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인류의 삶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수없이 많은 석학들이 다루었던 것이지만, 과학과 기술공학의 발전과 정보통신기술의 영향을 가장 잘 파악해낸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와 니콜라스의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유리감옥》, 바우만의 《액체근대》, 라이언의 《감시사회의 유혹》 등을 중심으로 다루어보는 것이 더욱 오늘날의 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광속으로 움직이는 ‘가벼운 경제’의 시대에서는 세상의 변화를 모두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이르러서야 날아오른다’는 헤겔의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문화에 대한 기술-경제적 발전의 영향력은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에서 보여준 것처럼, 신화(지배권력의 정통성을 창출함과 동시에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와 착취에 초월적 정당성으로 미화되기 일쑤다)와 계몽의 변증법(인류가 파멸에 이를 때까지 계속돼야 멈출 영원한 진보가 핵심이다)이 뒤엉켜 있는 고대의 신화적인 서사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는데, 그런 서사의 끝에 이른 현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서사는 의미만 다룰 뿐,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문화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완벽한 성찰을 보여준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보여준 구조주의적 인식들을 차용해 벤야민의 역사인식 개념을 활용하려고 한다. 



비록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역사개념이 ‘비변증법적’이라고 비판했지만, 보편적 도구인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정보사회에서 《미디어의 이해》의 저자, 마셀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한 것이 진리라면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적용한 방식이 현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보다 적절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진보의 모든 성과와 폐해들이 모두 녹아내려 높은 온도의 액체처럼 유동하는 상태가 현대성을 대표하는 상황에서는 ‘지금시간’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끌어내 거기에 포함된 모든 내용(역사라는 시공간이 압축되어 있는 씨앗)을 다루어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속도가 공간을 극한까지 압축하면서 지배 권력의 원천이 유지되는 세상에서, 그 파시즘적 속도에 맞춰 시대 전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란 단 한 명도 없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무엇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뒤집힌 세상이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있으며, 그 다음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유동적인 상황에서 오직 비대칭적 종말만이 확실하게 예약되어 있을 뿐이다.



역사주의가 보편사에서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방법론적으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역사보다 바로 이러한 보편사와 비교해 보면 아마 가장 뚜렷이 구별될 것이다. 보편적 세계사는 아무런 이론적 장치도 갖고 있지 않다. 보편사의 방법론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것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사유에는 생각들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유는, 그것이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 속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상황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그 상황은 하나의 단자로 결정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적 대상에 다가가되, 그가 그 대상을 단자로 맞닥뜨리는 곳에서만 다가간다. 이러한 단자의 구조 속에서 그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시, 달리 말해 억압받은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의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균질하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폭파하며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 기회를 포착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이러한 방법론에서 얻어지는 수확은, 한 작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파악된 것의 영양이 풍부한 열매는, 귀중하지만 맛이 없는 씨앗으로서의 시간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메시아적 시간 모델로서 전 인류의 역사를 엄청난 축소판으로 요약하고 있는 지금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루는 앞의 모습과 엄밀하게 일치한다.



