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연재를 하다 중단한 상태인 '늙은도령의 눈으로 본 근현대사 비판'은 인류 문명의 발전사가 자연과의 공생을 벗어난 순간부터 파시즘적 속도로 발전해왔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자연의 파괴만이 아니라 인류마저도 그 희생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통곡부터 하리라'라는 유럽의 속담만으로는 하늘을 향해 우뚝 쏫은 마천루 속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인간의 초라함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나마 인류는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동체와 사회 해체, 자연과 환경의 파괴를 감수하면서까지 문명의 발전을 받아들였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던 개인이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전의 '사회(복지)국가'를 포기하고, 그래서 성공과 실패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려지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평생에 걸쳐 다양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1인가구의 출현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후대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종의 번성을 거듭해온 인류 진화의 방식을 거부하는 세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앞세대가 누렸던 것들 중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3개에서 5개, 7개로 계속해서 늘어남에 따라, 무한대의 포기를 담을 수 있는 'N'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을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 여겼던 과학기술의 발전은 빛의 속도로 일자리를 줄였고, 그에 따라 '남아 돈다'는 뜻의 잉여를 넘어 '쓸모 없다'는 뜻의 비존재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처지로 내몰린 수많은 사회초년생들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저임금노동의 굴레에 갇혀버렸습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도 아니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올랐던 청춘'은 고통과 좌절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앞세대인 청춘의 고통과 좌절을 지켜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변한 꿈과 도전의 자리에 조숙한 현실인식과 타협의 선택들로 채웠습니다. 잘리지 않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돈을 벌 수 있는 편안한 직업을 찾는 것은 희망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아 때부터 선행교육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경쟁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텔레비젼과 PC, 스마트폰 등에서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돌이나 운동선수를 동경하는 것도 그 이면에 자리한 수백만 명의 낙오자들이라는 압도적인 실패확률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높은 실패율은 어느 직업에서나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온몸을 성형하던 약물의 도움을 받던, 죽을 만큼 힘든 연습생(지망생)과 후보 생활을 넘길 수만 있다면 단시간 안에 평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박의 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형되고 뒤틀려진 것이지 아이들과 청소년의 생각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조)부모의 능력이 나머지 삶을 결정하는 현실에서 그나마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육체를 활용하는 것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삶의 시작에서부터 무한경쟁에 던져진 이들이 급증하는 정신질환(ADHD, 우을증, 공황증세)과 시도때도없이 찾아오는 자신과 타자를 향한 폭력성, 그 극한에 자리한 자살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 비하면 그들의 선택은 치열한 생존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이들이 보았던 것들이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만 강조된 용산참사, 철저한 방관이 불러온 쌍용자동차해고노동자의 연이은 자살, 퇴임한 대통령에게 휘둘러졌던 광기 어린 폭력, 그들의 형제자매이자 친구와 선후배일 수도 있었던 250명의 단원고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참사,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노렸던 메르스대란 등이라면 자신에게 투영된 부모와 어른들의 꿈과 희망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불의와 부정, 반칙과 특권이라면 바르고 착하고 정의로운 삶을 주문하는 기성세대란 지독한 모순과 거짓의 화산이자, 이룰 수 없는 허상을 행해 죽을 때까지 노오오오력 하라는 그 유명한 '꼰대'의 전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목록에는 전혀 좋아할 수 없는 것들만 가득하다면 차라리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연습이 우선됐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살 수 있게 됐지만,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육체(적 재능)에 한가닥 희망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패배자나 사회부적응자로 취급됐던 외톨이라는 것도 사이버세상에서는 무한대의 네트워크를 통해 삶의 조각조각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한 생을 보낼 수 있는 (그들 나름대로는) 괜찮은 선택이 됐습니다. 





갈수록 시장이 좁아지고, 경쟁이 과열돼 '짧은 활동과 그것보다 긴 휴식기'가 되풀이됨에 따라 소녀시대나 동방신기, 빅뱅과 슈주, 2NE1과 엑소 같은 넘사벽의 성공을 거두는 것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알면서도ㅡ홍수를 이루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K-pop스타'를 빼면, 다양해졌지만 고만고만한 것들로 재편된 것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ㅡ끝없이 아이돌그룹이 배출되고 퇴출되는 과정은 (기형적인 인구구조와 시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김연아와 박지성, 박찬호와 박세리, 박인비 같은 대박을 터트리는 것(손홍민과 손연재, 류현진과 박병호, 강정호와 기성용, 김효주와 김세영과 장하나, 이승우와 백승희 등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제외)도 어려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이 불가능해진 청춘에 접어들기 전까지 육체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10대의 선택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맞선 부모들의 전통적인 압박도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통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빛의 속도로 끊임없이 배회하는 '떠다니는 섬'으로서의 10대의 등장이란 (다음 글에서 다룰) 무한한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1%의 희망 때문에 99%의 절망을 기꺼이 감내하도록 만들었던)낙관론적 세계관의 16세기에 잉태된 필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선진국들이 400년 이상이 걸린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을 단 70년 만에 파시즘적 속도로 이룩한 압축성장에 내던져진 대한민국의 10대에게는 더더욱.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catlover8 2016.03.01 05:14

