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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에 메르스 피해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망자도 6명이나 나왔고, 확진환자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으며, 믿을 수 없고 숫자에 잡히지 않는 자가격리자까지 포함하면 직접 피해자만 수천 명이 넘습니다. 이런 속도면 직접 피해자만 수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청와대와 정부의 방역실패 때문에 목숨을 잃었거나, 고통스런 투병을 해야 하고, 강제 휴직이나 휴업을 당한 꼴이라 유무형의 피해는 계속해서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가족이 겪어야 할 피해(메르스에 노출된 잠재적인 환자라는 낙인효과까지)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입니다.
병원들이 입은 피해는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방역당국의 초기대응 실패로 국내의 거의 모든 병원들이 파산지경의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오늘 필자가 다녀온 분당서울대병원만 해도 지난 8년 동안 정기적으로 다녀봤지만 이렇게까지 썰렁한 적이 없었습니다. 식당에 들려 식사를 하는데도 저를 포함해 5명만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잃어버린 신뢰는 병원시스템과 간병문화에 책임을 돌리기에는 메르스 퇴치가 완전히 끝났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에 계산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의료계 종사들이 입은 피해와 국내외의 신뢰 하락까지 더하면 피해추정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의료민영화와 영리화 추진이 힘들어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자영업자와 내수경제 주체들이 입은 피해는 병원들이 입은 피해액보다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메르스가 완전 종식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피해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재정상태가 나쁜 자영업자와 내수경제 주체들은 파산을 면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휴교학교까지 더하면 관련 피해 규모는 더욱 늘어납니다.
수출기업들도 유무형의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추상할 방법이 없지만, 중요 미팅들이 뒤로 미루어지고 그에 따라 결정이 늦어지는 것까지 고려하면 환율 쇼크와 비슷한 단기적 피해를 면할 수 없습니다. 한국이란 나라의 브랜드 가치의 하락까지 고려하면 후진국 시절의 ‘코리아 디스카운팅’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국민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라는 스트레스는 계산불가능합니다. 현대의학이 발전하면서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는 것은 오래전에 밝혀졌습니다. 모든 병의 직접적 원인인 바이러스와 균, 세포변이 등도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인간의 면역체계가 약화될수록 그 위력이 배가됩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코리아 디스카운팅’은 박근혜 대통령이 입만 열면 흘러나오는 ‘국격’에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초국적기업들이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해 연간 수천억에서 수조 원의 마케팅비용을 지불하는 것처럼 정부도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세금을 쏟아 붙습니다.
메르스의 급속 확산과 방역실패는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땅 속 깊은 곳으로 처박아 버렸습니다. 국민과 기업들, 앞선 정부들이 수십 년에 걸쳐서 쌓아올린 국격이 이번처럼 곤두박질친 경우는 5.18광주민주화항쟁의 무력진압과 IMF 외환위기에 비견될 만큼 치명적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두 비극은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주시하지 않았지만, 기술발전과 세계화의 결과로 국제교류가 일상화된 현재에는 전 세계가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메르스 방역실패가 불러온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두 개의 비극보다 국제적 파장이 더욱 클 수 있습니다.

대강 살펴본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관련 전문가들이 세세히 살펴보면 피해의 종류와 크기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김연아와 한류의 경제효과를 계량화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민간의 경제연구소들이 메르스 피해액을 구체적인 수치로 계량화해야 합니다.
이는 땅에 떨어진 국격과 파탄지경에 이른 민생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초등대응에 실패한 청와대와 정부를 상대로 모든 피해자들이 피해보상과 배상을 요구하는데도 필요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조치라도 취해야 후대의 국민에게 지도자를 잘못 뽑고 정부 감시를 소홀히 하면 어떤 피해를 입는지 깨우쳐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역사의 기록이며, 소수의 승자와 강자가 독점하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길입니다. 오늘의 무정부상태도 집단적인 단기기억상실에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국민의 특성을 고려하면, 경제적 수치로 계량화할 때만 반칙과 특권, 부정과 비리가 판치는 대한민국의 개조에 일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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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면에서 진보좌파라고 믿었던 나는 합리적(이 단어는 대단히 모호하고 형이상학적이지만 이를 대체할 단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자유주의자인 칼 포퍼와는 몇 가지 면(특히 과학철학을 바탕으로 해석해낸 경제와 역사의 재구성)에서 일치하지 않지만, 정치권력의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래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자유는 불멸의 가치다. 이것이 없으면 인류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평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사회적이던 간에 평등이라는 것이 탄생과 함께 불평등하게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불평등을 구조화한 정치사회적 부조리와 부정의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지 않는 한, 나라는 존재는 타인에게 비쳐진 다양하거나 엇비슷한 나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유로든 경쟁이 존재하는 한, 타인이 지옥으로 다가올 수는 있어도 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나와, 그런 다양한 나와 관계를 갖는 타인과의 접촉을 거절할 수 없다. 자살마저도 세상에 대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하나의 선택이라고 주장한, 그래서 말 잘 듣는 노동자가 필요했던 초기 자본주의체제가 철저하게 배격했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타방이 있어야만 일방이 있으며, 타방이 없으면 다른 일방도 소멸되어 버린다. 양자는 서로 직접 접경하여 객관이 시작되는 데서 주관은 끝난다. 양자의 경계가 공통된 것은 모든 객관의 일반 형식, 즉 시간·공간·인과율이 객관의 인식이 없이도 주관에 의해 안전히 인식”될 수 있다.
