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삼위일체’가 주도한 문명의 재구축은 홉스가 바랐던 최고주권의 《리바이어던》에 근접하면서도,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와 ‘환상의 짝꿍’을 이룬 자유주의(푸코가 말한 통치술로의 자유주의)를 지배적 이념으로 끌어올렸다. 부분적 진리에 불과한 진보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론이 보편적 진리가 됐고, 성장의 독점으로 발생한 불평등과 위험의 확대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졌다. 



이런 방식으로 ‘진보의 낙관론’에 절대적 권리를 부여한 ‘탐욕의 삼위일체’는 산업혁명의 발생지 영국을 거쳐 천혜의 조건을 갖춘 미국에 정착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을 건국이념으로 정립하면서 유일제국의 탄생을 알렸다. 풍요만 생각하면 되는 천혜의 땅에서 미국의 지배엘리트(WASP, 앵글로색슨계 미국인 프로테스탄트)은 국가를 기업화 했고, 기업과 개인의 이윤 추구 행위를 신의 영역에 올려놓음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다룬 1929년의 경제대공황은 ‘탐욕의 삼위일체’가 해체될 최대의 위기였지만 뉴딜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비를 넘긴 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같은 국지적 전쟁들과 세계적 차원의 파시즘적 개발을 통해 거뜬히 재기에 성공했다. 계산이 불가능한 천문학적인 비용과 수천만 명에 달하는 죽음, 회복불가능한 환경파괴의 대가로 부활한 ‘탐욕의 삼위일체’는 제조업의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린 노동 분업(포드자동차의 노동 분업이 분기점)을 전 세계적 차원으로 분산배치한 포스트포디즘을 단행하면서 전 지구적 시장구축을 위한 성장과 개발의 엔진을 본격적으로 가동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전성시대를 만들어낸 포스트포더니즘의 본질은 저임금 노동력을 착취하고 산업의 위해요소를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이전한 것으로, 식민지 팽창(제1차 세계화)에 이은 제2차 세계화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세계의 공장으로서 중국이 환경오염을 동반한 저임금노동의 천국으로 등장했지만, 매년 중국을 뒤덮고 있는 스모그가 한반도를 거쳐 미국까지 공습함으로써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성장의 대가는 위험의 확산이었고 노동착취에 따른 부의 불평등이었다.



1, 2차 오일쇼크와 미국의 강 달러 전략 때문에 국가부도 직전에 이른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무너지자, 자유시장 자본주의 진영에서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어리석은 선언들이 속출했다. 속빈강정이자 속물들의 경연장이었던 ‘제3의 길’은 무차별적인 성장 엔진의 출력 향상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뿐, 인류를 위한 제의 길은 찾지 못했다. 



석탄을 대체한 석유의 에너지혁명과 석유의 정제기술의 발전 및 플라스틱의 탄생으로 자본주의 전성시대는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전 세계적인 성장이 가속화됨에 따라 인류와 자연은 각종 위험에 노출되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다(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글로벌 위험사회》를 보라). 핵발전의 급속한 확대도 위험의 확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켜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할 처지까지 내몰렸다.  



인류를 부흥시킨 석유의 역사(에너지전쟁의 역사)는 자본주의 전성시대의 역사이자, 제국주의와 유일 제국이 전 세계를 착취하는 탐욕의 역사였다. 인류(특히 미국, 최근에는 중국이 가세)가 석유를 사용함에 있어 미래세대의 사용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염두에 두면서 속도 조절에 성공했다면, 지금 같은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에너지 혁명과 대규모 채굴은 언제나 파괴를 동반했고, 그 핵심에 '물보다 싼 석유'가 자리하고 있으며, 높은 이율로 개발비용을 제공한 거대 자본(특히 영미의 거대 금융업체)과 석유 확보를 위해 전쟁을 일삼은 군산복합체의 탐욕으로 얼룩졌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산업의 내부에서는 숙련된 남성 노동자의 퇴출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 빈자리들이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과 어린 청소년들로 대체되고 있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장려하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인류 역사상 비정규직 알바로 평생을 전전하는 세대가 탄생했다. 이는 뒤늦게 서구의 모델을 좇아가는 신흥국과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까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노예의 등장과 세습자본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지배적 산업의 형태도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에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가벼운 경제와 서비스 산업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 



고용의 질과 조건을 열악하게 만든 노동유연화와 직장을 구하기 위한 이동의 거리가 넓어지면서 가족과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국민국가의 독점적인 주권도 전 세계적인 시장권력으로 넘어가고 있다(노무현 전 대통령은 모두가 아는 이 추악한 비밀을 최고 지도자가 공식적으로 발설했다는 이유로 ‘탐욕의 삼위일체’에 빌붙어 사는 집단들의 융단폭격에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는 후반에 다루겠다). 



