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화를 국제적 자본주의의 재조직화를 위한 이론적 설계를 실현시키려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 또는 자본축적의 조건들을 재건하고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로 해석할 수 있다.


                                                             ㅡ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에서 인용





지금까지 신자유주의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명료하게 신자유주의를 압축한 설명이 위의 인용문이라 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이해하려면 꼭 숙지하기를 바랍니다. 푸코가 밝혔듯이 신자유주의는 19세기의 자유주의가 통치술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긴 상위 1%가 하위 90%를 상대로 벌인, 일종의 계급전쟁입니다. 



공통의 이해와 이익을 공유하는 계급은 하위 90%가 이루어야 할 것인데, 신자유주의에서는 상위 1%가 공통의 이해와 이익을 위해 계급을 형성합니다. 이것 때문에 소수에 불과한 지배엘리트들이 하위 90%의 돈과 노동을 탈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상위 1%는 사회주의, 하위 99%는 자본주의가 적용된다는 말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상위 1%에 근접한 9%는 체제의 간수로 하위 90%를 감시하고 분류하고 범주화해서 상위 1%의 필요에 맞게 관리하고 동원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잘 돌아가도록 하위 90%를 각각의 임무를 수행시키며 그들의 노동과 부를 착취합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노동착취와 함께 임금과 혈세(정부사업 및 국가업무의 민영화 등으로)까지 탈취합니다. 



체제의 간수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의 경영진이나 중역들이고, 재벌이나 대기업의 경영진과 고위임원, 교육기관의 수장이나 종신교수 및 프로페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급진적 지식인, 고위공무원, 상급법원 판사, 정치검찰과 경찰간부, 교도소장, 공장장, 각종 감독관, 용역업체 간부, 범죄조직 보수 등등 각 분야에서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상위 1%의 이익을 실현시키는데 일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신분상승의 가능성인 사회이동성을 말할 때 주로 인용하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 9%에게만 해당합니다. 신자유주의가 정착되기 전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사례가 다양한 계층에 적용됐지만, 이제는 체제의 간수에게 적용됩니다. 상위 1%가 정치적 용어로 경제를 말할 때 쓰는 성공이니 대박이니 하는 것들은 성공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체제의 간수에게만 유효한 것이 신자유주의 체제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좌파적 버전과 우파적 버전이 공히 존재하며,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근본주의를 내세운 극우적 버전(시장자유주의 우파라고 순화해서 부르기도 한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경제규모는 커져도 국민의 소득은 늘지 않고, 정치적으로는 1원1표를 성립시키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일상화한 것을 말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위계적 질서가 강한 초국적기업이나 대기업 집단, 거대금융업체, 슈퍼리치 등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지배엘리트의 이익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과 자본 편향적인 법치주의(현재의 권력과 자본에게 무한대의 자유를 주기 위해 체제의 반대세력을 합법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목표)를 말합니다. 교육적으로는 권력과 시장 주도의 교육제도를 공고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1%의 지배층과 99%의 자발적 복종의 피지배층을 구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탈성장사회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을 쓴 조하나 버크만은 신자유주의가 ‘경쟁적 시장, 더 작고 권위주의적인 국가, 경영진과 주주들이 통제하는 위계적 기업, 자본주의’로 구성된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이룰 수 있는 이유가 이것에 녹아있습니다. 박근혜의 권위주의적 통치(줄푸세), 재벌의 황제경영 등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과 《쇼크 독트린》을 쓴 나오미 클라인은 소련과 동유럽, 남미를 박살낸 시카고보이즈(프리드먼의 제자들)와 하버드 신자유주의자(제프리 삭스가 대표적이었다)들이 보여주었던 통치방식에 따라 재난자본주의, 카지노자본주의, 쇼크자본주의라고도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위기와 혼란 시기(전쟁, 내전, 금융 및 경제위기)에 적용해야 해야 이식이 가능하며, 권위주의적 정부가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정지시킬수록 성공확률이 높습니다.



