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대단한 인물인줄 아는 전원책이 전화를 바꿀 것이 확실하다. 혁명의 시대를 맞아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이재명과 표창원을 비판했으니 그의 전화가 온전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최순실처럼 추적이 불가능한 대포폰의 애용자라면 모를까, 그의 비판에 동의할 수 없는 표창원 지지자의 폭탄급 항의는 견딜 수 있겠지만, 반기문을 제친 후 문재인 턱밑까지 추격한 이재명 지지자의 핵폭탄급 항의를 피해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과 보수는 상극 같은 것이다. 변증법상으로 정(正)에 해당하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한 채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리하면서 살아가자는 보수의 입장에서, 기존의 질서가 아니라 체제를 통째로 뒤엎어버리려는 촛불혁명(변증법상의 반(反)에 해당)이 달가울 이유가 없다. 진보적 자유주의 정치인이었던 유시민이 관대했던 것에 비해, 보수주의자 변호사인 전원책이 체제의 근거와 무기인 헌법과 법치주의에 집착해 이재명과 표창원을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원책이 박근혜의 탄핵사유를 헌법과 법치주의를 어긴 것으로 봤기 때문에 분노한 시민들이 주도하는 박근혜 탄핵과정이 거꾸로 됐다고 주장했지만, 유시민이 전원책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분노한 시민들이 주도하는 박근혜 탄핵과정은 민주주의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권리행사이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은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파괴의 과정이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개선의 과정이 아님에도, 전원책이 박근혜 탄핵이 가결되면 촛불은 갈 곳을 잃을 것이라고 했지만, 유시민은 헌법재판소로 향할 것이라고 한 것도 혁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왔다.     





기득권을 형성하는 기존의 질서와 체제에 분노한 시민 주도의 혁명을 배제하면, 이재명의 강성발언과 표창원의 명단 공개는 전원책만이 아니라 유시민도 비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원책이 촛불혁명의 대의에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부패한 기득권세력에 대한 정의의 실현이라는 의미의 촛불집회는 찬성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체제의 전복이라는 의미의 촛불혁명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것은 총구에서 나오던 권력(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을 이념과 담론 중심으로 옮겼기 때문인데, 그것을 필수명제로 한다면 체제혁명(완전한 비폭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을 최종 목표로 하는 촛불의 분노가 헌법과 법치주의와 상충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공부를 많이 해 김대중과 노무현보다 지식이 많다고 주장하는 전원책이기에 혁명의 개념을 몰랐을 리가 없다면, 박근혜 탄핵의 본질을 헌법과 법치주의의 회복으로만 한정하려고 한 것은 자기기만(또는 양심불량)으로 보인다. 





오늘의 썰전은 이념과 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로 드러나는지 보여줬다. 평상시에는 헌법에 따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법의 지배)가 무엇에도 우선하지만, 혁명의 시기에는 민주주의가 헌법을 벗어나 시민의 거리로 나서기 마련이다. 헌법은 국가가 지켜야 하는 규범이자 국민의 명령이기도 하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국민투표를 거쳐야 함도 이 때문이다. 해서, 이재명과 표창원을 비판한 전원책에게 '꽃보다 청춘'의 주역인 신구의 카피를 빌려 말하는 것으로 글을 끝내려고 한다. 전원책은 썰전의 중반에 '지독한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한 유시민의 말로 충분히 설명되는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니가 혁명을 알아?!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6.12.09 05:44 신고

    철학이 없다는게 문제지요.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는 헛똑똑입니다.
    혼 좀 나야겠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12.09 08:58 신고

    다시 보기로 봐야겠습니다
    탄핵 표결을 기다리며..
    그런데 유시민 작가 모습이 조금 초췌해 보이는군요
    이리 저리 가연하고 농성에 참여한다고 그런 모양입니다

    오늘 좋은 결과가 있기를..

    • 늙은도령 2016.12.09 17:04 신고

      크하하하하하....
      이게 민주주의입니다.
      촛불시민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3. mangrove 2016.12.09 09:53

    전원책 변호사는 그냥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반기문 지지율이 높은 이유와 같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갈 곳을 잃은 자칭 보수가 택할 수 밖에 없는 자충수.

    우리나라 보수의 특징은 반성을 모른다는 거지요.

  4. merryjanet 2016.12.09 12:51

    썰전을 놓치지 않고 보는데 전원책을 참는 건 정말 힘드네요.
    눈빛만 봐도 뭔가 공안검사 느낌이고 유시민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적이 없이
    계속 마디마디 브레이크 걸고...
    대한민국 헌법은 자신 혼자만 아는듯이 강압적이지만, 다른 법조인들이 얘기하는 거랑은
    다를 때도 너무 많고... 그야말로 수꼴의 전형입니다.
    아무튼 인내심을 가지며 숙제를 하듯 시청은 하는데..
    jtbc는 좀 합리적인 보수 패널로 교체해줄 의향은 없는지.

    • 늙은도령 2016.12.09 17:06 신고

      전원책은 보수의 한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에 이 상태로 가는 게 낫다고 봅니다.
      어차피 법의 해석에서도 문재인보다 뒤지는 자이지만 그래도 국민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니 나쁠 것은 없습니다.

  5. 과유불급 2016.12.09 17:14

    전의 성향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비이성적,비도덕적,비합리적 등등 모든 단어앞에 非라는 부정사를 붙혀 얘기하는 애국자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자칭
    애국보수. 썰전시청내내 역겹더군요. 개인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양심의 자유가 국민의 알권리 보다 국회의원의 비밀보장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근본을 해치는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말할수 있는 권리가 선동에 의한 민주주의 파괴라면 내일 잘 보고 공부를 다시 하길 바란다.
    똑똑히 보아라! 두눈뜨고 이왕이면 이 부역자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터...
    장지진다던 이정현을 비롯, 대구 경북지역 의원인 최경환,이완영,김종태,김상훈,조원진등과 주말 광화문에서 울려퍼지는 소리가 민주주의의 근본을 해치는 누군가의 선동에 의한 것이지를 똑똑히 보기를 바란다. 공부를 많이 했다니 느끼는것 또한 많을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니.

    • 늙은도령 2016.12.09 19:21 신고

      전원책은 자신이 합리적인 보수라는 자기확신과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자기오만이 겹쳐져 실력 이상의 대가를 추구합니다.
      유시민이 지독한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한 것이 정확합니다.

  6. 대구류 2016.12.09 23:17

    참으로 유시민은 나이를 먹고 공부를 할수록 유해지고 겸손해지는데, 전원책은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편협하고 고집만 쎄지는것 같더군요...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한 양반일텐데, 헌법과 법치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정작 그 헌법과 법치가 무얼위해 존재하는지는 잊은 모양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전원책은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은 많은 박근혜'인 것 같습니다. 무식하다는거 빼고 너무나 닮은 느낌이랄까...

    • 늙은도령 2016.12.10 17:11 신고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은 많은 박근혜.... 정말 멋진 표현이네요.
      압축적으로 잘 나타냈네요.
      원래 보수는 무식합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이 알 필요도, 깊이 알 필요도 없거든요.
      그렇다보니 보수는 기득권을 지키는 정치공학적 지식만 있으면 되니까,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7. 과객 2016.12.11 14:39

    외제차 타는 자가 아이폰 쓴다고 남을 나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8. 포청천 2017.01.03 11:24

