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요약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는 평론집으로서는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아웃사이더들을 분류해서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인데, 긍정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이를 풀어냈습니다. 윌슨이 24세에 이 책을 출판했는데, 당시에는 문학계를 뒤흔들며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이후에는《아웃사이더》에 근접할 만한 책은 내놓지 못했습니다. 데뷔작이 최고의 작품이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의 책만으로도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관점과 저의 관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돌하는 까닭에 그의 아웃사이더 분석을 모두 다 수용할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 논객을 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는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또한 주요 작품들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인용된 문장들은 최고라 할 만합니다.
가능하면 책을 구입해서 보시면, 글을 쓰실 때 인용할 수 있는 문장들이 너무나 많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회자되는(콜린 윌슨은 최고는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최고라고 봅니다) 또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인 《황야의 이리》와 《유리알 유희》를 함께 읽으면 아웃사이더에서 성인의 수준까지 성찰의 수준을 높여간 위대한 소설가들의 아름다운 얘기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문학의 최고봉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세 편의 고전들은 매우 어려우니, 문학적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은 분들만 도전하시는게 나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우리나라에는 콜린 윌슨 같은 젊은 평론가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그의 박학다식함과 메모 습관은 모든 글쓰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세를 보여줍니다.
제1장 – 맹인의 나라
아웃사이더란 언뜻 보면 사회문제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다.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중에서)
아니, 잘못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러한 말들은 어느 것이나 다 죽은 것이다. 그 말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의 강렬함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며, 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무력한 말일 뿐이다.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중에서)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이 아닌 진리에 따른 것은 아웃사이더의 속성인데, 이는 자기가 본 것이 진리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진리의 편에 선다”는 이상은 모든 세기의 문학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명백한 특징이 된다.
아웃사이더에게는 세상이 합리적인 것도, 질서정연한 것도 아니다...그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아웃사이더는 혼돈이 적극적인 것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제2장 – 무가치한 세계
『침묵의 동맹』 속에서 샤르뜨르는 “그가 가장 자유롭게 느꼈던 것은 전쟁 중에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끊임없는 배반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고 쓰여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유는 ‘의미의 강렬함’이며, 그것은 살아남으려고 하는 의지를 인간에게 불러 일으키게 하는 극한상황에 나타나는 것이다.
전후의 헤밍웨이는 크레브스 상병의 입장이 되어 이미 죽어버린 과거와 아마 ‘사후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미래 사이를 방황한다.
죽음에 의하여 궁극적인 부정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기분은,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기분에 비하여 성숙한 깨달음이었다...죽음과의 만남은 생의 무의미함, 즉 무 그 자체와의 만남인 것이다. 남아 있는 유일한 가치는 바로 용기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인간은 파멸할 수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사자(死者)의 자연사>에서 스코틀랜드 탐험가 밍크 파크의 말이 그 책 머리에 실려 있다. 사막의 한 가운데서 목이 말라 실신한 지경이었을 때 파크는 몇 떨기의 꽃을 보고는 후딱 정신을 차린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식물을 창조하고도 양분을 공급하여 완성으로 이끄는 ‘존재’가 자기 모양대로 창조한 인간의 고난을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용기를 얻은 그는 계속하여 전진해 나갔고, 곧 물을 발견한다.
더구나 그 동물들이 요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기 몸의 고생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새들이 만약 입을 열수 있다면, 그 고경을 덜어줄 누군가를 찾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ㅡ 사자에 관한 첫 번째의 발견은, 갑자기 죽게 된 자는 동물과 같이 죽는다고 하는 사실이다......나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답게 아니라 동물처럼 죽는다.....그래서 지금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이른바 휴머니스트의 죽는 모습이다. 그들의 고귀한 퇴장을 보고 싶은 것이다......이 구절이야말로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휴머니스트에게 주는 그의 해답이다.
