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정반대에 서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크게 세 가지 쟁점으로 구분되곤 합니다. 민주주의를 사회가 추구해야 할 원리나 목표라는 보편적 이상으로 접근할 경우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냐'가 핵심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를 제도나 절차로 이해할 경우 '민주화 과정과 민주주의 달성의 방법'이 핵심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를 주체의 입장에서 접근하면, '누구에 의한 민주주의와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냐'가 핵심 쟁점이 됩니다(박호성 외 《한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와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을 참조). 





이 세 가지는 민주주의의 발전단계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역사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일정 부분 혼합된 채 일어나며 최근에 들어서는 시민주권 행동주의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은 물론, 최순실 청문회의 최고수훈자인 주겔, 일본과 한국 정부에 맞서 부산동구청의 소녀상 설치를 관철시킨 등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 시민주권 행동주의는 '민주주의를 주체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면서도 '일상에서의 정치행동주의의 실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 반민운동의 대부로 오바마에게 큰 영향을 준 시민사회 조직론과 행동론의 대가였던 사울 D.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거쳐, 러셀 J. 달톤의 《시민정치론: 선진 산업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정당》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졌고, 한국에서는 조기숙과 안병진, 안수찬, 김만복, 주성수, 정상호 등이 연구하고 있는 디지털시대의 민주주의입니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인터넷, 팟캐스트, 쇼설 네트워크, 자아 실현, 자기 노출, 유연한 가치, 자유주의적 감수성(개인주의), 정책결정의 신속성, 온오프를 연동한 플랫폼정당, 정당정치의 모든 단계에서 시민과 지지자의 참여, 일상에서의 민주주의, 플래시몹과 다양한 방식의 집회 같은 축제로서의 혁명(재미 이데올로기), 성공지상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탈물질주의,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물의 권리를 중시하는 생태민주주의, 사회적 평등, 성적 평등, 소수자의 인권 보장, 핵에너지 반대 등을 표방하는 디지털 청춘과 미래세대들의 적극적 정치참여와 시민주권의 실현입니다. 



이들은 소수 엘리트 위주로 편성되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전위 같은 엘리트 위주의 정치에 부정적입니다. 이는 이대생의 투쟁과 소녀상 지키기 등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의해 동원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이슈와 인물에 따라 반응하는 경향이 강한 이들은 거창한 혁명을 말하지는 않지만, 반칙과 특권, 불평등과 차별에 항거해 정의와 상식, 보편타당함을 실현하려 하며, 그렇게 일상에서의 시민주권 행사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며 즐거운 투쟁을 이어갑니다. 세월호유족과 함께 하고, 촛불집회에 나오는 시민들의 대부분이 자발적 참여자인 것도 시민주권 행동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민주권 행동주의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에 비해,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이나 권리당원을 중시하는 조직으로서의 정당정치와 계급적 대립에 의한 대중정당을 선호하는 브루스 에커만, 최장집, 박찬표, 로버트 달, 아담 쉐보르스키 등이 반대편에 서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공화국의 위기》에서 일원론적 민주주의의 한계와 타락을 성찰하고 고발한 이후에 논의를 이어간 달과 쉐보르스키, 최장집 등은 이념과 계급적 이해(물질주의)를 중시하고 시민적 항쟁의 요구를 제도권 정당에서 흡수하는 조직으로서의 정당을 중시합니다. 