    이런 사람이 보수로 있어니 또 이런 사람이 변호사로 있어니 나라꼴이 요모양 요지경 이 됐지



필자가 연재를 하다 중단한 상태인 '늙은도령의 눈으로 본 근현대사 비판'은 인류 문명의 발전사가 자연과의 공생을 벗어난 순간부터 파시즘적 속도로 발전해왔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자연의 파괴만이 아니라 인류마저도 그 희생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통곡부터 하리라'라는 유럽의 속담만으로는 하늘을 향해 우뚝 쏫은 마천루 속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인간의 초라함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나마 인류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동체와 사회 해체,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문명의 발전을 받아들였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던 개인이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전의 '사회(복지)국가'를 포기하고, 그래서 성공과 실패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려지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평생에 걸쳐 다양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1인가구의 출현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후대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종의 번성을 거듭해온 인류 진화의 방식을 거부하는 세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앞세대가 누렸던 것들 중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3개에서 5개, 7개로 계속해서 늘어남에 따라, 무한대의 포기를 담을 수 있는 'N'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을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 여겼던 과학기술의 발전은 빛의 속도로 일자리를 줄였고, 그에 따라 '남아 돈다'는 뜻의 잉여를 넘어 '쓸모 없다'는 뜻의 비존재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처지로 내몰린 수많은 사회초년생들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저임금노동의 굴레에 갇혀버렸습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도 아니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올랐던 청춘'은 고통과 좌절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앞세대인 청춘의 고통과 좌절을 지켜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변한 꿈과 도전의 자리에 조숙한 현실인식과 타협의 선택들로 채웠습니다. 잘리지 않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돈을 벌 수 있는 편안한 직업을 찾는 것은 희망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아 때부터 선행교육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경쟁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텔레비젼과 PC, 스마트폰 등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돌이나 운동선수를 동경하는 것도 그 이면에 자리한 수백만 명의 낙오자들이라는 압도적인 실패확률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높은 실패율은 어느 직업에서나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온몸을 성형하던 약물의 도움을 받던, 죽을 만큼 힘든 연습생(지망생)과 후보 생활을 넘길 수만 있다면 단시간 안에 평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박의 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형되고 뒤틀려진 것이지 아이들과 청소년의 생각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조)부모의 능력이 나머지 삶을 결정하는 현실에서 그나마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육체를 활용하는 것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삶의 시작에서부터 무한경쟁에 던져진 이들이 급증하는 정신질환(ADHD, 우을증, 공황증세)과 시도때도없이 찾아오는 자신과 타자를 향한 폭력성, 그 극한에 자리한 자살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 비하면 그들의 선택은 치열한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이들이 보았던 것들이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만 강조된 용산참사, 철저한 방관이 불러온 쌍용자동차해고노동자의 연이은 자살, 퇴임한 대통령에게 휘둘러졌던 광기 어린 폭력, 그들의 형제자매이자 친구와 선후배일 수도 있었던 250명의 단원고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참사,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노렸던 메르스대란 등이라면 자신에게 투영된 부모와 어른들의 꿈과 희망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불의와 부정, 반칙과 특권이라면 바르고 착하고 정의로운 삶을 주문하는 기성세대란 지독한 모순과 거짓의 화산이자, 이룰 수 없는 허상을 행해 죽을 때까지 노오오오력 하라는 그 유명한 '꼰대'의 전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목록에는 전혀 좋아할 수 없는 것들만 가득하다면 차라리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연습이 우선됐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살 수 있게 됐지만,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육체(적 재능)에 한가닥 희망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패배자나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됐던 외톨이라는 것도 사이버세상에서는 무한대의 네트워크를 통해 삶의 조각조각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한 생을 보낼 수 있는 (그들 나름대로는) 괜찮은 선택이 됐습니다. 





갈수록 시장이 좁아지고, 경쟁이 과열돼 '짧은 활동과 그것보다 긴 휴식기'가 되풀이됨에 따라 소녀시대나 동방신기, 빅뱅과 슈주, 2NE1과 엑소 같은 넘사벽의 성공을 거두는 것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알면서도ㅡ홍수를 이루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K-pop스타'를 빼면, 다양해졌지만 고만고만한 것들로 재편된 것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ㅡ끝없이 아이돌그룹이 배출되고 퇴출되는 과정은 (기형적인 인구구조와 시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김연아와 박지성, 박찬호와 박세리, 박인비 같은 대박을 터트리는 것(손홍민과 손연재, 류현진과 박병호, 강정호와 기성용, 김효주와 김세영과 장하나, 이승우와 백승희 등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제외)도 어려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이 불가능해진 청춘에 접어들기 전까지 육체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10대의 선택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맞선 부모들의 전통적인 압박도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통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빛의 속도로 끊임없이 배회하는 '떠다니는 섬'으로서의 10대의 등장이란 (다음 글에서 다룰) 무한한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1%의 희망 때문에 99%의 절망을 기꺼이 감내하도록 만들었던)낙관론적 세계관의 16세기에 잉태된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선진국들이 400년 이상이 걸린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을 단 70년 만에 파시즘적 속도로 이룩한 압축성장에 내던져진 대한민국의 10대에게는 더더욱.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catlover8 2016.03.01 05:14

    아고라 경제방에 이번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에 관한 제 생각을 담은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도령님처럼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짜피 많은 사람들이 읽을 건 아니지만, 그냥 답답해서 한 번 올려봤습니다.

    저는 아고라를 2년전에 처음 알게 됐는데, 정말 너무 난잡해서 처음 들어가 봤을 때 경악했었거든요. 그래서 글을 거의 올리지 않는데, 아무튼 혹시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세요. 닉네임 catlover8으로 찾으시면 되구요. 나중에 도령님 생각도 한 번 듣고 싶군요. 참으로 착찹한 저녁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01 05:12 신고

      알겠습니다.
      오늘 피로해서 10시가 넘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4일 전에 썼던 그대로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03.01 08:25 신고

    꿈을 잃어버린 10대들입니다

    그 잃어버린 꿈을 찾아줄,되살려줄 의무가 기성세대들에게
    있습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 늙은도령 2016.03.01 09:16 신고

      세상을 바꾸려면 압도적인 정치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을 최소화시켰지만, 국민의 지지가 높으면 얼마든지 체제를 바꿀 수 있습니다.

  3. ON ALL 2016.04.10 16:51

    매번 좋은 글들을 다방면에 걸쳐 올리고 계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이 미치는 영역이 턱없이 좁기 때문에 본문을 몇 부분 인용하고 싶습니다. 인용한 후에는 출처를 남기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박근혜는 끝내 위안부협상에서 아베와 나눈 대화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위안부할머니와 엄동설한의 혹독한 환경에서 소녀상을 지키는 청춘들에게 협상 내용을 받아들일 것만 강요할 모양입니다. 국가공권력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는 무시로 일관하고, 노동개악을 밀어붙여 사측에게 무수불위의 권한을 주는 초법적 양대지침을 몰아붙일 모양입니다. 세월호참사의 유족들에 이르면 박근혜를 향하는 극도의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온갖 폭정과 일방적 통치는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박근혜는 대통령에 오른 이후,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신을 지지하는 불멸의 35%를 믿고 국민을 찢어놓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을 넘어 유신독재의 부활과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면죄부까지 발행했습니다. 매일같이 경제와 민생을 외치지만 한국경제를 이 지경으로 망쳐놓은 책임만 국회, 특히 야당에 전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지금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에 정확히 역행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시하는 일들을 제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극도의 혼란 속으로 몰고가 칼 슈미트가 말한 예외상태를 만들어 독재를 하겠다는 것인지 박근혜의 불통의 독선이 향하는 곳은 박정희 시대의 부활로만 여겨질 정도입니다. 박근혜의 탈선은 국민이 타고 있는 기차와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고속열차를 떠올립니다. 

 

 

박근혜가 대통령의 의무와 역할을 하기 위해 어느 수준까지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과정만 놓고 보면 전혀 준비가 되지 않는 대통령을 넘어 최악의 소녀 군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현실인식이 내치에서의 절대적 권리를 주장하는 군주나 중세시대의 왕의 모습이 오버랩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동원의 대상이고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하는 노예로 보는 것이 박근혜의 통치에는 수없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현실인식에 따라 통치의 방법도 달라집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 극좌의 전략과 전술로 무장해 주류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던 미국의 부시 정부도 박근혜 정부에 비하면 여러 단계 아래에 위치할 정도입니다. 이는 마치 미국유학파로 구성된 한국형 신보수주의 정권이 얼마나 많은 광기와 위선들을 내부에 숨기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힘의 우위에 대한 폭력적인 성향은 독재의 본질이자,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가 극우 파시즘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히틀러는 독일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자였고, 자국민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최고지도자였습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도 표면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당시의 국민들이 속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60대 이상의 노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유효한 인식의 근거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무회의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인 장관들의 받아쓰기 장소로 변질됐고, 미리 연습한 각본에 따르지 않으면 질문도 받지 않는 일방적 대국민담화는 선동정치의 전형입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1~9호를 이용해 독재를 했지만, 박근혜는 고정지지층을 기반으로 감성적이고, 그래서 선동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최악의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통치이성이 사라진 곳에서는 국가공권력에 대한 집착과 사적 이용에 대한 유혹이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지금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입니다. 전 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이 점점 현실화되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백척간두에 서있는 풍전등화의 신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대상이 국민이 될 수 없으므로, 대통령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양보하는 것이 옳을 진데, 사회적 약자의 희생만 강요하는 모습이 참으로 잔인하기만 합니다. 