성장과 개발이 전 세계적인 규모와 파시즘적 속도로 이루어질수록 자원은 고갈되기 시작됐고, 자연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에 따라 대기의 질은 급속도로 나빠졌고, 화학비료의 대량사용에 따라 토지의 오염과 물의 산성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부정적 결과들이 치명적인 지구온난화와 광범위한 사막화, 대규모 개발이 초래한 환경오염에 따른 수질 악화(물 부족 사태의 핵심)로 집결되고 있다. 기상이변의 속출은 국가적 차원에서 대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부정적 세계화에 따라 기업과 국가간 경쟁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저임금의 고착화와 노동유연화에 따른 상시적 구조조정과 대량실업이 보편화됐다. 이 때문에 새로운 빈곤과 결핍에 시달리는 사회계급이 탄생했고, 부와 위험의 불평등한 분배가 기회의 불평등과 합쳐져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이익의 독점을 위해서는 단 한 발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탐욕의 삼위일체’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직전까지 지구라는 행성과 말하지 못하는 자연과 그저 죽어갈 뿐인 동식물과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의 조건까지 최악으로 내몰고 있다. 





가족과 사회의 몰락은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성 평등이란 미명 하에 경제적 불평등과 취업의 불안정을 동반하는 이혼이 증가일로에 있다. 대중매체와 손잡은 성산업의 발달은 상업적으로 포장되고 고무된 인스턴트 sex를 성해방으로 대체했고, 상시적이고 일방적인 피임만 번창시키는 부작용을 속출시켰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결혼이라는 개념처럼 거추장스럽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것이 됐다. 



인류라는 추상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을 동시대의 정치·경제·문화적 개념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비상은 자신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선정적인 타국의 사건들과,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경험들을 실시간으로 안방과 거실로 전달함으로써 스크린 상에 보이는 것과 자신의 현실 간의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양산해냈다. 인류를 소비지상주의에 매몰되고 순간적인 쾌락에 함몰되도록 만든 것은 매스미디어가 만든 최대의 업적이다.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의 등장은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였지만, 국가와 사회, 가족의 몰락과 해체에 가속도를 붙였다. ‘탐욕의 삼위일체’는 마이다스의 손이어서 그들의 손이 스쳐간 곳들은 모든 부를 뺏긴 채 하나같이 폐허의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공격 일변도의 남근과 근육질로 대표되던 남성의 권력은 임금이 줄어들고, 실업의 기간과 횟수가 늘어나면서 초라하게 찌들어졌고, 그만큼 자본과 초국적기업의 금고는 가득 채워졌다. 자궁으로 대표되는 여성의 권력은 경력단절과 양육권이라는 빈곤의 위험성에 무방비로 노출됐고, 그만큼 자본의 금고는 더욱더 채워졌다





이 모든 것이 서로의 성에 대한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진행됐는데, 남성은 노년에 대한 두려움과 sex파트너에 대한 비용증가와 근육질의 연성화로 말년의 외로움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어둠의 심연으로 떨어졌다. 여성은 성적 자기결정권이 강화되고, sex파트너의 숫자는 늘었지만 항시적인 피임과 낙태의 증가, 건강의 악화와 만성적인 스트레스(정반대도 있다)에 시달리게 됐다. 



남성 위주의 경제구조가 여전하기 때문에 저임금 노동과 경력 단절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확실하게 유전자의 반을 전달했다는 생물학적 판타지(자녀에게 투사된 슈퍼맨콤플렉스와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대표적)에 사로잡힌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과잉투자라는, 그래서 자본의 금고만 채워주는 집착과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사회는 대중매체와 인터넷에 의해 공적인 기능이 해체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드라마와 영화, 예능과 토크쇼, 리얼리티쇼, 스포츠경기 결과와 돈이 되는 모든 분야에서 성공한 대중화된 스타들의 자질구레한 일상과 스캔들에 빠져들었다. 각종 오락 프로와 리얼리티쇼의 득세는 연예인과 스타를 넘어 소시민의 사적인 일상까지 대화의 주제로 끌어들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이고 사회경제적인 공적 공간이 사적인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함으로써 지배엘리트와 피지배층의 분리(정치혐오와 무관심의 폭증)가 본격화됐다. 공적인 것들이 사적인 것들에 점령됨에 따라 공적 공간으로서의 정치적인 것들과 서민의 안정망으로서의 사회는 존재의 근거를 상실했다. 시민정신이란 존재할 수 없고 시민단체마저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어 민주주의마저 작동 불능의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전 지구적 시스템을 구축한 시장권력에 맞설 수 없는 국가(정부)는 주권의 행사를 국내로만 돌려 ‘탐욕의 삼위일체’가 남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만 전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자유와 진보(성장과 개발)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사회민주주의의 퇴조와 함께 복지의 축소가 뒤를 따랐다. 사회와 국가의 쇠퇴로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해체되고 자유의 공간마저 파고들어 기본적 권리마저 침식시켰다.



거의 모든 장벽들을 제거한 ‘탐욕의 삼위일체’의 폭주는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두려워했던 것들(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서 정치적 자유마저 박탈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전체주의적 성향과, 이기적인 성향의 강화에 따른 공적 이슈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을 현실화시켰으며, 유일제국 미국의 몰락과 유럽의 경제위기, 식민지 경험이 있거나 ‘자원의 저주’를 겪고 있는 나라에서 항시적 내전상태가 고착되고 있다. 