이를 이원론적 민주주의(혁명의 시기와 평시를 구부하는 민주주의로, 혁며의 시기에는 거리에서 분출된 시민의 요구를 제도화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으며, 평시에는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는 정당이 정치를 주도한다. 혁명의 요구가 제도화되면 시민은 제자리로 돌아가 정치적 전망자 또는 수동적 지지자로 자리매김한다. TV가 발달했을 때의 청중민주의가 대표적이다)라 하는데, 효율적인 정당 운영을 위해 관료조직이 필수인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혼합형이라고 보면 적당할 것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모범적인 시민은 "적극적인 시민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적극적인 시민"이었습니다. 더 간략하게 말하면 엘리트 위주의 고전적 의미의 정당정치와 마키아벨리적 민주주의의 혼합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들이 있기에 시민주권 정치행동론이 새로운 주제로 등장할 수 있었고, 합의적 의사결정과 다수결원리를 중시하는 심의민주주의를 넘어 일상에서의 정치혁명을 창출하고, 즉각적으로 시민 이익과 공적 이익을 실현하는 시민주권 행동주의로 나아가는 디지털 시민정치의 서막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이대생의 투쟁과 시민과 함께 하는 세월호유족의 저항, 정부에 맞서 의사결정의 참여와 주도권을 관철 중인 성주군민과 김포시민 투쟁, 소녀상 지킴이와 국정교과서 반대모임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촛불혁명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시민주권 행동주의는 세계적으로 보면 19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반세계화 집회(일방적이고 나쁜 세계화에 대한 반대)와 2012년의 '월가를 점령하라', 오바마의 선전략이었던 '풀뿌리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대표적이며, 우리의 경우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시초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필자의 경우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시민주권 행동주의의 과도기로 분류합니다. 촛불소녀의 제안에서 시작된 광우병 촛불집회는 정당이 철저하게 배제됐고 시민단체의 주도 하에 대부분의 의제가 설정됐기 때문에 과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인원 1000만을 훌쩍 넘긴 현재의 촛불집회는, 시민이 명령하고 정당이 입법화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성숙기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민정치론을 연구하는 전 세계 정치학자들이 촛불혁명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촛불혁명의 하루하루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위대한 후발국으로 칭송받던 대한민국이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세계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는데, 지난 11월부터 시작된 촛불혁명이 이 모든 것을 바라잡는 것을 넘어 뛰어넘고 있습니다.  



단, 이 모든 논의는 '사회적 권리(사회성)의 구현'을 기본으로 그 위에 좌우를 구별하는 유럽적 의미에서 보면 진보적 자유주의와 중도우파적 사이에서의 논의에 해당합니다. 공산주의의 부활이나 반세계화 및 무정부적 자유주의까지 주장하는 바디우와 아감벤 등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상반된 이해와 극단적 대립을 다룬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등을 보면 이런 구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진보좌파는 우리로 치면 급진적 진보주의나 교조적 구좌파에 해당하기 때문에 시민주권 행동주의를 주시하고 있지만, 비폭력적 방식과 느린 행보에는 회의를 보내고 있습니다. 





필자가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실천했던 노통과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와 유시민, 김경수 등을 지지하는 이유가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이념적 스펙트럼 하에서입니다. 노통을 비판하는 자들의 수준이 형편없는 것도 이 때문이며, 그들에게서는 이원론적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촛불혁명의 시민주권 행동주의와 재미 이데올로기, 의사결정의 속도, 정치과정의 모든 곳에 시민이 개입하는 디지털 네트워크적 원내정당의 출현, 당원과 지지자가 정책결정의 모든 단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시민개입주의의 출현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소셜 정당화는 진보정당의 명판으로는 권력을 잡을 수 없음을 깨달은 구좌파 출신들(이를 테면 민주노총과 통진당, 손가혁 등의 대거 유입)이 당원으로 가입하는 역풍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당원의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면 모를까, 200만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면 이들에게 당권을 내줄 수 있습니다. 당원들 중에서 실제 투표에 참여하는 비율이 50% 전후에 머물고 일반시민의 경우에는 10%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10만 명 정도만 가입하면 지역 하나는 통째로 삼킬 수 있습니다.  



