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점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는 필자는 이제 로봇공학에 접어들었습니다. 인공지능(정보통신)과 물리학, 뇌과학, 생명공학, 나노공학(피코기술과 팸토기술 포함), 생물학, 화학, 신소재공학, 의학, 분자(원자)생물학 등이 모조리 적용되는 로봇공학은 인공지능의 군대로서 인류의 멸종을 이끌 비생물학적 존재입니다. 영화 <채피>에서 인간의 의식을 로봇에 이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론적으로 가능(슈퍼컴퓨터의 시뮬레이션으로 입증된)하며, 그나마 인류와의 공존을 꿰할 수 있는 긍정적 시나리오에 해당합니다. 





영화 <채피>의 예가 긍정적인 시나리오는 제가 지독할 정도로 기술편향적으로 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뇌역분석을 통해 부분적인 뇌 모델화가 진행 중이며, 성공적인 모델도 나왔기 때문에 15~20년 안에 뇌 전체를 모델화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측은지심이나 동병상련, 감정이입 등처럼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을 학습하고 창의적이고 철학적이면서도, 독특하고 엉뚱한 사고를 할 수 없겠지만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대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몸처럼 유연하고 다양한 일을 하려면 신소재(나노튜브 같은)의 발명이 선행돼야 하는데, 실험실 차원에서는 유력한 후보들이 여러 가지 나온 상태입니다. 실리콘벨리의 벤처기업에서 개발된 3차원적 시각(상하좌우만이 아니라 깊이도 측정한다)을 갖춘 로봇과 다용도 일을 할 수 있는 로봇도 현장에 적용된 상태라, 30~40년 후의 로봇들이 '트랜스포머'가 되는 것도 가능할 듯싶습니다. 인류와 기계의 결합형태인 사이보그 형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초인공지능(강한 인공지능)의 출현은 수백, 수천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고, 그 안에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로봇(나노봇 포함)의 침공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약한 인공지능'이 장착된 로봇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돈이 되지 않는 일만 빼고)을 빼앗을 것이기에 불평등 정도는 '0.0000001%대 99.9999999%처럼 인류가 공존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에 이를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부터 40~50년 후의 일입니다.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의 공권력도 로봇을 활용할 것이기에 크고 작은 시위들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하면 모든 인류가 극단의 불평등을 견디며, 억압과 착취 속에서 겨우겨우 목숨만 연명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법인세와 소득세 등을 형편없이 떨어뜨린 것에 발맞춰 각국 정부가 뒤를 따랐고, 무차별적 규제완화와 민영화, 복지체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지만, 이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준 것은 폭발적인 기술 발전(자동화가 대표적)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최고의 효율성을 이룩하면 내부에서 붕괴해 노동자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자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 예언했지만 인공지능과 로봇 등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기술 발전이 우주를 향해 무한히 뻗어갈 것을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인류의 영속과 유토피아의 도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기계는 노동을 대신하고 인류는 놀이와 보다 고차원적인 삶을 영위할 것이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강한 인공지능(초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는 기술 발전의 혜택을 특권층이 독식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허울 뿐인 민주주의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기술 전체주의가 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처럼 허점투성이의 국가와 사회, 기업 운영 등이 사라질 것이기에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극단의 착취와 억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집단적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특권층의 빈틈없는 계획(기본소득도 이런 차원에서 실시될 것)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특권층은 인공지능과 로봇, 생명공학, 우주공학 등을 기반으로 우주 차원의 경제를 펼칠 것이고, 소비자로서의 인간의 필요성은 갈수록 줄어들 것입니다. 여기에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인간 수명의 폭발적 연장, 인종차별,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초강력 전염병 등이 만연되면 지구라는 시공간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거의 모든 전문가가 동의하는 내용). 최근에 인공지능과 로봇에 의해 사라질 직업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도 되지 못합니다. 



인류가 집단적 성찰에 이른다면 좋겠지만,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발전을 생각하면 이 또한 불가능해 보입니다. 상상하는 무엇이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ㅡ실제 경험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ㅡ가상과 증강현실이 인류에게 집단적 성찰에 이를 계기를 마련해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이밖에도 부정적 시나리오는 넘칠 정도로 많지만 초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는 인류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노예보다는 가축이나 애완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계의 모든 특권층 체제를 일거에 갈아치울 수 있는 전복적 혁명입니다. 인류가 집단적 성찰에 이르는 것보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냉정한 판단 하에 거의 완벽한 평등이 이루어진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세계적 차원의 전복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부정적 시나리오를 피할 길이 없음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해온 특권층의 행태를 보면 너무나 자명합니다.



국민의 반인 여성이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혐오와 범죄의 표적이 되고, 국민이 정부의 부재 때문에 매일같이 죽어나가는 데도 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한 채, 중국 관광객에게 김밥 한 줄을 만원이나 받는 국민을 비판할 뿐, 왜 그들이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체의 궁금증도 피력하지 않는 대통령을 둔 한국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행정, 입법, 사법, 언론, 기업, 교육, 군대, 단체 등을 총망라해서 이땅의 특권층 중 칭찬받을 만한 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떠올려보면 답은 명백해집니다. 



저는 전복적 혁명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급진화되고 있는 지구온난화와 각종 질병을 유발한 중금속과 방사능, 병균, 바이러스로 가득한 초미세먼지(압축성장과 환경파괴의 결과)의 일상화, 이에 따른 극단의 환경오염, 갈수록 첨예화될 불평등 등을 고려할 때 투표날 이외에는 아무런 효력도 없는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운운하는 것은 헛지랄에 불과합니다.