자유는 그 전제로써 자유의지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렇지만 의지가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기가 있어야 한다. 동기가 없는 곳에는 의지도 없다. 또한 동기란 바로 ‘신념’의 문제다...자유란 결국 현실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웃사이더’는 그 비현실감 때문에 근원에서부터 자유와 차단되어 있다. 비현실의 세계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강하하면서 도약하는 것과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다.
잔돈처럼 마음대로 주머니에 구겨 넣을 수 없는 신념을 발견했던 사람은 내가 처음은 아니오.
도덕적 공백 상태(파멸을 의미함)를 올리버는 다음과 같은 상징으로 표현한다.
ㅡ 포탄이 알버트가 아니고 나를 스쳤는데, 나의 시계가 고장났다. 흔들어보자 잠시 동안 갔지만, 태엽이 끊어져버렸다. 나는 자신이 이 이상 나이를 먹지 않고, 죽을 때가 되어도 무언가 때늦은 이상한 대단원이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용기와 규율이 남아 있었다.
인간은 일관된 존재가 아니며, 어제와 내일과는 똑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순간에 살며, 의지력을 함부로 발휘하지 않는다. 또 의지를 움직였다가도 곧 그 노력을 단념하든지, 아니면 당초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무엇인가 다른 것에 주의를 돌려버린다. 어떤 강렬한 의식 상태를 잠깐 보았지만, 자기로서는 어떻게 하여도 그것을 꽉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자각한 시인이 심한 절망을 느끼는 것도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제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병에 걸린 영혼인 국외자에게는 이 신세계가 공포감을 일으킨다. 그것은 축음기의 레코드같이 부자유스럽게 홈을 따라 도는 기계문명의 상징인 것이다.
아웃사이더는 세기말까지에는 유토피아가 확립된다는 것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근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아웃사이더 역시 자기가 살고 있는 토양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있는 한, 그 세기의 아들임을 면치 못하리라.
ㅡ 건강한 얼굴로도 여자를 끌 수 없다면, 창백한 얼굴로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J. 서클링)
그러나 젊은 베르테르가 등장하여 심정상의 혁명을 일으킨다.
세계가 창조된 것은 인간의 정신적 요구에 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양자의 차이는 현저하다. 리얼리스트적 아웃사이더는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는 꿈에서조차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가 외치는 것은 “어디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다. 진리가 그 무엇임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함께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가 된 다른 한 시인의 말을 빌리면).
ㅡ 백만 인의 입술이 찾는 것
어디엔가 틀림없이 실체로 존재하려니.(W.B. 예츠의 <그늘진 바다> 중에서)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다......자기실현을 이룩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구한다. 어떤 자는 부지런히, 어떤 자는 게으르게. 모든 인간은 탄생의 유물인 진흙과 알의 껍질을 끝까지 몸에 지녀 나른다.”
ㅡ 미래는 투명하리만큼 밝고 질서가 잡혀 있어야만 했다.(H. 헤세의 <데미안> 중에서)
혼돈을 직시해야만 한다. 진정한 질서가 오기 전에 혼돈으로 내려가야만 한다...타락이 필요한 것이며, 인간은 선악과를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불교 경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식별하기를 거부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아웃사이더는 한평생 심한 치통을 앓는 자와 같이 자기중심적이다.
한 인간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부분은 죽은 부분에 불과하여,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그 이외의 부분, 즉 무조건의 의지인 것이다. 의지는 본질에 선행한다. 그러나 우리의 부르주아 문명은 개성을 그 기초로 한다. 개성이 우리의 주요한 가치인 것이다.
인간은 완성된 피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으로부터의 도전이며, 구원을 받는 만큼 두려움도 느는 머나먼 가능성이기도 하다.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아직 단거리가 답사된 데 불과하며, 그것도 가공할 고초와 희열이 뒤따른 것이었다. 이 가능성은 오늘은 처형대, 내일은 기념비가 될 소수의 경우에도 그러한 것이다.
