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상자에 요약해 놓은 것처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면 '밈'이라는 문화적 유전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복잡한 유기체를 만드는 기계적인 유전자와는 달리, 문화적 유전자인 '밈'은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하는 낡은 유형의 진화가 뇌를 만들어 내면서 최초로 등장하게 됐습니다. 이 때부터 인간은 밈 유전자를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변이가 아닌 빠른 진화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밈 유전자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진화의 예로서는, 성장과 규모 위주의 개발 때문에 미세먼지가 급증하자 아이들의 속눈썹이 길어진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돌연변이와 개선을 거쳐 자연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누적적인 변이가 아닌, 한두 세대 만에 이루어진 이런 변이는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유전자 단위의 진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진화가 만들어낸 최고의 결과물인 뇌가 문화적 진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은 '유전자가 만들어낸 기계'에서 벗어나 보다 독자적이고 빠른 진화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진화의 최종단계(최상의 단계가 맞는 표현일 수도 있다)인 자연선택에서 벗어나 인간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문화적 진화란 이기적인 유전자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복적 혁명이자 '연속적인 돌연변이' 이상의 반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진화의 핵심이 적자생존이라는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이유도 밈 유전자의 존재에 있습니다. 승자 ㅡ 승자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과 살아남았기에 승자라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ㅡ 만이 후손을 남길 수 있다는 적자생존으로는 인간의 이타적인 행태를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생존의 조건이 좋아짐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태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업화(세습되는 천민자본주의)와 민주화(생존선 이하의 삶만 보장하는)를 동시에 이룬 대한민국이 '헬조선'으로 다가오는 삼포(오포, 칠포)세대들이 연예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행태가 바로 그러합니다. 우파 전체주의를 숭상하는 박근혜와 새누리당 및 뉴라이트 무리들은 압축성장을 이루어낸 대한민국이 위대하겠지만, 그 때문에 온갖 불평등과 차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청춘들에게는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선택을 강요하는 나라에 불과합니다. 

 

 

진화라는 과정은 양자슈퍼컴퓨터가 나와도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의 행운들이 쌓여서 시작됐고, 최초의 유기체가 수십억 년에 걸친 복제와 변이, 선택을 통해 인간으로 진화하려면 그만큼의 확률이 더해져야 가능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이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임도 이런 진화의 과정에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에는 이처럼 어마어마한 행운과 수십억 년에 걸친 거대한 역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청춘들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주재하는 진화의 법칙을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 자신의 창조자인 진화의 법칙에 저항하라고 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문화와 문명에 저항하라고 합니다. <국제시장>의 세대들이 온갖 고생을 자식세대에게 물려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청춘들은 앞세대들이 포기하지 않아도 됐던 것들마저 포기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행운들이 수없이 쌓이고 겹쳐 인간으로 태어난 그들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것들마저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으로서의 인간의 진화는 계속될지언정, 문화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진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헬조선을 외치는 삼포(오포, 칠포)세대들의 선택이, 그 전복적이고 반역적인 선택이 슬프고 처절하게 다가오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며,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새누리당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앞선세대의 노력과 희생이 불통과 아집으로 변하지 않을 때, 많이 가졌음에도 더 가지려는 탐욕과 무한경쟁이 나눔과 공존의 지혜로 바뀔 때, 대한민국의 청춘들은 세습과 천민자본주의의 천국,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화에도 흥망성쇄가 있듯이 진화에도 흥망성쇄가 있습니다. 고대와 근대, 현대의 제국들이 무너진 것도 앞선세대가 이루어놓은 것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진보와 성장의 낙관론'처럼 하나의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진화의 과정이란 없습니다. 정치가 아닌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도 수많은 독재자와 어리석은 지도자들,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이 충분히 입증했습니다.                       

 

 

청춘불패가 청춘필패로 바뀐 세상이 헬조선의 핵심이고, 죽창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 탈조선의 열망이라면 앞선세대와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흙수저는 없게 만드는 것,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진화의 법칙마저 거스르는 청춘들의 슬픈 선택이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문화, 문화적 돌연변이

 

문화적 전달은 유전적 전달과 유사하다. 기본적으로는 유전적 전달이 더 보수적이지만 일종의 진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말이다...언어는 유전자가 아니 수단에 의해 진화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게다가 그 속도는 유전적 진화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유전적 진화에서와 같이 그 변화는 진보적이다.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은 종종 논의 되는 사항이다. 때로는 쓸데없이 신비로운 함축이 있다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과학적 진보와 자연 선택에 의한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칼 포퍼 경이 밝혀 주었다.

 

인간은 과거 수백만 년을 소규모 혈연 집단 단위로 생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본적인 심리적인 특성이나 경향을 대개 혈연 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를 촉진하는 선택이 우리의 유전자에 작용한 결과로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와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기에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다윈주의는 유전자라는 좁은 문맥에서 국한되기에는 너무나 큰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자기 복제자

가령 탄소 대신에 규소를, 물 대신에 암모니아를 이용하는 화학적 구조를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거나, -100도가 되어서야 죽는 생물이 발견되거나, 화학 반응에 의존하지 않고 전자 회로를 기초한 생물이 발견되었다고 할 때, 이들 모든 생물체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 원리는 없는 것인가? 물론 나는 그 답을 모지만 내기를 한다면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률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법칙이다.

 

과 그 진화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는 문화의 전달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의 그리스어 어근으로부터 미멤mimeme이라는 말을 만들 수 있는데 이를 단음절로 줄여 밈meme이라 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 다닌다.  

 

밈은 비유로서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야 한다. 당신이 내 머리에 번식력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말 그래도 뇌에 기생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기생하면서 그 유전 기구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을 위한 운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신이라는 밈

밈 풀 속에서 신이라는 밈의 생존 가치는 그것이 갖는 심리적 매력의 결과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고쳐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이것이 신의 관념이 세대를 거쳐 사람의 뇌에 그렇게 쉽게 복사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재한다.

 

새로운 자기 복제자 밈

30억 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그 독점권을 영원히 가지리란 법은 없다. 새롭게 시작된 진화가 이미 낡은 유형이 된 진화를 답보할 이유는 없다.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하는 낡은 유형의 진화는 뇌를 만들어 냄으로써 최초의 밈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진화를 시작했다. 우리 생물학자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빠져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여러 종류의 진화 중 일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칫하면 잊어버린다.