지도자가 그렇게 일방통행만 강행하면 어떤 국가던 내부로부터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고, 이는 오직 폭력으로만 메울 수 있습니다. 찍어누르는 법치와 야만공권력을 앞세운 독재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구체화되기 마련입니다.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생을 들먹이며 경제 성장을 통해 지금보다 나은 풍요를 안겨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성장에 대한 환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 무한한 진보를 약속한 헤겔의 변증법

 

일반인은 인식하기 힘들지만, 헤겔이 역사에 끼친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은 헤겔의 책들을 읽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가 남긴 변증법적 사고와 역사 개념은 성장과 개발의 시대를 관통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기득권 권력(현재의 체제가 늘 '정'이기 때문에)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는 변증법은, 역사를 발전으로 가는 필연으로, 개인에 대해 사회의 우위를 확고히 하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영향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헤겔의 책들은 진정한 자유주의자, 칼 포퍼가 비판(포퍼 이외에도 헤겔을 비판한 석학들은 매우 많다)했듯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이르러서는 형이상학적 언어유희로 슬쩍 넘어간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겔은 일정 부분 플라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과 다윈의 발견들을 적절히 혼합했지만 계몽적 결론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기득권에 유리한 변증법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헤겔은 네 사람이 남긴 근대이성의 결과물을 버무려 그 유명한 '무한한 진보'가 가능한 변증법을 정립했습니다. 물론 변증법의 대가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헤겔의 변증법이 그만의 점유물도 아니고, 개인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확정하는 최종 단계에서 성찰의 치밀함과 끈질김이 변증법적 준거의 틀에서도 벗어났다고 신날하게 비판했습니다(필자도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반합으로 대표되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는 그 위대한 성과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이 헤겔의 핵심 주장입니다. 그것도 무한히 발전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정(正)에서 시작하는 역사(물론 반(反)도 동시에 존재한다. 유물론의 위대함은 여기에서 나온다)는 현재의 체제나 질서에 힘을 실어줍니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유물론적 논리를 전개한 끝에 탄생시킨 정상과학처럼.

 

 

그래서 언제나 보수(특히 기득권)에게 유리한 정에 반발해 동시에 존재하는 반이 이런저런 이의들이 제기하고, 저항과 투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반체제적이고 현재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아 폭력을 동반하는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반(反)이면서도 무한한 진보를 위한 중간단계적 충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반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거나 문제들을 지적하고, 체제나 질서를 전복하거나 개혁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진보의 개념이 됩니다.

 

 

이는 인력과 척력의 최적의 균형점을 이루는 방식으로 우주가 질서정연하게 돌아간다는 만류인력의 사회역사적인 변형이고,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뉴턴 역학에 기초한 정반합적 전개입니다. 또한 토마스 쿤에 의해 널리 인정받게 된 패러다임으로서의 정상과학에 대해 반론(이를 테면 뉴턴 역학에 대한 상대성이론의 반론, 상대성이론에 대한 양작역학의 반론)이나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해 치열하게 서로의 진실을 가리는 작업들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허나 헤겔의 변증법에 의해 정과 반의 대립은 정을 기반으로 부분 개조나 변형이 이루어지나 (때로는 극히 드물게 체제나 질서적 차원에서의 전복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정에서 출발한 합(合)이라는 새로운 체제와 질서가 정립됩니다. 즉 최종적인 합에는 정과 반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기득권의 생존(보수의 목표)이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입니다.

 

 

또한 정과 반의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 새로운 합이 정립되면 그것이 다시 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새로운 체제나 질서라 해도 그것이 새롭게 정리돼서 안정화됐기 때문에 정의 상태와 동일해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면 반이 출현하거나 합에 담겨있던 반이 힘을 얻으면 다시 둘 사이에 작용과 반작용이 포괄적으로 일어난 뒤 다시 합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는 무한히 진행되고 언제나 발전합니다. 헤겔의 변증법에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가 결정적 오류를 범한 것도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뉴턴역학의 작용과 반작용이 정과 반의 근거가 될 수 있었듯이, 생존의 싸움에서 승리한 적자가 계속해서 진보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약속한 무한한 진보가 헤겔을 넘어 마르크스까지 사로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무한한 진보라는 허구의 개념은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와 더불어, 진보와 성장을 이루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력적인 방법 때문에 파국적 종말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석학,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무한한 진보가 초래할 파국의 필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몇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충분히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울 클레어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떨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은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러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 그러나 지구는 유한한 존재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베이컨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자연마저 정복의 대상이 됐으나, 지구라는 행성은 우주에서 오직 하나며, 인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이 얼마까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극히 일부의 인류만이 정자나 난자 은행에 보관된 상태로 지구와 비슷한 행성으로 옮겨질 수 있으나, 그것은 (인류 원리에 의해) 확률 상 제로에 가깝습니다.

 

 

결국 인류의 대부분은 단 하나 뿐인 지구에서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이런 물리적 한계 때문에 인류 진보의 무한성은 존재할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단 250년(지구 전체의 역사를 기준으로 하면 0.00001초도 안 된다)만에 지구는 몸살을 앓을 정도로 파괴됐고, 자연은 더 이상 인간에게 당할 수만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아우성(지구온난화가 대표적)입니다.

 

 

천연자원 고갈과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파괴,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 20세기 내내 수위가 올라간 대양, 무차별적인 개발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각종 오염에 따른 대지의 기능 상실,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토지의 사막화와 각종 오염물질의 초미세먼지와 스모그화, 각종 만성질병과 정신질환의 급증, 사라졌거나 퇴치된 전염병의 부활과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 등 각종 부작용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근대이성의 최종 결과물 중 하나인 헤겔의 변증법을 신날하게 비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무한한 진보에 대한 믿음이 초래한 환상 때문에 전 세계적인 불평등이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됐습니다. 블랙홀의 대가인 리스는 인간의 생존확률이 50%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진화의 무한함을 주창하는 주류 경제학이 성장의 규모를 키우면 낙수효과가 발생해 중하위층도 풍요로워지리라는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인 이유가 무한한 진보의 결과물이란 상위 1%에 집중되고, 하위 99%에게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30년 동안 너무나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 또한 무한한 성장을 믿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야 무계급사회가 도래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했습니다.

 

 

근대이성과 변증법이 약속한 무한한 진보와 성장이란 불가능합니다. 더 이상 이런 허구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진보와 성장을 고집하면, 그 결과는 단 하나뿐입니다. 사회적 약자부터 죽어나가는 비대칭적인 종말이 먼저이고 뒤를 이어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나머지 인류 문명의 총체적인 공멸이 이어집니다. 이는 막을 수 없으며, 늦추거나 피해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합리적인 존재고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면. 





◉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

 

전 세계가 공멸의 시간을 늦추기 위해 노력하는 시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정반대의 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하는 현 시점에도 박근혜 정부는 성장 위주의 정책에 더욱 매달리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규제 완화와 비정상의 정상화, ‘통일은 대박’이라는 허무맹랑한 선동, 기업하기 좋은 나라, 선진국에서는 60년대부터 일상적으로 쓰인 창조경제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 때문에 창조경제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빨라지고, 규모가 커지는 지구온난화와 재생능력을 상실한 토지의 누적된 오염, 에너지전쟁을 대체할 전 지구적 물 부족 사태, 천연자원의 부족, 특히 정점을 찍은 석유 생산(오일피크)으로 인해 발 빠른 초국적기업들은 무거운 경제에서 가벼운 경제로 갈아타는 것만이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 불확실한 것들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상시적 구조조정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고 이것이 청년실업과 조기퇴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부가 법을 바꿔 정년을 늘리고 사법적 보장을 했지만, 기업이 이것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넘칠 만큼 많습니다. 최근에는 기업활력제고법이나 노동개악을 추진함으로써 앞의 정책이 이를 위한 비열한 당근(사전포석)에 불과함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정보통신의 발전, 특히 소비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 축적한 후 데이타 가공을 통해 행동패턴을 예측해내는 빅데이터의 활용은 소비의 확대로 이어질 뿐 신입사원의 필요성을 극도로 악화시켰습니다. 

 

 

최근에 들어 많은 기업들이 경력사원를 수시로 채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런 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청년실업을 극복하려면 기업이 아닌 정부의 투자와 정책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시장 우파이자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작은 정부로는 청년실업을 해결할 수 없고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박근혜는 사측의 이익만 반영된 경제법안과 노동법안을 강행처리하기 위해 1000만인 서명운동 같은 관제동원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하위 99%에게는 경제와 삶의 질의 악순환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비록 권력의 저울추가 시장으로 기울었다고 해도 정부의 역할이 중지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는 이런 시장의 힘에 대항하거나 협조하거나 제약을 가함으로써 제 역할을 다해야 국민 전체의 복리가 증진하고 불평등이 사라지며, 각종 불평등이 초래하는 새로운 종류의 차별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바우만의 말처럼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 세력의 하녀든 아니든, 국가란 쉽게 사표를 쓰고(과연 누구 앞으로?), 짐을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그 영토 내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에도 책임을 지고 있다.