‘황야의 이리’는...“필사적으로 자아에 매달리고 필사적으로 인생에 매달리는 것이 영원한 죽음으로의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그는 잊으려 결심하고 있다.”
<황야의 이리>에서 헤세는 아웃사이더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즉 자기가 비참한 것은 자기가 자칫하면 타협하게 되어 온건하고 문명적인 부르주아의 영역을 취하려 하는데 원인이 있는 것이며, 자기의 구제는 열광과 냉정, 정신과 자연이라는 양극단의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 비현실성이 고통을 주기 시작할 때 그것을 통절히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보통의 세계는 그 가치를 잃는다. 마치 오랫동안 와병 중인 인간에게 일상생활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은 악몽과 같기도 하며 화면이 텅 비어 있는 스크린 같기도 하다.
“꿈을 꾸고 있다고 몽상할 때에는 바야흐로 꿈에서 깨고 있는 것이다”고 노발리스는 말한다. 나비가 된 꿈을 꾸었으나, 자기가 나비가 된 꿈을 본 인간인지 혹은 인간이 된 꿈을 본 나비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장자였다.
“살아라. 힘껏 살아라. 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헨리 제임스의 <사절들> 중에서)
“사자(死者)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이 휠씬 낫다는 것뿐이다.”(엘로이 프레커)
제4장 – 자제의 시도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생활의 문제다. 문학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쓰는 것은 진실의 왜곡이다......작가는 지상(紙上)에서 최대의 극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는 본능이 있지만, 이 소재가 소용없게 되거나 이미 그 이상 발전시킬 수 없는 한도까지 이용되어버리면 작가는 새로운 방법을 선택한다......그 이유는 간단하다. 즉 어느 한도를 넘으면 아웃사이더 문제는 단순한 사고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인 것이다......아웃사이더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기를 아는 것이다.
전쟁에서 T.E.로렌스는 새로운 시야를 얻었다. 더 현명해지기는 했지만 조금도 행복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과민한 인간에게 과중한 체험이 겹쳐져서 동기 또는 원동력의 원천이 고갈하는 현상...이후 17년간의 로렌스의 행동은 아웃사이더에게는 당연히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천재가 갖는 건전한 자부를 결하고 있었던 점이 로렌스의 생애를 비극적 낭비로 끝나게 했던 근본 원인의 하나다.
ㅡ 이 책을 읽고 나니 가슴이 아프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는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는 아니다(He is not himself). 이 사람은 ‘나’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진실된 ‘나’는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될까 나는 마음 쓰지 않는다. 이 사람은 행동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교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은 생명이 흐르는 파이프(관)에 지나지 않는다. 대단히 훌륭한 파이프임에는 틀림없으나, 진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혜의 일곱 기둥』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예언자에 대한 로렌스의 공감이 역력하게 보인다. 사막의 순수함이 상징이 되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해방의 상징이 된다.
ㅡ 우리는, 햇빛이 오감을 깨우지만 밤새 사고에 지친 지력은 아직 잠자리에 있는 어느 맑게 갠 새벽녘에 출발했다. 이러한 아침에는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사이에, 세계의 소리와 향기와 색채가 사고를 통과하지도 않고 사고에 의해 정형화되지도 못한 채, 개개의 것으로 인간에게 직접 부딪쳐온다.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충만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며, 창조에 의도나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ㅡ 내가 정신적인 자살을 연기했던 것은 단순한 유약함 때문이었다. 나의 두뇌 속에 있는 이 용광로의 불을 서서히 꺼가는 일, 그것이 자살이었는데.......나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사상은 발전시켰지만 나 자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다. 내게는 창조를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웃사이더에게 필요했던 것과 똑같이 로렌스에게도 필요했던 것은, 경험이 매우 격렬한 것이어서 타협에 기초한 문명의 부적절함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폭력이 비현실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ㅡ 반란에는 휴식처란 있을 수 없고, 환희의 배당도 지불되지 않는다. 정신은 감각의 부속물이며 감각이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어내고 일보전진할 때마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먼 모험, 보다 깊은 고난, 보다 심한 고통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감각은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다. 느껴진 감정은 정복된 감정이며, 표현됨으로써 매장되어버린 죽은 체험인 것이다.
