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죠? 제 말이 맞죠? 호호호. 동철 오빠가 얼마나 음흉한지 기자님은 모르실 거예요?”

“야 그러면, 책을 권한 재영씨도 나처럼 음흉하다는 얘기잖아? 두 남자를 한 방에 보내는구먼.”

“일타쌍피야!”

“아이고, 유구무언이올시다. 헌데 듣고 보니 니 말도 일리는 있네. 그나저나 재영씨, 『거대한 전환』은 다 읽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갖고 집중해서 읽어야 할 책 같아서.”



재영은 유리와 동철의 주고받음이 마치 잘 짜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럴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것이 아닌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가 뭐래도 그녀는 한국 최고의 슈퍼스타고 동철은 최고의 MC가 아닌가. 20세기의 정치ㆍ경제학 서적 중 가장 아름다운 어휘를 사용해 가장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 『거대한 전환』이라 해도 조금 늦게 읽는 것이, 아니 아예 읽지 않는다 한들 무슨 문제가 되기나 할 일인가?



“저도 몇 번을 읽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저자의 통찰에 다가갈 수 있었지요.”

“두껍기는 얼마나 한데? 깨알 같은 글씨와 수백장에 이르는.. 어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재영은 유리가 툭 던진 말이 의미심장했다. 단서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기자로써의 경험이 말해주지 않는가?



‘어, 그러면 책을 사서 조금이라도 읽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앞의 농담은 정말로? 이 여자 어쩌면, 상상 이상일 수도 있겠어?’



재영은 유리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음에 가해진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유리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정현 선배에게서 받았던 것을 빼면, 그것은 철저하게 멀리했던 이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재영이 유리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종업원이 소주 두 병과 맥주 세 병, 야채샐러드와 글라스 잔을 들고 왔다.



소맥이여 영원하라!



재영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 느닷없는 생각이 평상시의 재영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작 재영 본인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그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살고 있는 환경에서 떨어져 나와 미지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제가 동철씨에게 괜한 책을 권해나 봅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유리씨에게 불통이 튀다니, 여러 가지로 송구스러울 따름이네요.”

“송구스러울 것까지는 없구요. 알면 됐어요, 호호. 이것도 인연인데,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평생의 영광인 줄 아세요, 기자님.”

“이것 봐라, 나한테도 안 하던 짓을? 너 사람 차별하기냐?”

“짓이라니? 아, 우월한 내가 참아야지. 차별 하냐고? 당연하지! 짤막하고 못생긴 오빠에 비하면 기자님은 조각미남에 가까워. 따라서 차별은 당연한 거야.”

“하하하! 조각미남이라니요?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동철씨보다 조금은 나은가 보죠, 유리씨?”



차별이란 단어만 들어도 치를 떠는 재영이 유리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그렇게 유리의 영혼에, 현재의 상황에 젖어 들고 있었다, 한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어, 재영씨도 그러깁니까? 저 그러면 삐칩니다? 제가 삐치면..”

“놔두세요, 삐치는 게 장기이니까. 열등한 인간들의 최대의 무기잖아요. 별 효과도 없는 것을, 뭐 그렇게 내세우는지? 그런데 기자님, 미디어는 재미있으면 그만 아닌가요? 거기서 재미 이상을 볼 필요가 있나요? 그 사람, 닐 뭐지?”



유리가 갑자기 화제의 방향을 돌렸다. 그 변화무쌍함이 재영은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사고가 자유롭지 못한 그로서는 하나의 생각에서 다음 생각으로 갈아타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떤 매개체라도 없으면 항상 하나의 생각에 골몰해 있기 일쑤였다. 재영은 사고의 체계를 거치지 않아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그녀의 분방함이,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은 성품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동철이 조금은 불쌍했지만.



“나 삐쳤어!”

“하하, 닐 포스트만입니다.”

“그래요, 닐 뭐시기. 다른 것은 모르겠고, 전 ‘쇼비지니스 시대’와 그 뒤에 나오는 몇 개의 장들만 더 읽었는데, 도대체 뭔 말인지? 어쨌든 TV는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요? 전 TV의 가치가 정보나 가치의 전달이 아니라 재미의 추구에 있다고 봐요. 그것이 TV의 속성이라 생각해요.”

“유리씬,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재영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가 바라던 순간이자 터닝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토론이나 논쟁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질 생각이 없고, 자신도 충만했다. 다만 상대가 유리라는 것이 문제였다. 재영은 그래서 유리의 생각을 조금 더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 하냐고요?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TV가 정치나 경제, 철학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대중의 기호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면, 뭐 하러 TV를 만들었겠어요?”