결국 사실이라는 객관적 팩트(시간과 공간, 인과율에 의해서 시계의 흐름에 따라 진열되는 역사의 단편들로 특정 가치체제를 거치지 않는 날것에 가까운 사실)는 의미라는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내가 소중한 것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과 믿음이 역사에 적시될 팩트(사건, 사실, 사람)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인류의 위대한 현인이며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정치학자의 입을 빌려보자. 그녀는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히이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전체주의의 기원》, 《혁명론》 등을 쓴 한나 아렌트다. 좌파와 우파를 떠나 오직 인간에만 집중했던 그녀의 사상(전체주의에 지나칠 정도로 속박된 정치철학 혹은 비판정신)은, 그것에 대한 네그리의 비판이 아무리 신랄해도(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류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어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은 역사를 상투적인 틀로 해석하는 길로 이어질 수 있다. 이해란 잔악무도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례에서 전례 없는 일을 추론하거나 현실의 영향과 경험의 충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오히려 우리의 세기가 우리 어깨에 지운 짐을 검토하고 의식적으로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 무게에 패기 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해란 현실에, 그것이 무엇이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깊게 맞서는 것이며 현실을 견뎌내는 것이다...현실을 아무런 편견 없이 감연히 맞서 이겨내는 것이다.”
내가 나의 능력에도 너무나 부치는 일인 인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유치하고 깊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나는 가능한 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최대한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동시에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관점과 지식을 통해 바라보고 분석하고 비판할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지만, 그보다 크거나 다를 것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체가 부분보다 커야 할 이유는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부분이 전체에 예속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이 강자와 승자 위주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맞설 수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나 연대를 이룰 때 그들에 맞서 싸워 이길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의적 권력의 결정체인 새로운 제국과의 싸움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제국의 체제 논리 때문에 전 세계가 상시적 전쟁 상태와 유동적인 감시체제에 빠져든 상황까지 고려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어찌 그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대한다 해도 무적의 제국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을 무너뜨리는 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나는 제국과 신자유주의 통치술과의 일전에 임해, 그 투쟁의 지평선을 넓히고자 한다. 더하여 이런 투쟁이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투쟁들이 인터넷을 통해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행동과 실천으로 구현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며, 나는 그 거대한 전환의 현장에서 가능한 많은 변화들을 직접 체험하고 기록하고 전하고 싶다. 그것만이 디지털 파놉티콘이라는 감시사회(각자도생사회 또는 삶정치로 포장되기 일쑤인 민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마도 거대한 전환의 실체를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다. 바로 그것들, 그 무한한 가능성을 내가 다시 쓰고자 하는 역사이며, 세계사의 진정한 모습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할 권리란 없다. 부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강자와 승자의 역사에서 사라진 그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재발견이며, 지상에서 보고 싶은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성지이기를 바란다.

P.S. 필자는 이 글을 쓴 이후 푸코와 벤야민, 벡과 바우만 등의 책들을 추가로 읽었다. 포퍼의 책도 더 읽었고, 그의 숙적이었던 토마스 쿤의 책들도 더 접했다. 최근에는 장하석의 책들을 읽었다. 그래서 생각이 조금은 변했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을 통해 조금씩 풀어가고 있고, 지적공동체를 이루는데 성공하면 그곳에서 집중적으로 풀어낼 생각이다.
지식은 이성을 지혜의 영역으로 이끄는 거름이다. 철학은 지혜를 모아 실천적 삶을 형성한다. 출발점은 지식의 축적이다. 현대사회는 지식과 정보가 섞여있어 제대로 된 지혜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는 철학의 부재를 불러온다. 필자는 운이 좋게 지식 축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고, 고삐 풀린 이성을 통해 무수한 사유를 할 수 있어서 나름의 지혜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철학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음은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의 방식을 따라갈 생각은 없다. 나는 그와 다른 방식으로 나눌 생각이다. 최대한 쉽게 풀어내 나눌 생각이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방식은 푸코를 지향하되 촘스키에 가까울 것이며, 최근에 내가 주시하고 있는 장하석의 방식에 근접할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부디 건강이 허락돼 작은 지적공동체라도 형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삶의 스승들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성원들이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줄 것이 많지만, 동시에 받아야 할 것도 많다. 내 안의 공간은 일종의 혼돈이다. 충만하면서도 배고프고, 만족하면서도 욕망한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가진 것을 다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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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 할 수 있는 ‘국제시장’을 두고 벌어지는 각종 논란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중병에 걸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포레스토 검프’는 빈곤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인 미국에서만 가능한 영화라면 ‘국제시장’은 일제가 남겨놓은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영화입니다.

