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으로 정치와 정책의 연속성은 약해지고(같은 집권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선거전을 치를 때는 전임 정부의 실적에 관해 마치 야당이라도 된 듯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정치 무대에 오른 의제들은 기술-경제적 관점에서 사전 조정된 내용들이 올라온다. 그것은 허상의 공연에 불과하며, 집권하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선거 때마다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지킬 수 없는 공약들과 정책들이 난무하는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민주적으로 치러져야 할 선거 기간 동안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약점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헌법과 법률에 의해 단기적 정당성을 획득한 정부는 독점적 공권력을 동원해 선거기간 동안 남발된 공약과 정책들을 폐기해버리며, ‘임기제 군주’처럼 임기 내에 확실한 실적을 쌓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지배세력인 ‘제국’이 있다면, 대항세력인 ‘다중’이 있기 마련이듯이, 그런 과정에서 하위정치를 구성하게 된 변함없는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고, 현실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임시직 군주’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통치행태가 과격해질수록 국민과의 소통의 양과 질, 양면에서 급격한 후퇴가 일어나며,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즘적 통치’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그네타기 유권자’와 인터넷과 SNS 등의 하위정치에 정착한 비판세력의 공격에 노출되는 범위가 갈수록 늘어난다. 



이런 현대의 정치 환경에서 집권세력은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며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여론의 추이와 임기 초반에 나타나는 대중매체의 기회주의적 지지와 집권 후반부면 어김없이 배를 갈아타는 변절에 따라 권력의 저울추는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크게 요동친다. 이에 따라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두고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만큼 비대해진다. 여기서 울리히 벡의 도움을 다시 한 번 받아보자.



역설적이지만, 한편에서 법관들이 심지어 정치의 본성에 맞지 않게 자신들의 ‘사법적 독립성’을 행사하고, 다른 한편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정치적 결정의 공손한 수신인에서 정치적 참여자로 변형시키고 필요하다면 국가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법원에 청원하려 하는 바로 그 정도 내에서 이 같은 변화는 일어난다...이 모든 것은 분명히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외교 및 국방정책의 핵심영역에서, 그리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권력의 응용에서 그 독점권을 보유한다. 이러한 독점이 국가정치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중심영역이라는 것은 19세기의 혁명 이래 시민의 동원과 경찰의 기술-경제적 장비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로써 사법부의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비대해지면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는 발언권이 갈수록 커지고 이는 ‘정치의 사법화’로 귀결되는 퇴행의 민주주의를 견인한다.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은 갈수록 퇴화하고, 본질적으로 확립된 질서를 유지하는 성향이 강한 사법부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정치적 정당성을 결여한 판결이 속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예상은 질서유지와 승진을 중시하는 법관의 성향이 제도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규범적 권력으로서의 사법제도의 형성을 다룸으로써 상식의 영역에 이르렀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지배세력이 입에 달고 사는 법치주의라는 단어도 개별 사건에 대한 법의 해석이 민주적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당시의 지배적 세력과 여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게다가 법의 적용은 아무리 과학적인 논리에 따라 법정에 제시된 증거를 다룬다 해도 언제나 법관의 해석이 선행되는 작업이다. 법관도 여론의 향배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지배권력과 기술-경제적 특권그룹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특히 아담 쉐보르스키 등의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보라).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지만 승진을 해야 하는 정신적 근로자에 불과하며,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모이거나 자식이거나 변함없는 당사자이고, 아무리 높게 봐줘도 특정 분야의 지식에 정통한 전문가 이상은 아니다. 그 또한 정치적 성향이 있으며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바라보는 성찰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 힘의 우위에 따른 현실적 고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판결이 내려진다는 일반적 생각은 대단한 허구에 불과하다. 



