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에는 휴식처란 있을 수 없고 환희의 배당도 지불되지 않는다.


                                                              ㅡ T.E.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 중에서




어쩌면 나는 깨어나지 않는 잠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 작용이 죽음과 같아서, 영원히 빛과 어둠 사이 갇힌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설명하고 그것과 투쟁하는, 숱한 몽상가들이 꿈꿨던 그 지겨운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리석게도 이성의 힘을 믿었기에 물질의 과잉 속에서도 투명한 질서와 자율이 있으리라 믿었다. 탐욕의 자본주의 하에서 이성의 가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고투를 마다할 수 없었지만, 그 끝에는 관대한 희망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다, 나는 어쩌면 로렌스가 그러했듯 밤에 꿔야 했던 꿈을 낮에 꿨는지도 모른다. 밤에 꾸는 꿈은 아침에 일어나면 초라해지지만 낮에 꾸는 꿈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 마련이며, 언제든 폭력적으로 돌변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꿈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휴식처란 있을 수 없고, 어떤 환희의 배당도 지불되지 않는다. 정신은 감각의 부속물이며 감각이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어내고 정신이 일보 전진할 때마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먼 모험, 보다 깊은 고난, 보다 심한 고통으로 빠져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로렌스만큼 치열하게 투쟁하지 못한 나는, 이성이 행동을 지배하고 영혼이 육신을 고양하는 어설픈 지성의 테두리에서 서성거렸다. 세상과 직접 부딪쳐야 하는 용기가 부족했기에 나는 움직이기 전에 결정하지 못했다. 문제는 늘 거기서 발생했다.



로렌스의 경험처럼, 나의 시작도 어느 수정처럼 맑은 오월의 아침(아니 오후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에 일어났다. 지난밤의 폭우가 만들어낸 세상 첫날 같은 햇빛에 눈을 떴지만, 밤새 퍼 마신 술 때문에 이성은 숙취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불 속을 뒹굴고 있었다. 육체는 아직 정신에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질서정연한 사고가 배제된 그 순간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딪쳐왔다. 



만개한 오감은 만물의 속삭임, 색체와 향기, 숨결과 미세한 떨림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알코올의 찌꺼기와 잠의 잔재, 정신의 부재가 만들어낸 현실과 비현실이 어디쯤. 그것은 인위적 해석과 성향이 배제된 본질의 세계였다. 거기에는 너무나 허술한 창조의 말도, 숱한 우연으로 가득 찬 거대한 섭리와 일관된 진화의 논리가 수십 억 년에 이르는 거대한 시간 동안 점진적으로 작용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미세조정에 슬쩍 끼어든 ‘눈먼 시계공’의 간섭도 필요하지 않았다. 



만물은 아름답거나 초라하고 복잡하거나 단순했다. 날것 그대로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투명해 어떤 꾸밈도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관성의 법칙도, 거대한 거리에서 작용하는 중력의 힘도, 나노 같은 극소의 공간에서 작동하는 양자역학의 에너지도, 질량불변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물리학 법칙마저도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시공을 뛰어넘어 내가 로렌스의 영적 경험에 빙의됐거나 아니면 로렌스가 내 몽상적 경험에 빙의됐거나, 그 꿀맛 같은 몇 분(아니 몇 십 분, 몇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이나 본질의 차원을 얘기할 때는 시간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이 거짓말처럼 흘러갔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

투명한 질서만이 혼돈처럼 자유로운 곳.



재영은 로렌스적 경험이 현실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칼끝이 살을 파고드는 벼락같은 통증을 느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위장이 쥐어짜듯 비틀어졌다. 역한 취기가 통증을 앞세워 맹렬하게 신경을 파고들었다. 그 위세에 눌려 만개한 오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였지만 고통마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으윽.”



지독한 갈증과 함께 위액이 역류할 듯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재영은 손을 뻗어 머리맡을 마구 뒤졌다. 가까스로 주전자가 손에 잡히자마자 재영은 입으로 가져와 있는 대로 쏟아 부었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위장에 닿는 순간 묵직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재영은 미간과 이마를 찌푸린 채 꾸역꾸역 물을 밀어 넣었다.



“꺼억.”



고개만 쳐든 채 급하게 마신 물 때문에 트림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한 통증은 수장시켰지만 그 바람에 토할 것처럼 위장이 출렁거렸다. 재영은 힘겹게 몸을 뒤집어 물의 역류를 막았다. 도대체가 인간이란 과거의 고된 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족속이다!