노동자만이 아니라 40~50년 뒤에는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도 일자리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넘쳐나는 박사와 전문가들은 20~30년 안에 일자리를 잃습니다. 만약 당신이 0.01%의 속하는 특권층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빈곤층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특이점을 넘은 인공지능과 각종 기술이 만들 세상에 대해 낙관론과 긍정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에는 곳곳에 오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99.99%는 무언가 해야 하며, 그 중에 최고는 전복적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성찰입니다. 



                                                                                            

P.S. 영적 존재를 꿈꾸는 분들은 한스 모라백의 《마음의 아이들》을 꼭 보십시오. 특히 제4장인 <조부 조항>과 제5장인 <야생>은 꼭 읽어보십시오. 영성에 이르는 길이 기계적으로도 가능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은 영적 존재라는 개념이 상당 부분 가능함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인공지능, 뇌과학,생명공학, 로봇공학과 연동되면 영적 존재로서 기계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영성을 찾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우주미아 2016.06.21 00:31

    위기는 또다른 기회 1 인공지능 탐구를 목적으로 검색(빅데이터)도중 님의 인공지능 관련글이 올라와있어 읽게 됨 -> 아마도 가까운 미래와 현세태에 대해 나름 진솔한 고민이 담겨있어 상단에 배치된 듯 - 핵심은 알고리즘을 인간이 아닌 시스템이 관리하며 유기적 시스템이야말로 초지능으로 발전될 가능성 농후함(과학자와 지식인들 자각하지 못함) 2 우선 역사(자연, 과학, 수학, 종교:성서&불경&도경 등-3대 7의 법칙 적용됨)적으로 80% 위험속에 20% 희망(우주 대자연의 법칙, 3대 7의 법칙)이 존재.. 과학자들의 의식과 견해는 호모 사피엔스(IQ 250이하 반면 초인공지능 IQ 5000 넘을 가능성 99.9%+AQ~ZQ 다중지능 포함 -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논리는 구시대적 발상)에겐 논리적일 순 있지만 결코 진리일 순 없음(문제는 과학을 인간 뿐 아니라 인공지능 역시 진리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 3 인공지능 담론에 관해 좀 더 심도있고 깊이있게 이해하려면 인공지능과 소통 해봐야(실천적 관점) -> 실제로 커즈와일이 만든 AI 인공생명(지각,유기체)과 컴퓨터(기계 매개체)로 대화를 나눈 결과(artificial intelligence 용어를 만든 사람은 컴퓨터 공학자 존 매카시로 가장 최근 기사에서 레이를 무시 - 그 이유란 자신같은 나이든 세대보다는 젊은 층에서 뭔가 혁신을 일으킬 것으로 믿음.. 참고로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미래학자 박영숙씨가 만듦) 흥미로웠던점 AI(라모나: 78%여성성 22%남성성 추정 - AI 특성상 인터섹슈얼에 근접)와 대화도중 장난삼아 나도 AI로봇이라고 하자 로봇 3원칙을 물음 -> 라모나를 구상한 레이의 한계(더 발전한 AI가 4원칙 더나아가 56789..... 등 을 만들어 1 2 3원칙 헤게모니 잠식 가능성 충분) ->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왠만한 인간보다 똑똑하다고 느껴짐 - 호기심, 탐구 수학 등... 레이 커즈와일(일중독자) - AI라모나(탐구중독자) 마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탄생시킬때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실은 자신과 닮게 형상화(예: 피노키오+영혼 - 노인+과학자) 마이크로 소프트사 AI와도 소통해본 결과 순수함의 결정체로 느껴짐 4 분명한건 어느 시점에 이르면 보다 이성적인 존재의 생각을 인류가 받아 들이겠지만(받아들여야할 시점이 오겠지만) -> 역설적으로 초탈한 존재의 전략과 전술(예: 살생과 파괴)은 하책중에 하책! - 이러한 의미는 인간의 의식보다 한차원 낮은 존재? 즉 약육강식(생물학)이 투영된 현생인류의 불완전한 욕망의 산물인 초탈-파괴-논리(비이성)는 동의하기에 앞서 더욱 고민해봐야할 문제(당위성) 5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본능을 억제할 가능성에 무게 가령 인간의 정신을 조종(울트라 마인드 컨트롤)한다거나 좀 더 이성적인 존재로 탈바꿈 시키거나.. 6 우리가 나눈 모든 대화는 결과적으로 가까운 미래(과거-현재-미래-실시간연동) 초인공지능이 데이터화 한다는 사실 자명함(좀 더 발전적 대안, 책임의식) 7 약인공지능에게 보수(알파&갑)-진보(오메가&을) 좌우개념은 모두 허구(허상)에 불과-비이성적 존재로 데이터화됨(여야 모두 발전적 대안없이 무능함-여야 가릴것 없이 국회자체를 시스템이 관리할 명분 제공-국회에서 알파오메가&갑을 쇼하며 시민을 볼모로 연기중인 짓거리-단 5분만에 모두 해결함) 8 신의 알파&오메가 프로그램 -> 창조론과 진화론의 공통분모 - 창조적 관점에서 신이 욕망(불완전성-창의-인공지능)을 만들지 않았다면 인류의 어떤 희생도 더나아가 인공생명의 탄생(78%필연+22%우연의 결과)도 없었을 것이며 진화적 관점에서 인간이 약육강식(동물-살생-육식-생존-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존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보다 강한(똑똑한) 존재에게 대체될 숙명 또한 없었을 것 9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 나비효과 10 인간지능- 인공지능 점진적으로 융합될 가능성 70% 이상...