이밖에도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동반하는 항시적인 국지전과 ‘탐욕의 삼위일체’를 비난하면서도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테러리즘의 무한 확장(미국이 주도하고 있다)이 거대한 폭력시장을 양산하고 있다. 집단과 집단, 집단과 개인, 개인과 개인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어디서도 안심할 수 없는 공포가 유동하는 세상이 도래했고, 부의 불평등과 위험의 불평등은 교차하거나 중첩됐고, 그에 따른 비대칭적 종말(빈국과 빈곤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이 전 지구적 경향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세상은 구글 회장 슈미트가 ‘수없이 많은 인공위성이 하늘을 날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광기 어린 선언처럼, 개인의 사생활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절대 권력자 빅브라더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으며(특히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유리감옥》을 보라),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예언한 쇼비즈니스 세상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일상화됐다(특히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를 보라). 



모든 파국의 징후들과 상시적인 내전상태, 무차별적인 자살 테러들이 ‘오늘의 뉴스’를 점령하고, 모든 것을 오락화하는 공적 공간의 사적화가 강화됨에 따라 정치의 실종과 사회의 몰락이 동시에 일어났다. 저임금 비정규·파견·임시직과 장기 실업이 일반화되고, 승자독식과 성공지상주의가 당연시되고, 실패의 책임에 이어 위험과 공포의 재분배가 개인화된 세상에서 ‘탐욕의 삼위일체’는 1%에 의한 99%의 배제와 소외를 만연시키고 있다. 



슈퍼클래스로 불리는 1% 내에서도 하위 0.9%는 ‘다음번 별도의 통고가 있을 때까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 수 있다. 이 상태로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계속된다면 인류의 부는 0.1%의 수중에 집중될 수밖에 없고, 나머지 99.99%는 소득과 자산의 차이에 따른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삶은 퇴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2.18 07:29 신고

    대처와 레이건... 무슨 이즘인가를 붙여 세상을 뒤집어 놨지요.
    참 사악한 친구들입니다. 기득권자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추악한 자본주의의 생얼입니다.

    • 늙은도령 2015.02.18 16:33 신고

      60년대부터 준비해 70년대에 미 재무부와 양국의 금융업체를 지배하게 되면서 80년대에 이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상위 1%를 위한 세상이 됐습니다.

  2. 아유 정말 ~~ 힘든 분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잘보고갑니다

    • 늙은도령 2015.02.18 16:34 신고

      갈수록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부의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으면 폭동도 가능한 시점으로 가고 있습니다.

  3. 꼬장닷컴 2015.02.18 09:32 신고

    도령님..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리구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십시요.
    이제 구정 지나고 뵙도록 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2.18 16:34 신고

      네, 님도 건강하시고 설 연휴 잘 보내십시오.
      좋은 세상을 기대해 보면서요.

  4. 2015.02.18 10:47

    비밀댓글입니다

  5. *저녁노을* 2015.02.19 04:44 신고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 늙은도령 2015.02.19 21:40 신고

      님도 즐거운 명절 되십시오.
      저는 3월 초에 이사가는 것 때문에 준비를 하느라...

  6. 바람 언덕 2015.02.19 11:42 신고

    본문의 내용과는 다른 댓글입니다만...
    새해 인사드리러 왔어요.
    건강하시고, 더욱 빛나는 글들로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더두말고 덜두말고 딱 지금처럼만...
    건강과 글...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시는 한 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

    • 늙은도령 2015.02.19 21:49 신고

      노력해야죠.
      잘 되겠지요.
      건강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가끔은 뜻대로 되지 않아서.
      즐겁게 글을 쓰려고 노력 중이에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다 보면 건강도 좋아지니까.

  7. 공수래공수거 2015.02.20 14:14 신고

    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아무쪼록 건강하신 한해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2.21 00:04 신고

      건강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바로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아무튼 조심하면서 설 연휴, 체력을 비축 중입니다.
      3월 초에 이사 가야 하기 때문에....

  8. 2015.02.21 03:25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2.21 00:12 신고

      아, 그게 영문 중에 님의 아이디와 비슷한 일베들이 있어 차단했는데 디스토리가 비슷한 아이디는 동시에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프로그램들이 보통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해당 아이디와 비슷한 아이디를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디스토리의 차단 프로그램도 그런 것 같습니다.

      헌데 다음 메인페이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저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못 찾았습니다.

  9. 2015.02.21 04:03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2.21 04:28 신고

      답장 보냈습니다.
      늘 관심과 격려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글 중 일부를 여러 매체(미디어오늘 등)에서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인터넷매체의 편집장은 제 글을 자신의 글인양 여러 편 올려 잘렸답니다.
      이러다가 정말 유명해질까 걱정입니다.



박근혜 정부 2년 동안 너무나 많은 참사와 대란들이 넘쳐나 국민들은 이런 수준의 비정상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 우리는 내일은 어떤 거대한 비정상의 돌출이 있을까, 단기적 관음증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것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것이 대란의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에는 둔감해졌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MBC 경영진에 의한 권성민 PD의 해고입니다. 권성민이라는 젊은 PD 한 명의 해고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하겠지만, 최소한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첫 번째는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특히 방송)의 영향력이 행정‧입법‧사법부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각종 보도자료부터 대형 사고나 사건처럼 보도할 것들이 하루에도 수만~수십만 건이 발생하는 현대사회의 특성상 방송사가 ‘오늘의 뉴스’로 무엇을 선정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주요 의제가 선정됩니다.



