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책상 위에 놓아둔 갤럭시2가 빛을 뿜어내며 자지러졌다. 연신 수증기를 뿜어내던 커피포트의 스위치도 약속이나 한 듯이 탈칵하며 떨어졌다. 그것들에 의해 다시 현실로 돌아온 재영은 머그잔에 끓은 물을 따른 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에도 『미디어 이해』에서 읽은 문구를 떠올렸다.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일상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정보사회에서 TV와 컴퓨터, 휴대기기 없이 누군가와 소통하는 일이란 생각하기 힘들다. 첨단 전자기술의 총화인 미디어의 힘이란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테크놀로지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처럼, 활자문화를 과거의 경험과 지식 전달자의 위치에서 밀어낸 방송ㆍ통신기기들은 우리의 인식과 삶 자체를 통째로 재편성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휴대폰이나 모니터, 평면 또는 3DTV가 전하는 각종 메시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접촉하며, 구분 짓고 저장하다 삭제한다. 디지털 미디어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삶의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미디어는 세상을 뒤덮은 촘촘한 그물망이야. 거길 통과한 메시지만 전달돼. 그물망은 거대 미디어가 독점하고 대안 언론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해.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조차 편성, 조작될 수 있어. 그물망을 조금만 변화시키면 되니까.’



재영은 비슷한 뉴스와 비슷한 드라마, 비슷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비슷한 공개 오디션을 보지 않으면 대화에도 낄 수 없는 세상을 떠올렸다. 플라톤에서 시작해 하이데거를 거쳐 히틀러가 실현했던 전체주의는 한나 아렌트의 예언대로 사라지지 않았고 그 모습을 바꿔, 좀 더 소프트하고 기술적으로 살아남아 세상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개인은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와 메시지를 각각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정보와 메시지는 무차별적이고 방대하며 연속적으로 던져지기 때문에 즉각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면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시청자들은 오늘의 뉴스라는 형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까? 다음 뉴스는, 다음 뉴스는 하면서 몇 분이나 몇 십 초 정도로 편집된 뉴스를 연속적으로 내보내는 게, 국가나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뉴스 다음에 흥미 위주의 가벼운 뉴스를 배치하는 게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얼마나 흐려놓는지 알까?’



뇌에 대한 각종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작업(또는 단기) 기억 안에 담아둘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정된다. 그 정보를 번역해 가중치를 부여하고 선택적으로 저장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정보의 바다에 수장되지 않으려면 앞서 들어온 정보의 대부분을 작업 기억의 공간에서 그냥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나마 마련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에서 정보의 대부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개인은 결국 미디어가 제공하는 네트워크(그물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러 가지 기사를 계속해서 내보내는 ‘오늘의 뉴스’의 진행 방식이다. 뉴스를 보고 있는 동안 (또는 보고 난 이후에도) 시청자는 뉴스가 전해준 십여 개의 기사 중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는 현상에 직면한다. 이는 앵커가 ‘자 다음은’ 하는 식으로 하나의 기사 꼭지가 끝났음을 알려줘, 다음 기사를 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작업 기억의 용량을 얼른 비워두라는 암시에 의해 발생한다.



‘결국 깨어 있어야 한다는 진부한 격언에 귀착돼. 그건 쿨한 세대에겐 최악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디어가 전하는 콘텐츠(내용)가 중요하지 미디어 자체(기술)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선택은 각자 개인이 내리는 것이고 각각의 인식과정도 다르며, 자신이 처한 삶의 필요에 따라 정보를 취사선택하므로 정보의 홍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설사 거기에 빠진다 해도 쿨하고 개념만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디어는 콘텐츠를 전달만 하는 매체일 뿐이 삶의 지배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영은 마샬 맥루한이 말한 또 다른 문구가 떠올랐다.



미디어의 내용이란 실제로는 정신의 입구를 지키는 개의 주의를 끌기 위해 강도가 손에 들고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 미디어 소유권의 집중까지 더하면,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어. 소유권이 분산되지 않고 이익에 집착하며, 엘리트 위주의 당파적 성격이 강한 미디어는 칼을 든 친구가 될 수 있어. 우리는 원수에는 최대로 주의하지만 친구에는 쉽게 속아 넘어가기 일쑤 아닌가?’