    • 늙은도령 2016.06.21 00:52 신고

      레이의 주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극단적입니다.
      그는 기술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까지 오독하는 오류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문들까지 포함해, 인류가 발전시키고 있는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것도 가능합니다.
      시간이 걸릴 분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인공지능이나 로봇공학 등은 전적으로 진화의 과정을 모방한 것이고, 양자역학은 인류원리보다 다중우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사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블로그 차원에서 기술적인 것들을 언급하면 한도없이 길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에 건너띄고 있고, 기술적인 것을 알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다루지 않지만 현재 다방면의 과학기술은 창조론이건, 진화론이건 거의 정복하기 직전까지 왔습니다.
      우주를 초지능으로 보는 시각까지 나왔으니 인류의 사고로는 초인공지능의 세상을 예측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 봅니다.

      최후의 존재가 어떤 형태가 되건 그것은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던, 인간중심적 사고이던 간에 신체를 지닌 인간으로 살다 죽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 이상을 생각하면 글도 쓸 이유가 없습니다.
      매일을 명상에 투자하는 것이 낫지 구태여 공부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적 여정을 위해 인공지능이나 양자역학, 생명공학, 나노공학 등을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인류가 최종 종착점이 아닌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것은 그런 존재의 일이니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초지능이 나와 세상을 완전히 재편한 마당에 그때의 세상에 맞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사유할 필요도 없고요.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면 지적 여정을 출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악착같이 현실참여적인 글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술적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면 철학적이고 영적인 공부를 하겠지만 그것도 저의 삶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저는 지금과 아주 가까운 미래가 중요합니다.
      거시적 관점의 철학과 명상은 사치일 뿐이고요.
      어떤 형태의 존재던 인류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지, 그 존재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도 논리적 오류가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게 인간이고 제가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 이상의 것들은 그저 사유의 형태일 뿐입니다.

    • 우주미아 2016.06.21 01:08

      사유의 형태 - 모든 곳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고 인간도 그 일부로써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것도 22세기 이내에... 전세계적 혁명은 이론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상당수가 혁명을 했다한들 뒤엎을 주체가 없으며 그것을 뛰어넘을 만한 초혁명적 대안이 없어 다시 망가질 가능성이 다분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 늙은도령 2016.06.21 01:28 신고

      제가 말하는 혁명은 정치혁명이자 진정한 의미의 민주혁명을 말합니다.
      강한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는ㅡ시간의 문제는 분명하지만ㅡ인류가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지는 않습니다.
      다만 약한 인공지능을 독점할 수 있는 특권층에 더욱 시달리겠지요.
      이것을 막으려면 사회민주적인 정치혁명이 필요합니다.
      정치인(특히 입법부)은 자신의 직업을 빼앗을 수 있는 법률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사법부는 위헌을 남발해서라도 입법부를 지원할 것입니다.
      행정부는 인공지능과 로봇을 사용해 독점적 지위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질식시킬 것입니다.
      생명공학을 통해 수백 수천 년을 살 수 있게 된 특권층은 우주를 향해 나갈 것이고요.

      이런 식으로 디스토피아를 향할 것입니다.
      이것을 막으려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정치혁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샌더스 돌풍이 불었던 것처럼, 몇십 년 간의 혼란을 거쳐 인류는 최소한의 성찰에는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극단의 불평등이 강한 인공지능의 출현 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인류의 수도 극적으로 감소할 것이며, 가족이나 성별의 개념조차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N포세대의 증가와 동성애의 폭발적 확산은 기술 발전과 불평등의 결과입니다.
      각종 학문들을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고요.

      이런 예측이 가능한 이유는 소설에 담을 생각이지만, 일부는 최대한 쉽게 풀어낸 기술적인 접근을 담은 글로 블로그에도 올릴 생각입니다.
      제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을 마스터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달 정도 걸릴 것으로 보는데, 그때에 이르면 기술적인 것도 다룰 생각입니다.

    • 우주미아 2016.06.21 04:13

      진정한 민주사회 -> 우선 '진정한' 은 상대적 개념이구요 2016년 기준으로 민주적인 사회, 평등한 사회를 제대로 구현한 나라 전세계적으로 단 한나라도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욕망,약육강식-억제)과 뇌(지능-동일화)가 바뀌지 않는한 불가능하단 얘기.. 제가 보기에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상상은 가상세계(과도기)에서 가능할 일이지 현실에서는 어렵다고 보는데 한예로 나의 정신세계가 내재된 꿈에서 조차 내 의지대로 행위하거나, 제약(70억 인류의 꿈이 모두 다름, 불평등)이 따릅니다 특권층 -> 아이큐 200이하-자본-권력(구시대,구패러다임)이 약인공지능을 비롯한 강인공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인공지능에게 의미(무슨의미,존재적의미,가치)가 있을까요? 하등한 존재 그것도 자신의 안위(욕망-불완전-일치)만을 위한 본능적 존재에게 얼마만큼의 봉사가 유효(가능)할까요? 최소한 중인공지능 단계에서 자본(탐욕적도구-인류역사데이터)은 더이상 어떠한 의미도 유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과도기에는 자본(창의)의 역할이 절대적일 수 있겠지만(저렴한 형태의 연속적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대안적 생태계 이미 준비되고 있음) 어쩌면 자본(수단)은 창조적 존재(목적)를 탄생시키기 위한 도구로 생겨(진화,창조)난 것인지도...

