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에 초월했던 베이컨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 과학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사람이라면, 데카르트는 현재의 결과만 놓고 볼 때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경험을 통한 과학적 지식을 중시했던 베이컨과는 달리 자연과 종교에 대한 근대이성의 우월성을 《제1철학에 대한 명상》과 《방법서설》을 통해 정립함으로써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자 세상의 지배자로 확고한 위치를 다졌기 때문이다(정신과 육체의 분리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바탕이 됐다). 우리가 말하는 과학철학이란 데카르트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그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이성이라는 종교에 귀속시켰다. 



모든 생각과 추론, 사상과 개념을 부정할 수 있어도, 신이 준 선물인 생각하는 있는 과정만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21세기의 명제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었다)를 정립할 수 있었다. 그의 성찰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의해 반박될 때까지 근대과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과 데카르트(와 데이비드 흄)를 근대이성과 근대철학을 논할 때 맨앞에 두는 것도 연역과 귀납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근대과학과 근대이성이라는 무한 진보를 견인하는 양축이 인간의 의식과 시대의 문화에 확고하게 자리 잡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와 자원을 찾아 떠나는 식민지 시대의 팽창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근대국가와 함께 등장한 중농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고전파 경제학과 양축을 이루었다). 두 사람과 함께 ‘돌다리도 두들겨 본 다음에 건너라’는 방법적 회의에 대한 데이비드 흄의 회의적 방법론(특히 《오성에 관하여》를 보라)이 더해져 폭발적인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여기에 브라헤와 케플러, 뉴턴의 연구결과의 도움을 받은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과학지식이 목표로 하는 대상은 무한대로 넓어졌고, 한 세기가 더 걸렸지만 종교적 제약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신과 동형인 인간은 과학적 결과가 축적되고 고도화됨에 따라 지구라는 협소한 근거지에서 벗어나 우주 정복에 나설 수 있을 것이고, 뉴턴 역학에 의해 우주의 법칙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에 시간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었다. 





비록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더욱 공고해짐과 동시에 깨져버린 고전물리학에 기반한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공위성 같은 우주공학의 발전과 기념비적인 인간의 달 착륙으로 이어졌다. 우주과학의 눈부신 성공까지 확인한 지식인들은 과학 찬양에 열을 올렸고, 제러미 리프킨은 《유러피언 드림》에서 이런 황홀경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리스는 블랙홀의 권위자다...그런 리스가 과학 탐구의 방법 가운데 일부는 존재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실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그의 주장은 과학의 기본 자체를 위협하면서 학계에 암운을 드리웠다. 규제 없는 과학탐구가 현대 과학의 기초이기 때문이었다. 계몽주의 과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목표였다...과학 탐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이면 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진보’가 비현실적인 목적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이성을 활용하는 인간의 능력에 회의를 갖는다면 지구상의 완벽한 삶에 대한 소중한 꿈도 사라지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몽주의의 시초부터 과학계는 인간의 모든 탐구가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우주 정복과 식민지 건설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의 풍요로움에 대한 환상이 컸던 것에 비해서, 근대과학의 기초는 생각보다 빈약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이성이 생각보다 대단치 않아서 이런 환상은 오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정 속도에 오른 기차란 멈추기 어려운 법이다. 낙관적 결과에 힘입은 과학의 행진이 무분별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각종 폐기물과 부작용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독소를 지니고 있는 폐기물의 양이 늘어남으로써 장단기적인 위험을 축적하는 부작용(산업적 측면으로 볼 때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부수효과)이 속출했지만, ‘탐욕의 삼위일체’에게는 더 큰 진보를 위한 감내해야 할 ‘부수적 피해’에 불과했다. 





