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일곱기둥
이 책에는 참으로 멋진 표현들이 많습니다.
철저한 실처하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던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는 저의 롤모델 중 한 명입니다.
책이 세 권으로 나왔는데 독서가 삶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아니면 도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정보요원으로 아랍의 독립을 위해 이중스파이를 했던 로렌스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이나 철학에 매달렸으면 역사상 최고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삶 자체를 행위하는 것에 두었던 사람이라 그 뛰어난 재능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좋은 문장들을 일부만 발췌해서 올립니다.
블로거 여러분들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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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극한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은 숨이 탁 막혔다.
이런 식으로 정신이 고양될 때마다 영혼이 비정상적으로 우위를 점령하고 육체는 지금까지의 온건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삶에 대한 비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한 종교들의 잔해가 사막과 정착지가 만나는 지점에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 모든 교의들의 발생이 그곳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언자의 삶은 모두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예언자의 탄생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로 정해져 있으며, 예언자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난폭한 사람들에 의해 사막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동안 명상과 금욕의 생활을 한다. 마침내 사람들에게 전할 계시를 깨달은 예언자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서 설교를 한다. 세계 3대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충실히 따랐다. 이 놀라운 우연의 일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간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서 일종의 법칙처럼 굳어졌다.
마을의 명상가들에게 있어서 니트리아 사막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곳에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고독 속에 파묻혀 있으면 그들에게 전해지는 계시의 말씀을 더욱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랍의 사막은 영적인 얼음집이었다.
신을 한 번 대면한 예언자들은 사막에서 돌아온 후에 (검은 유리처럼) 오염된 매개체를 통해서나마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의 충만한 비전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멀게 하며 입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베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황량한 곳을 찾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자신과 이웃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게 하려는 노력은 인간적인 약점에 걸려서 실패하고 만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촌사람이나 도시 사람이나 날마다 획득과 축적이라는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반동적으로 물질적인 환경이 인간의 가장 추잡하고도 가장 소중한 조건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가장 철저한 금욕주의로 이끌었던 삶에 대한 자랑스러운 멸시가 오히려 그를 더욱 커다란 절망으로 이끌었다. 그는 부주의하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어서 빨리 마지막 순간이 오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육체를 탕진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가장 아름다운 천국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발견했다.
결국 셈족은 욕정과 자기부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갔다.아랍인들은 그네를 타듯이 하나의 이상 위에서 얼마든지 왕복할 수 있었다. 충성스러운 정신은 그들을 순종적인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사라질 때 위대한 과업은 끝이 난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이상에 관한 한 아랍인들은 맹목적이고 단순하고 고집불통의 어린아이였다.
그들에게 육체와 영혼은 영원히 필연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신은 낯설고 어두웠으며 절망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고 질서가 없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서는 이 세상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욱 커다란 열정과 메마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출발의 민족이다.
그들에게 추상적인 것은 가장 커다란 동기였다. 그리고 무한한 용기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물처럼 불안정하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움직일 것이다.
세속적인 일의 저항을 받고 물러난 그 파도의 잔해를 씻어내는 것은 뒤를 이어서 밀려오는 파도가 할 일이다.
그래서 언제가 때가 무르익으면, 바다는 또다시 커다란 물결을 일으켜서 서서히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출발의 민족이다.
그들에게 추상적인 것은 가장 커다란 동기였다. 그리고 무한한 용기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물처럼 불안정하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움직일 것이다.
마치 물이나 혹은 기름처럼 모든 일에 조용히 그리고 끈기 있게 스며들었다.
Non nobis, Domine. – 시편 115장 1절. “주여,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마옵소서.”
언제나 진실보다 약간 더 높은 목표를 좇으려고 애를 쓰다가 자신을 소모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었다.
강철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불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것 같소?
과연 우리가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 가지 목표물을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본 결과 내 눈이 흐려진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견해란 얼마든지 말로 논쟁할 수 있는 문제이며, 확신 또한 수정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오직 비물질적인 논리의 옹호자들이 다른 논리의 옹호자들을 맞서서 저항할 만한 수단이 더 이상 없을 때 비로소 끝날 수 있다.
한 개인의 죽음은 수면 위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처럼 순식간에 물 밑으로 가라앉고 말지만 그것을 일으킨 슬픔의 파문은 한참 동안이나 멀리 퍼져나간다.