 

 

 

⊙ 빚도 자산이라는 악마의 경제학에서 탈피해야

 

현재 대한민국의 빚이 거의 4000조에 이른 것처럼, 박근혜 정부의 폭주가 계속된다면 제2의 IMF(이것이 정말로 일어나면 그때는 헤어 나올 방법이 없다)가 다음 정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국가 전체의 부가 1경 5백조라고 하니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의 규모가 국부의 40%에 이릅니다. 빚도 자산이라는 악마의 경제학에 속아 매년 수십조의 이자를 정부와 민간과 개인이 물고 있습니다. 



이런 막대한 이자 때문에 부채율이 높은 기업들은 직원의 월급도 제대로 올려주지 못한 채 사업규모의 확장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이럴 경우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네이버 같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기업만 돈잔치를 벌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노동5법마저 국회를 통과하면 하위 99%의 삶은 최악을 피할 수 없으며, 이들 속에는 나라를 팔아먹어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35%도 포함돼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무려 소득의 20% 이상을 저축한 국민의 절약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들어서는 전체적인 저축율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부의 재분배를 통해 복지의 확대와 사회안전망 강화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선별적 기본소득제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되지도 않을 성장 일변도의 정책과 조치들의 남발은 대한민국을 더욱 깊은 수렁 속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 박근혜 정부의 폭주를 막아라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가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진행하려는 일들이 현실화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하위 99%를 희생시키는 것 이외에는 탈출의 방법이 없습니다. 박 정부는 특정 집단에게 일정 수준의 당근을 던져주는 대신, 그 뒤로는 거의 전 국민의 지갑을 털어가는 정책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정책들은 박근혜 임기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그 다음 정권에는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아직도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시대의 허접하고 오류투성이의 정치경제정학(박 대통령의 신념인 줄푸세가 대표적이다)을 신봉하는 현 정부의 행태는 국가와 국민을 공멸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의로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각종 정책들과 파기되고 축소된 공약들을 보면 더 이상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 일부 부처의 행태를 믿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인사를 할 때마다, 정부의 각 부처가 새로운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가라앉곤 합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과 내각을 보고 있자면, 단기적인 업적에만 급급함을 넘어 장기적인 이익을 상위 1%에게 퍼부어주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정말 정신을 차리고 박근혜 대통령과 현 정부의 폭주를 막아야 합니다. 이는 좌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중하위 90%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국가의 총소득은 늘고 있지만 그것은 일방적이고 신기루에 쌓여 있는 것이고, 달러보유액(외한보유액)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시적인 위험이 만연된 현재의 상황에서 달러보유액은 투자로 활용하지 못하므로, 인플레이션의 비율만큼 역마진을 초래합니다. 외국의 투자를 기대하는 것은 기대 난망이며, 국내에서도 두 개의 그룹을 제외하면 여력이 있는 기업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이 투자에 나선다면 또다시 빚을 내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부채도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더해 새로운 부채가 계속해서 는다면 대한민국은 내부로부터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기습적으로 시행을 발표한 양대지침이나, 부의 대물림을 허용해주는 기업제고활력법과 모든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노동5법 등을 통과시키려고 혈안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잔혹한 IMF의 구조조정을 최단기에 끝냈고, 엄청날 정도로 1인당 국민소득도 늘었습니다. 헌데 실제의 삶은 더욱 가난해지거나, 소비에 중독돼 저축액은 늘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작은 위기에도 큰 데미지를 입게 됩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것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반대로 가고 있으니 그들의 폭주를 막는 것은 시대의 명령이자 생존의 요구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현재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일차적 피해자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ㅡ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전체의지와 일반의지 사이에는 종종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일반의지가 오직 공동의 이익만을 지향하는 데 반해, 전체의지는 사적 이익을 따르며 다수의 특수한 의지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특수한 의지들 가운데 일단 지나친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이 서로를 상쇄하고 나면 차이들의 총합으로서 일반의지가 남는다.





위의 인용문은 루소가 《사회계약설》에서 ‘일반의지’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입니다. 루소는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모든 불평등의 기원을 수천 년에 걸쳐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심화시키는 사회구조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을 선량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들고·노예 상태로 만들며 불행으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불평등을 타파하려면 사회혁명(프랑스혁명은 루소에 사상적 기반이 있다)을 이끌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일반의지’입니다.



루소는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는 일반의지에 기초한 ‘사회계약’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면(루소는 계몽의 힘을 너무 믿었다) 모든 불평등이 사라져 인간은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상태(그에 준하는 사회 또는 국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도 금지됩니다. 모두가 선량하고 자유롭고 평등하기 때문에 구태여 정치적 조직이 필요없게 됩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에 이르면 ‘능력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한다’는 완전평등의 ‘자유의 왕국’으로 발전합니다.



이밖에도 다른 철학과 사상의 기원이 있지만 진보좌파의 신념과 가치, 도덕의 근간은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보좌파의 최종 목적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결과의 평등은 완전한 자유로 가기 위한 사회적 운동이나 혁명의 목표일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변증법적 발전의 최종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에 기초한 자유입니다. 이런 사회를 진보좌파적 의미의 유토피아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양자론을 거쳐 양자역학이 일반화되면서 불확실성을 거부하는 변증법(근대물리학과 진화론의 결과물)이 지닌 치명적인 한계가 밝혀졌지만, 진보좌파의 신념과 가치, 도덕은 민주공화국의 핵심으로 자리합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에 녹아있으며, 역사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내천과 홍익인간까지 이어집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사람사는 세상’도 여기에 근원하고,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인 세상’도 마찬가지의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식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공산주의적 사상을 전파한 예수의 가르침보다 선교에 의한 세력 확장에 방점을 찍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름)와 손잡은 친일파 중심의 뉴라이트(신자유주의 우파)가 조선을 넘어 한반도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창극의 동영상은 뉴라이트의 세계관이 완벽히 녹아있는 정수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이조 5백 년 동안 허송세월을 했기에, 하나님이 일제식민지라는 시련을 주었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해방됐고, 친일 경력이 있지만 윤치호 같은 기독교도 덕분에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고 공산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한민족과 조선(이들에게는 이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 친일파에 대한 면죄부,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찬양, 친미와 친일에 뿌리가 있는 극단적인 반공, 독재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예찬 등으로 이루어진 뉴라이트의 핵심이 문창극의 동영상에 녹아 있습니다.



이중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극단적인 반공, 친일파의 면죄부인 독재시대의 경제성장 예찬이 황교안에게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했던 홍익인간과 인내천의 애민사상 및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향한 진보좌파적 가치들을 철저히 배척하고 탄압하는 사상적 기반을 이룹니다.





부의 불평등과 결과의 차별을 인정하고 장려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온전하게 녹아있는 박근혜의 ‘줄푸세’가 대한민국을 비정규직과 반칙과 특권이 넘쳐나는 보수 반동의 나라(반민주공화국)로 만들려면 문창극과 동족이자 공안검사 출신인 황교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판사 임용을 앞둔 사람들에게 사상 검증을 자행한 국정원처럼, 모든 국민을 잠재적 빨갱이로 보는 공안적 시각은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과 함께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두 가지 핵무기입니다. 여기에 가장 폭력적인 기독교 근본주의까지 장착한 황교안은 디지털 전체주의를 자행할 적임자입니다.



P.S.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아날로그 전체주의(푸코가 정형화한 벤담의 파놉티콘적 독재, 모두를 감시하는 것)였다면, 박근혜의 줄푸세는 디지털 전체주의(푸코의 일괄감시 개념과 아감벤과 낭시의 추방 개념이 더해진 바놉티콘적 독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생각인데, 박근혜가 사물인터넷에 매달리는 이유도 디지털 전체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박근혜가 이 개념을 알고 추진하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목요일. 2015.05.28 16:12 신고

    이 나라는 진정 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스럽습니다.

    • 늙은도령 2015.05.28 16:55 신고

      민주주의는 폭이 너무 넓어서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과두정치에 가깝습니다.

  2. 로널드 2015.05.28 16:34

    이 글은 교묘한 물타기입니다. 민주주의를 진보좌파와 연결하고, 그것을 규정한 헌법을 인내천 사상에 붙이셨습니다. 그런데 인내천이니 홍익인간이니 할 때 우리 무슨 시대 살았습니까? 우리 왕조국가에 살지 않았습니까? 또 동학이 일어설 때 그들이 성공했으면 민주공화국을 건설했을까요? 민주주의는 서구에서 온 것입니다. 인내천과 민주주의, 헌법을 연결 할 시도 같으면 기독교가 반동이라는식의 글을 쓰는게 이상한 거죠. 이건 이중잣대입니다. 유리하고 좋은건 민족사상과 민주주의에 가져다 붙이고 미국이 가져다 준 민주주의라는 팩트는 무시하고 근본주의 기독교와 친일을 묶는것. 아이러니죠.