별도의 글로 다루겠지만, 관료주의적 정신과 기술공학적 사고는 주어진 현실을 가장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데만 목표가 있기 때문에 지금시간의 이미지에서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역사의 시간들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현재를 이해하는 원천(그것은 미래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미래의 결과란 지금시간에서는 단순한 예측일 뿐이어서 미래의 영역에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언제나 미래의 풍요를 위해 지금시간으로서의 자신을 착취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지배세력의 도구가 된다)으로 작용하는 벤야민의 접근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관료, 즉 공무원들과 기술공학적 사고에 익숙한 전문가는 오직 미래의 결과만 보고 현재를 파악한다. 그들은 오직 과거의 결과로서의 현재를 기반으로 해서 모든 사유를 출발시키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계몽적 변증법이 명하는 데로 무한한 진보를 위해 현재의 문제를 푸는 데만 열중한다. 이런 가치중립적이고, 효율성과 경제적 편익만 따지는 사고방식은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인류를 예측불가능한 미래의 파국으로 내몰곤 한다(물론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극히 드물고 그것 역시 자본의 수중에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들은 진보의 흐름이 영원하다고 보기 때문에 폭주하는 기차를 멈춰 세운 후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목적지로 가는 다음 역까지만 중요하고, 거기까지 가는데 필요한 비용-편익 분석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대화하는 데만 집중한다. 계몽적 변증법이 고착화시킨 결과의 낙관론이 이들의 인식과 행태를 결정하며, 그 밖의 것들은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폄하한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이들이 내세우는 최후의 변명이자 전매특허이고, 따라서 기술공학적 처리과정에서 발생하는 치명적 부작용은 진보의 길에서 나오는 부수적 피해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기술공학적 사고가 지배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은 ‘탐욕의 삼위일체’가 손을 잡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졌다. J. M. 케인즈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신자유주의의 선조들에 책임을 묻는 근거로 사용한 “사회가 부유하면 할수록 실제생산과 잠재생산과의 사이의 간격은 클 것”이며, “따라서 경제체계의 결점은 더욱 명백하고 또 포악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는 기술-경제적 발전의 부작용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대부 중 한 명으로 회자됐던 밀턴 프리드먼이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자유주의는 대내적으로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개인의 역할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자유방임을 지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세계 각국을 평화롭고 민주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했다”며,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자유롭지 못한 정치제도의 조합도 분명 가능하다”고 말한 것에서 유추하는 것도 정치경제적 시각에 한정되기 때문에, 초위험사회가 도래한 현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술-경제적 발전을 국민국가와 자본과 함께 주도해 온 기술공학적 사고가 시장 만능의 산업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결정적 순간은 칼 폴라니가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에서 가장 잘 포착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제로 인간은 그러한 이론이 요구하는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 시장의 원리가 인간이 물질적 재화에 의존하고 있음을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이 단지 ‘경제적’ 동기 때문에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인간은 여전히 놀랄 만큼 ‘복합적인’ 동기들에 근거해 행동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복합적인’ 동기는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의무를 포함할 수 있고 또 노동 자체를 은근히 즐기는 것도 포함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동기들이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가정된 동기들이며, 심리학이 아니라 영업적 사회의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기초하고 있다. 일단 사회가 그 성원들의 일정한 행동 양식을 예측하게 되고 지배적인 사회 제도들을 통해 그 행동 양식을 대충 강제해내기에 이르면,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들은 그 행동 양식의 이념형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명예와 자부심, 공민으로서의 책무와 윤리적 의무, 심지어 자기 존중과 도덕마저도 생산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고, 의미심장하게도 ‘이상적’이라는 함축적인 단어로 요약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어지게 되었으니, 하나는 굶주림과 이익에 가까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명예와 권력에 가까운 것이다. 전자는 ‘물질적’인 것이며 후자는 ‘이상적’인 것이다. 전자는 ‘경제적’인 것이며 후자는 ‘이상적’인 것이다. 전자는 ‘합리적’인 것이며 후자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이 두 쌍의 말 묶음을 확실히 정리했으며, 인간 성격의 경제적 측면에 합리성이라는 신비로운 후광을 씌우기에 이르렀다. 모두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도록 되었고, 혹시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면 반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미친 사람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불루이글 2015.07.21 09:05 신고

    오!
    정말 도령님의 지식의 부요함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찍히 말씀 드리자면 부끄럽게도 저는 너무 심오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령님이 쓰신 글이니 좋은 글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 합니다.

    저는 같이 공감 할 자질이 없지만 이해하고 공감하는 분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줄로 믿으며 대신 공감 버튼 눌러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21 15:51 신고

      이 글은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인데 퇴고를 못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것들 때문에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합니다.
      써 놓은 양이 너무 방대해 고민입니다.

  2. 백순주 2015.09.04 10:17 신고

    공감을 눌러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열어보고 한 줄 읽고는 후회했습니다.
    대학 1학년 전공수업시간이 떠오릅니다. 적성도 관심도 없는 커트라인에 맞춰 지원한 대학수업이란 게 온통 외계어 뿐이었으니까요. 교수님은 알고 수업을 하고 계신지 의심까지 들었습니다.
    위편삼절이라고 했던가요? 100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한다고 했나요?

    죄송합니다. 말이 많네요.