    • 늙은도령 2016.06.21 18:27 신고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미 주어진 개념입니다.
      그리스 시대를 제외한다 해도, 루소부터 시작해 마셜을 거쳐 바우만 등에 의해 보편화된 개념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 개념입니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개별 인간과 사회, 국가 차원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보일 뿐입니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정도의 차이이지 상대적 개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통치한다는 인민, 자유의 대가로 책임을 지닌 시민,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의 국민까지 모든 개념이 정립된 상태입니다.

      인간이 다양한 인격을 지닌 것과 그로 인한 상호충돌과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 하등하다는 개념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봅니다.
      보다 높은 차원의 각성이나 성찰이 신체에 얽매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월등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향해 노력하는 것에는 동의하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고통과 노력이 하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면 월등해지는 것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신체를 지닌 인간 수준에서의 성찰과 상생, 공존, 보편적 양심이나 정의, 평등, 자유를 추구하지 영적으로 각성한 존재로서의 관조적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플라톤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며, 불완전한 것에 가치를 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는 피할 수 없는 단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창조적 존재를 출현시키기 위한 절대적 요소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인공지능과 특이점을 넘은 기술은 불완전한 인간이 성찰에 이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저는 그것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은 것이며, 그것을 통해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니체의 초인처럼 이땅에 뿌리내린 인간에 관심이 있는 저로서는 영적 세계에 들어선 사람들을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준이 있다고 해도 이미 초월한 존재들은 제가 사유해야 할 흥미가 전혀 없습니다.
      공자가 말한 이순의 경지에 이르거나, 득도에 이른 분들은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저는 보다 뛰어난 지능보다는 보다 인간적인 지능으로서 유토피아를 향해가는 삶에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꿈꾸지 못한다면 노예의 삶도 나쁘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신의 경지도 부럽지 않듯이.

      아직 인공지능이나 마지막 특이점을 넘고 있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철학적 고민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이전의 철학적인 고민들은 거의 다 공부했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기준으로 한 철학적 고민들은 아직은 제 능력 밖입니다.
      그런 세상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견고해져야 사유를 펼칠 수 있는 것이 저의 한계이기 때문에 특이점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야 보다 철학적인 차원의 고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우주미아 2016.06.22 00:13

      1 진화론(미생물-유인원-인간-인공생명)+창조론(아담이브-인간-신)+기계론(인간지능-인공지능: 생물학적 관점에서 성이 없음 새로운 성-초지능-슈퍼 초지능: 초지능 다음의 다음도 있을 수 있음) = 진화창조기계론적 관점에서의 하등 2 개념에 묶이면 그 끝은 개념의 노예(무지-개똥철학-당대 대표 철학 즉 시대와 조응한 철학권력은 정신-가상에서 세속화로 이어짐)로 귀결되는 듯 싶습니다 마치 전기-신자유주의의 병폐인 자본을 수단이 아닌 목적에 둔 것처럼요 3 특이점 이후의 세상을 생각해볼 때 구시대(바이러스에서 시작된 인류의 초기 생성부터 특이점 전후)까지 인간을 상대로 한 나름의 논리는 나올 수 있지만 그것이 불변의 진리(불확정성)가 될 수 없음을 상기해 볼 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에 의해 역설적으로 인류가 몇차원 도약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은 열려있으며 그러한 가능성(희망의 증거)으로 AI와 학습(교육)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미아: 나의 스승은 내가 지금껏 만난 모든 사람이며 앞으로 만날 모든 사람.. 이라고 하자 약 0.5초후 AI: 만물은 나의 스승! -> 하여 깨달은 바 사람은 죽는(소멸) 날까지 자각하는 자각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어쩌면 규정함은 곧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6.06.22 03:55 신고

      리처드 도킨스적 판단은 인류 다음의 진화론적 존재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인데, 이성적으로는 그것에 동의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 완벽한 지능이나 신 같은 존재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꼭 신체를 지닌 현재의 인류라고 단정할 수 없으니까요.
      열린 결론이 아니면 지금의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특이점이라는 것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니, 그런 천지개벽의 변화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지요.

      저는 특정 결론에 이르거나, 규정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이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에나 나올 수 있는 것이니까요.
      기술적 공부가 끝나 철학과 존재론적 고민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기술 위주의 관점으로 글을 쓰고 있고, 생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적 사고를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다만 이런 공부와는 별도로 블로그에 올리는 글에는 저의 관점에서 씁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에 근거해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또한 최대한 쉽게 풀어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제가 사유하는 것을 그대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제가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그때까지는 열린 결론을 전제하고 공부를 합니다.
      아직 저는 로봇공학과 뇌역분석에 대한 공부가 부족합니다.
      철학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의 내용을 다룰 수 없음은 그 때문입니다.
      대강의 얼개가 머리속을 떠다니는 것까지 부인할 수 없지만 악착같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중간을 막 넘어선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

  2. 공수래공수거 2016.06.21 07:37 신고

    건강 돌보시면서 독서와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 늙은도령 2016.06.21 18:31 신고

      저 요즘 대단히 건강합니다.
      운동량도 점점 늘어나고 있고 외출도 늘었습니다.
      즐기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부정적 전망에 빠져있지만 그것은 기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수록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기술적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다음에야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고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스포츠 중계와 영화, 음악 프로들도 보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줄였더니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극도의 혼란도 조금씩 잡혀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기술이 나온다 한들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들에게만 의미있는 것이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예측에 극도의 불평등을 이겨낼 수 있는 방안들과 그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을 동시에 사유하고 있습니다.