그들이 어떤 관점과 시각에서 ‘오늘의 뉴스’를 선정하는지 모르는 시청자들은 그들이 선정한 ‘오늘의 뉴스’에 따라 세상을 보게 됩니다. 특히 TV라는 매체가 광고와 협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상류 지향적이고, 시청률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오락성(이병헌, 클라라, 김군 IS가입 논란처럼)을 띤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현대사회의 공적공간이 방송사가 선정한 ‘오늘의 뉴스’로 채워지는데, 방송사가 ‘권성민 해고’를 보도하지 않는 한 그것에 담긴 시대적 중요성은 (고3일베의 폭발물테러와 세월호 특위 무력화처럼) 사장되고 맙니다. 일부 인터넷언론과 포털(아고라)에서 ‘권성민 해고’를 보도하거나 오늘의 이슈로 정한다 해도 방송사의 보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인터넷언론 구독자가 수백만 명에 이르거나 미르네르바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슈퍼블로거라면 모를까, ‘권성민 해고’에 담겨 있는 시대적 중요성은 공적 토론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개인 차원의 문제로 격하됩니다. 이는 권력과 자본에 순치된 방송사가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합니다.



대한민국 방송생태계가 무너져 내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반동적 폭력에 해당하는 이명박의 불법적인 방송장악에서 시작된 방송생태계(언론생태계 차원으로 오라 가도 마찬가지다)의 몰락은 대한민국이 비정상이 정상을 대치하는 나라로 만들었고, 박근혜 정부가 2년 동안 대한민국을 말아먹을 수 있었던 근원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 문제에서 시작된 이런 비정상화는 두 번째 문제로 연결됩니다. 특히 두 번째 문제는 서민과 미래세대에게 적용되는 노동유연화, 즉 해고가 쉬워지고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장그래 방지법(=장그래 양산법)’이 언론사이자 방송사인 MBC(이는 타 방송사로 확대될 수 있는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로 확대된 것을 말하기 때문에 더욱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세월호 참사에 보도에서 온갖 오보를 양산하고, 보도의 편향성 때문에 참사 수준으로 일컬어지는 MBC 뉴스를 구성원의 한 명으로써 국민에게 사죄한 것을 이유로 해고한 것이 ‘권성민 해고’의 핵심입니다. 그것도 권성민은 보도부분이 아닌 예능국 PD였다는 점에서 경영진의 해고는 무차별적인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합니다.



권력과 자본에 철저히 종속된 MBC 경영진들의 ‘권성민 해고’는 세월호 참사 오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는 최악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인 노동유연화(=경영진의 해고자유화)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방송사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MBC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보도부문 PD나 기자들이 시설관리 같은 비제작부서로 발령(자존심이 상한 직원이 스스로 퇴사하도록 만드는 고의적 좌천)나고, 엠병신이란 치욕적인 얘기를 들어가면서도 MBC에 남아 있는 것은, 끝까지 해고의 칼날과 맞서며 결전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능국 PD였던 ‘권성민 해고’에는 독립성과 공정성이 상실된 방송생태계의 붕괴가 자리하고 있으며,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어느 분야보다 보호하고 지켜야 할 방송사가 경영진의 입맛대로 해고를 남발할 수 있는 정치적 노동유연화가 숨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지키고 강자를 감시해야 할 방송사(지상파는 언론 기능이 우선한다)가 정반대로 간 것이 '권성민 해고'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권성민 해고’는 MBC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사회적 약자인 미생의 문제이고, 권력과 자본의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하는 방송의 문제이며, 노조와의 협의와 공존을 거부하는 슈퍼갑질의 문제이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과정인 정치의 역할을 부정하는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P.S. 성장을 통해 낙수효과가 작동하게 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두 가지 형태로 모든 자유의 원천인 사회경제적 평등을 달성합니다. 하나는 모든 소득에 누진적 과세를 하는 조세정의이고, 나머지는 보편적 복지와 공적부조를 통해 면세점 이상의 소득을 보장하는 부의 재분배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노지 2015.02.03 07:29 신고

    참, 한국의 이런 모습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네요.

    • 늙은도령 2015.02.03 07:47 신고

      그렇죠. 정말 이런 현상이 갈수록 강화되면 경영진이 원하는 내용만 보도됩니다.
      뉴를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기술을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국민은 무방비입니다.
      정말 걱정입니다.

  2. 꼬장닷컴 2015.02.03 09:18 신고

    맞습니다.
    그 방관이 안타깝네요.
    결국 우리 모두의 일인데 말입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02.03 09:24 신고

    이거 해고 무효소송을 내던지 투쟁해야 합니다
    다른 PD들은 뭐하는지 모르겠네요..

    서명운동이라도 해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2.03 16:09 신고

      네, 청원이 진행 중입니다.
      반드시 경영진의 횡포를 저지해야 합니다.