매스 미디어의 총아인, TV가 만들어낸 슈퍼스타다운 발상이었다. 단순하고 지극히 표피적이지만 정확한 이해였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말하니 정말 그럴 듯했다. 재영은 이럴 때면 진화의 과정도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존재 자체가 매력인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간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자연선택도 때론, 외형의 우수함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어떤 테크놀로지가 적용됐던 간에, TV는 대중 친화적 매체라는 말인가요?”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몰라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중의 기호라고 봐요. 그 기호는 처음부터 재미였고요. 아무리 좋은 방송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시청률이 떨어지고 방송국은 광고가 줄어들게 되고, 가수와 탤런트, 다수의 연예인들은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되요. 기획사와 열악한 임금에 허덕이는 스태프들은 더 힘들어지겠고, 자연히 작품의 질도 떨어질 거예요. 그것이 대중이 바라는 것도 아니고, 해피한 것도 아니잖아요? 반대의 상황이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닌가요? 왜 재미가 문제가 되죠? 알고 보면 나도 얼마나 재밌는데?”



유리가 이번에는 나름, 논리 정연한 말로 재영을 압박했다. 재영은 유리가 공리주의적 사고의 함정과 승자독식의 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논리는 파이를 키우는 데만 집중해 분배의 논리가 무시되기 일쑤다. 이 때문에 파이를 키우기 위해 ‘자본가가 흘린 찌꺼기가 노동자의 욕망을 자극’해 사람들로 하여금 0.001%도 안 되는 대박의 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먹이사슬로 귀착된다. 



게다가 계량화할 수 있는 쾌락(또는 행복)은 물질에 기반한 것일 수밖에 없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쾌락(또는 행복)의 기준은 단순화된다. 그 과정에서 소수의 이익은 무시되기 일쑤다. 다수(이 표현에도 문제가 있다. 다수라는 기준은 무엇이며, 출생에 의해 출발점이 다른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회의 불평등과 이익의 차이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승자독식의 룰이 경제와 사회 전반으로 퍼지는 상황에서 지난 시절보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가 전반적으로 늘어났으니 다수의 이익이 증가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질적 풍요와 편리의 반대급부인 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지구온난화라는 기후변화가 초래하고 있는 파국적인 결과는 어떻게 생산 원가에 반영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이 보증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승자가 가져가기 때문에 약자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 비정한 승자독식의 룰은 민주주의의 가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매력이 넘쳐 주체하기 힘든 슈퍼스타 앞에서 뭐라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악의가 없는 견해를 표방할 뿐이며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하다 해도, 나르시스와는 다른 사랑스러운 환상에 빠져 있는 여인에게 논리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어리석은 남자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심지어 로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는 안경 낀 여자에게 작업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세요? 기자님이 그렇게 논리가 없으시면.. 아, 나의 매력에 빠지신 거구나! 늘 겪는 일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기분은 좋네요. 저도 한 잔 주세요, 기자님.”



유리가 정말 그녀다운 말을 하면서 재영에게 잔을 내밀었다. 뭐라고 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지만, 유리의 말에 재영의 몸은 반응을 보이려 했다.  



“아이고, 환장하겠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 볼 수가!”

“눈이 새우만하니 그렇지!”

“그래서 조명 빨 같은 헛것에 속지 않는 거야!”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유리의 말에 동철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재영은 동철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손을 뻗기만 하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앉아 있는 슈퍼스타, 유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감정이 가는 대로 반응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증폭되는 그녀의 실체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작동했다. 재영은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흐린 조명과 긴 속눈썹이 만들어낸 짙은 음영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은하처럼 반짝였다. 재영은 단지 2~3초만 들여다봤을 뿐인데, 그 영롱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눈동자에 자신의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느낌에 급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엄청난 흡입력이야. 어떻게 보면 몽환적일 정도니. 몽환적?’



재영은 문득 유리가 논쟁을 걸어오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이런 눈동자의 소유자가 논쟁을 걸어온다는 것이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재영은 그 미소의 끝에서 유리의 말에 가벼운 이의를 표했다.