재영은 자리 앉아 머그잔을 내려놓고 두 번째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슈퍼아몰레드 액정화면 속의 상대를 확인했다. 재영은 취재와 관계된 인물이 아니면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 경향이 있어 그와 통화하려는 사람은 보통 두 번은 연속해서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는 그것이 불필요한 통화를 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통화 지연에 따른 오해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 번호는?’



재영은 상대를 인식하는 첫 단계가 11자리에 이르는 수의 조합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다. 사진(또는 아이콘)도 함께 뜨게 하는 것도 통화량을 늘리려는 미끼상품, 즉 이익 창출을 늘리려는 불필요한 기능일 뿐이었다. 수의 조합과 아이콘은 한 명의 인물을 기억에서 불러냈다. 동철이었다, 아니 그임을 증명하는 전화번호와 정형화된 메시지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재영은 캘럭시2를 들어 귀로 가져갔다. 동철은 요즘 들어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소셜테이너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정현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유일한 연예인, 그 역시 미디어의 명암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시하던 차였다. 타고난 말솜씨만큼 생각의 깊이도 충실한 그는, 재영이 갖지 못한 이 시대 최고의 무기(유머, 재치)를 장착한 사람이었다. 재영이 그에게 끌린 것은 자신과 비슷한 아웃사이더적인 기질 때문이었다. 그가 본 세상도 합리적이거나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형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동철씨, 웬일이세요?”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느닷없지요, 제가?”



왠지 슬픔이 묻어 있는 듯한 동철 특유의 음성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정겹게 다가왔다. 통신망의 용량 부족으로 통화품질이 떨어지는 차에, 여러 가지 음성이 섞여 들리는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떠드는 술집이나 포장마차 같은 곳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 잔 하신 모양입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다 주시고?”

“노총각이 다 그렇죠, 크큭. 공장 대신에 사원을, 하늘의 길에 포장마차를, 호수 속에 응접실을! 한 잔 했습니다, 이런 이른 시간부터요.”

“랭보 좋지요. 환각제나 술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니 세계적인 시인이 되신 모양입니다, 하하. 마침 저도 한 잔 하고 있는데, 종류는 다르지만. 아뜨뜨!”

“아뜨뜨? 뭘 마시.. 아, 커피 마시는군요. 그것도 아주 뜨거운. 입술만 랭보가 되겠네요? 크크큭!”

“동철씨 때문에 입술 다 뎄어요!. 책임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고소할 거예요.”

“저보고 재영씨 입술을 책임지라고요? 저 남자는 별로인데요. 못 생긴 남자의 입술은 더더욱. 유리로 뺐지 못한 입술인데, 어딜 감히. 크크큭!”

“사돈 남 말하십니다! 어디십니까?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온통 여자목소리뿐인 것 같은데? 혹시 전설의 아방궁인가요?”

“크큭. 귀는 밝으셔서. 오실 수 있으세요?”



동철이 전화한 이유를 밝혔다. 재영이 동철의 제의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래서 전화한 거 아닙니까? 전에 만났던 곳입니까?”

“네, 그곳이에요. 엄청 예쁜 연예인들이 수두룩해요. 반쯤 맛이 간 상태에서, 그것도 예쁘고 어린 순서대로. 크크큭!”

“총알같이 날아가겠습니다! 제가 갈 때까지 그분들 붙들어 매놓으십시오. 알겠습니까?”



재영은 좀처럼 하지 않는 농담을 던질 만큼 동철의 초대가 고마웠다. 울고 싶은 놈 때려준다고, 타이밍도 적절했다. 공복에 마시는 술, 그것은 마약과도 같은 진통해열제였다. 이성이 지나치게 고양될 때면 감정은 탈출구를 찾기 마련인데, 재영에게는 공복에 마시는 술이 그랬다. 재영은 취재기획안을 저장한 후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갤럭시2도 가방에 밀어 넣은 후 어깨에 걸쳤다. 자리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마도 동철은 술과 여자 연예인을 핑계로 자신이 추천한 책, 『죽도록 즐기기』나 정치경제학의 기념비적인 서적, 『거대한 전환』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죽을 때까지 한 번 마셔보자. 술에 죽나 취재기획안 때문에 죽나,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거, 당근 술이지!”