만일 그렇다면 정치적 시시비비와 정책집행의 결과에 대해 그 민주적 정당성을 가리는 작업은 처음부터 법정에서 시작하면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완벽할 수 없으며, 정의의 여신의 두 눈이 가려진 것은 어떤 유혹에도 불구하고 불편부당한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법관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주체와 객체의 입장에 들어설 수 없음을 뜻한다. 자신이 대변하는 쪽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검사와 변호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의 사법화’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경우가 빈번한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법정에 올라온 사건의 내용이 전문적 지식을 요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이 또한 미셀 푸코가 앞에 언급한 책과 《광기의 역사》에서 자세히 명쾌하게 다루었던 내용으로서, 법관이 판결을 내림에 있어 기술-경제적 전문화에 따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거나,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경우에는 대규모 공개변론이나 공청회ㅡ그러나 일반 국민은 참여하기 힘든 공개변론이나 공청회를 실시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누가 선정하고 규정해서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는가? 이제는 그 분화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된 전문가들 중에서 누가 공신력 높은 권위를 지녔으며, 그 권위에 대해서는 누가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극도로 세분화된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 서로 대치되는 주장과 방법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다산사인데, 해당 분야의 지식을 총괄하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전문가의 성향과 수준에 따라 판결은 왜곡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고 왜곡되기 일쑤였다. 





결국 돈이 유일무이한 권력으로 작동되는 세상에서 ‘탐욕의 삼위일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쪽일수록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 것이 아니라, 누가 보다 높은 수준의 전문가를 대량으로 끌어올 수 있느냐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을 지녔느냐에 따라서 국민적 관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정치적 사안은 승패의 윤곽이 잡힌다. 전관예우로 얼룩져 있는 거대 로펌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오며, 이는 산업사회가 처음 출발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이중적 경향, 즉 타자의 힘은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힘은 최대한 키우는 근대성과 반근대성이라는 이중적 경향에서 나왔다.



입만 열면 거짓말로 일관했던 이명박 정부와 공약 파기나 축소가 최대 무기인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한국적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물론 북한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정학적 한계를 무시할 수 없지만ㅡ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의 원천으로 삼는 정부와 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ㅡ마찬가지로 참여정부도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4.19와 5.18정신과 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합의한 6.15선언과 10.4선언을 당론에서 배제하려 했던 안철수 의원의 한심한 행태는 어떤 말로도 변명될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관한 문제여서 몇 마디 정치적 수사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명박처럼 안철수 역시 기업의 CEO 출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진 책임은 김한길 대표와 문재인 의원의 리더십에 있다. 물론 편파적인 방송들이 이른바 친노 죽이기에 일치단합한 것에서 나온 이유도 있다. 정치와 정당의 보수화와 관련된 제반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 



국정원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는 것과 미국의 NSA가 기타 정보기관들과 정보통신업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전 세계의 지도자들과 유력 정치인, 재계의 거물,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은 물론 타국의 국민들을 상대로 무차별도감청을 자행한 것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지, 최종적으로는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선사할 것이라는 기술-경제적 진보의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ㅡ변함없는 사탄의 맷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ㅡ을 감춘 사회변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의 국민국가는 기술-경제적 요구와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의 원리가 적용되는 분야를 갈수록 줄이고 있으며, 국민의 예산으로 돌아가는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이런저런 방식을 동원해 민영화하고 있으며(대부분 완전한 독점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흑자를 내는 것부터 민영화된다), 그 대신에 기술-경제적 특권그룹과 부딪치지 않는 영역에서, 즉 시장권력과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전통의 영토에 적용되는 주권의 독점적 사용에 전념하고 있다. 국익과 민생이라 하는 마약ㅡ다른 말로 해서 상위1%와 지배엘리트에게 돌아갈 이익과 권력을 숨기기 위해 국민의 의식에 주입되는 마약을 통해 국민을 착취하고 있다.  





