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적 외눈박이 김진의 말을 듣고 있자면 모든 세상과 고립되어 있는 갈라파고스의 인간이 떠오릅니다. 다윈은 갈라파고스에서 진화의 법칙을 찾아냈지만, 김진은 그곳에서 진화는커녕 퇴행의 법칙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김진에 대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노릇이지만, 엠병신과 TV조선을 오가며 인간의 퇴행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무개념의 수구꼰대질은 공유의 가슴에 박혀있었던 애증의 검이 필요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대정신과 미래세대는 안중에도 없는 그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부분적 사실을 가지고 일반적 진실을 도출하는 무모함을 보여줍니다. 문재인을 극혐하는 것도 노무현에게 패한 수구기득권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정동영의 패배로만 재단하고, 허접한 무기체제인 사드를 신성화하는 등 무력에서의 우위만이 안보를 담보한다는 경직된 사고와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보는 냉전적 사고 등은 김진이 이념적으로 얼마나 외눈박이인지 말해줍니다.



김진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숭배화하는 박정희는 자신의 부하도 관리하지 못해 암살까지 당한 최악의 실패자이며, 그가 찬미하는 레이건도 클린턴에게 정권을 빼앗겼으니 실패한 대통령과 정부가 됩니다. 심지어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었으니 성공한 대통령이 됩니다. 김진의 사고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식이 초딩보다 못한 수구꼴통에 해당함을 알고나 말을 하는 것인지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김진은 친일파들의 공통된 탈출구인 한국전쟁을 거의 모든 것의 판단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친미사대주의를 당연시여기고,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민주주의를 포기해도 되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합니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고 박정희를 난세의 영웅이자 구국의 결단자로 숭앙합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재평가를 떠벌이고 5.16군사쿠데타도 고도성장을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하는 것에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관이 파탄나도 이렇게까지 파탄날 수 있는지 정신분석학적 연구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전원책과 쌍벽을 이루며, 토론에서도 상대를 압도하거나 승자가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논리도 없는 폭력성의 근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판단을 과신하는ㅡ전원책보다 무식하고 판단이 떨어짐에도ㅡ습성은 옳고 그름을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고압적 태도와 최악의 꼰대질로 귀결되기 일쑤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에 조금만 상처가 나도 길길이 날뛰는 것은 자기방어기제가 조(울)증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이 헬조선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거에서 승리하면 임기 동안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명박근혜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에, 소수의 지배엘리트들이 정부의 예산(국민의 세금)을 나눠먹는 동안 절대다수의 국민은 소득이 줄고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9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김진 같은 수구꼴통들이 언론의 곳곳에 포진한 채 기레기 짓거리를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보니 권위주의적 독재나 우파 전체주의적 발언도 서슴치 않으며 그것이 왜 민주주의에 반하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잘난 맛에 사는 김진은 그렇게라도 자신의 무식함과 편협함, 퇴행의 현상들을 숨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김진을 볼 때마다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귀신은 뭐하나 몰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는데 꼴통꼰대 김진 덕분에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매일매일 올라가고 있습니다.



박정희 순화의 숭배자인 김진은 갈라파고스에서 혼자 살면 딱 좋은 인간이지만, 수구보수 진영의 X맨이라 오늘의 '100분토론'에서 보여준 퇴행적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김진이 꼴통꼰대짓을 할 때마다 청춘의 투표의지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가기 때문에, 정권교체와 체제혁명에 마구마구 힘을 실어주는 김진, 파이팅!! 엠병신과 TV조선(아, 여기서도 퇴출됐나?)이 폐방되거나 박근혜 부역자들이 모조리 청산되면 어디에서 무엇으로 먹고 살까요? 



김진이 자유한국당 후보로 나온다니 지랄도 풍년일세

 


#새누리당이박근혜다

#박근혜는하야하라

#바른정당도박근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늙은이 2017.01.18 20:06

    싸그리 민주화 하십시오

  2. 둘리토비 2017.01.19 00:36 신고

    김 진, 저 분의 극우 편향적 발언은 정말 오래되었지요
    무엇이 저자를 저렇게 괴물로 만들어버렸는지...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7.01.19 00:39 신고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두뇌가 굳어버렸습니다.
      유연한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인식의 출발점에서 몇 가지 전제(대표적인 것이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추상성, 모든 노동이 균질하다는 전제하에 사후적 평등의 근거가 되는 노동가치설, 계급투쟁의 기원이 된 다윈적 역사인식, 유토피아적 세계의 도래가 가능하다는 뉴턴식 우주관 등. 당시에는 뉴턴 이후의 과학은 없다고 할 정도로 뉴턴의 역학은 절대적 영향력을 지녔었다)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찰을 이루고도, 그가 예언했던 절대 다수가 누려야 할 ‘자유의 왕국’이 극소수의 ‘신자유주의 왕국’으로 변질되는데 일조했다.





아니 일조가 아니라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초기에 어떤 규제도 없었기 때문에 산업혁명의 여파는 근대유럽을 착취와 억압이 넘치는 무법지대로 만들었는데, 마르크스가 그 이유를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찾아냄에 따라 그의 성찰은 종교적 영역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아담 스미스가 작은 시장만 보고 자기조정 시장을 추상했기 때문에 온갖 문제들을 양산했듯이, 마르크스도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던 영국의 자본주의에 경도돼 역사의 발전과정이 노동자의 유토피아로 이른다는 결정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자본주의의 경험이 일천했으며, 그 당시까지의 과학적 한계에 갇혀 있었지만 이는 문제가 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마르크스는 다윈적 역사인식과 뉴턴식 우주관에 경도되는 바람에 역사의 발전과정이 거듭되는 계급투쟁에 의한, 최종적으로는 무계급사회에 이른다고 봤다(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역사결정론은 자본주의가 극에 이르면 자유의 왕국에 이른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성과들은 미래는 무엇으로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맞물려 자본주의적 착취가 종말에 이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마르크스적 계급투쟁을 거꾸로 뒤집어버린 지배엘리트(특히 전통의 금융‧산업권력)에 의한 반동의 역사이자 권위주의적 통치로의 회귀가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명박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박근혜의 ‘줄푸세’처럼, 신자유주의는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극소수의 가진 자들이 더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 덜 가진 자들의 것들을 탈취하는 과정이다.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식 복지국가나 국가개입이 자연법칙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내세워 적자생존의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도,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을 뒤집어 ‘자유의 왕국’과 정반대의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주기적인 공황을 불러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용해 위기를 조장하고 ‘쇼크요법(IMF 구제금융)’을 강제하는 것도 마르크스적 계급투쟁을 뒤집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하면 1, 2차세계대전 이후 평등과 공존, 상생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발전국가 모델의 핵심이었던 평생고용 체제 때문에 상위 1%의 부와 권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를 뒤집기 위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대상으로 반동의 계급혁명을 감행해 부와 권력을 회수한 것이 신자유주의 40년이고,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마르크스가 하늘에서 가슴을 치며 통탄할 노릇이다.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신보수주의 세력(뉴라이트)들이 19세기에 유행했던 자유방임 시장경제(어떤 규제도 없었고, 노조도 없었으며, 국가의 개입은 원천차단됐던)를 전면에 내세운 채,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평생고용 체제를 파괴한 것도 이 때문이며, 이를 위해 경찰력과 감시권력을 극대화한 권위주의적 정부를 선호했고, 정경유착과 회전문 인사로 집권을 이어가야 했다(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각종 불평등을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과정인 사회주의에 비해, 신자유주의가 개인적이며 환경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극복하는 과정인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도 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던 불평등은 자유를 제한하고 침식하는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나라일수록 불평등이 늘어나고 정의와 도덕, 윤리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도 필연의 과정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고 했지만, (바우만의 주장이 옳다면) 견고한 자본주의는 녹았지만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내부로부터 무너진 자본주의는 더욱 유연하면서도 무엇이라도 쓸어버릴 수 있는 상위 1%의 ‘액체의 형태’로 변형돼 세상의 모든 부분을 신자유주의화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석학들마다 다른 것도 이 때문이지만,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통치의 방법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막강해졌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줄이고 다른 세상을 만들려는 다양한 저항운동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하위 90%에게 ‘유동하는 공포’를 양산하는 체제로 거듭날 수 있었다(비어있는 9%는 체제의 간수로 별도의 군을 이루고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9.09 09:19 신고