필자는 한 동안 경제 관련 글을 쓰지 않았다. 아무리 글을 써도 달라질 것이 없고, 더 나빠질 것이 없기 때문에 경제 관련 글은 쓰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 선후배들로부터 듣는 현장의 얘기들이 하도 암울해서 피케티 교수와 관련된 내용 중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만 몇 차례 다루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체제이던 세계 경제는 몰락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정치가 부의 재분배를 포기한 상태에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세계 경제는 살아날 수 없다. 소비자들의 지갑이 갈수록 얇아지고,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지지 않고, 세습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는데 무슨 수로 시장을 넓힐 수 있겠는가?



석유를 대체할 미래의 먹거리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처방을 들고 나와도 경제가 나아질 방법은 없다. 1%가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남아있지만, 99%의 소비여력이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불평등만 극대화되며 경제 규모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거인들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난쟁이들이 당할 방법이란 없다. 



경제 용어나 이론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원래 경제학이라는 것이 통계에 대한 주석에 불과한데, 현실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현재의 경제학은 사기를 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학문으로 전락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나 윌킨슨의 《평등이 답이다》가 상당한 권위를 갖는 것은 방대한 통계와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주석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도가 어떠했던 간에 스미스와 마르크스와 케인즈까지 포함해 모든 경제학자들은 인류의 적이었다. 그들의 단견과 오류 때문에 국가와 인간의 삶을 담당하는 정치가 무력화됐고, 불평등이 극대화돼 인류의 삶은 피폐해졌다. 근대이성의 총화인 계몽에 빌붙어 세계를 지배하는 위치에 오른 경제학이, 과학기술을 앞세워 전 지구적 시장을 구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를 위해 신자유주의라는 통치술이 필요했고, 작금에 이르렀다. 더 이상의 혁명(프랑스혁명의 동인과 미국혁명의 결과를 아우를 수 있는)이 불가능해지고, 민주주의마저 고사 직전에 이른 것도 시장경제 안에 모든 것을 몰아넣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술 때문이니 그 출발이 현실과 동떨어진 경제학의 세속화에서 출발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이 경제적으로 평가됨에 따라, 99%의 좌절과 절망이 이제는 일상화됐다. 매스미디어와 정보통신기술의 호위를 받으며, 군사력과 공권력을 앞세운 1%의 일방통행에 99%는 최소한의 공간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하다. 평등은 바라지도 않고, 신분상승의 꿈도 접었으며, 그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떠돌이 생활이 일상화됐다.





정부의 사이버 사찰과 검열 때문에 대규모 망명을 떠났거나, 준비 중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갈수록 줄어드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안전한 땅을 찾아 거처를 옮겼다. 야당을 믿을 수 없기에 정치적 저항을 하기보다 디지털 유목민의 삶은 선택한다.



패배에 익숙해진 사람들. 체념이 빠른 사람들. 순간을 사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 그래서 최소한의 돈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큰 것을 바라지도 않고 대박을 바리지도 않는다. 습관적으로 로또를 사는 사람들도 일주일을 버티기 위해 그만큼의 손실을 감수할 뿐이다.



현실과 다른 학문을 배운다는 것도 고통이다. 작은 단위의 모임들이 늘어나며 최소한의 소비를 기반으로 살아갈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정부는 더 이상 부의 재분배와 일자리 창출에 목을 매지 않는다. 가난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들이 늘어나면 복지에 대한 요구도 줄어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삼포세대는 잉여를 넘어 방황하는 개인이 되어 폐품처리되기 일쑤다. 1인가구와 독거노인들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뿌리 없는 삶이 자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방법도 없다. 지금껏 인류를 끌고 왔던 수없이 많은 것들이 폐품처리장으로 보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공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서 정부와 사회는 이런 추세를 되돌리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인류는 두 개의 군으로 분류된다. 1%의 황금의 왕국과 99%의 척박한 대지. 가난한 사람들은 삶의 편리함을 많이 포기해야겠지만, 하고자 하는 일들이 줄어들어 특별히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최소의 욕망만 추구하며 작은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유만은 지키고 싶어 어제까지의 삶을 포기한다.



욕심이 없는 인간은 삶이 곤궁해도 마음은 편하다. 내일을 위해 어제의 만족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오늘의 삶을 살기 위해 다시 척박한 대지로 돌아가고 있다.  


                                                                                                         ㅡ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10.12 22:12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특정 분야만 경제가 조금씩 성장할 듯합니다. 허나 그 열매도 낙수효과는 미미할 듯합니다.
    돈을 벌기전까지는 찍소리도 못하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 늙은도령 2014.10.12 22:23 신고

      갈수록 힘들어질 것입니다.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먹거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은 갈 때까지 가보자는 기류가 강한 것 같습니다.

  2. 소피스트 지니 2014.10.12 22:59 신고

    좋은 말씀입니다. 이젠 분배 없는 성장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99%삶이 완전히 망가져야 1%가 자신의 몫을 나눠줄런지 모르겠네요.
    99%가 가진 힘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너무 일찍 무기력해지진 않았나 반성해봅니다.

    • 늙은도령 2014.10.12 23:22 신고

      그것이 1%가 원하는 것이지요.
      그저 소비하다 폐품처리되는 것이면 족하지요.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힘은 1%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그들은 국가라는 영토 안에서 체제의 도움을 받아 시간만 끌면 어떤 사건도 해결됩니다.
      혁명이 불가능한 세상에선 더 나은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도 불가능합니다.