결국 기술-경제적 진보의 방향은 기술 발전에 따른 사회의 변혁을 강제하는데, 그 속도의 가속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변화를 동반하는 인지부조화 상태를 늘리거나, 급격하게 줄이고 있다. 특히 대규모 토론이 불가피한 핵발전소 문제와 지구온난화 문제처럼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문화적 변화가 필수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TV로 대표되는 대중매체와 인터넷 및 SNS라는 하위정치 영역이 집중조명을 받게 된다. 이는 신화에서 나와 닐 포스트만이 말하는 《테크노폴리》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데(감시사회와 자동화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이다), 여기에 이르면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에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다루었듯이, 계몽의 비진리성은 그것의 발전이 끝에 도달하면 폭력성이 극에 이르러 파시즘적 전체주의자로 넘어갈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닐 포스트만에 따르면 ‘테크노폴리’는 “특정 기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축적하는 한편, 기술이 가능케 하는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리하도록 자기들끼리 서로 결탁하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이는 수많은 학자들이 밝힌 것으로 작금의 정보사회가 감시사회로 넘어가면서 전 지구적으로 부는 상층부에 쌓이고, 위험은 하층부에 쌓이는 현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1세기에 들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기업들이 초국적 언론기업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통신 기업이며, 그들 모두가 네트워크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애플과 삼성전자, 구글과 MS로 대표되는 4개의 초국적 독과점기업들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신제품에 열광하는 것이 승자의 덕목이고 생존의 필수사항이라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이들은 대중매체와 대형 스포츠행사의 광고를 독점하고, 노동유연화를 내세워 정규직을 대폭으로 줄여서 조달한 천문학적인 인건비를 마케팅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그 생산지가 어디인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복잡한 생산과정을 통해 원가에 수배에서 수십 배에 이르는 뻥튀기 가능한 브랜드와 로고의 신화를 창조했다. 



시계의 발명으로 가능해진 초 단위까지 계산한 노동 분업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수용소 같은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특히 부당한 권위에 대항하지 못하는 빈곤층 여성이 많다)이 생리와 섹스 임신과 낙태, 각종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면서 만들어낸 제품에 붙이기 위해. 잔업을 거부하는 행위는 해고의 사유가 되며, 잔업수당을 꼬박 챙기는 것도 해고의 사유가 된다. 세상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서, 지역 정부의 묵인 하에 18~19세기에나 있을 법한 노동착취가 자행되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이것밖에 없다는 진보의 신화를 끊임없이 주입한 결과에서 나왔다. 



또한 19세기의 후설과 블랑키, 마르크스, 20세기의 벤야민과 폴라니, 푸코와 이스트만, 라캉과 데리다, 딜뢰즈, 엘리아스와 아렌트, 21세기까지 이어진 로티와 네그리, 바우만과 아탈리, 클라인과 벡, 다이아몬드와 스티글리츠 등으로 이어지는 수없이 많은 석학들이 끝없이 경고했던 기술-경제적 발전에 내재해 있는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탐욕의 삼위일체’가 대중매체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개인과 사회 및 시민의식을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퇴행)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13 08:30 신고

    사법부의 판단이 권력을 향한 해바라기 판단으로
    기울수록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멀어져 갑니다

    요즘 하는일마다 위헌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13 17:40 신고

      최소 민주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정말 답이 없습니다.
      이제 노골적으로 나가네요.

  2. chemica 2016.05.29 09:49 신고

    잘 보고 갑니다 ..
    공감 .. ^^

  3. 2018.06.11 04:33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8.06.11 19:46 신고

      글은 많이 쓰면 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찰의 깊이이니 저보다 뛰어나실 수 있습니다.



기술 혁신은 개인 및 집단의 복지증대를 낳는다. (탈숙련화, 실업이나 이직의 위험, 건강 위험과 자연파괴 등의) 그 부정적 효과들은 이러한 생활수준의 향상 속에서 언제나 정당화되었다.


                                                                      ㅡ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에서 인용




걷잡을 수 없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인간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괴시킬지도 모른다. 기술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정신적 과정들과 사회적 관계들을 뿌리 채 흔들어놓는다.