    그리고 반공, 그게 진정 나쁜가. 이걸 생각해 볼 필요 있습니다. 우선 이 글은 성선설에 기초한 것 같은데 인류가 진짜 선하고 유토피아 완성시킬 수 있었으면 소련은 왜 망했을까요? 북한은 왜 저따위 나라가 되었습니까? 현실은 냉정하고 많이 인정해가봐야 사민주의정도가 한계입니다. 인간 역사가 짧게는 수천년 길게는 수만년입니다. 그 동안 한번도 그런 신적 지성을 가져본적이 없습니다. 이백년 삼백년 뒤라고 크게 달라질까요? 반공하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잘못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봅니다. 또 기독교와 친일을 엮는 것도 물타기입니다. 3개 대표 종파 중 친일 안한 곳이 없고 가장 반일 한 곳이 개신교입니다. 개신교는 반공노선 때문에 보수와 같이 가는것이지 친일을 옹호하기 위한게 아닙니다. 유관순, 김구, 안창호, 이승훈, 함석헌, 이준, 전덕기 같은 사람들이 친일파인가요? 아니면 조선 인구의 1.8% 밖에 안되던 시기에 3.1운동에서 22% 이상 수감된 개신교도들이 친일파인가요? 교회는 반공보수지 친일옹호가 아닙니다. 특별히 기독교 근본주의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문창극 발언은 그 사람의 지혜가 모자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한 신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신이 일제시대를 허락한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문창극씨는 그 뒤 이야기를 안했죠. 일본이 패망하고 원폭을 맞은 것은 신의 심판이라는 말을 안한게 실수입니다. 사람들은 일제가 하늘의 뜻이라는 그의 말을 기억할 뿐 일본이 신의 심판을 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죠.

    • 늙은도령 2015.05.28 17:14 신고

      글을 제대로 독해할 능력이 없는 것 같네요.
      홍익인간과 인내천 사상이 진보좌파의 가치와 신념, 도덕과 일치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민주주의에 녹아들었다는 것인데, 왠 민주주의의 탄생과 시기적인 문제를 제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고대 아테네에서 나왔지만, 현대의 민주주의에 들아가 있는 다양한 사상적 기반은 서양의 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체제도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전체주의, 자유방임주의적 요소들이 골고루 섞여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없는 이유는 맹자도 민주주의와 동일한 개념을 발전시켰고, 공자의 인 사상도 민주주의의 정신과 관통합니다.
      민주주의는 평등과 자유, 관용과 정의, 공존과 공평 등이 혼합된 것이지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가 왕정국가였지만 지금보다도 왕의 권력에 제한을 가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많았고, 실제 어떤 왕도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면 쫓겨났습니다.
      지금은 제왕적 대통령에게 말 한 마디 못하는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이지만, 조선시대에는 환관마저 왕에게 직언을 했습니다.
      무엇을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일부의 편향된 얘기만 듣지 마십시오.
      기독교 운운 하는데 천주교가 더욱 많이 박해받았고, 독립운동과 함께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와 기독교 전체를 비교하십시오.
      기독교에도 우파가 있고 좌파가 있습니다.
      글을 정확히 읽고 댓글을 다셔야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한데, 님은 이미 편향된 생각으로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원폭을 말하지 않은 게 실수라면 당신은 기독교 근본주의자이군요.
      정말 무서운 소리 하고 있네요.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라 했는데 정말 악마 같은 소리네요.
      성경부터 제대로 읽으시죠.
      예수는 성전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들에게만 단 한 번 화를 내며 성전에서 쫓아냈지만, 공적 생활 3년 동안 늘 사랑과 평화, 공존을 설파했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온 것도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큰 사랑은 없었는데 원폭을 신의 심판이라고요?
      정말 무섭고 악마같은 생각이네요.
      기독교 근본주의 우파들이 왜 신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 당신의 댓글에 가장 잘 나와 있네요.

      그리고 성선설이요?
      루소의 일반의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철학을 설명한 것과 성선설을 동일시하면 왜 혁명이 필요하고 부의 불평등이 왜 일어납니까?
      이 글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글입니다.
      왜 부와 권력, 기회, 성공 등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되는지, 예수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천국에 가려면 낙타가 바늘을 통과할 만큼 어렵다고 했는데, 뜬금없는 성선설이라니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으면 예수와 바울을 따로 분리해서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청교도 정신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말로 있었던 개념인지, 아니면 베버가 오인한 것인지, 왜 루터와 칼뱅은 국가와 손을 잡았는지, 칼뱅의 예정설에 어떤 신학적 오류가 있는지, 미국의 보수 반동과 손잡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왜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놨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일정 수준의 지식이 쌓이면 그때 다시 얘기합시다.

  3. 로널드 2015.05.28 18:37

    이글은 미국과 자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동일선상에 두었고 우리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내천, 홍익인간 정신 등을 엮었습니다. 저는 그게 이상한 결론이라는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물려받았냐는 겁니다. 홍익인간, 인내천 사상이 진보좌파의 가치와 신념, 도덕에 일치한다는건 엄연히 선생님 생각이죠. 저는 그런 도덕과 신념의 바탕이 되어 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왜 시작을 해본적도 없고, 저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이 선거 때 마다 이슈인 국가인 미국이 세계 민주주의의 선봉에 서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것이고요.

    서양의 사상만이 민주주의의 기반이 아니라고는 하나 우리의 사상이 민주지표를 따라간 것이라는 것은 후세의 해석일 뿐입니다. 정작 주창자도 그런 생각을 안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해봤습니까? 단군왕검도 군주고 고조선도 고대왕조국가입니다. 공자 맹자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신중국 이후 공자는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배척 받은 인물입니다. 공산주으의 적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공자의 인이나 군군신신부부자자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이지 누가 공자를 민주주의라고 평가하나요?

    그리고 천주교 독립운동이요? 천주교는 일제 초기부터 일제에 충성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을 담당하던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봐주는 것 까지 금지했고, 신민회 해산의 원인이 된 105인 사건의 단서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성당내에서 얼마 반대도 없이 허가했죠. 아예 로마 교황청이 공식 허가를 했습니다. 천주교도로서 항일한 사례? 만주 등지에서 많이 했죠. 사실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대표 항일인것처럼 말하는 건 거짓말이죠. 왜냐하면 독립 후 천주교의 친일사례 때문에 천주교가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자 민주화와 국민의 편에 선 것으로 해석이 많이 되니까요. 안중근 의사가 가톨릭 교회 내에서 복권된 것도 1990년대에 와서입니다. 천주교가 더욱 박해 받았으면 31운동 때 천주교도는 개신교도 보다 많았을 텐데 어디있고, 대표적인 천주교 독립운동가는 왜 이렇게 적습니까? 개신교가 신사참배 반대해서 걸출한 순교자들 낼 때 천주교는 관련 인사가 얼마나 있나요? 결과적으로 볼 때 역사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알고도 거짓말을 하고 계시다는 것인데 만일 알고도 거짓기술을 하셨다면 이런 글 쓰실 자격이 있는가요? 제가 편향된게 아니고 선생님이 편향된겁니다. 그저 댓글들을 읽고, 혹은 지금의 반개신교 감정에 편승해서 이런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주장이 아닙니까?

    기독교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기독교도 공산주의에 참여 할 수는 없습니다. 좌파와 공산주의를 분리한다는 점이 독특 할 수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 맑시즘에서 오는 공산주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신을 반대하기 때문에 교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고, 교회가 성악설에 기초하기 때문에 인간만의 유토피아 건설은 불가하므로 지지 받을 수 없는겁니다.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대교회의 공산주의는 '성령'이라는 신적 매개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고요. 그런면에서 예수가 공산주의적 성향을 띄었다는 것도 정확한 지식을 알지 못한 채 기술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확히 지적하자면 그리스도교 내 진보는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남미의 해방신학이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크리스트교는 신없는 유토피아, 맑시즘, 레닌적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구절 앞에는 첫째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취해서 받을찐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황교안을 이해 할 수 없다면 이게 자기 유리한 것만 가져다 쓰는 것이지 뭡니까?
    예수가 시킨 대로 하는 것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면, 학교선생님이 시킨대로 하는 자도 선생님의 근본주의자고, 선생이 가르친 것 중에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말만 뽑아서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리고 성전에 있던 사람은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 로마 황제가 그려진 우상숭배적 화폐를 성전에서만 쓸 수 있는 문양없는 돈으로 바꿔주던 자들과, 억지로 흠을 붙여 자신들의 짐승을 사게 만들던 자들입니다. 예수 공생애 3년간 사랑과, 평화, 공존을 선언했다고요? 어찌보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예수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신국,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 평화, 공존을 이야기 한 것이죠. 선생님을 가톨릭 교도로 알고 있는데 성경은 한번 안 읽으신 것 같은 분같습니다. 양 교회가 교리 해석이 달라도 이 부분이 다르지는 않는데 저에게 성경을 제대로 읽으라 하시니 이해 할 수 없군요.