  3. 태봉 2014.10.12 23:24

    늙은도령님의 글을 읽으니 자꾸 암울한 미래를 그린 영화들이 오보랩됩니다
    어휴 어쩌다 이렇게 되버렸는지...

    • 늙은도령 2014.10.12 23:51 신고

      저도 희망적인 글을 써보려 했지만, 작금의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네요.
      지금은 정말 종말론적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1%들도 갈 때까지 가보자는 투고......

  4. 공수래공수거 2014.10.13 10:03 신고

    저는 낙수 보다는 분수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 늙은도령 2014.10.14 02:53 신고

      원래 경제학은 분수효과로 움직이는 것이었는데, 70년대 이후의 경제학자들이 그들만의 경제학을 하면서 낙수효과 같은 것들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존 롤스 같은 철학자들을 통해서요.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세상을 너무 많이 망쳐났어요.
      그 뒤에는 탐욕스런 부자들이 있지만....

  5. 덕산 2014.10.13 20:35

    핵융합의 기술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고 삽니다. 이기술만 상용화된다면 인공태양을 만들어 내어 무한한 에너지원을 생성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다음 먹거리가 나오더라도 여전과 같은 대규모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소수들만 혜택을 누릴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늙은도령 2014.10.14 02:57 신고

      핵융합은 최후의 에너지원이 되겠지만 지금의 기술로는 인류의 공멸을 불러올 수 있어서 대단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핵융합은 우주에서 가장 강한 힘인 강한 핵력에 버금가는 것이어서 자칫 잘못하다간 시공간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지구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블랙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공학적으로 핵융합을 관리가능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인간의 핵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기가 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6. 덕산 2014.10.14 09:09

    늙은 도령님 kstar(한국형혁융합연구로)가 iter프로젝트(국제열핵융합실험로)에도 참가하고 있고 2035년에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 핵심이 되는 전원발생장치 기술(가속기, 플라즈마 등등)은 우리나라가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 카다라쉬 지역에 국제핵융합실험로를 건설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미국, 일본, EU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까지도 본격적인 핵융합에너지 개발 경쟁에 참여하여 수소경제시대를 준비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 늙은도령 2014.10.15 01:24 신고

      수소경제는 대단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소만큼 이용하기 쉽고 많은 것도 없으니까요.
      헌데 수소경제는 전자가 하나이고, 모든 핵폭탄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의 위험이 따릅니다.
      수소경제의 저자가 말했듯이 수소경제는 미래의 산업 중 하나입니다.
      헌데 실제 대기업에 가보면 수소경제에 대한 엄청난 연구를 하다 중단했습니다.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공학적으로 한참은 더 발전한 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 동안 수소를 이용한 여러 가지 제품들이 나왔지만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또한 수소 경제는 테러에 전용될 수 있다는 위험이 너무 큽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수소 경제에 집중하는 것은 더욱 더 위험하고요.
      수소 경제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존 업체의 반발도 있지만 최고 엔지니어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수소경제에 부정적입니다.
      저도 작년에 들은 얘기라 1년 사이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조금 기다려도 될 듯싶습니다.

  7. 울면서.. 웃네요. ^,.ㅠ 2014.10.14 14:16

    이젠 뭐..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그 수순(?)에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단 생각.
    애초에 희망따윈 없었지만, 그래도.. 그나마 작은 노력(^^;;)을 계속 해야되지않나 싶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바를 해왔습니다만.. ㅎㅎ
    쩝...
    이제는 이런 생각만 듭니다.
    개인적으로 뭔갈 기대(?)하며 생각해오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거기서만이라도 소기의 성과를.. 그 결과를 제 살아생전서 볼 수 있기만을... ^^;;;

    • 늙은도령 2014.10.15 01:29 신고

      정말로 민주주의가 중요합니다.
      민주주의가 기업 부분에도 도입되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다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기업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헌데 우리나라는 기업문화를 바꾸려면 관피아부터 없애야 합니다.
      이 놈들이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어요.
      이들을 정리해야 기업들도 비자금을 만들지 않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는 관피아들이 문제입니다.
      정치와 연동된 이들이 중간에서 너무 나쁜 것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부는 기업에게 공정거래를 하도록 강제하고 세금을 최대한 거두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업이 바라는 것도 사실은 그런 것들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는 관피아를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쫓아가는 현대성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살펴봐야 할 것이 두 개 더 남아 있다. 그것은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확대재상산하는 것에서부터, 기득권 위주의 상위정치에서 배제된 네티즌들의 정치의 장인 인터넷과, 그 폭발적 파급력이 빛의 속도를 연상시키는 SNS의 등장이다. 최근에 활성화된 개인 방송과 팟캐스트까지 더하면 현대성의 핵심으로 등장한 즉시성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와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통해 완전하지 않은 과학기술의 사용에 따른 각종 위험들의 증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무차별적인 개발의 부작용, 산업혁명 이후 닥치는 대로 이루어진 천연자원의 착취에 따른 환경 파괴, 견고하게 결합된 무거운 경제에서 액체처럼 유동하는 가벼운 경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확실성의 증가 등을 다루면서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매스미디어의 변천에 관해 다루었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현대사회의 위험성이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경고하고, 견고했던 체제들이 무너져내리면서 사회의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었던 이들은, 닐 포스트만처럼 매스미디어의 테크놀로지에 천착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터넷에서 트위터까지 상시적인 위험에 노출된 삶과 불확실성에서 도피하기 위한 즉시성이 만들어낸 비합리적 선택의 증가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비합리적 선택과 합리적 선택과의 차이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로 나뉜다). 