  3. 아오타케 2016.05.17 23:12

    외국인 학자 이름 나열이 뭐가 그리 중요하며, 그들의 학설이 세상을 대표합니까?
    식당 건물이 멋있고, 인테리어가 멋있다고 음식맛이 좋습니까?
    물 엎질렀다고 탓하지만 말고, 물이 엎질러지지 않게 하려면 어쩌면 좋은지 그 방법을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알려 줍시다.
    그것이 현대 지식인들의 지향점이어야 하는데, 엎질렀다고 주먹질만 해대고 있으니...
    어느 보약이든... 부작용은 있는 법입니다. 당신이 서 있으면 발밑에 밟힌 초목 벌레가 있을 테고, 서 있는 그늘밑에는
    활동 중지된 미생물이 주먹질 하고 있을 겁니다.
    사람 사는 것 쉽습니다. 어린아이들 같이 천진난만.. 어린아이들 같이 상식대로만 살면 되는 겁니다.

  4. 시골잔차 2016.07.11 20:34

    저의 무식함이 처절히 탄로 났습니다.

    무슨 말인지 넘 어렵네요 ㅎㅎ

    담에 또 정독해야겠습니다.

    딱딱한 음식이 이에 이롭듯이 , 어려운 글이 뇌를 단련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뇌를 각성시켜주셔서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ㅎㅎ

    • 늙은도령 2016.07.11 23:13 신고

      이 글은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한방 먹이려고 쓴 연재글입니다.
      원래는 출판을 목표로 했던 것이고, 퇴고를 거치지 않은 압축본입니다.
      지식인들의 지적사기를 고발하고자 하는 목적이라 어렵게 썼지만, 인공지능을 공부한 뒤 이 작업이 별로 유용하지 못함을 알게 됐습니다.
      시간이 되면 쉽게 풀어낼 생각입니다.
      본격적으로 쓸 때를 대비해 굵지한 것만 다루었기 때문에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시간이 주어질지 걱정이지만.....


구글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디지털 세대이거나, 과학자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를 이룬다. 저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또한 돈 때문에 사악하지 말자는 구글이 가장 사악하게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글의 두 창업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구글의 사악함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엔지니어적 상상에 미쳐 있는 두 사람이 인류가 가야 할 새로운 세상을 안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의 창업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구글의 역사라는 것도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구글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새로운 인류를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작금의 현실을 만들었고, 구글의 미래가 결코 인류의 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터넷 중독과 함께 최근에 들어서는 스마트폰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돈 앞에서 사악하지 않겠다는 구글 창업자의 다짐은 이미 주주들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행태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변질을 가져 왔다.  

 

 

기술은 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이 꿈꾸는 최종 목적지는 기술이 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임을 두 창업자와 최고경영자는 끝까지 부인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쌓여 기술이 적이 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외우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주문한다. 기술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은 기술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 책과 함께 《죽도록 즐기기》와 《테크노폴리》,  《구글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함께 읽으면 균형잡힌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때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성찰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다.   

 

 

 

 

 

인간의 뇌가 지닌 놀라운 복잡성

 

다른 모든 세포들과 마찬가지로 뉴런들 역시 보편적 기능들을 수행하는 핵과 체세포를 지니고 있으나 촉수같이 생긴 축색돌기, 수상돌기라는 부분을 지니고 있어 전자파를 받고 보내는 역할을 한다.

 

뉴런이 활동할 때 파동은 체세포에서 축색돌기 끝으로 흐르는데, 이 돌기에서는 신경전달물질이 분출된다. 이 신경전달물질은 오늘날에는 시냅스라고 불리는, 프로이트가 접촉 장벽이라고 명명했던 곳을 지나 흐르다가 이웃 뉴런의 수상돌기에 들러붙는다.

 

그 결과 세포 안에 새로운 전자파를 발생시킨다. 이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들 사이에서 이곳저곳으로 흐르면서 뉴런들은 서로 소통하고 복잡한 세포의 통로를 따라 전자 신호의 전달을 감독한다. 사고와 기억, 감정들은 모두 시냅스를 통한 전기화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인간의 두개골 안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존재하는데, 이 뉴런들은 1밀리미터도 채 되지 않는 것에서부터 몇 피트에 이르는 것까지 그 길이와 모양이 다양하다.

