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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를 사지로 몰고 있는 ‘트로이카’의 배후에는 마키아벨리의 화신, 메르켈이 자리하고 있다. 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에 따르면, 유럽은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단일 국가의 독점이 불가능한 체제를 구축했다. 한 국가가 강해지면 다른 국가들이 연합해 이를 저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베스트팔렌조약의 핵심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유럽의 강대국들이 벌이는 패권전쟁은 이후로도 지속됐지만, 어느 한 국가도 유럽의 패권을 움켜쥘 수 없었다. 베스트팔렌조약의 효력은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1806년에 정지됐지만, 유럽 강대국들의 패권주의가 유럽 내부로 향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킨 국가가 독일이었고, 히틀러의 나치가 그 주역이었다. 히틀러는 ‘유럽 내의 독일’이 아니라 ‘독일 휘하의 유럽’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최소 5천만 명이 사망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히틀러의 나치는 미국을 유일제국으로 만들어준 채 패망했지만, 유럽은 전후 체제의 안정과 번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유로존의 통합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단극체제를 탈피하고, 한중일 중심의 아시아 경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이루어졌지만, 히틀러의 나치처럼 하나의 국가가 유럽을 독식하는 것을 막기 위함도 내면에는 자리하고 있었다. 달러와 맞설 수 있는 유로화로의 통합도 이래서 가능했다.

헌데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이 밑그림을 그려준 유로존 통합의 불완전성(금융 강국 영국이 참여하지 않은 핵심적인 이유)이 독일과 프랑스의 독점을 불러왔고, 최근에는 독일의 독주로 귀결됐다. 이 바람에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는 유로존 통합의 피해자가 등장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해 세계적인 석학들(스티글리츠, 크루그먼, 피케티, 벡, 삭스, 로드릭, 촘스키 등)이 독일(과 프랑스)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된 유로존 통합을 비판하며, 이익을 독점해온 독일의 지도자 메르켈에게 그리스 부채탕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올해 작고한 울리히 벡은 《경제 위기의 정치학》에서 마키아벨리적 통치술의 대가인 메르켈이 유로화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욕만 채운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유로존 통합의 불완전성을 이용해 돈을 쓸어 담고 있으면서도, 피해자인 PIGS의 부채 탕감은 국내여론을 이용해 피해가는 메르켈을 유럽의 파괴자로 규정했다.

벡은 무력으로 ‘유럽 내의 독일’이 아닌 ‘독일 휘하의 유럽’을 만들려고 했던 히틀러와, 유로화로의 화폐통합만 이룬 유로존의 불완전성을 이용해 독일제국을 재현하려는 메르켈이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스티글리츠와 크루그먼에 이어 피케티와 삭스 등이 메르켈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독일은 유로존의 불완전한 통합 때문에 전후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리스 부채의 반은 독일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호황의 결과다. 메르켈의 정치적 목표가 독일 중심으로 유럽을 재편하는 것이고, 독일의 여론도 반으로 갈라진 상태라 메르켈이 그리스 부채탕감에 동의할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그리스는 독일이 부채를 탕감해주지 않으면, 유로존을 탈퇴해 러시아와 손잡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유로존 탈퇴를 막기는 힘들며, 유로존은 붕괴된다. 그 피해는 최대 채권국인 독일(과 프랑스)에도 미칠 것이며, 유럽을 넘어 세계경제가 공멸로 가는 길이다.