“쇼비지니스만을 놓고 보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겠죠? 하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쇼비지니스가 TV와 인터넷 전반에 작용한다면 시청자 역시 재미에 빠져들지 않겠어요? 결국에는 TV와 인터넷이 정해놓은 틀, 즉 삶의 오락화라는 그물에 갇혀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TV와 인터넷이 정해놓은 틀이 삶의 오락화라는 건 잘 모르지만, 어쨌든 TV 프로그램과 인터넷 사용은 결국 개인이 선택하잖아요? 자신의 기준에서, 그것이 재미이든 정보 검색이든, 웹 서핑이든 간에 취사선택이 가능하잖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안 보고 안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TV 시청과 인터넷을 많이 한다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 복잡한 세상, 그냥 쿨하게 사는 게 최고 아니에요? 난,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열띤 음성으로 반론을 마친 유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혔지만, 재영은 그 주름마저 매력적으로 보였다. 눈동자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아직까지 작용하는 듯싶었다.



“물론 안 보면 문제없지요. 인터넷도 안 하면 그만인 것처럼. 남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고, 유리씨처럼 노래를 불러도 좋겠지요. 하지만..”

“내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 기자님도 불러봤죠, 당연히?”

“하하, 당연히 불러봤죠. 몇 번 안 되지만.. 불러보긴 했죠.”



재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리를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뱉은 말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냥 넘어갈 그녀가 아니지 않은가? 뒤늦은 재영의 후회에 유리가 쐐기를 박았다.



“어떤 노래요? 한 번 불러보세요.”

“네, 불러보라고요? 허, 이거 참 어떡하지? 장소도 그렇고, 이렇게 갑자기 시키시면..”



재영이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는데, 다행히 동철이 나섰다.



“야, 재영씨에게 노래를 불러보라니? 당근이지!”

“네? 동철씨까지 이러시면..”

“호호호! 됐어요, 됐어. 기자라면서 왜 이렇게 부끄러움을 타신데? 하긴 내 앞에서 부끄럼 타지 않는 남자가 없긴 하지만, 호호호호!”



유리가 한껏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맑은 웃음소리가 공명이 되어 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남자 손님들의 시선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 바삐 움직였다. 유리의 몸, 구석구석을 훑는 매직(이 일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아이들의 향연!



“허허, 다음번에는 꼭 불러볼게요. 연습도 좀 하고요. 헌데 유리씨, 아까의 얘기로 돌아가면, 사람이 세상을 쿨하게만 살 순 없잖아요? 세상과 소통하는 게 TV와 인터넷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상당한 시간을 그 앞에서 보내는 게 현실이니, 결국 TV와 인터넷이 제공하는 틀에 갇혀 버리지 않을까요?”

“TV나 인터넷 앞에 앉는 게 왜 그들이 제공하는 틀에 갇히는 거죠? TV나 인터넷이 내 전부가 될 수는 없잖아요? ‘늘 깨어있으라’ 그런 상투적인 말 말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재영은 가능한 한 유리의 눈높이에서 생각을 물었지만, 유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비록 유리의 주장이 표면의 진실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의 논리는 명확했다. 디지털 시대에서 쿨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 내리는 논리의 기승전결이 완벽했다. 재영은 자신의 논리와 대척점에 서있는 그녀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도 확인했고, 그녀를 이해시킬 이유는 더더욱 없었고.



‘그래, 확실해? 처음 보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공격적일 이유가 없잖아? 혹시 동철이라면 모를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재영은 지금까지의 상황이 단순해지고 또렷해졌다. 동철과 유리가 자신을 향해 연출하고자 하는 대강의 얼개도 그려졌다. 재영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어 봤다. 

  1. 참교육 2015.01.12 18:34 신고

    재미 있습니다.
    처음부터 봐야 더 흥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12 20:20 신고

      감사합니다.
      앞 부분도 이렇게 소설적인 요소들로 다시 써야 합니다.
      퇴고를 할 날이 오겠지요.

  2. 박창식 2015.01.13 14:12

    우영워드와 천검지로는 너무나 기다려 지는 작품입니다.
    님의 다른 칼럼도 빠뜨리지 않고 읽지만...