“끅.”



재영은 다시 한 번 트림을 한 후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봤다.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 속의 얼룩덜룩한 무늬가 두 눈에 어지러웠다. 다시 위장이 울렁거렸다.



‘제기랄!’



재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간 위장의 상태를 다스렸다. 몇 가지 생각들이 뒤죽박죽 머리를 스쳤지만, 아직도 뚜렷한 잠의 잔재가 의식을 끌어내렸다. 재영은 물을 빨아들이는 마분지처럼 온몸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의식을 차단하는 스위치가 꺼지고, 잠을 불러오는 스위치가 켜졌다. 태고 이래로 반복돼온 빛과 어둠의 공전처럼, 두 개의 상태가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재영은 혼신을 다해 잠의 입구에 감각과 정신을 풀어놓았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세계로 파고들었다.



생각을 버리면 오감이 깨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열리리라. 생명으로 충만한 그곳에서는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내가 벌이는 이 지루한 고투는 냇물을 거쳐 작은 강에라도 이를 수 있을까? 바다는 거대한 수면에 때 없는 파문을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자신의 품을 내어주려 할 것인가?



재영은 꿈꿨다, 손을 뻗으면 잡히는 주전자처럼 질서가 감각처럼 살아 있는 세상을. 생명의 회로에는 어떤 결함도 없기에 들여다보지 못할 실체도 파헤쳐야 할 이면의 진실도 없는 세상을. 만물의 소리와 숨결, 색체와 향기가 내는 것들이 일체의 사고가 배제된 오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투명한 세상을 꿈꿨다. 질서가 혼돈처럼 떠다니는, 어떤 여과장치도 정형화된 논리와 이념의 창도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그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세상을 향해 고뇌하고 투쟁하며 연대를 꿈꿨다.



하지만 진실은 항상 의식이 튀어나와 불굴의 노력으로 물질과 직관의 결과를 뒤집는 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실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끊임없는 노력이, 끝없이 필요했다. 재영은 늘 거기서 멈칫거렸다. 이면에 자리한 채, 배후에서 작용하는 거대한 힘은 늘 그쯤에서 멈추라 경고했고 회유했으며 때로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재영은 그 압도적이며 일방적인 힘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증명하듯, 모든 권력은 시스템에서 나온다. 그것은 지적생명체인 인류 탄생의 순간부터 구축되어 온 것이다. 그 압도적이며 가공할 실체 앞에서 한 명에 불과한 개인이 머뭇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순수한 용기가 필요했다. 어떤 매개체도 필요 없는, 어느 수정처럼 맑은 오월의 아침에 경험했던 그 몇 분의 무작위적인 빙의처럼.



재영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 경험의 순수함 때문에 탄식했지만, 시대의 예언자와 몽상가들은 언제나 실제적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막에 들어가 육체를 핍박하고 물질을 멀리한 채 명상에 잠길 수 있었으나, 세상에 나와 온몸으로 부딪치는 행위의 위대함을 알지 못했다. 이성을 차갑게 유지했음에도, 명상과 고뇌의 양이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다 해도, 예언자가 본 것은 극도로 고양된 감정과 각성된 정신이 만들어낸 자기 체험적 영혼의 울림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신비한 천상의 경험으로 채색됐지만 시대를 바꿀 전능한 말도 거룩한 질서가 구축되는 그 어떤 역사의 현장도 증거하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찰의 순간에 들었던 천상의 말에 압도돼 삶과 죽음과, 관계와 사랑의 본질에서도 벗어나 그들만의 언어와 성역에 머물렀다. 예언자는 지상의 가난과 천국의 보상만을 떠들고, 몽상가는 반복되는 이상의 혼란과 찬란한 패배의 기억만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들은 모호하게 말할 뿐, 실제적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직 스스로 구축한 그들의 성서와 성전에서만 머물러 절대 다수의 희생과 복종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뿐, 의도된 분노와 탐욕에 의거한 ‘사탄의 맷돌’식 일탈을 조장했다.