    변수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마치 마르크스나 애덤스미스가 잘못내린 결론처럼.... 저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결국 자멸의 길을 걸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09 17:39 신고

      앞으로 10년 안에 거대한 전환이 일어날 기반이 생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파국을 면치 못합니다.
      지구온난화와 환경 오염, 물부족 등의 공격이 20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성장 자체를 하면 안 됩니다.
      소비를 줄이고 지금보다 매우 많이 불편해져야 합니다.

  2. 耽讀 2015.09.09 12:38 신고

    자본주의이든 공산주의이든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에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지요.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었느냐는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09 17:46 신고

      그래서 공부하고 토론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는 것은 가치가 없고 쉽게 사라집니다.
      우리는 실천하고 반성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09.10 07:59 신고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알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11 01:04 신고

      네, 저도 제가 공부한 것들을 하나의 주제로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4. 천상명월 2015.09.10 16:36 신고

    언제나 현실과 타협하는 저는...정말 어려운 용어에 .. 작게만 느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5. 청공(靑空) 2015.09.11 07:39 신고

    간결하게 핵심을 짚어주시는 글 잘 보았습니다. 항상 쓰신 글에 감탄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가 그 형태와 목적이 유동적일 수 있는 이유는... 특정한 이론체계라기보다는 그 실상이 자본권력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경제발전의 이유를 기술발달과 환경적 요인와 같은 구체적 근거에 의해 설명하기보다 자유 경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설명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가변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선 글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다수의 시민의 해방을 드셨는데요. 푸코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 이유는.. 인간은 문제에 직면해서 그걸 보아야만 바뀌고, 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결국 인류문명은 그 끝을 보게 되겠죠. 아니면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되거나요..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인류의 문제를 위한 해독제(Antidote)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독일식의 질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범주에 속하지만..)가 답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답은 독일만을 위한 답이지, 현재 봉착한 문제를 위해 고안된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답이 안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깊게 생각하기에는 제가 아는 바가 적고, 또 그에 대해서 밝지 못하네요. 얼른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 늙은도령 2015.09.11 16:29 신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십니다.
      신자유주의는 권위적인 정부가 권위적인 재벌과 함께 시장근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새워 부를 독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공공의 자산을 민영화시키는 것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국가 전체를 민영화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지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사회주의를 제대로 발전시키고 현대에 맞게 수정한 것이 나와있더라고요.
      그것을 민주주의와 엮으면 충분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은 너무 상황이 심각해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집중해야 하고요.
      국민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제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기를 바랍니다.

  6. 백순주 2015.09.12 10:53 신고

    약속 지켜드리려고 열어는 보았으나 도령님과 대화를 나눌 능력은 멀었나 봅니다. 열심히 읽은 것이 아까워 댓글에 손은 댔습니다.
    행복한 주말보내세요.
    저는 벌써 주말은 글을 쉬려고 합니다. 매일 발행이 힘겨워졌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12 15:32 신고

      네, 그렇게 조절해야 합니다.
      이게 매일 글을 올리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풀어놓으면 그 다음부터가 문제가 됩니다.
      길게 보셔야 합니다.



브루스 H. 립튼과 스티브 베어맨의 《자발적 진화》를 보면 진화론의 진정한 창시자는 다윈이 아니라 윌리스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윈이 오랫동안 품어왔지만 아직 부화하지 못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을 때, 윌리스는 완성된 이론을 이미 ‘써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들은 평민이었던 윌리스가 <원래의 형태로부터 정처 없이 멀어져가려고 하는 품종의 성향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필사본을 다윈에게 보내지 않고 출판했었다면, 진화론을 발견한 영광은 다윈이 아니었을 것이며, 다윈 이후의 역사도 바뀌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윈이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당시에 다윈의 후원자인 ‘라일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 윌리스의 문서를 뜯어고치고 표절하여 귀족인 다윈이 선취권을 차지하게 하고 평민인 윌리스는 부차적인, 후배 기여자라는 미심쩍은 영광에 머물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발적 진화》의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기극이라 할 수 있는 희대의 조작작업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서다. 말년의 다윈이 훗날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왜곡될 자신의 진화론에서 멀어졌듯이, 다윈의 진화론이 영광을 독차지하면서 세상은 정글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윌리스는 평민의 관점에서 진화란 약자의 제거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윈은 동일한 데이터를 적자의 타고난 생존의지에 의해 진화가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 차이는 뭘까? 윌리스의 세계에서는, 우리는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개선시킬 것이다. 그러나 다윈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워야 한다. 달리 말해서, 윌리스가 우세했더라면 경쟁보다는 협동에 더 초점이 맞춰졌을 것이다.



이렇게 윌리스의 진화론이 소수의견으로 격하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는 권력과 동격이 된 진화라는 작업이 자연선택이라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적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처럼 인식됐다. 이런 냉혹한 세계관이 허버트 스펜서를 거치면서 적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되는 폭력으로 변질됐다.



적응하는 자만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방식에서, 적응이란 한 종이 후대에서도 그 숫자와 유지되거나 늘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함으로써 적응하거나 적응한 후손을 갖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목적이 된다. 우리 인간이 그 목적을 자비심으로써 성취하느냐, 기관총으로 성취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협동은 사라졌고 경쟁만 남았다. 작은 단위의 경쟁은 더 큰 단위로 번져갔고,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교리까지 치달았다. 인간의 조건이란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자연상태로 돌아갔고, 말년의 다윈이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 진화의 추진력으로 제시한 사랑과 이타심, 호혜적 협동 같은 것은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이 돼버렸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뉴턴의 역학과,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발견한 멜서스의 '인구론'에 경도된 다윈의 진화론은 거의 모든 인류 문명에 영향을 미쳤고,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지배적 시각을 제공했다.



특히 거의 모든 권력자들이 좋아하는 <동물의 왕국>은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교리를 적자생존으로 왜곡시킨 허버트 스펜서의 시각이 가장 많이 적용됐다. 권력욕이 강한 지도자일수록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적자생존의 정글은 ‘신은 승자와 함께 한다’는 신념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사자처럼 먹이사슬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동물에 포커스가 맞춰진 <동물의 왕국>도 있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동물의 왕국>도 있고, 먹이사슬의 하층부에 있지만 무리들이 협동해서 최고의 강자들을 물리치는 <동물의 왕국>도 있다.