이윤의 논리는 ‘빨리 빨리’의 행태가 필수적으로 초래하는 부작용들이 새로운 시장의 단초로 남도록 만들었다. 이것들이 또 다른 응용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윤의 추가요소로 전환될 때까지 철저하게 감춰두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결과의 낙관론과 부수적 피해의 운명론을 되뇌면 충분됐다. 이미 시장논리에 길들여진 시민들은 언제나 자기유지의 타협과 힘의 열세에 따른 체념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디지털기록의 축적으로 개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욕구를 창출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는 소비사회에 대한 체념을 넘은 소비사회를 구축하는 자발적 복종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뜻한다(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뉴턴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대표되는 무한한 진보에 대한 과학적 맹신은 인류로 하여금 반성하는 성찰과 비판하는 능력을 망각의 창고로 보내버리도록 만들었다. 과학의 신성화는 갈수록 시민에게서 멀어지는 전문가들의 언어에 현혹되기 마련이어서 과학의 부작용을 보편적인 것으로, 언젠가는 해결될 일시적인 문제로, 그래서 그때까지는 개인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문제로 만들었다. 철저히 지배 세력에게 유리한 체념과 순응의 사회심리학은 이런 방식으로 과학의 부작용이 개인에게 분배되는 악마의 방식에 면죄부를 발행한다. 





최근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는 초미세먼저의 공습(반 이상이 국내에서 배출된다)과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일본 제1원전의 폭발에 따른 방사능 유출의 위험성을 예보의 정확성과 그에 따른 개인적인 대처의 문제로 뒤집어버렸다. 자신의 대보다 다음 세대에서 주로 나타날 피해와 부작용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근대과학이 견인한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개발의 후유증으로 나타날 미래의 피해를 지금 확인해 그에 대한 보상을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질적 지배자들에게 청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볼 때, 과학의 역사를 위험 확산의 역사라고 입증한 울리히 벡의 성찰은 20세기 물론 21세기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과학의 부작용이 축적이자 확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위험은 근대성이 출발할 때부터 이미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을 확률이라는 의미론적 지평 안에서 합치시켜’ 버렸다”고 말했다. 예측 불가능한 것을 확률을 통해 ‘오만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가정’을 담고 있는 미적분학의 발전이 과학계 전반에 퍼지면서, 인류를 비대칭적 종말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의 폭발적인 확산이 지구온난화와 토지의 사막화, 대양의 오염과 극도의 불평등으로 축적됐다. 이제는 과학의 부작용이 초래한 폭발 직전의 위험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울리히 벡의 성찰을 따라가는 바우만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이 세계의 우연성과 무작위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의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처럼 벡이 ‘오만’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자만심이 바로 근대적 의식을 지탱해주던 두 기둥이며, 결국 위험이라는 범주가 이 두 기둥을 화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 ‘위험’이라는 범주는 두 번째 기둥인 ‘자만심’을 구해내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비록 원망스럽고 무서운 동반자일지라도 고집스럽게도 도처에서 계속 따라다니는 첫 번째 기둥이라는 동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동안은 과학자의 전유물이었던 위험이 비과학자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증폭되자, 다급해진 정부와 더 이상 비밀을 숨길 수 없었던 과학자들은 ‘위험을 계산해내려는 기획’을 통해 다시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주도권을 움켜쥐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고, 전문적인 통계를 해독하기 어려우며, 주어진 정보의 타당성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개인들로서는 범죄자에게 범죄의 피해를 해결하도록 맡기는 것 이외에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이에 고무된 과학자들은 위험을 통제하기에는 완벽하지 않지만, 과학의 발전과 지식의 축적을 통해 위험을 제어하는 확률의 오차를 최대한도로 줄여나가다 보면 ‘통제할 수 있는’ 상태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며, 과학적 의미의 ‘낙수효과’를 약속했다. 이를 위해서는 변함없이 정부의 예산지원이 필요하고, 그 결과물들을 이용해 폭발 직전의 위험을 통제하는 일은 여전히 정부의 위탁을 받은 기업들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한 것은 완전한 위험 통제와 전혀 실패가 없는 확률의 계산이 아니었다.



바우만에 따르면 그들이 약속한 통제의 범주는 “단지 위험할 수 있는 확률과 예상되는 위험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만을 약속했을 뿐”이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는 원래 목표로 삼았던 일을 최대한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원들을 가장 최적의 상태로 분포시키는 방법을 계산하고 이를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약속”했을 뿐이었다. 만약에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고 가는 사건들이, 과학자들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발생하고 만다면, 그 사건들이 일어날 확률들에 대해서는 이미 계산해두었기에 대처가 가능하다는 약속 말이다. 