메르켈이 정치생명을 걸고 결단(부채탕감 반대 국민을 설득)하지 않은 한 그리스와 유로존의 경제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이 그리스 우파정부와 유로존의 지배엘리트들과 공모한 초대형 금융범죄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 없다면, 독일이 그 동안 독식해온 돈을 풀어주는 것만이 유로존의 공멸을 막을 수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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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와 투기의 백화점인 이완구 총리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반드시 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방송(JTBC도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완구 후보자가 경찰에 근무하던 당시 국보위에 파견(1980년 6월~10월)돼 활동한 경력입니다. 이 후보자는 그때의 파견 활동으로 보국훈장광복장을 받았고 초고속 승진의 이유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완구 총리후보자가 수천 명의 국민을 살해하고 수십만 명의 인권을 유린한 군부독재에 참여한 것이라 총리로서 분명한 결격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국보위 파견 경력에 대한 소명이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정치적 검증을 거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모를까, 이상할 정도로 이에 대해 침묵(이완구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주일 전부터 인터넷언론에서 보도된 상황)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국보위는 살인마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시절, ‘10.26 사건’ 이후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하에 민주주의와 헌법을 정지시킨 채 초법적인 독재(야당 탄압, 언론 파괴, 인권 탄압)를 주도한 야만적 기구였습니다. 특히 국보위는 5.18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한 주체였고, 북한의 정치인수용소와 동일한 역할을 한 삼청교육대를 운영한 주체입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다음에, 군사독재의 출발점이 된 내란 사건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에서 ‘국보위 및 상임위 설치가 헌법기관인 행정부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국헌문란’이며 ‘폭동 행위를 유지‧강화하기 위해 취재진 조치는 내란행위’에 해당한다며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또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에 대해 공직자 숙청,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인권 유린 등을 자행했다며, 대법원 판결과 동일하게 ‘신군부의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함을써 사형 선고가 정당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50대 이후의 세대에게 삼청교육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인권 탄압과 국가폭력의 대명사였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의 중앙정보부보다 더 악랄했던 것이 국보위와 삼청교육대였는데, 이완구 총리후보자가 국보위에서 파견돼 활동했고, 그 경력 때문에 훈장까지 받았다면 국보위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밝혀야 합니다. 까도까도 새로운 의혹이 양파처럼 나오는 이 후보자의 투기의혹도 중대한 결격사유이지만, 국보위 활동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합니다.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 비시 정부는 수장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는 모든 자는 물론 나치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와 블랙마켓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했습니다. 처형된 사람만 105.000명에 이르고, 합법적으로 숙청된 프랑스인이 거의 100만 명에 이릅니다. 드골 정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을 단행한 것은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해 역사를 바로 세우고, 다시는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는 전체주의적 독재를 자행한 자들과 그에 협력한 자들을 숙청했습니다. 극우와 극좌 정부를 막론하고 전두환의 국보위처럼, 전체주의적 독재를 자행한 초법적 통치기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은 물론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극우 히틀러)와 난징대학살(극우 군국주의), 소련의 수용소인 굴락학살(극좌 스탈린), 4.3사건·거창·보도연맹학살(반공, 이승만), 광주항쟁 무력집안(국보위, 전두환) 같은 대규모학살도 저질렀습니다.
그런 초법적 기구에서 전쟁과 학살을 자행한 공무원과 그에 부역한 자들은 어김없이 합법적인 숙청을 당했습니다. 친일부역자에서 반공과 식민지사관 및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변신한 그들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린 조중동을 비롯해, 한나라당과 보수세력들이 참여정부의 4대개혁입법을 필사적으로 무력화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위법성이 국헌문란과 내란죄에 해당할 만큼 초법적인 국보위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이완구 총리후보자는 그때 무슨 일을 했고, 왜 훈장을 받게 됐는지 국민 앞에 진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군부독재의 모태인 국보위에서 일했다는 것은 국헌문란과 내란죄에 일조했다는 것이기에, 그가 한 일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후보를 자진사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유신헌법 제정에 깊숙히 참여한 김기춘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는 마당에 총리마저 국보위 경력이 있는 사람이 차지하면 박근혜 정부는 독재정부를 지향한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완구가 초고속 승진한 이유가 국보위 활동 때문이라는 보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디어오늘과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한겨레, 경향 등을 통해서 KBS와 종편에 압력을 가한 것까지 밝혀진 상황(그 다음에야 JTBC와 KBS가 보도했다)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인사청문회에서 이것을 따져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제1야당만이 아니라, 민주 정당으로서의 자격도 없습니다. 당대표 선거가 끝나면 이완구 총리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완구 후보자도 국보위 파견이 자신의 뜻에 반했지만,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만으로는 그때의 경력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총리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반드시 밝혀야 할 것이 국보위 경력의 실체이며 그것만이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나마 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공영방송을 기레기 방송으로 만들고 종편에 압력을 넣어 표현의 자유를 파괴한초법적 행태도 밝혀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가 아무리 막장이라도 헌법을 파괴한 자가 총리에 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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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가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 이제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인 된 일베의 일탈과 폭력적 행태가 테러의 수준에 이르렀다. 일간베스트에 단원고 교복을 입고 오뎅을 먹으며 '친구 먹었다'는 사진을 올린 것은 고3일베의 폭발물테러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관용의 역설'은 벌레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박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아래의 사진들이 말해준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넓혀주는데 악용되는 '관용의 역설'은 벌레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들의 반사회적 폭력을 막으려면 박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육체에 가해지는 테러보다 더 비열한 것이 영혼에게 가해지는 테러며, 그것도 사회적 약자와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테러 중에서도 최악의 테러며,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양아치·건달·깡패들은 무리지어 다닌다. 폭력이 범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리지어 다니며 폭력에 따른 죄의식과 두려움을 최소화시킨다. 벨레들의 출몰을 말해주는 위의 사진들 속에서도 그들 특유의 표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집단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짐승보다 못한 벌레로서의 동질감을 보여줌으로써 죄의식과 두려움을 희석시키고 양아치·건달·깡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초법적 무리를 이룬다.