현대 신자유주의의 탄생지인 독일의 경우 좌파적 버전(사회적 시장경제)이 상당 부분 살아남았고(필자는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요소와 민주주의가 배제된 것이 우파적 버전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를 생각이다), 유럽 각국에 사회민주주의(민주적 사회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시장사회주의라고도 한다)의 형태로도 남아있습니다.



우파적 신자유주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라 하며, 최근에는 미국식 자본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신자유주의라고 합니다. 이것의 기원은 리프먼, 미제스, 하이에크, 프리드먼, 나이트, 포퍼 등이 참여한 몽페를랭 협회(초기 이름은 액턴-토크빌 협회였다)가 결성됐을 때 구체화된 신자유주의(국가 개입을 극도로 반대하고, 통화주의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의 독립, 자유방임 시장경제와 이를 위한 규제 철폐를 주장하는)가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지금 한국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극우적 버전인데, 권위주의적 정부, 제왕적 대통령, 위계적 재벌, 기득권화한 양당, 노조와 파업 불용, 비정규직 양산, 상시해고, 취업규칙 완화, 최저임금의 악용, 각종 규제 철폐, 경제민주화 회피, 경쟁 중심의 교육, 지역적 차별, 언론의 상업화, 안보 강조, 재난자본주의, 시장 중심의 경제주의, 여성의 상품화, 세대 간 갈등 조장, 소비지상주의, 사법과 인식의 보수화 등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정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노사정위원회의 합의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관통하는 사회주의적 요소 때문에 민주정부 10년을 뺀 60년을 내내 극우적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였지만 곳곳에서 저항에 부딪치고 있으며, 박정희 향수에 사로잡힌 37.5%의 고정지지층만 확보한 상태입니다. 이들 중에 한국적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은 0.0001%도 안 되겠지만, 이들의 열성적인 투표 참여로 인해 하위 90%의 돈을 상위 1%로 이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현재의 한국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치적 자유도 사회경제적 평등도 최악의 상황에 처한 것도 극우적 신자유주의가 남북분단 상황을 악용해 최대로 번성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재벌 오너도 한 사람의 시민에 불과한데 국회에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이 마치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는 인식이 만연된 것도 극우적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모든 파업에 불법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고, 기업의 경영실패는 노동자에게 전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나라가 됐습니다. 평등에 기반하는 민주주의가 최소화됐고, 부자감세와 서민증세가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것도 한국적 신자유주의의 성공을 말해줍니다. 한국 현대사를 성공한 자 위주로 재편하겠다는 국정교과서 부활도 극우적 신자유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헬조선에 가깝습니다. 집권세력이 포털을 대놓고 길들이는 독재적 행태가 가능한 것도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민주주의를 최소화하는 극우적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세습자본주의가 정착됨에 따라, 뉴라이트 계열의 부활하는 것은 역행하는 역사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정치엘리트와 위계적 재벌의 경제엘리트가 이끌고 있는 상위 1%가 지배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 출발은 잘못된 광복의 형태(남북 분단)에 있었고, 이를 이용한 친일부역자들과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맥아더의 오판이 더해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적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려면 박정희 시절의 압축성장과 IMF 외환위기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IMF 외환위기부터 다루겠습니다.  




10월9일 첫 만남을 가지려고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청공(靑空) 2015.09.12 18:19 신고

    왜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이런 식으로 정착이 되었을까요? 저는 조중동과 재벌, 이승만의 자유당부터 지금의 새누리당까지 이어지는 기득권층(이라 부르는 매국집단, 재난집단)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철학 따위는 없고, 영악함을 제외하고는 지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 어떤 것이라도 짓밟고 망칠 수 있는 이들이요. 저는 이념과 체계조차 인간 이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추악한 이들을 잉태한 것은 일제라고 생각합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사회학과의 게오르크 폴만 교수의 전세계 엘리트들의 이동경향성을 추적한 연구에서 한국은 비정상적으로 영미에 편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의 무국가성에 대한 이해없이 문화적 토양과 법과 국가체계가 상이한 한국에 무분별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자유주의를 심었습니다. 미국에 자국의 국가기밀을 팔려고 서로 다투는 그 모습은 미국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국가와 사회의 의사결정에서 이들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압도적이고, 그들의 금력과 권력 또한 반대진영에 비해서 너무나도 공고합니다.

