차라리 묻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의 생존에 대해 최소한의 가능성만은 남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존재할 수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면서 흘릴 수 없는 숱한 눈물을 가슴에 담아둔 채 그가 처음 꺼낸 말이 ‘무공 수련을 하고 싶어요’ 였다. 어쩌면 선천지체의 잔인함은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는 세상의 이치에 그 나이 또래의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고금제일인이 될 거야.’

 

 

무영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돌아 뇌리에 박히고 뼈에 새겨서 죽어서도 이뤄야 하는 목표, 고금제일인이 돼 천상천으로 돌아가는 그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최대한 빨리 고금제일인 될 거야!’

 

-----

 

“할아버지, 심법이 뭐야?”

 

 

그가 마침내 불혼에게 물었다.

 

 

 

“심법은 모든 무공의 기초란다. 기초이면서도 대성하면 그 자체가 절대무공이 될 수도 있어. 상대의 마음에 말이 떠오르게 하는 소림의 혜광심어도 그 중 하나란다.”

 

 

“정말? 심법도 절대 무공이 돼?”

 

 

무영의 눈빛이 유난히 밝아졌다. 심법의 중요성은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 심법은 혜광심어 말고도 많이 있어.”

“그래? 나도 조금 배웠는데.”

‘..아버지 한테.’

 

 

무영이 아버지와 함께 했던 천상천에서의 짧은 무공수련 기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 같았다.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면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오, 그러니. 그럼 네가 배운 심법이 어디까지야?”

 

 

불혼이 생각에 잠긴 무영을 보며 인자하게 물었다.

 

 

“음.. 내력을 쌓아 일주천하는 거, 거기까지.”

“뭐라고? 일주천을 했다고?”

“응, 일주천을 했어.”

“허허, 일주천을 했단 말이지?”

“정말이야!”

“그래, 그래.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주천 다음에? 어, 어.. 그건..”

 

 

무영이 당황해서 말을 잘 잇지 못했다. 불혼이 보기에 무영은 일주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어린 나이에 내력의 일주천을 했지만, 그 다음까지는 주군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니 무영이라고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다음은 일주천한 내력을…”

 

 

불혼이 일주천 다음에 해야 할 것을 설명하려 하자, 무영이 그의 말을 잘랐다.  

 

 

“밖으로 내보내면 되지! 할아버지 바보야?”

 

 

무영의 눈빛이 초롱초롱 하게 빛났다. 그는 불혼의 답을 알고 있었다.   

 

 

‘허허… 내가 정말 바보가 됐어. 무영은 아무리 어려도 선천지체의 소유자이며, 천상천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깜빡했어.’

 

 

불혼이 무영에게 기분 좋은 한 방을 또 먹었다. 비록 아이에게 보기 좋게 당했지만, 그것은 즐거움이 가득할 날들에 대한 예감이기도 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 번 해볼까.’

“그럼 너는 몸 밖으로 내력을 어떻게 내보낼 생각이야?”

 

 

불혼이 무영에게 다시 물었다. 생각의 연상작용을 통해 심법의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기 위해서였다. 심법이 받쳐주지 않는 무공이란 있을 수 없다.    

 

 

“응, 그것은? 어, 어.. 그래 맞다. 주먹이나 발을 통해 내보면 되지 않을까?”

 

 

잠시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답은 순식간에 나왔고 정확했다. 무영의 눈망울이 다시 초롱초롱 빛을 발했다.

 

 

‘허허. 그 짧은 순간에! 생각보다 더 뛰어난 아이일 수도 있겠어. 좋아, 그러면 한 발 더 나가볼까?’

“주먹과 발로 어떻게? 내력은 몸 안에만 있는 것인데?”

 

 

불혼이 감탄을 담아 둔 채 무영에게 발기의 기본을 물었다. 그는 이번에도 무영이 짧은 시간 안에 유추해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무공이라는 것이 죽도록 노력하면 일정 선까지는 발전한다. 하지만 그 다음의 수준인 절정고수가 되려면 창조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일반적인 고수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절정고수의 차이는 무공의 종류나 수련의 정도가 아닌, 우주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무공에 접목시키는 창의적인 발상에 있다.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는 것도 여기서 나온다.

 

 

“어, 그건.. 그건..”

 

 

이번에는 무영이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모았고 앙증맞은 손으로 턱을 괸 상태에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운기에서 발기까지 상상만으로 유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슬며시 무영이 웃었다.

 

 

“할아버지가 가르치려는 심법을 익히면 되지.”

 

 

그의 눈빛은 이미 혜성처럼 빛났다. 불혼이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니 무영은 무엇을 하나 넘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았다. 주군도 비슷한 버릇이 있었는데 무영도 그런 버릇이 있었다.

 

 

‘정말로 주군과 닮은 점이 많아. 대체 이 아이란..’

“허허, 이놈 봐라. 그래, 그래, 그것이지. 허허허!”

 

 

불혼은 다시 짧은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내는 그의 영특함에 탄복을 금치 못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불혼은 자신이 심법을 가르치는 이 아이가 주군에 필적하는 절대고수로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가능성이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위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왜소하기도 하다. 가능성의 시작에는 희망이 있지만 가능성의 끝에는 절망이 있다. 인간은 언제나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다.     

 

 

“그래, 네 말처럼 심법을 익히면 돼.”

 

 

무영의 무한한 가능성을 처음 확인한 불혼은 가슴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천상무극진기요결』, 책자의 겉장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무영이 불혼이 건네준 서책을 천천히 들었다. 그의 시선에 황금빛을 인쇄된 ‘천상무극진기요결’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들어왔다.

 

 

‘그래, 이거야! 이거였어!’

 

 

무영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다스리려 해도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호흡도 거칠어졌다. 참을 수 없는 물기가 저절로 차올라 두 눈에 맺혔다. 그 단어로 하여 무영이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둔 아버지가 떠올랐다.

 

-----

 

“무영아, 이것이 천상천의 근본이란다.”

 

 

어느 햇살 맑은 날, 검강천이 무영에게 다가와 책 하나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청명함은 그저 높다 하기에는 너무 깊었고 푸르다 하기에는 오히려 투명해 그 끝도 보일 듯했다. 담장 밑에 핀 꽃들이 햇살에 부딪치며 눈부시게 피어났고, 그저 예쁘다 하기에는 너무나 향기가 진했다. 그날 약한 바람에 연을 날리려 애를 쓰고 있는데 아버지가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서책 겉장의 황금빛 글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이거 뭐야?”

“천상천의 시작이란다.”

“천상천의 시작?”

“네 미래이기도 하지.”

 

 

무영이 연을 놓고 서책을 들었다. 그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고 검강천은 그를 보고 가득 웃었다. 무영은 ‘천상무극전기요결’의 첫 장을 펼쳤다. 자신의 미래라 하는 것의 첫 장을 열었다.

 

 

‘무릇 우주 간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니 이를 순(順)이라 한다. 나머지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이니 이을 역(易)이라 한다. 둘은 서로 마주하는 곳에서 생성되어 각각의 성향이 시작된 곳으로 역으로 흘러간다. 이로써 하나 된 성향은 조화를 이루어 생명을 만들고 질서를 이루니, 이를 삼라만상의 본질인 천(天)이라 한다. 생은 우주 간의 두 가지 기운, 빛과 어둠에 의해 흐르고 솟고 꺼지고 갈라지니, 이를 삼라만상이 터전을 이룬 지(地)라고 한다. 그 사이에 두 성향과 기운이 충만하여 음과 양이 생성되니, 이를 영겁회귀의 원(原)이라 한다. 이 원이 나뉘고 분화되어 삼라만상이 자리를 하니, 이를 각각의 성질로 발화하는 생(生)이라 한다. 이렇게 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생에 이르는 과정을 개벽(開闢)이라 하니, 그 개벽이 무수한 변화와 순한의 끝에 이르면 비로서 무극(無極)이 열린다. 천상무극진기가 이와 같음이니, 모든 것이 시작이자 끝이다.’

 

 

무영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을 발했고 미소도 함께 지었다. 옆에서 연을 날리던 한살 어린 예준도 함께 웃었다. 그 웃음이 밝기란 무영보다 더 했고 그렇게 웃으니 그 아리따움이 여섯 살 아이라 하기에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무영의 한 손은 연을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은 예준의 손을 잡고 있었다.

 

 

허나, 무영은 검강천이 조심스럽게 한숨을 쉬는 것을 듣지 못했다.

 

-----

 

무영은 고인 눈물을 옷깃으로 닦았다. 책의 내용은 그날과 같은데 자신의 처지는 그날과 달랐다. 그날 그쯤의 시간에 멈춰 있는 듯, 햇살은 여전히 빛났고 계곡에 널려 있는 꽃들은 다투어 자신을 뽐내는데 지금 자신의 손에는 연이 없었고 예준도 없었다. 황금빛 글자는 여전히 빛났지만, 심법의 원리를 들려주는 사람은 달랐다.

 

 

‘아버지, 이제 시작해요. 지켜봐 주세요. 흑흑.’

 

 

무영이 마음속으로 끝내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무영의 마음속으로 흘렀던 눈물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천상천을 다시 찾을 때까지 그가 흘릴 마지막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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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옥은 바깥에서 볼 때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넓었다. 꼭 필요한 가구만 있어서 내부공간이 실제보다 넓어 보였다. 나무와 짚단, 진흙과 돌을 고루 사용해서 지었기 때문에 튼튼하면서도 아늑했고 온도와 습도도 알맞게 유지됐다. 세 개의 방과 열 명 정도가 함께 앉아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가옥의 중심에 자리했다. 마루 끝에는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주방이 자리했고 무엇보다도 무영의 방이 가장 잘 꾸며졌다.

 

 

방 세 개 중 류심환과 검무영이 각각 하나씩을 사용했고 삼혼이 하나의 방을 사용했다. 삼혼으로선 억울하지만 주군의 명을 따라야 했다. 기골이 장대한 편인 그들이 잠을 자기 위해 함께 누우면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였다. 마누라면 모를까 몇 십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낸 늙은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잠을 자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도혼의 불만은 그중에서 으뜸이었다. 뼈와 살이 타는 밤이 아니더라도 늙은 홀아비 냄새란 차라리 퇴비보다 못했다.

 

 

그래도 삼혼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주군이 무영에게 무공을 가르치라 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어디선가 꼭꼭 숨어 잠을 자야 했다. 주군의 곁을 떠날 수 없어 그가 어디라도 갈 경우에는 노숙은 기본이었다. 방이 한 개였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게다가 주군은 무영에게 무공의 기초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제한된 형태의 해방이었고 아이의 출신 성분이 한 때 마음에 걸렸지만, 교육의 목적이 아이를 통한 천하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 열두 시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이 아닌지 아쉬울 정도였다. 그들은 이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 수 있었고 그것에 주군의 배려가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다.

 

 

‘방 하나라도 늘리면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

 

 

욕심 같아선 후다닥 새집을 짓고 싶지만, 무영과 빨리 친해지기를 바라는 주군의 뜻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군의 삶을 생각하면 자신들의 투정이 가을날의 공기처럼 가볍기만 했다. 허나 그들은 무영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즐거움 때문에 이런 배려에 류심환의 복안이 하나 더 들어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류심환은 무영을 해독하는 과정과 천상천의 무공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그 근본이 되는 천상무극진기와 그에 근거한 천상지무의 원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해를 무영에게 전수하는 과정이 수련의 핵심일 터, 이를 곁에서 지켜보고 직접 체험하는 과정에서 그들도 검강천에 못지않은 무신의 경지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삼혼의 진보, 그것이 류심환이 그들에게 주려는 두 번째 보답이었다.

 

 

주군의 이런 배려까지 더해진 삼혼은 오늘도 즐겁게 무영과의 하루를 보냈고 무영도 자신의 미래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삼혼과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화월곡의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던 어느 날, 새벽부터 술시(戌時)까지 이어진 수련을 끝낸 후 호수에서 가볍게 몸을 씻은 무영이 류심환의 방으로 불쑥 찾아왔다.

 

 

 

“무영아, 무슨 일로 이곳에?”

 

 

류심환은 처음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무영을 보며 물었다. 헌데 무영은 주저하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뭘 말하려고?’

“왔으면 말해야지.”

 

 

류심환이 무영에게 다시 물었다.

 

 

“아저씨, 나 검 하나 만들어 주면 안돼요? 아버지 검은 너무 무겁고 나뭇가지는 잘 부러져. 나도 검 하나 갖고 싶어. 만들어 주면 안돼요?”

 

 

무영은 맑은 눈빛으로 류심환을 올려다봤고, 입을 삐쭉 내밀어 그 끝을 모음으로써 간절함을 드러냈다. 그를 데리러 온 사신이라도 그 표정을 보면 일단 검은 만들어주고 데려가는 것을 고민했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무영의 그런 모습이 류심환의 마음에 아련하게 전해졌다.

 

 

‘마음을 굳혔구나, 본격적인 무공수련에 들 것을.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과거를 털어냈어. 역시, 검강천의 아들다워. 그래, 이 순간부터 뒤돌아보는 일은 없는 거야.’

“알았어, 만들어줄게. 하지만 검을 들려면 오늘부터 삼혼 할아버지한테 검술의 기초부터 배워야 해. 알았지?”

 

 

류심환은 무영이 자신과의 무공수련을 원하고 있기에 삼혼을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네? 삼혼 할아버지 한 테요?”

 

 

그의 말에 무영의 눈이 커지더니 잠시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초롱한 눈은 왜 아저씨가 아니고 삼혼이냐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육포 하나 씹어 삼킬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영의 눈에서 의문이 사라졌고 다시 그의 표정도 밝아졌다. 류심환이 말한 것이면 그것이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다는 뜻, 어렸지만 무영은 그것을 이해했고, 무조건 따랐다. 지금까지 자신의 의문이 얼마나 쓸모없었는지 체득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삼혼 할아버지와 수련을 할게요. 근데 처음은 누구세요?”

 

 

무영이 다시 초롱해진 눈망울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자신도 삼혼과의 첫 무공수련 날 그들에게 똑같이 물었기 때문이다.

 

 

‘허허, 이것까지 나를 닮았다니!’

“불혼 할아버지. 그는 무림 역사 상 불공에서는 소림도 능가하는 고수야. 지금 당장 강호에 출도해도 아마 불혼 할아버지를 이길 자는 없을 걸. 불혼 할아버지 엄청 강한 분이야.”

 

 

그는 무영에게 불혼의 능력을 말해줬고 그것을 통해 무영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을 아쉬움을 털어내고자 했다. 무공 수련의 근본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상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이것이 없으면 가르치는 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배우는 자는 원하는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

 

 

“와! 그렇게 세요. 불혼 할아버지 다시 봐야겠다. 와!! 많이 늙은 줄만 알았는네, 그게 아니었네? 불혼 할아버지, 너무 멋있어!”

 

 

무영의 믿음이 류심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헌데, 그 받는 방법이 한 사람을 뻘쭘하게 했다. 많이 과장하는 무영의 말에 류심환 뒤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불혼이 허탈하게 웃었다.

 

 

“팔십을 바라보지만 그래도 아직은 팔팔해. 왜? 아닌 것 같아? 어, 그러면.. 그래! 무영아 이 팔뚝의 근육 좀 볼래?"

 

 

그가 도포를 걷어 올려 주먹을 불끈 쥔 채 팔을 구부려 알통을 만든 행동을 했다. 큼지막한 알통과 툭 튀어나온 핏줄이 30대를 방불케 했다.

 

 

“지랄을 해요, 지랄을! 저 팔 떨리는 것 좀 봐! 애쓴다, 애써. 알통은 개뿔, 살이 오래 돼 뭉친 거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는데, 이 영감탱이, 사형이라고 하나 있s는 것이, 원…”

 

 

도혼이 무영에게 잘 보이려는 불혼에게 면박을 줬다. 불혼을 놀려먹는 것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고, 그런 도혼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불혼의 넉넉함이었다.

 

 

“너… 이놈, 도혼아! 너라고 안 늙은 줄 아냐. 너도 칠십이야! 늙어 보이기는 니가 더 해!”

 

 

불혼이 도혼의 농에 씩씩거리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평상시면 이 정도 농은 그냥 웃고 넘기는데 오늘은 유독 강하게 맞받아쳤다.

 

 

“헐, 그럼 두 분 할아버지 엄청 늙은 거네. 아, 재미없겠다. 한숨 쉬는 거나 가르쳐주실 모양이네? 아, 이를 어쩌나?"

 

 

무영이 그들의 너스레에 더한 농으로 응답했다. 불혼과 도혼이 멀뚱해졌다. 둘 다 엄청 늙었다는 무영의 말에 그들은 더 멀뚱해져 무영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순간에는 한 숨이나 배울 뿐이라고 말한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심법부터 배워야 한단다. 쉼 쉬는 것, 한숨까지도 배워야 하지."

 

 

류심환이 무명 대신 무영이 한 말의 의미를 그들에게 설명해 줬고 불혼과 도혼은 그제야 무영이 했던 말의 의미를 파악했다. 그들의 얼굴에 경탄과 낭패감이 교차했다.

 

 

“쩝! 나 바보 됐네.”

 

 

도혼이 불혼을 보며 입을 다셨다. 그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으이그. 여기 바보 하나 더 있어.’

 

 

도혼은 넉살 좋게 웃고 있는 불혼을 보면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무영에게 허를 찔려 순식간에 바보가 됐지만 그래도 좋았다. 게다가 무영이 웃었다.

 

 

"하하, 시작해요. 할아버지."

 

 

무영이 마음을 열어 삼혼을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그들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간격도 사라졌다. 거의 70년에 이르는 세월과 경험의 차이를 넘어 믿음에 근거한 관계가 시작됐다.

 

 

“무영아, 네가 최고가 되는 날까지 우리가 지켜주마.”

 

 

불혼과 도혼, 그리고 속혼이 무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어린 주군에게 그랬던 것처럼.

 

-----

 

무영과 삼혼이 방을 나선 후 류심환이 창문 밖 천공을 올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이승까지 오는 길이 멀기만 했을 텐데 그 마음의 짐은 여기다 두고 가십시오. 무영을 고금제일인으로 키워낼 테니, 대신에 저의 말이나 선친들에게 전해주십시오.”

 

 

그의 시선이 천공의 한 언저리, 무한정의 공간에 홀로 떠있는 조각난 구름을 쳐다봤다. 못난 아들이 죽어 저승에 이를 때까지 검강천의 영혼에 노잣돈을 보내드리니, 부디 그곳에서 몇 평의 땅이라도 얻어 편안히 지내십시오. 살아서는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했지만 그곳에 가면 제가 두 분의 머슴이 되어 일각도 쉬지 않고 행복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날까지 맘 편히 계시고 이 분과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못난 아들의 이승 일과 저 아이에게 이어진 운명의 무게를 서로 격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날에 두 분을 볼 때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를 천 년 같이 보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저와 아이를.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이제는 신화라는 강요된 고독에서 자유로워진 검강천,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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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에 성공한 자들은 무영을 찾기 위해 무림을 속속들이 뒤지고 있겠지만, 이곳을 찾으려면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다. 그 동안 무영을 최대한 강하게 키워야 한다. 무공에 대한 욕심 때문에 기구한 부자의 운명 사이에 끼게 됐지만 나는 무영을 고금제일인으로 키워 약속을 지키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내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 어느 햇살 밝은 날 주린 배를 무로 달래고 있던 나에게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다가와 천하를 구해보지 않겠느냐고 세 명의 친구는 제안을 했다. 그들의 손을 잡고 부모를 떠나 무공을 처음 수련한 이곳에 그때의 나와 비슷한 무영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반복되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영을 고금제일인으로 키워내는 일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천하를 홀로 독행할 수 있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

 

-----

 

하북성은 화북(華北) 지방 북부에 자리한 성이다. 하북성 내 선화(宣化) 분지, 지산(冀山) 산지, 태행(太行) 산지, 하북(河北) 평원과 함께 화북지방의 다섯 개 지형구인 장북(張北) 고원에서 우측으로 백리 이상 들어가면 천애 고지의 비처, 화월곡이 있다. 사람은 고사하고 동물조차 왕래하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류심환과 삼혼, 무영이 자리를 잡았다.