재영은 누구에라도 보이려는 듯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것은 마치 팀장이건 국장이건, 거대 언론이건 그 뒤의 시스템이건, 심지어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신에게라도 위세를 떠는 것 같았다. 오늘은 실컷 퍼 마시리라, 재영은 스스로의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튀어나오려는 일말의 두려움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1%도 안 되는 취재기획안의 승인 여부였지만 지금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는 거야!”



재영은 이번의 취재기획안이 진실을 향한 길고 험한 여정이 될지, 아니면 죽음을 향한 무모한 출정식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은 한 잔의 술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지금은 그 누구의 한 마디 격려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1. 하늘꽃 2015.01.02 08:11

    새해 더욱 강건하시고..
    뜻하신 모든일 이루시길...
    복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복 많이 지으시기를...

    • 늙은도령 2015.01.03 18:05 신고

      네, 감사합니다.
      님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첨단기술의 발전에 따라 의사와 환자 간의 문진과 진단, 시술과 수술 등의 일체의 의료행위를 철저히 경제 논리에 의거하는 미국의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성의 폭력적 행태가 사회의 모든 곳에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행정조치(국회의 동의가 필요없는 가이드라인)라는 편법을 동원해, 모법인 의료법을 무력화시키며 강행되고 있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의 논리도 결국 자본과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의 정당화와 극대화에 있다. 



국가권력기관들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60~70%와 야당, 의사협회와 보건노조, 시민단체들이 반대하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를 강행하는 것은 경기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의 생명마저 돈의 논리에 넘겨버리는 최악의 통치행위라 할 수 있다.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도 어긋난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각종 규제가 신설되고, 초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을 제한하고 있음에도, 유독 근대이성에 사로잡혀 성장만 외치는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는 자신의 임기 동안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 폐해는 다음 정부와 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시대에 역행하는 각종 정책들, 규제의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분별한 철폐, 온통 장미빛으로 색칠된 ‘통일은 대박’이라는 미래비전은 치적에 대한 지도자의 본능적 욕망과 미래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대체 불가능한 경제학자로 지칭되는 조지프 스트글리츠마저 경제성장이 온기가 국민들에게 흘러내리는 낙수효과가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치기 어린 지도자와 정부 및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의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직 '결과의 낙관론'을 퍼뜨려 국민들을 집단적인 최면상태로 빠뜨리는 것은 현대성의 폭력성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여론몰이는 특히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세대에게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함께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미디어세대들은 텔레비전이 전해주는 특정 정보에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미국의 교육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방송학자였던 닐 포스트만은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성찰없는 미디어세대'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 《죽도록 즐기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이제 텔레비전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까지 지시하는, 초 매체적 지위에까지 올랐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편향된 방송을 즐겨 시청하는 50대 후반부터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메시지가 사실ㅡ심지어는 진실ㅡ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이란 도구(정확히는 텔레비전을 작동시키는 배후의 테크놀로지)가 가치중립적이라고 확고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특정 방송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생각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빛의 속도로 반응하며,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인식의 활동을 일상생활과 여론조사와 투표소에서 분출시킨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세월호 유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장소에서 맞불시위를 벌이거나, '자식 팔아서 그만큼 챙겼으면 됐지'라며 짐승보다 못한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이들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거기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관계가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닐 포스트먼은 이런 인지부조화와 길들여진 인식의 편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크놀로지와 매체의 관계는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두뇌처럼 테크놀로지는 일종의 물리적 기관과 같다그리고 정신과 같이 매체는 물리적 기관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하나의 테크놀로지가 특정한 상징부호를 사용할 때나 사회적 위상을 차지할 때그리고 경제적ㆍ사회적 정황 속에 슬그머니 자리잡을 때그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매체로 변모한다테크놀로지는 그저 하나의 기계장치에 불과하지만매체는 기계장치로 인해 생성되는 사회적ㆍ지적 환경과 같다는 뜻이다물론 뇌처럼 테크놀로지는 나름대로 태생적인 편향성을 갖는다바로 이 때문에 경우에 따라 테크놀로지가 쉽게 접목되기도 하며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따라서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테크놀로지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와 발견은 가치중립적이어서 윤리나 도덕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과학적 행위가 가치중립적이라는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논리적 모순에 빠져드는 것처럼, 카메라가 제한된 각도에서 찍은 것만 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제한된 각도 밖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은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편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폐허와 쓰레기장도 카메라 각도와 편집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고,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미디어 세대들은 모든 방송 콘테츠가 광고와 협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고가의 텔레비전 광고비와 거액의 협찬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조직, 단체)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는다. 방송사들이 먹고 살려면 이들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와 뉴스를 내보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자본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소수의 상류층의 삶을 지향하는 매체이자 테크놀로지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고민해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디어 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매스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는 메타포'라고 말했다. 이는 메시지를 생산하는 '테크놀로지마다 제 나름대로의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젠다'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정치적이라는 것처럼,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가 그 시대의 지배적 세력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에 봉사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악의 초국적 언론재벌 머독