    아고라 경제방에 이번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에 관한 제 생각을 담은 장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도령님처럼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짜피 많은 사람들이 읽을 건 아니지만, 그냥 답답해서 한 번 올려봤습니다.

    저는 아고라를 2년전에 처음 알게 됐는데, 정말 너무 난잡해서 처음 들어가 봤을 때 경악했었거든요. 그래서 글을 거의 올리지 않는데, 아무튼 혹시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세요. 닉네임 catlover8으로 찾으시면 되구요. 나중에 도령님 생각도 한 번 듣고 싶군요. 참으로 착찹한 저녁입니다.

    • 늙은도령 2016.03.01 05:12 신고

      알겠습니다.
      오늘 피로해서 10시가 넘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필리버스터를 중단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4일 전에 썼던 그대로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6.03.01 08:25 신고

    꿈을 잃어버린 10대들입니다

    그 잃어버린 꿈을 찾아줄,되살려줄 의무가 기성세대들에게
    있습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 늙은도령 2016.03.01 09:16 신고

      세상을 바꾸려면 압도적인 정치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을 최소화시켰지만, 국민의 지지가 높으면 얼마든지 체제를 바꿀 수 있습니다.

  3. ON ALL 2016.04.10 16:51

    매번 좋은 글들을 다방면에 걸쳐 올리고 계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이 미치는 영역이 턱없이 좁기 때문에 본문을 몇 부분 인용하고 싶습니다. 인용한 후에는 출처를 남기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번 글은 완벽한 추측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필자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의당 당원이고 '노유진'이란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유시민 작가가 JTBC의 썰전을 선택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것에서 출발해 하나의 그럴싸한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 이번 글의 허구성과 필자의 희망사항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부담없이 읽으시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에서 인용).



위의 인용문처럼 텔레비전은 우리의 삶 모든 곳에 공기처럼 퍼져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거나, 아예 없다고 해도 스마트폰, 도심의 광고판, 유튜브, 각종 대화 등을 통해 텔레비전이 내보낸 콘텐츠를 어떻게든 접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은 그 자체로 현대인의 삶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아무리 쌍방향적 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텔레비전 테크크놀로지의 기본인 다수의 시청자에 대한 일방적 전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 절대 다수의 시청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뉴스와 정보는 가랑비에 옷 젓듯이 시청자의 인식을 텔레비전에 최적화하도록 야금야금 잠식합니다. 인류 진화의 최대 성과인 두뇌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편향된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인 미디어 세상의 도래가 특별한 정항을 받지 않은 채 파시즘적 속도로 인간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페이스북이 페친의 네트워크로 이에 맞서고 있지만, 유통되는 정보의 대부분이 텔레비전의 콘텐츠라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텔레비전의 위력을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미래의 미디어가 될 것을 예상했던 트위터의 몰락과 팟캐스트의 부진에 비해, '보이는 라디오'와 아프리카TV의 성공 등에서 보듯이, 미래에도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유시민이 JTBC의 썰전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현실정치에서 벗어난, 그러면서도 팟캐스트와 출판, 강연, 토크콘서트 등을 통해 거대양당체제에 무엇으로도 매꿀 수 없는 균열을 만들고자 종횡무진 뛰어다녔던 유시민이 텔레비전의 영향력에 두 손을 든 것이 썰전 참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득권 보수화된 새누리당2중대로서의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 전 대표에 의해 환골탈태에 성공하자, 그에 발맞춘 듯 유시민은 썰전에 합류했습니다. 