 

 

그 중심에 한 채의 모옥이 자리했고 그 왼편에 조그만 인공호수가 화월곡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새로 물을 받아 넣었는지 그 밑바닥이 보일만큼 투명했다. 인공호수의 수면 위로 바람이 낙엽 하나를 떨어뜨리자 그곳으로부터 물결이 일어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 물결 위로 투영된 오백 장에 이르는 인공절벽이 물결을 따라 요동치며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사실 류심환은 자신이 무공을 수련한 곳이었던 이곳에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검무영을 위해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그들은 가옥의 앞뒤에 자리한 수백 평의 연무장을 보다 다양한 장치로 보수했다. 한 달 동안 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했으며 류심환은 무영의 치료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무영은 이곳에 도착한 이후에도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영의 상태는 잘 유지됐고 삼혼이 류심환의 지시로 화월곡의 심처를 새롭게 단장할 동안 류심환의 보살핌 속에 점차 상태가 좋아졌다. 그동안 류심환은 이틀에 한 번씩 무영의 혈도를 통해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천상무극독에 중독된 그의 신체가 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다행히 검무영은 검강천으로부터 벌모세수와 내력을 전수 받아 그의 신체와 기혈, 맥박 등은 생각보다 기초가 단단했다.

 

 

특히 그의 단전에 자리하고 있는 천상무극진기의 기정은 그 깊이를 알기 힘들 만큼 내공의 보고였다. 어쩌면 검강천의 최후가 너무 허망했던 이유가 이것에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내공을 상당 부분 무영의 단전에 저장시켜 두었음이 틀림없었다. 천양천단의 효능도 능히 그를 절정 고수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천상무극독과 본류가 같아 서로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의 그에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무영의 치료를 막았고 지금처럼 류심환이 빙 둘러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류심환의 세심한 배려와 무영 자신이 부여받은 선천지체의 잠재력 때문에 그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됐다.

 

 

류심환이 판단하기에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보름 정도 지나면 그가 오랜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제대로 된 음식과 물을 먹고 스스로 운신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를 것으로 보였다. 이는 무영이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이 돼야 하는 운명의 첫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그에 따라 류심환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류심환은 무영의 회복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그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가르쳐야 가장 효율적일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일곱 살 때 삼혼이 찾아와 천외천의 문을 열 후인으로 자신을 발탁한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직은 어리지만 이 정도의 아이라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리가 없어. 그날의 아이의 눈빛도 그랬어.’

 

 

류심환은 그가 깨어났을 때 무공 수련보다 제일 먼저 그가 처해 있는 현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면 하루라도 먼저 알아야 충격으로부터의 회복도 그만큼 빠를 것이고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아이도 아니었다. 류심환은 정면돌파를 택했다.

 

 

‘고금제일인로 키우려면 어쩔 수 없어.’

 

 

류심환은 그것도 다 아이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조력자나 지원 세력이 없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아이는 천하제일인이 아니라 고금제일인이 돼야 하는데, 그 험난한 길을 제대로 가려면 아이의 흔들림 없는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게다가 그가 복수를 위한 검을 닦는 동안 역천의 주모자들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천상천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기에 아이의 의지는 그의 천재성보다 강하고 커야 했다.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이란 사치나 다름없다.

 

 

‘주어진 운명이 혹독하다면 극복하는 과정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삼혼은 그런 류심환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는 하늘 같은 존재이고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이유다. 주군은 진정으로 천하를 구할 사람이었고 그럴 능력도 갖춘 사람이다. 허나 주군은 하루가 멀다 하고 검무영을 위해 타혈을 하고 진기를 불어넣는 추궁과혈에만 매달렸다. 주군은 오직 아이에게만 집중하니 신하된 도리로써 그들의 속이 타들어 갈만 했다. 게다가 아이는 천상천의 적자였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어. 헌데 저 아이마저 강호로 나가면 주군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의 마음은 신하된 도리로서 어버이 같은 근심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바람은 그저 불어가는 것이었고, 옷깃에 스며들어 서늘함을 남겼어도 가슴에는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됐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주군의 삶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까?’

 

 

그들은 일이 잘못된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이 나이 먹어 죽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가슴앓이로 속이 새까맣게 타서 죽을 것이라 확신했다, 특히 도혼은.

 

 

‘고금제일인이 지금의 주군인데, 하는 일이 검강천 아들의 양육이라니. 이건 말도 안 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아이의 상태에 대해 신경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스스로를 부정해 봤지만 그럴수록 아이를 보는 자신들의 시선이 처음과 같지 않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아이는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매력을 발산했으며 언제부터인가 그들도 자신의 시선이 아닌 주군의 시선으로 아이을 보기 시작했다.

 

 

‘이래서 결혼하면 안 돼. 아이는 골치 아픈 아편 같은 거야.’

 

 

도혼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 주군에 그 신하였다. 부부로 오래 살다 보면 닮는다 했는데 자신들도 주군과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에 아이를 보는 시각마저 주군을 닮아 있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 서로 죽이 잘 맞는 사이를 뜻함)라 해도 이만은 못할 것이니, 그들은 그래서 속이 더 탔다. 주군의 삶이 점점 주변부로 밀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류심환은 그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했다. 이미 무림에 나서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그들에게 넘칠 만큼 미안했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은 무공을 익히기 위해 부모님이 돌림병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데도 곁에 없었다. 가난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주려 했던 부모님이었는데 자신은 무공에 대한 욕망 때문에 부모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천하의 불효자였다.

 

 

‘살아 있는 동안 그 대가의 일부라도 치러야지.’

 

 

류심환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천상천을 찾아 검강천에게 비무를 요청하면서까지 무공의 끝에 이르고자 했던 것은, 무공의 완성이 임종마저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무공에 미쳤던 자의 자식된 도리로써 유일한 속죄의 길이라 여겼고, 끝에 이르되 행하지 않음이 자신의 불효에 대한 스스로의 형벌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런 그라고 해도 그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모른 채 할 수만은 없는 일, 류심환은 고민을 거듭하다 한 가지 복안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무영이 본격적으로 무공 수련에 들어가게 되면 삼혼을 그에게 붙이는 것이 복안의 출발이었다. 자신을 고금제일인으로 인도해 혈난의 천하를 구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면, 그는 이 복안이 모든 것을 풀어줄 정답에 가장 근접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자신 대신에 아이를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으로 키워내 천상천의 외도를 막아낸다면 그 과정에서 그들의 타들어가는 속내도 어느 정도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보름 정도만 더 지나면 무영이 깨어날 것이고, 그 며칠 뒤면 무공 수련에 들 수 있다.

 

 

'삼혼에 대한 미안함은 그것으로 대신하자.'

 

 

문득, 시원한 바람 한 점이 얼굴을 스쳤다. 호수 옆에 심어놓은 사과나무에서 잘 익은 향기도 묻어왔다. 청명지수를 거쳐 시원한 기운을 담아오니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잔잔히 퍼지는 물결은 아직도 향기에 빠져 일렁이고 있었다. 그 위로 반짝이는 것은 가을날의 햇살인지, 혹여 검강천이 아이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나 한 것인지, 무영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코끝으로 스미는 아비의 따뜻한 숨결인 것 같기도 했고 저승에서 이승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아비의 걱정 같기도 했다. 바람의 일부는 그의 머릿결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에게서 맑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류심환을 향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공 수련을 하고 싶어요.”

 

 

말하는 아이의 눈에는 깊은 심연에서 솟아오른 듯 차고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고 혼수상태에서 빠져나와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천상무극독에 중독된 까닭에 육체보다 뇌가 최소 일주일은 먼저 깨어났을 터였다. 아득한 어둠의 심연에서 홀로 싸웠을 일곱 살 아이의 엄혹한 의지 덕분에 류심환의 고민이 하나는 줄었다.

 

 

"아저씨, 나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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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을 뒤엎는 작업은 여덟 시진 넘도록 계속됐고 그것이 성공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자 검강인의 눈빛이 갈수록 강렬해졌다. 오랫동안 준비했다고 해도 하늘을 뒤엎는 작업의 성공을 어느 누군들 장담할 수 있을까? 역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끝날 때까진 추호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 처음 계획한 대로 진행됐고 이제 거의 그 끝에 이르려 하지만 검강천의 죽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역천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계획대로 되고 있지만, 방심은 금물이야.’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검강인은 역천이 성공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낮말은 해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자세로 지금까지 은밀하고 치밀하게 그러면서도 속전속결로 역천을 진행했다. 천상천의 천주가 아닌 외궁 궁주로 밀려난 후, 지난 삼십 년 동안 치욕을 먹고 살았다. 더 이상 먹어치울 치욕이 없어졌을 때, 하늘을 향해 검을 들었다. 역천이 성공 직전에 이른 것은 지난 30년의 준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 시작은 이랬다. 먼저 천후 금미령이 검강천을 중독시키게 만들어 내공을 약화시켰고, 다섯 명의 호위무사와 열두 명의 친위대를, 내궁의 대총관이자 천상천의 3장로인 검강윤과 오대당주인 오천협룡을 필두로 해서 외궁 소속 칠대 전주, 암살대와 결사대 및 추살대를 동원해 내궁을 초토화시켰다. 그가 극비리에 키웠던 열두 명의 살천령(殺天靈)의 활약은 눈부셨다. 내궁에서 장로들 다음으로 무공이 강한 열여덟 명의 호법 중 일곱 명이 그들의 손에 최후를 맞았다.

 

 

검강천이 천상천의 미래로 키우고 있었던 12명의 제마령들을 자신에게 넘어온 내궁의 장로들과 외궁의 장로들을 동원해 제압했고, 미래의 살수로 키우기 위해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가장 껄끄러운 천상천의 비밀병기 삼재(三在)를 제일 먼저 포섭할 수 있었던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것이 역천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검강천의 마지막 추종자인 다섯 명의 장로와 열한 명의 호법들을 제거하면 역천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자신은 다시 천상천의 내궁으로 입성할 것이며 당연히 물려받아야 했었던 천주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검강인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 천궁의 결전이 끝나면 천상천은 내 것이야!'

 

 

침착함을 유지하던 검궁인의 눈빛이 조금씩 타올랐다. 그는 내궁에 위치한 제마전으로 오는 동안 삼십 년 전의 치욕을 걸음걸음마다 둔탁한 발자국으로 남겨놓았다. 그것은 천상천 역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꾸는 기념비적인 것들로 기억되고 칭송될 작은 증거들이었다.

 

-----

 

천상천 내궁에 위치한 천주의 거처, 천궁(天宮). 그 안에는 내·외궁의 주요 당직자들이 도열해 있고 천상천 32대 천주인 검궁현이 태사의에 앉아 있다. 그 앞에 두 명의 건장한 청년이 서있다. 한 사람은 육 척 장신에 구리빛 피부, 딱 벌어진 어깨, 단단해 보이는 골격과 수련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고 단아한 눈빛을 가졌다. 누구라도 한 번 그를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기도가 느껴졌다.

 

 

다른 한 명도 외모 비슷했으나 느껴지는 기도는 유연했다. 허나 그의 눈빛은 총명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검미는 날카로웠으나 콧날의 선이 매끄럽고 입술이 여인의 그것처럼 얇고 붉어서 전체적 조화를 이룬 미남의 전형이었다.

 

 

 

 

“본 천주는 십 년 동안 앞의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학식과 인품, 업적과 무공 수련과장까지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켜보았다.”

 

 

마침내 검궁현이 입을 열었다.

 

 

“천무대제(天武大帝) 검강인은 그 학식이 역대 천주 중 으뜸이라 할 만하고, 모든 궁인들이 그를 따를 정도로 따뜻한 인품까지 지녔다. 이는 은둔의 문파인 천상천의 천주로써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젊은 궁인들의 무공까지 한 단계 발전시킨 것도 이에 못지않은 업적이라 할 수 있고.”

 

 

검궁현의 말이 이에 이르자 검강인의 눈빛이 미세하게나마 떨렸다.

 

 

“고검천존(孤劍天尊) 검강천은 학식 면에서 검강인에 뒤지고, 모든 궁인들과의 관계도 아직 완전해 보이지 않는다. 지간 십 년간의 노력에 비하면 적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이는 검강천이 넘어야 할 숙제임에 틀림없다. 업적 또한 검강인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검강천은 검궁현의 얘기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데도 눈빛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오늘의 행사가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무나 무심한 그의 눈빛이 표정과 어우러져 마치 방관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허나, 천상천의 천주라 함은 고금 제일을 의미한다. 천기를 보면 가까운 미래에 간단치 않은 폭풍이 무림에 닥칠 것이 확실하다. 이는 역천마곡의 부활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말이 이에 이르자 천궁 내의 궁인들에게서 약간의 동요가 일어났다. 검강인도 마찬가지였고, 검강천도 처음으로 눈빛에 변화가 일어났다.

 

 

“위기는 천 년 전보다 더 클 것 같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여기서도 천 년 전의 역촌마곡보다 더 강한 마기가 느껴지니 천하는 또 한 번 피에 물들 것이다. 천상천 본연의 임무가 천하의 안전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 후임 천주를 지명하겠다. 이에 이의가 있는 자는 반대를 말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천의 규율에 따라 이후로 어떤 반대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더 강해진 역촌마곡이 부활했다는 검궁현의 말에 궁인들이 잠깐 동안의 동요를 드러냈지만, 이내 검궁현의 말에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후임 천주를 지명하겠다는 검궁현의 말에 검강인의 눈빛이 간절함과 그 이상의 무엇을 드러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의 친부인 검궁현과 눈을 마주쳐 자신의 강한 의지를 표출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어 마음을 누르며 다음의 말을 기다렸다.

 

 

오히려 그의 오른쪽 뒤편 1장의 거리에 서있는 금미령의 시선이 검궁현의 두 눈을 향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검강인의 뒷모습과 검궁현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는 검강인과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알아챈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차대 천주의 부인으로 내정된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본 천주는 나를 이을 천상천의 제 32대 천주로써 검강천을 지명한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검강천이 호명됐다. 동시에 한 마디의 분명한 신음과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한숨, 당황한 몇 몇 궁인들의 소란스러운 음성들이 튀어나왔다. 신음의 주인공은 검강인과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금미령이었으며, 한숨은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낀 검강인이 내뱉은 것이었다. 검강천은 차대 천주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검궁현을 올려다보았다.

 

 

‘왜, 나를? 모든 면에서 검강인에 뒤지는데?’

 

 

검강천은 객관적으로 볼 때, 검궁현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들 천주의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겠느냐만, 자신이 아니라 검강인이 천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의문을 표시한 검강천의 눈빛을 일견한 후에 검궁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는 천주의 가장 큰 덕목이 무림의 위기를 구하는 것이어서, 다른 무엇보다도 천상지무의 마지막 초식 천상귀원검(天上歸元劍)의 성취 여부를 최종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 비록 검강인이 내 적자이나, 성취의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이점에서 검강천에 뒤졌고…"

 

 

검궁현이 검강천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 계속 이어졌으나, 검강인의 눈빛은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검궁현의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격하게 흔들려 폭발할 것만 같았던 반발의 감정을 완벽하게 억눌렀다. 그러나 그와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금미령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정도의 습기가 차올랐다. 검궁현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차기 천후로 내정된 여인으로서 검궁인을 편들 수 없었다. 결정은 내려졌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니, 자신의 남편은 검궁인이 아닌 검강천으로 결정됐다.

 

 

“다만 검강인을 외궁의 궁주로 임명하여 역천마곡의 부활을 대비하고자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천주의 권한으로 외궁의 강호 출입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겠다. 검강인 외궁주는 이에 대해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는 천주의 자리 못지않게 중요한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천상천의 신화가 외궁의 활약에 있다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검궁현이 상당수의 예상과는 달리 검강천을 천주로 임명하면서, 동시에 검강인에게도 기회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 천창천 천 년의 율법의 한 축을 살짝 비틀었다. 내궁 내 비밀조직인 암중천만 할 수 있었던 무림 출입을 외궁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림 출입을 허용하겠다고?’

 

 

검감윤이 율법의 규제를 일부 풀어주기로 하자, 한없이 가라앉기만 하던 검강인의 눈에서 미약하나마 한 줄기 빛이 번쩍했다 사라졌다. 빛의 잔영이 남아 있는 검강인의 눈동자엔 붉은 실핏줄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삼가 천주의 장남, 검강인이 명을 받들어 천주의 명을 반드시 실행하겠습니다.”

 

 

검강인이 무릎을 꿇으며 외궁궁주로서 밀려난 한을 구배에 담았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금미령은 검강인의 구배에서 갈수록 커질 한이 분명히 보였다. 검강천은 아무 말없이 검강인의 구배를 지켜보았고, 검궁현은 자신의 결정이 정말로 현명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검강인 말한 ‘천주의 장남’이란 말이 검궁현의 귓속에서 맴돌았고, 구배를 올리는 검강인과 금미령의 마음속으론 아홉 번의 다짐이, 치욕의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검강인은 이제 금미령과 검강천의 혼례를 막을 방법이 사라졌고, 그 다음에 일어날 일들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다.

 

 

‘반드시 저 자리에 오른다. 필요하다면 뭐든지 할 거야. 내 여인을 지키지 못하니, 나는 죄인이며 남자로서 최악이야. 필요하다면 하늘이라도 벨 거야. 반드시 저 자리에 오를 거야!'

 

 

섬뜩한 검강인의 저주가 결코 풀릴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각인될수록, 그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미령,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돌아올 테니..’

 

 

구배를 마친 검강인은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는 치욕과 분노, 무력감을 억누르며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검강천의 품에 안기는 금미령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검강천은 본 좌 앞으로 나오라.”

 

-----

 

그 순간부터 역천은 삼십 년을 거슬러 왔다. 특히 검강천이 금미령과의 사이에서 그토록 갖지 않으려 했던 아이를 그의 두 번째 부인 취설란이 출산한 7년 전부터 역천의 작업은 더욱 빠르게 진행됐다. 그리고 마침내 외궁의 궁주로 밀려났던 바로 그곳, 천궁이 바로 검강인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상황은 어떤가?”

 

 

검강인의 음성이 처음으로 떨렸다. 지난 삼십 년 내내 이 순간만을 기다리지 않았던가. 자신은 천상천의 적자였고, 자신을 밀어낸 검강천은 그 출신도 모른 채 외궁에서 내궁으로 굴러 들어온 혈혈단신 고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사랑했던 여인 금미령마저 천의 율법에 따라 검강천의 부인이 됐고, 지난 30년 간 단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을 이제 바로 잡으려 한다.’

 

 

가슴에 담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그날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지난 30년이란 좌절과 분노, 살의로 뒤범벅된 폭발 직전의 활화산이었다. 외궁을 역대 최강의 상태로 끌어올렸던 지난 30년이란 치욕에 대한 엄혹한 와신상담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에 이르려 한다.

 

 

“천궁의 내전에서 선발대가 대장로와 고장로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나머지 세 장로와 열한 명의 호법은 외궁의 일곱 장로와 열두 호법, 칠대 전주와 12명의 살천령이 맡고 있습니다. 승부는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내궁 3장로와 내궁의 5대당주, 부총관과 일곱 명의 전주, 열여덟 명의 제마척살대가 6개조로 나뉘어 검강천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독에 중독된 검강천과 무영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천상천 외궁의 삼호법 광문요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 했다. 그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검강인의 욕망은 이미 천주의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삼재(三在)에게 뒤처리를 맡긴다. 검강천과 무영의 죽음을 확인하라. 광 호법, 수고했다.”

 

 

천상천의 절대병기까지 동원하면, 귀찮은 보고도 더 들을 필요가 없고 천궁으로 들기만 하면 된다. 귀신보다 더한 세 명이 천궁 내 어둠의 얼룩으로 숨어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주 잠깐 어둠의 일부가 흔들리기는 했다. 그러나 모두 다 어둠에 속해 있어서 그것이 어둠이 흔들리는 것인지, 어둠에 바람이라도 불어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자들이야. 저들을 제일 먼저 설득하지 못했으면 역천은 실패했을 수도 있어.’

 

 

검강인이 그들이 머물렀던 곳을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역천은 막을 내렸다. 이제 변수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전까지의 천상천은 이후부터의 천상천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이 있을 것이니, 검강인이 역천의 끝을 선언했다.

 

 

“천궁으로 옮긴다.”