 

밈의 특성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밈에서도 특정한 사본의 수명보다 다산성이 훨씬 중요하다. 문제의 밈이 과학적인 아이디어일 경우 그 아이디어가 과학자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지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경우에는 과학 학술지에 그 아이디어가 인용되는 수를 셈하여 대략적인 생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

 

이 논의는 자기 복제자가 성공하기 위한 세 번째 일반적인 성질인 복제의 정확도와 연관되어 있다. 과학자가 어떤 아이디어를 듣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할 때 그는 그것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이를 테면 강조하는 점을 바꾸거나 나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와 혼합해서 그의 아이디어를 나의 목적에 맞게 바꾸어 놓았다...밈의 전달은 연속적인 돌연변이를 거치며 다른 것과 혼합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밈의 단위

아이디어 밈은 뇌와 뇌 사이에 전달될 수 있는 실체로서 정의될 수 있을지 모른다. , 다윈 이론의 밈이란 그 이론을 이해하는 모든 뇌가 공유하는 그 이론의 본질적인 바탕이다. 사람들이 그 이론을 표현할 때 방법상의 차이점은 정의상 다윈 이론의 밈의 일부가 아닌 셈이다. 만약 다윈 이론이 A B 두 분분으로 나뉘어, 어떤 사람은 A를 믿는데 B는 안 믿고, 다른 사람은 B를 믿는데 A를 불신하는 상황이라면, AB는 서로 다른 밈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A를 믿는 사람은 대개 B도 믿는다면, 즉 유전학 용어로 이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이 경우에는 양쪽을 합하여 하나의 밈으로 보는 것이 편리하다.

 

경쟁하는 밈

대규모의 컴퓨터 센터에서는 연산 시간과 기억 용량을 돈으로 환산하거나, 사용자에게 초 단위의 사용 시간과 문자 단위의 기억 용량을 일정량씩 배분한다. 인간의 뇌는 밈이 살고 있는 컴퓨터다. 뇌에서는 아마도 저장 용량보다 시간이 중요한 제한 요인이며, 심한 경쟁의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뇌와 그 제어를 받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어떤 사람의 뇌의 집중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에서도 경쟁하고 있다.

 

밈 복합체의 예-종교, 맹신, 독신주의

사람들에게 종교 의식을 가용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었던 교의의 하나는 지옥불의 협박이다...이것은 매우 간악한 설득 기술로서, 중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나는 성직자들이 그렇게까지 똑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을 갖지 않은 밈들이, 성공한 유전자가 나타내는 준잔인성이라는 성질을 가진 덕분에 스스로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가설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지옥불이라는 이이디어는 단순히 그 자체가 갖는 강렬한 심리적 충격 때문에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것이 신의 밈과 연관되어 버린 것은, 이 둘이 밈 풀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맹신이라는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하여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맹신은 아무것도 정당화할 수 없다...맹신의 밈은 특유의 잔인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번식해 간다. 애국적 맹신이든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를 보강하지만 때로는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예컨대 독신주의 같은 것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 곤충과 같이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독신주의를 발현시키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실패하게 돼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독신주의의 밈은 밈 풀 속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독신주의는 상호 협력하는 종교적 밈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복합체에서 작은 일부분인 셈이다.

 

나는 공적응된 유전자 복합체가 진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밈의 복합체가 진화한다고 추측한다. 선택의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문화적 환경을 이용하는 밈에게 유리하게 적용한다. 이 문화적 환경은 함께 선택되는 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밈 풀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로서의 속성을 지니며, 새로운 밈은 쉽게 침입할 수 없다.

 

밈의 긍정적인 면

우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유전자와 밈 두 가지다...유전자 자체는 불멸일지 몰라도 우리 각자의 유전자의 집합은 사라질 운명에 있다...번식이라는 과정에서 불멸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계 문화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유전자가 공통의 유전자 풀 속에 용해되어 버린 후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유전자 중에서 오늘날 살아 남아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이나 있는가.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밈 복합체는 아직도 건재하지 않은가.

 

문화적 특성의 진화와 그 생존 가치를 문제 삼을 때에는 누구의 생존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어떤 문화적 특성이 단지 그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진화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종교, 음악, 제식 춤 등에 생물학적인 생존 가치가 있는지 몰라도 이들에게서 전통적인 생물학적 생존 가치를 찾을 필요는 없다. 일단 유전자가 재빠른 모방 능력을 가진 뇌를 그 생존 기계에게 만들어 주면, 밈은 자동적으로 세력을 얻을 것이다. 모방이 유전자에게 이득을 준다고 가정할 필요조차 없다. 만약 그렇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뇌가 모방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기만 하면 밈은 그 능력을 십분 이용하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인간의 선견지명

우리가 비록 어두운 쪽을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지명,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 실험하는 능력이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이기성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당장의 눈앞의 이기적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따질 정도의 지적 능력은 있다. 우리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 장기적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능력이 있으며, 이 공동 행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논의할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1. 청공(靑空) 2015.11.30 06:02 신고

    저는 자기복제자(유전자와 밈)의 한계를 뛰어넘는 열쇠가 인간의 이성 혹은 상상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바이러스 혹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
    혹은 자아에 오염된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끊임없이 생각과 말이란 매개체를 통해 영속하는 바이러스로서의 자아가...
    인간의 생각과 존재를 왜곡시키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인간을 발전시키는 힘은 욕심이 아니라, 반복된 행위에 의한 차원의 이행에 있다고 봅니다.
    항상 정진하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의지, 올바른 방향성을 부여하는 지혜가 그 기제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자아가 만들어내는 욕심으로도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높은 수준으로 이행하려 하면 할수록...
    오염된 체계보다는 순수한 체계일수록 유리할 것입니다.

    작은 차이가 누적이 되면 결국에는 엄청난 차이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의 특성이 개인적인 성공의 요소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철저한 이기주의와 목적지향성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고, 개인간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현상적으로는 개인의 성공이라 보일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사회적자본에 해를 입힘으로써 사회발전의 실패를 초래합니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을 위협에서 보호하고,
    예측가능하게 만듦으로써 특정 행위에 집중하여 더 복잡하고 높은 수준의 생산물을 창출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매커니즘인데...
    사이코패스와 같은 이기주의자는 자신들에게 해가 입게 되는 규칙만을 준수하지...
    그것이 어떤 형태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머지는 무시를 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준법자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적자본에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사이코패스와 같은 이기주의자는 극단적인 요소이지만,
    인간의 자아가 만들어낸 욕심과 잘못된 전제들은 똑같이 노이즈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이 생각을 길게 정리할 역량도 안되고, 상황도 아닌지라 대략이나마 풀어봅니다.
    지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꼭 완전한 자아의 극복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에게 맞춰진 포커스를 사회로, 역사로 확장시키지 않는다면...
    변화를 일궈낼 수 있는 여지는 젊은 세대와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점점 작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11.30 08:48 신고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수 있다 라는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건강은 좀 괜찮으신지요?

  3. 2015.11.30 11:37

    비밀댓글입니다

  4. besso 2015.12.12 04:44

    늙은 도령님 이야기가 옳다는것은 귀납적으로 증명됩니다.
    보세요 세상을... 인간이 만든...

    • 늙은도령 2015.12.12 14:43 신고

      그래서 답답한 것이지요.
      인간은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족속인가 봅니다.



                                   김경렬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형의 노트북을 찾았다. 그는 형이 누운 상태에서 한 자 한 자 사력을 다해 작성한 파일들을 노트북에서 찾아 밤낮으로 읽고 또 읽었다. 회사에 10일 간의 휴가를 낸 상태라 재영은 업무와 시간에 구애 받지 않았다. 육체적인 피로는 혼자라는 사실에 압도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라면이나 햇반, 물, 동료들이 사놓고 간 과일이나 과자 등으로 겨우겨우 때우는 공복은 지랄 맡기가 쥐새끼 같아서 아예 무시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정신에 모든 힘을 집중할 때면 에너지가 육체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기 일쑤여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도출되기 마련이지만 재영은 형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악착같이 버텼다.