기술 발전에 따라 전체주의화하는 성향이 있는 국가와 경제성장이 유일한 가치인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대단히 성공한 나라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건너 띈 채 흥남철수에서 시작되는 ‘국제시장’은 지나치게 과장된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규모 14위에 오른 경제성장의 역사를 다뤘습니다.
언제나 뛰어나 연기를 보여주는 황정민과 오달수가 이끌어가는 ‘국제시장’이 산업화의 숨겨진ㅡ또는 정치적으로 동원되거나 그 이유 때문에 지나치게 축소된 이름 없는 주역들에게 바치는 헌사임은 그래서 당연합니다. 오로지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그분들에게 저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의 삶을 수십 년 간 지켜본 필자이기에,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한국을 경제규모 14위의 선진국으로 만든 진정한 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극소수의 승자나 강자의 기록이 아닌 절대다수의 패자와 약자의 기록이어야 한다면, 한국 산업화는 그들의 피와 땀, 희생의 기록입니다.

헌데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을 만든 그들의 대부분이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빈곤이 그들이 그렇게 지키려 했던 자식과 손주들에게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노인빈곤과 복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못하다는 통계가 나왔고, 자식들은 낀 세대로 외면받고 있으며, 손주들은 88만원 세대나 삼포세대라고 불립니다.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라는 ‘국제시장’의 주역들 중 과연 몇 %가 그들의 피와 땀, 희생에 걸 맞는 대가를 받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누리고 있을까요? 국가는 세계 최고의 빈곤국ㅡ전쟁이 끝난 해의 통계니 그럴 수밖에 없다ㅡ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음했다지만,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후손은 그에 합당한 삶의 질을 누리고 있을까요?

‘국제시장’이 산업화 주역들에 대한 헌사로서 충분한 영상미를 담아냈지만, 여전히 고달프고 힘겨운 그들의 현실은 담아내지 않았습니다. 윤제균 감독이 오로지 그들에 대한 헌사만 얘기하고 싶었다면, 그는 대단히 성공한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한국을 분배가 아닌 성장의 관점에서만 보면 대단히 성공한 나라인 것처럼.
'포레스토 검프'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람보'와 '록키' 등을 영화적 재미로만 볼 수 없었던 것은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을 영화적 재미로만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흥남철수부터 낙동강 넘어까지 이어진 피난행렬 때 미국 B-29의 무차별 폭격에 제 모친의 친척어른들이 돌아가신 것처럼, 현대사의 질곡을 넘기지 못한 분들도 많고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분들은 더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P.S. 영화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과포장된 ‘해운대’와 비교하면 ‘국제시장’이 낫지만, 윤제균 감독이 한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평가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윤 감독이 보수의 아이콘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지만, 아직까지는 영화로 보여주는 철학적 깊이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비해 너무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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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단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지만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된다. 강자와 승자 위주로 쓰인 역사와 세계사를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을 통해,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깔려 죽은 이름 모를 수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희생과, 단 한 번도 제값을 받지 못한 피와 땀을 되살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건강, 나이에 비해 도무지 이루기 힘든 지난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류의 위대한 현인인 중 두 명의 입을 통해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길에 나서려 한다. 내가 이 두 사람을 인용하는 것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미셀 푸코와 발터 벤야민과는 달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회의주의자이자, 타협을 모르는 진정한 용기 때문이다. 그 처음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2』의 저자 칼 포퍼의 말이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라고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며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치권력의 역사이다...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도대체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과 투쟁 그리고 수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의 신봉자이자 확장자였던 칼 포퍼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역사주의 학자들의 역사결정론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비록 그는 마르크스 비판에서 지나칠 정도로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 사회학적 오류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최소한 역사의 주인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또한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2』에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들을 보자.