ㅡ 비물질적인 것,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관계되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시간이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정신이 육체보다도 훨씬 빨리 늙기 때문이다. 인류는 고된 일로부터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동기가 마비된...황야의 이리는 “돌아갈 길은 없다......전진을 계속하여 죄와 인생에 보다 깊이 빠져들어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고 했다... “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어떠한 길도 똑같다”고 하는 스트로드의 입장(처럼)...“진실을 말해버리자면, 내가 들을 수도 있고 볼 수 있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로렌스가 증오했던 것은 육체, 정신, 감정의 전부가 만들어내는 복합체일 뿐이며, 그의 생의 본능 주위에 항상 질식을 일으키게 하는 모포를 쌓아 올린 그 자신에 관한 관념일 뿐이었던 것이다.
문명 사회에 태어났던 그들은 그 물질적인 행복관을 거부하고 사막에 은둔한다. 다시 세상에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현세부정을, 육체적인 안녕에 대한 정신의 강렬함을 설교하기 위해서다. ‘아웃사이더’의 비참함은 말하자면 치아가 나는 시기에 있는 예언자의 고통인 것이다.
“패배는 불가피하며 인생이란 먹이가 달린 함정이다”는 고흐의 말은 먹이를 다시 물어야 할 필요에서 벗어나가기 위해 자살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는 불행히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할 방향을 잘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로렌스와 공통된다...그는 로렌스와 함께 아웃사이더의 문제에 수련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에겐 이것이 이미 지력의 수련은 아니다. 그의 의지력은 감정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돌려졌다...둘은 다 실패했는데...로렌스가 너무나 많이 생각한 것과 똑같이 고흐는 너무나 많이 느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느꼈으며, 또 한 사람은 느끼지 않고 생각했다.
ㅡ 그의 동작은 공전의 것이었다. 관중은......화석인 양 굳어버렸다. 말하자면 그는 피카소의 작품 <게로니카>의 무용화라 할 만한 발레 춤을 춘 셈이다.(로몰라 니진스키, 『니진스키』중에서)
니진스키의 인생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장은 “내 처를 비롯한 전 인류의 인생은 죽음이다”고 한 말이다. 어느 날 밤 산책을 마친 후 휘황한 호텔 앞을 지나갈 때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ㅡ 나는 이러한 곳에서 영위되는 인생이 죽음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인간은 즐거워하고 신은 탄식한다. 그는 인간의 허물이 아니다.
“나는 육체에 깃들인 신이다. 누구나 이와 같이 생각하기는 하나, 아무도 이 생각을 쓸 줄 모른다.” 그리고 “신은 두뇌 속의 화염이다.” 니진스키의 끊임없는 슬픔의 하나는, 그가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그의 처 역시 이른바 천박한 사색가에 불과하여 인생 표면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그는 천성적으로 묵고형이며, 자기 내부 깊숙이 인퇴하여 정력을 일점에 결속한 후 자기표현에 의해 그것을 풀어버렸다.
나는 지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육체를 통하여 느낀다 – 니진스키
나는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신을 통해 통찰한다 – 로렌스
나는 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통해 통찰한다 – 고흐
성적인 오르가즘에서 “나는 신이다”하는 감정을 느낀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는 것으로 같은 감정을 체험하는 일은 드물며, 어떠한 지능 활동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예는 더욱 드물다. 윌리엄 제임스는 말한다.
ㅡ 알코올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멀쩡한 때 냉엄한 현실과 준엄한 비평정신에 의해 땅바닥에 짓눌렸던 인간의 신비적 측면의 기능이 알코올에 의해 자극받게 되는 데 있음이 틀림없다.