나치 소속의 전위부대들이 '하이 히틀러'라고 외치며 손을 어깨보다 조금 높은 위치로 쭉 뻗는 특유의 제스처로 동질감을 표현했고, 일제 군국주의는 '덴노이까 반사이(천왕 만세)'를 외치며 사무라이식 충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동질감을 표현했다. 어디서든 혼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벌레들의 의식은 나치와 일제 특유의 집단의식을 강조하고, 극단적 폭력과 테러를 조장하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런 표식을 통해 집단으로서의 세력을 과시하는 벌레들의 만행은 자신의 가족마저 비하와 테러의 대상으로 삼는 패륜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도록 만든다. 이들은 자신이 벨레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폭력적임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세력을 유지하고 행동반경을 넓히며, 그렇게 의식과 실천의 폭력화는 더욱 강렬해져 상상할 수도 없는 최악의 테러로 치닫기 일쑤다, 인식이 행동을 좌우하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 영상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더해지면 패륜적이고 파렴치한 범죄가 빛의 속도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기술의 발전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넘어 인류 발전의 필연의 과정이라고 해도, 영상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악용하는 사례도 덩달아 폭증하기 마련이다(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를 참조). 양아치·건달·깡패처럼 현실에서의 무리지음이 불가능하다면 사이버 세상에서의 무리지음을 통해 폭력과 테러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한다.

무리지음이란 위에서 언급했듯, 양아치·건달·깡패처럼 폭력적이고 반인륜적인 폭력 범죄를 가능하게 만든다. 나치의 등장과 집권에 이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들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노출증과 관음증을 정치적 선동으로 부추겨 집단적 폭력으로 유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중연설에 탁월한 재주를 지닌 히틀러와 그의 주위로 정치공학·철학·심리·병리학자, 광고·마케팅 전문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몰려든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참조).
걷잡을 수 없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인간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괴시킬지도 모른다. 기술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정신적 과정들과 사회적 관계들을 뿌리 채 흔들어놓는다.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에서 가져온 위의 인용문은 벌레들의 패륜적이고 반인륜적인 폭력의 근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인류의 인식보다 언제나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문명을 풍요롭게 만들고, 인류를 빈곤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권력과 자본의 행태에 투명성을 강요하고, 필자가 글을 올리는 블로그와 '아고라', '오늘의 유머', 페이스북과 트위터처럼 민주주의의 발전과 확대에도 도움을 준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친구의 역할'을 넘어 '악마의 역할'로 변질될 수도 있다. 군사적인 기술력의 일방적 우위를 바탕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전쟁범죄가 바로 그러하며, TV조선과 채널A의 광기어린 종북몰이가 더욱 그러하며, 세월호참사의 최대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들과 일제의 성노예로 꽃다운 청춘을 짓밟힌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보이는 벌레들의 파렴치하고 반인륜적인 폭력은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모두는 상대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던 볼테르가 될 수 없기에, 표현의 자유와 관용에도 한계를 정할 수밖에 없으며,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처럼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타인의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명백하면서도 현존하는 위협일 때는 한계를 강제할 수밖에 없다. 벌레들의 일탈과 폭력은 표현의 자유도 관용의 대상도 아니다.
그들에게 법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처벌이 가해져야 함은 당연하고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벌레들의 난장을 그대로 나두면 언젠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다. 그 정치인이 벌레 박멸의 적임자요, 거악에 맞선 정의의 수호자로 포장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물론 그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기술의 발전을 이용해 무리를 짖는 자들과 집단, 세력이 있다면 제2, 제3의 벌레들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며, 상대적 약자를 향해 폭력을 남발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극우와 극좌의 준동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의 발전과 이를 악용한 광범위한 선전선동이다. 히틀러의 나치와 스탈린의 소비에트처럼 역사적 경험을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한다.