이들은 인류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경제에 집중하는 동안, 체제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정치와 철학, 문화와 교육 등에서 벌어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퇴행의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보다 세밀하게 분할해서 점령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앞에서 다루었듯 텔레비전을 이루는 테크놀로지는 폭력성과 선정성과 상업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이와 정반대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 정보통신기술도 이런 방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텔레비전이 독점했던 메시지를 시공간적으로 분할한 것에서 기인한다. 



철저하게 '1대 다'의 소통방식을 취했던 텔레비전에 비해, '1대 1'의 소통을 내세웠던 인터넷과 SNS는 넘쳐나는 정보와 익명성으로 인해 민주적인 매체에서 무정부적이고 카오스적인 매체로 변질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자율정화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이어서,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작동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질적 차이가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필터링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정보와 익명성의 바다에서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현대성은 루소와 칸트와 홉스가 그렇게도 우려했던 아노미적 무한경쟁과 무정부적 자유방임의 투쟁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인류가 끝없는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정착함에 따라 문명이라는 것이 시작됐고, 근대이성이 탄생하기까지 발전의 뱡향은 예측가능한 사회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합리성의 극대화였다. 그것이 신의 섭리에서 나왔건, 우주의 법칙에서 유래했건, 자연의 원리에서 끌어왔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에서 출발했건, 장기적인 계획과 질서 잡힌 확실성의 원천으로써의 합리성의 추구는 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에 일치한 불변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보편화에 이어, 즉시성과 유목성 및 선정성과 상업성을 특징으로 하는 정보통신기술과 모바일기기의 발전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인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폭력적인 현대성(한정된 자원과 일자리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면서 발생한다)이 창출한 온갖 허상들을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낙관적이고 변증법적인 신화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갈수록 첨담화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구원과 해방이 실현된 유토피아로 향해 간다면, 그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늦추는 방법이 최상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의 발전이 영생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래서 지금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무수히 작은 단위로 쪼개놓음으로써, 영원한 삶도 가능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 패러다임을 형성할 수도 있다, 토끼가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토끼가 간격을 좁힐 때 거북이도 최소한이라도 앞으로 나갔기에 토끼가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궤변은 소피스트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비해 과학과 기술은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발전했이지만, 소피스트의 궤변처럼 시간을 잘게 쪼개놓으면 영원한 삶도 가능하다는 관념은, 멈추지 않는 파동으로 영원히 날아갈 수 있는 빛으로 대변되는 전기전자기술의 과학적 원리와 일치한다. 이런 궤변과 과학의 이종교합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지 못하는ㅡ구태여 구별하려 하지 않는ㅡ아노미적 현상을 일반화한다. 끊임없이 시공간을 옮겨다니는 새로운 유목인의 등장은 이런 이종교합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날아가는 화살은 멈춰있다'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를 연상시키는 2차원적 관념이 3차원의 현실을 뒤집어버린 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내포돼 있는 정신적 퇴행을 드러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된 세상이 거꾸로 된 세상이라고 말했는데, 작금의 세상은 즉각적인 만족을 통해 영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성에 의해 다시 한 번 뒤집혀버린 것이다. 이런 2중의 변증법에 의해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질서 잡힌 체제를 추구했던 근대이성은 현대성으로 넘어오자마자 끊임없이 유동하는 특성을 지니게 됐고, 그에 따라 삶의 불확실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제 장기적인 계획이 담긴 청사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단계로 접어들었고, 현실공간을 빠르게 넘나드는 가벼움을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굳어졌다. 신자유주의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만 파편화시킨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충돌로 인해 높은 열(갈등)이 발생시켰으며, 이것으로 인해 각각의 파편들이 녹아내려 세상이 액체상태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체제와 제도는 물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상태로 접어들었고,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위험과 두려움이 공포를 생성하며,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화된 근대'의 출현과 '유동하는 공포'의 만연이란 이런 상태를 말한다. 이는 분명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초위험사회'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현대성의 모토는 이렇게 출현했고, 잘게 쫗개놓은 시간의 관념에 맞는 삶을 영위하려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만족을 미루지 않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헌데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오늘의 사치품이 내일의 필수품'이 될 수 있도록 만들거나, '내일에는 내일의 신상품이 출시'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잘게 쫗개놓은 시간들을 만족시켜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 오늘에는 사지 못한 사치품이 내일에는 가격이 내려 필수품이 돼거나, 오늘 채우지 못한 만족을 내일의 신제품으로 채울 수 있어야 싼 가격에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라도 구차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소비지상주의는 이렇게해서 일반화된다.  