‘형, 이 정도일지는 몰랐어. 아니, 아인슈타인이 환생한다 해도 이만큼은 못할 거야.’



재영은 형의 유골을 고향 강가의 바람에 날릴 때, 손가락 사이로 퍼져나가는 재의 온기가 너무나 생생해 주먹을 움켜쥐었고 한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수면에 떨어져 작은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는 그 가벼움과 금방 시야에서 사라지는 허무함은 또 어떻고? 헌데, 재영은 형이 남긴 파일의 내용에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엄청난 충격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형의 흔적들로부터 죽음을 떠올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0,000권이 조금 넘는 독서량이 가져다 준 방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재영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와 동서양을 망라한 철학과 모든 학문의 기초인 화학과 물리학을 거쳐 전자공학과 생명공학, 생체심리학과 뇌과학을 넘나드는 창의적 발상과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치밀하고 장대한 형의 계획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재영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자동 정리해주는 전능의 워드프로세스와, 가상 메모리를 상ㆍ중ㆍ하단전으로 나누어 정보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저장 공간을 지정하는 인체공학적 방식, 신경회로인 뉴런과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장단기 기억을 만들어내는 시냅스의 전자ㆍ화학적 반응의 일부를 디지털 코드로 풀어낸 인공지능 검색엔진에 이르러서는 아예 사고의 기능마저 멈춰버렸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재영은 형의 계획에 대해 어떤 생각도 이어갈 수 없었다.



‘이건.. 거의 완벽한 인공지능이야! 어떤 검색엔진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재영은 인간 사고에 대한 저급한 이해를 바탕으로 디지털 제국을 건설하려는 구글과 애플, MS을 비롯해 반지성적 사이버 왕국을 건설하려는 모든 인터넷 검색 업체와 미디어에 대항하고, 깊고 고요한 사유와 모든 기억의 연결과 통합을 통해 이뤄지는 인격의 존엄성과 갈수록 그 존재가 미약해지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형의 계획이 일개 광언이나 비현실적 몽상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영은 살아서 물리학의 대통일 이론을 완성하지 못한 아인슈타인처럼, 형의 계획을 실현할 도구들도 아직은 미완성이었지만 계획의 99%는 이미 실현된 상태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이나 신문, 웹상의 글을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나 드라마를 볼 때, 우리의 뇌가 그 내용들을 잠시 담아 두었다가 다른 내용들이 밀려들어오면 곧장 내보내는, 저용량의 작업 기억 속에 저장된 정보들을 일정 기간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단기 기억으로 옮겨, 개념이나 사상 같은 것을 형성하는 스키마와 무의식 속에 자리할 정도로 오래된 기억 같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장기 기억으로 바꾸는 과정을 이렇게 간단히 풀어낼 수 있다니! 형은 상상 속에서 수학적 계산,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장기 기억을 만들어내는 뉴런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시냅스의 단백질 합성과정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냈어. 이건 구글과 MS 등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필사적으로 완성하려고 몸부림치는 꿈의 검색엔진이야! 아니, 어쩌면 그 정반대일수도 있고.’



“형! 정말 이 모든 걸 혼자서 다 만들어낸 거야? 이것 때문에 몇 년 앞당겨 죽음을 맞이했던 거야? 이 세상에 나 홀로 두고!”



재영은 자신도 몰랐던 형의 재능과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계획,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불굴의 의지와 신념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의 창조주라 해도 이 정도로 완벽한 설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컴퓨터가 여분으로 갖고 있는 전자기를 디지털 에너지로 변환시켜 디지털 엔트로피를 방출하는 방식의 순환으로 무한의 가상공간을 창출해내는 방식이란, 가히 디지털 열역학 법칙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었다. 



자가면역성 백신제조를 완성시키기 위해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의 화학적 단어인 A, T, G, C를 디지털 방식으로 치환해 모든 컴퓨터 바이러스와 악성코드를 무력화시키는 디지털 항체는 만능의 백신에 다름 아니었다. 개인이 어떤 것이든 기록(녹음과 타 사이트에서 복사해 온 것을 저장만 해도 가능)만 하면 자동색인이 이루어져 기억의 네트워크에 자동적으로 연결ㆍ통합하는 ‘우영워드’란 인간의 뇌가 기억을 형성하는 방식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낸 최후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 해도 과하지 않았다.



물론 ‘우영워드’를 확장해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인간의 뇌처럼 통합해내는 디지털 뉴런과 시냅스 코드를 안정적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고급 수준의 프로그래머가 필요하지만 동방국에서 그런 수준의 프로그래머를 찾는 일이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싶었다. 형이 정해놓은 목표치는 10만 개인데 그 중 8만 개는 완성된 상태였다. 대신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디지털 코드의 게놈지도는 완성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은 그런 적임자를 가려낼 수 있는 기준도 마련해두었고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는 힌트, 즉 지름길도 남겨뒀으니 자신은 그 길을 따라 여행하며 적절한 인물을 찾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형, 이거 너무 싱거운 거 아니야? 어차피 내 인생을 구속할 생각이었다면 좀 더 어려운 일들을 부탁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재영은 자신에게 최소한의 역할만을 남겨줬지만 그것만으로도 영원히 자신을 구속하게 만들어버린 형의 거대하면서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계획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그 덕분에 형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은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다. 형의 세운 계획의 첫 장은 디지털 세계에 대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예언적인 묵시록이었고, 어찌 보면 썩을 대로 썩은 동방국의 현실에 대한 치명적 경고였다. 그것은 완벽한 절망에서 최대한의 희망을 찾아내기 위한 단 한 순간도 포기할 줄 몰랐던 무모하기 그지없었던 한 인간의 처절한 고투의 산물이며, 살아 숨 쉬는 매 순간순간이 고통이었던 철저히 고립된 영혼의 간절한 호소이자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었다.



재영은 평생을 스크린을 통해 세상과 만났던 형의 디지털 세상의 미래를 이렇게 암울하게 봤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언제나 형은 컴퓨터를 통해서만 삶이 가능했기 때문에, 디지털 세상은 형의 모든 것이었다. 따라서 디지털 세상에 대한 형의 평가는 긍정적으로 나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은 뜻밖의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잠시나마 자신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기대가 크면, 그 기대가 순수하면 할수록 실망도 큰 법이다.



‘어쩌면 형에게 디지털 세상이란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워야 했던 건 아닐까? 물리학자들이 하나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방정식에 우주의 원리를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형은 암울하기 짝이 없는 「디지털 묵시록」을 작성한 이유에 대해 말하길, 현재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배할 소수의 기술과 전략 및 소유주들의 목표를 정확히 알아야만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우영워드’를 사용할 이용자들이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가질 수 있도록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작성했다고 했다.