맥루한은 또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콘텐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미디어는 결국 인간을 그 이전의 인간과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지닌 존재로 변화시킨다. 맥루한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를 "기술(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이미지 조작(상징 조작)을 통해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없이"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맥루한이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콘텐츠가 "정신의 감시견을 따돌리기 위해 도둑이 미끼로 던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현대성을 대표하게 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텔레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모든 잠재력을 영상기술로 끌어낼 수 있었"고 정치적 편향성이나 권력 편향성을 지닌 매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수백 수천만 가지의 동영상에 인간은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는, 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의 결여로 확장됐고, 심지어는 뇌의 퇴행을 야기하는 유전적 변화ㅡ리처드 도킨스는 이 유전자를 밈이라고 명명했다ㅡ까지 초래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는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팔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말보다는 이미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을 선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부정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은 넘쳐날 정도로 많고, 이런 것이 쌓이면 시청자의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가 텔레비전이라는 무대를 통해 상영되는 모습을 본떠 점차 각색"되는 일도 가능해진다.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며,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종적인 결과는 낙관해도 좋다는 근대이성이, 1,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현대성으로 넘어가며 선택한 지배적 체제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에 따른 승자독식을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였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인류를 자연과 신의 수중에서 해방시켜주고 빈곤과 질병에서 구원해주겠다고 공언한 근대이성은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사라진다. 무한한 진보와 함께 근대이성이 약속한 것이 '자유와 평등, 박애와 관용, 정의와 평화'의 왕국이었다는 것마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성은 이렇게 폭력성과 선정성, 즉시성과 오락성을 띨 뿐 어떤 진지한 담론과 토론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류는 그렇게 현대성을 확대재상산하는 주류 매체인 텔레비전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전쟁과 테러, 대형사고와 유명인사의 부패와 스캔들, 엽기적인 범죄와 함께 잘 만들어져 섹시함으로 흘러넘치는 아이돌들의 온갖 몸짓들과 모든 이슈를 오락거리처럼 다루는 콘텐츠 처리방식에 따라 가치의 판단기준이 왔다갔다 하는 아노미 현상에 빠져들게 됐다. 



이를 극대화시킨 것이 모든 콘텐츠에 따라다니는 가장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광고의 범람이다. 인류는 이제 광고 없는 공간을 찾기 힘들게 됐고, 이제는 광고에 순응돼 그것이 전하는 현대성의 다양한 욕망과 쾌락행위에 사로잡힌 포로이자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는 어김없이 광고가 걸려있고, 손을 뻐치는 모든 곳에는 광고에서 본 욕망들이 실체를 드러낸 채 기다리고 있다. 필요한 것은 돈이거나, 즐기고 난 다음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이다. 