 

 

이제 가는 것이다. 드디어 내가 밀려났던 회한의 그곳으로 이제는 주인이 되어 들어간다. 판단착오로 볼 수밖에 없는 타의에 의해 밀려났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 자리에 돌아왔다. 이제부터 천 년 전설의 주인은 바로 나다. 천상천 제34대 천주이자, 모든 것이 바뀔 새로운 천상천의 1대 천주는 바로 나, 검강인이다.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

 

 

하남성, 성도 정주(鄭州)의 중심에 자리한 청운장. 백면서생들이 모여서 학문을 논의하는 이곳에서 무림인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역천이 일어났다. 이곳은 모든 무림인이 찾았으나 끝끝내 찾을 수 없었던 천 년 전설의 절대 문파, 은둔의 신화인 천상천의 내궁으로서, 유명 학자들이 꾸준히 배출되고 있는 청운장이었다.  

 

 

전설은 강호 안에 있었고, 다만 등잔 밑이 어두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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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독을 극음지기로 얼린 후 각 혈도마다 공간을 만들어 극음지기와 약간의 극양지기를 축적시켜 놓는 것뿐이다. 향후 얼린 독이 녹아 다시 온몸으로 퍼진다면 각 혈도의 주변에 축적시켜 놓은 극양지기가 급한 것은 태우고 나머지 대부분은 극음지기가 얼릴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 이후 아이가 천상무극진기를 익혀 남은 독을 스스로 풀어야 한다.’

 

 

다행히 그는 오년 전 검강천과 겨루면서 자신의 몸에 내재해 있는 극음지기를 확인했고 그가 보여준 초식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파천태극무검을 대성했고 그 결과 극양지기까지 얻게 됐다. 천상지무와 당시 그가 익히고 있던 파천태극무검과 원리가 동일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삼혼과의 삼혼지문의 비무를 펼치면서 파천태극무검의 원리를 파악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파천태극무검은 천상지무의 원리는 닮았다.

 

 

‘허나, 닮음은 뭐고 다르면 또 무엇이랴. 뭐인들 상관 있나. 약속만 지킬 뿐이다. 그거면 돼,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자신의 내력을 오성으로 내려 극음지기의 양을 줄였고 대신 여유가 생긴 2성의 내력에는 극양지기를 실었다. 지금부터는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단전의 경우 힘의 논리가 통했지만 혈도와 혈맥의 치료는 화타나 편작의 의술처럼 정밀하면서도 신속해야 한다.

 

 

또한 진기의 양이 일 리라도 넘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어 극도로 정밀해야 한다.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하는 극도로 정밀한 작업이었다. 그는 단전에서 한 손을 떼 중요 혈도를 짚어가며 극양지기를 밀어 넣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극음지기를 아이의 기경팔맥을 통해 십이경략과 주요 혈도로 흘려보냈다.

 

 

‘치료는 이제부터야. 극양지기로 혈도 주변과 혈맥에 퍼져있는 천상무극독을 태우고 그 일부와 아이의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만 남겨두고 대부분 얼려버릴 기경팔맥의 주변에 극음지기를 내장시켜야 해.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데 그 작업이 극도로 정밀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삼혼과 저들의 일전 중에 작은 진동이라도 이곳까지 밀려오면 이후의 치료는 불가능 해. 결국…’

 

 

삼혼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다. 극도로 정밀한 치료를 무사히 치르려면 그들은 상대를 완벽히 압도해야 할뿐만 아니라, 충돌의 파장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초식을 사용해야 한다. 삼혼이라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이 사실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결국 그는 또다시 그들에게 힘든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

 

‘죽을 맛이군… 할 수 없지.’

 

 

이왕에 엎질러진 물. 이번에는 아예 넘치도록 따라야 했다. 그 결과는 그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

 

 

삼혼은 오천협룡의 세 번째 합공에 대항해 막 팔성의 공력으로 절초를 날리는 중이었다. 상대는 자신들의 합공이 불혼이 펼친 기막에 튕겨나가자 만만치 않음을 감지한 듯 전력을 다해 두 번째 합공을 펼쳤다. 하지만 이도 속혼의 도움을 받은 불혼이 막아냈다. 바로 그 순간이 류심환이 무영의 단전치료를 막 끝내는 순간이었다. 도혼은 자신을 무시하는 다섯 놈들에게 ‘늙은 사이비 땡초 말고 나한테 덤벼’라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헌데 일이 꼬이려는 것인지, 상대는 이를 알기라도 한 듯 세 번째 공격은 다섯 명이 각각 자신의 독문무공을 펼쳐 그 조합으로 이루어진 합공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원리와 초식으로 이루어진 한천마결을 펼쳤다. 검, 도, 장, 선, 지의 다섯 무공이 만들어낸 음기는 같았으나 한천마결의 빙혈류가 초식의 흐름에 따라 천지 간에 존재하는 모든 방위를 거치면서 절대 음강으로 발전했다.

 

 

그 위력이란 수십 장 두께의 절벽은 그대로 관통하며 얼려버릴 정도로 막강한 극강의 절대 음기였다. 검강천이 펼친 것과는 또 달랐다. 삼혼이라 해도 이 초식을 주군이 있는 곳까지 충돌의 여파가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때 주군의 전음이 들렸다. 주군의 전음이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조종처럼 울렸다.

 

 

 

 

 

[상대를 제압하되 출동의 여파가 이곳까지 미쳐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것만은 피해야 합니다. 힘들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전음의 내용은 이랬고 주군의 전음을 들은 불호노가 속혼은 상대의 합공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강력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주군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고래고래 소리만 지를 뿐,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도혼도 입을 다물었다.

 

 

‘허면, 파천무형검법 뿐이야.’

 

 

불혼의 생각은 이랬고.

 

 

‘으아! 주군도 빨리 좀 말씀해주시지! 제기랄, 현의천도류에서 방법을 찾아야 해.’

 

 

도혼의 생각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주군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무엇이든 선택해서 펼쳐야 했다. 충돌의 파장을 최대한 줄여보겠지만 성공에 대한 보장은 할 수 없었다. 류심환 만큼 삼혼도 백척간두에 서있는 느낌을 받았다.

 

 

'파장이 일어나면 먹어서라도 막아야겠지.'

 

 

불혼의 생각이 불안하게 이어졌고.

 

 

'몸을 던져서라도.. 중요 부위만 확실히 방어하면서..‘

 

 

도혼의 생각도 그 끝이 불확실 했는데, 순간 속혼이 초식을 거두며 자신의 몸을 상대가 펼친 극강의 절대 음기를 향해 날렸다. 그 무모함이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했다.

 

 

[주군의 명이라.]

 

 

“사제!!”

 

 

불혼이 급히 초식의 운결을 거두면서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야! 그건 내가 하려고.. 저 놈의 성미하곤!’

 

 

도혼도 막 펼치려 했던 초식을 다급히 거두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주군의 일이라면 막내란 놈은 언제나 저랬다.

 

 

퍽! 쑤욱!

 

 

다섯 가지의 음기가 인간의 몸과 충돌하거나 박혀 관통하는 소리가 났다. 속혼이 자신의 몸 다섯 군데로 상대의 초식을 막았다. 충돌에 따른 여진을 만들지 않고 불혼과 도혼이 상대를 제압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생각을 하자 그는 자신의 몸을 날려 상대의 초식을 아예 흡수해버렸다.

 

 

퍽!퍽!퍽!

“크으윽!”

 

 

비명을 지르는 속혼의 옆구리와 어깨, 허벅지가 두부처럼 뚫렸고 연이어 가슴에 장풍과 지풍이 만들어낸 빙강에 맞은 속혼의 몸이 속절없이 밀려나갔다.

 

“사제!!!”

 

 

도혼이 소리쳤다. 손을 뻗어 그를 잡거나 자신의 공력을 보내 그의 몸을 감쌀 수도 없었다. 두 눈이 부릅떠지고 가슴에선 극도의 염려가 일었으며 가늠할 수 없는 살의가 솟았다. 그는 속절없이 날려진 속혼을 보며 자신의 도장에 전 공력을 실었다. 상대를 단 한 방에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안 돼! 사제의 뜻을 생각해! 잔말 말고 파천여의일천류를 펼쳐!]

 

 

불혼의 강력한 전음이 그의 고막을 강타하자 극도의 살의에 무작정 날아오르기 시작한 도혼의 신형이 공중에 뜬 상태로 잠시 멈췄다. 그의 시야에 수십 번 구르고 튕기며 5장이나 날아간 속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죽었잖아..”

 

 

마치 혼잣말 하듯 도혼이 불혼에게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은 속이 텅 비어있었다.

 

 

[살아 있어. 알잖아. 난 천룡승천일검류야. 너도 시전해, 어서!]

"합!"

  

불혼의 몸이 둥실 떠올라 오천협룡을 향해 발사됐다. 공중에서 중간쯤 떠 있는 상태로 머물러 있던 도혼도 자신의 시야 끝에 널브러져 있는 속혼을 일견 한 뒤, 불혼에 맞춰 공중에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차가운 이성이, 다급한 사정이, 주군의 부탁이 도혼을 지배했다. 허공중에 뜬 상태에서 어떤 것에도 탄력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날아가는 모습이란! 그것은 마치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비행물체 같았다. 새라고 해도 이에 이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을 본 오천협룡의 눈빛이 만족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한 놈을 보내고 흡족한 마음으로 막 네 번째 합공을 펼쳐 대결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사이비 도인 같은 놈이 잠시 공중에 떠 있다가 그 상태에서 그대로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이란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그 속도가 빛살 같았다. 물론 떨거지 땡초도 그들로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런 경공이 가능하다니!’

‘이걸 믿으라고?’

 

-------------------------

 

 

류심환에게도 속혼이 오천협룡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 치명상을 입고 그 충격에 오 장 정도 날려 땅에 부딪쳐 수십 번을 구르고 튕긴 후 그대로 혼절한 모습이 시야의 끝에 걸렸다.

 

 

‘속혼, 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그는 시선의 끝에 겨우 걸려 있는 속혼에게서 한 가닥 시선마저 거두며 가슴 저며오는 그의 희생을 자신의 기억 속에 묻었다. 이것으로 빚이 또 하나 늘었다. 속혼은 죽지 않았다. 그것이면 됐다. 그것만 기억 속에 각인시켜 두면 됐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서 추호의 빈틈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극음지기와 극양지기가 아이의 주요 혈도와 혈맥에 다가가고 있었다.

 

 

‘주요 혈도와 기경팔맥 주변의 독을 극양지기로 태운 후 생긴 공간에 다른 것이 들어서기 전에 남은 극양지기와 모든 극음지기를 저장시켜야 해.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면 지금까지의 치료는 다 허사가 돼. 어떤 실수도 허락되지 않아.’

 

 

추호의 틈도 보여서는 안 되는 이 찰나의 순간에 아이의 생명과 검강천과의 비무와 그에 따른 깨달음, 죽음으로 부탁한 아비의 청인 오년 전의 약속과 조금 전 속혼의 희생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결정된다. 그래야 아이가 살아 깨달음의 대가를 치룰 수 있고 자신은 아이를 천하제일인으로 키워 검강천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꺼이 생명도 받치려 했던 속혼의 희생도 의미를 갖게 된다. 이번 찰나 지간의 치료에 그 모든 것이 결정된다.

비록 이것도 임시치료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성공시켜야만 과거도 살릴 수 있고, 미래도 의미를 갖게 되며 지금 이 순간의 모든 노력과 희생이 비로소 둘을 연결할 수 있다.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없어.’

 

 

류심환은 극도로 집중했다. 그 찰나 지간만 생각했다. 극음지기와 극양지기가 모든 혈도와 혈맥에 있는 천상무극독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선 독과 두 지기의 접점들만 보였고 다른 어떤 것도 그의 의식 속에 자리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자신마저 잊었다. 그렇게 그는 뜻밖의 이유로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신기하게도 극도의 집중이 무아의 경지로 이어졌다.

 

 

류심환이 무아경지에 이르는 순간 무영의 주요 혈도와 혈맥 주변에 있던 천상무극독이 극양지기에 타 들어갔고 미세하지만 독이 사라진 곳에 공간이 생겼다. 그것은 허공중에 무엇이 터지거나 타면 그곳이 순간적으로 진공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무아지경의 류심환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경이로움은 그 다음에 있었다. 선천지체의 생존본능이 보여주는 위대함이 남아 있었다. 스스로 일어나 필요한 것을 찾아가는 질긴 생명력의 원천이 류심환의 극음지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극미한 공간으로 그의 의식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아이의 몸이 극음지기를 불렀다. 무아지경에 이른 류심환의 영혼이 무영의 몸에 자리한 본능을 깨웠고, 아득히 깊은 심연 속에 머물러 있던 어미의 뱃속부터 자리한 선천지체의 생존본능이 그의 무아지경에 반응해 스스로 깨어났다. 류심환은 무아지경 속에서 또 하나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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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혼의 천룡승천일검류와 도혼의 파천여의일천류가 오천협룡이 펼친 네 번째 합공, 한천무극빙혈류의 극음의 강기들을 삼켜버렸다. 두 합공이 절대적인 위력을 가졌기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변 몇 십 장은 폐허가 되고 인근 몇 십 리 안에 사는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났거나 엄청난 낙뢰가 떨어졌다고 느꼈음이 옳았다. 그래야 맞았다.

 

 

헌데, 오천협룡의 생각과는 다르게 폭음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충돌의 파장도 크지 않았다. 그들은 한천마결의 제4초, 한천무극빙혈류를 펼쳤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펼친 갑작스런 합공에 한천무극빙혈류가 통째로 삼켜지는 것이 아닌가. 한천마결이 어떤 것이더냐. 그 네 번째 초식인 한천무극빙혈류 또한 무엇이더냐.

 

 

선조인 오천협이 천상천을 탈출한 뒤 오백 년을 갈고 닦으며 혈족 간의 혼인까지 강제해서 태어난 한 형제만으로, 그렇게 오백 년을 한결 같이 노력해 완성한 무공이지 않은가. 당연히 천상지무를 빼면 이것을 능가할 무공은 없어야 했다. 그들은 오백 년을 그렇게 믿었고 수련해왔고,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헌데 그 믿음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며 떨거지 같은 땡초와 얼치기 무당 같은 도장의 합공이 자신들의 초식을 막은 것이 아니라, 아예 삼켜버렸다. 바다 속으로 빠져든 돌들이 이러했을까? 그리고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삼룡과 사룡, 오룡의 몸이 수만 개로 조각나 흩어지는 것과 이룡과 자신의 몸에 수천 개의 구멍이 뚫리며 서있던 자리에서 일 장정도 밀려난 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는 사실을 일룡은 기억하지 못했다.

 

 

지랄 맞게도 사제들의 몸을 산산조각낸 것은 그들이 펼쳤던 한천무극빙혈류의 파편들이었다. 천상지무의 초입에 이른 한천무극빙혈류가 근원을 근원도 알 수 없는 단 두 명의 합공에 삼켜지는 것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오백 년 한이다. 그 피 끓던 은둔의 슬픔이요 가족과 잠자리를 같이 했던 치욕의 세월이다. 그런 오백 년이다.

 

 

‘나는 죽었어도 죽을 수 없다.’

 

 

---------------------------

 

 

류심환이 무영을 안고 일어섰다. 불혼과 도혼이 속혼에게 달려갔다. 산서성 외딴 이름 모를 산길에서 천년 전설은 새로운 모습을 잉태했다. 그것은 전설 밖에서 죽었으나 그 안에 군림하면서도 자유롭지 못했던 절대자의 죽음과 그 전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다시 전설 속으로 돌아갈 절대자의 아들과 그 사이의 간격을 완벽하게 메워줄 한 사람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고 그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그 순간에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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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심환을 추적하던 천상천 제3장로 검강윤과 현무당을 맡고 있는 당주들인 오천협룡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신형을 멈췄다. 그 멈춤이 너무 급작스러워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수백 리를 미친 듯이 도망치던 상대가 갑자기 멈춰서 자신들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어라? 왜 이래, 이 자식?”

 

 

검강윤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이 의아했다. 그것도 심하게 의아했다. 지금까지 아이를 안은 상태에서 너무 잘 달렸던 놈이, 그것도 아직 한참은 더 달릴 것이라 생각했던 놈이 갑자기 멈추더니 아예 돌아서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죽어라 도망가야 할 놈이 할 짓은 아니었다.

 

 

‘지쳤나? 아니면 무영이 죽었나?’

 

검강윤은 몇 가지를 가정할 수 있겠지만, 현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고 오천협룡까지 더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하! 더는 도강갈 수 없었군. 그래서 죽으려고, 큭큭큭."

 

 

검강윤이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는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됐다. 그의 웃음이 얼굴선마저 뚫을 듯했다. 헌데, 자세히 상대를 보니.. 뭔가 이상했다.

 

 

‘어? 발이 땅에서 떨어져 있네? 공중에서 멈춰, 떠 있는 채 돌아섰다는 얘기잖아!’

 

 

검강윤이 상대의 행동에 잠시 의아해 하다 득의의 웃음을 터뜨릴 때 그의 옆에 있던 오천협룡의 첫째, 일룡은 순간적으로 멈춰 돌아선 상대의 동작과 그 상태를 주목했다. 멈춘 순간부터 돌아서기까지 상대는 지면에 떠 있었고 달리는 속도 때문에 반드시 먼지가 일고 흙들이 튀어야 했는데 그것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먼지조차 일으키지 않다니? 어쩌면 저 자는 생각보다 고수?’’

 

 

그것을 눈이 보고 뇌가 판단했을 때 그들은 알지 못할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특히 일룡은 그 두려움이 더했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 격언이 상대에게 적용된다면, 먼지를 일으키고 넘어질 뻔했던 자신들은 그의 상대가 아닐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잘 생각했다. 어차피… 피… 피다! 허걱! 이건, 내 피!”

 

 

처음에는 상대를 향한 말이었으나, 단 두 단어 이후에는 경악으로 변질된 외침이 검강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뭔가 번쩍하기는 했었다. 미간이 모기에 물린듯 뜨끔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건 뭐야?’

 

 

일룡은 검강윤의 미간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생각할 틈을 준 것인지, 아니면 생각을 끊어 정확한 판단을 못하게 한 것인지 그 순간은 헷갈렸다. 그 짧은 혼동을 가르며 하나의 빛이 지나갔다. 일룡은 그렇게 느꼈다, 보지 못하고.

 

 

“크윽!”

 

 

검강윤의 삶이 짧은 신응소리와 함께 끝났다. 상대의 갑작스런 변화에 잠시 마음을 풀었던 것이 치명적 실수였다. 초절정고수 간의 대결에서는 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 생긴 한 줄기가 선이라니!!’

 

 

일용은 미간을 거쳐 코의 정점에서 양 쪽으로 흘러내리는 피가 빛의 결과임 알았을 때, 검강윤의 목이 뒤로 약간 밀리며,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류심환의 말이 막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던 검강윤이 이승에서 들었던 마지막 인간의 말이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효용이 없는 말이라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다음? 염병할!!'

 

 

사실 검강윤의 머리를 관통한 지풍은 류심환의 무공 중 가장 속도가 빠른 태극일섬(太極一閃)이었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 지풍이 지나간 자리에 몰려든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 하나의 선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생을 다한 검강윤이 접한 최후의 무공이었고 류심환이 결심한 세 번의 초식 중 하나였다.

 

 

퍽!

 

 

그렇게 생을 마친 검강윤이 뒤통수부터 지면에 처박혔다. 류심환은 이것으로 검강천의 죽음에 대한 대가는 일부 받았고, 자신이 입곡을 허락하지 않은데 대한 대가의 일부도 받았다.

 

 

[흩어져 협공을 한다.]

 

 

 

상황 파악이 끝난 일용의 전음에 오천협룡이 몸을 날렸다. 그들은 검강윤이 대지에 처박히기 전에 몸을 날렸고, 그 방향이 류심환을 향했지만 공격의 방향은 모두 달랐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3수 안에 끝내려는 류심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두 수 안에 저들을 제압하려면, 천상지무밖에 없어. 하지만 아이가 죽어. 방법은 하나야.’

 

 

류심환이 최후의 수를 떠올리며 그 운결을 실행하려는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세 명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봤다. 너무나 익숙해 한몸이나 다름없는 그들은 자신의 유일한 동반자들이었다.

 

 

'삼혼, 당신들은 도대체가..'