어떤 <동물의 왕국>에서도 정글이나 초원 전체를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절대 강자나 유일 승자는 나오지 않으며, 지독한 가뭄이나 감당하기 힘든 폭우처럼 외부의 충격ㅡ특히 인간의 탐욕ㅡ이 개입하지 않는 적정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동물의 왕국>을 관통하는 주제다.



따라서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며 다윈식의 적자생존과 절대복종에 집중하는 것만큼 비정상적이며 폭력적인 시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욕의 화신이 아닌 이상 <동물의 왕국>을 보며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편집증적인 환상에 빠져드는 것만큼 잘못되고 위험하며 천박한 인식도 없다, 푸른 기와집의 세입자처럼.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불루이글 2015.07.21 08:08 신고

    밀림의 왕 사자같은 맹수도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한 사냥이상의 살생을 하는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권력과 재물에 눈먼 독재자와 아귀같이 배부른줄 모르는 악덕 자본가들이 동물의 왕국에서 교훈을 얻기를 희망할 따름입니다.

    훌륭한 글 잘 보고 갑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07.21 08:31 신고

    저도 언젠가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교묘한 수를 쓰는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배신하지 않는다는것은 주관적인 생각일뿐입니다
    무언가 착각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21 15:19 신고

      보는 사람이 그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이지요.
      박근혜는 배신이 두려운 것입니다, 아버지의 최후 때문에.

  3. 『방쌤』 2015.07.21 10:01 신고

    하물며 동물의 세계에서도 배울 점이 있는데,,,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늙은도령 2015.07.21 15:21 신고

      네, 윌리스의 진화론이 보다 현실적입니다.
      그의 진화론이 대세가 됐다면 인류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인식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4. 耽讀 2015.07.21 12:53 신고

    같은 장면을 봐도 사람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합니다.
    동물의 왕국도 비슷합니다.
    박그네는 '배신'만을 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성애', '부성애', '공동체'를 봅니다.
    다윈 진화론만 생각했는데
    윌리스는 솔직히 생소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21 15:23 신고

      실제 생물학계에서는 다윈-윌리스 진화론이라고 합니다.
      다윈에게만 전적으로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전공을 하지 않는 대다수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요.



‘탐욕의 삼위일체’가 주도한 이런 과학의 궤도 이탈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과학이론(또는 결과물)이 나왔을 때 다른 과학자들이 그것을 실험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도 부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과학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정상과학의 위치에 들어선다는 정상과학론을 구조화했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과학이론이 나오면 똑같은 과정이 과학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 한층 진전된 정상과학이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렇게 정(기존의 정상과학)-반(반대 또는 대립되는 과학 이론의 등장)-합(과학적 검증을 통해 다시 정립된 새로운 정상이론, 이것이 다시 ‘정’이 되고 변증법적 발전이 지속된다)의 순환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과학혁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영구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하늘에 별이 빛나는 한, 우리가 하늘을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고 모든 장애물들을 돌파해나갈 것이다.



과학의 부정적 입증에 철저하게 파고든 칼 포퍼와는 달리 토마스 쿤이 공식화한 계몽의 변증법적 해석에 따라 과학혁명은 영원한 발전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쿤이 무한대의 발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언젠가는 과학의 진보도 한계에 이를 것이라 했지만ㅡ이것에 관해서는 포퍼도 마찬가지다ㅡ이는 자신이 정립한 과학혁명의 패러다임 이론과도 모순에 처한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극에 이르면 내부로부터 붕괴해 유토피아(자유의 왕국)에 이른다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물론 이런 방식에 대해 닐 포스트먼은 《테크노폴리》를 통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진술의 조건을 검증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은 정반대다. 과학적 진술은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 진술과 구분된다. 과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깨닫는 능력이다”라고 주장하며 칼 포퍼의 이론에 반박을 표하기도 했지만, 세상이 다시 뒤집히는 지금에 와서는 포퍼의 주장이 정확했던 것 같다(장하석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철학에 접근하기에 대단히 좋은 길을 제시한다). 



어쨌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패러다임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분야로 넓혀져, 과학혁명에 대한 맹신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돈이 되는 모든 것은 전문화된다’고 말한 것처럼, 비전문가에 대해 또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과학자들과 대안과학자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전문성이라는 높은 장벽을 구축한 과학자들은 그들만의 천국에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하고 있고, 할 것이다).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이 탄생시킨 진보의 과정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면서 지적 모순을 바로잡을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런 배타적 독점권(파벌을 이루는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은 높아졌고, 부작용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데 쉬워졌으며, 문제의 해결도 같은 부류의 과학자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또한 과학연구가 대학과 기업으로 넘어감에 따라 반드시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과학자들의 목을 조여 왔다. 투자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확실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황우석 교수와 만능세포 발견과 취소를 거듭한 일본의 젊은 과학자처럼 완전하지 않는 연구결과를 조작해서 대규모 사기를 벌이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한국 교수들의 학위논문을 전수조사 하라,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지니!). 





이들은 인류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들이 일정한 부작용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과학자가 책임을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중립적인 면책특권을 이용해 부작용이 속출하는 연구결과물들을 대량생산과 전문서비스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어떤 것이든 시장 시스템으로 넘어가면 오직 한 가지 목적, 이윤만 추구되기 때문에 부작용들의 확산과 축적은 막을 도리가 없다. 시장이 알아서 다른 것들로 대체할 때까지 악순환은 계속된다.