현대성이란 이렇게 즉시적인 욕망과 쾌락의 추구를 창출해낸다. 소비자로 정체성이 재규정된 인간은 어제의 귀중품이 오늘에는 필수품이 돼야 한다. 욕망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족시킬 수 없어 돈을 버는 대로 소비하려 달려가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순간적이고 즉시적인 불만족과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폭력적 요소를 가미하게 되고,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주차 문제를 놓고 살인도 일어나게 된다. 폭력적 성향으로서의 현대성이 온갖 공포를 양산하고, 타인은 언제나 지옥인 존재가 된다.    



많은 젊은 세대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던 간에 무조건 새누리당을 찍는 사람들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도 그러하다며 이념적 편향성에 대해 진저리를 친다. 이 때문에 가족 간의 대화는 더욱 줄어들고, 그것도 아니면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만나도 좀처럼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 사회를 비판하고 정치인들을 욕해도 이념적 성향이 들어가는 것은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밝힌 것처럼 '핫'이란 개념과 '쿨'이란 개념이 뒤바뀌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이런 경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네 권의 책만 읽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정치라는 사실은 시대가 아무리 흘러가도 변할 수는 사실이다. 심지어 인간이란 자신 안에서도 몇 개의 자아가 존재하기 마련이어서, 행위로 이어지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아무런 갈등없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과정이 선행된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선택했을 때는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한다. 이것을 기회비용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홀로 있을 때조차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의 과정을 거치고 이것이 곧 삶에서의 정치다.   



우리는 이런 선택과 행위의 과정을 욕구에 대한 최고의 효율성(최대의 쾌락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하며 경제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심지어 자해(이것이 극에 달하면 자살에 이른다)마저 처해진 상황에서 최고의 효율성(최대의 쾌락으로, 부정적이거나 마이너스 쾌락도 존재한다)을 찾기 위한 것으로 설명되기 일쑤다. 그리고 이것은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분명한 진실을 담고 있다.

 

 

 

헌데 정치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며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자원을 골고루 배분하는 행위라는 것이 현대 정치학의 주류이론이다. 우리가 경제라고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정치에 속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을 경제로 대체하는 정치권의 언어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미디어의 왜곡에 판단의 기준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것이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면 인간은 판단의 기준이 고정되며, 삶에서의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이것이 편향된 이념의 밑바탕을 이룬다. 

 

    

                                  

                       국과수의 DNA분석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나온 이 사진이 유병언의 죽음을 확정했다.



특히 텔레비전의 보편화와 일반화가 이루어진 이후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텔레비전은 콘텐츠를 보내는 쪽에서 일방적인 전달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과 같음은 인간이란 존재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전달하는 것들에 많이 노출될수록 콘텐츠를 전달하는 측의 입장에 더욱 경도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청자의 인식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것에 조금씩 젖어들고 길들여지게 된다. 이것이 심해지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인 편향의 오류가 발생하고, 이것이 무의식이나 의식의 전반에 쌓이고 축적되서 견고하게 굳어지면 거의 모든 콘텐츠를 이념의 잣대로 바라보게 된다. 세상이 바뀌어 텔레비전이 전하는 콘텐츠의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도 이미 굳어져 버린 인식의 틀로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자신이 보고 믿고 익숙한 것들만 받아들이고 강화하는 확인 편향의 오류 때문에 어떤 콘텐츠가 주어져도 해석의 작용은 변함없는 편향을 보여준다. 또한 인간이란 과거의 기억들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에 경도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에 삶의 조건과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사회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종의 문화지체가 일어나는 것이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독재가 지금보다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그들은 특히 어느 집에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을 보고 받아들인 최초의 세대들이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닐 포트스만의 《죽도록 즐기기》에 나오는 내용 일부인데,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세대의 확인 편향 오류, 즉 이념적 편향성과 경도된 인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것이 6.4지방선거의 결과를 갈랐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진실과 거짓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확인 편향 오류가 만들어내는 집단적인 인식의 편향성은 어떤 것으로도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자신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이나 고뇌에 찬 결단은 이념적 편향성에 불을 당기는 미디어 세대들의 절대 마약이다. 정치적 프레임 설정이나 전환이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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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텔레비전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까지 지시하는, 초매체적 지위에까지 올랐다...우리는 더 이상 그 기계장치에 매료되거나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는다. 또한 텔레비전의 경이로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텔레비전 수상기를 특별한 공간에만 한정시키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심지어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현재 이런 장면은 텔레비전을 타지 못한다.