    제대로 된 후속세대라도 키워야 할텐데... 작금의 교육과 사회가 미래가 요구하는 인재들을 키울 수 있을지... 키우고 있는지조차 의문입니다. 답답하네요.

    • 늙은도령 2015.09.13 03:39 신고

      기본적으로 한반도가 해방될 때 친일 부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것이 컸습니다.
      이 책임은 당시의 미 국방부와 맥아더에 있습니다.
      이들이 너무 안이하게 일본을 판단했고,소련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은 기회주의자의 천국이 됐습니다.
      더더욱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것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한국이 친일부역자들은 친미사대주의로 방향을 틀었고 박정희 또한 그것을 철저히 이용해 먹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조중동과 친일 부역자들이 한국의 주요 엘리트가 됐습니다.
      미국 유학파들이 한국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도 일본이란 나라를 점령한 맥아더의 후원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일제의 교육제도가 그대로 정착했고, 한국의 국가체제가 미국과 일본의 혼합물이 됐습니다.
      여기에 압축성장은 도덕의 필요성을 없앴고 성공만이 살길이라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더 이야기해야 하지만 아무튼 한국은 현대로 접어들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공지상주의와 경제주의를 거둬내야 다음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거둬내야 조중동도 친열 부역의 후계들도 몰아낼 수 있습니다.
      한국적인 것과 유럽식 철학, 체제 등을 합쳐야 미래가 있습니다.
      제가 한국적인 것들을 글로 옮기지 않는 것은 유럽을 먼저 이해해야 미국의 문제를 알 수 있고, 그래야 한국 지배엘리트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글로 옮기기에는 너무 길어 지적공동체가 잘 되면 거기서 풀어야겠지요.
      우리나라에도 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대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을 각성시킬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국민들에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대단히 어렵지만 하나씩 풀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최근 많은 움직임들이 있으니 점점 나아질 것입니다.
      최소 10년은 갈등 상황이 폭발해야 미래가 있습니다.

  2. 훈잉 2015.09.13 00:27 신고

    이게 절대 바뀌지는 않지만 바뀌지않는이상 저희 애들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수 있을까요

    • 늙은도령 2015.09.13 03:43 신고

      제가 보기에는 10년 내로 대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 세계적으로 더 이상 이런 식의 경제와 정치가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부류들이 늘어났습니다.
      가장 빠른 길은 미국이 바뀌는 것이지만, 아무튼 신자유주의의 폭주는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넷이 조금 더 좋은 콘텐츠를 반영할 수 있으면 더 빨라질 수 있을 것이고요.
      한국은 현대성의 나쁜 점들이 모두 모여 있는 난장판이지만, 그것이 용광로처럼 녹아내릴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3. 참교육 2015.09.13 08:07 신고

    어둠이 짙어진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워졌다는 희망을 말하지요.
    우리사회는 더 이상 물러설수 없는 막장에 가끼워지고 있습니다. 자본은 자기네들의 세상을 구가하지만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깨어나야 하는데.... 깊은 잠에 빠진 민중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답답합니다.

    • 늙은도령 2015.09.13 23:39 신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그들은 실질적인 면에서 강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명목상의 자본은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그런 것이 불가능합니다.
      정치와 사법까지 얽매여 있느니 이것을 극복하려면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합니다.
      헌데 그런 힘을 시민이 만들지 못하니 외부효과가 있어야겠지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라, 걱정이 앞섭니다.

  4. besso 2015.09.19 01:41

    님 글을 읽다보면 웬지 정토회가 생각이 납니다. 희망의 내음...
    진정한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만나서 좋은 세상을 만들면 참 좋겠습니다.
    다만 인류라는게 원래 탐욕이 근본이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보다는 오히려 정화해보자는 식으로 .. 뭐랄까 참회의 마음으로 접근하는게 좋다는 생각도 하구요.