    문창극이 일본의 한국 지배가 신의 뜻이라고 말한 것이 기독교 근본주의이며 반민족적인 일로 매도 받아야 한다고 비판받으면서 원폭이 신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류애의 상실이며 악마같은 이야기라고 비난받는게 공존 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논리에는 일관성이란게 있어야죠. 그리고 신이 사람 마음 속에 있는게 아니라 인류 역사를 지배한다면 아시아에서 600만명 이상 죽인 일본이 신의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모든지 잘했어 잘했어 하는게 좋은 부모고 좋은 판사인가요? 자신의 입맛에 맛는 신을 찾거나, 신이 사람들 마음 속에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세계관을 이해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좋은 신이라면 모든 걸 눈감는게 아니라 커리큘럼으로 운행하고 잘한 것은 칭찬하고, 못한 것은 훈계해야죠. 신마저 정의에 눈 감기를 원합니까? 다른 글에 본인을 천주교인으로 언급하셔서 그런 줄로 압니다만 하느님이 사람 맘속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제3자로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단적 이신론자가 아니고서야 왜 신의 정의로운 심판을 그릇되고 악마적이라 하십니까? 링컨 대통령 연설에 노예노동으로 쌓아 올린 부가 다 무너져도 신의 심판은 정의롭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구약을 인용한건데 그 사람도 기독교 근본주의자입니까?

    그리고 낙타 바늘귀 이야기가 성생님께서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리스도교(이점에서는 가톨릭까지 포함해서) 문화를 잘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저건 부와 권력, 기회, 성공 등이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세상에서 가질 거 다 가진 사람들은 신을 찾지 않기 때문에 멸망길로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가리켜 부정한 창녀, 세리 같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비난하자 예수는 말하기를 병든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모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인 즉슨 너희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병든 줄 모르고 의사인 나에게 오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고, 이들 창녀나 세리같은 자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알고 나에게 나아오니 내가 구원할 것이란 말입니다. 성서적 지식을 자기 편한대로, 혹은 어느 공산주의 서적에서 읽어서 기술하면서 그게 무슨 주류 해석인것처럼 자랑하니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예수와 바울을 분리해서 공부하는 것도 근대 역사주의적, 비평성서학적, 자유주의 신학적 관점에서나 성립하는 것이지 원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주교는 1900년대 초에 이미 교황에 의해 '근대주의'라는 이름으로 해당 신학을 이단으로 공표했고 개신교 내에서도 자유주의가 주 노선은 아닌데 예수와 바울을 분리해서 공부하는 것을 당연한 것 처럼 이야기하는게 맞는 걸까요? 불교가 궁굼하면 스님에게 묻고, 기독교가 궁굼하면 신부나 목사에게 물어야지 자신 편한대로 기술하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투성이의 이야기를 하고는 소양이 쌓인 후 찾아오라니 여기에 무슨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쭉 읽어보니 진보논객이신 듯 한데 저도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복지를 진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진보고 저 또한 신자유주의를 싫어합니다. 고용을 유연하게 만들어 국민들이 생각하게 만들기 보다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 스스로 돈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뉴라이트의 문제를 확대시켜서 그 큰 근본주의 기독교와 엮고, 예수의 의도나 성서에 대한 지식은 없이 기독교 세계 변두리의 주장으로 숲을 해석하려는 시도, 반공과 친일을 구분 못하고 가톨릭의 일제 수난사 같은 거짓 역사 자료로 이야기를 돌파하려는 점은 정말 이 원글과 덧글의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 늙은도령 2015.05.28 18:50 신고

      내 분명히 말하리다.
      글부터 정확히 읽고 댓글을 다십시오.
      당신은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경직돼 논리를 전개할 뿐이어서 정치학적으로도 저급한 수준의 글입니다.
      공부를 제대로 한 다음에 답글을 다십시오.
      당신은 민주주의의 역사와 철학, 사상의 발달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요.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도 형편없고요.
      기본적인 지적 수준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토론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니 기본적인 지식부터 갖춘 다음에 오십시오.
      공자, 맹자, 묵자, 한비자, 노자, 장자 등등 제가백가에 대해 기본적인 것이라도 읽고 숙지하면 답해줄 테니.

      민주주의의 기원을 말할 때 과거의 철학부터 찾아가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공산주의의 전형이 실현된 것은 천주교 초기공동체만이 유일했으니 공산주의의 근원도 그렇게 오래됏습니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로 고대의 철학에서 찾습니다.
      어떤 체제도 그저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책도 읽어보고 그들의 신화가 상당 부분 조작됐다는 것도 함께 읽어보고, 미국의 보수 반동을 이끌었던 주역이 좌파에서 전향한 신보주의자임도 공부하시고, 그들이 어떤 문화전쟁을 진행했는지도 찾아보시고, 미국이 어떻게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는지도 찾아보시고, 당신의 눈을 제대로 열어줄 것들은 널려 있으니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글을 정확히 읽고 먼저 이해한 다음에 댓글을 달아요.
      기독교 근본주의가 왠 예수와 연결되냐고요?
      글에서 바울이라 했는데 왠 예수?
      글부터 제대로 읽고 숙지하는 것이 먼저고 예의입니다.

      어떤 기독교도 공산주의가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구체적인 근거를 대십시오.
      마르크스가 종교가 아편이라는 말만 듣고 어림진작 말고요.
      기독교의 종류가 얼마나 많고 기독교의 여러 분파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가와 공동체 건설까지 나왔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거듭 말하지만 당신의 지식으로는 나와 토론이 안 됩니다.
      당신은 댓글 자체에서도 오류가 있어요.
      기독교와 천주교에 대한 이해도 형편없고요.
      종말론적 예언을 이용해 기독교 우파가 근본주의자로 발전한 것이니 이것도 더 공부하시고.

      예수와 바울에 대해 수없이 많은 정치종교철학자들이 다루었으니 찾아보시지요.
      당신이 찾아서 읽을 생각만 있으면 넘칠 정도로 많으니.

      참고로 기도교 우파의 복음 같은 책들은 소개해줄 수 있으니 읽어보실 의향이 있으면 알려드리리다.
      기본적으로 종교던 신학이던 사회던 과학이던 철학이던 역사던, 특정 분야를 비판하려면 찬반 양쪽을 모두 습득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사유와 성찰이 깊어지면 양쪽에서 최고에 이른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받는 석학들로 넘어가야 하고요.
      그렇게 해야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이 생깁니다.

      비판이라는 게 한쪽의 주장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고요.
      기독교 우파와 근보주의를 비판하려면 기독교 우파와 근본주의에 대해 먼저 공부해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어떤 논리와 기원,역사를 가졌는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읽었고 사유했고 노력했으니 함부로 떠들지 마시고.

      마찬가지로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도 수백 권의 경제서적을 통해 그 출발부터 지금까지 쭉 공부했고 공부하고 있으니 이것에 대해서도 함부로 예단하지 마시고.
      미국의 역사와 그들이 세계에 미친 영향에 관한 것도 수백 권이 넘게 읽었으니 비판이 가능한 것이니 그리 아시고.

      이런 글들도 아무 소용이 없음은 당신이 내 글이나 답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와 토론하고자 하면 각 분야에 대해 더 공부하고 지적으로 성숙되고 철학적으로 확고해졌을 때 오십시오.
      기본적인 예의와 수준이 되면 그때는 밤새도록 토론합시다.
      이런 시간도 아까운 사람이니 이것으로 답글은 끝낼 생각입니다.


  4. 머무는바람 2015.05.28 18:57 신고

    항상 잘보고 갑니다.

  5. 로널드 2015.05.28 21:17

    어차피 토론을 끌어나가기 보다는 너는 내 상대가 아니니 물러나거라는 식의 짧은 답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려 하시니 저도 이 글을 끝으로 그만 두지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살아있는 현실적 문제로 해석한 것이라면 몰라도 학문적이고 기초가 되는 이론적인 선에서 제 이야기에는 흠결이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본래 모순되는 의미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모택동은 공산주의자이며 동시에 역사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동양사상을 몰라서 공자를 배척했겠습니까? 중국이 중국식 프롤레타리아 독재민주주의를 하면서 공자를 비난하고 배척한 까닭이 분명하건만 선생이 스스로 견주어 마오쩌둥 수준이라고 판단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공산주의의 전형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천주교라고 애써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굼하군요. 정교도들이 알면 서운할 겁니다. 그리고 언급했듯 그건 지금의 공산주의와 유사한 것, 교회사적으로 보면 신의 도움으로나 가능했던 이야기지요.