아웃사이더에 관한 한 고도로 발달한 감성보다 강대한 지능을 갖는 게 더욱 중요하다. 고흐의 마지막 말 “불행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는 말에 대해 이 긍정의 태도를 균형짓는 일, 이것이야말로 아웃사이더의 문제다. 이는 이미 철학문제가 아니라 종교문제기 때문이다.
제5장 – 고뇌의 역
낙관적이어서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평소 불행의 경계선 양지 쪽에 살며, 비관적이고 우울한 심정의 소유자는 그 반대편, 어둠과 근심의 세계에 산다.(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체험의 제상』 중에서)
아웃사이더는 변종이 아니라 ‘낙관적이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보다 민감한 인간...아웃사이더는 어떤 내면적 긴장에서 출발...페시미즘(비관론)의 입장으로 되돌아온 셈...
ㅡ 심술궂은 아이들이 파리를 놀리듯/신은 사람을 놀리며 장난 삼아 죽인다(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글로스터의 2행)
이것은 결국 인생의 불확실함을 말하는 것이며, 지금 들이킨 숨을 다시 뿜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사람이 어찌 목적이나 신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의문인 것이다.
어떠한 신념을 갖든 그것이 자기에게 닥치는 운명과 무관하다는 이 공포는 곧 실존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근거다. 동시에 어떠한 신의 배려나 숙명을 믿는 것이 모든 종교와 대부분의 철학의 필수적인 기본 조건임을 암시하고 있다...인생이란 한낱 고독한 나그네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종교의 근본 이념은 자유다...공포의 순간은, 나에겐 아무런 자유도 없다는 느낌에 휩쓸리는 순간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경전에서 말하는 속박이란 기독교의 죄에 해당되는 말이다. 이는 적어도 죄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귀결이라 간주되고 있다. 종교에 있어 필수적인 기반이 되는 것은, 자유는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이다...아웃사이더의 문제란 결국 자유의 문제다...죽음에 직면하여 현실을 발견할 때 자기의 인생이 비현실적이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다.
한쪽 극단은 신, 다른 쪽 극단은 불행. 우주는 신과 불행 사이에 걸쳐진 영원한 긴장이다.(실천적 아웃사이더였던 니진스키의 입장에서 보면)
지성을 중시하는 성실성 때문에, 자기허무에 대한 보상으로써 구세주의 피를 받아들일 수 없다.(사르뜨르의 부언)
아웃사이더는 자유를 희구한다. 그는 한 번 태어났을 뿐 범속인이 자유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아웃사이더가 드물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며, 마치 한 소대 가운데 발이 맞는 것은 자기뿐이라 주장하는 사병과 같은 생각이다.
카프카의 <단식하는 광대>는 가장 명확히 아웃사이더적 입장을 나타낸 작품이다...인생에 대한 식욕의 결여 – 이것이 그의 문제다. 모든 인간의 행위엔 이와 동일한 허무의 낙인이 잇따른다.
ㅡ 나는 기도합니다, 너무도 많이/자신과 논쟁하고 자신에게 설명할 문제를 잊게 하소서......( T.S.엘리엇의 <재의 수요일> 중에서)
이것이야말로 아웃사이더가 이룬 궁극적인 것이다. 그는 무신앙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한다...즉 내가 생각할 수도, 몽상할 수도 없는 신앙적 태도를 꾸미지 않고도 어느 때고 어거지로 그것이 내게 닥쳐올 수 있다고 대답한다.
니체 일생의 일, 모든 가치를 무가치화하려는 일에 덤벼들었던 행동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충동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한다...그는 기독교의 이념을 지지하지 않는다...그는 그것과 대치할 신앙의 체계를 갖고 있었다.
ㅡ 기독교라는 것이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내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구제의 필요를 뜻하는 것이라면 존중할 만하다.