오세훈은 충북대 강연에서 “복지의 본질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며 “우리의 재정 형편으로 부자 급식을 하는 건 정치이지 복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뒤 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의무급식을 바라보는 그의 편향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오세훈의 논리는 단순함을 넘어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오세훈이 말한 ‘노하우’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국가와 복지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넘어 사실왜곡에 해당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발언입니다.



현대성은 개개인이 처한 다양한 삶의 조건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에서의 인간의 조건입니다.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돌파하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초중고를 넘어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도,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도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의 노하우를 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제도가 그런 개인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것을 넘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개인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들을 돌파해나갈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개인이 신분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의 노하우를 쌓도록 나두지도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현대사회란 개인(과 가족)으로 하여금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와 수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재정’ 운운하는 것도 사실왜곡의 전형입니다. 국가의 재정이란 어떤 조세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오세훈의 주장은 부자와 재계에게 유리한 현재의 조세제도를 손볼 수 없거나, 손대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정하고 들어갈 때만이 오세훈의 주장은 타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해가 충돌하는 다양한 종류의 갈등을 조정해서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의 필요성은 사라져버립니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갈등의 해결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 현실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 오세훈의 주장입니다. 이처럼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에는 한 가지 숨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명확한 기준이 없어 정하기 나름이다)에게 선별적 복지혜택을 주는 대신 무한대의 부를 가질 수 있는 부자도 동시에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그래서 절대다수를 가난하게 만드는 무한대의 부를 인정하는 것이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한 개인(과 가족)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의무교육과 선별적 복지를 제공했음에도 개인이 각자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노하우를 깨우치지 못했기에 가난은 큰 재산을 모은 부자과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제도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선별적이어서 혜택이 되지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삶의 노하우를 깨우쳐서 부를 쌓은 것이기에, 국가의 복지와 사회의 공적 부조를 받는 것은 성공한 자들에 비해 국가와 사회의 혜택을 받는 것이라 굴종적 인식에 사로잡힙니다. 가난이 곧 창피함이 될 뿐, 국민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되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그래서 국가가 사회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됩니다. 퇴임시 8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빈국이었던 브라질을 중진국 반열로 끌어올린 룰라 전 대통령이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며, 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왜 비용이라고 하느냐며 불만을 표출한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선별적 복지는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 거대 금융자본을 위한 공개적인 면죄부입니다. 모든 부는 누군가의 빈곤을 전제로 하는데, 선별벅 복지는 수백만에서 수천만 명이 나눠가질 수 있는 거대한 부를 독점한 자들에게 세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할 뿐, 부의 불평등을 줄이지 못합니다. 





선별적 복지는 또한 복지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의 숫자가 소위 부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습니다. 극소수에 불과한 부자급식을 반대하다 송파모녀 같은 이들을 양산합니다. 복지의 사각지대는 맞춤형 복지로 커버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 성공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또한 학부모의 자산과 소득을 파악하기 위한 엄청난 행정비용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도 지하경제 규모가 20% 정도를 차지하는데, 그것을 일일이 파악해서 투명하게 만드는 행정비용(부당수급되는 비용도 행정비용이다)이면 보편적 복지의 최소한인 의무급식을 중단할 이유조차 사라집니다.





오세훈과 홍준표 같은 자들은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무한대의 부를 허용하기 위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할 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성공한 자들이 가지는 편협하고 반인류적인 현실인식은 자신의 경험을 전체에 투사시켜 모든 사람을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 슈퍼리치와 초국적기업과 재벌의 오너와 경영진, 거대 금융자본에게 지금보다 더 탐욕적인 부의 사냥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줍니다. 개천에서는 용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개천을 용이 나올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지, 용이 살지 않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라는 것은 대국민사기극입니다.