신이 인간의 삶에서 모호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이제 예언자와 몽상가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퇴장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들을 모조리 경계의 변방으로 영구 추방시키거나, 아무튼 그들의 기억을 역사에서 삭제해서라도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게 완벽히 처단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화신인 ‘자기조정 시장’과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독재를 꿈꿨던 마르크스의 몰락처럼, 그들의 퇴장은 ‘속도의 파시즘’적인 진보의 역사에서 절대 다수의 희생과 죽음을 선동했던 얼치기 합리주의와 어설픈 휴머니즘의 패배로 기록돼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들어와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거대 언론, 지배를 꿈꾸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재영은 거대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분명 꿈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생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재영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둠은 다가갈수록 멀어졌고, 물러설수록 다가왔다. 감각과 이성은 초라한 방에 갇혀버린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희망이란 구석진 천장에 늘어져 있는 거미줄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세월의 무게 같아서 몇 점의 먼지에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일체의 사고가 배제된 오감은 물먹은 마분지처럼 아예 작동하지도 돌아오지도 않았다. 감각이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란 이성의 체계에 갇혀 이미 죽어버린 경험으로 물컹물컹 흐느적거리거나 널브러져 있었다. 인류 대부분의 삶이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향한 무차별의 고투는 이렇게 이름 모를 공동묘지에 수장되거나 아무렇게나 매장돼 버렸다. 투명한 진실과 그 끝에 서 있는 초라한 희망, 재영이 붙들 수 있는 것은 그런 주변적 요소의 허탈함이 거의 전부였다.



그래, 언제나 희망이 문제였다. 희망은 늘 존재했고 단 1퍼센트만으로도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1%의 가능성에라도 움직여야 한다면, 우리가 실패할 압도적인 확률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99%라는 일방적인 위험에 노출되는 우리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1%의 독점은 99%의 희망에서 작동할 뿐, 희생의 대가가 무엇인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부터 또 얼마나 많은 고투를 벌여야 우리는 99%의 희망이란 자인한 고통과 좌절, 일방적인 희생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재영은 그 빌어먹을 1%의 희망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두려웠다.



신이란 또 무엇인가? 격랑 치는 파도 속에서 신에게 기도한 소수만이 빠져 죽지 않았다면 기도하고도 물에 빠져 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왜 성공한 종교들이란 이 세계에서 번창하는 세력들에게만 그렇게도 관대한 것일까? 가난과 핍박, 차별에 대한 보상을 다음 세상에서 받으라 하면서 기득권 세력에 유리한 말만 되풀이 하는 저의란 무엇인가? 끝 날에 믿는 모든 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천국에 이끌려 올려 진다면, 신의 법정에 어떤 세속의 부자를 세울 것이며 어떤 세속의 가난한 자에게 보상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정의란 어디에 있으며 언제까지 원죄 없는 구원을 좇아야 이 질곡의 땅에서 평화로이 잠들 수 있단 말인가? 재영은 지독히 상업화하고 근본주의자들이 판치는 종교와 아직 제대로 된 공통의 준칙도 없는 사회와의 접촉이 두려웠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종교와 사회의 만남은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 없는 지극히 휘발성 높고 마녀사냥적인 비방과 폭력이 난무하는 반인륜적이며 비이성적인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대 언론, 지배를 꿈꾸다>



점차 생각의 양이 늘어나자 재영은 슬슬 잠에서 빠져 나왔다. 대부분의 숙취는 가셨지만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12평 원룸에는 지독한 정적과 어둠만이 무성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재영은 더듬더듬 기어가 책상 위에 놓아둔 노트북 전원을 눌렀다. 독점적 권리를 나타내는 특유의 멜로디가 흐른 후, 태초 이래로 그 견고함을 유지해온 어둠이 디지털 전사의 빛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어둠이 사력을 다해 반격했지만, 얼마 안 가서 둘은 알맞은 선에서 싱겁게 타협해버렸다. 잠시 동안 빛과 어둠이 치열하게 다투는 잔재로 흔들리는 회색지대의 경계선을 말없이 응시하던 재영은 손깍지를 한 상태에서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으며 무슨 오래된 응어리를 토하듯 하품을 내뱉었다. 아직도 숙취의 나른함이 남아 있던 세포 하나하나에 서서히 산소가 공급되더니 잃었던 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천추 2015.06.03 08:31 신고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시작하세요 ^^

  2. 참교육 2015.06.03 09:13 신고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데...
    잘 보고갑니다.

    • 늙은도령 2015.06.03 13:28 신고

      그냥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직 완성되지도 탈고도 안한 소설이니까요.


 

 

이 책에는 참으로 멋진 표현들이 많습니다.

철저한 실처하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던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는 저의 롤모델 중 한 명입니다.