형은 또한 리처드 도킨스가 발견한 ‘밈’이라는 유전자가 디지털 세상을 인간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장이 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단초 중 하나로 보였다고 했다. 형은 ‘밈’이라는 유전자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TV와 개인용PC, 휴대폰과 인터넷을 거쳐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 이르기까지 자기복제와 돌연변이, 자연선택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일어났던 누적적 진화가 스크린이라는 디지털 공간에서 제어하기 힘든 속도로 빠르게 일어나는, 그래서 잘못된 진화를 막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메스를 들이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에는 ‘우영워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근데 형, 힘들지 않았어? 매 순간 지속되는 고통에 저항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거대한 일들을 해왔으니, 난 엄두도 못 낼 것 같은 데? 형이 위대한 리처드 파인만이나 루게릭병이 악화된 이후의 스티븐 호킹처럼 탁월할 정도의 상상력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재영은 만일 신이 있다면, 육체적으로 무력하게 태어난 형과 지독할 정도로 축복받은 육체를 갖고 태어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로 해서 그의 뜻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홀로 진행하면서 형이 꿈꿨을 세상이, 형의 일생과 하루하루의 투쟁이 정말로 행복했을지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사실 신이야 그를 찬양할 인간이 없으면 그 권능의 가치조차 의미 없는 철저히 인간 의존적 존재 아닌가? 신은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필요했을 뿐이고 그 대표적 모델이 형의 일생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Fuck your Heaven!"



재영은 수면제와 진통제를 먹지 않는 몇 시간의 잠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끔직 했던 육체적 고통과 24시간 내내 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안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 고투의 연속이었던 형의 일생 - 오직 컴퓨터 앞에 누워 시선만으로 모든 것을 해야 했던 그 처절한 28년 모두 - 을 떠올리며, 인류를 위해 기꺼이 참혹한 고통을 감내하며 초라하고 누구 하나 슬퍼하거나 기억하지 않은 죽음을 선택한 디지털 전사의 출사표를 계속해서 읽었다. 그것은 영혼을 뿌리까지 갉아먹는 끝없이 이어진 육체적 고통과의 팽팽한 투쟁의 증거들이었고, 동시에 그것 모두를 그리움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종신 서약서였다.



재영아, 한나 아렌트는 그 잠정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독재정치와 전제정치가 인류를 항상 따라다녔다고 말하며 『전체주의의 기원』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었어. “그러나 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유일한 ‘메시지’이다.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전에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새로운 탄생이 이 시작을 보장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내 죽음도 너의 삶에서 또 다른 시작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모든 것을 준비했어. 난 육체적으로 무력했기에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어. 그것은 나에 의해서 너에게 가해진 속박이기도 했지만, 나는 너를 통해서만 세상과 만났을 수 있었기에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교감한 우리는 세상의 어떤 힘과도 맞설 수 있는 작지만 강력한 연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너와 내가 형제이기 이전에 완벽에 가까운 조합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데 두려워하지 않았고, 어떤 숫자가 나오는 것도 개의치 않았어. 확률이란 그저 확률일 뿐이니까.



그것을 바탕으로 나는 신자유주의가 창출한 상업적 전체주의(대량 생산과 가격 파괴로 이루어진 소비의 파시즘)와 사회의 파멸에 대항해 인간 본연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무모하리만치 담대한 한 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흔들림 없이 계획을 진척시킬 수 있었어. 나도 너처럼 무모한 낙관이나 분별없는 절망에는 반대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나갈 때, 너와 나는 동전의 양면일수도 있고 그 반대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추호도 배제하지 않았어. 가족과 사회를 포함한 인류의 역사에서 악화가 언제나 양화를 구축하고,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착취와 억압조차도 사회가 돌아가게 만들고 나름의 질서를 확립’시키는 것처럼 말이야.



그럼에도 나는 잠재된 가능성을 보여주고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열정과 동기만 불러일으켜주면, 평범한 사람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특권층과 지배 시스템을 향한 혁명의 방법으로 폭력적 수단을 얘기하는 건 아니야. 그것이 정의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다 해도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어. 물론 공권력의 야만적 집행에 저항하는 폭력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정의의 실현에 폭력이 없다면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저항권으로서의 정당한 폭력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권력으로 하여금 공권력 사용에 신중을 기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 



그래서 나는 사이버상의 폭력을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기로 했어. 물리적 파괴와 상관없는 특별한 형태의 폭력이라 죄의식까지는 갈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래서 혁명의 수단으로써 개개인의 지식의 강화를 선택한 거야. ‘우영워드’는 뇌가 지력을 높이고 인격을 형성시키는 방법과 최대한 동일하게 설계됐기에, 나는 개인의 노력이 늘어날수록 혁명의 성공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리라 확신해.



나는 지금 바라고 기원하고 있어. 비록 선택의 여지도 거의 없고 반강제적이지만, 어쨌든 최종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어(얘기가 여기서 끝나면 다 너의 책임이라고 뻥도 쳐놨어). 재영아, 형에겐 너에 대한 투명한 확신과 순결한 사랑이 있어. 나는 너에게 일방이 될 수도 없었고 너는 나에게 타방으로 존재할 수도 없었잖아.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면, 나의 주관이 끝나는 곳에 너의 객관이 있었고, 너의 주관이 향하는 곳에 너의 객관이 불을 밝혀주었어. 돌이켜 보면 우리는 둘이면서도 하나였고 하나이면서도 여럿이었어. 비록 내가 이룬 것은 작고 미약하지만 너를 거치면 분명한 형태로 작동하리라는 믿음은 그래서 정당하면서도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렇게 살아서 탐욕을 조장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어떤 권위와 독점적 시스템에도 저항할 거야.



그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에서 출발해. 너와 나의 이름을 따 ‘우영’이라 이름 붙였으며, 뇌의 작동원리에 가장 가까운 인공지능 검색엔진을 내장한 워드 프로세스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이 바로 그것이야. 인공지능 알고리즘인 ‘우영워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최종 목표는 모든 사람이 ‘우영워드’를 자유롭게 사용해 지식과 정보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며, 출생이라는 단 하나의 우연에 의해 비롯된 재산과 기회의 차별, 지리적 족쇄와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 자연과 우주를 만끽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공생하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거야.



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이란 탄생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 계량적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따라서 인류에게 풍요라는 선물과 공멸이라는 숙제를 동시에 안겨준 과학과 기술의 지적 윤리를 재설정하고, 노력에 합당한 이익을 보장하되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차별을 초래하고, 그 차별의 확장이 정의의 실현과 사회의 결속을 해칠 정도에 이르지 못하게 조절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지금 무너지고 있는 세계경제를 되살려 내고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인류의 지향점은 결국 개인의 권리와 성장을 유인하는 자유가 먼저 치고 나가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각종 권리의 남용과 성장의 과실을 독점하려는 욕망 및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려는 탐욕을 적정선에서 제어하고, 정의의 관점에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평등의 확대에 있다고 믿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본연의 모습이고, 신에 의한 창조이던 누적적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이던 간에 인간이 가장 발달한 두뇌를 갖게 된 근본적 이유이자 만물의 영장으로써의 의무라고 생각해. 루소의 말처럼 ‘덕성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제도가 덕성을 기’르는 것이고, 칸트의 말처럼 ‘오직 좋은 정치제제를 통해서만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도덕적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마찬가지로 너와 내가 극명하게 다른 장단점을 지닌 채 이 땅에 태어난 이유도 그런 인류의 지향점에 일조하라는 절대 명령(넌 이런 말을 가장 싫어하지만)에 의한 것이 아닐까? 재영아, 나는 너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어. 너는 그런 나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고. 내가 이런 미치광이 같은 무모하고도 지난한 목표를 향해 도전할 수 있었고, 소정의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었던 것도 너라는 측정 불가능한 잠재력을 지닌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 어쩌면 나는 너라는 위대한 인간의 여러 분신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것을 분명하게 믿으며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허무맹랑하리만치 무모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어. 그 계획은 다음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 번째 단계는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재영아.