                                                                  ㅡ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에서 인용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보면 그가 지적재산권의 대부분을 독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아리스토텔레스가 나머지 소유권을 가졌다. 이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대단히 불행한 일이었다)을 빌려, 발명의 신인 테우스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타무스 왕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보급해 번영을 누리라고 말하는 얘기가 나온다. 각종 발명품에 대해 타무스 왕이 테우스에게 묻고 답하는 가운데 문자에 이르렀고 둘의 견해는 완전히 갈린다. 테우스는 문자가 이집트인들의 지혜와 기억력을 눌려줄 것이라고 했지만, 타무스 왕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발명가의 모범이 되는 테우스여, 기술의 발명자는 그 기술이 장차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를 판정할 수 있는 최선의 재판관이 될 수 없습니다. 문자의 아버지인 당신은 자손들을 사랑하여 발명해 낸 그 문자에 본래의 기능에 정반대되는 성질을 부여한 셈입니다. 문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이 잊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위해 내적 차원에 의존하기보다 외적 기호에 의존하게 되는 탓이지요. 당신이 발견한 것은 회상의 보증수표이지, 기억의 보증수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라면, 당신과 제자들은 사실과는 상관없이 지혜에 대한 명성을 계속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적절한 가르침 없이도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실제로는 거의 무지하다 할지라도 지식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지혜 대신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장차 사회에 짐만 될 것입니다.



모든 지식과 정보가 축적됨에 따라 검색을 통해 어느 곳에서나 광속으로 접속할 수 있는 정보사회(감시사회)에서 타무스 왕의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기술의 본질에 관해 분명한 성찰을 전해준다. 닐 포스트만의 성찰처럼 ‘기술은 한 번 도입되기만 하면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 자체의 예정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채택할 때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특히 기술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타무스 왕의 성찰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술의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데 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이 만든 도구인 기술에 어떻게 지배되는지 말해주었다. 



한나 아렌트 또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조건이 인간이 만든 기술의 산물인 인공세계에 의해 반대로 조건 지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혁명적으로 달라졌지만, 동시에 진화의 과정을 역행하고 있는 우리의 삶의 행태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특히 상당한 돈이 있어야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고급기술은 모든 인류의 갈등들 사이에서 극소수의 승자와 강자에게 소화해내기 힘들 정도의 전리품을 안겨주지만 절대다수의 패자와 희생자에게는 절망과 죽음을 안겨주기 때문에 그 도입의 단계에서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해서 철저히 따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Ⅱ》에서 말한 대로 과학과 기술을 독점한 ‘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만악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기술은 사용 방식에 따라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되며,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도 동의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등장을 역사의 필연으로 봤고, 그 끝에 이르면 노동자의 생산성이 최고조에 이르러 투입 대비 이익이 제로에 이르러 더 이상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착취가 사라지는 ‘자유의 왕국’이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무한 변신을 예상할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였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착취되고 사물처럼 거래되는 제품으로 전락해 극단적 소외에 빠져드는 노동자의 삶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결론을 내리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마르크스의 문제점을 가장 잘 지적한 칼 폴라니의 설명처럼, 그는 여러 곳에서 자신이 세운 ‘준거틀’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보여줬지만, 소수의 자본가의 수중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노동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휴머니즘의 산물이었다. 아무튼 기술의 발전이 ‘탐욕의 삼위일체’에 의해서 극소수의 승자에 봉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서, 기술에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에서 결론으로 내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사용의 결정과 그 결과에 따라 우리의 적일 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는 우리의 친구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애초에 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도가 없었다면 내 아이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사용할 일도 없을 것이다. 만일 대양을 횡단하는 선박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친구는 항해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연히 마음 졸이며 그의 소식을 전보로 전해들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유아 사망률의 감소가 그 비율만큼 출산을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어떤 면에서 보든 우리가 위생학이 발전하기 이전보다 아기를 더 잘 기른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생활 여건 역시 악화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고 기쁨이 없으며 비참하기 그지없어 오직 죽음만을 바라고 산다면 오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런 프로이트의 절망은 지구온난화가 일상화되고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수록 더욱 현실적인 울림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출산율의 저하는 산업사회의 발전 단계에서 처음부터 내재된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노인들의 수명 연장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임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세대 간의 전쟁은 갈수록 첨예해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손자와 손녀일수도 있는 젊은이들을 비난하고, 젊은이들은 그들의 조부모일수도 있는 어른들을 비난하며 심지어는 폭력적 언사도 퍼붓고 있다. 