 

 

-----

 

 

‘지금이다.’

 

 

삼혼 중에서 불혼(三魂)이 먼저 몸을 날렸다. 한 형제로 보이는 다섯 명의 추적자들이 그들과 같이 온 건방진 놈이 주군의 지풍에 관통돼 단 한 수에 떨어져나갔을 때, 그들이 다섯 방향으로 흩어지며 주군을 향해 그들은 몸을 날리자 더 이상 방관만 할 수 없었다. 불혼은 그들과 동시에, 아니 그 순간보다 반에 반이라도 빠르게 몸을 날렸다.

 

 

[주군! 아이를 치료하십시오.]

 

 

불혼(佛魂)이 전음으로 주군에게 말했다. 그는 주군과 오천협룡의 중간에 끼어들면서 그 이유를 차마 육성으로 설명할 수 없어 전음을 쓰는 꼼수를 부렸다.

 

 

[죄송합니다. 불충의 대가는 어떤 것으로든.]

“야핫!”

 

 

그가 주군을 향해 몸을 날린 오천협룡의 앞을 가로막으며 장풍을 연속해서 다섯 번 날렸다. 그러자 류심환의 앞에 하나의 장막이 쳐졌다. 그것은 불혼이 자신의 장풍으로 만들어낸 불력(佛力) 가득한 기막(氣幕)이었다.

 

 

퍽퍽퍽! 쑤욱!

 

 

오천협룡이 펼친 다섯 가지의 극강의 음기가 그의 펼친 기막에 부딪쳤다. 그들은 다섯 방향으로 몸을 날려 류심환을 협공했고, 그 결과가 다섯 개의 극강의 음기였다.

 

 

“흡!”

 

 

불혼이 제법 큰 신음을 질렀다. 그의 몸도 심하게 흔들렸다. 기막에 막혔지만 그들의 음기에서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그는 밀려나지 않았고 대신 그의 기막 다섯 군데가 움푹 들어갔다. 하지만 그 정도 선에서 상대의 음기(陰氣)들이 전진을 못한 채 격렬하게 마찰을 일으켰다. 기막과 음기의 힘겨루기는 막상막하였다.

 

 

순간, 하나의 인형이 불혼의 뒤에 내려 그의 후단전에 자신의 양 손을 붙였다. 그 인형은 자신의 내공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키는 격체전공(隔體傳功)을 시전했다. 불혼에게 엄청난 공력이 밀물 듯이 밀려들었다. 그는 삼혼의 막내 속혼(俗魂)이었다. 그 다음에 나머지 한 명이 나섰다.

 

 

“나하고 놀자, 천상천의 다섯 마리 똥개들아.”

 

 

오천협룡의 뒤로 도혼(道魂)이 표홀히 내려서며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새 같았다.

 

 

‘이 자들은 또 뭐야?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고수들이야.’

 

 

오천협룡의 첫째 일룡이 검강윤의 죽음을 목격하고 류심환을 향해 절초를 펼쳤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세 명의 고수들이 그의 심장을 덜컥 거리게 했다.

 

 

‘한 놈은 단 한 수로 검강윤을 죽였고, 나머지 세 놈은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일룡과 나머지 네 명은 극도의 놀람 속에서도 모두 똑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단 한 수로 검강윤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존재했으며, 지금까지 수백 리를 오면서 존재조차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세 명의 고수가 있었다. 그들의 뇌가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는 천년 무림의 어떤 누구도 이들에 일치하는 문파나 고수는 없었다. 무림에 나오지 않는 은거기인이다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무공이나 실력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무림에서 영원한 비밀은 없다.

 

 

'이들 같은 무인은 맹세코 없어!'

 

 

그들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바로 그 순간!

 

 

팅! 휘익!

 

 

속혼의 내력을 받은 불혼의 기막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면서 그들이 결발한 음기가 고무처럼 튕겨졌다. 튕겨난 음기는 자신들을 향해 되돌아 왔고 그들은 다급히 초식을 거두면서 필요한 만큼만 움직여 그들 간의 간격을 넓혔다. 그렇게 벌릴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대의 것이었다. 자신들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자는 고려할 틈도 없었다.

 

 

쉭! 쉭!

 

 

튕겨난 음기는 늘어난 틈새로 그들의 옷깃을 스치듯 지나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쳤음에도 스쳐간 곳의 도포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펼쳤던 무공의 음기가 얼마나 강력하고 극도로 차가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허나 그 극한의 음기는 반탄력에 멈추지 않고 그들의 뒤로 날라갔고, 그곳에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도혼이다.

 

 

“뭐야? 이거! 야, 불혼! 날 죽일 생각이야?”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자신에게 갑자기 엄청난 음기가 파고들자, 그것이 다섯 놈들이 아닌 자신에게 날아온 이유를 알아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물론 자신은 고래에 속하지만, 그는 불혼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있는 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그 모습은 접혔다 해야 함이 맞을 정도로 그의 허리는 순간적으로 꺾였다.

 

 

우두둑!

 

 

외모에서 드러나는 나이를 감한 할 때 당연히 이런 소리가 나와야 정상인데, 실제 일어난 소리는 새색시 옷고름 푸는 소리처럼 부드러웠다.

 

 

스스스.

 

 

젖힌 그의 배 위로 아슬아슬 하게 음기가 스쳐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의 배 위로 다섯 줄기 차가운 느낌이 스쳐가면서 엄청난 소름만 돋게 했다.

 

 

“이런, 처죽일 놈들! 피할 거면 말했어야지!"

 

 

도혼이 이번에는 불혼에서 오천협룡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가재는 게 편이기 마련이니 비난의 강도는 훨씬 높아졌다. 물론 오천협룡의 입장에서는 피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도혼을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무시했다. 그것이 도혼을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이놈들 봐라? 날 무시해? 이, 개만도 못한 놈들이 감히 나를!!”

 

 

분을 삯이지 못해 고함을 한 번 더 지른 후에야 도혼이 접었던 몸을 일으켰다. 허나 분은 그것으로 풀리지 않아 계속해서 씩씩거리며 길길이 날뛰었다.

 

 

“다 죽었어, 니들!! 죽을 때까지 때릴 거야! 죽은 다음에도 때릴 거야!”

 

 

‘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3명의 서로 다른 노인들을 보며 일룡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됐다. 역천의 계획에도 빈틈이 있었고, 3년마다 무림을 샅샅이 살피는 천상천의 정보망에도 문제가 있었다.

 

 

-----

 

 

“어쨌든 고맙습니다. 서로 없던 일로 칩시다. 그럼.”

 

 

류심환은 삼혼의 등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미 배는 떠났고 수면에는 흔적이 남을 리도 없다. 어차피 5명의 추격자를 한 번에 제압하려면 필살의 절초를 펼쳐야 했고, 아이의 생명을 담보할 수 없었다. 죽어도 그들의 도움을 받기 싫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서로 상쇄하면 될 일이라 치부했다. 부모님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후, 무영을 눕혀 치료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3십장밖에 하나의 바위를 발견했다. 그는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아이의 상태가 너무나 급박했다. 그는 바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웃옷을 벗어 바위에 깔고 그 위에 아이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지체 없이 주요 혈도를 막은 후 아이의 혈맥을 짚어 서둘러 검진을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색은 검다 못해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반 각의 반, 그것의 반이라도 늦었다면.. 독이 예상보다 많이 퍼졌어.'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아이의 몸에 퍼진 독은 일반적 응급치료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최고 절독인 천상무극독을 아이가 견뎌낸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아마도 그 기적은 단전과 몸 곳곳에 퍼져 있는 진기의 기운과 천단의 효능 때문인 것 같았다.

 

 

류심환은 자신의 내력을 오성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아이의 단전에 자신의 극음지기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조금이라도 기의 주입이 경로를 벗어나면 그것으로 아이의 목숨은 끝난다. 그는 끊어진 신경을 잇는 것처럼 극도로 정밀하게 자신의 진기를 아이의 단전에 주입했다. 아이의 단전에 분포해 있는 미세 혈관을 따라 그의 진기가 퍼지자 천상무극독의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다.

 

 

순간, 아이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혼절해 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느끼지 못할 것이지만 아이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자신의 예상보다 독의 저항이 강했고 의식이 없는데도 아이의 몸이 꿈틀거릴 만큼 고통은 컸던 것이다. 아이의 몸은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핏발이 서고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아이의 몸이 견뎌내지 못하는 증거였다.

 

 

‘위험해!’

 

 

그는 급히 자신의 내력을 육성으로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을 통해 엄청난 극음지기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와 아이의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강하게 저항하던 천상무극독도 그 위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극음지기와 맞닿은 부분부터 얼어붙었다. 그러자 핏발 선 혈관들이 점점 얇아졌고 호흡도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아갔다. 입고 있는 옷을 흥건하게 적신 땀들도 잦아들었다. 꿈틀거리던 몸도 움직임을 멈췄다.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헌데, 천상무극독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의 단전에 머물러 있던 천상무극진기가 갑자기 요동쳤다. 차츰 안정되던 중독의 증상들이 다시 일어났다. 아이 몸의 떨림은 작은 근육까지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심해졌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급작스럽기는 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진기가 준동하는 것은 더 강한 힘으로 누르면 된다.’

 

 

두 진기는 닮았기 때문에 더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면 약한 것은 밀리게 돼 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것이 남아 있었지만.

 

 

‘분명, 관계 있어. 전설과 다른 게 있어. 허나, 상관없어, 아이만 산다면.’

 

 

류심환은 의문을 접은 채 자신의 내력을 칠성으로 올려 확실한 힘의 우세로 천상무극진기의 준동을 막았다. 그리고 진기가 밀려난 단전의 일부에 자신의 극음지기로 기막을 쳐 공간을 확보했다.

 

 

‘휴, 일단 일차 치료는 됐어.'

 

 

그는 기막을 쳐서 아이의 단전에 작은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가장 시급한 치료를 끝냈다. 천상무극독은 단전에서 더 이상 퍼지지 않았고 천상무극진기도 제 자리로 돌아갔다. 이로써 아이는 죽음으로 가는 가장 큰 위기를 넘겼다. 잠시 숨은 돌렸지만 지금부터가 기술적으로 더 어려운 치료여서 그는 마음의 긴장은 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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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물론 보수화된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도 경제성장과 선진국 진입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은 마치 경제성장을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면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와 병폐들이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럴까? 정치철학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양당의 정치인들이 말하는 선진국들의 상황이 유토피아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기만 할까?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이 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를 보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수없이 많은 저자들이 인용하는 저서로서 출판된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연구결과다. 저자들이 현재의 선진국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는 이제 배를 채우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더 이상 최우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시민들은 어떻게 더 먹을까가 아닌, 어떻게 덜 먹을까를 고민하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뚱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동력이던 경제성장은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그 임무를 마쳤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평안과 행복이 증대되던 시대도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가 더 부유해질수록 스트레스와 우을증 및 각종 사회문제가 장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긴 역사의 여정에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대규모 개발 위주의 성장담론이 전 지구적 시장구축과 함께, 금융과 정보통신 및 지적재산권 중심의 '고용없는 성장'의 패러다임에 이르면서 선진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진보의 동력이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 곳곳에서 진행된 대규모 개발의 역설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인류는 물론 지구 생명체들은 여섯 번째 종말을 걱정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분석틀을 이용해 진행한 연구에서 경제성장에 따른 행복과 기대 수명이 1인당 GDP(국민소득) 약 2만5천 달러에서 평평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행복과 기대 수명이 일어나는 국민소득 수준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는 결과도 보여줬다. 이는 모든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현상으로, 우리의 국민소득이 늘어난다 한들 국민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대 수명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지수로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득불평등의 증가, 스트레스 지수의 상승, 만성질환 및 정신질환의 급속한 증가, 10대 임신율과 낙태율 증가, 청년과 노인의 자살율 증가,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확대, 범죄율아 사회적 비용의 증가, 마약과 약물중독의 증가, 계층이동성의 폭락, 저축률의 하락과 소비지상주의, 가족의 해체와 1인가구의 증가, 외모지상주의와 성형의 확대, 신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부상 등이다. 


 

                                                  

 

 


이런 부정적 현상들은 개인과 계층 및 지역 간의 소득불평등이 심한 선진국일수록 발생 빈도가 높았고, 일본과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처럼 소득불평등이 적은 나라일수록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줬다.특히 신생아 사망율과 범죄율, 10대임신율과 낙태율, 부의 불평등이 가장 크고, 의료비지출 대비 효율이 가장 떨어지는 미국과 영국이 최하위에 자리했다. 두 나라는 신자유주의(무정부적 자유주의)가 가장 발달한 선진국이며, 대부분의 지수가 후진국에 버금가거나 떨어지는 것도 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부유한 국가에서 생기는 문제가 사회가 충분히 부유하지 못하기 (혹은 너무 부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 내에서 사람들 간의 물질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 내에서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기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절대적인 불평등이 문제가 되지만, 부유한 나라에서는 상대적인 불평등이 개인의 행복과 기대 수명 등에 나쁜 영향을 주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의 51개주도 똑같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소득불평등이 가장 적은 뉴햄프셔주와 가장 큰 뉴욕주를 비교하면 거의 모든 지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최악의 주는 세계금융의 본산지인 뉴욕주이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피케티가 사용한 자료도 상당 부분 이 사이트에서 나왔다.

 



결국 1인당 GDP가 25,000~27,000달러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을 3~4만달러에 이른다고 해도 소득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건강과 사회문제 등을 다룬 수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부유한 국가일수록 "사회 전체를 가로지르는 불평등의 정도"에 따라 행복과 건강, 기대 수명 등에서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 수없이 많은 통계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종합한 결과,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공동저자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미국의 뉴햄프셔주와 뉴욕주를 비교한 것과 같은 지수와 통계들을 사용해 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스웨덴과 일본을 비교했다. 

 


스웨덴에서는 평등이 재분배를 지향하는 세금과 보조금, 그리고 큰 복지국가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국가 소득의 비율로 보면 일본의 공공 사회 지출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아 스웨덴과 대비를 이룬다. 일본은 재분배보다는 세금이나 보조금 '이전의' 소득이나 시장 수입이 평준화되어 있어 더 높은 수준의 평등을 달성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는 소득 차가 적다. 그러나 그 밖에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더 큰 평등은 세금이나 보조금을 통해 불평등한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지만, 세금과 보조금 이전 총소득을 평준화해 재분배 필요성을 더는 방식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했다. 각종 부조리와 불평등이 넘쳐나던 시절의 샤르트르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했다. 그의 말대로 타인은 지옥일 수도 있고, 반대로 천국일 수도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세상에선 각종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사회관계의 왜곡과 스트레스 때문에 타인이 지옥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인식과 태도를 바꿔 경쟁보다는 공존과 상생에 눈을 돌릴 때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다.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 지역사회와 국가 차원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했을 때는 타인은 결코 지옥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도 지친 몸과 허해진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가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자유는 이런 공동체가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 성장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전환, 그것이 인류가 6번째 종말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자유방임적 경쟁이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한다는 것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결론이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 관심법'은 최악의 입법이며, 대한민국을 1%의 수중에서 하위 99%가 피터지게 싸우게 만드는 최악의 악법들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ttangke 2014.07.20 12:43

    좋은 글 생각 정확한 지식이 참 좋네요~~
    사막 속에서 금은보화를 찿은 기분입니다~
    티스토리 구독을 하고 십습니다~~ 초대해 주실거죠?
    (hschainav@naver.com) 좋은 하루 되시고~~ 감사합니다^^



더 이상 경공만으로 그들을 따돌릴 수 없다. 이 상태로 일각이라도 더 지체한다면 아이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중독된 상태의 아이를 안은 채 진동을 주지 않고 내가 낼 수 있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무려 5개의 추적조들 중에서 여섯 명은 생각보다 무공이 뛰어난 초절정 고수였다. 하남성(河南省)에서 시작된 도피가 이제 수백 리를 지나 산서성(山西省)에 접어들었는데도 그들을 좀처럼 따돌릴 수 없었다. 그들의 내력은 떨어지지 않았고 속도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론 아이를 살릴 수 없어. 어떻게든 아이들 치료할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검강천이 추적조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의 검과 도에 수십 번 찔리고 베인 상태에서 반 시진을 버티고 그런 상태에서 또 그의 양 팔과 두 다리를 희생하며 일각을 벌어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아이에 대한 응급치료를 할 수 있었다.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사랑이 그리도 크고 높은지 비로소 알 것 같던 그 순간을 이용해 아이에게 최소한의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아이의 생명을 노리는 독은 생각보다 강했고, 류심환이 화월곡을 벗어났을 때 사방에서 새로 추적자들이 들이닥쳤다. 고금제일의 천상천을 무너뜨린 자들은 그만큼의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은 치명상을 입은 검강천을 추적하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화월곡 주변에 폭넓은 포위망을 구성했고, 탈출구를 찾지 못한 류심환은 화월곡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온몸에 퍼져 있는 독의 진행을 막으면서 4개의 추적조를 따돌리려면 나무 하나의 위치까지 꿰고 있는 화월곡을 이용해 새로운 탈출로로 그들을 따돌리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 5년 동안 자신이 머물렀던 모옥이 최상이었다. 그는 모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검강천은 역천의 무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니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벌고 있는 것이었다. 지독히 잔혹한 것이지만, 검강천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아들과 재면해야 했다.

 

 

‘무영아, 죽으면 안 돼. 어떻게든 살아서..’

 

 

검강천의 표정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류심환의 능력을 믿지만 역천의 무리들의 능력을 고려할 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을 수 있었다. 이런 검강천의 마음을 꿰뚫었을까, 류심환이 극도로 초조해 하는 검강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추적자가 너무 많아서. 모옥 뒤편에 비상구가 있어 그리고 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는 죽지 않습니다, 절대로.]

 

 

류심환은 전음으로 검강천에게 자신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검강천은 류심환의 품안에서 죽은 듯 혼절해 있는 무영을 근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하하!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더냐?”

“역천을 준비한 기간만 10년이야.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어!”

“천주를 상대로 즐길 만큼 즐겼고, 이젠 마무리 한다.”

 

 

역천의 무리들이 무엇이라 떠들던, 류심환에게 무영을 맡긴 이상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만 무영이 살아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

 

 

‘단 일각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해.’

 

 

처음 팔 하나가 잘릴 때 검강천은 무영의 상태를 살폈고, 다리 하나가 잘릴 때는 류심환과 함께 모옥으로 들어가는 창백한 무영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다리로 힘들게 자세를 잡은 상태에서 손으로 상대의 검을 잡아 손가락이 잘리고, 팔뚝으로 도를 막아 그것마저 잘려나갔을 때는 잔혹하게 웃는 그들의 표정 너머로, 잔영처럼 남아 있는 무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모옥의 입구를 막아섰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내가 알량한 신화에 갇혀..’

 

 

다시 역천의 검에 의해 하나 남은 다리가 사타구니로부터 잘려나가고, 동시에 도에 의해 허리 살이 뭉툭 잘려나갔지만 검강천은 모옥의 입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까지 삼킬 수 없었지만, 사지가 잘린 상태에서도 모옥의 입구를 지켰다. 자식에 대한 아비의 사랑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최고에 이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검강천의 머리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목젖을 중심으로 몸에서 양단될 때 생을 다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비장함조차도 없었다. 오직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만이 남아 있었다.

 

 

‘아들까지 그렇게 살라 할 순 없어.’

 

 

목에서 잘라나간 그의 머리가 지면에 떨어져 몇 번이나 굴렀지만, 목표했던 일각의 시간은 끌 수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류심환이라면 일각이란 시간에 무엇도 가능하게 만들 능력의 소유자 아닌가?

 

 

천상천의 주인은 그렇게 닫힌 하늘에서 열려 있는 땅으로 내려왔다. 살아서는 전능의 능력으로 무엇이던 할 수 있었지만 신화가 남겨놓은 족쇄에 갇혀 살았고, 죽어서는 대지에 몸 하나 둘 곳 없는 신세로 초라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자유라는 것일까?’

 

 

자유에 대한 성찰이 검강천이 살아서 마지막으로 한 행위였다. 잘려나간 부위들이 꿈틀거렸다. 오체절단된 머리와 팔과 다리, 이리저리 잘리고 떨어져 나간 살덩어리와 잘려진 뼈에서 조각난 영혼들이 육체와 신화의 족쇄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게 오체절단된 영혼의 조각들이 다시 모여 하나의 형체로 돌아왔을 때 검강천의 영혼은 류심환과 무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했다.