문재인의 정치력과 리더십을 노무현과 비교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던 그가, 바보 노무현의 정치력과 리더십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문재인에게서 노무현의 모습이나 그 확장판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진중권은 실패했지만 유시민이기에 가능했던 것들이 썰전을 통해 발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노무현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2회 때 말했던 것처럼,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이미 끝장난 역사적 판결이 이명박근혜 8년 동안 모두 다 폐기된 채 유신시대로의 무한퇴행을 거듭하자 썰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서있는 것이 힘들 정도로 우측으로 기울어진 방송생태계에서 썰전이 갖는 독특한 영향력을 활용할 수만 있다면, 도무지 탈출구를 찾기 힘든 진보정당의 부활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와 국정운영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박학다식과 촌철살인의 유시민이, 막무가내의 전원책을 적절하게 응대하면서, 썰전의 시청률을 높일수록 그의 영향력은 이철희보다 몇 배는 커질 것입니다. 이는 진보정당 전체에 힘을 실어줄 뿐만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혁신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유시민과 손석희의 오랜 인연이 썰전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SNS를 통해 확대재생산될 콘텐츠들로 하여, 기울어진 방송생태계를 조금이나마 바로잡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가 '올 단두대' 전원책을 오락적이지 않으면 시청률이 떨어지는 텔레비전의 특성에 부합한다고 인정하면서, 썰전의 본방사수에 힘을 보태는 것도 야권의 총선 승리가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근혜 8년이 단 하나의 단어 '헬조선'에 압축되는 것에서 보듯, 나머지 2년마저 그렇게 흘러간다면 청춘의 미래란 '잉여의 흙수저'를 넘어 '쓰레기로 버려지는 무(無)수저'까지 추락할 수 있습니다. 



야권의 총선 승리, 그것도 진보정당의 약진을 동반한 승리만이 이런 퇴행을 막을 수 있다면, 썰전의 시청률이 10%를 돌파할 정도로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시민의 활약이 독보적이어야 합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던, 필자는 미증유의 부담을 유시민에게 안겨주는데 추호의 인색함도 보이지 않으렵니다. 문재인이 대놓고 밀어줄 수 없는 정의당의 원내교섭단체 달성, 노동당과 녹색당의 원내진출을 이루기 위해 유시민에게 온갖 부담을 씌우렵니다, 팍팍!!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반골 2016.02.03 23:20

    유시민과 손석희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 두사람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이로(^^) 봅니다!
    손 석희는 유시민이 썰전에 나와서 시청률 및 우군이 생긴거고
    유시민은 방송에 출연해서 인지도 및 정당홍보 상승 돼고~

  2. 어쩌다가보니 2016.02.04 06:24

    더불어민주당이 환골탈태했나요? ^^;;

    • 늙은도령 2016.02.04 21:09 신고

      지금 진행 중입니다.
      문재인 대표가 백의종군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환골탈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매일같이 비판해야죠.
      온라인입당도, 총선 승리도 모두가 날아가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은 혁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시죠.

  3. 공수래공수거 2016.02.04 08:32 신고

    좌파--> 올 단두대-->? 무엇을 이야기 할지 궁금하긴 합니다 ㅋ



언제부터인가 진보정당들이 중도를 표방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은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처럼 ‘제3의 길(온화한 보수주의)’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우축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도가 존재하는 양 사기를 쳤던 블레어와 클린턴이 한 일이란 진보좌파를 내부로부터 파괴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커지는 것을 힘겹게 막아왔던 진보좌파의 마지막 역할마저 시궁창에 처박았다. 대처와 레이건이 보수우파의 영원한 목표인 정부의 민영화(작은 정부)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만들었다면, 블레어와 클린턴은 민영화된 기업들을 감시하는 업무마저 시장에 넘겨버렸다.



수없이 많은 통계와 연구들이 부와 권력이 세습되고 있고, 신빈곤층이 양산되고, 시장논리에 따라 잉여들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사실상의 과두정치로 접어들었고, 정치와 자본의 유착은 어디까지가 정부에 속하고, 어디서부터 민간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됐다.



2008년에 발생한 월가의 붕괴는 정치와 자본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무력해진 진보좌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보수화된 세상에서 진보정당들은 우측으로 움직였고, 좌파정당들은 존립조차 불가능했다. 진보좌파들은 다투어 ‘중도’를 내걸었고, 창씨개명에 열중했다.





이렇게 정부와 정치의 영역에서 진보좌파의 핵심가치(시장의 탐욕을 억제해 보다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것)들이 사라지자 세상은 ‘1대 99사회’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중하위 99%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노예로의 삶과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



사람들은 거대담론(이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만, 잠시만 멈춰 서서 세상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보수우파의 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수우파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돌아가는 자유 시장이 신의 섭리라는 것으로 집약됐다.