문제는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극도로 세분화되고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의 타당성과 윤리적 방법에 대해 사전에 검사할 수 없고, 당연히 연구의 결과물의 장단점과 문제점을 생산단계 이전에 확인할 수 있는 지적검증부대(벡이 말한 대항과학이나 대안과학 또는 대안전문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문제의 결과물이 알려진 것보다 부작용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경우(토지 오염과 사막화, 이에 따른 물 부족 사태와 생태계 파괴, 미세먼지 같은 스모그의 일상화, 지구온난화와 각종 기상이변, 무조건 인재인 파멸적인 원전 폭발과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공포와 스트레스의 폭발적 증가 등)에도 리콜조치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또한 제품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과학자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과학은 그림자 영역 속으로 들어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전 예방이라는 최상의 방법은 이윤 추구에 굴복해 영원히 취해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정치만이 아니라 전문화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만연되고 제도적으로 고착화된다. 지금 기업의 연구소에서, 또는 기업의 의뢰로 개인연구소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적 영역을 보호해주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상의 체제가 되며, 삼권분립이라는 정부 구조가 책임의 분산을 자초하거나 유발하는데 일조했다. 문제가 발생해도 합법적 면죄를 받거나 최소한의 형량과 벌금으로 과학의 부정적 결과는 모든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비자가 입은 피해는 (거의) 보상받지 못한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상은 과학자들이 연구의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위험과 위협을 조직적이고 객관적으로 해석’해 부작용에 대해 투명하게 밝혔는지, 아니면 ‘경시하거나 은폐했는가’로 판정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과학적 결과물을 독점하는 산업자본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이것조차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상태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힌 것처럼, 무분별한 과학적 결과물의 산업화와 서비스화에 따라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사회계급이 발생했고, 공통된 계급의식과 연대의 가능성이 없는 개인화된 이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비대칭적 종말에 무방비상태로 놓여 졌다는 경고가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오염과 중독에 대한 기준치는 개별적으로 제시되고, 그 기준치의 근거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눈으로 보이고 만성질환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음에도 숫자의 제시는 개별 기준치들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접촉하는 가운데 모든 기준치들의 총합은 개인의 인체에 축적되고 있다. 이는 과학적 부작용을 전체 인류를 상대로 한 자연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인체가 과학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의해 공인된 그래서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침묵의 암살자가 등장한 것이다.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종교입문서나 헌법 같은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쿤의 주장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과학혁명에서는 소득 못지않게 손실도 따르며, 과학자들은 손실에 대해서는 유독 맹목적인 경향을 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통한 진보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권위의 성격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공식화, 즉 과학에서 힘은 곧 정의라는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그리고 특히 비전문적 권위가 패러다임 논쟁의 조정역을 한다면 그들 논쟁의 결과는 혁명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이 존속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 사회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가는 과학 활동에 대하여 인류가 보인 이해력의 부족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모든 문명의 기술, 예술, 종교, 정치체제, 법률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문명의 이러한 영역들은 우리들의 문명에서만큼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었던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 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다른 시대는 과학적 생산 활동이 나타나는 그런 특별한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은 스스로 과학화됐다. 일체의 도전과 자기성찰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위계적 학제와 권위주의적 파벌 속에서 ‘과학에 대한 비판, 진보에 대한 비판, 전문가에 대한 비판, 기술에 대한 비판’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과학의 진보를 믿지 않는 자들과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정신병자나 비합리적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칼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도달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서로 경쟁하는 가정들과 그 가정들이 실험적 증거를 거쳐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에 관한 정보”에 불과한데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진리로 확정이나 된다는 듯이 그들만의 리그에 안에서 과학적 정의는 물론 사회적 정의와도 거리를 넓혔고, 스스로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을 평균 이상의 소득과 승진, 명성으로 대체해버렸다. 





과학은 또한 인간 구원에 대한 최종적 믿음을 종교로부터 빼앗아 갔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인류 해방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한 과학자집단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과학자집단이, 그러나 둘은 지향하는 결과에서는 동일한 비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방법에 대해 극단적 논쟁에 돌입하지만, 비전문가들은 논장의 밖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신자유주의가 번성한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진리의 도움을 받는 활동에서 진리없이 활동’했으며 ‘내적으로 과학은 더 이상 의사결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는 위험의 전 지구적 확산이었고, 유일한 성과물이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윤을 쌓아준 것이다. 



과학은 이제 자신을 반성적으로도 비판적으로도 바라보지 않으며, 돌아오는 이익과 승진에의 욕망, 목을 조여 오는 연구자금의 사슬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됐으면서도 진리의 담지자이자 지배자로서의 역할은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책임이 사라진 곳에서 연구방법과 부정적 결과에 대해 윤리적으로 고민할 과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서의 파벌은 경제학에서의 파벌보다 더욱 심하다는 사실은 여러 과학자들의 고백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과학도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한 채 현실에서 멀어진 것도 이런 파벌의 부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벡의 지적처럼, 과학의 결과물을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과 다양한 종의 멸종 같은 파괴적인 결과들이 속출하는데도 불구하고, 산업적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과학은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들을 제거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다시 산업화해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이윤 창출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움직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원인은 애매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고, 각종 실수와 문제의 변형을 시장의 활성화에 내맡기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과학실천에서 ‘학습과정은 체계적으로 단축되며 저지’됨에 따라 각종 질환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인류는 당뇨병, 암, 심장병, 우울증, 비만, 호르몬 장애, 자살 충동 같은 문명질환의 무방비상태로 놓인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문명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화의 동력이 창출된다. 결국 “더욱더 많은 영역에서 산업은 문제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무시한 채 자신이 이차적으로 유발한 문제들에서 이윤을 얻고 있다.” 부작용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변하면서 과학은 갈수록 무오류성의 신화를 대중으로부터 압박받으면서도, 과학이 도달할 무오류성 때문에 모든 부작용들을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는 과잉전문화에 매몰되면서 ‘한없이 뒤로 후퇴하는 자가동학적 진보의 신화’를 연일 써나가고 있다. 




1986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위험사회》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적 부작용의 원인을 이차적인 산업화의 동력으로 삼는 과정을 가장 일반적인 화학산업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지만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살충제와 미국이 베트남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의 땅으로 만들겠다며 무차별적으로 퍼부은 네이팜탄과 고엽제가 화학산업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장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화학산업은 유독폐기물을 생산한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해결책’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폐기물 문제가 지하수 문제로 되는 것이다. 화학 및 여타 산업들은 음료수의 ‘정화장치’를 판매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서 이윤을 얻는다. 이러한 정화장치로 거른 물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경우에는 약을 먹으면 되며, 따라서 그 ‘잠재된 부수효과’는 정교한 의료체계를 통해 차단하고 연장된다. 이런 식으로 과잉전문화의 정도에 따라 문재해결과 문제생산의 사슬이 형성되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이차적 결과라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금 완전히 ‘확증한다.’ ‘객관적인 제약들’과 ‘자기 동학’이 발생하는 원형구조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그 협소함, 방법과 이론에 대한 그 이해, 그 경력 사다리 등에서 과잉전문화된 인지적 실천의 모델이다. 극한까지 추진된 분업은 이차적 결과, 그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이 ‘운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현실 등의 모든 것을 생산한다. 과잉전문화는 자기확증하는 순환 속에 결과의 운명론을 집중시키는 능동적인 사회적 실천모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미국식 대량 소비 경제를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면 지구 같은 행성이 여러 개 필요하다...우리가 알고 있는 개발 모델은 자기 파멸적 모델인 것이다.


                                                                 ㅡ 필립 맥아이클의 《거대한 역설》 중에서



사회적으로 위험과 모순은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그것들을 해결할 의무와 필요는 계속 개인 차원의 문제가 되어간다.


                                                                  ㅡ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 중에서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근대이성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봉건제가 무너지고 부르주아로 대표되는 시민이 상위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귀족계급에 대항해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넓혀가려면, 그전에는 시민들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제도적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세금을 냄으로써 투표권을 획득했고, 참전을 하면서 투표권을 확대했다. 이들은 투표를 통해 의회에서 자신의 제도적이고 법적인 권리를 대표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과 노동의 분업으로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자유시장과 자본주의 필요성과 정당성이 강화됐다. 지식의 보편화에 따른 과학과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고, 베이컨에서 데카르트를 거친 근대이성이 칸트의 관념론으로 완성되며 이성이란 종교는 신을 대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후 시간의 발견(역사)에 힘입은 헤겔이 계몽의 변증법과 시민사회를 정립했고, 이로써 무한한 진보와 결과의 낙관론이 이성의 폭주를 부추겼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거야'라는 진보의 낙관론은 과학기술과 자유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팽창 일변도의 중상주의를 통해 식민지 침탈과 세계시장 구축을 위한 금본위제가 정립됐고, 대도시의 발달과 중농주의의 확산과 함께 식민지 팽창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근대(국민)국가가 탄생했다. 거대 관료제와 식민지 자산을 지킬 수 있는 경찰력을 지닌 근대국가의 발전은 식민지 팽창을 넘어 세계적 차원의 시장 구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자유무역이라는 최초의 세계화가 서구패권주의의 닻을 올렸다(푸코의 《주권, 영토, 인구》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보라).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귀족과 노동자 사이에서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제3신분)들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독점함에 따라 자유시장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돈이 곧 권력인 경제체제이고, 자유시장은 이를 실현하는 유일한 매개체이며, 이것들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무한경쟁을 추동해 부의 독점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주의와 국가이성, 자본주의와 신보수주의의 결합물인 신자유주의다. 