누구를 지지함에 있어 절대적 기준을 들이대고 교조적 폭력을 일삼는 이들은 시민주권 행동주의자들의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을 '친문패권주의(죽어도 문재인의 능력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한 채 비판의 칼날을 휘두릅니다.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이 문재인 전 대표에게 도움이 될지, 더민주의 정권교체에 도움이 될지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주권 행동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표현을 통해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행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았지만 더민주 후보들 사이에서의 날선 비난과 자기파괴적 공격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신분상승과 중산층의 꿈'이라는 정형화된 공식이 무너져내린 시점에서 태어난 이땅의 청춘들은, 안철수와 법륜스님 같은 멘토를 찾아가던 과도기를 거쳐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고 길을 만들어가는 창조적 행동주의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99%의 압도적인 절망에 굴하지 않고, 1%의 빌어먹을 희망에서도 비전과 행복을 찾아내는 순례자이자 실천가이고 개척자입니다. 진보적 가치(사회적 시장경제)와 자유주의적 감수성(개인주의, 공정으로써의 정의)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최초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무한대의 정보와 상호인정의 교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수평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디지털공간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기성새대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분해해 다시 조립할 수 없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꿈도 꾸지 못했던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 소녀상 지킴이, 촛불혁명(최초의 촛불집회를 소녀들이 제안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이런 시대적 변화에서 나온 정치행동주의이며, 경제적으로는 사회적 민주주의(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버니 샌더스류의 한국판 경제혁명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다 노무현 지지자는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발전하고 있습니다. 광화문광장을 지켜준 박원순 시장이 문재인 전 대표가 노무현의 참여정부를 재현하려 한다고 비판하지만, 필자 같은 친노와 문재인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좌절과 성공'을 초석으로 꾸준히 연구하고 발전해왔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기득권을 구축해 참여정부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발전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입니다. 친노(모든 친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는 그렇게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좌절을 경험할 것이라면 참여정부 5년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개헌을 소리 높게 외치는 전문가와 정치인, 기성세대들에게 '현대의 시민들은 지배적 엘리트에 도전하고, 이슈 및 정책범주들에 적극적으로 투표하고 자신이 뽑은 그들의 대표들에게 더욱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위기 상태에 있다는 일반적 속설과는 달리 그것은 제도적 위기지 시민들이 지닌 민주주의 정신의 위기는 아니다'라는 러셀 달톤의 말을 전합니다.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청춘들의 시민주권 행동주의는 제도적 위기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민주주의 정신은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무현 죽이기'에 이어 '문재인 죽이기'가 본격화된 현 시점에서 시민행동주의자들의 행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서둘러 쓴 글이고, 통계학적 의미를 지닐 만큼 많은 청춘들과 미래세대를 만나지 못한 관계로 글의 내용이 조금 어렵고 난해하다면 저의 부족함이고 자세히 풀어내지 못한 게으름이라 탓해 주십시오. 솔직히 민주화 세대로써 이땅의 청춘들과 미래세대를 쫓아가기에도 너무 벅차거든요, 배가 너무 나온 것에 비해 다리의 힘이 빠르게 줄어들어서. 게다가 다리도 짧답니다^^. 



#새누리가박근혜다 

#박근혜하야하라 

#바른정당도박근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7.01.12 08:31 신고

    7시간의 행적과 비교되는 노무현대통령의 김선일 피랍 시
    행동이 좀 더 알려졌으면 합니다
    정말 누구말대로 박근혜는 양아치입니다

    • 늙은도령 2017.01.12 08:36 신고

      그럼요, 이해찬이 공개한 것에서 보듯이 참여정부는 기록의 정부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시스템에 따라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2. 토마토 2017.01.12 09:46

    양아치 정부가 대놓고 국민을 우롱하고도 눈하나 꿈쩍안하니 어쩌면 좋습니까?
    차기 대통령은 우리가 지켜내야 합니다. 노무현대통령처럼 어이없이 보낼수 없으니까요.

    • 늙은도령 2017.01.12 18:07 신고

      네, 지켜야죠.
      지켜내는 것을 대통령에 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3. 참교육 2017.01.12 11:21 신고

    저도 그 기사를 보고 너무 실망했습니다.
    같은 정당에서 비판은 있을 수 있지만 인신모독이나 비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원순을 좋게 봤는데... 결국 자신의 수준을 드러내는 꼴이지요.

    • 늙은도령 2017.01.12 18:07 신고

      박원순의 지지율이 폭락했습니다.
      이제는 정치인이 말 한 마디 조심해야 합니다.
      박원순의 평생 가장 큰 실수를 했습니다.

  4. mangrove 2017.01.12 12:40

    아쉽습니다.

    그럴 분이 아니었는데 그랬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네요. 더우기 근거가 없는 비판이라니.... ㅜㅜ

  5. 문빠세요? 2017.01.12 20:53

    논조가 갑자기 이재명 까대기로 흘렀는데
    그 이유가 "그냥보수" ?
    그냥 웃지요
    어렵게 쓰고 비트는 것은 꼭 누굴 닮으셨네

    • 늙은도령 2017.01.12 22:00 신고

      개혁적 보수주의자는 이재명이 직접 말한 것인데요.
      한국에서 보수라면 할 것이 아니지요.
      자신을 진보라 하면 수구기득권이라는 말도 이재명이 직접 했는데요.
      이재명을 지지하다가 돌아선 것은 그가 최근에 보여준 행태가 하도 기가 차서 처음부터 다시 검증하는 것입니다.

  6. 2017.01.12 21:10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7.01.12 22:04 신고

      보수는 현재의 상황을 유지한 채 조금씩 수리하며 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개혁을 붙였으니 그 자체로 형용모순인 것이지요.
      개혁적 자유주의자는 가능합니다.
      개혁적 진보주의자도 가능합니다.
      최근에 들어 이재명의 발언을 들어보면 오락가락합니다.
      뉴딜에 대한 이해도 그렇구요.
      제가 보기에 아직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실수들이 속출하는 것 같습니다.