개처럼 버는 자는 개가 되듯이, 벌레처럼 사는 자는 벌레가 된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해로운 벌레는 박멸하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벌레가 활동하는 서식지를 없애야 한다. 그들의 본거지를 폐쇄시켜야 할 이유는 넘치도록 많다. 그들이 세상을 활보하며 폭력을 남발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로 넘어가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궤변이자 어불성설이며, 정부와 사회의 명백한 직무유기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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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삼촌팬에게는 여전히 넘사벽인 소녀시대(제시카까지 여전히 9명이었답니다)가 황홀한 자태로 꿈속에 왕림하시어, 매력적인 군무를 추며 살살 녹을 듯한 손짓(차마 의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 이해바라랍니다.. 흐흐흐)으로 ‘소원을 말해봐’ 하는데, ‘이건 꿈속에서 꾸는 꿈이야’ 하면서도 ‘run run run’ 해버린 소원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아, 완벽히 무장해제된 저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날을 세우며 분노로 단련시켰던 소원을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꿈속에 왕림하지 않을 소녀시대에게 그만 ‘TV조선 폐방’이라는 올해의 소원을 말해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뒤에 ‘어떻게 스킨십이라도 한 번만 하면 안 될까요?’라는 필생의 소원은 말해보지도 못한 채.
그래도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아니, 여기까지만 좋았습니다. 제 황당한 소원술회에 크게 당황한 소녀시대가 Gee Gee Gee 하면서 섹시한 게걸음으로 꿈속에서 퇴장하는데, 그 섹시한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저는 TV조선의 폐발이 소원일 수밖에 없는 ‘달콤살벌한 이유'까지 말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치의 광기어린 선동방송보다 더 악독하고, 동네 골목깡패보다 더 비열한 기레기 테러집단의 행동대장인 TV조선은 북조선김씨인민공화국과 상통하는 남조선수구공안정부를 대변하는 극우 전체주의 방송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자체 악의 전파로 이어지기 때문에 폐방시켜야 합니다... 라고 말해버린 것입니다.

제 소원술회를 들어줄 수 없었던 소녀시대의 게걸음은 더욱 빨라졌고, 이윽고 run run run으로 바뀌어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케빈 스페이스가 보여준 반전의 걸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질 않을 아득한 꿈밖으로. ‘이건 꿈이야! 꿈에서 깨어나면 안 돼! 그래야 테티서라도 돌아올 거야!’ 하면서 다시 잠들기를 바랐지만, TV조선의 빌어먹을 저주는 되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카라도 좋고, 에이 핑크나 걸스데이, AOA도 좋다고 다시 꿈꾸기를 바랐지만, 꿈속의 저는 여신 수지를 역겹게 모방한 마녀 정미홍이 ‘TV조선의 종북몰이 샤워나 하실래요’ 하면서 저주의 말들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의 저는 ‘이건 뭐야! 살려면 꿈에서 깨어나야 해!’를 외쳤지만 끝내 가위에 눌려서 힘겹게 눈을 뜨는데 성공했습니다.
헌데 이건 또 뭡니까? 폭식파티를 벌이는 백정 변희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고 있는 게 아닙니까? 저는 달콤해야 할 잠속에서도 극도의 공포를 동반하는 공황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깨어날 수도, 계속 잠들어 있을 수도, 심지어는 다시 꿈꿀 수도 없는 상태로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갇혀 있다가, 완전히 탈진된 상태로 새해 첫 날의 늦은 아침을 맞았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저로서는 그 전에 늙어빠진 삼촌팬의 뮤즈였던 소녀시대를 순식간에 몰아낸 극악무도한 방송인 TV조선의 폐방이 통일보다 우선하는 소원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제가 꿈속에서 소녀시대나 수지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면 TV조선의 폐방이 우선돼야 함을 깨닫게 됐습니다.
어, 그런데 이 사람들은 또 뭐야? 왜 저들이 내 방에 있는 거야? 저 자들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돌아온 저격수들’이잖아? 아, 그랬습니다. 저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었고, 자다가 눌린 리모콘 때문에 TV조선이 켜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에게 주어진 새해 첫 날의 시작은 완벽한 악몽이었습니다.