    그리고 본문 중간에 예수와 바울이 언급됩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공산주의적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을 비판한 겁니다. 본문을 제대로 안 읽은게 아니죠. 그런면에서 제게 예의를 이야기 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더 예의가 없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가 양립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 것 때문에 그렇게 주장했을 것이다라고 어림짐작해서 넘겨짚는 것이 아닐런지요. 소수 기독교도가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게 주류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면 그 얼마나 무모한 행보입니까? 또한 특별히 공산주의자이면서 기독교도인 사람들이 신의 도움 없는 유토피아 건설이 가능 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판단하시나요?

    종말사상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기독교와 가톨릭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게 아니라 선생님 주장이 비주류인거죠. 지금껏 선생님이 주장했던 바늘귀 같은 이야기를 신부님들에게 한번 물어볼까요? 어차피 그렇게 물어본다한들 추기경들에게도 순명하고 싶어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이신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들이 무식한 것이라고 이야기 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선생님에게 가톨릭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굼하군요. 타자로써의 하느님을 믿기는 합니까? 참된 가톨릭 신자라면 찔릴 이야기를 해볼까요? 성령의 도움 없이 악한 인간이 결과론적으로 문제가 없는 유토피아,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 할 수 있을까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독재정부를 스스로 제거 할까요? 인간사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진짜 신자라면 양심을 속이지는 마십시오. 인간이 악하다면 진보는 수단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누릴 수 있는 수단. 하지만 그것도 허울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선량하지 못합니다.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1%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으면 하느님도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셨겠죠. 아들을 죽일 필요가 없었을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안 보였으니 구원을 위해 성자를 보냈겠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유토피아를 건설합니까? 양심에 비춰 말해보세요. 그게 가능한 것인지. 말끝마다 성경을 운운하는게 근본주의가 아닙니다. 그냥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뿐이죠. 성경과 교회사를 읽어보십시오. 마침 위에서 언급하신 것 처럼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없어요. 기독교 우파가 종말론을 발판삼아 성장했다는건 진짜 짧은 교회사를 가지고 지식을 늘어놓은 것이죠. 종말론이 갑자기 나온 것 처럼 이야기 하시는 건 이상한 겁니다.

    빈정이 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도 한 마디 말을 하고 가겠습니다. 선생님이 온라인 여기저기서 많은 인지도를 가지시고 여러 기사에도 출현하시며 지식이 많으신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감히 한마디 이야기하자면 책을 다독할 때에 주의할 점은 지식을 쌓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다독으로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을 목적 삼는 것은 교만의 지름길입니다. 책은 지혜를 얻기 위해 읽었을 때에 깨이는 것이지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 할 때에는 그저 남보다 우월함을 이야기하는데 쓰일 뿐입니다.오늘 날의 토론 자세를 보십시오. 만일 제가 부족하다한들 설명 할 것 같지 않았으면 무엇하러 세상에 보라고 이런 사이트를 만들어 둡니까? 그냥 혼자 생각하면 되지 다음 같은 곳에도 올려두시고. 수준을 이야기하면서 예의를 언급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남을 계도하고 싶다면 가르치면 될 일입니다. 또 옳지 않은 정보를 가졌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십시오. 세상에 소리는 지르면서 맞지 않는 자와는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모습,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라면서 한쪽으로 아주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선생님 충고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많은 지식을 가졌으되 남의 수준에 맞게 전달하지는 못하며, 지식을 무기로 알되 지혜가 부족하다면 그게 무슨 세상을 바꿀 광야의 소리요 국가와 민족의 씨알이겠습니까. 권위에 찬 보수는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지식과 지위를 무기로 삼고 다른 이를 가르치지 않거나 무시한다면 보수와 다를 것은 고사하고 씨알의 소리로 거듭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까운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어니 회이트 2015.05.28 21:54

      도령님께서 장문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시는 걸로 보이는건
      모든학문이 독립적인게 아니고 상호 관계속에서 이루어졌단 겁니다
      학문의 역사는 철학 역사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의 전반이 두루 발전해왔는데 님의 글은 정치와 철학이 무슨 관계냐 할정도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28 22:44 신고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본주의나 원리주의자가 그러합니다.
      종교가 맹신을 요구할 때 가장 잘먹히기 때문에 나온 인지부조화의 전형입니다.

      세상을 망치는 세력과 함께 움직이는 종교가 기독교 우파인데 기본적인 것부터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너무 신경쓸 것 없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도 없고,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하고,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도 모르는 사람과 무슨 얘기를 합니까?

      로널드라는 사람이 하는 말은 기독교 목사들과 토론하며 수없이 듣고 들었던 얘기들입니다.
      원래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과 얘기하면 늘 이런 식이기 때문에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악마와 천사가 원래 같았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6. 耽讀 2015.05.29 07:38 신고

    일제강점기 때만해도 기독교는 저항하고, 인민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침레교장로)이 권력을 잡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에서 남하한 근본주의는 반공주의와 결탁합니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었습니다. 영락교회(한경직 목사)는 서북청년단과 손잡고 제주4.3항쟁에서 수많은 이들을 죽이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박정희와 조용기, 김준곤 등과 손잡고 철권통치 행사했고, 기독교는 양적 성장을 했습니다.
    기독교근본주의와 반공주의는 동고동락할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29 14:47 신고

      일제강점기에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까지 일제에 저항했지요.
      일부는 친일부역을 했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저항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와 기독교 근본주의 우파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국가와 거래를 시작한 것만이 아니라 정치에도 참여해 나를 개판으로 만들고 있으니까요.

      조용기 목사는 제가 나온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담당목사였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성공해 순복음교회까지 발전했습니다.
      저는 순복음교회와 국민일보와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용기의 아들들과 사업을 한 것이지요.

      그들은 이미 종교를 사업화했습니다.
      그렇기에 보수정부와의 거래를 적극적으로 한 것이지요.
      기독교 우파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악마입니다.
      예수를 팔아먹는 자들입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의도 예수의 가르침을 호도한 것입니다.
      성경에 자본주의에 딱 들어맞는 예가 두세 개 나오지만 그것은 믿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는데 성경에 나온 글자만 악용해 고리대금업을 하고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청교도 정신으로 차용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두 군데, 신명기에 한 군데 나옵니다.
      그렇다 보니 사업적 이유로 공산주의를 부정합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공산주의적 가르침을 설파했습니다.
      신의 권위는 공산주의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헌데도 기본적인 지식도, 성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자들이 악용하고 있습니다.



  7. 공유의 플랫폼 2015.05.29 19:39 신고

    황교안은 정말 편향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인것 같습니다.
    게다가 만성담마진이라는 이상한 질병으로 면제를 받은것을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 늙은도령 2015.05.29 20:08 신고

      믿을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유신독재와 군부독재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공안 검사를 믿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그는 법무부장관으로도 과한 사람일 뿐입니다.



‘탐욕의 삼위일체’가 주도한 이런 과학의 궤도 이탈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과학이론(또는 결과물)이 나왔을 때 다른 과학자들이 그것을 실험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도 부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과학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정상과학의 위치에 들어선다는 정상과학론을 구조화했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과학이론이 나오면 똑같은 과정이 과학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 한층 진전된 정상과학이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렇게 정(기존의 정상과학)-반(반대 또는 대립되는 과학 이론의 등장)-합(과학적 검증을 통해 다시 정립된 새로운 정상이론, 이것이 다시 ‘정’이 되고 변증법적 발전이 지속된다)의 순환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과학혁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영구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하늘에 별이 빛나는 한, 우리가 하늘을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고 모든 장애물들을 돌파해나갈 것이다.



과학의 부정적 입증에 철저하게 파고든 칼 포퍼와는 달리 토마스 쿤이 공식화한 계몽의 변증법적 해석에 따라 과학혁명은 영원한 발전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쿤이 무한대의 발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언젠가는 과학의 진보도 한계에 이를 것이라 했지만ㅡ이것에 관해서는 포퍼도 마찬가지다ㅡ이는 자신이 정립한 과학혁명의 패러다임 이론과도 모순에 처한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극에 이르면 내부로부터 붕괴해 유토피아(자유의 왕국)에 이른다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물론 이런 방식에 대해 닐 포스트먼은 《테크노폴리》를 통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진술의 조건을 검증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은 정반대다. 과학적 진술은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 진술과 구분된다. 과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깨닫는 능력이다”라고 주장하며 칼 포퍼의 이론에 반박을 표하기도 했지만, 세상이 다시 뒤집히는 지금에 와서는 포퍼의 주장이 정확했던 것 같다(장하석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철학에 접근하기에 대단히 좋은 길을 제시한다). 