바로 여기에 총체적 차별을 당연시하는 능력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한 최소한의 통치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무서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놓쳤고 케인즈도 놓쳤던, 그러나 허버트 스펜서는 꿰뚫었던 정치의 역할이 최소로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우파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2부 개인은 어떻게 제도의 노예로 전락하는가?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4.11 11:37 신고

    개인적으로 오세훈 시장은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여당내에서는 그래도 생각이 괜찮은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11 16:48 신고

      오세훈법이 있는데 그것은 돈 없는 진보정당을 죽이는 법입니다.
      보수세력들은 기득권들이라 진보정당보다 자금 운영에 애로가 없는데 진보정당은 오세훈법이 정한대로 하면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오세훈이 한 일은 겉으로는 정의를 표방하지만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만 해놓고 간 시장입니다.
      그가 한 일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2. 유태준 2015.04.11 22:24

    선별적 무상급식이 오히려 부의 대물림을 제제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은데요..
    저만그렇게생각하나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적에는 가난해서 밥못먹는 친구들이 있으면 나눠주고 도와주면 도와줫지 따돌림하거나 하는건 12년 교육과정동안 본적이없어서그런지 선별적무상급식의 반대의견논리에는 도통 공감할수가 없네요

    • 늙은도령 2015.04.12 01:01 신고

      최소한의 보편적 복지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나누지 않는 대신 부자에게서 누진적 과세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를 나눠야만 자본주의 세상에서 비슷한 기회와 출발의 환경이라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족의 부와 건강, 지역, 사회, 국가 등등에 따라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최근에는 그런 불평등을 고착화시켜 부와 기회가 세습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물려주는 부와 기회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절대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의 평등도 이루지 못합니다.
      의무급식을 선별적으로 해서 마련되는 비용으로 빈곤층 아이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한다 한들 기존의 부자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차별은 그렇게 커지고 공고해집니다.
      아이들이 부의 크기에 따라 친구들마저 달라집니다.
      최소한 아이들이 그런 차별과 불평등을 점심 먹을 때만이라도 느끼지 않게 해주자는 것이 의무급식의 정신입니다.
      국가란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지 차별적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 결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출발시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짐승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평등해집니다.
      그것이 정치가 하는 일이고 국가의 역할입니다.

      당신이 지금의 교육현장을 가보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1~2학년만 되도 자신이 살고 있는 동내에 따라 차별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일들이 수두룩하게 벌어집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차별에 익숙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3. BGG뚜벅이 2015.04.12 20:58 신고

    하위 50%까지 지원한다고 했을때, 50.1%에 속하는 사람은 지원을 안 해줘야하는지, 49.9%사람들이 꼭 지원받을 필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기준이 있다면, 오히려 그 기준을 악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12 21:28 신고

      네, 그것이 복지의 사각지대가 됩니다.
      선별적 복지는 극소수의 부자를 핑계로 서민, 특히 빈곤층의 삶을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면서 세계 경제는 식민지 팽창과 대규모 개발 및 분업화된 생산을 통한 대량 생산의 역사였습니다. 계몽의 시대가 도래하여 영원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성장의 패러다임이 절대적 가치로 고착화되면서, 이를 뒷받침하려면 두 가지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그 하나는 팽창과 개발 및 생산을 위한 무제한적인 신용의 창출이었고, 나머지는 대량 생산된 제품을 신용 창출에 힘입어 소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계몽의 시대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자본주의의 역사는 돈을 풀어서 자연과 노동과 정신을 착취함과 동시에 이를 소비하도록 개인을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빚더미 위에 올라서 있는 지구



이를 위해 국가는 대규모 행정조직을 동원해 세금을 걷고, 이를 통해 신용 창출의 원천으로 자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불완전하고 불공정한 시장을 통해 새로운 기득권으로 떠오른 지배엘리트들을 위한 국가와 지역 및 세계 차원의 시장을 구축하고, 값싸고 질 좋은 노동자들을 시대적 요구에 봉사하는 교육제도를 통해 양산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긍정적 경제관을 주입시킴과 동시에, 첨단학문과 과학 및 기술로 중무장한 환상적인 광고를 통해 소비의 극대화와 신용 창출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생산자이자 소비자였던 시민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산자의 역할이 줄어들었지만 소비자로서의 역할은 커졌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짐에 따라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하는 인류가 등장했습니다. 소비의 중독이나 노예로 만드는 광고와 서비스 및 유행의 홍수는 삶의 모든 공간에서 개인의 삶과 욕망과 함께하며 끊임없이 유혹했습니다. 광고의 홍수에 노출된 개인이 이것에 맞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로서 끊임없이 더 많은 빚을 권하는 신용 창출과 그것에 힘입은 과도한 소비가 두 개의 축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됐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보다 많은 빚과 보다 많은 소비를 위한 특권화된 기득권의 도구와 선동에 불과합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축이 끝없는 차별과 온갖 문제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금까지 이끌고 왔고, 이제는 그 관성의 질주를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소비경제의 하이라이트