이 세 가지 메커니즘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데 그것은 부와 기회와 권력의 독점을 위한 인간의 놀라운 탐욕이다. 한 세대 만에 벼락부자가 된 시민사업가와 소수의 금융가들은 인간의 탐욕을 축으로 삼각편대를 이루게 됐다. 필자는 이를 (앞에서도 몇 번 언급했듯이) ‘탐욕의 삼위일체’라 명하는데, 이때부터 양적 성장을 주도하는 파시즘적 속도의 폭주가 시작됐다. ‘개발과 성장의 역설’에서 볼 수 있듯이, 비대칭적 종말이라는 작금의 결과를 놓고 볼 때 무엇으로도 이들의 폭주를 제어할 세력이나 주체는 없었다. 거의 10년마다 경제공황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1929년과 2008년의 대공황을 일으키며, 세계경제를 파탄의 질곡으로 빠뜨렸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탐욕의 삼위일체’의 역사를 보면 현재의 절망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무한 진보에 대한 믿음을 먹고 사는 ‘탐욕의 삼위일체’가 과학기술과 경영의 합리화 및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통해 견인된 산업과 국가의 발전 단계를 활용해, 인간과 사회와 국가의 조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문화와 종교, 교육과 철학 등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종교혁명과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에 고무된 ‘탐욕의 삼위일체’는 자본 축적을 위해 본격적인 팽창을 시작했지만 곳곳에서 현실적 제약에 부딪쳤다. 이들은 최종목적인 거대한 부를 통한 영원한 지배에 이르려면 그들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으로 급상승한 생산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집중화된 공장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대량생산된 제품을 시장(소비자)에 보내기 위한 물샐틈없는 연계망 구축이 필요했다. 국내시장은 물론 해외시장과도 안정적인 공급을 위한 수요의 연결망이 필요했다. 이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도시국가 차원에 머물러 있던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제임스 베니거의 《통제혁명》과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를 보라).



결국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인프라(철도, 도로, 항만 건설 등이 대표적)를 구축하려면 국민의 세금이 필요했고, 정부가 보증하는 금융지원(유대계 자본의 수중에 있었던)이 필요했다. 막강한 행정력과 공권력을 독점하는 중앙집중적이면서도 친산업적이고 친금융적인 국민(민족)국가와 자유주의를 내세운 권위주의적 정부가 필요했다. 이런 시장 중심의 이중사회의 구성에 대해 칼 폴라니는 정치경제학의 기념비적인 저서,《거대한 전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장은 인간의 삶을 두 영역으로 ‘파편화’시켜서 사람들의 시야를 크게 좁혀버리니, 첫째는 생산물이 시장에 도착하면서 종결되는 생산자의 영역이요, 둘째는 모든 재화를 시장에서 가져오는 것에서 시작하는 소비자의 영역이다. 생산자는 자신의 소득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얻으며, 소비자는 시장에서 자신의 소득을 ‘자유롭게’ 지출한다. 이 틀에서는 전체로서의 한 사회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게 된다. 국가권력이란 존재 이유가 없다. 국가 권력이 적을수록 시장 메커니즘이 더 원활하게 작동할 터이니까.



(푸코의 <주권, 영토, 인구>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네그리의 <제국>, 바우만의 <액체근대> <유동하는 공포> 등에서 보충해야 하는데 아직 못했습니다).



원했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한 ‘탐욕의 삼위일체’는 전 세계적 시장 구축과 소비의 팽창을 담보할 무제한적인 신용 창출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빚도 자산’이라는 악마의 경제이론ㅡ로스차일가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 온갖 욕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독점하고 있었던 합법적 고리대금업ㅡ이 탄생했다(세계화와 금융에 대한 스티글리츠와 라잔 및 퍼거슨의 저작들을 참조할 것).






두 번째로는 ‘탐욕의 삼위일체’는 생산을 담당할 건강하고 숙련된 남성노동자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남성 노동자의 품질을 보장하는 국가적 차원의 교육과 함께, 업무에 지친 노동자를 재충전시킬 수 있는 안정적인 가족제도가 필요했다. 노동자의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생산은 증대될 것이기에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에 맞게 부인이 가사와 교육을 맡는 가부장적 1부1체를 법적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었다(특히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와 《감옥의 역사》,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루이스 멈포드의 《유토피아 이야기》를 보라).



여기서 중상주의로 대변되는 상업자본(초기 산업자본 포함)과 국민국가와 기독교가 손을 잡았고, 그 사회학적 기원은 막스 베버에 의해 합리적인 이성의 산물이자 자본주의적 종교규범으로 잘못 해석된 루터와 칼뱅의 청교도정신이었다. 헌데 노동 분업의 정교화와 조립 라인의 발전(자본주의의 전성시대는 숙련된 직원의 이직을 막기 위해 두 배의 임금을 주고도 이익이 넘쳤던 포드의 노동 분업으로 통한 대량생산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에 따라 남성노동자의 숙련도는 임금상승의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윤의 극대화가 유일한 목표인 자본의 입장에서 숙련된 노동자의 임금이 높아질수록, 숙련의 필요성이 단순 작업으로 대체될수록, 이들을 대체할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했고, 이런 필요를 해소하기 위해 부분적인 여성의 해방이 필요했다. 다음 세대의 신규 노동자가 될 자식의 숫자도 시장규모에 따라 조정될 수 있어야 했다(마르크스 사상의 해석에 집중했던 네그리의 <혁명의 만회> 같은 초기 저작과 <제국>과 <다중>처럼 하트와의 공동저작, 퍼트넘의 <혼자 볼링 하기>를 참고하라).





세 번째로 고전물리학적 발견(우주는 하나의 법칙에 의해 질서정연하다는 것으로 뉴턴 역학이 핵심이며,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대표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이 정해진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두 개의 과학적 발견에 의해 무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에 기반해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필요했고, 칸트와 헤겔과 니체가 이를 사상적으로 풀어주거나 정반대로 나갔다. ‘장기간에 걸친 자연선택’이 핵심인 다윈의 진화론을 자신의 저서 《생물학 원리》에서 ‘적자생존(진화의 ‘승자’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적자’라는 개념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식민지약탈과 대량학살 및 승자독식의 원리로 변질됐는데, 정작 다윈의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에는 ‘변종의 후손’이라는 표현이 나와도, 적자생존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이 승자의 철학이 되는 적자생존으로 번역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진화론’을 주장한 허버트 스펜서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보편적 영역으로 올려놓았다.



이때부터 진보는 퇴보로 전향했지만 사람들은 언어마저 상품화하는 ‘탐욕의 삼위일체’의 농간에 200년 가까이 이를 알지 못했다. 이로써 중앙집중적인 국민국가와 자연과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가능해진 무한 진보를 역사의 필연으로 수용한 사회,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임금으로 계산되지 않는 여성(특히 전업주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규범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구축됐다.