물론 엄밀하게 계산된 확률과 오차 범위 안에서의 실패일 뿐인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최소한의 피해ㅡ그것이 수천만에서 수억 명의 죽음일지라도ㅡ는 개인이 감당해내야 할 문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적 절차인 선거에 의해 공인된 정당성을 획득한 ‘단기적인 군주’로서 통치하는 정부의 행태가 정책 실패의 책임에서 갈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탐욕의 삼위일체’의 실질적 지배자인 세계적 특권그룹이 일방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현재의 구조 하에서 개인에게 돌아갈 피해를 보상해주거나 막아줄 방법이란 결단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원자탄의 발명은 위험의 보편성과 공멸의 동시성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이 견인하는 진보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지만, 미국이 끝내 원자탄 두 개를 일본에 떨어뜨림으로써 인류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위험은 오히려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선례가 생겼으므로 핵무기 확산은 불가피할 것이며,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고, 상호견제의 버팀목으로 변질된 핵무기를 보유하는 국가는 갈수록 늘어났다.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면서, 더 이상 핵무기의 확산은 없어야 하며, 이에 대한 국제적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본말이 전도된 이런 현상이 ‘위험사회’의 본질이며, 그래서 인류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어떤 방법도 강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에너지 안보를 확고히 하고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해 핵발전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이렇게 절대 행해지면 안 되는 악마의 선례가 이루어졌음으로 과학의 광기를 이용해 이익을 독점하는 ‘탐욕의 삼위일체’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라져버렸다. 꾸준히 늘어나는 핵보유국 숫자가 이를 말해주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를 바로잡을 제대로 된 기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세계적인 장기공황이 불러온 지난 7년 간 핵 관련 프로젝트들이 어느 때보다 활발히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이제는 위험이란 불확실성의 미래와 함께 사는 것이 일상이 됐고, 개인이 사회적으로 발생한 위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스스로 무장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공멸의 순간에 이르지 않으려면 전 지구적 차원의 공동노력이 필수인데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 신자유주의적 선동은 미래세대의 선택지를 갈수록 줄인다는 점에서 무책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모두가 전멸할 위험을 항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핵우산’이란 정치논리의 미친 허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온난화에 따른 온갖 피해마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것으로 떠넘겨지고 있다. 과학이 철학을 귀찮게 여기면 인본주의적 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자본의 탐욕을 추구할 뿐이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 


                                   


  1. smm 2015.04.21 06:12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도 엄밀히 따지면 존재가 우선이죠. 지가 존재하니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죠. 아뭏튼 어느 영역이든 철학이 없는 진보는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철학을 할 수 없는 환경으로 개인들을 내몰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하지만 도령님처럼 이렇게 지속적으로 외쳐주며 지식인의 소임을 다하는 강단있는 소수가 적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5.04.21 06:28 신고

      어디선가 좋은 글을 쓰고 준비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현실정치적인 것들도 다루다 보니 자꾸 늦어지네요.
      하긴 공부할 것도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당분간은 과학사 관련 책들을 집중적으로 봐야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자발적 복종이 시대에 대한 책들을 다 읽으면 읽으려고 이미 10여권을 구입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나저나 책값이 많이 나와 죽일 지경입니다.

  2. 최홍대 2015.04.21 15:16 신고

    철학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삶의 철학따위는 없이 무조건 누구보다 잘살겠다는 생각만 넘쳐나면 결국에는 칼날이 자신을 향할듯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4.21 15:20 신고

      네, 그렇습니다.
      인간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너무 생각을 쉽게 버립니다.
      인간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기술은 편리함을 주지만 그것이 꼭 올은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2018.04.02 09:20

    비밀댓글입니다



4. 과학비판



궁극적이고 대답 불가능한 질문들을 물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질문하는 존재로 정립한다. 대답 가능한 질문을 묻는 과학이 철학에 기원을 두는 것은 이 때문인데, 이 기원은 모든 세대를 통해 항상 현존할 원천으로 남아 있다.


                                                               ㅡ 한나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에서 인용



이제 도스토예프스키나 프로이트, 디킨슨이나 베버, 트웨인이나 마르크스 가운데 그 누구도 합법적인 지식생산자가 될 수 없다. 단지 재미있어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 뿐, 그들은 과거의 산물일 뿐이다. 진리를 원한다면, 주저없이 과학으로 눈을 돌릴 일이다. 과학만능주의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이것은 테크노폴리 속에 과학만능주의가 생겨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ㅡ 닐 포스트만의 《테코노폴리》에서 인용





부와 기회를 독점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극도의 불평등과 회복불가능한 위험을 인류와 자연에게 떠넘긴 ‘탐욕의 삼위일체’의 성공에는 영원한 성장이라는 진보의 믿음을 보편적인 진리로 만들어준 과학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과학과 과학적 결과와 발명이라는 것이 시장의 외부(국가가 예산을 배정하고 대학이나 개인이 연구의 주체가 되는 방식과, 기업과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식)에 위치하면서, 성장을 견인하고 시장이 정체상태에 빠졌을 때마다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주는 외부효과로 인식되었다. 



