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정수면 1단계에서 4단계로 점진적으로 넘어가다가, 또 다른 변환기가 켜진 듯이 갑자기 새로운 상태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느린 뇌파는 사라지고 각성상태처럼 빠른 뇌파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근육 긴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깊게 잠들어 있다. 이러한 상태 때문에 ‘역설수면’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근육은 꼼짝 않고 잠들어 있건만 뇌는 깨어 있는 것이다.

 

                                                            ㅡ 장 디디에 벵상의 『뇌 한복판으로 떠나는 여행』 중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마침내 10의 32승에 이르는 온도를 넘는 순간 수없는 차원으로 뒤엉켜 있던 입자와 반입자들이 폭발하고 말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동안 쌓이고 쌓였던 무한히 응축된 에너지의 폭발이란 오직 빅뱅이란 말을 제외하면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가능한 모든 방향과 차원을 향해 무한히 많은 쿼크와 반쿼크는 물론 폭발의 순간 방출된 미증유의 복사열이 퍼져나갔다. 그 압도적인 힘에 의해 만들어진 온갖 차원의 시공간들은 생성과 동시에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1초가 더 지났을까, 6개의 쿼크들이 무한대의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전자기장을 만드는 입자가 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그 핵심적 움직임의 잔영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신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지만 분명 시선 속에 잡힌 무엇인가가 있었다.

 

 

곧이어 수소와 헬륨, 리튬과 중소수 같은 최초의 원자핵이 만들어졌다.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의 인력이 질량이 없는 전자들을 잡아당겨 일정한 궤도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구름떼를 이루자 비로소 물질과 반물질이 생성됐다. 빅뱅의 순간에 생성된 복사와 물질과 반물질이 혼재하는 최초의 우주가..

 

 

‘우주가... 아니야 다른 건 필요 없어. 쿼크들에게 질량을 부여한 입자의 움직임만, 전자기장의 생성방식만 떠올리면 돼! 헌데, 이런 지랄 같은 경우가 어딨어?’

 

 

재우는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에너지조차 자신의 몸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설수면에 든 자신은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면서도 뇌의 기능을 극대화해 입자가속기에 비견될 만한 능력을 펼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현실의 행위로 이어지게 할 능력이 없었다. 수경의 도움으로 그렇게 원했던 완벽한 역설수면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래서 우주 탄생의 신비까지 꿈꿀 수 있었지만, 그 바람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에너지 한 방울마저 상실해버렸다.

 

 

‘제기랄, 깨어나야 뭐라도 하지!’

 

 

재우는 미칠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이 완벽한 역설수면 상태에서 본 것은 모든 입자에 질량을 선사해 물질을 만들 수 있게 해준, 소위 신의 입자로 알려진 힉스 입자가 분명했다. 힉스 입자가 만들어낸 전자기장에 의해 질량도 없는 기본입자에 질량을 생성해주는 방식을 마침내 본 것인데 이제는 반대로 역설수면에서 깨어날 방도가 없어져 버렸다.

 

 

‘신의 비밀을 알게 됐으면 뭐 해? 깨어날 수도 없는데.’

 

 

깨어날 수도.. 깨어날 수도 없다면 다 부질없는 것이다. 재영은 역설수면에서 빠져나올 에너지를 끌어 모을 수 없었다. 


 

‘수경이.. 수경이 그렇게까지 해주었는데.. 이게 뭐야? 깨어날 수 없다니. 제기랄!’

 

 

재우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자신의 신체 중 오직 뇌와, 시각 및 청각 기능 일부만 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것도 깨어나야 쓸 수 있는 것이니, 동생이 부탁한 프로그램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깨어나야만 한다. 그건 절대 명령이자 수경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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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재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살이란 살이 모두 빠져나간 그의 얼굴 위로 태초의 순간처럼 햇빛은 눈부셨다. 비스듬한 햇빛의 각도 때문에 재우의 얼굴은 차라리 해골에 가까웠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였다.

 

 

‘이런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다니..’

 

 

수경은 다시 한 번 재우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본다. 거의 1분에 한 번씩 내쉬는 숨이 극히 미약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지고는 있었다. 재영의 말로는 재우가 완전한 역설수면에 든 것 같다고 했지만 수경은 갈수록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숨 쉬는 주기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어. 링거가 들어가는 속도도. 깨어나겠지? 깨어나지 못하는... 아니야, 오빠는 깨어날 날 거야. 반드시, 반드시 말이야.’

 

 

수경은 재우로부터 프로그램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역설수면에 들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하는 것을 들었다. 육체의 활동에 공급되어야 할 에너지의 대부분이 뇌로 공급되는 정체불명의 천형 때문에 뇌의 능력이 극한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재우의 잠은 죽음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완전한 역설수면에 들면 뇌의 기능이 최소한의 에너지로도 최대로 돌아갈 수 있지만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한 재우의 말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수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오빠.. 꼭 깨어나야 해.”

 

 

수경은 상체를 굽혀 재우의 귀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한 다음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실려 있는 인지하기 힘든 슬픔의 조각들이 억지로 끌어올린 희망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다.

 

 

“오빠, 내 선택이 틀리지 않게 해줘. 꼭 깨어나야 해.”

 

 

수경은 자신의 몸에 가득히 흐르고 있는 삶의 에너지라도 넘겨주고 싶었다. 세상의 이면을 파 해쳐 보다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 형제의 무모한 여정에 합류했지만, 이 자인한 천형의 고통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재우의 잠이 길어질수록 두려움과 후회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사실 수경은 자신의 삶이 너무나 비루했기에 이 위대한 형제의 계획 속에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자신이 경험한 세상이란 모든 것이 속이고 뺏고 탐하고 버리는 것이었다. 헌데 이 형제들의 삶이란 서로의 특징이 정반대인 것만큼, 서로 기대고 주며 끊임없이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래, 한 번은 예루살렘에 가고 싶었어.’

 

 

사실 수경은 수많은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의 공통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가보고 싶었다. 그곳을 향해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의 예수와 마호메트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순수하고 간절한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신앙이 서로 교차하고 만나는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어떤 삶의 이정표를 제시받았는지, 어떤 구원의 약속을 받았는지, 그래서 지옥 같은 삶의 방향이 변했는지 그 일부라도 알고 싶었다.

 

 

길을 가다 보면 순례자들이 세웠다는 돌탑이 나올 것이고 자신도 그 탑 위에 작은 돌 하나만이라도 얹어놓고 싶었다. 순례자 중 누군가가 거기에 처음으로 돌을 놓았을 것이고 그 뒤에 왔던 순례자들도 하나씩 돌을 얹어놓는 과정에서 하나의 탑이 세워졌다면, 자신도 그런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다. 처음에 돌을 놓았던 사람의 마음과 그 돌 위로 새로운 돌을 올려놓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난 그저 순례자 중의 한 사람이라 되고 싶었을 뿐이야.’

 

 

헌데 정말로 그런 단 하나의 꿈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삶에 이리 채이고 저리 차이는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느닷없이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 위로 내리는 햇살처럼 분명히 다가왔다.

 

 

‘그래, 그때부터였어. 내 삶이 송두리째 변한 건.’



(재영과 수영의 첫 번째 만남이 이어져야 하는데 쓰지 못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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