TV조선의 폐방!!! 이보다 더 중차대한 소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단의 조치가 정말로 필요한 곳은 청와대보다 TV조선이 먼저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무간지옥을 왔다 갔다 한 저의 을미년 첫 번째 꿈속에서의 잠은 최악이었습니다.
부디 올해는 이 참혹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기를, 저는 빌고 또 빌었습니다. 여전히 매력적인 소녀시대가 떠나간 황량한 자리에는 꿈의 잔재들이 죽음과 가장 닮은 형태의 잠으로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TV조선이 악마의 주술들을 여전히 내뱉고 있음으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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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룸의 보도에 따르면 검찰이 이정희 전 의원과 해산이 결정된 통진당 의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에 들어간다 합니다. 대한민국이 비선 실세의 나라임을 폭로한 정윤회 문건의 후속수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전체주의적 정권의 호위병을 자처한 정치검찰이 전면에 나선 모양입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에 8명이 자신의 이념이 극우적임을 커밍아웃한 상태에서 정치검찰이 마구잡이로 공안수사에 들어가도 이제는 위헌소송조차 제기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을 노렸다면, 그녀의 딸은 헌재를 통해 국가의 우파적 전체화를 관철하려는 모양입니다.
푸코가 분명하게 밝혔듯이 극우와 극좌의 공통점은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최소화해 국가를 전체화하는 초헌법적 통치행태에 있습니다. 어떤 다름도 인정하지 않는 극우의 전체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와 히데키의 군국주의가 실현했고, 극좌의 전체주의는 스탈린의 소련과 북한의 김일성이 실현했습니다.
두 체제에 가장 근접한 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반민주적 권력을 유지했던 유신독재와 같은 권위주의적 독재정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행어 중 하나인 ‘100% 대한민국’이 전체주의의 구호와 비슷한 것으로, 불확실한 다름과 차이보다는 확실한 질서와 차별을 선호하는 인간 진화의 본성을 파고든 것입니다.

극좌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한다는 명목 하에 등장했고, 극우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환상을 완성한다는 명목 하에 등장했지만, 서로 통하는 두 체제는 영토와 주권과 국방과 내치로 대표되는 국가의 전체화하는 경향에 근거합니다.
국가의 공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일체의 이견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는 미네르바 사건과 카카오톡 검열에서 보듯이, 국민의 머릿속까지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들은 민중봉기 같은 폭력혁명이나 군사쿠데타 같은 반혁명이던, 아니면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이던 국가권력을 잡은 후에 국가공권력과 정치깡패인 용역들을 동원해 반민주적이고 초헌법적인 통치를 자행합니다.
표현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처럼 민주적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는 1인 독재와 일당 독재는 전체주의적 통치의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공권력의 초헌법적이고 반민주적 행사를 위해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특히 방송)을 장악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떠오릅니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방송을 장악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일단 방송을 장악하면 법치주의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부족했던 유신독재 시에는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해산시켰다면, 민주화 이후의 보수 정부에 들어서는 법치주의를 이용해 반대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여론을 독점하고 조작할 수 있는 방송 장악을 통해 이명박 정부는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을 새누리당 2중대라는 보수화에 성공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법치주의를 동원해 제2야당인 통진당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국가의 전체화하는 경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이 남았습니다.
공안검사들의 천국이 된 청와대와 법무부와 헌재를 통해 통진당 해산에 성공하자마자 통진당 지도부를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피선거권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이 국민의 머릿속을 지배하려는 본격적인 행보입니다. 이들이 내세운 것이 초헌법적 법치주의이니 정치검찰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따라서 파시즘적 속도로 통진당을 해산하기 위해 정당해산청구소송이 동원됐으니, 국민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위해 국민해산청구소송이 동원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통진당 지도부와 핵심 당직자들이 정치검찰에 의해 사법처리 된다면, 그 다음은 통진당에 표를 준 국민들이 타겟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 이전에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와 언론들이 해산될 수 있겠네요.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경향신문을 폐간한 것처럼.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 고착화된 정경유착(부의 불평등과 세습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버전인 줄푸세는 이미 던져놓은 상태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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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김영오 죽이기,
나치,
동아일보,
살인행위,
세월호 참사,
세월호참사,
인격 살인,
인권 탄압,
인권유린,
전체주의,
조선일보,
조폭적 보도,
집단 이지메,
파시즘,
히틀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MBC는 거대 언론이다. 이들은 한국의 여론환경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조폭방송에 다름아닌 TV조선과 채널A를 행동대장으로 해서, 악마의 연합을 이뤄 하나의 사안을 다룬다면 그 사안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다. 정부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할 수밖에 없고, 그 사안은 어떤 형태로든 정치의 중심에 자리하고, 국민에게 회자된다.