금속인쇄술의 발명으로 과학지식이 보편화됐고, 화약의 발명으로 전쟁이 빈발해졌으며, 자석의 발명으로 식민지 정복을 위한 항해술의 발전이 가능해졌다. 석탄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들 수 있게 됨에 따라 내연기관이 나왔고 그것이 산업혁명의 동력이 된 이후에 나온 과학적 결과물들은 시장의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에 들어서는 인간을 대체하는 자동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제품화할 수 있는 연구들만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기초과학(물리학과 화학이 핵심)의 발전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정도로 과학의 시장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에 ‘탐욕의 삼위일체’가 기획한 국민(민족)국가 탄생의 원대한 비밀이 숨어 있다. 초기의 상인자본과 산업자본은 지속적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자되는 것에 비해 결과물의 효용성과 경제성이 의심스러운 다양한 분야의 과학(특히 기초과학)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했다. 결국 해결책은 똑같을 수밖에 없었다. 대량생산에 따른 충분한 수요를 만들기 위해 국내의 그물망 같은 인프라와 해외 시장과의 안정적인 연결망 구축을 담당했던 국가가 이를 대신하도록 만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유전자에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지적 욕구라는 불치병이 자리하고 있어서 과학적 결과들은 계속해서 나올 터였고, 심지어는 잘 갖춰진 교육제도 밖에서도 과학적 성과는 지속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과학발전을 위한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고, 그 결과물이 생산성 향상과 효율성 증대를 위해 제도적으로ㅡ국가가 투자한 비용(세금) 대비 국민의 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하게 만들어놓은ㅡ시장에 흡수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과학의 눈으로 본 경제성장에 관한 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는 과학의 성과들이 약속하는 진보에 대한 낙관론(경제성장을 통해 파이부터 키워야 한다는 거짓말)과 성장의 결과들이 개인에게 내려가는데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이라며, 끝없이 미뤄지기만 하는 ‘낙수효과’를 내세워 연구의 결과를 독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작동하지 않는 낙수효과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전 세계적으로 무분별한 개발을 통해 경제규모를 확장하고 그 이익의 상당 부분을 독점한 결과, 자산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의 GDP와 맞먹을 정도로 성장한 초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은 과학을 아예 ‘탐욕의 삼위일체’에 종속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제니퍼 위시번의 《대학주식회사》를 보면 정부의 예산(국민의 세금)으로 대학이 담당했던 과학연구의 결과물들이 헐값에 기업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나와 있다. 이는 국민의 세금을 통해 기업의 배를 채워주는 반국민적 행위이며, 특히 누진적 세금으로 회수돼 복지를 통해 국민에게 재분배되지 않으면 사회계층간의 불평등이 심화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방식이야말로 미국이 유일 제국으로 발돋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나라들을 등쳐먹은 방법으로 자신까지 말아먹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금의 대한민국처럼 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기업이 자체 연구소에서 윤리적 문제에서 벗어난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으며, 대학의 연구소와도 독점 계약ㅡ연구원들은 학생 신분이어서 얼마든지 저임금 노동 착취가 가능하다ㅡ을 맺어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사례가 수없이 언급되었다.



바슐라르와 칼 포퍼, 칼 세이건과 제임스 베니거, 스티븐 호킹과 스티븐 와인버거,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 니콜라스 카와 장하석, 나심 탈레브와 제레미 다이아몬드 등의 저작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오니아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진정한 후계자인 근대과학의 출발에, 자연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정복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 베이컨과 근대이성을 종교의 영역에 올려놓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내놓은 데카르트가 있었다. 