    • 늙은도령 2017.01.12 22:09 신고

      보수가 단기적으로는 불평등을 줄일 수 있지만 장기적 그럴 수 없음도 보수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재명은 전체적인 개혁을 얘기하며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뉴딜의 핵심은 조세정책과 인프라 구축 같은 재정확대인데, 앞은 최소화한 채 뒤만 얘기하니 모순이 생깁니다.
      기본소득을 만들겠다는 방식도 뉴딜에 어긋납니다.
      이재명은 전체적으로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며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러니 개혁적 보수주의자라는 발언을 스스로 하나 봅니다.

  7. 둘리토비 2017.01.13 00:45 신고

    헤게모니의 싸움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점점 이것은 극렬화 되었다가, 보다 선명한 주제를 가지고 점점 대권후보의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경쟁이 되겠죠.

    분명한 것은 촛불민심은 시민주권주의의 너무나 잘 닦여진 형태였고
    이제는 한 두명의 정치적 리더십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민주권으로서의 자체적 목소리와 행동이
    반드시 이 시대에 표현되야 한다는 당위성이 증명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한 두명의 이런 저런 발언과 행동에 일희일비 하는것보다
    더욱 큰 물결을 생각하며 더욱 깊게 지금의 현상을 바라보려 합니다~

    • 늙은도령 2017.01.13 03:05 신고

      경선에 들어가면 이런 일들은 당연히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면 도를 넘는 발언들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걸러지고 판단의 대상이 되니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이재명에 대한 저의 비판은 그것과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의 정체성과 인격적인 문제 같은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를 봤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알려야 한다고 생각햇습니다.

      개혁적 정치인과 선동가는 종이 한장 차이인데, 이재명은 지독한 자기방어기제 때문에 예상할 수 없는 사고를 칠 수 있는 전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를 지지하려면 이것까지 알고 지지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이재명 같았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정신상태였죠.
      이재명을 보면 그때의 제가 너무나도 똑같이 겹쳐집니다.

      이재명은 자신을 다스리고 경험을 늘릴 필요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충분한 사람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헤게모니는 잘못 흐르면 종이 한장의 차이를 훌쩍 넘어갑니다.
      그래서 걱정인 것이고요.

  8. 동우 2017.01.13 12:38

    포스트와는 거리가 있는 댓글이지만,
    사명이 사라진 다음( daum)이 예전의 모습으로 귀환은 불가능한 건지 ..)

    다음도 정권 차원에서는 블랙리스트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요.

    • 늙은도령 2017.01.13 14:26 신고

      정권이 바뀌어야 다음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 영광은 찾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 많은 또라이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가 저의 독자 때문에 다음에 글을 올리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올리지 않습니다.
      다음 아고라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영향력도 없습니다.
      경영진들이 없앨 수 없으니까 그냥 유지하는 정도로 보입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다음에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9. 2017.01.13 13:04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7.01.13 14:23 신고

      제가 말씀드리는 이념과 가치 지향이란 특히 경제에 관계됩니다.
      경제는 철저하게 진보적일 때 거시적 안목에서 불평등과 차별을 줄일 수 있습니다.
      환경도 그렇고, 다른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재명은 경제적으로도 보수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라도 함께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닙니다.
      문제는 정치의 8할이 경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념과 가치 지향을 중시하는 것이 모든 선택과 결정에서 누적적으로 차이를 보입니다.