 

 

“류공, 이제야 알겠구려. 난 신과 맞설 만큼 전능의 소유자가 됐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음을 이제야 알 것 같소. 신화란 무결점의 최고 권력의 상징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함께하지 못하면 세상 밖에서 영원히 군림하는 죽은 권력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소. 신화의 본질은 사람사는 세상에서 단절된 것이어서 모든 이로부터 칭송받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소. 내가 살아서 잘한 일이란 당신을 만나 천상지무를 보여주고, 단 하나의 약속을 예약해둔 것뿐이라오.”

 

 

“무영아, 너에게 너무 큰 짐을 물려주고 가서 미안해. 너는 최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단다.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노력의 양에 따라 너는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인이 될 수 있어. 하지만 천상천의 신화 속으로 절대 들어가지 마라. 세상에 남아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너의 길을 가라. 고립돼 함께 하지 못하면 전능의 힘도 결국은 무력한 것이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실존할 때만 너의 능력은 비로소 의미를 회득할 수 있어. 무엇보다도 신화와 복수에서 자유로워져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너에겐 너의 길이 있을 터, 무엇에도 구속되지 마라. 사..랑.. 사랑한다, 무영아.”

 

 

-------------

 

 

신화의 주인공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검강천이 한 아이의 아비로써 일각이란 시간을 끌어주었기 때문에 류심환은 무영의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은 채 잠시 동안이라도 추적조를 따돌릴 수 있었고, 산서성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응급조치로 막아둔 혈도가 풀리기 직전이야. 천상무극독을 잠시 동안 막을 수 있었지만, 진동에 의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아이가 중독된 천상무극독의 독성은 천상지무처럼 고금제일이라 독의 재준동은 곧 아이의 죽음을 의미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류심환은 생애 처음으로 초조함이란 단어의 뜻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나마 아이의 단전에 아비가 내장시킨 천상천 고유의 천상무극진기와 어려서 복용한 천양천단의 효능이 독의 준동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내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아비가 단전에 남겨준 천상무극진기와 아이의 죽음을 재촉하는 천상무극독은 서로 본질이 같아 처음에는 진기에 포함된 아비의 내성이 아이의 온몸으로 퍼져가는 독의 흐름을 상당 부분 차단하고 있었지만, 두 개의 본류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아이는 절명하게 된다. 더는 치료를 미룰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소 한 시진은 치료해야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상태였다.

 

 

‘결국 방법은 하나야.’

 

 

류심환에게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아이에겐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결단을 해야 한다.

 

 

‘할 수 없지. 내가 버렸던 것을 가져올 수밖에. 살아 검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아버님, 어머님의 용서해주세요. 이번만, 이번 한 번만 검을 쓸게요.’

 

 

그는 속죄의 약속마저 깨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부모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니, 그것은 류심환이 자신에게 하는 변명에 불과했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검강천의 최후를 귀로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게는 마음의 부담보다 무영의 상태가 급했다. 이래서 자유를 속박하는 운명은 빌어먹을 놈이었다.

 

 

‘경공을 접고 저들을 죽인다. 세초 안에 끝내야 해. 그것도 충돌의 파장이 아이에게 미치지 않아야 해.’

 

 

아이의 혈색이 창백하면서도 검게 변했다. 호흡도 미약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불규칙했다. 세 초 안에 저들을 없애라면 그것은 어렵지 않다. 헌데, 충돌의 파장까지 흡수한 채 하라고 하면 그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피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어차피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는다.

 

 

------------

 

 

마음이 급하다. 우리는 주군의 임시거처에서 여기까지 쫓아왔다. 하지만 그 먼 거리를 도피하면서도 주군은 끝내 우리를 불러주지 않았다. 아이의 상태는 촌각을 다투는데도 주군은 요지부동이다. 새삼 확인하지만 주군의 맹세가 너무나 깊고 잔인하다.

 

 

물론 주군이 천상천의 적자를 구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이 주군의 선택이니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다. 주군이 정하면 그때부터 그것은 준엄한 명이며 우리들의 따라야 할 삶의 준칙이다. 따라서 아이의 출신은 따지지 않는다. 주군이 뜻하는 바가 있으리라.

 

 

우리에게 주군은 모든 것이지만, 지금은 우리의 도움이 절실하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가?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선택하자. 선택해 무엇이든 해서 주군의 애로사항을 풀어 들이고 신하된 자로서 허락도 없이 선을 넘은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벌을 구하자. 그것이 죽음이라도 지금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아이를 구해 약속을 지켜 주군이 갖고 있는 마음의 부담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면 못할 것은 없다. 주군은 현재 도움이 절실하고 주군의 곁에는 우리가 있다. 하남에서 산서까지 따라온 우리가 바로 지척에 있다. 당연히, 무엇이든 해야 한다.

 

삼혼(三魂)은 마침내 주군의 뜻을 거스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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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칼럼들이 실려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중에서 특히 화제가 됐던 것은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이라는 칼럼이었다. 이것을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이 본격화된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수 세력의 수문장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와 칼럼이 연달아 나오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주민보 넷에서 인용

 

 

하지만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아래에 전문을 올린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의 핵심은 국민이 비이성적인 상태여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풍문이 사실처럼 떠돈다는 것이다. 이 칼럼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실질적인 아킬레스건인 만만회로 향하는 여론의 관심을 무력화시키기 위함이다. 어차피 김기춘 비서실장은 버려야 할 카드라서 그를 향한 비판에는 찬서리가 느껴질 정도이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전통의 조중동이 박근혜 대통령을 때리는 것은 짧게는 7월 재보선의 승리를 위해서며, 길게는 보수 세력의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다.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때리면서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권은희를 집중공략함으로써 새정치민주연합 전략공천의 난맥상을 부각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 마케팅을 하지 않고 7월 재보선에서 승리하면 차세대주자로 떠오른 김무성의 무게감은 문재인과 박원순과 동급의 수준으로 올라선다. 

 

 

이럴 경우 박근혜 대통령은 조중동의 지원을 받은 미래권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의 공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청와대에서 전통의 보수 세력의 뜻에서 벗어나는 정책과 결정들을 밀어붙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7월 재보선 이후 2년 동안 선거가 없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를 빌미로 한 국가 개조를 보수 세력의 정권재창출에 유리하도록 만들 수 있다. 어차피 조기레임덕에 빠진 박근혜 정부가 야권과 시민사회로부터 욕을 먹는다 한들 변하는 것은 지지율 하락일 뿐이다.

 

 

                                                                                          연합뉴스에서 인용

 

 

그런 과정 속에서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 마음 속에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자리할 수도 있고, 동시에 김무성으로 대표되는 미래의 주자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가 견고해지기 시작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사권이 부여된, 그러나 기소권이 없는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할 수도 있다. 세월호 유족들은 자식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투쟁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며, 이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높은 피로감으로 응축될 것이다.

 

 

보수 세력의 결집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짧게는 7월 재보선의 승리로 이어질 것이며, 길게는 보수 세력의 정권재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그 출발이 이미 죽은 권력의 길로 들어선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함은 당연하다. 다만 이런 박근혜 정부 비판은 7월 재보선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만 유효하며, 그 이후로는 미래권력과의 조합을 통해 원하는 바를 하나씩 이루어갈 것이다. 

 

                                                                      JTBC 방송화면 캡처

 

 

다른 어떤 언론에 앞서 조중동이 확인할 길이 없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해, 모든 제도권 방송들이 이것에 근거해 7월 재보선의 판세를 예측하게 한 것은 조중동의 프레임이 얼마나 막강한지 세삼 확인하게 만든다. 새누리당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여야 대표의 담판마저 깨버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일련의 과정이 자리하고 있다. 안철수와 김한길 공동대표 덕분에 7월 재보선의 승기를 잡은 것(허상일 수도 있지만)도 이들에게는 전화위복이자 신의 한수로 작용했다.

 

 

물론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수사권과 기소권이 주어지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직접적인 이유(별도의 글로 다룰 것이다)는 다른 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차피 그것도 보수 세력의 정권 재창출로 이어지는 과정에 포함돼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방송이 편향된 상태에서 치러지는 선거란 민주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최근의 연구에서 보듯,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 세력의 정권 재창출 전략이 이미 가동된 상태이다. 

 

 

조중동을 필두로 소리소문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KBS와 그 밖의 편향된 방송들의 박근혜 대통령 때리기는 7월 재보선의 결과에 따라, 또는 그 결과와 상관없이 급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이용해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은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처럼 국정원과 군, 보훈처 등을 동원해 정권 재창출을 도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 세력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려면 기본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성공이 평균작 수준은 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보수 세력에게 유리한 기존의 체제를 적정선에서 개조하는 작업은 대통령과 정부의 몫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TV나 스마트폰, PC화면으로 보는 것조차 싫은 사람들에게는 조중동의 대통령 때리기에 속이라도 시원하겠지만, 그것으로는 세상이 단 한 발짝도 변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볼 때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간의 진검승부는 총선을 6개월 남은 시점부터 본격화될 것이며, 그 이전에는 7월 재보선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한다. 유족이 제시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가능하려면 7월 재보선에서 야권이 압승해야 한다. 바로 이것을 막기 위해 조중동을 필두로 현재의 권력에 편향된 제도권 방송들이 보수 세력의 정권 재창출에 동원된 것이라면 필자의 지나친 상상일까?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風聞)'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정작 대통령 본인은 못 듣고 있는 게 틀림없다. 지난 7일 청와대 비서실의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 보고가 발단이 됐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오전 10시쯤 대통령이 서면(書面)으로 첫 보고를 받은 뒤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하기까지 7시간 동안 대면(對面) 보고도, 대통령 주재 회의도 없었다는 게 알려지면서다. 당시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와 김기춘 비서실장의 문답.

"대통령께서 집무실에 계셨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비서실장이 모르시면 누가 아나?" "비서실장이 일일이 일거수일투족 다 아는 건 아니다." 대통령 일정을 실시간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후에는 알 수 있다. 그날은 대형 참사가 발생했던 날이다. 당연히 "대통령이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고 찾거나 물어봤을 것이다.

김 실장이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서실장에게도 감추는 대통령의 스케줄이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됐다. 세간에는 "대통령이 그날 모처에서 비선(秘線)과 함께 있었다"는 루머가 만들어졌다. 차라리 "대통령의 소재에 대한 공개적 언급은 곤란하다"고 했으면 이렇게 전개되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을 둘러싼 루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증권가 정보지나 타블로이드판 주간지에 등장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걸로 여겼다. 행여 누가 화제로 삼으려고 하면 "그런 들으나 마나 한 얘기는 그만"하며 말리곤 했다. 그런 대접을 받던 풍문들이 지난주부터 제도권 언론에서도 다뤄지기 시작했다. 사석에서 몇몇 사람들끼리의 잡담이 아닌 '뉴스 자격'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다.

때마침 풍문 속 인물인 정윤회씨의 이혼 사실까지 확인되면서 더욱 드라마틱해졌다. 그는 재산 분할 및 위자료 청구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부인에게 결혼 기간 중 일들에 대한 '비밀 유지'를 요구했다. 고(故) 최태민 목사의 사위인 그는 정치인 박근혜의 7년간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의 이권 개입, 박지만 미행 의혹, 비선 활동 등 모든 걸 조사하라"며 큰소리를 쳤다.

세상 사람들은 진실 여부를 떠나 이런 상황을 대통령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됐다. 과거 같으면 대통령 지지 세력은 불같이 격분했을 것이다.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도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식과 이성적 판단이 무너진 것 같다. 국정 운영에서 높은 지지율이 유지되고 있다면 풍문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 개인에 대한 신뢰가 허물어지면서 온갖 루머들이 창궐하는 것이다.

 

마치 신체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숨어 있던 병균들이 침투하는 것과 같다. 이는 대통령으로서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왜 어디서 면역력이 떨어진 걸까. 현 정권만큼 국정 어젠다가 많았던 적이 없었다. '국민 행복' '국민 대통합' '비정상의 정상화' '규제 철폐' '통일 대박' '국가 혁신'…. 하지만 임기 내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될 걸로 믿는 사람들은 없다. 대부분 발표만 해놓고 끝날지 모른다.

쓸 사람을 뽑는 문제만으로 시간과 정력을 몽땅 날린 탓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많은 논란과 불신을 낳은 정권이 없었다. 대통령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분을 찾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도대체 저런 후보자를 '누가' 추천했을까" 하며 매의 눈으로 응시했다. 이런 누적된 의심이 대통령의 면역력을 서서히 떨어뜨려 온 것이다.

국가 혁신을 이룰 '2기(期) 내각의 출범'이라고 내세웠지만, 거리에 나가 누굴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인물 면면을 보고서 선뜻 우리의 앞날에 대한 기대를 걸기가 어렵다. 국가 혁신을 하려면 대통령 본인과 주변 인물의 혁신부터 먼저 해내야 한다. 대통령은 여전히 구(舊)시대의 심벌 같은 김기춘 비서실장을 끌어안고 있다. 그의 충성심과 비서실 안정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김 실장이 그대로 있는데 '혁신'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를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인사 때마다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이 세간에는 회자되는데도, 청와대 담장 안에서만 평온한 일상이 계속된다. 대통령이 이들을 불러 "조금이라도 오해받을 처신을 하거나 직무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는 소식도 없다. 설령 이들이 억울하다고 해도 민심을 향한 메시지 차원에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장마철에 곰팡이처럼 확산되는 풍문을 듣지 않기 위해 대통령은 자신의 귀만 막아서는 안 된다. 곰팡이는 햇볕 아래에서 말라죽는 법이다.

 

 

 

  1. 여강여호 2014.07.20 09:34 신고

    이렇게 편향된 언론환경 속에서
    진보 진영이 이만큼 살아남은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쩌면 진보진영은 보수권력과의 싸움보다는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언론과의 싸움이 더 당면한 문제이지 싶습니다.

  2.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2014.07.20 19:35

    더욱 넓고 더욱 다양하고 더욱 세심하게 꾸며진
    늙은 도령님의 저택에는 오늘 처음 방문을 했습니다.

    늦게 방문을 한 점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더욱 당당하고 더욱 분명하게
    자꾸만 어둡게 변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밝아질 수 있도록
    희망의 눈, 희망의 빛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드림


무려 4년 전에 입건유예된 박봄의 마약밀수혐의가 지금의 시점에서 터져 나온 것은 무엇을 덮으려고 한 것일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회의 세월호 국정조사다. 여기서 정권 차원에서 숨기려 했던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면 박근혜 정부의 내일이란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안철수와 김한길이 대표로 있는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이 거기까지 밀고 갈 지에 대해서는 기대 난망이지만, 그들과 상관없이 국민의 분노가 정권을 향해 직접적으로 폭발 할 수도 있다. 세월호 국정조사가 내포하고 있는 휘발성은 에측불가능하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연합뉴스에서 캡처

 

국정원 댓글사건 만큼 폭발력을 지닌 GOP 총기난사 사건을 덮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세월호에 이어 군대까지, 1020세대의 부모들이 들고나올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앵그리맘의 세대가 50대까지 올라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줬다 뺏았는 기초연금 때문에 분노하기 시작한 40만 명에 이르는 기초생활보장 대상 노인들에 이어 현 정권의 지지세력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새누리당이 서청원과 김무성의 진흙탕 당권 경쟁에서 박근혜 마케팅이 사라진 것도 심각한 민심이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조중동마저도 문창극 사태로 인해 박근혜 정부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가 아니라 이승만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밖에도 수많은 것들이 혐의 대상에 오를 수 있지만 필자가 주시하는 것은 만만회와 7인회의 갈등설이다. JTBC가 특종보도를 하면서 김윤회라는 인물이 세간의 관심으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문창극 사태로 표면화된 만만회와 7인회의 갈등설도 거의 모든 언론에서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사참사 배후 의혹 ‘만만회’의 실체

 

 

 

필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일신문이었을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목사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일요신문의 보도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사람에 따라 정국의 추이를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청와대가 인사수석실을 재빨리 들고 나온 것도 만만회(박지만, 이재만, 정윤회)라는 비선라인을 지키기 위함일 수도 있다. 

 

 

실제로 만만회의 실체가 드러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결코 안전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박지만은 박근혜의 동생이고, 이재만은 박근혜와 19년을 함께 해온 진정한 실세고, 정윤회는 박근혜의 얘인이란 의혹이 파다한 최태민 목사의 조카이다. 이들 3인이 만만회이며, 박근혜 정권의 속살을 가장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국민의 시야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필자의 추측이 터무니없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언론보도들을 종합하면 박봄이 비열한 통치 메커니즘의 피해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승진을 위해 대박사건이면 죽어라고 물고 늘어지는 대한민국의 검찰이 한창 주가가 치솟던 시절의 2NE1 멤버인 박봄에게만 예외적 법적용을 했다는 견해는 검찰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단견이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란 승진이 어느 선까지 이루어졌느냐에 따라 수임료 자체가 달라진다. 그들에게 승진이란 것을 제외하면 판사나 변호사로 법조인 인생을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사시 성적과 연수원 성적이 높아야 하지만 그것은 학벌만큼 참조사항에 불과하다. 유수의 대기업 신인사원 모집에 사시 합격자나 변호사 출신도 지원하는 마당에 검사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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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쓸 때 필자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아직 100%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김기춘 비서실장이 세월호 국정조사에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당일(4월16일)에 박근혜 대통령의 행방을 몰랐다고 말했다. 세간에 도는 풍문(나중에 보면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가 대다수다)에 따르면 그 시간에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지 않고, 이른바 만만회라는 시선라인을 만나고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새누리당이 수사권이 부여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가 칼럼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서둘러 연막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세간의 풍문처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당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박지만과 이재만과 김윤회라는 비선라인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7월 재보선 승리는 고사하고 탄핵이나 하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치권에서는 안대희와 문창극의 낙마사태 때 수첩인사의 본질이 만만회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었다. 헌데 박봄의 4년 전 사건이 튀어나오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만만회라는 비선라인의 국정 농락에 대한 뉴스도 모든 언론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때만 해도 필자는 만만회의 등장과 빛의 속도로 사라진 것이 세월호 참사와 직접적인 연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합뉴스에서 인용

 

하지만 세월호 국정조사에서 박영선 의원의 질문에 김기춘 비서실장의 답변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퍼즐이 맞춰졌다. 동시에 7월 재보선을 코앞에 두고도 새누리당이 새정치민주연합과의 대표회담마저 깨버린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박근혜 정부와의 운명공동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새누리당이 수사권이 명시된 세월호 특별법이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던 것이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튀어나온 박봄의 마약설이 며칠이라도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라면서.

 

 

여기까지는 충분히 추론이 가능한 수준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 정도 추론은 너끈히 하고도 남았을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들(안철수와 박영선)이, 결과적으로 볼 때 새누리당의 막가피식 행태에 아무런 제동도 걸지 못했느냐에 대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들도 조선일보의 칼럼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4월 16일에 비서실장에게도 알리지 않고 만만회를 만났다는 것을 세간의 풍문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라면 모를까. 

 

 

하긴 세간의 풍문이 사실이라면 양당의 대표들은 보수화된 거대 양당의 기득권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계산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박근혜 정부와 거대 양당이 세월호 유족들이 원하지도 않는 단원고 생존학생들과 그들의 1년 선배인 3학년에게까지 대학의 정원외 특례입학까지 들고나온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주어진 세월호 특별법은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했기 때문이리라. 

 

 

이로써 수사권과 기소권이 부여된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야 할 필요가 더욱 분명해졌다. 설사 이 모든 것이 허구로 밝혀진다고 해도 침몰 원인이라도, 골든타임을 허송세월하며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라도 알아야 금쪽 같은 아이들을 저승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짐승보다 못한 카톡으로 유족과 생존학생은 물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과 아직도 저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돼 있는 실종자들을 욕보이는 심재철 같은 자가 국회의원이라고 설처대는 꼴을 다시는 보지 않으려면. 