하나 : ‘우영워드’의 목적과 구성

둘 : ‘우영워드’의 확산을 로드맵과 타임스케줄

셋 : 최후의 선택 또는 유일한 보험



재영은 그 뒤로 한참이나 이어진 형의 계획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도, 그 준비의 철저함과 과정에 대한 담대함, 결과에 대한 치밀한 예측과 확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세부 계획이 하나하나 실현될 때마다 더욱 커질 것이며 결코 줄어들 이유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다는 태초 이래로 그에 이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넉넉하게 남아서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형이 준 힌트에 따라 박성수 교수와 많이 친해졌어. 형의 예상대로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야. 당연히 정의롭고 진실해. 그리고 또 한 명의 기인, 형이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았던 현우씨도 만났어. 그에게 형의 계획을 얘기할 날이 곧 올 거야. 헌데 형, 목표를 이루려면 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내가 꿈꿔왔던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아. 형, 이해해줄 수 있지? 형의 계획에서 많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재영은 액자 속의 형에게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며 계획으로부터 잠시 동안이나마 이탈(돌아가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목표에 대해 간곡한 이해를 구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이라는 것이 남은 자에게 주어진 일이고 구속이어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기에(재영은 그렇게 믿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일체의 꾸밈과 가감도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망자의 혼령처럼 떠돌았다. 




  1. *저녁노을* 2015.08.02 06:58 신고

    노을이에겐..다소 어렵네요.ㅎㅎ
    그래도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휴일되세요.

  2. 참교육 2015.08.02 14:04 신고

    우영워드.. 시작할 때 지금까지 줄거리를 소개 해 주시면....?

    • 늙은도령 2015.08.02 18:33 신고

      한 번 신경을 써 볼게요.
      많은 분이 읽으면 그럴 기분도 나겠는데....

  3. singenv 2015.08.04 00:36 신고

    읽기가 만만치 않네요~ ㅋ

    • 늙은도령 2015.08.04 00:46 신고

      네, 어려운 부분입니다.
      아직 퇴고를 거치지 않는 내용이라 많이 고쳐야 합니다.
      그럴 시간이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 것에서는 어떤 위험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검은 백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과거의 관찰을 미래를 결정짓는 것, 혹은 미래를 표상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ㅡ 나심 탈레브의 《블랙스완》에서 인용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된 KBS심야토론의 목적은 국민에게 메르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녔다. 정부방송으로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국민의 지나친 불안과 공포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학이니 전문가니 하면서 발언을 이어간 질병감염 관련 두 전문가의 발언들은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사회자가 박원순 시장의 긴급기자회견 후 서울삼성병원 의사의 상태가 갑작스럽게 악화된 원인을 묻는 질문에 질병관리본부장을 역임한 전병율의 발언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임은 현대의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설이다. 그는 문제의 의사 상태가 갑자기 악화된 것이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박원순 탓임을 분명히 했다. 그가 그렇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박원순의 긴급회견 내용을 반박한 의사의 발언이 진실이라는 전제 때문이다.



문제의 의사가 위독한 상태는 대한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병율은 그가 진실만을 말했다는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은 채 박원순에게 책임을 돌렸다. 의사의 반박이 진실이라면 박원순에게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서울시민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메르스를 대란으로 키운 박근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의사의 반박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의사로서 그의 행동이 완전히 면책되는 것일까?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세간의 시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사려 깊지 못한 행태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을까?  



그는 삼성서울병원 의사가 갑자기 악화된 것이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의학적 증거를 의료진으로부터 전달받기라도 했단 말인가? 공개가 불가능한 개인의 의료정보를 그는 무슨 수로 확인했단 말인가? 그는 의사의 반박이 진실이고 박원순이 틀렸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의도성이 엿보이는 사회자의 질문도 문제지만, 전병율의 발언은 천만 명이 넘는 서울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는 박원순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박원순을 비판한 그의 발언은 마녀사냥에나 어울릴 비약과 오류의 전형이었다.





사실 신종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금융위기의 작동방식과 동일해서 심리적인 저항선이 무너지면 과학이고 뭐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보다 조금 높은 경험적 지식에 불과하다. 질병관리본부장을 했던 전문가라면 이 정도의 지식은 기본에도 속하지 않는다.



질병관리본부(사스 방역의 경험을 살려 노무현 대통령이 만들었다)를 비롯해 복지부와 방역당국의 무능력과 무책임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메르스 대란이 전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는데, 최고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자가 지상파에 나와 한다는 얘기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전문적인 지식이란 말인가?



그렇게 잘났으면, 지금보다 방역체계도 의료시스템도 열악했던 12년 전에는 사스를 그렇게도 완벽하게 막아냈던 부처들이 지금은 왜 대란이 되도록 만들었는지 그것부터 설명해보라. 국민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잘난 방역체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서이고, 전문가들의 말과 다르게 감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치료약도 백신도 개발되지 않은 신종 전염병이란 매일이 새로운 사태고 국면이다. 사우디의 사례는 참고자료는 될지언정 그것이 한국에서 똑같이 적용될 가능성이란 완전 제로다. 사우디와 한국은 완전히 다른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고, 메르스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국민의 유전자도 다르다.



전염병 방역의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인가? 정확한 상황 파악이다. 지금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국민이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할 만큼 방역당국과 박근혜 정부의 대처가 엉망진창이고 기레기들의 보도가 권력 편향적이고 중구난방이어서 이 지경까지 온 것이 아닌가?



대체 대한민국의 방역 전문가들은 국가의 방역체계가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권위주의적 권력이 무서웠던가, 아니면 정부를 설득할 능력이 부족해서였던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방방 뜨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돈 냄새를 맡은 브로커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소양 없는 학위는 재앙을 낳는다”고 했는데, 이 땅의 학위 소지자와 전문가들의 경박한 행태를 보고 있으면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의 토론에서 시청자들이 일말의 믿음이라도 받았다면, 더는 도망갈 데가 없는 체념의 발로에서였을 것이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처음보다 수천수만 배나 어려운 법이다. 자기들끼리 만의 일방적인 토론에서 신뢰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시청자와 국민을 우롱하는 일이다. 시청료 인상에 혈안이 된 KBS를 비판하는 일은 이제 신물이 날 정도이지만, 반성을 모르는 전문가라고 다를 것은 없다. 