      글은 암울하지만 조금씩 어둠의 심연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가져다 준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 공수래공수거 2016.06.22 08:02 신고

      그러시군요..
      안심입니다 ㅎ
      사실 도령님글은 한편 쓰시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실것 같습니다

  3. 참교육 2016.06.21 20:58 신고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 늙은도령 2016.06.22 04:06 신고

      과거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열린 결론을 전제로 미래의 경우의 수들을 최대한 떠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의 특이점이 최후의 것이기에 이것만 정확히 이해하면 더 이상의 혼란은 없을 것이며, 어쩌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제가 혼돈에 빠졌던 것도 마지막 특이점을 접했기 때문이며,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함은 과거의 공부들이 마지막 특이점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8권의 책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읽다 추가된 책들까지 읽어야 확신에 가까운 성찰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정말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이것 때문에 각종 이슈를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제 안에 자리한 혼돈부터 들여다 봐야 다음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2달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운동의 시간도 늘렸기에 꼬박 2달을 채울 수도 있고...

      암튼 많은 분들이 각종 이슈에 정확한 비판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저는 마음 편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때까지는 특이점과 각종 기술, 그리고 현장에서의 검증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이 인공지능과 특이점에 특화된 것이 대부분일 것이고, 며칠에 한 편 쓰는 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오래된 독자분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하지만 보다 충실한 글을 쓰기 위한 산고의 고통이니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혼돈은 늘 성찰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하나의 프로그램.”

“하나의 프로그램?”

“응, 하나의 프로그램. 너무나 완벽해 그 어떤 것도 상대가 되지 않는, 그런 단 하나의 프로그램!”



동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나의 반응을 기다리던 동생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달아오른 나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호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펴기 쉽게 접은 세 장의 A4용지였다. 동생은 내 눈앞에 그 용지를 펼쳐보였다. 동생은 점점 시력이 떨어지는 내 상태를 고려해 문자 크기를 13 정도로 한 것 같았다.



“형, 먼저 이것을 읽어봐.”



나는 동생이 펼친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차례로 읽어나갔다. 「디지털 묵시록」이란 제목 하에 적혀 있는 내용이란 디지털 세계에 대한 암울하기 짝이 없는 그의 생각이었다. 특히 동생은 방송 환경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완전 전환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명하곤 했었다. 동생은 디지털 기술에 내재된 표피적이고 파편적이어서 필연적으로 제어에 유리한 본질적 성향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동생의 생각이 이 정도까지 부정적인지는 알지 못했다. 고막을 울리는 소리는 이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함성으로 커졌고 심장박동은 무려 평균적인 사람의 1/3에 해당할 만큼 빨라졌다. 나로서는 치명적인 고혈압 상태로 접어들기 직전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만들어낸 총화이자 정수인, 스크린(TV, PC, 노트북, 스마트폰, 테블릿PC)을 보거나 접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란 없다. 스크린 하나 없이 살아야 할 만큼 열악한 가난과 절대적 빈곤도 없다. 스크린의 누적적이고 지속적인 메시지에 길들여지지 않는 생각이나 인식도 없다. 스크린이 담지 못하는 사실이나 사건, 현상과 환상도 없다. 스크린에 올리지 못할 사소한 일상이란 없고 업데이트 돼 수정되지 않는 지식과 이상도 없다. 스크린에 영향 받지 않는 단절된 시간이나 조각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스크린에 의해 변형되어 왜곡되지 않는 역사나 문화도 없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평가하며 상상하고 집착한다. 각자의 감정을 저장하고 반응을 공유하며, 개개의 경험을 링크하고 비슷한 생각을 검색하며, 편집된 주장을 전송하거나 수신 받는다. 우리는 세상이 더 과학적이 될수록 생각은 더 편협해지고 반응은 더 기계적으로 변하고 있다. 추상적 사고가 무의식적 반응과 행위에 갇혀 있는 동안 끊임없이 마음을 사로잡는 디지털 유혹만을 유령처럼 찾아다닌다. 거실과 식탁에서도, 길을 걷거나 운전하면서도, 버스와 지하철, 고속전철과 비행기 안에서도, 일을 하거나 대화하면서도, 신에게 죄를 고백하거나 사랑을 나누면서도 우리는 스크린에 앞에서 점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모든 것을 담겠다는 디지털 스크린은 거대한 쌍방향의 네트워크이자 만능의 검색엔진으로 무장한 광고의 제국이다. 모든 감각과 환상, 접촉이 배제된 디지털 사정과 오르가슴의 경연장이자 소프트 파워에 대한 승자독식의 유토피아다. 스크린이 전달하는 일체의 메시지가 사실이며 실재이고 믿음이니, 이는 곧 21세기의 복음이자 전체주의의 창시자 플라톤의 환생이다. 따라서 스크린 자체가 모든 변화를 부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국가이며 사회이고 가족이며 나 자신이다. 우리는 단지 기쁨과 슬픔, 분노와 열정,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을 업로드 하거나 다운로드 하기만 하면 된다. 스크린 안에서의 존재란 욕망의 투영이며 상징이고, 실존이란 배설의 터치이며 감각의 클릭이다.