왜곡의 대명사인 조선일보
헌데 이 세 개의 거대언론이 단 한 사람을 향해 신상정보를 탈탈 털고, 정체도 모르는 네티즌의 쓰레기보다 못한 말들을 인용해 인격살인을 자행하고 있다. 그 사람은 정부의 무능과 기업의 탐욕으로 자식을 잃은 김영오씨다. 세 명이 한 사람을 공격해도 집단 이지메라 하는데 거대 언론 세 개가 한 사람을 매장시키기 위해 맹공을 퍼부으니, 이런 야만적 폭력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신상털이의 정수를 보여준 조선일보
주치의의 전력까지 파헤치는 조선일보의 행태는 인권 유린과 인격 살인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위력은 행정·입법·사법부를 능가한다고 하는데, 이들이 폭력적인 보도는 야만공권력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는 언론의 공정성과 인권 보장에 대한 보도준칙과 윤리준칙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에서 가려지기도 한다.

기레기 방송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MBC
이런 면에서 볼 때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방적인 이념적 편향성을 보여주고, 왜곡·편파 보도를 일삼는 기레기·조폭 언론 때문에 민주주의국가라고 볼 수 없다. 언론이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도할 수 없지만, 다른 언론에서 모두 보도할 정도로 중요한 것을 외면하는 것은 의도적인 외면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으로서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쓰레기라 할 수 있다.

편파 보도를 일삼는 동아일보
하물며 한 나라의 거대 언론 세 개가 한 사람을 공격하면 그 결과란 참혹함을 넘어 그 자체로 살인행위에 해당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면 이들의 인권 말살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조선·동아·MBC가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김영오씨를 맹폭하는 것은 북한의 인권 탄압에 비교해도 뒤질 것이 없다.

파시즘적 보도를 일삼는 TV조선
여기에 TV조선과 채널A의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공격까지 더해지면, 파시즘과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들이 체제 전복세력처럼 만들어지는 과정이 집단적이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이 나라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라 할 수 있을까? 현재의 대한민국은 유사 전체주의에 들어섰고, 일본의 재무장을 욕할 수도 없을 만큼 파시즘화됐다.

인권유린의 정수를 보여준 채널A
이들은 김영오씨가 한국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으니 그를 해부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고 있는 피해자가 아무리 세월호 유족이라 해도, 한 명의 국민을 매장시키기 위해 천하의 거대 언론들이 연합공격을 펼치고 있으니, 자신들이 하는 미증유의 폭력이 얼마나 치졸하고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짓인지 알기 때문이다.

조폭적 방송의 달인인 TV조선
히틀러의 나치 체제를 떠올리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죽음을 각오한 단식에 들어간 아버지를 위선자에, 죽일 놈으로 만드는 것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조선·동아·MBC 같은 거대 언론들이 한 사람의 인권을 말살하는 조폭적 행태가 아무런 제제도 없이 진행되고, 국회의원을 향한 물리적 폭력이 자행되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안방과 거실, 음식점과 거리까지 지옥의 소리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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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나치,
뉴런 거울신경,
리처드 도킨스,
미국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사적독점,
쇼팬하우어,
억압과 착취,
위정자,
이기적인 유전자,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칼 포퍼,
토크빌,
히틀러
근대이성이 창출해낸 현대성이란 즉각적인 만족을 위한 소비지상주의와 무한투쟁을 장려하기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왜곡돼 전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인간이란 이기적인 유전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저 복잡한 생존기계가 아닌 스스로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종이자,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지적 존재이다. 신이라는 존재와 무한이라는 개념을 추상할 수 있는 인간이란 종은 그래서 한 명 한 명이 작은 우주이며, 곧 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언자로서 나서는 대신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오류를 항상 눈여겨보도록 우리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심판자라는 생각을 우리가 내던져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는 버릇을 끊어 버렸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당화를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진보좌파인 나는 합리적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와는 몇 가지 면(특히 경제적 관점과 변증법적 유물사관)에서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권력의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혼자만의 역사와 이미 결정된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승자와 강자의 역사란 폭력의 만연으로 짐승으로 되돌아간 인간이란 종의 비극을 보여줄 뿐이다. 민주주의란 그런 세상에선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만일 위정자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통치를 하면, 그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며, 열린사회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라고 했다. 위정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도 국민이고, 그의 탈선을 막기 위해 그를 끌어내리는 것도 국민이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전 세계의 위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며, 이럴 때만이 열린사회는 점진적인 발전을 할 수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발전이 가능하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인간은 권력의 행사나 복종의 습관으로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부정하다고 믿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부정하게 탈취되고 억압적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통치에 복종하게 되면 타락하고 만다”고 한 것도 매우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이는 승자와 강자의 공적독점을 대체한 사적독점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사적독점이 공적영역마저 사유화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더 유효하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간다’고 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불멸의 가치로서 영원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가 없다면 인류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 평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사회적이던 간에 평등이라는 것이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불평등한 부조리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생명의 침해불가능한 존엄성과 탄생의 불평등은 다른 얘기다.