 

마치 눈과 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고 묻듯이, 그러한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그래픽과 전자혁명으로 유발된 가장 큰 골칫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된 세계가 우리에게 낯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점이다. 낯설게 느끼는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은 길들여졌다는 신호이며 길들여져 온 만큼 변해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는 이제 텔레비전의 인식론에 거의 다 길들여졌다. 즉,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규정되는 진실, 지식, 사실을 너무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에 쓸모없는 것들이 중요한 것인 양, 그리고 모순된 것들이 대단히 합리적인 양 우리 안에 가득 들어앉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 중 일부가 시대적 규범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이제는 시대적 규범을 문제라기보다는 본래의 관습이나 제도가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여긴다......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텔레비전은 모든 잠재력을 영상기술로 끌어낼 수 있었다...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저 방송 프로그램이 좋아서 원할 뿐이다. 여기서의 논점은 텔레비전이 오락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인해 모든 경험적 표현이 자연스럽게 오락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온 세상과 교감을 유지하지만, 이는 인격이 사라진 무표정한 방식일 뿐이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더더욱 텔레비전을 타지 못한다.                                                     

 

텔레비전 세계에서 오락은 모든 담론을 압도하는 지배이념과 같다. 무엇을 묘사하든, 어떤 관점에서 전달하든, 가장 중요한 전제는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재미' 때문에 매일같이 뉴스에서 재난이나 잔혹한 장면을 접하면서도, 뉴스진행자가 하는 한마디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에 걸려들고 만다...이 모든 것들이 방금 본 장면을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한다...이들은 읽는 뉴스를 편집하거나 라디오 청취 방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한 뉴스를 TV로 내보내고 있을 뿐이다. 이들도 자신들이 사용하는 매체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다. "믿을 만한 텔레비전"이란 설명이나 언어표현이 뛰어나다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저 생생한 이미지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텔레비전'이라는 말 그대로 사람들은 '본다'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순간순간 생동감 있게 바뀌는 수백만 가지 동영상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시각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해 사고력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TV매체의 본질이다. 즉, 텔레비전은 쇼비지니스적 가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여강여호 2014.07.27 14:50 신고

    대학시절 전공수업 교재였던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요기서 보게 되네요.
    어떤 내용이었는지 깜깜하지만요..ㅎㅎ..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과 민주주의의 발전이 정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미디어에서 보듯 그런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민주주의의 진보를 정비례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국민들의 분노일 것입니다.
    여기에 정치는 생활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겠지요.

  2. 백순주 2015.09.18 11:00 신고

    우아~ 글이 매력적이예요. 짜임새 있고, 간결하고, 막힘없고... 독서력의 힘인가요?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보고 믿고 익숙한 것들만 받아들이고 강화하는 확인 편향'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지요? 매체를 멀리하는 것이 방법은 물론 아닐테고요. 뇌가 익숙한 것을 선택한다고 하던데요. 습관처럼.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데 뭘 배워야 하는지 그런 시각이 필요할텐데...의문이 끊이질 않습니다.
    글은 명쾌한데 저는 머물러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도령님 심정이시지요?ㅋㅋ

    • 늙은도령 2015.09.18 11:14 신고

      제가 글에 올린 책들을 보면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종합적으로 보기 위해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어려서 읽은 것들은 기본적인 철학을 구축했다면 지난 10년 동안 읽은 책들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 자아의 구축이 일정 수준 이상 완성되면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결국은 책을 많이 읽고, 사유의 양을 늘리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연습을 멈추지 않고, 거울뉴런이 최대로 발달할 수 있도록 관계를 늘려야 합니다.

      인터넷에 올리는 글로는 계략적인 것만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지적공동체를 만들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지적검증부대를 만들어 사이비들을 걸러내고, 정치경제적 지배엘리트의 논리를 까발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위 90%는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 백순주 2015.09.19 04:32 신고

      고맙습니다.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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