세계 각국의 정부와 국제기구들, 슈퍼리치와 거대 자본들이 하는 일이란 중단 없는 성장을 위한 신용 창출과 소비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그런 무한한 진보와 그 낙관적 결과에 대한 한계에 이른 것이 현재의 세계 경제 상황입니다. 더 이상은 기존의 경제 규모를 늘려갈 방법도, 여력도 바닥이 나 버린 것입니다. 가격파괴와 할인경제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결국 현 체제를 유지하는 두 개의 축에서 심각한 부실이 노정된 것입니다. 거품의 크기가 너무 커 작은 바늘로 톡 찔러도 터져버릴 지경입니다. 특권화된 기득권들은 이것을 터뜨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고,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 상황을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될까요? 경제 성장이 이루어져도 돌아오는 것이 없는 현실에서 아예 빚과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보는 것입니다. 지구보다 더 커진 거품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1%를 더욱 궁지로 내모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항을 하겠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과 정단대의 행동과 실천으로서.



거품을 터뜨릴 수도, 그냥 가지고 갈 수도 없도록 아예 기존의 체제가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빚과 소비를 줄이는 것은 물론, 자식들을 위한 교육비 지출마저도 학교 공부에 한정하는 것입니다. 확률적으로 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낮다면 인정하고 받아들여 지출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양육에 들어가는 비용도 최소화하고, 먹고 자는데 드는 에너지 사용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초고령사회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게 만들면 된다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공동육아와 교육, 생계를 함께함으로써 소비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현 체제의 독점적 승자들이 제발 빚을 내서 소비를 늘려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정말 독하게 자린고비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현 체제가 바뀌지 않은 한 해결이 불가능한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도록 말입니다. 



상위 10%가 전체 부와 기회의 90%를 독점하는 상황이지만, 그들로만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위 90%가 무리하게 빚을 내서 신분상승의 꿈을 버리지 않고, 남들에게 꿀리지 않도록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할 때만 상위 10%가 지금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의 규모를 줄이고, 돈의 대부분이 내부에서 도는 소규모 공동체를 결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다한 돈이 필요없는 문화와 놀이를 찾아서 향유하고, 삶을 짓누르는 무한경쟁의 압박에서 한 발짝 벗어나 정신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진보와 과시와 경쟁의 악몽에서 벗어나 물질적이고 사회적으로는 가난해져도 정신적으로는 부유해지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정부와 정치에 대한 감시ㅡ예산의 사용과 정책 및 법의 적용과 집행ㅡ를 극한까지 늘리는 것입니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같은 얘기이지만 평균수명이 80년이라면 이렇게 2~3년 정도 살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처럼 2~3년 더 살아가는 것이 더 힘겨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지나칠 정도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압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가진 자들이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이 돌지 않으면 지금 가진 것들을 절대 유지할 수 없습니다. 상위 1%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운영에 드는 고정비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돈이 안돌면 제일 먼저 죽어나가는 곳이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와 행정입니다. 기업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들은 살기 위한 자구책을 미친 듯이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위 90%의 소박한 반란에 따른 모든 압박이 상위 10%에게 집중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거품의 압력은 더욱 커지고, 거품의 폭발을 막고 있는 외벽은 빠르게 약해집니다. 빚과 소비를 줄인 하위 90%에게 거품 폭발이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대안적 삶은 이미 제시돼 있다



고생은 하겠지요. 무척이나 힘들 것입니다. 빚을 줄이고 소비를 줄이며 거품을 늘리지 않는 동안 정치권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분노가 차오르겠지요. 그것이 쌓이고 퍼져 가면 바로 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폭력이 배제된 자유의지에 의한 저항이, 정신의 풍요로움을 찾아가는, 가난하지만 즐거운 여정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쓰나미가 됩니다.