마지막으로 게오르그 짐멜이 《돈의 철학》을 통해 산업사회와 화폐경제의 필연성이 소비지상주의와 개인주의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불길한) 성찰이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사회와 가족의 해체 및 1인가구의 확대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국가와 사회, 가족과 개인까지 산업발전에 따른 문명의 재구축이 완료됨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에 가격이 매겨질 수 있는 사전 준비가 마감됐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건는다산 2015.02.07 03:21 신고

    탈산업이 진행되며 기존의 세력들은 더욱더 공고히 부를축적하는반면, 개천에서 용나려는 사람이 정당한 노력으로 부를 모을수 있는상황이 되더라도 보수적분위기상 그것을 용납하지않는다.. 라는 내용의 글을 어디선가봤어요.

    역사를보아오더라도 피해받는것은 서민. 결국 귀결되는것은 폭동. 전쟁..

    저는왜이렇게 대한민국 미래가 암울해보이는걸까요

    • 늙은도령 2015.02.07 03:35 신고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면 본격적인 반격의 시간이 올 것입니다.
      국민의 상당수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대대적인 반격이 있을 것입니다.
      온갖 병으로 시달리는 저도 이렇게 싸우고 있으니, 힘냅시다!!!!!!!!

  2. 건는다산 2015.02.07 04:35 신고

    ㅎㅎ저는사실 진보도보수도 그여느쪽 성향이 있는것은아니지만 이번정부는 너무 노골적이라 정치적성향이 생겨버릴것같기도하네요

    누군가가 나서서 견제해야만할것같아요

  3. 건는다산 2015.02.07 04:36 신고

    심심풀이 정치성향테스트 제블로그에올려두겠습니다~심심하실때한번 해보셔요!

    • 늙은도령 2015.02.07 05:52 신고

      네, 들려서 카피해 해보겠습니다.

    • 공수래공수거 2015.02.07 09:08 신고

      저두 짬을 내서 해 봣는데요
      아주 흥미 있군요
      저는 제3의길 부분이 가장 넓네요 ㅎ

    • 건는다산 2015.02.07 12:54 신고

      저는모든영역 고르게나왔지만 저ㄸ‥한 제3의길이 근소하게크긴해요.

      답하기너무어려운 문항도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더많이가져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진화론에 나오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두 개의 개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과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의 차이에 대해서도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번 글에선 진화론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보통 우리는 최적화와 최대화를 동일한 개념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둘의 개념은 정반대입니다. 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책의 제목에서 주는 선입관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자발전 진화》라는 책을 보면 리처드 도킨스와 다윈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비교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적자생존이란 의미에서의 최적화

 

진화론의 핵심 논리이자 거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진 최적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요약하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유전적인 변이란 대부분의 진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를 말하는데, 수만~수십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나기 때문에 가우스 종형곡선의 꼬리 부분(롱테일)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보통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거의 대부분은 채택되지 않습니다. 방사선에 피폭되면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로 유전되지 못합니다. 이를 나쁜 돌연변이라 한다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돌연변이도 있는데 이것이 진화를 추동하는 좋은 돌연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돌연변이에 나쁘고 좋음은 없지만, 돌연변이가 인간은 물론 자연과 환경에 적합하지 못하면 당대에서 도태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유전돼 진화를 이어갑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돌연변이 유전자는 진화의 기억을 담아두는 유전자풀에 안착함과 동시에 다른 유전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모든 생명체를 최적화된 형태로 이끌어갑니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를 누적적 자연선택이라고 하며 만일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진화를 계획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면 어떤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다윈과 도킨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을 보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최고 걸작



▲ 적자생존이 승자의 진화를 말하는가?

 

허버트 스펜서가 정립한 적자생존이란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해서 나온 것으로, 주어진 자연환경(인류에 적용하면 사회가 된다)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후대로 전승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유전자 차원에서 말하면 모든 유전자에 대한 모든 유전자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들이 후대의 진화를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지구상에 살아남은 종은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적인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종"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힘 세고 포악한 종은 멸종하고, 착하고 배려하는 종은 생존한다"고도 말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란 개념은 『종의 기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적자생존의 본래의 뜻을 왜곡해서 ‘적자가 곧 승자’라는 의미로 사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병치시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및 약육강식의 정글을 탄생시켰습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팽창주의(식민지 확대 경쟁)를 정당화한 강자의 논리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국가와 자본의 결탁이 자연의 법칙인양 호도됐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신은 언제나 승자와 함께 한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비판한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스펜스의 사회진화론이 우파의 전체주의인 히틀러의 나치와 히데키의 군국주의로 이어졌고, 좌파에서는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이어져 인류에게 치유할 수 없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월가의 현인인 탈레브가 《블랙 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나 전사의 후예보다 적당한 타협을 한 평범한 사람들의 후예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적자생존은 승자에게 진화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멸종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실제로 생태계의 서열구조를 보면 승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환경에서 적정한 환경에 적응한 종들이 살아남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대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지만 연대를 하면 어떤 강자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자가 어느 영화평론가가 말했던 Little, Low, Lean, 즉 작고 낮은 사람들이 서로 기대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들은 수없이 많은 다른 유전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적적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유전자들이 유전자풀에 입성해 다른 유전자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해서 다음 세대에 전해지려면 최대한 이기적인 행태를 통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자살유전자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자살유전자는 힘을 잃게 돼 유전자 풀에서 쫓겨나 진화의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직 생존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진화의 결정체인 종의 생명마저 단축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려 합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라는 과정이 유전자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개별 유전자는 필요하다면 다른 유전자의 기능을 최소화시키고, 자신의 힘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유전자와 담합해서 자신의 특성과 반대되는 유전자를 퇴출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기보존의 차원에서만 행위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를 의미합니다.


 


                                                  


  

▲ 인간이란 종의 이타적 특성

 

유전자가 이기적이라 표현했던 리처드 도킨스의 영향을 논외로 한다고 해도 유전자의 이기적인 면은 진화론의 시조인 다윈조차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의 핵심이 적자생존(유전자 차원과 종으로서의 차원 모두에서)으로 오독되기 쉬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도덕성과 이타적 본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의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기질이 인류의 성공적인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견해를 밝힙니다. 그는 특히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많은 부족들의 ‘충성심, 애향심, 복종, 용기, 동정심’을 인류 진화의 성공 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타적인 유전자의 특성이 인간이란 종이 만물의 영장의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란 것이란 뜻이지요.