지식을 통해 얻은 사기는 무지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극단까지 치열하게 살게 하는 젊은 시절의 낭만은 사라지고 마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신이란 확신은 다른 모든 희망을 죽여버리는 독약 같은 것이었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목표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초연했고, 이상을 전달하기에는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했으며, 복잡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비록 더럽고 누추한 도시였지만 셈족의 모든 종교가 이곳을 거룩한 성지로 만들어놓았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과거의 유물을 직접 관찰하고 또한 역사의 전통을 실질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해마다 이곳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정치적인 미래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보고 싶어 했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의 단합된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거의 현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치 호텔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처럼 아무런 개성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오가는 여행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살아갈 뿐이었다.
우리 영국인들은 모방을 풍자로 여기지만, 프랑스인들은 칭찬으로 여겼던 것이다.
감각은 앞으로도 뒤로도 도달할 수 없다. 일단 느낀 감정은 정복된 감정이며 이미 죽어서 사라져버린 경험이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죽은 감정을 매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육신보다는 영혼이 훨씬 더 일찍 늙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그 오랜 수고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얻는 것이 없었다.
성공이 확실히 보장되는 곳에 명예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우리의 경직된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이상이란 개인적인 차원의 것들을 초월하는 듯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 이상은 우리의 일상적인 세상의 잣대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일단 열광적인 흥분의 순간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고단한 육체를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육체는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가장 고귀한 목적을 달성했다는 주제넘은 만족함에 가득 차오르곤 했다.
언젠가 닥칠 최후의 심판일을 위해서 선악의 대차대조표를 딱 맞춰놓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맑은 새벽에 출발했다. 지난밤에 오랫동안 사색을 했기 때문에 지성은 몹시 피곤해서 아직까지도 잠을 자고 있었지만, 감각은 태양과 함께 번쩍 눈을 떴다. 이런 아침에는 한두 시간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냄새와 색깔이, 생각을 통해 여과되거나 정형화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직접 우리에게 와 닿았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족하며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의 창조물들에서 모양의 결함이나 부주의한 면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안타까운 마음 같은 것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이성은, 죽음이란 단지 육체가 정신의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속삭였다.
인생이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유의지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자 은총인 것이다.
근시안적인 군중들이 여러 해 동안 헌신해 온 희망에 다 함께 올라타다 보면, 결코 원하지 않는 우상에게조차 신성(神性)을 씌우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침묵 속에서 기도할 때마다, 그것의 존재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자기희생을 하는 자들은 희생을 자신이 가진 고귀한 재능으로 간주한다. 이 세상에 자아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보다 더욱 기쁘고 풍요로운 쾌락은 없다. 그 안에는 철저한 완벽주의와 상통하는 숨겨진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고통을 당할 기회를 가로채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정당한 고통을 빼앗는 것이다.
나에게 완벽한 응답이란 나와 똑 같은 이유에서, 똑 같은 방법을 통해서, 똑 같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디 물질의 우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기를. 또한 나의 생각을 고요히 잠재워서, 어떤 연상이라도 자유롭게 떠오를 수 있게 되길. 그래서 언제나 바싹 깨어 있을 수 있길.
진실은 항상 의지가 몸을 뒤척거리며 터져 나가려고 기다리는 곳에 숨어 있었다.
아무런 고통 없이 행동의 망각 속에 빠져듦으로써 의지와 인격을 차갑게 보관할 수 있었다.
용기처럼, 독자적으로는 온전히 존재할 수가 없고, 선하거나 약한 매개물이 있어야만 발현되는 자질들이 있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저녁이었다.
군복이라는 것이 평범한 대중들을 얼마나 냉정하고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이도록 만드는지, 또한 얼마나 그들에게 단일성과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몸에 걸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을 민간의 일상생활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도록 만드는 이 죽음의 제복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몸을 국가에 팔았다는 표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비록 처음에는 자발적인 계약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전제 때문에 그 계약자들이 덜 비참한 존재가 된다거나, 혹은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자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바보나 보통 사람이나 대등해지는 법이다.
길을 가던 순례자들은 이곳에 돌탑을 세웠다......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어놓곤 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알려진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 중 누군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