책이 세 권으로 나왔는데 독서가 삶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아니면 도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정보요원으로 아랍의 독립을 위해 이중스파이를 했던 로렌스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이나 철학에 매달렸으면 역사상 최고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삶 자체를 행위하는 것에 두었던 사람이라 그 뛰어난 재능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좋은 문장들을 일부만 발췌해서 올립니다.

블로거 여러분들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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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극한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은 숨이 탁 막혔다.

이런 식으로 정신이 고양될 때마다 영혼이 비정상적으로 우위를 점령하고 육체는 지금까지의 온건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삶에 대한 비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한 종교들의 잔해가 사막과 정착지가 만나는 지점에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 모든 교의들의 발생이 그곳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언자의 삶은 모두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예언자의 탄생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로 정해져 있으며, 예언자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난폭한 사람들에 의해 사막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동안 명상과 금욕의 생활을 한다. 마침내 사람들에게 전할 계시를 깨달은 예언자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서 설교를 한다. 세계 3대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충실히 따랐다. 이 놀라운 우연의 일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간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서 일종의 법칙처럼 굳어졌다.


 

마을의 명상가들에게 있어서 니트리아 사막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곳에 신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고독 속에 파묻혀 있으면 그들에게 전해지는 계시의 말씀을 더욱 확실히 들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랍의 사막은 영적인 얼음집이었다.


 

신을 한 번 대면한 예언자들은 사막에서 돌아온 후에 (검은 유리처럼) 오염된 매개체를 통해서나마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의 충만한 비전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멀게 하며 입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베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황량한 곳을 찾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자신과 이웃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모든 것들을 던져버리게 하려는 노력은 인간적인 약점에 걸려서 실패하고 만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촌사람이나 도시 사람이나 날마다 획득과 축적이라는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반동적으로 물질적인 환경이 인간의 가장 추잡하고도 가장 소중한 조건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가장 철저한 금욕주의로 이끌었던 삶에 대한 자랑스러운 멸시가 오히려 그를 더욱 커다란 절망으로 이끌었다. 그는 부주의하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어서 빨리 마지막 순간이 오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육체를 탕진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가장 아름다운 천국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발견했다. 결국 셈족은 욕정과 자기부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갔다.아랍인들은 그네를 타듯이 하나의 이상 위에서 얼마든지 왕복할 수 있었다. 충성스러운 정신은 그들을 순종적인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사라질 때 위대한 과업은 끝이 난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이상에 관한 한 아랍인들은 맹목적이고 단순하고 고집불통의 어린아이였다.그들에게 육체와 영혼은 영원히 필연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신은 낯설고 어두웠으며 절망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고 질서가 없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서는 이 세상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욱 커다란 열정과 메마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출발의 민족이다. 그들에게 추상적인 것은 가장 커다란 동기였다. 그리고 무한한 용기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물처럼 불안정하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움직일 것이다.


 

세속적인 일의 저항을 받고 물러난 그 파도의 잔해를 씻어내는 것은 뒤를 이어서 밀려오는 파도가 할 일이다. 그래서 언제가 때가 무르익으면바다는 또다시 커다란 물결을 일으켜서 서서히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출발의 민족이다. 그들에게 추상적인 것은 가장 커다란 동기였다. 그리고 무한한 용기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물처럼 불안정하다. 그리고 아마도 끝내는 물처럼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 육체의 해안에 스스로를 부딪치면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물질적인 세상이 자리 잡고 있던 그곳을 완전히 뒤덮어 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수면 위로 움직일 것이다.


 

 

마치 물이나 혹은 기름처럼 모든 일에 조용히 그리고 끈기 있게 스며들었다.


 

Non nobis, Domine.  시편 115 1. 주여,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마옵소서.


 

언제나 진실보다 약간 더 높은 목표를 좇으려고 애를 쓰다가 자신을 소모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었다.


 

강철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불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것 같소?


 

과연 우리가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 가지 목표물을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본 결과 내 눈이 흐려진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견해란 얼마든지 말로 논쟁할 수 있는 문제이며, 확신 또한 수정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오직 비물질적인 논리의 옹호자들이 다른 논리의 옹호자들을 맞서서 저항할 만한 수단이 더 이상 없을 때 비로소 끝날 수 있다.


 

한 개인의 죽음은 수면 위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처럼 순식간에 물 밑으로 가라앉고 말지만 그것을 일으킨 슬픔의 파문은 한참 동안이나 멀리 퍼져나간다.