“모든 위대한 인간은 자기의 이상을 연출하는 배우”라는 경구는 모든 인간은 잠재적인 영웅이고 천재며 다만 무기력함이 인간을 평범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의 고유한 종교심은 “어떠한 희생도 꺼리지 않는 진리에의 의지, 진리를 사랑하는 나머지 젊은 광기”였다.
짜라투스트라는 소리 높이 외친다 ㅡ “내 가르침을 들어라. 하늘의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지 마라. 자유로이 머리를 들어라. 대지에 의의를 부여하는 대지의 머리를.” 이것이 니체의 긍정 철학의 시발점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군중의 하나가 소리쳤다. ‘이 줄타는 광대의 얘기는 실컷 들었다. 이젠 실물을 보여다오.’ 그러자 군중은 일제히 짜라투스트라를 조소하기 시작했다...짜라투스트라는 명상한다. ㅡ 인간의 생명이란 불가해하고도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한 놈의 어릿광대에 의해 죽게 될 수도 있다니.
블레이크 – 어리석음을 끝까지 추구하면, 바보도 끝내 현명하게 된다.
로렌스나 고흐는 암중모색하던 인물이었으나 니체는 그렇지 않았다. – 두려운 것은 상승이 아니라 낙하다. 손은 위로 뻗는데 눈은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는 그 절망...... 내 의지는 인간에게 매달린다. 나는 사슬로 나 자신을 인간에게 잡아맨다. 내 몸이 초인을 향해 자꾸 끌려오기 때문이다. 한편 나의 다른 의지 역시 초인을 지향한다.
제6장과 제7장, 제8장은 생략합니다.
제9장 – 회로에서의 탈출
감정과 감각이 무수한 유성처럼 자아에 격돌할 때 비전의 인간은 자기의 마음이 물레방아를 회전시키는 물의 흐름과 같다는 점을 깨닫는다. 세계에 넘치는 활동성 그 자체를 오싹오싹 느끼는 것이다...지금의 세계는 무한히 큰 힘이 상호 충돌하고 있는 전장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비전의 인간은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다. 세계가 동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의 영혼도 동적이라는 것. 그것을 알아차린 그는 사물의 표면만을 바라보며 낙담하는 대신에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력의 작용을, 보다 충실한 생명을 목표로 하는 ‘의지’의 활동을 본다. 보통의 경우 이 의지는 숨어 있어 의식적인 마음을 제멋대로 움직여준다. 의식적인 마음은, 말하자면 물질 세계에 내던져져서 거기에서 제멋대로 꾸며낸 일관성이라든지 불변성의 개념에 의해서 가능한 한 기분 좋은 잠을 탐내려고 한다. 대개의 경우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접촉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거기에서 당연히 최소한도의 노력으로써 최대의 안락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의식적인 마음의 목표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우리가 편의상 ‘아웃사이더’라고 관습적으로 부르는 사람들로, 의식의 부분과 무의식의 실체가 밀접하게 접촉되어 있어서 그 의식적인 마음이 “보다 충실한 생명”을 찾는 욕구, 즉 부르주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안락이라든지 안정이라고 하는 것에 너무 뜻을 두지 않는 욕구를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아웃사이더’가 이룰 수 있는 것의 하나는 자기 내부에 숨어 있는 힘을 통해 그 고투를 원조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발견하는 것이며, 만약 ‘아웃사이더’가 이러한 내적인 힘을 막연하게 밖에 깨닫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힘을 보다 명료하게 의식하고, 힘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아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웃사이더’는 최초에 이렇게 말한다-“나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고독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한, 새로운 체험은 불가능하다. 강렬한 갈등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붓다는 단식을 하고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그것을 계속했다. 어느 날 개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그는 기슭으로 기어올라갈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늘어뜨려져 있던 가지에 매달려서 익사를 면했는데, 이때 죽음 일보 직전의 체험에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은 보다 긴 생명이지 생명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이렇게 깨닫자 그는 당연한 식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동시에 바라는 결과를 얻는 수단으로서 자기 자신의 예민한 상상력과 식별력에 의지하기로 한다...붓다가 오랜 명상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유’의 경지, 열반에 도달하여 대오각성하고 자기실현을 완성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환희가 존중되었던 것은 그 배후에 의지의 생명력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며, 만약 단순한 고행 혹은 의식적인 과제로서 이러한 체험을 하려고 하면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뿐이며 오히려 해롭게 될 위험이 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의사다.