이 때문에 보수우파들은 자유 시장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부는 신의 섭리를 가장 충실히 따른 결과이므로 정당하다 한다(미국의 주류인 WASP의 청교도정신). 부가 독점되고 빈곤이 늘어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이므로 불평등이 늘어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마태복음에 나오는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더 가난해지리라'의 근본주의적 해석).





자유 시장이 신의 섭리이기에 이의 작동에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은 신의 섭리를 거역하는 행위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극단적 복음주의자가 자유 시장의 수호자며, 정부 업무의 민영화와  세금 감면, 노조 파괴 등을 옹호하고, 시장을 억압(개입)하는 진보좌파에 빨간색을 칠하는 보수우파와의 교집합이 형성된다.



뉴딜정책과 케인즈 경제학이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기 시작한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내내 보수 반동을 주도했던 뉴라이트(신보수주의자)들이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보수우파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자유 시장을 축으로 한 기독교와 보수우파의 교집합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다른 교집합도 있는데 이는 별도의 글로 다룰 것이다).



최고 97%(영국)와 91%(미국)에 이르는 세금을 내야했던 부자들이 이들의 교집합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음은 세삼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처럼 미국과 영국에서 성공한 보수 반동의 모델을 도입한 한국의 보수우파가 정권을 탈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투표율과 상관없이 한 표라도 많은 정당이나 후보가 정치적 승리를 독점한다. 투표율이 낮을수록 조직을 동원할 능력(선거는 돈이다)에서 앞선 보수우파가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형교회와 새누리당의 교집합에 맞설 진보좌파의 표 집결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자꾸 우축으로 움직이려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와 보수우파의 교집합의 승리를 공고히 해줄 뿐이다. 비록 마르크스의 성찰이 상당 부분 유효하지 못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수밖에 없었을 때보다 작금의 현실이 더욱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래, 지금처럼 진보좌파의 가치가 중요해진 적이 없었다. 민주주의가 대체 불가능한 체제로 굳어진 이래, 지금처럼 진보좌파의 역할이 중요해진 적이 없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부정적 세계화가 신의 자리를 대체한 지금처럼 진보좌파의 부활이 절실했던 적도 없었다.



정체불명의 ‘중도’를 얘기할수록, 철저히 실패한 ‘제3의 길’을 얘기할수록 노예로의 삶과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을 빼면, 하위 99%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방임의 수준에 이른 넘쳐나는 자유란 불평등과 불공정의 대가로 주어진 값싼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P.S. 블레어 내각과 클린턴 정부에 대한 보수학자들의 연구는 완승을 위한 중간단계 정도로 보고, 진보학자들의 연구는 진보의 가치가 시장으로 넘어가는 참담한 결론으로 가득하다. 블레어는 대처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이었고, 클린턴은 부시에게 레이건의 유산을 확대해서 넘겨주었다는 것이 최근의 결론이다.



한국에서는 토인비의 <제3의 길>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지만, 실제적으로 <제3의 길>을 채택한 진보정부들은 모두 다 친재벌적 자유 시장을 도전불가능한 지위로 끌어올린 보수우파에게 승리의 팡라페를 울리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했다. <제3의 길>은 진보의 가치를 공동묘지로 보내는 결과로 귀결됐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엘리스 2015.06.14 17:39

    지금 탐욕의 정체를 말씀해주시고 계시는 거죠?
    탐욕의 고리들을 찾아서 근본 출발점을 깨우쳐 주시는 거죠?
    값싼 부스러기들로 눈 먼 저와 같은 대중들을 깨우고 계시는 거죠?

    누군가 자본주의의 폐해가 올해와 내년 정점에 다다를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도령님 글을 통해 깨우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6.14 18:14 신고

      자본주의와 보수우파의 자유 시장이 합쳐져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습니다.
      여기에 신의 섭리를 끌어들인 것은 기독교 우파이며, 이것이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어 영미식 신자유주의가 탄생했습니다.
      악마와 탐욕의 탄생이었지요.
      그 이후의 인류는 무한대로 타락했고 이기적인 됐습니다.
      도덕과 윤리, 정의와 상식, 도덕과 철학 등이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진실한 자유가 무엇인지도,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도, 평등의 중요성도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2. base 2015.06.14 18:46

    새로운 형태의 정교합작(일치)의 세상인가봐요. 그런데 그 누구는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니 아마 신당을 차려놓고 신께 두손 모아 기도하며 계시를 받아 또 다른 정교일치를 보요주는듯 하네요.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없게도 말이죠!!