어쨌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패러다임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분야로 넓혀져, 과학혁명에 대한 맹신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돈이 되는 모든 것은 전문화된다’고 말한 것처럼, 비전문가에 대해 또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과학자들과 대안과학자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전문성이라는 높은 장벽을 구축한 과학자들은 그들만의 천국에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하고 있고, 할 것이다).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이 탄생시킨 진보의 과정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면서 지적 모순을 바로잡을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런 배타적 독점권(파벌을 이루는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은 높아졌고, 부작용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데 쉬워졌으며, 문제의 해결도 같은 부류의 과학자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또한 과학연구가 대학과 기업으로 넘어감에 따라 반드시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과학자들의 목을 조여 왔다. 투자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확실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황우석 교수와 만능세포 발견과 취소를 거듭한 일본의 젊은 과학자처럼 완전하지 않는 연구결과를 조작해서 대규모 사기를 벌이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한국 교수들의 학위논문을 전수조사 하라,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지니!). 





이들은 인류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들이 일정한 부작용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과학자가 책임을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중립적인 면책특권을 이용해 부작용이 속출하는 연구결과물들을 대량생산과 전문서비스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어떤 것이든 시장 시스템으로 넘어가면 오직 한 가지 목적, 이윤만 추구되기 때문에 부작용들의 확산과 축적은 막을 도리가 없다. 시장이 알아서 다른 것들로 대체할 때까지 악순환은 계속된다.



문제는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극도로 세분화되고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의 타당성과 윤리적 방법에 대해 사전에 검사할 수 없고, 당연히 연구의 결과물의 장단점과 문제점을 생산단계 이전에 확인할 수 있는 지적검증부대(벡이 말한 대항과학이나 대안과학 또는 대안전문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문제의 결과물이 알려진 것보다 부작용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경우(토지 오염과 사막화, 이에 따른 물 부족 사태와 생태계 파괴, 미세먼지 같은 스모그의 일상화, 지구온난화와 각종 기상이변, 무조건 인재인 파멸적인 원전 폭발과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공포와 스트레스의 폭발적 증가 등)에도 리콜조치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또한 제품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과학자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과학은 그림자 영역 속으로 들어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전 예방이라는 최상의 방법은 이윤 추구에 굴복해 영원히 취해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정치만이 아니라 전문화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만연되고 제도적으로 고착화된다. 지금 기업의 연구소에서, 또는 기업의 의뢰로 개인연구소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적 영역을 보호해주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상의 체제가 되며, 삼권분립이라는 정부 구조가 책임의 분산을 자초하거나 유발하는데 일조했다. 문제가 발생해도 합법적 면죄를 받거나 최소한의 형량과 벌금으로 과학의 부정적 결과는 모든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비자가 입은 피해는 (거의) 보상받지 못한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상은 과학자들이 연구의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위험과 위협을 조직적이고 객관적으로 해석’해 부작용에 대해 투명하게 밝혔는지, 아니면 ‘경시하거나 은폐했는가’로 판정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과학적 결과물을 독점하는 산업자본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이것조차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상태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힌 것처럼, 무분별한 과학적 결과물의 산업화와 서비스화에 따라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사회계급이 발생했고, 공통된 계급의식과 연대의 가능성이 없는 개인화된 이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비대칭적 종말에 무방비상태로 놓여 졌다는 경고가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오염과 중독에 대한 기준치는 개별적으로 제시되고, 그 기준치의 근거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눈으로 보이고 만성질환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음에도 숫자의 제시는 개별 기준치들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접촉하는 가운데 모든 기준치들의 총합은 개인의 인체에 축적되고 있다. 이는 과학적 부작용을 전체 인류를 상대로 한 자연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인체가 과학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의해 공인된 그래서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침묵의 암살자가 등장한 것이다.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종교입문서나 헌법 같은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쿤의 주장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과학혁명에서는 소득 못지않게 손실도 따르며, 과학자들은 손실에 대해서는 유독 맹목적인 경향을 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통한 진보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권위의 성격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공식화, 즉 과학에서 힘은 곧 정의라는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그리고 특히 비전문적 권위가 패러다임 논쟁의 조정역을 한다면 그들 논쟁의 결과는 혁명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이 존속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 사회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가는 과학 활동에 대하여 인류가 보인 이해력의 부족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모든 문명의 기술, 예술, 종교, 정치체제, 법률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문명의 이러한 영역들은 우리들의 문명에서만큼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었던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 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다른 시대는 과학적 생산 활동이 나타나는 그런 특별한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은 스스로 과학화됐다. 일체의 도전과 자기성찰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위계적 학제와 권위주의적 파벌 속에서 ‘과학에 대한 비판, 진보에 대한 비판, 전문가에 대한 비판, 기술에 대한 비판’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과학의 진보를 믿지 않는 자들과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정신병자나 비합리적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칼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도달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서로 경쟁하는 가정들과 그 가정들이 실험적 증거를 거쳐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에 관한 정보”에 불과한데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진리로 확정이나 된다는 듯이 그들만의 리그에 안에서 과학적 정의는 물론 사회적 정의와도 거리를 넓혔고, 스스로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을 평균 이상의 소득과 승진, 명성으로 대체해버렸다. 





과학은 또한 인간 구원에 대한 최종적 믿음을 종교로부터 빼앗아 갔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인류 해방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한 과학자집단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과학자집단이, 그러나 둘은 지향하는 결과에서는 동일한 비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방법에 대해 극단적 논쟁에 돌입하지만, 비전문가들은 논장의 밖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신자유주의가 번성한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진리의 도움을 받는 활동에서 진리없이 활동’했으며 ‘내적으로 과학은 더 이상 의사결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는 위험의 전 지구적 확산이었고, 유일한 성과물이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윤을 쌓아준 것이다. 



과학은 이제 자신을 반성적으로도 비판적으로도 바라보지 않으며, 돌아오는 이익과 승진에의 욕망, 목을 조여 오는 연구자금의 사슬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됐으면서도 진리의 담지자이자 지배자로서의 역할은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책임이 사라진 곳에서 연구방법과 부정적 결과에 대해 윤리적으로 고민할 과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서의 파벌은 경제학에서의 파벌보다 더욱 심하다는 사실은 여러 과학자들의 고백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과학도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한 채 현실에서 멀어진 것도 이런 파벌의 부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벡의 지적처럼, 과학의 결과물을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과 다양한 종의 멸종 같은 파괴적인 결과들이 속출하는데도 불구하고, 산업적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과학은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들을 제거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다시 산업화해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이윤 창출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움직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원인은 애매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고, 각종 실수와 문제의 변형을 시장의 활성화에 내맡기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과학실천에서 ‘학습과정은 체계적으로 단축되며 저지’됨에 따라 각종 질환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인류는 당뇨병, 암, 심장병, 우울증, 비만, 호르몬 장애, 자살 충동 같은 문명질환의 무방비상태로 놓인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문명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화의 동력이 창출된다. 결국 “더욱더 많은 영역에서 산업은 문제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무시한 채 자신이 이차적으로 유발한 문제들에서 이윤을 얻고 있다.” 부작용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변하면서 과학은 갈수록 무오류성의 신화를 대중으로부터 압박받으면서도, 과학이 도달할 무오류성 때문에 모든 부작용들을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는 과잉전문화에 매몰되면서 ‘한없이 뒤로 후퇴하는 자가동학적 진보의 신화’를 연일 써나가고 있다. 




1986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위험사회》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적 부작용의 원인을 이차적인 산업화의 동력으로 삼는 과정을 가장 일반적인 화학산업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지만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살충제와 미국이 베트남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의 땅으로 만들겠다며 무차별적으로 퍼부은 네이팜탄과 고엽제가 화학산업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장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화학산업은 유독폐기물을 생산한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해결책’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폐기물 문제가 지하수 문제로 되는 것이다. 화학 및 여타 산업들은 음료수의 ‘정화장치’를 판매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서 이윤을 얻는다. 이러한 정화장치로 거른 물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경우에는 약을 먹으면 되며, 따라서 그 ‘잠재된 부수효과’는 정교한 의료체계를 통해 차단하고 연장된다. 이런 식으로 과잉전문화의 정도에 따라 문재해결과 문제생산의 사슬이 형성되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이차적 결과라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금 완전히 ‘확증한다.’ ‘객관적인 제약들’과 ‘자기 동학’이 발생하는 원형구조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그 협소함, 방법과 이론에 대한 그 이해, 그 경력 사다리 등에서 과잉전문화된 인지적 실천의 모델이다. 극한까지 추진된 분업은 이차적 결과, 그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이 ‘운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현실 등의 모든 것을 생산한다. 과잉전문화는 자기확증하는 순환 속에 결과의 운명론을 집중시키는 능동적인 사회적 실천모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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