“신이 보통 <역사>라고 일컫는 국제적 범죄와 대량학살의 역사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잔인하며 치졸하기도 한 짓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의 삶의 영역 안에서 참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제대로 말해줄 수 있겠는가. 잊혀진 사람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슬픔과 기쁨, 그들의 수난과 죽음, 이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인간경험의 참된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는 모든 시대에서 평범하게 살다간 고달픈 삶을 반영해야 하며, 온갖 피해를 감내했던 대다수 인류를 포괄하는 우리 모두의 역사가 돼야 한다. 승자나 강자의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적인 신념에 의해 절대다수의 약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집단 최면의 거짓되고 희생을 강요하는 죽음의 역사였다. 성공한 사람의 기억만이 유효하다면 인류는 동물 중에 가장 천박한 동물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짐승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빌 브라이슨이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만약 우리의 외로운 우주에서 생명이 어디를 지나왔는가를 기록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감시할 일을 맡길 수 있는 생물을 디자인하려고 한다면, 그런 일을 절대 인간에게 맡기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의해서나, 신에 의해서나, 아니면 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고 싶은 바로 그 존재에 의해서 선택”됐다고 말했다. 미우나 고우나 인간만이 우주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류와 우주의 탄생과 역사, 미래에 대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자, 그런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그리하여 인류가 공존과 상생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하여, 이성의 지배를 위하여,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국제적 범죄의 통제를 위하여 우리가 벌이는 투쟁의 관점에서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역사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러한 목적들을 역사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것이며, 기록은 그 이후에나 필요한 것이다.
극소수의 승자나 강자의 입장에서 역사가 기술되면 인류는 언제나 집단학살과 전쟁범죄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든 탐욕과 죽음의 역사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 만인의 것이 되지 못할 때, 역사는 그 자체로 승자와 강자의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니, 이제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이자 검열관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 보수(유럽의 경우, 미국에서는 진보, 한국에서는 중도)의 가치를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들도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휴머니즘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철학자로 내가 꿈꾸는 역사의 재구성에 모범적 예다. 역사의 주인은 강자나 승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만인의 행복을 위해 '사회계약론'의 필요성을 제시한 루소의 『인류 불평등기원론』의 핵심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사회를 이루는 일반의지를 부정하고, 인류 이성의 포기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평등권을 위한 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국가와 같은 인간의 제도들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벌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프랑스의 행동하는 자유주의자였고 급진적 진보주의자였던 『분노하라』는 소책자로 널리 알려진 고 스테판 에셀을 떠올리는 칼 포퍼의 외침은, 발터 벤야민과 미셀 푸코, 칼 폴라니와 한나 아렌트처럼 ‘신은 승자와 언제나 함께 한다’는 통념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동시에 그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는 폭력적인 혁명도 반대한다. 열린사회라는 것이 꾸준한 변화들이 쌓여 점진적으로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칼 포퍼의 열린사회가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과 다른 점은 최종적인 모습이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관계인 체제의 하부구조가 정치와 문화 및 교육과 예술 같은 체제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궁극의 유토피아를 확정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결정론도 거부하는 칼 포퍼는 인류의 역사를 열린 상태로 나두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 약자와 이름 모를 무명용사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유주의적 이상론에 빠지지 않고 열린 세상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역설한 것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점에서 칼 포퍼와 칼 마르크스는 '극과 극은 통한다'는 벤야민의 성찰처럼, 서로간에 사상의 소통이 가능하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과 그 적들(궁지에 몰리면 이들은 파레토의 충고에 따라 인도주의적 정감을 앞세운다)과의 항쟁을 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렸다. 사실과 결정의 이러한 이원론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산물인 특정 제품이 자신의 삶과 관계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과도 일맥상통한다. 언제나 결정권은 인간의 주체성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칼 포퍼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결정론을 비판한 것이지, 그의 휴머니즘적인 신념과 과학적인 분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위선자였고 차별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던 플라톤과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자신의 능력을 쏟아부은 헤겔을 맹렬히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도 초기 기독교의 이론을 제공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월가의 현인으로 등장한 탈래브의 《블랙스완》을 관통하는 주장도 플라톤의 주름지대(권위가 만들어낸 단순성, 다양한 토론이 가능한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를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플라톤의 주장처럼 변화 자체가 부패라면 열린사회는 애당초 불가능하고 인류의 진보도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열린사회의 적이 된 것이고,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처럼 이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같은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인간의 이타성에 대해 분명히 하고자 한다. 도킨스가 이기적이라고 한 것은 유전자 차원에서 적용되는 논리로 그들 또한 무한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과 공존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도 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상기하고자 한다.
“30억 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그 독점권을 영원히 가지리란 법은 없다. 새롭게 시작된 진화가 이미 낡은 유형이 된 진화를 답보할 이유는 없다.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하는 낡은 유형의 진화는 뇌를 만들어 냄으로써 최초의 밈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진화를 시작했다......일단 유전자가 재빠른 모방 능력을 가진 뇌를 그 생존 기계에게 만들어 주면, 밈은 자동적으로 세력을 얻을 것이다...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뇌가 모방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기만 하면 밈은 그 능력을 십분 이용하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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