 

지식을 통해 얻은 사기는 무지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극단까지 치열하게 살게 하는 젊은 시절의 낭만은 사라지고 마는 법이다......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신이란 확신은 다른 모든 희망을 죽여버리는 독약 같은 것이었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목표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초연했고, 이상을 전달하기에는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했으며, 복잡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비록 더럽고 누추한 도시였지만 셈족의 모든 종교가 이곳을 거룩한 성지로 만들어놓았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과거의 유물을 직접 관찰하고 또한 역사의 전통을 실질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해마다 이곳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정치적인 미래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보고 싶어 했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의 단합된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거의 현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치 호텔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처럼 아무런 개성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오가는 여행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살아갈 뿐이었다.


 

우리 영국인들은 모방을 풍자로 여기지만, 프랑스인들은 칭찬으로 여겼던 것이다.


 

감각은 앞으로도 뒤로도 도달할 수 없다. 일단 느낀 감정은 정복된 감정이며 이미 죽어서 사라져버린 경험이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죽은 감정을 매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육신보다는 영혼이 훨씬 더 일찍 늙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그 오랜 수고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얻는 것이 없었다.


 

성공이 확실히 보장되는 곳에 명예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우리의 경직된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이상이란 개인적인 차원의 것들을 초월하는 듯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 이상은 우리의 일상적인 세상의 잣대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일단 열광적인 흥분의 순간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고단한 육체를 돌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육체는 단순히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가장 고귀한 목적을 달성했다는 주제넘은 만족함에 가득 차오르곤 했다.


 

언젠가 닥칠 최후의 심판일을 위해서 선악의 대차대조표를 딱 맞춰놓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맑은 새벽에 출발했다. 지난밤에 오랫동안 사색을 했기 때문에 지성은 몹시 피곤해서 아직까지도 잠을 자고 있었지만, 감각은 태양과 함께 번쩍 눈을 떴다. 이런 아침에는 한두 시간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냄새와 색깔이, 생각을 통해 여과되거나 정형화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직접 우리에게 와 닿았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족하며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의 창조물들에서 모양의 결함이나 부주의한 면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안타까운 마음 같은 것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이성은, 죽음이란 단지 육체가 정신의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속삭였다.


 

인생이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유의지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자 은총인 것이다.


 

근시안적인 군중들이 여러 해 동안 헌신해 온 희망에 다 함께 올라타다 보면, 결코 원하지 않는 우상에게조차 신성(神性)을 씌우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침묵 속에서 기도할 때마다, 그것의 존재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자기희생을 하는 자들은 희생을 자신이 가진 고귀한 재능으로 간주한다. 이 세상에 자아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보다 더욱 기쁘고 풍요로운 쾌락은 없다. 그 안에는 철저한 완벽주의와 상통하는 숨겨진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고통을 당할 기회를 가로채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정당한 고통을 빼앗는 것이다.


 

나에게 완벽한 응답이란 나와 똑 같은 이유에서, 똑 같은 방법을 통해서, 똑 같은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디 물질의 우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기를. 또한 나의 생각을 고요히 잠재워서, 어떤 연상이라도 자유롭게 떠오를 수 있게 되길. 그래서 언제나 바싹 깨어 있을 수 있길.



진실은 항상 의지가 몸을 뒤척거리며 터져 나가려고 기다리는 곳에 숨어 있었다.


 

아무런 고통 없이 행동의 망각 속에 빠져듦으로써 의지와 인격을 차갑게 보관할 수 있었다.


 

용기처럼, 독자적으로는 온전히 존재할 수가 없고, 선하거나 약한 매개물이 있어야만 발현되는 자질들이 있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저녁이었다.


 

군복이라는 것이 평범한 대중들을 얼마나 냉정하고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이도록 만드는지, 또한 얼마나 그들에게 단일성과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몸에 걸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을 민간의 일상생활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도록 만드는 이 죽음의 제복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몸을 국가에 팔았다는 표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비록 처음에는 자발적인 계약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전제 때문에 그 계약자들이 덜 비참한 존재가 된다거나, 혹은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자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바보나 보통 사람이나 대등해지는 법이다.


 

길을 가던 순례자들은 이곳에 돌탑을 세웠다......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탑 위에 돌 하나를 더 얹어놓곤 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알려진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 중 누군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꿈을 꾼다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그렇다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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