 

 

칼 세이건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코스모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우리를 만들고 있는 원자들이나 단순한 분자들에 있는 게 아니라 이 물질들이 결합되는 방식에 있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원자로 이루어진 유전자도 이기적인 행태가 아닌 진화를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이타적인 방식에 의해 지금의 인류를 창조했다고 것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복잡하고 거대한 생명들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이타성이 진화의 본질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물론 브르스 립튼의 《자발적 진화》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지만, 유전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종의 차원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대표적이다)의 도움이 없이는 우주의 법칙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윈 진화론을 박반하는 후생진화론의 핵심

 


▲ 현대의 차원에서 본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

 

다윈의 진화론을 입증하려면 생명체를 이룰 수 있는 원소들로 최초의 복제자가 탄생하던 순간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물리학과 유기화학 및 무기화학, 분자생물학 등이 발전함에 따라 우주의 탄생부터 계산이 불가능한 확률이 겹치고 겹치면서 지구라는 행성이 최초의 유기체가 탄생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진화를 해왔음이 밝혀졌습니다. 높은 온도와 방사능, 유해가스들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수준까지 안정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최초의 유기체인 첫 번째 복제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인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진화된 유인원에서 현재의 인류 사이에 어떤 진화의 비밀이 있었는지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신의 창조론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입니다. 어쩌면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고, 유인원에서 인류로 비약했던 진화의 비밀을 푼다고 해도 신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가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에 관한 글은 시간이 되면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믿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이타적 본성에 있습니다. 인류학에서 밝혀진 것들을 참조하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는 개별 유전자들이 이기적인 성질과 이타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둘 다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성질 때문에 인간은 보다 지적인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고, 처한 환경에 따라 적자생존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종으로서 이기적인 것에 치중하면 세상은 위험에 빠져들고 반대로 이타적인 것에 열중하면 세상은 행복해집니다. 삶의 필요와 욕구, 공존과 연대가 탐욕과 욕망, 독점과 무한경쟁으로 대체되면 최악의 세상인 신자유주의가 됩니다.

 

 

필자가 분장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진화와 관련된 수십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유전자 차원에서는 이기적인 성질이 중요하지만, 종이란 차원으로 넘어오면 이타적인 성질(새누리당 빼고)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만 해도 천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서로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이며 영적인 활동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의 이타성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진화의 결과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는 극좌와 극우들은 제외됨을 밝혀둡니다. 그들은 진화도 가끔은 역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대한민국에서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떠받드는 보수의 DNA가 최대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다양한 자유를 지향하는 진보의 DNA는 최적화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셀 푸코에 따르면 국가란 개인화와 전체화의 두 가지 경향이 서로 충돌하고 반응하고 교차하는 곳입니다. 이 둘을 자유방임 시장경제 하에 통합시킨 신자유주의 통치가 일반화된 이후로는 모든 사회 환경이 사적 독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보수우파(박근혜 정부 뒤에 자리한 시장자유주의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의 법칙과 신의 섭리에서도 벗어난 탐욕의 결과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분명 우리는 예전만큼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경제규모도 예전보다 수백 배 이상 커졌습니다. 1인당 GDP도 30,000만 달러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현 대통령은 '줄푸세'를 통해 임기 내 40,000만 달러에 이르는 기반을 다지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달콤한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집니다. 경상수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나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런 모순된 경향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세계화의 부작용을 다룬 몇 권의 책을 중심으로 모순의 기원을 파고들어갈까 합니다. 《블랙스완》,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 《롱테일 경제학》을 중심으로 노력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모순을 밝혀보겠습니다. 이 책들의 저자들은 너무나 당연해 의심해본 적이 없는 보편적인 진리가 부분적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 예로서 2008년 금융위기와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를 대체해가고 있는 가벼운 경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단 하나의 증거만으로 이전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세 권의 책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2030세대들은 이전의 세대들보다 더욱 공부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 세 권의 책은 그 기원과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기도 합니다. 



 

 

먼저 세 명의 저자는 불평등의 기원과 그의 심화를 밝히기 위해 마테효과(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 마저 잃어버리라, 사악한 경제학자들이 성경에서 찾아낸 부익부빈익빈의 근거)와 파레토 법칙(모든 공동체에서 전체를 먹여살리는 것은 뛰어난 20%의 엘리트다, 차별의 근거와 엘리트주의로 악용)과 파레토 최적(사회와 시장참여자 모두에게 최적의 이익이 주어진 상태. 따라서 추가적인 자신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손해를 피할 수 없는 상태. 문제는 이런 완벽한 균형상태가 여러 가지여서 코에 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된다. 이것 때문에 합리적 시장이나 시장의 균형가설에서 출발한 모든 시장이론이 실패한 것이며, 반면에 모든 이에게 최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경제학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우스 종형곡선의 왜곡과 오류(쓸모없는 부분이라고 무시된 종형곡선의 양쪽 하단에서 직선처럼 길게 늘어진 부분-롱테일-이 실제로는 하위 99%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가우스 곡선은 간과했다는 것으로, 프랙털이론과 롱테일경제학의 학문적 근거를 제공)부터 파고듭니다. 저자들은 따르면 이 세 가지가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고 상호 강화되면서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초장기 경제불황과 1929년에 시작된 선진국 중심의 경제대공황보다 더욱 심각한 경제대침제기를 초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2008년 미국 월가와 런던 금융시장 발 금융 대붕괴(정확히는 신용의 대붕괴)에 의해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미국식 무정부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가 한계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슈퍼리치들도 상당한 돈을 날려버렸지만, 거의 전 재산을 날린 중하위층의 타격은 회복불능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음에도 유대인들이 수십 년째 이사장을 맡고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우리의 한국은행과는 달리 민간은행이다)는 부자들의 금고를 다시 채워주고, 무한대의 돈놀이를 할 수 있는 미국 중심의 신용 체계가 무너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이를 위해 연방준비제도는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실시했고, 슈퍼리치와 상위 10%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날린 손실을 만회했지만, 나머지 90%는 빈곤의 악순환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이 바람에 선진국의 주식시장은 금융 대붕괴 이전을 넘어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천문학적인 재산을 날린 슈퍼리치들은 금융 대붕괴 전보다 더욱 부유해졌습니다. 자본주의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공황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하위층의 지갑을 털어 만회하곤 했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은행과 금융시장을 오가며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밀어붙인 것입니다.

 

 

무제한 양적완화 때문에 천문학적인 유동성이 시중에 풀렸지만, 이것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은행과 금융업체를 살리고 주식시장을 띠우는데 사용됐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동자의 소득을 보장하는 실물경제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지만, 슈퍼리치와 상위층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낙수효과는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죽하면 세상이 1%의 부자와 99%의 가난한 사람으로 나뉘었다는 말들이 전세계를 회자하겠습니까? 미 연방준비제도의 무제한적 양적완화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이라도 찾아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공존과 상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일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됐습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소득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노동자들은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놓고도 다투어야 할 상황까지 내몰리게 됐습니다. 평균수명이 늘은 만큼 매년마다 노동시장으로 편입되는 새내기들과 피터지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 것입니다.  

 

 

허면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수없이 많은 일자리도 없애버린 2008년의 금융 대붕괴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던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성경에 나오는 문구를 차용한 마테효과와 파레토의 법칙부터 살펴봐야 합. 우선 가우스 이론에 근거한 통계가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밝힌 《블랙스완의 도움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월가의 현인, 탈레브는 《블랙스완》에서 “확률과 수학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실 세계의 근소한 수리적 변화는 정규분포곡선으로 대표되는 완만한 무작위성으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가증식하고 거친 무작위성으로 추정된다. 수식화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이 아니라 만델브로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이란 뉴턴역학이나 다윈의 진화론,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처럼 선형적으로 돌아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이것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인데, 원체 방대한 내용이라 최소 4~5편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습니다). 만델브로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의 기반을 이루는 두 개의 원리에 대해 짧게 다뤄보겠습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비약을 통해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내는 양자역학의 근간이 되는 두 가지 원리는 불확정성 원리와 베타원리입니다. 