      일반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것이 낡은 분류법 같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것이 불러오는 변화가 10년만 지나도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 민주주의 체제가 지배적이 되면서 진보와 보수로 재편됐지만 진보적 이념과 가치 지향을 가진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인류는 발전하고 평등해지고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수많은 학자들이 진보와 보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물론 보수화된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도 경제성장과 선진국 진입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은 마치 경제성장을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면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와 병폐들이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럴까? 정치철학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양당의 정치인들이 말하는 선진국들의 상황이 유토피아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기만 할까?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이 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를 보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수없이 많은 저자들이 인용하는 저서로서 출판된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연구결과다. 저자들이 현재의 선진국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는 이제 배를 채우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더 이상 최우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시민들은 어떻게 더 먹을까가 아닌, 어떻게 덜 먹을까를 고민하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뚱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동력이던 경제성장은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그 임무를 마쳤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평안과 행복이 증대되던 시대도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가 더 부유해질수록 스트레스와 우을증 및 각종 사회문제가 장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긴 역사의 여정에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대규모 개발 위주의 성장담론이 전 지구적 시장구축과 함께, 금융과 정보통신 및 지적재산권 중심의 '고용없는 성장'의 패러다임에 이르면서 선진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진보의 동력이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 곳곳에서 진행된 대규모 개발의 역설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인류는 물론 지구 생명체들은 여섯 번째 종말을 걱정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분석틀을 이용해 진행한 연구에서 경제성장에 따른 행복과 기대 수명이 1인당 GDP(국민소득) 약 2만5천 달러에서 평평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행복과 기대 수명이 일어나는 국민소득 수준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는 결과도 보여줬다. 이는 모든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현상으로, 우리의 국민소득이 늘어난다 한들 국민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대 수명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지수로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득불평등의 증가, 스트레스 지수의 상승, 만성질환 및 정신질환의 급속한 증가, 10대 임신율과 낙태율 증가, 청년과 노인의 자살율 증가,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확대, 범죄율아 사회적 비용의 증가, 마약과 약물중독의 증가, 계층이동성의 폭락, 저축률의 하락과 소비지상주의, 가족의 해체와 1인가구의 증가, 외모지상주의와 성형의 확대, 신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부상 등이다. 


 

                                                  

 

 


이런 부정적 현상들은 개인과 계층 및 지역 간의 소득불평등이 심한 선진국일수록 발생 빈도가 높았고, 일본과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처럼 소득불평등이 적은 나라일수록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줬다.특히 신생아 사망율과 범죄율, 10대임신율과 낙태율, 부의 불평등이 가장 크고, 의료비지출 대비 효율이 가장 떨어지는 미국과 영국이 최하위에 자리했다. 두 나라는 신자유주의(무정부적 자유주의)가 가장 발달한 선진국이며, 대부분의 지수가 후진국에 버금가거나 떨어지는 것도 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부유한 국가에서 생기는 문제가 사회가 충분히 부유하지 못하기 (혹은 너무 부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 내에서 사람들 간의 물질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 내에서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기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절대적인 불평등이 문제가 되지만, 부유한 나라에서는 상대적인 불평등이 개인의 행복과 기대 수명 등에 나쁜 영향을 주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의 51개주도 똑같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소득불평등이 가장 적은 뉴햄프셔주와 가장 큰 뉴욕주를 비교하면 거의 모든 지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최악의 주는 세계금융의 본산지인 뉴욕주이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피케티가 사용한 자료도 상당 부분 이 사이트에서 나왔다.

 



결국 1인당 GDP가 25,000~27,000달러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을 3~4만달러에 이른다고 해도 소득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건강과 사회문제 등을 다룬 수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부유한 국가일수록 "사회 전체를 가로지르는 불평등의 정도"에 따라 행복과 건강, 기대 수명 등에서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 수없이 많은 통계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종합한 결과,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공동저자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미국의 뉴햄프셔주와 뉴욕주를 비교한 것과 같은 지수와 통계들을 사용해 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스웨덴과 일본을 비교했다. 

 


스웨덴에서는 평등이 재분배를 지향하는 세금과 보조금, 그리고 큰 복지국가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국가 소득의 비율로 보면 일본의 공공 사회 지출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아 스웨덴과 대비를 이룬다. 일본은 재분배보다는 세금이나 보조금 '이전의' 소득이나 시장 수입이 평준화되어 있어 더 높은 수준의 평등을 달성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는 소득 차가 적다. 그러나 그 밖에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더 큰 평등은 세금이나 보조금을 통해 불평등한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지만, 세금과 보조금 이전 총소득을 평준화해 재분배 필요성을 더는 방식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했다. 각종 부조리와 불평등이 넘쳐나던 시절의 샤르트르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했다. 그의 말대로 타인은 지옥일 수도 있고, 반대로 천국일 수도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세상에선 각종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사회관계의 왜곡과 스트레스 때문에 타인이 지옥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인식과 태도를 바꿔 경쟁보다는 공존과 상생에 눈을 돌릴 때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다.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 지역사회와 국가 차원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했을 때는 타인은 결코 지옥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도 지친 몸과 허해진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가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자유는 이런 공동체가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 성장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전환, 그것이 인류가 6번째 종말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자유방임적 경쟁이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한다는 것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결론이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 관심법'은 최악의 입법이며, 대한민국을 1%의 수중에서 하위 99%가 피터지게 싸우게 만드는 최악의 악법들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ttangke 2014.07.20 12:43