    • 늙은도령 2015.01.13 15:35 신고

      천검지로는 내일 쯤 올리겠습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책상 위에 놓아둔 갤럭시2가 빛을 뿜어내며 자지러졌다. 연신 수증기를 뿜어내던 커피포트의 스위치도 약속이나 한 듯이 탈칵하며 떨어졌다. 그것들에 의해 다시 현실로 돌아온 재영은 머그잔에 끓은 물을 따른 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에도 『미디어 이해』에서 읽은 문구를 떠올렸다.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일상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정보사회에서 TV와 컴퓨터, 휴대기기 없이 누군가와 소통하는 일이란 생각하기 힘들다. 첨단 전자기술의 총화인 미디어의 힘이란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테크놀로지 자체의 속성에 있는 것처럼, 활자문화를 과거의 경험과 지식 전달자의 위치에서 밀어낸 방송ㆍ통신기기들은 우리의 인식과 삶 자체를 통째로 재편성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휴대폰이나 모니터, 평면 또는 3DTV가 전하는 각종 메시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접촉하며, 구분 짓고 저장하다 삭제한다. 디지털 미디어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삶의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미디어는 세상을 뒤덮은 촘촘한 그물망이야. 거길 통과한 메시지만 전달돼. 그물망은 거대 미디어가 독점하고 대안 언론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해.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조차 편성, 조작될 수 있어. 그물망을 조금만 변화시키면 되니까.’



재영은 비슷한 뉴스와 비슷한 드라마, 비슷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비슷한 공개 오디션을 보지 않으면 대화에도 낄 수 없는 세상을 떠올렸다. 플라톤에서 시작해 하이데거를 거쳐 히틀러가 실현했던 전체주의는 한나 아렌트의 예언대로 사라지지 않았고 그 모습을 바꿔, 좀 더 소프트하고 기술적으로 살아남아 세상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개인은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와 메시지를 각각의 관점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정보와 메시지는 무차별적이고 방대하며 연속적으로 던져지기 때문에 즉각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면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시청자들은 오늘의 뉴스라는 형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까? 다음 뉴스는, 다음 뉴스는 하면서 몇 분이나 몇 십 초 정도로 편집된 뉴스를 연속적으로 내보내는 게, 국가나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뉴스 다음에 흥미 위주의 가벼운 뉴스를 배치하는 게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얼마나 흐려놓는지 알까?’



뇌에 대한 각종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작업(또는 단기) 기억 안에 담아둘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정된다. 그 정보를 번역해 가중치를 부여하고 선택적으로 저장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정보의 바다에 수장되지 않으려면 앞서 들어온 정보의 대부분을 작업 기억의 공간에서 그냥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나마 마련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세계에서 정보의 대부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개인은 결국 미디어가 제공하는 네트워크(그물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러 가지 기사를 계속해서 내보내는 ‘오늘의 뉴스’의 진행 방식이다. 뉴스를 보고 있는 동안 (또는 보고 난 이후에도) 시청자는 뉴스가 전해준 십여 개의 기사 중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는 현상에 직면한다. 이는 앵커가 ‘자 다음은’ 하는 식으로 하나의 기사 꼭지가 끝났음을 알려줘, 다음 기사를 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작업 기억의 용량을 얼른 비워두라는 암시에 의해 발생한다.



‘결국 깨어 있어야 한다는 진부한 격언에 귀착돼. 그건 쿨한 세대에겐 최악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디어가 전하는 콘텐츠(내용)가 중요하지 미디어 자체(기술)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선택은 각자 개인이 내리는 것이고 각각의 인식과정도 다르며, 자신이 처한 삶의 필요에 따라 정보를 취사선택하므로 정보의 홍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설사 거기에 빠진다 해도 쿨하고 개념만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디어는 콘텐츠를 전달만 하는 매체일 뿐이 삶의 지배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영은 마샬 맥루한이 말한 또 다른 문구가 떠올랐다.



미디어의 내용이란 실제로는 정신의 입구를 지키는 개의 주의를 끌기 위해 강도가 손에 들고 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 미디어 소유권의 집중까지 더하면,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어. 소유권이 분산되지 않고 이익에 집착하며, 엘리트 위주의 당파적 성격이 강한 미디어는 칼을 든 친구가 될 수 있어. 우리는 원수에는 최대로 주의하지만 친구에는 쉽게 속아 넘어가기 일쑤 아닌가?’



재영은 자리 앉아 머그잔을 내려놓고 두 번째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슈퍼아몰레드 액정화면 속의 상대를 확인했다. 재영은 취재와 관계된 인물이 아니면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 경향이 있어 그와 통화하려는 사람은 보통 두 번은 연속해서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는 그것이 불필요한 통화를 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통화 지연에 따른 오해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 번호는?’