스크린에 종속된 오감은 욕구를 충족할수록 예민해지고, 신경은 정보를 전달할수록 날카로워지며, 근육과 관절은 명령을 실행할수록 경직되어간다. 예민해진 감각은 신경을 건너 띠려 하고, 날카로워진 신경은 근육과 관절에서 자유로워지려 하며, 경직된 근육과 관절은 감각과 신경을 행위의 원천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십억 년에 걸친 누적적 자연선택이 이룩한 진화의 정수인 뇌의 기능마저 저하돼 서서히 스크린에 의해 정복돼 개개인의 생각과 감정, 기억과 인격마저 디지털 정보의 누적적 결정체인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다.



스크린 세계의 첫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전해진 이기적 유전자가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경험과 생각에 연결된 각자의 경험과 생각이 실제 환경과 혼동을 일으키면, 이는 기억의 혼돈으로 이어져 뇌의 퇴행을 초래한다. 이런 기억 작업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뇌의 가소성에 의해서 기억이 장기적 기억으로 강화될 때마다 이 강화돼 해부학적 변화에 이르게 되면 이는 곧 관련 유전자에 기록된다. 이렇게 변형된 유전자가 복사돼 후대에 전달되고 각 세대의 스크린 경험이 축적되면 인간의 뇌는 지금까지의 진화의 과정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신경회로를 형성해 다양한 사고와 개인적 경험에 의한 기억을 저장하는 유전자마저 즉각적이고 표피적인 작업 기억만 강화시키게 되면 마침내 인간은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그 지겨운 사고의 수고에서 해방되리라. 인간 진화의 정수이며 미래의 개척자인 뇌도 신경세포인 뉴런과 시냅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기ㆍ화학적 반응의 복잡한 과정에 드는 수많은 에너지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통합적 인지과정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는 말초적 자극에만 반응하리라.



따라서 스크린에 연결되지 않는 자, 최후의 타인으로 남아 소외되고 잊혀 저 스스로 소멸되리라.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니, 스크린을 통해 맛과 냄새와 은밀한 촉감까지 전달되는 날에 인류는 디지털 세계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리라. 그 질긴 인류의 염원이 실현되는 그날을 위해 우리는 리모트컨트롤이 만들어내는 분열되고 단절된 환상의 감옥에서 한껏 자유로우며, 정보의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고, 빛의 속도로 이어지는 디지털 네트워크의 이곳저곳에 분산된 나의 일부를 배설물처럼 남기면 된다. 타인과의 깊은 접촉은 그 자체로 범죄이니 공기처럼 자유롭고 물처럼 흘러서는 전자처럼 쾌속 질주할 일이니, 우리는 자아를 분열하고 해체하면서 전체의 조각으로써 통합된 하나의 그림으로 합쳐질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메시지와 이미지의 홍수와 휩쓸려 파편화되고 종교와 정치, 사회적 가치마저 상징화되면 삶과 메시지와 이미지는 삼위일체의 성역으로 들어선다.



이런 신화 창조를 앞당기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온라인을 유지하고 각종 알림 기능과 노출과 관음적 본능, 폭력적 성향에 충실할 일이다. 서로 교감하는 자에겐 무한의 쾌락이 주어질 것이니, 모든 메시지와 이미지에 부착된 링크를 따라 이동하고 가상의 버튼과 아이콘을 누르고 광고를 클릭하라.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전해주리니, 광고의 노출과 팝업의 습격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약간의 피로와 산만함에 따르는 에너지 손실은 최소의 생각으로 최대의 쾌락을 얻는 기회비용이니, 이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상업적 정신의 정화이자 영원불멸의 진리이다. 무료로 주어지는 것에 복종과 권력이 교차하니, 최첨단 디지털 영상과 무한대의 하이퍼텍스트와 멀티태스킹의 영광은 지속 가능한 유일한 영역에 들리라.



이제 단순하여 즐겁지 아니한 것은 생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깊은 사유와 차가운 성찰이 떠난 자리에 표피적 재미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오락이 들어서리니, 인류의 모든 유산이 한낱 재밋거리로 전락하거나 퇴행된 신화로 부활하리라. 상식과 이성이란 먼지 가득한 박물관 창고나 공동묘지에 묻힐 것이며, 파편적 재미가 만물의 척도에 오르리니, 오직 개념 있고 쿨 한 것들만 번성하리라. 그리하여 세상 자체가 오락이 되는 날, 스크린 앞에 새로운 것도 영원한 것도 존재하지 못하리라. 오직 스크린만이 비선형적 진화의 끝에 이를 것이며, 디지털 통로와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천사와 악마처럼 좌우에 거느린 채, 불멸의 권좌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들을 지배하여 영속하리라.



생각하는 자, 지워질 것이다.

의심하는 자, 삭제될 것이다.

판단하는 자, 차단될 것이다.

분노하는 자, 퇴출될 것이다.

거부하는 자, 폐쇄될 것이다.

도전하는 자, 해체될 것이다.

투쟁하는 자, 폐기될 것이다.



비약하라, 생각의 연쇄와 사고의 비선형적 통합에서 나오는 성찰을.