또한 인간 이성(순수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한정지으려고 했던 칸트의 영향도 지대했다. 칸트는 그의 비판시리즈를 통해 하늘만 바라보던 인간들을 지상에 충실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그가 정한 인간 이성의 한계가 위축되는 부작용을 일으켰다. 칼 포퍼에 따르면 칸트는 ‘형이상학에 대한 돼먹지도 않은 소리가 나오는 터전을 없애 버리려는데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칸트가 없애 버린 것은 그 헛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논증을 사용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됐다고 말했다(사족이지만, 칼 포퍼는 토마스 쿤보다 베르그송과 같은 세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칸트를 놓고 멋진 설전을 벌였을 것이므로).





즉, 과학적 객관성을 추구하는 인식의 기본 틀은 각종 이론을 실험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없는, 그래서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선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바람에 과학적 지식이 진리의 영역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검증 과정이 질식사해버렸다. 아인슈타인이 불변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우리가 전제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빛이 강력한 인력을 발휘하는 태양을 지나갈 때 휘어지고, 그렇게 시공간이 휘어지는 방식으로 시간여행도 가능할 수 있다며, 기존의 과학적 인식을 혁명적으로 뒤집어버린 상대성이론)을 입증함으로써 과학적 객관성의 불완전함을 경고했지만, 이마저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고전물리학적 발견들에 기초한 영원한 진보라는 개념이 한정된 자원과 공간만 제공하는 지구에서는 절대 실현될 수 없는 허구임을 알 수 있는데, ‘탐욕의 삼위일체’는 과학적 진보의 영원성에 대한 모든 저항들을 하나씩 점령해가면서 무한질주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하물며 과학적 지식이 돈이 되는 상황에서 칸트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는 최상의 선물이었다. 헤겔의 등장은 이 모든 과정의 완결판이었으니, 그는 미완성의 변증법을 통해 과학기술이 견인하는 진보의 영원성과 개인에 대한 사회와 체제의 우월함을 선언함으로써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버렸다. 개인 대한 사회의 우위와 역사의 필연은 ‘탐욕의 삼위일체’가 시장의 규모를 무서운 속도로 확장하는데 결정적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이로써 근대이성이 완성됐으며 그 첫 번째 수혜자는 불완전한 근대과학이었고, 부산물은 근대철학이었으며, 최대 수혜자는 거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들이었다.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무소불위의 힘을 준 근대이성이 과학의 발전에 공헌한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16세기에 현대적인 사고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설익은, 그래서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과학에 대한 믿음부터 살펴봐야 한다. 아쉬운 것은 어렸을 때 읽었던 베이컨의 책들을 모두 다 처분한 관계로, 필자에게 변증법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재인용했다.



우선 자신들(과학적 성과의 전통의 대가들)이 모르는 것을 그들은 안다고 믿는다. 경솔한 믿음, 회의에 대한 거부, 신중하지 못한 답변, 교양의 과시, ‘모순’의 혐오, 이해타산적인 태도, 탐구에의 태만, 언어물신주의, 단순한 부분적 인식에만 머물러 있음. 이 비슷한 것들이 인간의 오성과 사물의 본성이 행복하게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고는 오성을 공허한 개념이나 무계획한 실험과 결혼시켰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러한 결합의 결과나 열매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인쇄기는 조야한 발명품이고, 대포는 이미 익숙한 물건이었고, 나침반은 벌써 이전부터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 물건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나는 학문에 있어서,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또 다른 하나는 재정, 무역 그리고 항해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말하자면 소 뒷걸음치다가 건진 것들이다. 지식은 많은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제왕들이 보화를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것, 그들이 명령이 미치지 않는 것이며, 왕의 첩자들이 그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도 없고, 항해자와 탐험가들은 그것이 생겨난 원산지에 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우리는 말로만 자연을 지배할 뿐 자연의 강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의 인도를 받아 발명에 전념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자연 위에 군림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베이컨의 선언은 베니스 대지진이라는 무자비한 자연을 과학의 발전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줬지만,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와 필요하다면 인간에 대한 인간의 파괴까지 넓혀지는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밝힌 것처럼, 그 결과는 종말이나 파국이라는 말이 너무나 많이 언급돼 실증이 날 정도에 이른 현대의 만연하는 공포와 폭력의 일상화이다. 베이컨이 말한 ‘우리가 실제로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베이컨의 유토피아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실현된 오늘날, 그가 정복되지 못한 자연의 탓으로 돌린 강압의 본질이 명백해졌다. 그것은 지배 자체였”음이 확실해졌다. 