 


  1. 장하조 2014.07.22 21:58

    김윤회 (X) ㅡㅡ> 정윤회
    ㅇ박근혜 밤의 비서실장
    최태민먹사 5번째 부인과 사이에 난 딸 최순실 남편..즉 최태민 5번째부잉 사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여론조사를 이용해 조중동의 권은희 죽이기가 도를 넘었다. 비록 안철수와 김한길 공동대표가 전략공천에서 보여준 난맥상이 조중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들의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났지만, 이 모든 것이 권은희에 대한 보상공천(조중동의 주장) 때문이라는 것은 침소봉대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는 뉴스타파까지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무능력과 무책임 때문에 전세가 나쁘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들에게 불리하게 나온 지지율의 책임을 권은희에 돌리는 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자들에게 투표 불참을 권유하는 행태와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의 일방적인 보도행태는 가뜩이나 낮은 투표율 때문에 조직 동원능력이 뛰어난 새누리당에게 유리한 재보선의 판세를 더욱 공고화시킬 수 있다 



전통의 지배자였던 조중동이 권은희가 광주 광천을에 전략공천 되는 순간, 조중동의 노회한 정치 프레임이 작동하기 위한 최상의 밥상이 차려졌다. 이들은 당선에 전혀 영향력을 줄 수 없는 권은희 때리기에 집중함으로써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략공천 전체를 비판하는 효과를 최대화하고 있다. 확인되지도 않은 찌라시 수준의 글들을 연달아 내보내면서 권은희를 흠집내는 것 뿐만 아니라 7월 재보선의 판세를 새누리당에게 유리하도록 만든다. 



"권은희에게 속았다" 그를 똑똑한 후배로 여겼던 한 경찰간부의 토로ㅡ조선일보 프리미엄 기사의 제목



정체불명의 경찰 선배(고위직에 오를수록 보수화된다)를 내세워ㅡ그래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의 입을 빌어 '권은희 후배에게 속았다'는 기사를 내지 않나, 사안이 종결된 논문표절에 관해 억지 트집을 잡지 않나, 이번에는 남편의 부동산 문제를 흘리지 않나, 조중동의 전략적 행태는 권은희 흠집내기와 야권의 공멸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한다. 



좋은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지만, 나쁜 말은 날개를 달고 순식간에 퍼지기 마련이다. 하나의 보도가 지니는 힘은 그것에 담긴 진실의 정도가 아니라 후속 보도가 독자와 시청자에게 더욱 깊이 각인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보도에 의해 재보선이 행해지는 지역의 유권자들은 조중동의 프레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野지지율 연속 하락… 31→28→26% 기록조선일보 기사 제목



이런 여론조사가 발표될수록 야권 성향의 유권자들은 투표를 포기하는 쪽으로 좀 더 기울 것이며, 여권 성향의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권은희로 대표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략공천의 난맥상에 심판을 내리겠다는 쪽으로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재보선의 낮은 투표율을 감안하면 이런 차이는 당락을 결정하는 제1 순위의 요인으로 자리하게 된다. 



조중동과 그 아류들의 권은희 때리기가 도를 넘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근혜 정부의 연이은 실정으로 야권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됐음에도 권은희 전략공천이라는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거대한 균열로 만들어내는 조중동의 노회한 전술이란 정치와 선거가 프레임 설정의 문제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답이 있다



결국 야권이 승리하려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프레임 전쟁으로 가면 백전백패다. 이런 상황에서는 극도의 역발상이 필요하다. 조중도의 프레임도 무용지물이 되는 역발상ㅡ새정치민주연합의 무조건적인 양보를 통한 야권연대의 극대화다.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것처럼, 그런 역발상의 새정치가 정말로 필요한 것이 바로 지금이다. 


  1. ttangke 2014.07.20 13:11

    문제는 조중동의 전략과 노회한 전술에 순진한 국민들이 말려 들어간다는 것이죠~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까요?가 저의 관심사이자 제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도령님의 글도 국민 한 명이라도 더 보게 되어 그들의 노림수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의 행동하는 양심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blog.naver.com/hschainav에도 복사하여 게시하오니 양해 부탁드리고~~
    좋은 글 퍼 나르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게시된 글을 내리라고 연락주시면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


쌀 시장 전면 개방은 미국과 유럽의 거대기업농을 위해 녹색혁명(실제로는 녹색 착취)이란 명목하에 진행된 농축업 약소국에 대한 제2의 식민지화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고율의 관세화와 의무수입량의 급증을 들어 쌀시장을 전면 개방하겠다고 한 것도 이런 식민지화가 마지막에 이른 것입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대표된 농축산업의 신자유주의화는 17~18세기에 유럽을 지배했더 귀족과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중농주의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농작물 거래의 자유방임을 원칙으로 내세운 중농주의 정치경제학은 농작물의 자유무역을 통해 거대한 농지와 농노를 소유한 귀족과 대지주의 부를 불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별도의 글로 올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중농주의에서 시작된 농축산물의 자유무역은 지금의 신자유주의의 원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약소국일수록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적인 거대기업농과 거대 금융자본에 장악된 농축산물의 자유무역은 상대적 약소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밥상안전에도 빨간불을 켜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에서 인용


거대기업농과 농축산물 무역상들을 위해 출범한 중농주의적 자유무역은 선진국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GATT에서 WTO를 거쳐 우루과이 라운드까지 이어졌습니다. 전 세계적의 곡창지대를 거의 다 점령해 버린 거대기업농의 입장이 반영된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상대적 약소국가의 농축산물시장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농작물의 자유무역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이 협정의 핵심은 농축산물의 자유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각국의 보호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국제가격과 국내가격의 차이만큼 관세를 부여하는 '예외없는 관세화'만 허용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결정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외국의 거대기업농이 기습적으로 가격을 낮춰 국내시장을 강타하면 사후 관세로 이득을 회수하는 것도 어렵고, 오랜 법정 다툼을 통해 이득을 사후에 회수했다고 해도 국내의 농축산물 시장은 도산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내의 농축산업이 무력화되면 국제가격이 올라도 국내가격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시장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또한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 외국의 농축산물을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농축산업 종사자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복지비용을 대기 위한 국가의 재정이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적 문제들이 속출해서 한국 사회의 골칫거리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자유 경쟁을 강제하며,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결정한 관세 이외에는 일체의 농업보조금을 금지하는 우루과이 라운드의 결정은 농업경쟁력이 떨어지는 나라를 위해 일정 기간의 유예를 두었지만, 이는 농작물의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농업 분야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농업 분야에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적용됩니다. 거대기업농의 농축산물의 안전은 우리가 담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역할은 무력화됩니다.


                                                                       연합뉴스에서 인용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루라이 라운드에서 체결된 협정은 국제가격의 변동 때문에 자국의 농업종사자들에게 발생하는 피해를 보조금으로 해결하는 유럽과 미국의 반칙을 제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결과 상대적 약소국들의 농업시장만 거대기업농들에게 무방비로 열어주는 결과만 초래했습니다. 각국의 주식(우리의 경우 쌀)에 관해서는 식량주권 차원에서 우루과이 라운드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지만, 대신 의무수입이란 족쇄를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조항 때문에 우리나라는 쌀시장의 개방을 허용하지 않는 대신ㅡ정확히는 개방을 유예하는ㅡ10년마다 두 배로 뛰는 의무수입양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이해당사자들과의 대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쌀시장 개방은 이런 배경 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일본이나 대만처럼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쌀시장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그것이 국제적인 협정이라 해도 각국의 정부가 자국민의 일방적 피해를 이유로 협정 이행을 거부하면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국제무역에 관한 재판소 같은 것들이 있지만 이 또한 배타적 주권을 지닌 각국의 정부가 재판을 거부하면 강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이러 미친짓을 해야 한다 말인가?



미국이나 유럽이 자주 사용했고, 지금도 이용하고 있는 무역보복이란 것들도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의 반대시위로 무산된 것처럼 여론의 힘을 빌어 정부가 강하게 나가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것이 쌀시장 개방입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까지 수출기업들을 위해 식량주권을 우습게 여기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일본과 대만처럼 외국산 쌀들이 경쟁력을 지니지 못할 만큼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 그만입니다. 



제 아무리 우루과이 라운드라 해도 쌀시장을 지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강하면 300만 명으로 줄어든 농업종사자들의 미래를 짓밟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국제적인 선례도 있기 때문에 정부가 강력한 의지만 표명하면 우리 모두의 조상이었던 농업종사자들을 외국의 거대기업농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습니다. 



소수에게만 부가 독점된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을 위해 농촌을 식민지화하고 뼈속까지 수탈했으면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식량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의 미래란 외국의 거대기업농에게 우리 모두의 생명을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경상수지 흑자를 주장하며 쌀시장 전면 개방을 밀어붙이는 통상관료들의 감언이설에 정부가 놀아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거짓말도 했다



만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의 내각처럼 자국의 농축산물 시장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쌀시장 전면 개방의 충격을 최소할 뿐만 아니라, 역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1000%에 이르는 초고율관세와 농축산업에 대한 정부의 장기적인 지원으로 자국의 농축산업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풍요롭게 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줄푸세’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사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우루과이 라운드 전문가들만 있다면 우리나라의 쌀시장은 얼마든지 지켜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부는 언제든지 거짓말을 한다는 현실정치학의 절대 명제입니다. 쌀시장 개방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식량주권의 마지노선마저 풀어놓으면 안 됩니다. 필자의 형님이 국내 최고의 권위자인 식품포장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장거리 이동에는 일정량 이상의 방사능 처리가 가해집니다. 기준치 이하의 방사능은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장기적으로 축적되고, 다른 것들을 통해 축적되는 위험물질의 종합적인 양으로 따지면 인간의 생명까지 커다란 위험에 노출됩니다. 



미국산 소고기에 이어 쌀시장의 전면 개방이 자유무역을 통해 소비자에게 저렴한 가격의 농축산물을 공급하는 것 이상의 문제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량주권이란 소규모 농작을 하며 시장경제의 밖에서 살 수 있는 소농들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부에 축적되는 온갖 위험물질들은 자식에게 전해지고, 우리의 미래세대를 더 큰 위험에 내모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박근혜 정부가 얼마만큼의 관세율을 부과할지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에 해당합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외국 정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관세율을 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행위의 전형입니다. 만일 박근혜 정부가 형편없는 수준의 관세율을 상대국들과 맺는다면 이는 탄핵의 조건으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1. 참교육 2014.09.19 18:50

    미친정부입니다.
    교육, 의료, 철도, 수도.... 전작권에 이어 주식인 쌀까지 시장에 내놓겠다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식량주권을 포기해 식민지를 자청하는 정부 완전히 미쳐 돌아갑니다.

    • 늙은도령 2014.09.19 20:59 신고

      정말 미친 정부입니다.
      최후의 먹거리들을 임기 동안 다 발라내겠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기능을 최소화시키겠다는 뜻이지요.

  2. 重傳/이희빈 2016.01.04 09:43 신고

    경찰(警察), 검찰(檢察), 감찰(監察), 입법(立法), 사법(司法), 행정(行政), 모두 각자의 임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공직자들이 국민을 우롱하고 자기 자신이 맡은 임무와 책무를 다하며 심부름을 다하지 않고
    국민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들입니다...
    문제는 이 땅의 중간 리더들이 잘못하여 이 치욕의 역사를 외면하고 무슨 민주주의를 하겠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랏님도 못살고 떠나시지요?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 현주소가 이렇습니다!
    http://cafe.daum.net/gmot/6L12/7679


어떤 책들은 감히 서평을 쓰는 것조차 누가 되는 것들이 있다. 책의 첫 장에서부터 끝장에 이르는 동안 온몸을 관통하는 지적 선율과 시대를 관통하는 성찰에 지상의 언어가 모두 초라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 시대의 지식과 경험을 빌렸으되 영원 불멸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여기 이 책이 그렇다. 칼 폴라니의 몸을 빌어 1944년에 쓰여진 《거대한 전환》은 책의 부제처럼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유럽에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 책이 2009년에 이르러서야 한글로 번역된 것은 미스터리 그 자체라 할만하다. 이 책과 함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으면 인류의 근현대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몰락하는 시점에서 자기조정 시장(시장경제)과 그것을 떠받드는 사상과 이념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이 책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운명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던 것들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먼저 이 책의 94페이지를 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시장 근본주의자와 신자유주의 핵심으로 모든 시장정보가 공개되는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면 최고의 효율성을 이루어 인류 전체가 풍요로워진다는 아이디어)의 문제를 이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한 문장이 있었던가? 인간을 노동으로, 자연을 토지로 변환시킨 자기조정 시장은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인간 욕구를 파괴해버리고 단 하나만을 남겨놓는 사탄의 맷돌처럼 애초부터 자기조정 시장이란 아이디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허구였다. 



자신이 정식화했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애덤 스미스의 자기조정 시장이란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처럼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어도 실현될 수 없다. 시장에 주어진 모든 정보를 검토한 후 거래를 하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사인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원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허구의 아이디어인 자기조정 시장이 경제체제의 축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호황은 없었고 주기적인 공황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없어서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을 말한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칼 폴라니처럼 자기조정 시장의 본질을, 그 화려한 유혹의 이면에 자리잡은 탐욕과 착취의 시스템을 낱낱이 밝혀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조차도 이익을 둘러싼 자본과 계급 간의 투쟁에만 집중했을 뿐, 자기조정 시장이 가지고 있는 파국적 결말의 필연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23가지》에서 말한 것처럼, 지구에 대해 선입견이 없는 외계인이라면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자기조정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시장 경제란 선진국과 초국적기업 및 기업집단 간의 불평등한 거래를 숨기기 위한 허구의 개념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는 선입견이 있는 인간이 보더라도 자기조정 시장이란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핵심임을 알게 됐다.     

 


다시 209페이지를 보자.



시장 패턴이라는 것은 잠재적으로 오직 그것에만 따라오는 고유한 동기, 즉 물물교환과 교역이라는 동기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종의 특별한 제도를 따라 창출할 수 있으니, 그 특별한 제도가 바로 시장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경제 체제를 시장이 통제할 경우 전체 사회 조직을 압도해버릴 만한 결과가 나오는 이유이다.


 

합리적인 인간의 자유롭고 이기적인 이익 추구 행위가 자기조정 시장의 중재하에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애담 스미스의 선언이 있은 후, 인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돈벌이에 나설 수 있었다. 자기조정 시장의 아이디어, 즉 자유주의 경제가 순식간에 전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데이런 이익 추구의 무한경쟁은 전세계를 초토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거의 10년 단위로 되풀이되는 경제공황과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자원, 더욱 심해지는 지구온난화와 대지의 사막화, 토지의 대규모 오염, 물 부족 사태, 천연자원의 고갈, 미세먼지의 범람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일본의 제1원전 폭발과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폭주는 지구의 반발을 불러와서 인류를 종말로 내몰고 있다.


                                                       2008년 금융 대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결국 칼 폴라니의 분석처럼 자기조정 시장이란 유한한 지구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아이디어에 불과하며 금융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실물경제를 담보로 한 거대한 지적사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파괴적인 자기조정 시장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사회의 근간인 상호성과 재분배의 회복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역할을 하는 사회의 회복, 바로 그것이 칼 폴라니가 제시하는 해답이며 지속 가능한 경제의 실현이다.


 

마지막으로 603~604페이지를 보자.



따라서 사회의 발견은 자유의 종말일 수도 있고 그것의 재탄생일 수도 있다...인류는 더욱 성숙해질 것이며, 복합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갖춘 채 존재할 수 있다...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셈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천혜의 땅에 세워진 미국의 경제가 무너지고대부분이 선진국인 유로존이 위기에 직면한 현재,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그 원인과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성경 같은 책이다. 회의 재발견, 그것만이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는 미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칼 폴라니가 육화된 노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 폴라니의 성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위험사회》는 《거대한 전환》 못지않은 책이다.



현대의 상황을 유동하는 액체로 정의한 바우만의 성찰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맥을 같이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푸코의 성찰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칼 폴라니의 작은 오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인류가 물보다 싼 석유를 대체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칼 폴라니의 성찰이 바우만의 성찰보다 더 유효할 수 있다.     



신주유주의 이후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일반 국민은 물론 이 땅의 지도자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읽고 또 읽어야 하는 보물 같은 책이다아울러 이 땅에서 진보좌파의 이름으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들 중에 합리적 자유주의, 즉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학자와 통상관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과 노동 개혁, 금융 개혁과 관치 경제 탈피는 진정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했지만 그 결과가 자살률 1위의 무한경쟁 사회, 내수가 없는 수출 중심의 일방적 경제,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기본적 사회안전망의 부족, 보편적 복지제도의 미비, 1000만 명을 육박하는 비정규직, 거의 4000조에 이르는 부채로 넘쳐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는 것이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다음에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새로운 대학민국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국가 개조의 맨 처음에 칼 폴라니의 성찰이 주요함은 《거대한 전환》이 증명해주고 있다. 

  1. 태봉 2014.07.19 18:03

    좋은 글,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 백승준 2015.03.24 03:17

    좋은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 늙은도령 2015.03.24 04:32 신고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금은 어렵더라도 끈기있게 읽다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길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예전만큼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경제규모도 예전보다 수백 배 이상 커졌습니다. 1인당 GDP도 30,000만 달러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현 대통령은 '줄푸세'를 통해 임기 내 40,000만 달러에 이르는 기반을 다지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달콤한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집니다. 경상수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나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런 모순된 경향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세계화의 부작용을 다룬 몇 권의 책을 중심으로 모순의 기원을 파고들어갈까 합니다. 《블랙스완》,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 《롱테일 경제학》을 중심으로 노력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모순을 밝혀보겠습니다. 이 책들의 저자들은 너무나 당연해 의심해본 적이 없는 보편적인 진리가 부분적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 예로서 2008년 금융위기와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를 대체해가고 있는 가벼운 경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단 하나의 증거만으로 이전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세 권의 책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2030세대들은 이전의 세대들보다 더욱 공부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 세 권의 책은 그 기원과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기도 합니다. 



 

 

먼저 세 명의 저자는 불평등의 기원과 그의 심화를 밝히기 위해 마테효과(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 마저 잃어버리라, 사악한 경제학자들이 성경에서 찾아낸 부익부빈익빈의 근거)와 파레토 법칙(모든 공동체에서 전체를 먹여살리는 것은 뛰어난 20%의 엘리트다, 차별의 근거와 엘리트주의로 악용)과 파레토 최적(사회와 시장참여자 모두에게 최적의 이익이 주어진 상태. 따라서 추가적인 자신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손해를 피할 수 없는 상태. 문제는 이런 완벽한 균형상태가 여러 가지여서 코에 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된다. 이것 때문에 합리적 시장이나 시장의 균형가설에서 출발한 모든 시장이론이 실패한 것이며, 반면에 모든 이에게 최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경제학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우스 종형곡선의 왜곡과 오류(쓸모없는 부분이라고 무시된 종형곡선의 양쪽 하단에서 직선처럼 길게 늘어진 부분-롱테일-이 실제로는 하위 99%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가우스 곡선은 간과했다는 것으로, 프랙털이론과 롱테일경제학의 학문적 근거를 제공)부터 파고듭니다. 저자들은 따르면 이 세 가지가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고 상호 강화되면서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초장기 경제불황과 1929년에 시작된 선진국 중심의 경제대공황보다 더욱 심각한 경제대침제기를 초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2008년 미국 월가와 런던 금융시장 발 금융 대붕괴(정확히는 신용의 대붕괴)에 의해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미국식 무정부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가 한계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슈퍼리치들도 상당한 돈을 날려버렸지만, 거의 전 재산을 날린 중하위층의 타격은 회복불능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음에도 유대인들이 수십 년째 이사장을 맡고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우리의 한국은행과는 달리 민간은행이다)는 부자들의 금고를 다시 채워주고, 무한대의 돈놀이를 할 수 있는 미국 중심의 신용 체계가 무너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이를 위해 연방준비제도는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실시했고, 슈퍼리치와 상위 10%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날린 손실을 만회했지만, 나머지 90%는 빈곤의 악순환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이 바람에 선진국의 주식시장은 금융 대붕괴 이전을 넘어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천문학적인 재산을 날린 슈퍼리치들은 금융 대붕괴 전보다 더욱 부유해졌습니다. 자본주의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공황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하위층의 지갑을 털어 만회하곤 했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은행과 금융시장을 오가며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밀어붙인 것입니다.