결국 자본주의가 사회와 체제 속의 시민들을 개인들로 파편화시키는 과정에서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됨에 따라, 이런 즉시성의 추구는 정신적 차원에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신제품들을 쉴새없이 광고하는 텔레비전과, 매일같이 지우고 덮혀지고 새로 업그레이드 되는 인터넷과 SNS가 최상의 매체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고, 개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적 지위로 격상했다. 



원래부터 다양한 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시간을 잘게 쪼개듯, 자아를 여러 개로 쪼개 각종 사이트와 네트워크를 넘나들며 즉각적인 욕망과 쾌락을 탐닉하던 흔적들을 곳곳에 남겨놓게 됐고, 이것들은 쌓이고 축적돼 매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개인의 취향을 꿰뚫어볼 수 있는 빅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광고주들의 꿈이었던 맞춤형 광고가 가능하게 됐고, 끝없는 매출 창출과 이익의 추구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졌다.  



이렇게 소비지상주의 시대가 우리의 눈앞에 도래했다. 끊임없이 대형마트와 쇼핑몰(홈쇼핑 포함)을 채워주는 신제품과 매순간마다 업그레이드 되는 정보와 지식들은 즉각적인 만족을 일상화시켰고, 먼저 쓰고 나중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의 발전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빚의 굴레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충분히 예측가능한 결과를 회피하면서, 당장의 만족에 매달리는 이런 비합리적 선택들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합리적인 선택으로 전도되고, 머리결마저 소중한 존재로 포장됨에 따라 미래를 위해 만족을 늦추는 것은 자신을 저버리는 배반의 행위가 됐다. 





문제는 이런 다양한 매체들을 운영하는 극소수의 전 지구적 지배 그룹으로 즉각적인 만족의 대가들이 흘러들어가는 데에 있다. 천문학적인 빚에 대한 이자는 그 자체만으로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지배 그룹의 영향력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SNS를 중계도구로 활용해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이고, 돈이 되는 모든 분야를 독식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미디어가 지배 세력의 이익에 협조하고 봉사하는 시대에 접어듬에 따라, 미디어가 전해주는 콘텐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의 도구인 미디어 자체가 중요해졌다.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광고와 협찬(과 미디어에 길들여진 개인들의 시청료)로 돌아가는 이들의 힘은 국가의 주권을 구성하고 있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은 제4부에서 이들 삼부를 좌지우지 하는 제1부의 역할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본질적으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천상의 궁합을 가진 것이 미디어의 본질이어서 폭력적인 현대성의 폐해들은 몇 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동하는 공포’와 공간을 압축해 지배의 범위를 넓히는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실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떨어졌음은 이제 상식의 영역에 자리했다.  



이런 극단의 불평등으로 귀착되는 폐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ㅡ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ㅡ는 정말로 여러 번 있었다. 1929년에 발발한 경제대공황이 그 중에 하나였고, 2008년의 금융 대붕괴와 2011년부터 구조화된 유럽의 경제위기가 최근의 것이었다. 이렇게 현대성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인류ㅡ정확히는 전 지구적 엘리트와 국민국가 단위의 지역적 엘리트와 국제기구를 지배하고 있는 엘리트들ㅡ는 근대이성의 질주가 초래한 현대성의 문제점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아예 방향을 돌려 사회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관용의 정신을 실현한 복지국가의 잔재마저 일소시키는 퇴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중심에는 욕망과 쾌락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행태를 끊임없이 부추긴 텔레비전과 인터넷, SNS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전부터 특정 세력에 의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회주의의 몰락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세를 불린 급진적 자유주의자와 좌파에서 전향한 신보수주의자들이 자본과 권력의 주변부에서 핵심으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통치이론(신자유주의)과 가치판단의 기준에 따라, 근대이성이 창출한 현대성은 사회적인 도덕규범에서 완전히 이탈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거대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은 빛의 속도로 국경을 넘나들며, 천연자원을 바닥까지 착취하고, 무한대의 신용을 창출해 전 세계 부의 90%을 독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존과 상생이 불가능한 이런 극도의 불평등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은 것이 아님에도, 전 지구적 지배 그룹은 부정적 세계화의 병폐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그날까지, 갈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가보자며 신자유주의의 엔진 출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다. 자기조정 시장에서 발전한 자유시장과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로 등장한 자본주의, 새로운 통치술의 형태로 등장한 자유주의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형성된 탐욕의 기관차가 빛의 속도까지 출력을 높이는 동안 지구와 인류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폭발 직전의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 30년의 신자유주의적 폭주는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구의 반격에 직면했지만,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은 폭주하는 기관차의 속도조절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그들도 제어할 수 없는 속도에 이른 기관차를 멈출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 속도를 감당해낼 브레이크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전후한 지난 250년 동안 인류는 지구 역사상 5번째의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성찰을 가로막아 즉각적인 만족의 포로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게네시스 2014.08.14 17:11

    기술은 발전하지만 우리가 중요해야할 인문학적인 분야나 윤리는 점점 사라져 가네요ㅠㅠ 그게좀 슬픕니다

    • 늙은도령 2014.08.14 19:55 신고

      네, 돈이 되는 사람들에게 과학과 기술 발전으로부터 얻는 이익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