이렇게 베이컨에서 출발해 신의 영역에 오를 기회를 포착한 과학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며, 무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신화의 첫 장을 열었다. 과학은 지식에서 나오고 실험과 생산을 통해 제품화할 수 있기 때문에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과학적 지식은 원래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베이컨의 선언에 의해 자연을 정복하는 능력(이윤의 원천)을 얻었고, 기업이 이를 제품화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노동 착취의 과정인 대량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과학자가 아니었던 베이컨은 과학자다운 면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과학의 언어인 수학 지식도 형편없었고 과학적 실험에 대한 경험도 없었지만, 과학 발전의 현대적 토대를 마련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닐 포스트만은 《테크노폴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문의 진보》에서 베이컨은 발명가들을 위한 대학이라는, 마치 매사추세츠(MIT)와 유사한 대학의 설립구상안까지 들려준다. 베이컨은 정부가 발명가들에게 실험과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해 주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학술 저널과 국제 학회를 주관한 일도 있다. 그는 과학자들 간의 완전한 협동을 꾀하였는데, 이는 티코 브라헤,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이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노출시키지 않고 최대한 숨길 방법을 찾고 있었기에, 이러한 발상은 그들을 무척이나 놀라게 했을 것이다. 베이컨은 또한 과학자들이 쉽게 대중을 위한 공개강연에 나설 수 있도록 충분한 보수를 보장하라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발명품의 활용방법을 계몽시키는 것 역시 발명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가 과학 사업을 바라보던 시각은 현대인의 안목 그대로였던 것이다. 즉 조직화되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공적인 의무를 지니고, 인류가 삶의 조건들을 개선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4.01 07:07 신고

    오늘은 차분하게 정독해야할 것 같습니다.
    늘 많은 공부를 하고갑니다.

    • 늙은도령 2015.04.01 16:08 신고

      첫 번째 출판으로 생각했던 글이어서 조금은 어렵습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보완 탈고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네요.

  2. 달빛천사7 2015.04.01 08:48 신고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은데 실력이 없어서염 부럽네염 늙은노령님은 글을 잘쓰시네요

    • 늙은도령 2015.04.01 16:09 신고

      그 동안 읽은 책들을 녹여내야 하는데 게을러서.....
      당장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 분들을 위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깊은 글은 쓰기 힘드네요.

  3. 공수래공수거 2015.04.01 10:05 신고

    혜안과 박학다식에 늘 감탄을 합니다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4. 최홍대 2015.04.01 10:18 신고

    제대로된 과학의 발견 그리고 통찰력을 가진 과학자가 한국에는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

  5. 耽讀 2015.04.01 13:54 신고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과학 영역은 항상 어렵습니다.

    • 늙은도령 2015.04.01 16:14 신고

      네, 어렵습니다.
      최대한 쉽게 쓰느라 어려운 부분을 생략해서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6. 나비오 2015.04.01 14:47 신고

    음 매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마지막 정리 부분에서
    베이컨을 새롭게 보게 되네요
    그가 진정한 혁신가라는 ^^

    • 늙은도령 2015.04.01 16:15 신고

      지금의 세상을 만든 장본인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성찰이 현대를 만드는데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근대이성은 뉴턴역학에 의해 지독히도 단순화된 우주의 법칙을 지구의 법칙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거대한 체제의 견고함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동시에 문명의 지속성을 확신시키고, 시간의 발견과 궤를 같이하는 역사를 등장시킬 수 있었다.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평등한 노동에 대한 소유와 자유(방임)의 상대적 우위, 끝없는 팽창의 대항개념으로 발생한 민족성과 영원한 투쟁을 유발하는 계급의식의 출현, 신을 끌어들인 로크의 소유개념(구획 짓기)과 스미스의 교환시장의 발견 등이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중요한 목록들이다.



근대이성의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유개념과 교환시장의 정립으로 독점적인 부의 축적과 과시적 소비를 통한 ‘구별 짓기’의 저급한 욕망, 일체의 것들을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 모든 종교와 정치가 지닌 영향력을 다 합친 것과 거대해진 매스미디어의 발전, 이에 편승해 거의 모든 영역을 상업화하는데 성공한 소비지상주의의 확립까지 현대성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근대이성은 인류의 문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베이컨과 데카르트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그 모양을 드러낸 근대이성은 폭력적인 현대성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 탄생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21세기의 14년을 관통하며 인류 문명의 불확실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플라톤과 헤겔, 고전물리학과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격문은 분업과 거대관료제의 등장으로 사유하는 인간에서 착취 받는 동물(고도의 숙련도 필요 없는 단순작업)로 전락한 노동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산업사회의 발전단계에서 불확실성이 최대화되는 단계로 접어드는 시작에 불과했다. 