 

 

무제한 양적완화 때문에 천문학적인 유동성이 시중에 풀렸지만, 이것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은행과 금융업체를 살리고 주식시장을 띠우는데 사용됐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동자의 소득을 보장하는 실물경제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지만, 슈퍼리치와 상위층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낙수효과는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죽하면 세상이 1%의 부자와 99%의 가난한 사람으로 나뉘었다는 말들이 전세계를 회자하겠습니까? 미 연방준비제도의 무제한적 양적완화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이라도 찾아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공존과 상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일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됐습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소득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노동자들은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놓고도 다투어야 할 상황까지 내몰리게 됐습니다. 평균수명이 늘은 만큼 매년마다 노동시장으로 편입되는 새내기들과 피터지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 것입니다.  

 

 

허면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수없이 많은 일자리도 없애버린 2008년의 금융 대붕괴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던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성경에 나오는 문구를 차용한 마테효과와 파레토의 법칙부터 살펴봐야 합. 우선 가우스 이론에 근거한 통계가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밝힌 《블랙스완의 도움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월가의 현인, 탈레브는 《블랙스완》에서 “확률과 수학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실 세계의 근소한 수리적 변화는 정규분포곡선으로 대표되는 완만한 무작위성으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가증식하고 거친 무작위성으로 추정된다. 수식화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이 아니라 만델브로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이란 뉴턴역학이나 다윈의 진화론,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처럼 선형적으로 돌아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이것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인데, 원체 방대한 내용이라 최소 4~5편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습니다). 만델브로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의 기반을 이루는 두 개의 원리에 대해 짧게 다뤄보겠습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비약을 통해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내는 양자역학의 근간이 되는 두 가지 원리는 불확정성 원리와 베타원리입니다. 

먼저 불확정성의 원리란 물질과 반물질이루는 기본입자들이 질량을 지닌 입자의 성질을 띠면서도 동시에 운동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형태인 파동의 성질도 띠어서 어느 하나를 파고들면 나머지가 무너지기에 우주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불확정한 상태로 머문다는 원리입니다(입자물리학적으로 보면 게이즈장 이론).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빛이 입자이면서도 파동이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론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됐습니다.

 

 

두 번째인 베타원리는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닌 입자나 에너지가 서로를 밀어낸다는 원리입니다. 우주를 이루는 모든 기본입자들이 다차원적으로 압축돼 있던 특이점에서 거대한 폭발(빅뱅)이 일어나면서 우주가 창조된 것도 이 원리가 바탕이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우주를 만들어낸 기본법칙인데, 이런 양자역학의 원리들을 통해 우주가 뉴턴역학에 의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뉴턴역학의 붕괴는 다윈의 진화론을 차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물론, 헤겔의 변증법에 기초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도 무너뜨렸습니다. 우파의 신화로 자리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좌파의 신화로 자리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류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적 비약(진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가 이에 속한다)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예측가능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쓸모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물리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시되고 있는 초끈이론(양자역학과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합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통일이론의 핵심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과학란에서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이 양자역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들이 채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금융위기를 예언해 유명세를 탄 블랙스완의 저자 탈레브는 이 두 가지 이론에 근거해 가우스 정규분포곡선(뉴턴역학의 핵심인 작용과 반작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에 따라 통계를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는지 2008년 발 금융시장 대붕괴을 통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선형방식을 따르는 기존의 통계수치는 현실의 변수들을 모두 다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인 편향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책의 제목인 '블랙스완'은 인간이 발견한 백조들이 모두 다 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검은 백조는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수천 년 동안 이런 믿음이 강화되다가 어는 동물학자가 검은 백조를 발견함에 따라 수천 년 된 믿음이 단 한 번에 무너져내린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사항에 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성찰처럼 인간은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인류 문명에 최악의 선물을 남긴 플라톤의 주름지대에 관한 내용은 별도의 글로 다루겠습니다).   



실제로 인간은ㅡ집단도 마찬가지이지만ㅡ자신의 성향과 기호, 경험과 환경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필요한 쪽의 의견만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로 구별되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경우에는 이런 확인 편향의 오류가 심각하다 못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 간에도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이런 확인 편향의 오류 때문에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위가 홀쭉하고 밑이 넓은 종 모양의 곡선)에 경도된 주류 경제학자들은 2008년의 금융시장 대붕괴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의 양극화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자기조정 능력이 있는 완전시장을 방해하는 국가의 개입이나 과잉된 규제, 초국적기업의 담합과 내부거래, 경제정책의 일관성 부족,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정치인 등이 문제라고 합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합니다. 애당초 보이지 않는 손이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면서요.


   

주류 경제학과 현장과의 차이를 확인 편향 오류 등으로 설명한 탈레브는 부의 양극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마태효과를 얘기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는 마태복음 13장 12절에 나오는 내용인데,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것이며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질 것이라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우화에 불과합니다. 



낮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예수가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하늘에 가면 더욱 대접을 받는다는 뜻에서 한 말을 주류 경제학자들이 부의 양극화가 시장경제의 발전 도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경제현상이라고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는 중에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피살된 것을 전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부수적 피해라고 말한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이번에는 부의 양극화를 최초로 밝혀낸 파레토의 법칙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였던 파레토는 빈부격차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몇 세기에 걸쳐 국가들의 부와 소득에 대한 다량의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만델브로브트는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는 한 축에는 소득 수준을, 그리고 다른 축에는 그 소득 기준을 가진 사람 수를 표시해 놓고 그래프용지 위에 데이터 차트를 그리자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동일한 그림이 그려졌다. 사회는 빈자 대비 부자의 비율이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완만히 기울어지는 <사회적 피라미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닥은 매우 두껍고, 부자 엘리트들이 속해 있는 위는 매우 얇은 <사회적 화살>에 더 가까웠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철저히 분석한 파레토는 소득 분포가 가우스의 정규분포곡선(종형곡선)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의 부의 대부분을 소수의 부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화 된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법칙에 따르면 억만장자가 억대의 돈을 버는 확률이 가난한 사람이 만원을 버는 확률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20 : 80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득불평등이 더욱 커지면 1 : 99 사회도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2008년 금융위기가 가져다 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파레토에 의해 마태효과가 공식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물론 최근의 기준으로 보면 파레토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보여줬습니다. 파레토가 개인적으로 구할 수 있는 국가의 자료가 일부 유럽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고, 통계와 분석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티핑포인트》와 함께 80대 20법칙을 넘어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롱테일 경제학의 도움을 받아 보겠습니다(가우스 이론에서 벗어나 프랙털 이론을 따른 이유는 삼성전자의 어닝쇼크, 미래의 먹거리가 문제야를 참조하십시오). 이 책의 저자 크리스 엔더슨은 미국의 속담을 인용하며 “만일 단 몇 명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을 갑부가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가우스 곡선의 꼬리 부분이 무한히 길어지면 종형을 이루는 머리와 몸통 부분을 넘어설 수 있다.



이는 단 몇 명이 갑부가 된다한들 한 국가의 부나 전 세계의 부를 모두 독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갑두들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많은 부가 가우스 종의 곡선에서 ⅹ측 부분과 평행하게 이어지는 긴 꼬리(롱테일) 부분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류들의 시장경제의 규모보다 그것에서 잘려나간 꼬리 시장의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이것을 양성화할 수 있으면 가벼운 경제의 도래가 가능하며, 부의 양극화도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소수에게 소득이 집중되는 부의 양극화는 《롱테일 경제학》의 주장도 무효로 만들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부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중산층의 수는 계속해서 줄고 있고 하위층과 극빈층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게다가 인간 수명의 연장은 종의 차원과 개인의 차원에서는 축복일지 모르지만,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는 상황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고령화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출산율이 세계에서 최저로 떨어지며,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지고 계층의 이동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2030세대가 오죽하면 삼포세대라는 말로 회자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중산층이 무너져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하층민은 극빈층으로 떨어진 2008년 이후에는 부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빨라지고 있습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다보스 포럼에서 전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초국적 기업의 총수와 거대 금융 자본가, 세계적 언론기업과 각국의 정치지도자, 국제기구 책임자와 급진적 지식인들의 모여서 공공연히 자유시장 자본주의 실패를 얘기하는 것(이것도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쇼비지니스에 불과하다)도 이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인류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릅니다.  



최근에는 허리우드 영화관계자들이 최고의 영화로 뽑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히로인인 비비안리가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부의 양극화가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는 오늘에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도 믿기 어려울 판입니다. 기존의 시장경제로는 부자들의 재산을 늘릴 수 없어서 폭력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늘고 있고, 빈곤의 거버넌스(마이크로 파이낸스라고 알려진 미소금융을 말함)를 통해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지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좌파게티 2014.10.17 11:41

    아고라에 이어 블로그에서도
    명료한 글과 좋은 책들...
    소개 잘 받고 갑니다. ..
    시간나는대로 탐독해야 겠네요...

  2. 무대포 2018.12.02 13:36

    좋은글 감사드려요.
    너무너무~~~



죠셉 콘래드의 <어둠의 핵심>은  위대한 명화인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 되었던 소설입니다.

선원이었던 죠셉 콘래드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라고 할까요?

제국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고전 중 하나입니다.

너무나 멋진 문장들이 많아 어지러울 지경이지요.

그 중에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분들이나, 멋진 문장으로 이루어지 글을 쓰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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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강물에도 변화가 찾아와 그 평온함은 차츰 빛을 잃으며 점점 더 심오해졌다. 이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통하는 수로의 고요한 위엄을 보이며 펼쳐져 있던 넓은 옛 강은 여러 시대에 걸쳐 양쪽 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한 후 이제 저무는 날을 맞아 아무런 동요 없이 휴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존엄한 강물이 한번 찾아왔다가 영영 사라지고 마는 짧은 하루의 그 생생한 열기 속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기억이라고 하는 장엄한 빛 속에 잠겨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야말로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의 운명만큼이나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이 세상이 창조되던 날부터 우리 남성들과 만족스럽게 공존해 온 모종의 괘씸한 사실이 툭 튀어나와서 그 여자들의 세계를 모두 허물어뜨리고 말 테니까.


 

삶 속의 죽음처럼 흐르는 강 안팎에서도 진행 중이었다네...그것은 마치 악몽을 해명할 실마리들을 찾아 지겨운 순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들은 나로부터 6인치도 떨어지지 않게 가까이 지나가면서도 나를 힐끔 쳐다보는 일조차 없었는데 그건 불행한 야만인들이 보이는 그 철저하고 죽음 같은 무관심이었어.


 

그늘 속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마치 어떤 연옥의 암흑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졌다네. 가까이에 여울이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물 소리가 끊임없이 밀려와서 사람의 숨소리나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그 숲 속의 음울한 정적을 신비로운 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었어. 그건 마치 허공으로 쏘아 올린 지구가 질주하며 내는 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리게 된 것 같았어.


 

일정 기간의 고용 계약이라는 합법적 수단으로 해안 각처에서 끌려온 후 자기네 체질에 맞지 않는 환경에 내던져진 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다가 지금은 병이 들어 비능률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니까 작업장에서 기어나가 그늘에서 쉬도록 허락되었던 거야. 이 죽어가는 형상들은 이제는 공기처럼 자유로워졌지만 한편 공기처럼 엷은 존재들이기도 했어. 


 

그가 말을 마칠 때마다 그 표정이 나타나서 마치 자기가 방금 한 말에 봉인을 함으로써 그 흔해빠진 어구의 의미마저 절대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으로 비치게 하는 듯했거든...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그는 특유의 미소로 그 말을 봉인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관리하고 있던 암흑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리는 것 같았어.


 

대지 속의 그 작은 공지를 둘러싸고 있던 말없는 밀림은, 마치 악이나 진실처럼, 무언가 위대하고 정복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내게 엄습해 왔으며, 이 어처구니없는 침입이 종식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는 듯했어.


 

왜냐하면 세상에 그 어떤 꿈 이야기도 꿈 속에서 느낀 것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야. 발버둥치는 반항의 떨림 속에 혼재하는 그 부조리함, 놀라움 및 당혹감이라든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 바로 꿈의 본질이겠지만, 이런 것을 어떻게 이야기 속에 옮길 수 있겠는가......


 

우리 일생에서 그 어떤 특정한 시기의 삶에 대한 지각을 옮길 수는 없다구. 그 삶의 진실, 그 의미 그리고 그 오묘하고 꿰뚫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 말이네. 그걸 전달하기는 불가능해. 우리는 꿈을 꾸듯이 살고 있으며, 그것도 혼자서......


 

강가의 무거운 밤 공기 속에서 인간의 입을 통하지 않고 저절로 형성되고 있는 듯하던 그 이야기가 내게 불어넣고 있던 희미한 불안감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될 만한 하나의 문장, 하나의 낱말도 놓치지 않으려고 경청하고 있었다.


 

그는 짧은 지느러미발처럼 새긴 팔을 펴고 숲이며 샛강이며 진흙이며 강이며 하는 것들을 모두 끌어안을 듯한 몸짓을 하는 것이었네.그것은 마치 햇빛 비치는 대지의 얼굴 앞에서 불경스럽게 팔을 저어 밀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라든가 숨어 있는 악령이라든가 그 핵심에 들어 있는 심오한 암흑을 향해 배반적 호소를 표하는 듯한 몸짓이었네.


 

그들의 뒤에서 그 두 그림자는 기다랗게 자란 풀 위로 천천히 끌려가면서도 풀잎을 하나도 꺾지는 못했어.


 

살다 보면 우리에게 짬이 전혀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이따금 과거가 회고되듯이 그렇게 과거가 우리에게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는 법일세. 과거는 불안하고 소란하기만 한 꿈의 형태로 찾아왔으며, 식물과 물과 정적으로 구성된 기이한 세계의 그 압도적인 실체 사이에서 경이롭게 기억되었지. 이 생명체의 정적은 평화로움과는 조금도 닮지 않고 있었네. 오히려 그것은 어떤 헤아리기 어려운 의도를 감싸고 있는 달랠 수 없는 세력이 지닌 정적이었어. 그래서 그 정적은 마치 복수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 후에 나는 그 정적에 익숙해졌고 그걸 더 이상 볼 수도 없었고 또 볼 시간도 없었지.


 

단순히 표면적인 일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다 보면, 표면 뒤의 실체, 바로 그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네. 내면의 진실은 감추어져 있는데, 그건 다행이지. 다행이야. 그러나 그것이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사뭇 느낄 수는 있었지. 그 신비로운 정적이 내가 벌이는 보잘것없는 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자주 느낄 수 있었단 말일세.


 

밤이며 이따금 커튼처럼 둘러선 밀림 뒤쪽에서 북소리가 강으로 울려와서 첫새벽이 될 때까지 마치 우리의 머리 위를 선회하듯이 허공에 희미하게 걸려 있었어. 그 북소리가 의미하는 것이 전쟁인지 평화인지 아니면 기도인지를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도 없었지. 새벽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것은 대지에 내려앉은 싸늘한 정적이었어. 나무꾼들은 잠이 들었고 그들이 지펴놓은 불은 나직이 타고 있는데 불이 붙은 나뭇가지가 탁탁 튀는 소리에 우리는 놀라곤 했어. 우리는 어떤 선사시대의 대지, 그것도 어떤 미지의 유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대지 위를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우리는 마치 어떤 저주받은 유산을 멋모르고 소유했다가 결국은 깊은 고뇌와 잇따른 고통을 대가로 치른 후 굴복하고 만 최초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네.


 

그러나 배가 강의 한 만곡부를 허덕거리며 돌 때면 별안간 우리는 미동도 하지 않는 무거운 나뭇잎 장막 아래로 골풀 담장, 뾰족한 초가 지붕, 터져 나오는 함성, 검은 팔다리의 소용돌이, 집단적인 손뼉소리, 발 구르는 소리, 흔들리는 몸통, 굴리는 눈알 따위와 마주치곤 했어. 이 검은색의 영문 모를 광기의 가장자리에서 기선은 느린 속도로 끙끙대며 기어가고 있었어...우리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세계가 우리와는 시간적으로 너무 멀어서 우리가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우리가 태초의 밤, 아무런 흔적이나 기억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시대의 그 캄캄한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 땅은 이 세상의 땅같이 보이질 않았어. 우리는 정복당한 괴물이 족쇄를 차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었거든. 그러다가 거기서 괴물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거야...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동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생각이 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인간의 마음은 무슨 생각이든 할 수 있는 법이야. 왜냐하면 모든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과거까지 그 속에 모조리 들어 있기 때문이야.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기쁨, 두려움, 슬픔, 헌신, 용기, 분노가 있겠지만,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진실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옷을 벗어버린 진실이지. 바보들이야 입을 벌리고 몸을 떨고 있겠지만, 용감한 인간이라면 진실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네...원칙이란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 몸에 걸친 옷이라든가 예쁜 천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몸을 세차게 흔들기만 해도 그 천은 떨어져나가게 되지...물론 바보는 그저 겁을 먹고 있기 때문에 또 더러는 까다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안전할 수 있어...이 모든 일 속에는 표면적인 진실이 충분히 들어 있어서 나보다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네.


 

읽던 것을 중단한다는 것은 마치 단단한 옛 우정의 안식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같이 느껴진단 말이야.


 

그 놈의 것이 어느 순간에 멎어버릴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숨을 죽이고 동력륜의 날개가 물을 차는 소리를 하나하나 아슬아슬하게 듣고 있었어. 그건 마치 사람의 목숨이 이제 막 꺼지려는 촛불처럼 깜박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았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한 채 무시해 버리는 것들이 사실 무슨 문제가 되었겠는가?...이따금 우리는 번뜩이는 섬광 같은 통찰을 얻게도 되지. 그러나 그 일의 본질은 표면 아래 깊숙이 가려져 있어서 내 인식 범위라든가 내 간섭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일세.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따진다면 이 세상의 나머지 부분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구. 아무데도 없었어. 없어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이었지. 작은 속삭임이나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청소되어 버렸던 거야...사람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인해 경련을 일으켰고, 손은 가볍게 떨렸으며, 눈은 깜박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들은 아직도 태초의 시간을 살고 있었고, 그래서 말하자면 자기네에게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는 체험이라고는 전혀 물려받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무언가 그들을 제약하는 힘, 즉 개연성을 거역하며 작용하는 인간의 은밀한 힘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어. 나는 관심을 재빨리 첨예화시키며 그들을 바라보았지.


 

그 당시 나는 그 검둥이들이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과 마주 서서 마치 깊은 바다에 생기는 물거품이나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비밀의 표면에 이는 잔물결을 바라보듯 그 사실을 눈부시게 바라 보고 있었네.


 

극단적인 슬픔도 궁극적으로는 격렬하게 발산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냉담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아...... 


 

그건 마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무에게 흔들리지 말라고 명령한 격이었어.


 

그가 뻐끔뻐끔 파이프를 빨아들일 때 얼굴은 마치 작은 불길이 규칙적으로 깜박이는 가운데 밤의 어둠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 같았다. 성냥불이 꺼졌다.


 

한 커다란 북에서 울려오는 단조로운 고동소리로 인해 허공에는 무엇으로 감싼 듯한 충격과 지속적인 진동이 가득했었어.검고 평평한 벽처럼 둘러선 숲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혼잣말로 음산한 주문을 외우는 끈질긴 저음이 벌집에서 번져오는 벌들의 붕붕거림처럼 들려와서 마치 마약처럼 아직도 잠이 덜 깬 내 감각에 이상한 효력을 던지고 있었지.  


 

이제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되어버린 그의 지쳐빠진 두뇌에는 망령 같은 이미지들이 출몰하고 있었어. 재산과 명예의 이미지들이 그 고귀하고 고매한 표현력이라는 탕진되지 않는 천부의 재능 주위를 비굴하게 맴돌고 있었던 거야...원래의 커츠가 침투해 들어갔던 그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악마적 사랑과 비현세적인 미움은 이제 원시적 감정을 만끽하며 거짓된 명성, 헛된 탁월성, 겉으로 보기에 성공과 권세로 여겨지던 그 모든 것을 탐하고 있던 그의 영혼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있었어.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그 눈은 촛불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온 우주를 감싸 안을 듯이 활짝 뜨고 있었고, 암흑 속에서 고동치고 있는 모든 심장들을 침투할 수 있을 만큼 꿰뚫고 있었어. 