P.S.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걸려 있으면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사스라는 신종 전염병을 최일선에서 막아내야 하는 방역당국과 의료진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고 국민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 결과가 세계 최고의 방역모범국이었고, 한 명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뜨신돌 2015.06.13 05:00

    치료약이 없는 후천성 상식 결핍증 걸린 밥버러지들의 광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정의의 수레바퀴를 구르게할 수있을까요? 기득권 시스템이 아주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 나라 현실을 생각하면... 소통 여론조직 ... 해도 택도없죠 ㄷ ㄷ ㄷ

    • 늙은도령 2015.06.13 16:00 신고

      그래서 이렇게 싸우고 고발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한 명이라도 각성하게 되면 승리할 확률은 4천만 분의 1만큼 올라간 것이니까요.
      그렇게 티끌 모아 태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 耽讀 2015.06.13 07:49 신고

    메르스는 안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색깔론으로 몰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언론들도 이제 환자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박근혜에게 책임 묻는 언론은 거의 없습니다.

    • 늙은도령 2015.06.13 16:01 신고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었지만 메르스 대란은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돌아선 부모들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근헤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입니다.

  3. 뉴론♥ 2015.06.13 11:00 신고

    메르스가 쉽게는 잠잠해 지지 않을거 같네여 문제이긴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경제가 더 안좋아 진다고 하네여
    환자가 더 발생하면 방안에서 혼자있는게 살길이죠 머

  4. 참교육 2015.06.13 12:32

    KBS는 옛날부터 기레기입니다.
    권력의 목소리르 대변하는.. 시청자는 안중에도 없는... 한때 심야토론을 밤세워 보았던 때가 있었지요.
    지금은 기대조차 안합니다.

    • 늙은도령 2015.06.13 16:04 신고

      정말 기레기 중의 기레기입니다.
      시청료를 강제징수하는 공영방송이 하는 짓이라곤....

  5. 공수래공수거 2015.06.13 14:26 신고

    사스때의 학습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우두머리 때문입니다

  6. 불루이글 2015.06.13 17:37 신고

    밥버러지 새퀴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말이 안나오게 만드는 기레기와 종편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오게 만드네요

    6.29항쟁때 처럼 화염병과 돌팔매를 한번 맞아봐야 정신들을 차릴른지...

    • 늙은도령 2015.06.13 20:16 신고

      종편은 천벌을 받아야 합니다.
      보도채널 중 YTN도 기레기의 전형으로 변했습니다.
      이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7. 하늘이 2015.06.14 17:33

    볼만한 방송이 없다는게 마음이 아프고 영혼을 팔아먹은 지상파와 종편들 언론 그 누구도 믿을데가 없다는게 암울합니다 ᆞjtbc가 자 버터야하는데~

    • 늙은도령 2015.06.14 18:15 신고

      jtbc가 중앙일보가 아닌 시청료를 받는 공영방송이었으면 좋겟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는데......



이처럼 끝없는 이윤 창출을 가능하게 만드는 산업사회의 2차적 시장 형성이라는 ‘요정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동안 결과의 부작용(부수효과)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에게는 과학적 결과에 대한 낙관적 운명론이란 현세에 재현된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과정은 역사의 필연이며, 그래서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게 하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부정적 결과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대안과학과 대체의학 및 과거회귀적인 식이요법과 지역의 소규모 농장을 돕는 것 이외에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유기농 열풍과 함께 확률로 먹고 사는 ‘공학’이 전면에 부상한다(특히 유전공학과 환경공학 및 원자력공학). 





이들의 주장은 과학이 무오류성을 지닐 때까지 각종 부작용들을 공학적 기술로 막으면 확률 영역에 속하는 ‘결과의 낙관론’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특히 핵발전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각종 방호장치와 저준위·고준위 핵폐기물들의 (재)처리와 보관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양산하고 있다. 소형항공기와 충돌하는 확률까지 계산ㅡ백만분의 1의 확률ㅡ해서 만들어졌다는 핵발전소가 50년밖에 되지 않는 역사에서 벌써 세 번이나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이런 사고의 가능성은 조지프 로트블랙과 버트런드 러셀, 아인슈타인과 칼 폴라니 등이 “어느 나라나 대륙 또는 종교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계속적인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인간이라는 종의 한 구성원으로서” 서명한 핵위협의 감소를 촉구하는 1955년의 선언문에 반영돼 있다.



과학자들 중 아무도 최악의 결과가 확실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러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전문가들의 견해가 그들의 정책이나 편견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지는 것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우리의 연구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그것은 오로지 그 전문가가 지닌 지식의 범위에 따라 다를 뿐이다. 가장 많이 아는 전문가일수록 더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비록 이들의 선언문이 1955년도에 나왔지만,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현재의 세계적 핵물리학자들도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일본 제1원전의 폭발사고에서 보듯, 핵발전은 지구온난화와 함께 인류에게 놓인 최악의 위협이다. 특히 지구온난화는 대규모 기상이변을 동반하기 때문에 핵발전의 위험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핵발전의 위험을 막기 위한 공학적인 조치들로 사고확률을 아무리 낮춘다 해도,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확률이란 숫자놀음이다. 폭발 사고란 확률이 계산해낸 마지막 시기에서 발생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원전 폭발이 입증해준 것처럼 그 중간에 일어날 수도 있다.



하물며 노후 원전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핵발전소의 수가 늘어날수록 사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핵발전소의 완전한 폐쇄까지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농축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에서 발출되는 방사능물질은 최소 500년에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방출되기 때문에, 그것을 방비하기 위한 비용부담은 전적으로 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됐다고 해도 사고확률은 발생가능성만 입증할 뿐이지, 발생의 시기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만연된 원전 비리와 일본 제1원전 폭발에서 보듯 현재는 물론 미래의 일을 예측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위험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이란 절대 허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만들어지면 해체할 수 없고, 상상하는 이상의 피해를 불러오는 것이 핵발전이다. 아무리 많은 방어막을 설치한다 한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핵폭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또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란 계산에 적용된 변수의 종류와 가중치에 따라 달라지며 원전사고의 대부분이 인재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전에 대한 공학적 신화란 확률이라는 놀음에서 나온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핵발전은 사고가 일어나면 그 불가역적인 피해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전대미문의 결과만 동시대의 사람들과 미래 세대들에게 전가될 뿐이다. 특히 방사능피폭의 결과들이 나타나는 다음 세대에 가해지는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피해는 핵발전과 관련된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핵발전이 경제적으로도 마이너스라는 주장이 허튼 소리만은 아니다. 율리히 벡의 《위험사회》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핵에너지는 기술발전에 복속된 ‘무오류성’을 따르는 위험천만한 게임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제약에서 객관적인 제약을 방출한다. 그리고 이 제약은 거의 변화불가능하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핵폐기물의 처분 또는 비축기 동안) 수세대에 걸쳐, 오랜 시기에 걸쳐 묶어 두며, 다시 말해서 그 동안에 핵심적인 낱말들의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다른 영역에 대해서조차 측정할 수 없는 결과들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그것이 요구하는 사회통제에 적용되는데, 이것은 ‘권위주의적 핵국가’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장기적인 생물학적 영향에도 적용되며 이것은 오늘날 결코 측정될 수 없다.