노동과 적대적 공생을 유지했던 자본은 과학의 발전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노동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끊고 국경을 넘나들며 홀로 독주할 수 있게 됐지만, 노동은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노동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더욱 열악한 조건으로 빠져들었다. 자본은 정규직 위주의 노동을 분해해서 비정규직과 임시직의 노동으로 격하시킴과 동시에 전업주부라는 것을 상류층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생산의 주체였던 노동이라는 것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자본의 일방적 우위로 하여 퇴근 이후에도 계속되는 무한대의 재생산을 강요받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가족간의 경계선이 무너졌고, 생산의 주체로서의 노동의 형태도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까지 확대됐다. 노동자에게는 사적인 공간이 사라져버린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간접적인 노동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됐다. 



결국 모든 노동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노동가치설’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까지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제대로 된 노동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잉여노동자들이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려 있으니, 노동가치설은 무노동 무임금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들어서는 유노동 무임금의 처지까지 내몰리는 가족 구성원들도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며, 이는 정규직이라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자본주의의 태생적 모순과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적 노동생산성이 최후에 이르는 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자유의 왕국’이 이루어진다고 예언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추상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무지와 정치와 문화,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전복을 꿈꾸는 노동자의 연대는 개별 사업장 내에서도 사라져 버린지 오래됐다.  






푸코가 촘스키와의 대화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폭력적 혁명을 통해 집권을 하면, 오랜 기간 동안 탐욕의 질주를 거듭한 자본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의 악순환이 한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걱정도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입증됐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다중》, 《전복적 스피노자》 등을 통해, 네트워크처럼 집합했다 유령처럼 사라지는 다중ㅡ각자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목적을 위해 연대하는ㅡ의 등장을 예견했지만 이 또한 마르크스에서 스피노자로 갈아탄 것 이상의 결과들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계 노동자들의 연합은 부정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시위로 되살아나는 듯했으나, 2001년 이후로는 분노한 사람들의 행진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점령운동의 붐을 일으켰던 2008년의 금융 대붕괴의 결말도 슈퍼리치의 배만 불려준 채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더 이상 게릴라전은 유효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희망의 이름으로 절망만 쌓여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위대한 분투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 뿐, 영원히 도래할 수 없는 환상의 나라로 판명됐다. 그의 예언대로 자본주의적 진화의 본질적 모순 때문에 내부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고 분열된 틈새를 용접하고 부식된 부품을 가라치우며 보수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 그의 예언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압축된, 또는 유동하는 액체 상태의 현대란 어디로 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극도의 혼란과 공포만 양산하고 있다. 



근대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헤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정반대에 위치한 경제학자가 아닌, 진행경로가 다를 뿐 목적지는 동일한 고전경제학자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노동이 자본의 암묵적 동조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학문적 업적에 그쳤을 뿐이었다.이것 때문에 언제나 중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고, ‘제3의 길’이라는 엉망진창의 이데올로기도 등장할 수 있었다. 



개인과 단위별 노동생산성이 최고에 이르면,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접어든다는 생각이 한 동안 만연했고,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사실인 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최종 목적지는 시장에 들어오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의 비교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에 완전시장을 통해 각각의 공급은 최적의 수여에 할당되는 평등사회로 접어든다는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도 같은 지점에 이르기 때문에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무계급사회’가 도래한다고 주장했으니, 이를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보면, 둘의 차이란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자기 조절능력이 있는 자유 시장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모든 노동을 동등하게 평가하는 노동가치설을 폭력적으로 실현시켜 자본주의의 종말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맬서스)의 경우에는 노동착취와 잉여생산을 피할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의 합리적인 행위가 불러오는 부수적인 피해로 봤을 뿐이고, 노동의 가치를 시간의 절대화로 환원한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그런 부수적인 피해를 본질적인 절대악으로 봤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어느 주장을 따르더라도 현대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근대이성의 잔재들은 영원한 진보의 과정에서 사라질 수 없는 침전물임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근대이성이 완벽하지도 않았고, 합리적이기보다는 비합리적이었다.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이성의 정언명령은, 그것이 동시에 따라야만 하는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고 탈선될 수 있는 것이어서 칸트적 개념과 사유의 차원에서만 찬란하게 빛날 뿐이다.  