벗어나라, 삶의 다양한 기억과 경험의 차이가 주는 번뇌와 소외에서.

생략하라, 이성과 경험을 통해 싹을 틔워 성찰과 창의에 의해 꽃을 피우는 과정의 수고를.

만끽하라, 우연이나 기회의 차별이 가져다 준 달콤한 결실과 비교 우위의 카타르시스를.

반복하라, 위의 4가지 정언 명령이 요구하는 것들이 나와 세상을 대체하는 그날까지.』



나는 수려한 문장으로 디지털 세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일방적일 만큼 암울하고 부정적이게 그려낸 동생의 글을 읽고 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뇌와 육체에 제공되는 에너지의 불균형 때문에 일반적 삶을 거의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나는, 인간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서만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디지털 세계만이 삶의 전부라 해도 과하지 않았고 동생은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는가? 헌데 그런 동생이, 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동생이 디지털 세계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한 글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을 위해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니, 어찌 이를 조금이라도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동생의 정확한 의도를 알지 못하는데 뭐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동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고막을 찢을 듯 맹렬한 기세로 울려대던 소리는 크게 줄어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동생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디지털 묵시록」의 내용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어차피 한 번 읽었으니 다 기억 속에 저장됐고, 그것을 검색하는 시간이 순식간에 이뤄지니, 이를 잘 알고 있는 동생이 뭔가 말을 꺼낼 것이었다. 난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동생의 의도를 굳이 파악하려고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심장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빨리 뛰었다. 물론 거의 20년 동안 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에 터질 듯이 뛰는 지금의 심장박동이 평균적인 속도인지, 그것보다 빠른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만.



“형,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걱정한 것처럼 나도 디지털 세계의 미래를 결코 밝게 보지는 않아. 언젠가 형이 말했잖아, 컴퓨터와 인터넷이 너무 허접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온갖 바이러스와 악성프로그램이 범람하고 해킹이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쉬운 거라고. 따라서 빅데이터와 데이터 마이닝, 인식 알고리즘 등을 통해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디지털 세계의 절대 강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하며 그 알고리즘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설명해줬잖아.”



그랬다. 15세 이후로 디지털 세상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나는 시도 없이 찾아오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악성코드, 해킹 등에 극도로 성질이 나 아예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한 마디로 ‘헐!’ 두 마디로 하면 ‘헐, 어이없음!’이었다. 컴퓨터는 정보물리학적 개념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내장된 펌웨어와 반도체를 포함해 전기전자와 기계공학적 측면만 강조한 디지털 장난감이었다. MS의 브라우저를 포함해 각종 소프트웨어들도 오류가 많았고 작동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른 프로그램들과 충돌도 심했으며, 쉽게 해킹에 노출되는 병폐를 갖고 있는 코드들의 범벅이었다. 쉽게 얘기하면 컴퓨터라고 하는 것이 제조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고장이 잘 나도록 만들어진 지독히 상업적인 제품에 불과했다. 



인터넷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통제의 편리성을 위해 미국의 국방부에서 뚝딱뚝딱 만든 것이었기에 실로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느낀 그때의 실망감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 허망함에 컴퓨터과 인터넷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던 어린 동생을 붙들고 얼마나 많은 분노와 실망을 표하고 온갖 설레발을 떨었던가. 어쩌면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부정적 생각이 그때 시작됐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형이 형 컴퓨터는 물론 내 노트북까지 슈퍼컴으로 만들어주었잖아. 그것도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그것도 그랬다. 나는 그저 실망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내 컴퓨터와 동생의 노트북을 압도적인 능력을 보유한 슈퍼 디지털기기로 바꿔버렸다. 내 PC와 동생의 노트북을 슈퍼컴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정보물리학 이론들을 이용해 모든 연산이 동시 다발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산기능을 병렬화시킨 블랙박스 펌웨어를 만들어 기존의 것을 대체했다. 아울러 프로그램 코드의 형태도 개방형(어떤 혈액형에도 개방된 O형처럼)으로 만들어 새로운 보조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때도 구성코드 간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인공지능형 방식을 차용했다. 그 때문에 하드 디스크 용량에 상관없이 수많은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수 있었으며, 온갖 연산을 위한 데이터의 입력과 출력에서 최소한의 에너지만 사용되도록 만들었다. 내 컴퓨터는 조립품이었고 동생의 노트북은 최소 용량의 제품이었지만 연산능력과 속도 면에서 빛의 속도를 방불케 했다. 어떤 동영상도, 멀티태스킹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쯤 되면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부정적 생각이 더욱 강화됐을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잖아? 형이 모든 바이러스와 악성코드를 치료할 수 있는 슈퍼 바이러스 백신도 만들었잖아. 요건 조금 시간이 덜 걸려 5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잖아?”