우리는 지금의 생산과 소비 수준을 맞추겠다는 자기파괴적 명목과 영원히 진보해야 한다는 경제적 숙명론 때문에 핵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하고 노후 원전을 재가동하는 정치적 결정에 미래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 또한 지구온난화의 대안은 핵발전밖에 없다는 위험천만한 사이비 진단들도 넘쳐나고 있다. 모든 이익을 지금(겨우 한두 세대) 누리고, 그 회복불가능한 피해는 미래세대에 전가하겠다는 이 파렴치한 결정들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제2, 제3의 산업화와 이윤 창출의 기회를 무한정으로 늘려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도 이런 정치적 결정과 경제적 탐욕이 맞물리면서 일어났다.



울리히 벡이 정식화한 ‘위험사회’의 실질적 위협들이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 정보저장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데이터 가공기술과 인공지능의 발전에 의한 빅데이터의 출현과 다방면에서의 활용, 모바일기기들의 보편화와 유전공학 및 뇌과학의 발전으로 실재적인 위험들이 더욱 커졌고 통제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제임스 베니거가 《통제 혁명》에서 과학의 역사가 곧 정보 제어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보의 홍수를 통제하지 못하는 현대는 ‘위험사회’를 넘어 ‘초위험사회’로 접어들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니거의 말처럼, 인류의 진화가 장기간에 걸친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유전자에 축적된 어마어마한 정보들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역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정보의 범람과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초위험사회’의 도래는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사회진화론’의 한 단계에 속할 수도 있다. 헤겔의 주장처럼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02년 7월, 뉴욕 주립대학의 에커드 위머와 그 동료들은 DNA와 인터넷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유전자 청사진을 사용해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마틴 리스의 《인간 생존확률 50:50》에서 인용)”한 것에서 보듯,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각종 연구실에서 어떤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고려하면 ‘초위험사회의 도래’는 ‘감시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불확실성이 아닐 수 없다. 인공지능을 향한 구글의 집요한 노력이 빅데이터를 탄생시켰고, MS와 애플, 거대 금융자본들과 초국적기업들이 뒤를 잇고 있으며, 대규모 카드정보가 유출된 것에서 보듯 인류가 감당해야 할 위험들의 숫자와 규모, 발생빈도는 점점 높아지고 빨라지고 있다. 



미국 국방부가 내부용으로 쓰던 인터넷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이래, 인류는 핵폭발의 위협과 지구온난화의 위협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전염병과 만성질환, 정신병과 인종청소, 구조적 빈곤과 악의적인 차별 등에 시달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바우만이 《액체근대》와 《유동하는 공포》를 거쳐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다루고 있는 ‘가벼운 경제’와 ‘불확실성의 일반화’와 ‘뒤죽박죽이 된 세상’이라는 성찰들은 아탈리와 아감벤, 네그리와 지젝, 한병철과 벡, 스티글리츠와 센 등이 새로운 사회과학의 성과물들을 내놓는다고 해서 줄어들지는 않는다.



필자는 가끔 새벽에 잠이 깨 거실로 나오면 사방에서 나지막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신의 울음처럼 끊임없이 귀를 파고드는 것에 섬뜩함을 느낀다. 대형냉장고, 김치냉장고, 평면TV, 정수기, 진공청소기,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스마트폰 충전기, 컴퓨터, 프린터 등이 24시간 전자파를 방출하며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이윤 창출의 도구들을 볼 때마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핵발전소 추가 건설의 이유로 작용하면서 미래세대에게 모든 피해를 전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일방적인 부의 창출과 세습화는 거대한 위험의 개인적 분배를 요구하고 있으며, 상층부의 공기가 하층부의 공기와 다르듯이, 모든 분야에서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이름으로 악마화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불완전한 근대과학과 그 뒷수습에 분주할 뿐인 현대과학이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진보의 가면을 쓴 채. 모두에게 책임이 있기에 누구에게도 책임 없다는 궤변들을 늘어놓은 채. 수십억 명에 이르는 신 빈곤층의 양산은 상위 1%가 무한대로 부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을 넘어 인류의 5번째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최고 과학자들의 고백성사는 일부 기독교 광신도들의 종말론적 편향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은 평행선을 달리며 우리의 판단을 흐려놓거나, 거의 언제나 호도하고 있다. 인류에게는 우주라는 무한대의 시공간이 남아 있으며, 현대과학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볼 수 있으며, 스티븐 와인버그의 《최종이론의 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과 《우주의 풍경》에서도 볼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시계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에서도 볼 수 있다. 





거의 모두 이런 식이다. 과학자가 아닌 이상, 설사 과학자라고 해도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는 모두가 무책임(그들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그것을 전 세계의 정치적 의제로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할 뿐이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형제와 친지들 중에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위지에 오른 전문가들이 많은, 그래서 그들로부터 최고의 정보를 얻는 필자 역시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과학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와 비관적인 견해를 보이는 두 가지 인용문을 올리는 것으로 이번 장을 마칠까 한다(에너지의 다른 말인 영성을 강조하는 학파들도 있는데, 필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국가의 투자가 조금이라도 배분된다면 인류에게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할 시민과학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지적 능력이 있는 존재가 어떤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을 알고, 우주를 이루는 모든 사물들의 위치를 알고, 또 만약 이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면, 하나의 방정식 안에 우주에서 가장 큰 물체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운동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지적 존재에게 불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미래란 마치 지나간 일들처럼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피에르 라플라스의 《천체역학》에서 인용).



과학적 상상력이 상상력의 고갈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거친 말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과학적 상상력이 극대화되면 새로운 사상은 씨가 마를 것이라는 점이다. 과학에서 거시적 관점은 탐욕적인 관점이며, 우주를 설명하는 값진 모델은 가장 빈곤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의 정체성》에서 인용)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앨리스 2015.05.24 06:55

    오늘은 감동적인 글입니다 인류와 지구에 대한 애정이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느껴집니다^^

    • 늙은도령 2015.05.24 15:35 신고

      걱정입니다.
      지구온난화는 점점 급진성을 띠는데 박근혜 정부는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조금씩 이 문제에 고민하고 실천에 옮기는데 우리만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2. 耽讀 2015.05.24 07:44 신고

    과학만능주의를 지나, 과학은 절대선이라는 과학교 시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5.24 15:37 신고

      과학교 시대가 맞습니다.
      철학이 없는 과학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진화론에 나오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두 개의 개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과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의 차이에 대해서도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번 글에선 진화론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최적화와 최대화 개념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보통 우리는 최적화와 최대화를 동일한 개념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둘의 개념은 정반대입니다. 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책의 제목에서 주는 선입관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자발전 진화》라는 책을 보면 리처드 도킨스와 다윈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비교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적자생존이란 의미에서의 최적화

 

진화론의 핵심 논리이자 거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진 최적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요약하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유전적인 변이란 대부분의 진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를 말하는데, 수만~수십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나기 때문에 가우스 종형곡선의 꼬리 부분(롱테일)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보통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거의 대부분은 채택되지 않습니다. 방사선에 피폭되면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로 유전되지 못합니다. 이를 나쁜 돌연변이라 한다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돌연변이도 있는데 이것이 진화를 추동하는 좋은 돌연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돌연변이에 나쁘고 좋음은 없지만, 돌연변이가 인간은 물론 자연과 환경에 적합하지 못하면 당대에서 도태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유전돼 진화를 이어갑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돌연변이 유전자는 진화의 기억을 담아두는 유전자풀에 안착함과 동시에 다른 유전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모든 생명체를 최적화된 형태로 이끌어갑니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진화를 누적적 자연선택이라고 하며 만일 하나의 생명체가 자신의 진화를 계획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면 어떤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다윈과 도킨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을 보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 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최고 걸작



▲ 적자생존이 승자의 진화를 말하는가?