기술-경제적 발전이 진행될수록 인류는 인식과 삶의 태도 차원에서도 급격히 퇴보하면서 배타적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가장 많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기술 발전에 따른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총기 사고 등으로 연간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이승을 등지거나 장애인이 되고 있다는 통계가 쏟아져 나온다. 민간 보험을 통해 그 피해를 일부라도 만회한다고 해도 이 또한 기술 발전의 피해자인 개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민간보험마저 들 수 없는 사람들은 어디서 하소연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시계의 발명으로 인간을 시간의 노예와 결과로 평가하는 과정으로 정착한 방식이라도 해도, 기술 발전의 성과를 1년 단위로 나눠서 평가해보면, 한마디로 1년 단위의 고과를 따지면 기술 발전의 결과가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고들을 축적해 거대한 홀로코스트를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례까지 감안한다면 인류 해방을 약속한 기술 발전 덕분에 인류는 상시적 전쟁상태라는 무차별적인 폭력의 심연 속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기술 발전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는 추세라 어제까지의 기술적 경험과 지식들이 오늘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내일에는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퇴물로 취급되는 내가 현실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제까지 확실하고 견고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사회와 삶의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며 오늘의 공포로 엄습해 온다. 내일에는 모든 것들이 불확실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한 지속적인 것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리처드 세넷이 《개성의 부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순간적인 충동과 단기적 행위로만 가득한, 지속적 일상과 습관을 결여한 삶을” 유지해야만 한다. 





언제든지 어제까지 유효했던 것들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오늘의 결정이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 넘칠 만큼 주어진 자유를 소유한 개인은 “이정표 하나 없고 온통 자신이 헤쳐가야만 하되, 그 결과가 어찌 될지 전혀 확신이 없는 상태로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이 잔뜩 도사린 길을 가며 이런저런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공포에 질린 채 무기력한 존재로 한없이 위축된다. 끝없이 땅을 파면서 안전한 곳을 찾아가는 두더지가 그 과정 속에서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가 오늘날의 파편화되고 소비에 집착하는 너와 나, 철저히 개인 단위로 분리된 우리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대해 질 딜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그들의 공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참담한 고백을 해야만 했다.



파편화된 존재의 신화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 파편들은 마치 원래의 온전한 상태와 똑같은 하나의 일체로 모아 붙이기 위해 마지막 한 조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고대 조각상의 파편들과 마찬가지이다. 한때 존재했다는 근원적 총체성 혹은 미래의 어느 날 우리를 맞이할 최종적 총체성 따위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없다.



이런 참담한 고백을 한 사람들이 이제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지만, TV라는 ‘바보상자(또는 ‘탐욕의 삼위일체’의 판도라 상자)’에 길들여진 아날로그 세대는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TV가 보여주는 오늘의 뉴스와 각종 콘텐츠의 오락성과 상업성, 해피엔딩과 즉물적 쾌락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그들은 작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날로그 세대의 막내인 필자도 한 동안 이런 혼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와 사회, 부모가 요구하고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온 그들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의 유동성이 너무나 생경해 존재의 근원까지 뿌리 뽑히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제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그들은 누가 기술을 독점하고 있으며 세상을 이렇게 만든 TV 화면 뒤의 지배자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생각하려 않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들은 닐 포스트만이 《죽도록 즐기기》에서 말한 것처럼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압축성장이 가져다 준 확고부동한 믿음, 그 기간 동안 가족의 해체가 시작됐으며 부모 공양과 자식의 교육과 결혼에 들어간 돈 때문에 땅을 팔고 집을 옮겨 다녔고, 이제는 노후도 대비하기 힘든 정도로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굶주림에 대한 위협에서 해방됐다는 진보의 허상이 불러온 마법에 갇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고,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당연한 것이며, 박정희의 독재 시절에 이루어진 압축성장과 이를 주도한 대기업 덕분에 지금의 호사(?)를 누리게 됐다는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두지 않는다. 자신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인지, 국가의 경제규모가 커진 만큼 자신의 재산도 비례해서 늘어났는지, 왜 자식들과 손자와 손녀들과 떨어져 살며 명절 때에나 간신히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지, 그들은 명문대를 나오고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왔는데도 취직하지 못하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 죽어라고 따라가려고 했던 미국이 외국의 돈으로 흥청망청 살다가 전 세계를 경제대공황으로 내몰면서 자신은 부도국가의 처지로 전락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려 36년간의 일제 강제합병의 침탈과 착취에서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왜 한반도가 민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쪽으로 잘리게 됐는지, 스탈린식 사이비 공산주의의 확장을 6.25전쟁 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앗기고 있는지(이것을 다루려면 한 권의 책도 모자라다. 미국의 도움을 받는 것은 곧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첩경임을 고백한 《경제저격수의 고백1, 2》가 가장 무난하다) 따져보지 않는다. 북한의 공산주의라는 것이 국가파시즘의 형태를 띤 전체주의 국가이며, 이익 추구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 인정하는 미국의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 때 실시한 기초노령연금이 박근혜 정부가 개정한 기초연금보다 수령액이 5~6년만 지나면 역전된다는 것도, 자신의 자식과 손자/손녀들은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르는 손해를 본다는 것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여성 대통령의 리더십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은 여성들을 차별하는 정책과 친기업적이고 친부자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이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오히려 그 당시에 이루어진 각종 불평등들의 원천들이 미래세대의 불행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6.21 10:34 신고