 

화려한 외양과 무서운 실체에 대해 싫증낼 줄 모르는 그림자, 밤의 그늘보다 더 어두우며 화려한 달변을 숨기고 있는 주름진 천을 고귀하게 걸친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되살아났던 거야...심장의 고동처럼 감싸여진 소리를 규칙적으로 울리는 북소리 같은 것들이, 다시 말해 만물을 정복하는 어떤 암흑의 심장이 그의 환영과 더불어 그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어.


 

그 구름 낀 저녁의 슬픈 빛이 모두 그녀의 이마로 숨어버린 듯이 그 방은 더욱 어둡게 보였어.


 

나는 그녀와 그를 똑 같은 시간에 보고 있었던 거야. 그의 죽음과 그녀의 슬픔 말이네. 그가 죽은 바로 그 순간에 그녀의 슬픔을 보는 듯했어.


 

그녀의 그 금발 머리카락은 허공에 남아 있던 잔광을 모두 포착한 듯 금빛을 내고 있었어. 

  1. 태봉 2014.07.19 18:41

    와우 대단합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찬탄이...대신 이해할려고 하니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네요 ^^ ㅎㅎ


죠셉 콘래드의 소설 『로드 짐』에 나오는 명문장들을 일부만 모았습니다.

제국주의 시절의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소설로 주인공이 여러 가지 면에서 저와 비슷한 아웃사이더입니다.

선원이었던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제국주의 시대의 야만을 글로 옮겼는데, 최근에 와서는 당시의 유럽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죠셉 콘래드의 소설들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지만 요즘 소설과는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현대소설의 시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의 소설에는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표현들이 참 많습니다.

글을 쓰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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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외면적으로 내세우는 것들의 은밀한 진실...

 


위험도 직접 목격되지 않을 경우에는 인간의 생각 속에서 불완전하고 막연할 뿐이다.

 

 

죽음과 형제 관계에 있는 잠 앞에서는 모두들 평등했다.

 

 

잠을 자는 무리 위로 미약하지만 꾸준한 한숨 소리가 이따금 떠돌았다. 어지러운 꿈에서 발산되는 소리였다.

 

 

어쩌다 흘깃 보게 된 흐릿한 진리를 근거로 하나의 철학 체계를 펼치려는 사상가처럼 백치 같은 둔중함을 보이고 있었다.

 

 

짐은 그를 바라보다가 마치 마지막 이별을 한 뒤처럼 결연히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마치 그의 정령이 흘러간 시간 속으로 날갯짓하며 들어간 후 그의 입술을 빌려 과거로부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념이라니! 그것은 떠돌이요 방랑자로서 우리 마음의 뒷문을 찾아와 두드리고, 우리의 자질을 조금씩 앗아가며, 이 세상에서 점잖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게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수해야 하는 몇 가지의 단순한 관념에 대한 믿음을 부스러기마저 얼마쯤 가져가 버리기도 하지.

 

 

그의 몸은 당겼다 놓은 하프의 현처럼 팽팽하게 떨리더군.

 


그 심한 떠벌림 속에 그런 논리의 실오라기가 들어 있다니.


 

삶의 가혹함이 그의 자기만족적인 영혼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었던 것은 마치 바늘을 가지고서 바위의 반질반질한 표면에 아무런 흠집을 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인간의 내면적 존재의 품위를 위해서는 육신의 단정함을 위해 옷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겠나.

 

 

한 문장이 지니는 힘은 그것이 구성하는 의미와 논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법이야.


 

내가 볼 수 있도록 그가 허용해준 자신의 모습은 짙은 안개 속의 갈라진 틈으로 흘깃 보이는 풍경들 같았어. 그 생생하지만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세부 광경의 조각들은 한 지역의 전체적인 경치에 대해서 조리 있게 알 수 있도록 해주진 않아.그 조각들은 호기심을 부추기기만 했을 뿐 충족시켜 주지는 않았어. 그 조각들은 그 지역에 대한 방위 잡기라는 목적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까. 대체로 말해서 그는 나를 오도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는 죽어도 좋다고 체념했을지 모르나, 더 이상 공포의 상황을 겪지 말고 일종의 평화로운 몽환 상태에서 조용히 죽고 싶었을 거야.죽으려고 모종의 준비를 하는 사례는 그리 드물지 않겠지만, 뚫을 수 없는 결심의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들이라도 질 것이 뻔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사례는 보기 어려운 법이야.


 

희망이 줄어들면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욕구는 점점 더 강해져서 결국은 삶의 요구까지 정복해 버리게 되지...턱없이 큰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이라면 그걸 잘 알고 있지. 이를테면 난파선에서 구명정으로 빠져 나온 사람들이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들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자연의 힘이나 군중의 우둔한 포악함에 대항해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걸 알고 있을 거라는 말일세.


 

그는 나를 상대로 말하는 것이 그저 내 앞에서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어. 어떤 보이지 않는 인격체랄까, 자기와는 적대적이면서도 자기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파트너랄까. 자기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랄까. 뭐 그런 상대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던 거지.



즉 제 나름의 요구를 하고 있는 평판 좋은 사람들과 제 나름의 절박함을 겪고 있는 평판 나쁜 사람들에게 다 같이 공평해지려면, 그 논쟁에서 판정을 내린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인데도 말이야...나는 모든 진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관행이라든지 허위의 본질적 성실성을 바라보도록 요구 받고 있었던 거야. 그는 한꺼번에 모든 면을 향해 호소하고 있었지.

 

 

귀에는 익지만 일그러진 소리로 들리는 이름들이라 마치 여러 시대에 걸쳐 말없는 세월의 손길이 그 이름들 위에 작용한 것 같더군.

 

 

세월이 그를 따라잡고는 앞질러 버렸던 거지. 세월은 몇 가지 초라한 선물을 남긴 후 그를 절망적으로 뒤쳐지게 해버렸던 거야.

 

 

그의 무의식적인 얼굴은 언뜻 지나가는 경멸, 절망과 결의의 표정들을 차례로 반영하고 있었어. 마치 마법의 거울이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비현세적 형상들을 반영하는 것 같더군.

 

 

환자의 병상 곁에서 밤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영혼이 쥐어짜는 희미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거야.

 


그는 암담하고 절망적인 대양의 기슭에 서 있는 외로운 사람처럼 거대한 어둠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던 거야.

 


말은 세월을 통해 멀리까지 옮겨가며, 허공을 나는 총알처럼 파괴를 가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것치고 그런 종말감 말고 따로 무엇이 있겠는가? 끝장! 종결! 이런 강력한 말들이 생명의 집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운명의 그림자를 쫓아낼 수 있는 거야...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정말이지 희망은 있어. 그러나 두려움 또한 있는 법이야...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죄뿐인데도 그가 자기의 불명예를 너무 심각히 여긴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해...그는 너무 섬세하고 섬세해서 아주 불행했던 거야.

 

 

그 사념이 어둠 속의 물웅덩이처럼 아른거리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만, 그 깊이를 헤아리기 위해 접근하는 데 대해서는 절망하고 있었지.

 


그의 상처 입은 영혼이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깡총거리며 퍼덕이다가 어떤 구멍에 빠져 결국은 영양실조로 조용히 죽어가는 동안, 그가 늘 하던 대로 일상의 중요 용무를 보며 먹고 마시고 자는 데 필요한 생계비를 나는 그의 속에 억지로 쥐어주었지.

 

 

백분의 일이라는 가능성 말이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늘 그 백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가능성이거든.

 

 

그 여린 날개의 청동색 광채라든지 하얀 선이라든지 화려한 무늬에서 그는 마치 다른 무엇을 보고 있는 듯했는데, 그건 죽어서도 손상되지 않은 화려함을 보여주는 여리고 생명 없는 나비의 조직만큼이라 쉽게 손상될 수 있으면서도 파괴는 거역하는 어떤 무엇의 이미지였어.



인간도 놀랍긴 하지만 걸작은 못 돼...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인간이 나타난 것처럼 보일 때가 가끔 있어. 인간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데도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인간이 모든 곳을 갖고 싶어 할까?


 

그는 등불이 밝게 비치는 곳을 벗어나서 불빛이 희미하게 테를 이루고 있던 가장자리를 거쳐 결국은 아무 형상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더군. 그 몇 발짝이 마치 이 구체적이고도 어지러운 세계로부터 그를 데리고 나간 것처럼 기이한 효과를 내고 있었어. 키가 큰 그의 형체는, 마치 그 실체를 박탈당한 것처럼, 허리를 굽힌 불명확한 동작으로, 보이지 않는 물체 위를 소리 없이 떠돌고 있었거든. 그가 실없는 관심을 쏟으며 영문 모르게 바쁜 모습을 엿보이고 있던 그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먼 거리로 인해 부드러워진 채 굵고 엄숙하게 굴러오는 듯하더군.


 

그의 일생은 고귀한 이념을 위한 희생과 열정 속에 시작되었고 그 후에 여러 종류의 길이며 낯선 길을 따라 참으로 먼 여행을 해왔지만, 어떤 길을 걸을 때건 비틀거림이 없었고 따라서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할 일도 없었지. 그때까지 그는 늘 옳았어. 그게 유일한 길이었음을 의심할 수는 없지.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무덤과 함정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광대한 평원은 흐릿한 빛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시경 속에서 아주 황량하게 보였고, 마치 여러 갈래 불길로 가득한 심연으로 둘러싸인 듯이 가장자리는 동그랗게 밝았지만 그 중심은 그늘져 있었어. 드디어 내가 침을 깬 것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자신보다 더 로맨틱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서였어.

 

 

내게 보인 것은 그가 확고한 걸음걸이로 뒤쫓고 있던 그의 운명이라는 실체와, 미천한 환경에서 시작한 후 열정, 우정, 사랑, 전쟁 같은 그 모든 고양된 로맨스의 요소들을 넉넉히 누렸던 그의 일생뿐이었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마치 자기네를 불안정하게 삶에 묶어두는 밧줄이 다른 사람의 밧줄보다 더 길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방향으로든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법이야.


 

욕망이라는 괴이한 고집이 그들로 하여금 온갖 형태의 죽음을 무릎 쓰고 했었지



불굴의 죽음이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목숨을 세금 걷듯이 앗아가는데도 교역을 갈망하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만 했어.


 

단지 탐욕 때문에 인간이 그처럼 집요한 목표에 매달릴 수 있고 그처럼 맹목적으로 끈질긴 노력과 희생을 할 수 있었다는 건 참으로 믿기 어려울 지경이야.

 

 

그 모든 정복, 신임, 명성, 우정, 사랑 같은 것들은 그를 지배자로 만든 동시에 사로잡힌 몸으로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야...그는 일종의 격렬한 이기심과 경멸적인 애정을 가지고 그 땅과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더군.

 

 

승전의 도덕적 효과는 그를 갈등에서 평화로 인도했고 죽음을 거쳐 사람들의 가장 깊숙한 내면 생활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하지만 햇빛 아래 펼쳐진 대지의 어둠은 속을 헤아릴 수 없이 영속하는 안식의 외양을 지니고 있었어.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으나 자기네가 거둔 성공이나 소중히 지키고 있을 만큼 우둔하지 못하고, 결국은 불우한 일생의 역정을 마치고 마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어.

 

 

이따금 그녀가 우리와 함께 앉아 있을 때면 작은 주먹으로 부드러운 뺨을 누르면서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 마치 우리 입에서 나오는 낱말 하나하나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가지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우리의 생존이 다른 사람들 위해 필요하되,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알게 될 경우 우리 각자는 여느 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유령이 나올 듯한 폐허에서 사랑이 맹세를 교환하는 기사와 소녀처럼 삶의 재앙이 던지는 그림자 아래서 만나 함께 살게 되었던 거야. 그런 이야기를 위해서는 별빛이면 충분했어. 그 빛은 너무 희미하고 아득해서 그림자의 형상을 드러낸다든지 강 건너편 기슭을 보여줄 수도 없을 정도였어.

 

 

이처럼 한 망령의 마력에 이끌린 가엾은 인간이 또 다른 유령으로부터 엄청난 비밀을 짜내려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것은 이 세상의 열정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어떤 와해된 영혼에 대한 저 세상의 소유권과 관계되는 비밀이었어. 내가 디디고 섰던 바로 그 땅바닥이 발 밑에서 녹아버리는 듯하더라니까. 게다가 그건 아주 단순했어. 하지만 만약에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에 의해 환기된 유령들이 비참한 마술사인 우리들 앞에서 서로의 항구성을 보장해야 한다면, 나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서도 나만은  그 과업의 절망적인 냉혹함 속에서 몸서리를 치고 있었던 거야.

 

 

진리도 기회를 얻어야 이기는 법이라고. 법칙이 있음도 의심할 수 없지. 마찬가지로 주사위를 던질 때는 어떤 법칙이 우리의 운명을 규정하는 법이야. 고르고 세심한 균형을 유지해 주는 것은 인간이 하인처럼 부리는 정의가 아니고 우연이나 운명이나 행운 같은 것들로서 모두 참을성 많은 시간과 연대 관계에 있지...우연은 시간과 연대하고 있지만 시간은 서두른다고 빨라지지 않는다고. 또 우연은 죽음과 적대 관계에 있지만 죽음은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야...운명은 우리를 희생시킬 뿐더러 도구로 삼기까지 하거니와 나는 마치 그 달랠 수 없는 운명의 작용을 눈으로 보게 된 듯했어. 


 

인간의 마음은 모든 세계를 포용할 만큼 넓고 모든 짐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만, 그 짐을 벗어 던질 용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의 마지막 인간인 것처럼, 오직 내 기억 속에서만 잠시 동안 살이 있는 듯했어...참으로 그곳은 이 지구상에서 상실되어 잊힌 미지의 땅 중의 한 곳이었어. 나는 그 불분명한 표면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튿날 내가 그곳을 영영 떠나면 그곳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내 자신이 망각의 세계로 들어가는 날까지 내 기억 속에서만 존속할 거라고만 느끼고 있었지.

 

 

잔인하고 끔직한 파국에 처해 보아야만 비로소 우리에게서 진실을 꺼낼 수 있는 법이니까.


 

마치 우리가 캔버스 위에 상상해서 그려놓은 그림을 오랫동안 곰곰이 들여다 본 후 마지막으로 등을 돌리는 기분이더군. 그런 그림은,그 속의 삶이 불변의 빛 속에 정지된 가운데, 퇴색하지 않고 미동도 없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지.

 

 

펜이 떨려 잉크가 튀겼고, 그는 그만두고 말았지. 더는 쓰지 않은 거야. 그는 자기의 시력이나 목소리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을 보았던 거지.

 

 

마치 압도적인 운명의 힘을 우리에게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뿐인 것처럼 말일세. 우리 사념의 무모함은 결국 우리의 머리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지.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니까.

 

 

우리 인간 자체가 지나친 잔인함과 지나친 헌신이라는 여러 갈래 어두운 오솔길에서 그만 스스로의 위대함과 스스로의 힘에 대한 꿈에 휩쓸린 나머지 맹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게 아닐까? 진실의 추구라는 게 도대체 무얼까?  

 

 

그가 이십 년간 사납게 공격적으로 멸시하며 협박해 오던 세계가 물질적 이득이라는 면에서 그에게 한 자루의 은화밖에 남기지 않았고, 그는 악마도 냄새 맡지 못하도록 그 자루를 자기 선실에 감춰두었다.

 

 

세상에는 영영 잊을 수 없는 광경이 있는 법이다.


 

허영심은 늘 우리의 기억을 상대로 음침한 속임수를 쓰는 법이며, 모든 열정의 진실은 그것을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게 할 약간의 거짓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그곳에도 그리움은 영그는지


 

 

길게 늘어진 시간이 석양에 걸려

하루의 끝자락으로 흘러가는 슬픔이 된다.

번성하는 어둠, 그 한 편엔

누군가의 사연이 낮게 드리워지고

땅 위에는 홀로 핀 달맞이꽃

당신 닮은 외로움이 깊어만 간다.


그대여 그곳에도 그리움은 영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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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 방송들의 새누리당 편들기가 도를 넘었습니다. 새누리당에게는 유리한 내용만 내보내고, 새정치민주연합은 권은희 남편의 재산처럼 불리한 내용만 내보내고 있습니다. 정의당과 노동당, 통진당 등 진보정당에 대해서는 아예 다루지도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 내용도 대폭 줄어들었고, 특별법 제정이 늘어지고 있는 것도 거의 보도하지 않습니다.

 

 

 

이는 권위주의 독재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전두환의 시절의 땡전뉴스를 방불케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에 도움이 되지 않자 매일같이 내보내던 대통령 관련 보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방송들이 새누리당에 불리한 것들은 거의 내보지 않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른 보도와 토론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권은희 후보가 신은 아니기에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언론의 심층보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뉴스타파의 보도는 그런 면에서 저널리즘 본연의 자세를 지녔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은 권은희 죽이기이지 뉴스타파처럼 저널리즘의 기본 자세조차 지키지 않고, 의혹을 범죄인양 만들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이 권은희를 때림으로써 7월 재보선의 전체 향배를 자신들에 유리한 쪽으로 몰고가는 것에 방송사들이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입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권은희 전 과장을 전략공천한 안철수와 김한길의 선택은 분명 최악의 카드입니다. 하지만 7월 재보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어제부터 오늘까지 거의 모든 방송에서 새누리당 위주의 방송만 내보내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참패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방송이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조중동의 여론조사 결과를 신주단지처럼 떠받들며 새누리당의 선거운동을 대신해주는 느낌입니다. 



JTBC조차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송들은 가히 목불인견입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참패를 운운하는 꼴이란 야권 지지자들에게 투표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암시를 전해주는 꼴입니다. 모든 방송들의 보도행태를 보면 새누리당의 기간방송을 보는 듯합니다. 



안철수와 김한길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공중파에서 내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권은희의 전략공천에 최대 화력을 퍼붇는 것으로 다른 후보들의 지지율까지 떨어뜨리려는 저열한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권은희를 때림으로써 다른 지역의 후보에 악영향이 미치도록 하는 새누리당의 선거전략을 방송사들이 대신해주는 꼴입니다.  

 


필자도 제1야당을 보다 확실하게 보수화의 길로 이끌면서, 별로 남아 있지도 않은 야성마저 수장시켜버리는 김한길과 안철수 공동대표를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7월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참패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의당과 노동당의 선전을 바라고 있지만, 아무튼 전체적으로 야권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안철수와 김한길의 무능함과 대표자리에서의 퇴진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7월 재보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는 현실을 반영하지도 못하는데 모든 방송들이 조중동의 여론조사를 인용하는 것은 암묵적 담합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조중동의 여론조사는 참조사항에 불과한데 그것이 진실인양 떠들어대는 것은 새누리당의 승리를 위한 현재의 권력을 향한 방송사들의 셀프서비스입니다. 



7월 재보선이 미니 총선급이라 해도 그 결과만으로 보다 높은 단계의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권이 압승하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그런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재보선이 실시되는 지역의 유권자의 몫이지 우리 모두의 몫은 아닙니다.



모든 방송사들이 조중동의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보수 성향의 정치평론가들의 입을 빌어 7월 재보선을 새누리당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는 언론 본연이 역할을 내던져 버린 한국 방송생태계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뉴스타파와 고발TV, 국민TV, 노유진 팟캐스트, 김어준의 KFC 등이 제도권 방송을 대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7월 재보선의 향배를 왜곡하고 호도하는 방송사들의 행태는 반드시 단죄돼야 합니다. 



7월 재보선이 조중동이 주도하고 있는 프레임 속에서 돌아갈 위험이 커졌습니다. 이를 막기 위한 야권의 무기도 신통치 않습니다. 이번 재보선이 조중동의 프레임대로 끝나면 세월호 특별법의 제정은 아예 물건너 갑니다. 향후 2년 동안 선거가 없기 때문에 세월호 침몰 원인은 밝히지도 않은 채 현 집권 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가 개조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이런 광경을 또다시 볼 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럴 경우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수구세력들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도 있습니다. 합리적 보수라는 것이 사라진 현실에서 새누리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면 대한민국의 우경화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견고한 추세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부패와 비리에도 박근혜가 대통령에 올랐고, 새누리당은 여전히 제1의 다수당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GOP 총기난사 사건, 안대희와 문창극을 거쳐 김명수와 정성근으로 이어진 인사 참극이 있었는 데도 새누리당이 조중동의 지원 아래 7월 재보선에서 승리하면 대체 무슨 방법으로 정권을 탈환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미래세대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