 

허버트 스펜서가 정립한 적자생존이란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해서 나온 것으로, 주어진 자연환경(인류에 적용하면 사회가 된다)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진화의 과정을 통해 후대로 전승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유전자 차원에서 말하면 모든 유전자에 대한 모든 유전자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들이 후대의 진화를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지구상에 살아남은 종은 가장 강하거나 가장 지적인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한 종"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힘 세고 포악한 종은 멸종하고, 착하고 배려하는 종은 생존한다"고도 말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란 개념은 『종의 기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적자생존의 본래의 뜻을 왜곡해서 ‘적자가 곧 승자’라는 의미로 사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병치시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및 약육강식의 정글을 탄생시켰습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팽창주의(식민지 확대 경쟁)를 정당화한 강자의 논리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국가와 자본의 결탁이 자연의 법칙인양 호도됐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신은 언제나 승자와 함께 한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비판한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스펜스의 사회진화론이 우파의 전체주의인 히틀러의 나치와 히데키의 군국주의로 이어졌고, 좌파에서는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이어져 인류에게 치유할 수 없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월가의 현인인 탈레브가 《블랙 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나 전사의 후예보다 적당한 타협을 한 평범한 사람들의 후예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적자생존은 승자에게 진화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멸종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실제로 생태계의 서열구조를 보면 승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환경에서 적정한 환경에 적응한 종들이 살아남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대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지만 연대를 하면 어떤 강자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자가 어느 영화평론가가 말했던 Little, Low, Lean, 즉 작고 낮은 사람들이 서로 기대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들은 수없이 많은 다른 유전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적적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만들어진 유전자들이 유전자풀에 입성해 다른 유전자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해서 다음 세대에 전해지려면 최대한 이기적인 행태를 통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자살유전자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자살유전자는 힘을 잃게 돼 유전자 풀에서 쫓겨나 진화의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오직 생존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진화의 결정체인 종의 생명마저 단축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화하려 합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라는 과정이 유전자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이기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개별 유전자는 필요하다면 다른 유전자의 기능을 최소화시키고, 자신의 힘을 최대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유전자와 담합해서 자신의 특성과 반대되는 유전자를 퇴출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기보존의 차원에서만 행위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로서의 최대화를 의미합니다.


 


                                                  


  

▲ 인간이란 종의 이타적 특성

 

유전자가 이기적이라 표현했던 리처드 도킨스의 영향을 논외로 한다고 해도 유전자의 이기적인 면은 진화론의 시조인 다윈조차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의 핵심이 적자생존(유전자 차원과 종으로서의 차원 모두에서)으로 오독되기 쉬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도덕성과 이타적 본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윈은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의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기질이 인류의 성공적인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견해를 밝힙니다. 그는 특히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많은 부족들의 ‘충성심, 애향심, 복종, 용기, 동정심’을 인류 진화의 성공 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타적인 유전자의 특성이 인간이란 종이 만물의 영장의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란 것이란 뜻이지요.

 

 

칼 세이건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코스모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생명의 본질은 우리를 만들고 있는 원자들이나 단순한 분자들에 있는 게 아니라 이 물질들이 결합되는 방식에 있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원자로 이루어진 유전자도 이기적인 행태가 아닌 진화를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이타적인 방식에 의해 지금의 인류를 창조했다고 것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복잡하고 거대한 생명들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이타성이 진화의 본질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물론 브르스 립튼의 《자발적 진화》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지만, 유전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종의 차원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대표적이다)의 도움이 없이는 우주의 법칙을 모두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윈 진화론을 박반하는 후생진화론의 핵심

 


▲ 현대의 차원에서 본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

 

다윈의 진화론을 입증하려면 생명체를 이룰 수 있는 원소들로 최초의 복제자가 탄생하던 순간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물리학과 유기화학 및 무기화학, 분자생물학 등이 발전함에 따라 우주의 탄생부터 계산이 불가능한 확률이 겹치고 겹치면서 지구라는 행성이 최초의 유기체가 탄생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진화를 해왔음이 밝혀졌습니다. 높은 온도와 방사능, 유해가스들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수준까지 안정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과학은 최초의 유기체인 첫 번째 복제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인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진화된 유인원에서 현재의 인류 사이에 어떤 진화의 비밀이 있었는지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신의 창조론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입니다. 어쩌면 ‘원시 스프’의 재현에 성공하고, 유인원에서 인류로 비약했던 진화의 비밀을 푼다고 해도 신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가 창조론과 진화론을 비교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에 관한 글은 시간이 되면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믿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이타적 본성에 있습니다. 인류학에서 밝혀진 것들을 참조하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전자의 최적화와 최대화는 개별 유전자들이 이기적인 성질과 이타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서 둘 다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성질 때문에 인간은 보다 지적인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고, 처한 환경에 따라 적자생존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종으로서 이기적인 것에 치중하면 세상은 위험에 빠져들고 반대로 이타적인 것에 열중하면 세상은 행복해집니다. 삶의 필요와 욕구, 공존과 연대가 탐욕과 욕망, 독점과 무한경쟁으로 대체되면 최악의 세상인 신자유주의가 됩니다.

 

 

필자가 분장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진화와 관련된 수십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유전자 차원에서는 이기적인 성질이 중요하지만, 종이란 차원으로 넘어오면 이타적인 성질(새누리당 빼고)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몸만 해도 천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서로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이며 영적인 활동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의 이타성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진화의 결과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는 극좌와 극우들은 제외됨을 밝혀둡니다. 그들은 진화도 가끔은 역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대한민국에서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떠받드는 보수의 DNA가 최대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다양한 자유를 지향하는 진보의 DNA는 최적화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셀 푸코에 따르면 국가란 개인화와 전체화의 두 가지 경향이 서로 충돌하고 반응하고 교차하는 곳입니다. 이 둘을 자유방임 시장경제 하에 통합시킨 신자유주의 통치가 일반화된 이후로는 모든 사회 환경이 사적 독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보수우파(박근혜 정부 뒤에 자리한 시장자유주의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의 법칙과 신의 섭리에서도 벗어난 탐욕의 결과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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