 

                                                                   

 

각각의 뉴런에는 많은 수상돌기들이 달려 있는데, (축색돌기는 하나만 존재한다) 축색돌기와 수상돌기의 끝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그만큼 많은 시냅스의 통로가 존재한다.

 

아직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한데 결합시키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인격을 결정하는 복잡한 회로 속으로 이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뇌의 물리적 작동 방식에 대한 인류의 지식 확대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 있는 오래된 가정이 하나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생물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은 성인의 뇌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우리의 뉴런은 아직 말랑말랑할 때인 어린 시절에는 회로와 연결되지만 이 회로는 성인기에 이르면 고정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관점에 따르면 뇌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유사하다. 유년기에 어떤 틀에 맞춰진 모양이 만들어지면 최종적인 모양으로 재빨리 굳어버리는 식이다. 20대가 지나면 새로운 뉴런은 전혀 생성되지 않고 새로운 회로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일생 동안 새로운 기억을 계속 저장하지만 (그리고 오래된 것들 일부는 잃어버린다) 성인기에 거치게 되는 유일한 구조적 변화는 신체가 노화하고 신경세포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느린 속도의 쇠락에 불과하다.

 

제임스는 "흐르는 물은 더 넓고 깊게 진행하면서 스스로 수로를 만들어낸다.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흐를 때는 이전에 스스로 파놓은 길을 따라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부 물체에 대해 받은 인상들은 우리 신경 체계 속에서 적합한 길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이 같은 살아 있는 통로들은 한동안 막혀 있다가도 비슷한 외부 자극을 받을 경우 되살아난다"고 했다.

 

                        
  

우리의 뇌는 변할 수 있는가?

 

머제니치는 잘린 신경조직이 재생되는 과정에서 생긴 혼란을 뇌가 스스로 재정비했음을 알아차렸다. 손의 신경에서 발생한 재배치와 일치하도록 동물의 신경 통로 역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머제니치 이후 30년에 걸친 더 많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다 큰 영장류의 뇌에 광범위한 가소성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그는"이들 결과는 감각 체계를 일련의 내장된 기계 구성으로 보는 시각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선언했다.

 

뇌의 가소성은 접촉에 의한 감각을 좌우하는 체성감각의 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었다. 결국 우리의 모든 뇌 회로는 감각, 시각, 청각, 동작, 사고, 학습, 인식 또는 기억 등 어느 것에 관여하든 변할 수밖에 없다. 널리 인정받던 지식도 언젠가는 버림받게 된다.

 

 

 

 

 

 

 

 

뇌의 가소성

 

올즈의 관찰에 따르면 "뇌는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과거 방식을 바꿔 스스로를 새롭게 정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뇌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재정비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지고 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시냅스의 풍부한 화학 물질 안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뉴런 사이의 미세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극도로 복잡하지만 신경 통로에 경험을 등록하고 또 기록하는 다양한 화학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감각을 경험할 때마다 뇌 속에 있는 일련의 뉴런들은 가까이에 있을 경우 아미노산 글루타민산염과 같은 시냅스상의 신경전달물질을 교환하면서 결합한다.

 

같은 경험이 반복될 경우 뉴런 사이 시냅스 간 결합은 보다 농축된 신경전달물질의 배출과 같은 생리학적 변화나, 기존 수상돌기와 축색돌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시냅스 끝부분에 새로운 뉴런의 생성을 이끌어내는 등의 해부학적 변화를 통해 더욱 강력해지고 많아진다.

 

시냅스들의 연결은 또다시 생리학적해부학적 변경의 결과, 특정 경험에 반응하면서 약화된다. 우리가 살면서 배우는 내용은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포 간 연결 부위에 담겨 있다. 연결된 뉴런의 끈은 우리 사고에 있어 진정 살아 있는 통로를 형성한다. 신경가소성의 역동성은 "불꽃이 동시에 이는 세포는 철사처럼 한데 묶인다."

 

캔델은 군소의 아가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습에 의한 행동 변화는 외부 자극을 느끼는 감각뉴런과 아가미를 움직이게 하는 동작뉴런 사이에 있는 시냅스의 연결이 점진적으로 약화됨과 동시에 일어난다."