이에 따라 세상은 현대성이 내포한 폭력에 의해 온갖 피해와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장경제에 포함되는 순간부터 반이성적인 것들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의 대부분을 무효로 돌릴 만큼! 이제는 평범해진 바우만의 성찰처럼,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무한한 진보와 결과의 낙관론이 추동해낸 경제성장이란 불평등을 양산하는 이데올로기였으며, 그의 부작용으로 생긴 참혹한 결과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온갖 종말적 문제들을 끝없이 축적하고 있다.



진보의 결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정치의 타락이나 몰락, 정부의 친시장적 경향이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지목한다. 또한 자본의 노예로서 경제적 안락함에 함몰된 시민정신의 타락이나, 소비지상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물신화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심지어 국가와 사회에 만연한 범죄와 비리와 부패에 분노하며 차라리 독재시절이 낫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자들도 세계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부자들은 늘어나는 재산을 감당하지 못해 온갖 첨단장비로 무장한 채 공권력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자신의 성을 쌓았고,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에 만연된 폭력과 공포(확인해 보면 자본과 언론이 과장한 것이지만)에 질려 앞선 세대들이 힘겹게 얻어낸 소중한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초인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폭력적인 좌파라며 가난한 자들까지 성을 내며 집단 린치를 가한다. 



원본에 대한 탐독도 없고, 지적 성찰에 대한 부단한 노력도 없이, 검색과 인용으로 이루어진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보편적 허위를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지식인들의 타락은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접게 만든다. 이들은 멘토와 힐링과 인문학 열풍에 편승해 혼란을 가중시키며 ‘탐욕의 삼위일체’를 강화하는 첨병역할로 빠져들고 있다. 또한 세계적 특권그룹과 그들에 기생해 있는 지역의 지배엘리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실정이다. 



이런 퇴행의 현상들은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OECD 회원국들에서 공히 일어나고 있다.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과 맹신이 불러온 이런 참혹한 결과는 낙수효과라는 지상 최대의 거짓말을 불변의 진리로 끌어올렸고, 특히 성장과 개발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최근에 들어 성장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분수효과ㅡ중하위층의 지갑이 든든해야 상위층의 지갑이 더욱 채워지며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경제이론ㅡ마저 거의 작동한 적이 없었다. 



만일 현대판 분서갱유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허락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경제학과 실험실 위주의 결과를 현실에 적용하느라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기 일쑤인 심리학과,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와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형편없는 자기계발서들은 모두 태워버려야 한다. 이제 현대성이 값을 매기는 지식은 땀을 흘려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는 부단한 사고를 통해 성찰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지금-당장 소비할 수 없는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으므로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것들이 됐다.  



이런 즉각적인 만족만을 최고의 가치로 탄생시킨 폭력적인 현대성의 유일한 지배자에서 이제는 수많은 피해자의 하나로 전락한 예외국가, 미국의 좌파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 만들기》의 저자 리처드 로티가 다음과 같이 호소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미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그의 호소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들었어도 행동하지 않아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져가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키워야만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우리가 더럽힌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사람들보다 무려 열 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정작 우리가 두드려대는 그 키보드를 만드는 제3세계 사람들보다 무려 백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아이들이 바로 먼저 산업화된 나라들이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보다 백배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반드시 일찍부터 자신들이 누리는 그 행운과 다른 아이들이 누리는 행운 사이에는 많은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배우게 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바로 그러한 불평등들이 신의 의지도 아니고 경제적인 효율성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니라 오히려 분명 피할 수 있는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가능한 빨리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이 과식하는 동안 굶주리게 되는 일은 결코 없게 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1. 유머조아 2014.08.21 12:28 신고

    깊은 철학이 배인 글 잘 읽고 갑니다~~

  2. 참교육 2014.08.21 12:58 신고

    복사해 뒀다가 두고두고 읽어야겠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태봉 2014.08.22 09:07

    좋은 말씀 백배 공감하고 느끼고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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