    좋은 글 생각 정확한 지식이 참 좋네요~~
    사막 속에서 금은보화를 찿은 기분입니다~
    티스토리 구독을 하고 십습니다~~ 초대해 주실거죠?
    (hschainav@naver.com) 좋은 하루 되시고~~ 감사합니다^^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보면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불확실성이 극에 다른 시대인지를 알 수 있다. 바우만이 말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는 갤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갤브레이스는 주로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서 시대의 혼란을 얘기했다면, 바우만은 종합적 차원에서 시대의 혼란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홀로코스트와 현대성》에서 18~19세기의 근대이성이 창출한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현대성의 문제를 성찰한 바우만은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통해 인류의 현대성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는지 뛰어난 성찰을 보여줬다. 특히 바우만의 상징으로 자리한 《액체근대》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함께 현대를 종합적인 차원에서 파헤친 탁월한 성찰들로 가득하다. 현장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런 수준의 성찰에는 절대 이르지 못한다.  



바우만이 현대의 특징으로 액체를 선택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격언,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견고한 체제를 구축하며 무섭게 질주하지만, 노동생산성이 발달할수록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 때문에 견고한 체제가 내부로부터 녹아 무너지며, 최후에는 기체처럼 자본주의의 체제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바우만은 이런 마르크스의 주장 중에서 모순과 오류가 있는 부분들은 제거한 채 자본주의라는 견고한 체제가 녹아내려 물처럼 유동하는 상태로 바뀐다고 주장했다. 부정적 세계화가 구축한 전 지구적 시장이란 첨단산업으로부터 1차산업과 소작농 및 물물교환까지 거의 모든 경제 형태가 하나의 액체 덩어리처럼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체제가 아닌 유동하는 특징이 있는 불확실한 체제의 형태로서.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옳게 혹은 그릇되게)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했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 의무를 덜어준 결과이다. 



결국 바우만의 성찰도 미국식 신자유주의(무정부적 자유주의) 40년이 장구한 세월 동안 구축돼 왔던 긴밀히 얽혀 있고 상호 이해관계로 단단히 묶여 있던 관계들이 모두 다 무너져버린 데서 출발한다. 공간적 거리를 속도로 극복해버린 전기·전자·정보통신 기술, 제품의 소형화에 성공한 무게 없는 제조업, 거대한 선박을 대체하기 시작한 비행기와 고속열차, 자동차 등의 등장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던 체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 시대에는 자본과 노동이 서로 대립하고 싸우고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지만, 자본은 노동이 필요했고, 노동은 자본이 필요했다. 이들은 하나의 틀 안에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거대한 공장을 중심으로 '역사와 자본, 경영과 노동이 전부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좋던 싫던 무한한 진보와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처럼 결속되어 있어야 했다. 


                                                             사물인터넷의 세계



하지만 혁신과 향상, 진보를 뜻하는 것이 '더 작고, 더 가볍고, 더 쉽게 이동 가능한 것들'을 뜻하게 됨에 따라 자본은 더 이상 노동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다.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가 도래함으로써 20세기까지의 근대성이 현대성으로 변환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 USB, 현지 법인만 있으면 국가의 경계를 넘어 어디로든 가볍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잠시 머물 수 있고, 필요가 생기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



그것은 강제적이고 강박적이고 지속적이고 멈출 수 없는, 영원히 미완에 그치는 '근대화'이다. 창조적 파괴(혹은 이 경우에는 파괴적 창조이기도 한)를 향한, 저항하거나 근절하거나 가라앉힐 수 없는 갈증이다. '새롭고 향상된'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개간'하는 근대성, '해체' '제거' '단계적 폐지' '합병' 혹은 '대규모 감원'의 근대성, 이 모든 것은 미래에도 똑같은 일, 즉 생산성과 경쟁력을 제고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여력을 확대하기 위한 힘이다.



이런 현대성의 목표는 근대성의 목표와 다르지는 않다. 단지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 그 방법론과 존재론이 달라진 것이다. 방법론은 가벼운 경제의 본성인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다. 존재론은 견고한 체제에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다 끊임없이 유동하면서도, 어떤 견고한 것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액체의 특성을 지닌 체제로 변함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우리의 존재 방식과 근대적 형식의 변환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노동의 분업화로 대규모 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든 포디즘과 세계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포스트포디즘의 세계적인 생산체제 분업화가 만들어낸 중후장대한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가 막을 내리고, 반도체와 스마트폰, 인터넷과 SNS처럼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파편화된 대중이라는 고전적 의미를 넘어 소비하는 시민으로서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 개인으로 변질됐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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