    • 늙은도령 2015.06.14 19:24 신고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두 명의 대통령이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습니다.
      정치철학도 없는 탐욕의 결정체들이 나라를 통치했으니 메르스 대란까지 일어난 것이지요.

  3. 耽讀 2015.06.14 20:02 신고

    1%대 99%인데 왜 99%는 중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왜 99%는 1%는 뒤집어 엎지 못할까요?
    예수 가르침은 신자유주의와 부의 독점이 아닌데. 근본주의자들은 왜 부의 독점을 지지할까요?
    통탄할 일입니다.

    • 늙은도령 2015.06.14 20:30 신고

      99% 중에도 보수가 있고 자신이 중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진실을 알려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늘 그곳에서 생깁니다.
      보수우파에 대한 연구가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4. 가난한여행자 2015.06.15 02:40 신고

    잘읽고 느끼고 갑니다
    20살때 젊은시절 '''루소의 불평등 기원론''' 을알고 한사회에 불평등에 대한 생각 했는데

    2015년 대한민국에서 상식이전에 금전적이득을 위한 집단이 나라를 움직이는 한주역이라는데 신기하네요

    고도의 개인 문명 (인터넷) 발달한 나라에서 중세 암흑시대 일이 벌어지네요

    유령여왕 박근혜 ,그를 조정하는는 실질적 귀족권력들, 그이득 보려고 모여든 기사, 종종 문필가들
    그리고 그이론 취한 대중들

    박대통령 당선되고 친구들 모임때 '''' 우리나라는 중세 암흑시대 재현될거야'''
    그리고 그영향은 한시대가 고생해야 극복 될수있어'''


    내 예언이 들렸으면했는데,,,,

    대한민국은 현재 아마겟돈이네요 .....정신적 공황이네요

    슬프네요....

    • 늙은도령 2015.06.15 02:45 신고

      보수정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시장자유주의 우파와 기독교 근본주의자, 좌파에서 전향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이명박근혜 정부입니다.
      친일파의 후예라는 것보다 이것에 초점을 맞춰야 그나마 사람사는 세상의 일부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5. h2 2016.07.30 11:35

    기독교 근본주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아십니까? 글을 읽어보면 근본주의가 아닌자들을 근본주의로 덧씌워 말하는 의도가 뭔지 궁금합니다 정확히 기독교 근본주의와 더불어 미국 근본주의 역사도 검색을 한 후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늙은도령 2016.07.30 14:31 신고

      <아메리칸 그레이스>는 100대 석학에 포함되는 로버트 퍼트남이 쓴 책으로 1000페이지가 넘습니다.
      미국의 기독교를 다룬 것이지요.
      기독교 근본주의는 지독히 많이 경험했고, 책으로도 많이 읽었으며, 무지하게 자세히 알고 있으니 새로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기독교 근본주의들이 쓴 책을 몇십 권이나 읽어 그들의 정치적 성향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종교 관련해서, 특히 천주교와 기독교, 불교는 박사학위 받을 만큼 공부했습니다.
      님이나 제대로 공부하시지요.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새정연이 몰락하는 과정을 복기해 보면 계층구조와 이념구조의 변화가 중첩되는 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이후로는 일관되게 나타났다. 그 시발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1997년의 외환위기다.

 


수출 일변도의 압축성장의 폐해가 외환위기로 폭발하자,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동반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돌이킬 수 없는 해부학적 외과수술이 단행됐다.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구조조정은 수없이 많은 해직자를 양산했고, 노동유연화의 본격화에 따라 노동의 몰락이 촉진됐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장기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됐다. 민주정부 10년 동안에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강화됐지만, 질적인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부와 소득 수준에 따라 계층구조는 10 대 90로 악화되고 있고, 이념구조도 보수3 : 중도3 : 진보4에서 보수4 : 중도4 : 진보2로 재편되고 있다. 







현 제1야당의 갈지자 행보의 기원을 추적해보면 여기에 이른다. 참여정부 후반부터 오늘의 새정연에 이르기까지 제1야당이 외연을 넓히겠다고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을 보면, 계층구조의 90%를 이루고 있는 중하위층 중에서 중도(이중이념)와 합리적 보수 성향을 띠는 유권자를 지지층으로 끌어들여 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7.30 재보권선거의 참패로 이어진 안철수 신당과의 합당과 이상돈 교수의 비대위원장 영입추진이 가장 대표적이다.