동등한 시민으로 태어나 체제의 노예로 살아가는 일을 중단했을 뿐인데, 아니 최소화했을 뿐인데 세상은 근본부터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이릅니다. 그것은 파국을 선택한, 갈 데까지 가보자는 특권화된 기득권들의 암묵적 합의를 공생과 공존의 방향으로 틀어놓을 것입니다.



상위 10%, 최종적으로는 상위 1%에 유리한 현 체제는 중하위 90%가 무리하게 빚을 내 소비하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식시키려면 이 두 개의 축에 타격을 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선택의 시기, 폭력적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현 체제가 원하는 삶의 방식과 정반대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주체이며 삶의 주인입니다. 반성적 실천이 가능한 것이 인간입니다. 우주에서 지금까지의 과학으로 밝혀낸 유일한 고등생명체가 인간입니다. 물질적 가난이란 자본주의적 시각이 만들어낸 차별의 논리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표라면, 이제부터라도 생각하며 최소한으로 소비하며 살면 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꾸면 됩니다. 현재의 체제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빚을 소비에 쏟아부어 이루어내는 양적 성장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하위 90%의 삶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팍팍해지는 것입니다. 작금의 경제 성장이란 하위 90%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전도된 나쁜 성장입니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4.12.05 07:54 신고

    내가 자본과 싸울 투사가 될 때 세상이 바뀌겠지요.
    나 하나가 아닌 수 많은 투사가 된 나로 만드는....

    • 늙은도령 2014.12.05 09:55 신고

      우리가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으면 됩니다.
      성장이란 악마의 논리를 거둬내면 세상이 보입니다.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다수의 나가 생깁니다.
      세상이 복잡하니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12.05 08:05 신고

    세상도 나도 바꾸기가 힘이 드는군요 ㅡ.ㅡ;

    • 늙은도령 2014.12.05 09:56 신고

      아주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세상을 우리가 당장 바꿀 수는 없지만 나라도 변하면 됩니다.
      그냥 그렇게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실제 이런 변화에 동참한 사람들이 늘고 있답니다.

  3. 덕산 2014.12.05 08:34

    공동체 생활으로 공생과 공존을 해나간다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 생각 바꾸기 넘 힘이 드네요.

    • 늙은도령 2014.12.05 09:58 신고

      일단 자신부터.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나부터 변화를 실천하면 됩니다.
      현 체제는 너무 거대해 스스로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일단 내 삶의 방식부터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고, 그것이 퍼져 힘이 됩니다.
      무조건 내 삶부터 바꾸는 것입니다.

  4. 뉴론7 2014.12.05 09:36 신고

    좋은글을 너무 잘쓰시네요

  5. TISTORY 2014.12.05 17:55 신고

    안녕하세요, TISTORY입니다. 이 게시글의 이미지가 12월 6일, 7일 이틀간 티스토리 앱 카테고리 배경이미지로 소개될 예정입니다. 항상 좋은 글과 사진으로 활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6. 발큰신데렐라 2014.12.10 13:44 신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4년 한해동안 정말 필요치 않은 소비를 습관적으로 또는 충동적으로 너무 많이 했더라구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물건 필요한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2014년 마무리 잘하시구요^^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4.12.10 20:01 신고

      네, 건강에 조심하며 좋은 글로 인사드릴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모든 일들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최선은 다해볼 생각입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저에게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들인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7. 기저 2015.03.03 23:02 신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고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물질적인 부분이 참 어렵습니다. 소비가 위축되면서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나를 보며 속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미래를 위한 투자다, 나는 현재가 아닌 미래 지향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버텼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지금 이 순간을 통해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이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