먼저 불확정성의 원리란 물질과 반물질이루는 기본입자들이 질량을 지닌 입자의 성질을 띠면서도 동시에 운동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형태인 파동의 성질도 띠어서 어느 하나를 파고들면 나머지가 무너지기에 우주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불확정한 상태로 머문다는 원리입니다(입자물리학적으로 보면 게이즈장 이론).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빛이 입자이면서도 파동이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론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됐습니다.

 

 

두 번째인 베타원리는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닌 입자나 에너지가 서로를 밀어낸다는 원리입니다. 우주를 이루는 모든 기본입자들이 다차원적으로 압축돼 있던 특이점에서 거대한 폭발(빅뱅)이 일어나면서 우주가 창조된 것도 이 원리가 바탕이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우주를 만들어낸 기본법칙인데, 이런 양자역학의 원리들을 통해 우주가 뉴턴역학에 의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뉴턴역학의 붕괴는 다윈의 진화론을 차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물론, 헤겔의 변증법에 기초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도 무너뜨렸습니다. 우파의 신화로 자리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좌파의 신화로 자리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류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적 비약(진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가 이에 속한다)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예측가능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쓸모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물리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시되고 있는 초끈이론(양자역학과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합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통일이론의 핵심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과학란에서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이 양자역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들이 채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금융위기를 예언해 유명세를 탄 블랙스완의 저자 탈레브는 이 두 가지 이론에 근거해 가우스 정규분포곡선(뉴턴역학의 핵심인 작용과 반작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에 따라 통계를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는지 2008년 발 금융시장 대붕괴을 통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선형방식을 따르는 기존의 통계수치는 현실의 변수들을 모두 다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인 편향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책의 제목인 '블랙스완'은 인간이 발견한 백조들이 모두 다 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검은 백조는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수천 년 동안 이런 믿음이 강화되다가 어는 동물학자가 검은 백조를 발견함에 따라 수천 년 된 믿음이 단 한 번에 무너져내린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사항에 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성찰처럼 인간은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인류 문명에 최악의 선물을 남긴 플라톤의 주름지대에 관한 내용은 별도의 글로 다루겠습니다).   



실제로 인간은ㅡ집단도 마찬가지이지만ㅡ자신의 성향과 기호, 경험과 환경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필요한 쪽의 의견만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로 구별되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경우에는 이런 확인 편향의 오류가 심각하다 못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 간에도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이런 확인 편향의 오류 때문에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위가 홀쭉하고 밑이 넓은 종 모양의 곡선)에 경도된 주류 경제학자들은 2008년의 금융시장 대붕괴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의 양극화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자기조정 능력이 있는 완전시장을 방해하는 국가의 개입이나 과잉된 규제, 초국적기업의 담합과 내부거래, 경제정책의 일관성 부족,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정치인 등이 문제라고 합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합니다. 애당초 보이지 않는 손이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면서요.


   

주류 경제학과 현장과의 차이를 확인 편향 오류 등으로 설명한 탈레브는 부의 양극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마태효과를 얘기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는 마태복음 13장 12절에 나오는 내용인데,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것이며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질 것이라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우화에 불과합니다. 



낮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예수가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하늘에 가면 더욱 대접을 받는다는 뜻에서 한 말을 주류 경제학자들이 부의 양극화가 시장경제의 발전 도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경제현상이라고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는 중에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피살된 것을 전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부수적 피해라고 말한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이번에는 부의 양극화를 최초로 밝혀낸 파레토의 법칙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였던 파레토는 빈부격차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몇 세기에 걸쳐 국가들의 부와 소득에 대한 다량의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만델브로브트는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는 한 축에는 소득 수준을, 그리고 다른 축에는 그 소득 기준을 가진 사람 수를 표시해 놓고 그래프용지 위에 데이터 차트를 그리자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동일한 그림이 그려졌다. 사회는 빈자 대비 부자의 비율이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완만히 기울어지는 <사회적 피라미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닥은 매우 두껍고, 부자 엘리트들이 속해 있는 위는 매우 얇은 <사회적 화살>에 더 가까웠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철저히 분석한 파레토는 소득 분포가 가우스의 정규분포곡선(종형곡선)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의 부의 대부분을 소수의 부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화 된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법칙에 따르면 억만장자가 억대의 돈을 버는 확률이 가난한 사람이 만원을 버는 확률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20 : 80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득불평등이 더욱 커지면 1 : 99 사회도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2008년 금융위기가 가져다 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파레토에 의해 마태효과가 공식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물론 최근의 기준으로 보면 파레토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보여줬습니다. 파레토가 개인적으로 구할 수 있는 국가의 자료가 일부 유럽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고, 통계와 분석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티핑포인트》와 함께 80대 20법칙을 넘어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롱테일 경제학의 도움을 받아 보겠습니다(가우스 이론에서 벗어나 프랙털 이론을 따른 이유는 삼성전자의 어닝쇼크, 미래의 먹거리가 문제야를 참조하십시오). 이 책의 저자 크리스 엔더슨은 미국의 속담을 인용하며 “만일 단 몇 명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을 갑부가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가우스 곡선의 꼬리 부분이 무한히 길어지면 종형을 이루는 머리와 몸통 부분을 넘어설 수 있다.



이는 단 몇 명이 갑부가 된다한들 한 국가의 부나 전 세계의 부를 모두 독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갑두들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많은 부가 가우스 종의 곡선에서 ⅹ측 부분과 평행하게 이어지는 긴 꼬리(롱테일) 부분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류들의 시장경제의 규모보다 그것에서 잘려나간 꼬리 시장의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이것을 양성화할 수 있으면 가벼운 경제의 도래가 가능하며, 부의 양극화도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소수에게 소득이 집중되는 부의 양극화는 《롱테일 경제학》의 주장도 무효로 만들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부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중산층의 수는 계속해서 줄고 있고 하위층과 극빈층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게다가 인간 수명의 연장은 종의 차원과 개인의 차원에서는 축복일지 모르지만,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는 상황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고령화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출산율이 세계에서 최저로 떨어지며,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지고 계층의 이동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2030세대가 오죽하면 삼포세대라는 말로 회자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중산층이 무너져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하층민은 극빈층으로 떨어진 2008년 이후에는 부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빨라지고 있습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다보스 포럼에서 전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초국적 기업의 총수와 거대 금융 자본가, 세계적 언론기업과 각국의 정치지도자, 국제기구 책임자와 급진적 지식인들의 모여서 공공연히 자유시장 자본주의 실패를 얘기하는 것(이것도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쇼비지니스에 불과하다)도 이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인류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릅니다.  



최근에는 허리우드 영화관계자들이 최고의 영화로 뽑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히로인인 비비안리가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부의 양극화가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는 오늘에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도 믿기 어려울 판입니다. 기존의 시장경제로는 부자들의 재산을 늘릴 수 없어서 폭력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늘고 있고, 빈곤의 거버넌스(마이크로 파이낸스라고 알려진 미소금융을 말함)를 통해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지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좌파게티 2014.10.17 11:41

    아고라에 이어 블로그에서도
    명료한 글과 좋은 책들...
    소개 잘 받고 갑니다. ..
    시간나는대로 탐독해야 겠네요...

  2. 무대포 2018.12.02 13:36

    좋은글 감사드려요.
    너무너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