 

"시냅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훈련만으로도 그 강도에 있어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양육의 결과물이지 천성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이 군소 실험은 캔델이 말한 대로 "양쪽의 시각이 각자 가치를 지니며, 사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임을 밝혀냈다.

 

우리의 유전자는 뉴런들 사이의 연결, 즉 어떤 뉴런이 다른 뉴런과 언제 시냅스 간 연결을 형성하는지에 관해 상당 부분을 지정한다. 유전적으로 정해진 이 같은 연결들은 칸트가 말하는 선천적 원형, 즉 뇌의 기본적 구조와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이 같은 연결의 힘, '장기적 효력'을 규제하며 로크가 말한 대로 사고의 재형성과 '새로운 형태의 행동에 대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자들의 상반되는 철학은 시냅스에서 공통분모를 찾는다.

 

뉴욕대학교의 신경과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시냅스와 자아』라는 책에서 천성과 양육은 실상, 같은 이야기라고 적었다. 양쪽 모두는 궁극적으로 뇌의 시냅스 조직 형성을 통해 정신적ㆍ행동적인 영향을 받는다.

 

                                

    

세포는 유연하다. 경험과 환경, 필요에 의해 변한다...어떤 사람이 실명을 할 경우 시각적 자극을 처리하던 뇌의 부분, 즉 시각 피질이 그냥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즉각 정보 처리를 위한 회로에서 채워진다.

 

또한 이 사람이 점자를 배울 경우 시각 피질은 촉각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처리하는 새로운 임무를 띠게 된다...뉴런의 준비된 적응력 덕분에 청각 감각과 촉각은 시력을 잃은 데 따른 피해를 완화하기 위해 더욱 예민해진다.

 

 

뇌는 우리가 사고하는 대로 바뀐다

 

우리의 뇌조직이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많은 것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진화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여러 번 사고를 반복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뇌를 안겨주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행위가 뇌 속에 의미 있는 물리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동물의 뇌에 관한 이 도구들이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집게를 가지고 실험을 실시했던 연구자들에 따르면 원숭이의 뇌는 현재 이 집게들이 손가락인 것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사고 형식이 우리 뇌의 모양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놀라운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실험자들의 뇌는 순수한 상상, 즉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행동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도 변화했다...우리는 신경학적으로 우리가 사고하는 그대로 변하고 있다. 

 

 

가장 바쁜 자의 생존

 

뇌의 특정 회로가 육체적 또는 정신적 행동의 반복을 통해 강해질수록 회로는 해당 행동을 습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도이지가 관찰한 신경가소성의 역설은 이 가소성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정신적 유연성이 결국은 우리를 '고착화된 행동' 속에 가둘 수 있다는 것이다.

 

뉴런들을 연결시키는 화학적으로 활성화된 시냅스들은 실상 이 뉴런들이 형성한 회로를 계속 작동시키고 싶어 하도록 우리를 조정한다.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만큼이나 빨리 우리의 뉴런을 파고든다. 피스쿠알 레온은 "유연한 변화가 꼭 주어진 문제에 대한 행동적인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가소성은 발전과 학습의 구조임은 물론이고 병적 증상들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환자가 자기 증상에 더 집중할수록 이 같은 증상은 더 깊이 신경 회로에 각인된다. 최악의 경우 사고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통증을 느끼도록 훈련시킨다. 많은 중독 증상들 역시 뇌에 있는 유연한 통로들이 강해지면서 더 악화된다.

 

어떤 경우에는 아드레날린의 사촌격이라 할 수 있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도파민과 같은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형성이 특정 유전자를 살리거나 죽이는 결과를 낳으면서 결국 약을 더욱 갈망하게 만든다. 이는 특히 살아 있는 통로에는 치명적이다.

 

뉴런과 시냅스는 우리 사고의 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뇌의 유연성이라는 특성 속에 지적 쇠퇴의 가능성이 이미 내재해 있는 셈이다.

 

 

뇌가 생각하는 뇌 

 

이는 내가 인터넷 사용이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고 염려하기 시작했을 때 느낀 바와 같다. 나는 처음에는 이 같은 생각을 거부했다.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컴퓨터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깊이,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틀렸다. 신경과 학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뇌와 뇌를 통해 가능한 사고 변화는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이는 개개인뿐 아니라 하나의 종으로서 인류 전체에도 적용되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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