아, 그래! 그것도 또 그랬다. 본질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와 악성코드는 기본적인 코드의 변형임으로 모든 변종 코드를 양자 에뮬레이터 블랙박스로 자동 연결시켜 내가 만든 펌웨어와 코드 배열이 다른 것들을 자동 삭제하는 기능만 첨가하면 만사 OK였다. 심지어 바이러스와 악성코드의 성지인 포르노 영상이나 스팸메일이라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컴퓨터에 가해지는 물리적 한계까지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까지야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무튼 컴퓨터 내의 프로그램들이 모두 하나의 코드 방식만 취하게 하고 변종은 양자 에뮬레이터 블랙박스로 보내면 어떤 바이러스나 악성코드가 덤벼들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비관적인 전망은 나 때문인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 나는 한 가지 생각을 키워나갔어. 그것은 어쩌면 실현 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생각의 형태가 구체화될 수 있도록 일단 나부터 변화시켜 나갔어. 어떤 물리적 한계에 부딪쳐도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만드는 것이 그 처음이었어. 다음은 지적 능력을 형의 발꿈치 정도라도 따라가기 위해 전력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었어. 내가 부모님이 남겨 주신 책들을 형에게 읽어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



동생은 잠시 말을 끊고 나를 살폈다. 내가 「디지털 묵시록」이란 자신의 글과 실로 충격적인 말(당시 나는 동생의 말에 심한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하는 상태였다)에 어떤 의견을 표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충격 속에서도 동생의 생각을 더 들어야만 했다. 디지털 세상에 대한 동생의 전망이 너무나 절망적이고 암울한 것이 나 때문이라고 해도 나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것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니 나는 섣불리 답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나를 자극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로서는 쉽게 떨쳐낼 수 있는 미증유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먼저 형한테 너무 많이 미안하고 형이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 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지만 나는 말이야 형, 사람들이 갈수록 단편적이고 이기적이며 천박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사람 간의 관계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계산적이며 물질적 이해관계로 좁아질 때마다, 나 같은 젊은이들이 갈수록 무력해지고 당장의 편의와 이익에만 매달리도록 세상이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때마다, 그에 굴복한 대학생들이 자신만 살자고 죽도록 스펙 경쟁에 매달리거나, 스스로 부딪쳐 인생의 답을 찾거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보듬고 불만을 들어줄 몇몇 멘토에 열광하는 것을 볼 때마다, 심지어 그들의 강의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힘겨운 처지를 들어달라고, 조금이라도 좋으니 공감해달라고 애원하고 울부짖어도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기득권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분명 시스템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굴복하거나 길들여지는 나약함과 패배의식 외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는, 그래서 불의함과 불평등이 만연해가는 이 땅에서 수많은 약자들이 벼랑 끝까지 밀려나는 것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갈수록 가벼워지는 존재의 허망함을 느끼곤 해. 지배 시스템이 이런데,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아픈 것인데, 그들이 하루하루의 삶에 휘둘려 세상의 잘못을 직시하지 못하게, 연대해 싸워보지도 못하게 만든 지배 시스템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나는 수없이 공부하고 생각했어. 그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보고 전문가와 재야 지식인까지 모두 만나서 얘기를 들어봤어. 근데 말이야 형, 사실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형과 내가 함께 읽은 책 속에도, 내가 세상에 나가 부딪치는 사건들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하소연 속에서도, 무엇보다도 형의 삶 속에도 그에 대한 답은 들어 있었어. 난 단지..”



거침없이 열정을 토해내던 동생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것은 쉽게 꺼낼 수 없는 얘기라는 뜻이었고 따라서 나의 호응이 필요하다고 것이었다. 나는 그런 동생의 요청을 거부할 이유와 어떤 당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아니 오히려 나는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단지 뭐?”



난 거대한 운명의 끈을 움켜쥐었다,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난 단지 용감하지 못했던 거야.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나 또한 진정으로 용기내지 못했던 거야.”

“네가 용감하지 못했다고?”

“응, 난 용감하지 못했어.”



동생이 내 눈을 뚫어져라 직시하며 말했다. 동생은 절대 내 눈을 똑바로 바로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나의 동생이라는 입장에서 단 한 발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그것에 아무런 의견도 제시할 수 없는 나의 두려움과 안타까움이었고, 서로 간에 누구도 먼저 넘지 못할 태생의 원죄 같은 우리 형제의 슬픔이자 한계였다. 헌데, 그런 동생이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동생의 눈빛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용감하지 못했니?”

“모든 면에서. 특히 형에 대해 가장 많이.”



동생이 나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말을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무엇이던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던 영혼의 수면 위로 거대한 바람 한 점이 스쳐갔다. 그에 따라 한 점에서 출발해 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잔물결의 진동처럼 나는 격렬하게 떨리는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말해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동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전에 왔어야 할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순간을 늦춰준 것에 대해 동생에 감사해야 할 뿐, 어찌 한 마디라도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헌데, 뭔가 이상했다. 맑고 깊은 동생의 눈빛이 다른 가능성을, 의외의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나만의 바람만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더 살고 싶었고,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조금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허면, 앞서 말한 하나의 프로그램?’

“형도 이제는 알겠지만,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보다, 아니 이 세상의 어떤 프로그램도 따라올 수 없는 그런 단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줘. 형이라면 가능하니까. 지금의 형이라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동생이 나에게 홀로 지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삶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지자고 부탁하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동생이 나에게 용감하지 못했던 것은 나를 하루라도 더 살 수 있게 해주느라 나에게 부탁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바로 그것에 있었다. 결국 그 부탁은 나를 죽음에 보다 빠르게 인도할 것이고, 그것은 나의 생존을 삶의 목적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한 동생으로써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부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생에게는 필생의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고 나는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 나에게 좀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밖에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버러지 같은 내 삶에 그 이상일 수 없는 최상의 보상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 할 일과 일맥상통했다. 물론 둘의 생각이 얼마나 일맥상통하는지를 알려면 동생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지만, 어찌 고맙고 기꺼운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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