    인간적이지 못한 모든 문명은 인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불행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지혜가 인류를 불행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6.21 17:32 신고

      네, 기술-경제적 접근이 인류를 더욱 망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요즘입니다.
      인류는 발전할수록 종말에 근접하니 이런 경향을 어떻게든 늦추거나 막아야 합니다.
      헌데 이런 대세를 뒤집을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2. 뉴론♥ 2015.06.22 07:00 신고

    한주의 새로운 시작이네여 즐거운 한주 되세여

  3. 耽讀 2015.06.22 07:59 신고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경남진주에서 경기수원까지 매주 기차를 탔습니다. 월요일은 진주에서 수원, 금요일은 수원에서 진주.
    그 때 통일호가 있었습니다. 무궁화호는 한 번씩 탔지만 거의 통일호였습니다. 시간은 7시간쯤 걸렸습니다.
    기차를 타면 계절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주씩 변해가는 바깥 풍경은 경이로움입니다. 무엇보다 팔도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사투리를 다 들 수 있었죠. KTX는 계절변화도, 구수한 사투리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기술문명 편리함이지만, 사람냄새와 자연냄새를 빼앗았습니다. 더 빠른 기차가 또 나오겠지요.

    • 늙은도령 2015.06.22 15:05 신고

      인간에게 더욱 많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을 빼면 기업만 떼 돈을 버는 것이지요.
      철도 같은 인프라는 결국 산업체를 위한 사업으로 변했습니다.

  4. 『방쌤』 2015.06.22 12:32 신고

    무조건 빠르게 가고, 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는 아닌데 말이죠
    우리가 간과하거나 잊고 살아가는 것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조금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증을 가져봐도 답은 너무 뻔하게 보이는 것들인데 말이죠
    기술-경제적 성장과 접근을 막을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조화는 필요하다 생각되네요

    • 늙은도령 2015.06.22 15:08 신고

      우리는 물질적 편리함만 중시하는데 이는 산업체의 시각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 것입니다.
      공공성이 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비지상주의와 물질만능은 신제품들의 홍수 속에 빠지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5. 프리뷰 2015.06.22 17:05 신고

    요즘 메르스 때문에 걱정이네요.
    빨리좀 진정되었으면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6.22 17:15 신고

      잠복기에 있는 슈퍼전파자가 문제이고, 최초의 감염자가 낙타가 아닌 인간으로부터 옮겨진 것이라면 변이가 일어났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럴 경우 풍토병이 되거든요.

  6. 공유의 플랫폼 2015.06.22 20:05 신고

    적당히 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한데 말이에요. 한국은 정신적으로 성숙하기 전에 너무 경제가 빨리 커져서 문제가 많은것같아요.

    • 늙은도령 2015.06.22 21:12 신고

      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압축성장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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