재영은 상대를 인식하는 첫 단계가 11자리에 이르는 수의 조합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다. 사진(또는 아이콘)도 함께 뜨게 하는 것도 통화량을 늘리려는 미끼상품, 즉 이익 창출을 늘리려는 불필요한 기능일 뿐이었다. 수의 조합과 아이콘은 한 명의 인물을 기억에서 불러냈다. 동철이었다, 아니 그임을 증명하는 전화번호와 정형화된 메시지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재영은 캘럭시2를 들어 귀로 가져갔다. 동철은 요즘 들어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소셜테이너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정현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유일한 연예인, 그 역시 미디어의 명암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시하던 차였다. 타고난 말솜씨만큼 생각의 깊이도 충실한 그는, 재영이 갖지 못한 이 시대 최고의 무기(유머, 재치)를 장착한 사람이었다. 재영이 그에게 끌린 것은 자신과 비슷한 아웃사이더적인 기질 때문이었다. 그가 본 세상도 합리적이거나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형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동철씨, 웬일이세요?”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느닷없지요, 제가?”



왠지 슬픔이 묻어 있는 듯한 동철 특유의 음성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정겹게 다가왔다. 통신망의 용량 부족으로 통화품질이 떨어지는 차에, 여러 가지 음성이 섞여 들리는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떠드는 술집이나 포장마차 같은 곳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 잔 하신 모양입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를 다 주시고?”

“노총각이 다 그렇죠, 크큭. 공장 대신에 사원을, 하늘의 길에 포장마차를, 호수 속에 응접실을! 한 잔 했습니다, 이런 이른 시간부터요.”

“랭보 좋지요. 환각제나 술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니 세계적인 시인이 되신 모양입니다, 하하. 마침 저도 한 잔 하고 있는데, 종류는 다르지만. 아뜨뜨!”

“아뜨뜨? 뭘 마시.. 아, 커피 마시는군요. 그것도 아주 뜨거운. 입술만 랭보가 되겠네요? 크크큭!”

“동철씨 때문에 입술 다 뎄어요!. 책임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고소할 거예요.”

“저보고 재영씨 입술을 책임지라고요? 저 남자는 별로인데요. 못 생긴 남자의 입술은 더더욱. 유리로 뺐지 못한 입술인데, 어딜 감히. 크크큭!”

“사돈 남 말하십니다! 어디십니까?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온통 여자목소리뿐인 것 같은데? 혹시 전설의 아방궁인가요?”

“크큭. 귀는 밝으셔서. 오실 수 있으세요?”



동철이 전화한 이유를 밝혔다. 재영이 동철의 제의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래서 전화한 거 아닙니까? 전에 만났던 곳입니까?”

“네, 그곳이에요. 엄청 예쁜 연예인들이 수두룩해요. 반쯤 맛이 간 상태에서, 그것도 예쁘고 어린 순서대로. 크크큭!”

“총알같이 날아가겠습니다! 제가 갈 때까지 그분들 붙들어 매놓으십시오. 알겠습니까?”



재영은 좀처럼 하지 않는 농담을 던질 만큼 동철의 초대가 고마웠다. 울고 싶은 놈 때려준다고, 타이밍도 적절했다. 공복에 마시는 술, 그것은 마약과도 같은 진통해열제였다. 이성이 지나치게 고양될 때면 감정은 탈출구를 찾기 마련인데, 재영에게는 공복에 마시는 술이 그랬다. 재영은 취재기획안을 저장한 후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갤럭시2도 가방에 밀어 넣은 후 어깨에 걸쳤다. 자리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마도 동철은 술과 여자 연예인을 핑계로 자신이 추천한 책, 『죽도록 즐기기』나 정치경제학의 기념비적인 서적, 『거대한 전환』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죽을 때까지 한 번 마셔보자. 술에 죽나 취재기획안 때문에 죽나,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거, 당근 술이지!”



재영은 누구에라도 보이려는 듯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것은 마치 팀장이건 국장이건, 거대 언론이건 그 뒤의 시스템이건, 심지어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신에게라도 위세를 떠는 것 같았다. 오늘은 실컷 퍼 마시리라, 재영은 스스로의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튀어나오려는 일말의 두려움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1%도 안 되는 취재기획안의 승인 여부였지만 지금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는 거야!”



재영은 이번의 취재기획안이 진실을 향한 길고 험한 여정이 될지, 아니면 죽음을 향한 무모한 출정식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은 한 잔의 술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지금은 그 누구의 한 마디 격려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1. 하늘꽃 2015.01.02 08:11

    새해 더욱 강건하시고..
    뜻하신 모든일 이루시길...
    복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복 많이 지으시기를...

    • 늙은도령 2015.01.03 18:05 신고

      네, 감사합니다.
      님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