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자로써 살아가지 않는 한 나는 타인에게 비쳐진 나일 수밖에 없다. 타인이 지옥일 수는 있어도 존재 자체와 관계를 거절할 수는 없다. 죽음마저도 자신의 삶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선택하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이라고 말한, 자본주의 사회가 철저하게 배격한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우리나라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소평가된 철학자로 스피노자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다)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타방이 있어야만 일방이 있으며, 타방이 없으면 다른 일방도 소멸되어 버린다. 양자는 서로 직접 접경하여 객관이 시작되는 데서 주관은 끝난다. 양자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모든 객관의 일반 형식, 즉 시간·공간·인과율이 객관의 인식이 없이도 주관에 의해 안전히 인식”될 수 있다.
인간은 뉴런거울신경을 지니고 있어 사전 접촉이 없었던 상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오히려 인위적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나는 상대가 있어야 존재하며, 상대 또한 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주관이 타인의 주관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나에 대한 타인의 주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사실이라는 객관적 팩트(시간과 공간, 인과율에 의해서 시계열 상으로 진열되는 역사의 단편들)는 의미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과 믿음이, 역사에 적시될 팩트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곡이 없는 절대 다수의 삶의 이야기들. 최초의 모든 이들과 그 후손들 모두가 주인공인 보편적 역사의 탄생.
이번에는 인류의 위대한 현인이며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정치학자의 입을 빌려보자. 그녀는 인간은 늘 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인간의 조건』, 누구나 상황에 따라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예루살렘의 아히이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와 인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의 나치를 파헤친 『전체주의의 기원』 등을 쓴 한나 아렌트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 오직 인간에만 집중했던 그녀의 사상은 네그리의 비판을 떠나서도 인류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어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은 역사를 상투적인 틀로 해석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례에서 전례 없는 일을 추론하거나 현실의 영향과 경험의 충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오히려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무게에 패기 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현실을 아무런 편견 없이 감연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내가 나의 능력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일인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유치하고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는 가능한 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최대한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강자와 승자 위주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맞설 수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나 연대를 이룰 때 그들에 맞서 싸워 이길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욱 분명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결정체인 새로운 제국과의 싸움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제국의 체제 논리 때문에 전 세계가 상시적 전쟁 상태에 빠져든 상황까지 고려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어찌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대한다 해도 무적의 제국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나는 모든 제국과의 싸움에 임해, 그 투쟁의 지평선을 최대한 넓히고자 한다. 더하여 이런 투쟁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투쟁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고, 삶의 현장에서 네트워크 식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로의 특이성을 인정하며 공통의 가치를 창출해가기를 희망한다.
만일 내 터무니없는 희망이 현실이 된다면 그 파급력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다시 쓰고자 하는 약자들의 역사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세계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부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강자와 승자의 역사에서 사라진 수많은 약자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재발견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지상에서 보고 싶은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성지의 일단이라도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 나오는 인용문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새로운 출발점에 선 내 마음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며, 세월호 유족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면 똑같은 마음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ㅡ특히 지식인들은 반드시 세월호 유족의 입장에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슬프고도 참혹하며, 좌절하지 않는 위대한 역사를 써야 한다, 그들의 성지로 가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나는 문득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순례자들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북쪽의 민족들은 성스러운 유물에 대한 신앙심을 가슴속에 품은 채, 성지를 방문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랍 혁명은 순례자들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이상을 대신하여 또 하나의 이상을, 계시에 대한 과거의 믿음을 대신하여 자유에 대한 믿음을 품고, 북쪽으로, 시리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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