‘자각’이라는 것은 일보 물러서서 ‘자신(창유리)’과 ‘본인’이라는 별개의 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갑자기 그리고 영원히 죽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에크하르트가 “사람은 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지만 신도 또한 인간 없이는 살지 못한다. 인간 없이는 신은 자신의 존재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고 말했을 때 그는 주관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아무리 절대적이고 엄격한 두뇌의 진리일지라도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진리일 수 없다.
종교를 고쳐 규정하기 위하여는 제일보로서 낡은 가치에서 곰팡이를 털어버리고 인간이 최초로 그것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자세를 포착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흄은 현재의 휴머니즘기의 종언을 예언했다. 이 휴머니즘 시대는 흄의 지적대로 르네상스가 일어나서 절대적인 한정론인 ‘원죄’설이 파기됨과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흄이 믿기로는 원죄설을 파기한 것은 모든 방면에 있어서 명석한 사고를 흐리게 하고 감상적인 낙관주의에 채색된 사고법을 날뛰게 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ㅡ 새로운 반휴머니즘의 관념은 중세 정신의 단순한 재현일 수 없다. 휴머니즘 시대는 과학적 성실성을 만들어내 사상과 행동의 자유라는 개념을 육성했다. 이것은 금후에도 남을 것이다.
휴머니즘은 정신적인 나태의 별명에 불과하다. 즉 수학이나 물리학의 세계를 상대로 하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종교의 범주에 관해서는 머리를 썩이려 하지 않는 과학자나 논리학자가 채용하는 애매하고 불충분한 신조, 그것이 휴머니즘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종교 범주의 윤곽이나 그 파생물을 명료하게 하고 포착하기 쉬운 것으로 하는 것만이 필요할 뿐, 르네상스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잡동사니를 분류하는 것을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쇼의 이 말에 『성찰』 속에서 종교의 ‘감상성’을 훈계하고 있는 흄의 얘기를 덧붙여 균형을 맞추도록 하자.
ㅡ 나에게는 전통에의 향수도 공손한 존경도 없고, 안젤리코의 기분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없다. 종교를 옹호하는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것에 환희작약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잡담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마음 쓰지 않는 것, 즉 ‘원죄’설을 필두로 하는 갖가지 교리다. 인간은 어떠한 의미에서 있어서든 완벽한 존재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비참한 물건이면서도 완벽함은 이해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나는, 감상 때문에 감히 교리를 훌륭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위해서라면 감상을 감수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만약 현대 문명이 자멸하기 전에 흄이 말한 ‘새로운 종교의 시대’가 탄생한다면, 그것을 위해서는 문명 세계 전체의 참여를 필요로 할 만큼의 지적인 창조와 진통이 불가피하게 될지는 모른다. 이 책에서 기술한 이외에도 아직도 많은 장애가 남아 있다. ‘문명’이 직면하는 문제는 앞 주의 일요신문 표제처럼 객관적으로 소화ㆍ흡수할 수 있는 종교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인데, 개인 문제는 어느 세대에도 그 정반대임에 틀림없다.
자기보존의 본능이 내면 확대의 고통에 반항하고, 정신적인 태만에 기울기 쉬운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파도같이 높아져가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손으로 만진 체험의 양을 한정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존재의 민감한 부분을 그것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드러내 보이며, 어떻게 하든지 전체로서 사물을 보려고 고투하는 것, 그것이 개인에게 맡겨진 문제다. 개인은 이 긴 노력을 아웃사이더로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자로서 마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