시민이 개인을 거쳐 소비자로 변한 상황에서 공통의 정체성이 없는 계층들은 사실상 세대로 대체된 상태다. 계급적 의식을 대표했던 노조도 노동유연성이 대세가 됨에 따라 전통의 영향력을 상실하며, 한국노총의 경우 아예 보수화됐다. 대형사업장 노조들은 귀족화됐고, 정작 노조가 필요한 사업장은 비정규직으로대체됐다. 



여기에 성별의 차이(차별)와 지역적 환경, 학력과 이주민, 직종과 노동의 분화까지 더해지면서 중하위층 90%는 수없이 분열되고 파편화됐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삶정치적 영역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는 반정치적 정서의 확대와 투표율 하락에 따른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이어졌다. 정치를 얘기하는 것조차 시대에 뒤쳐진 자들의 특징이 됐다.  



소비자로 떨어진 시민은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어떠한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그에 따라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정치경제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없어 공통의 의식을 형성하지 못한다. 네트워크의 과잉은 네트워크의 무력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으로 세력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그때그때의 사안에 따라 단기적이고 즉물적인 이합집산만 보여준다. 



네그리와 하트가 꿈꾸었던 이합집산이 자유로운 수평적인 떼처럼 '다중'으로서의 세계시민적 네트워크는 이루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질 수도 없다. 시민적 자유와 계급적 의식이나 공토의 이해를 구축하지 못하는 극도로 파편화된 소비자의 시대에는 유럽적 의미의 신좌파란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어색한 동거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형태의 네트워크적 유목민은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에 의해 여론 조작의 대상으로 최적화된다. 민주주의란 사회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정치적 자유와 각종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데, 정착하지 못하는 디지털 유목민은 신빈곤층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권리들을 제대로 행사하기 힘들다.



저임금 비정규직과 임시직의 젖줄인 잉여들이 포화상태를 넘어 삼포세대처럼 ‘쓰레기로 버려지는 삶’의 전 단계까지 추락을 거듭한다. 이들에게는 빈곤의 대가로 떠들어댈 수 있는 자유,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아예 진입을 거부하는 자유, 사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 기타등등의 자유들이 주어진다. 



1인가구와 빈곤가구의 증가는 평균수명의 확대와 중첩되며, 필연적으로 신빈곤층이 늘어난다. 청년 실업자의 증가와 교용 형태의 악화는 노인 빈곤과 낮은 수준의 복지, 저임금 여성노동자와 이주민 및 외국인노동자의 확대와 삼중사중으로 중첩되며, 세대간 갈등과 성적·인종적 차별과 저임금 노동의 고착화로 이어진다. 



중하위층을 중심으로 사회적 스트레스와 만성질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부와 기회의 불평등이 강화되며 계층간 이동이 최소화된다.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는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확대와 맞물려 최소화되고, 새로운 형태의 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가 강화된다. 모든 분야에서 구조적 부정의가 눈덩이처럼 커진다.  





이에 비해 상위 10%는 부와 기회의 대물림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1%의 특권층과 9%의 상류층을 이루며 두터운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중하위층이 이익 집단과 특정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1이라면 상위층은 10에 이르고, 최상위 1%는 20~25에 이른다. 



그 결과 상위 10%와 중하위 90%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갈수록 벌어진다. 정치자금 제공과 각종 기부를 통해 이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고액의 광고비와 대규모 협찬 등으로 대중매체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력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특권층으로 접어든다. 마침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1인1표가 1원1표로 대체되며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만큼 금권정치를 강화한다.



국가와 사회의 보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신빈곤층은 복지의 사각지대로 떨어지거나, 이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정규직에 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도 이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보통신기술의 결과물인 빅데이터가 구축됨에 따라 프라이버시가 축소된다. 감시받는 사람들이 기득권에 맞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중산층도 언제든지 하층민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류층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너무나 많은 돈이 들어가고 노후대책도 챙겨야 한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가족이 해체되고, 계층구조가 10 대 90으로 재편됐음에도 이념구조가 4 : 3 : 3으로 고착화되는 이유다.





여기서 진보의 가치가 정체성인 새정연의 중도와 보수화의 논리가 힘을 얻는다. 안철수 신당과의 통합과 이상돈 교수의 비대위원장 영입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화의 시발점이 됐던 신민주당 플랜이나, 신당과의 합당 과정에서 당의 강령을 정할 때 4.19와 5.18 정신과 10.4선언 계승 등이 빠지는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도 마찬가지다.



헌데 새정연의 주류는 진보고, 고정 지지층의 대부분도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이들에게는 새정연의 보수화가 달갑지 않았고, 당의 정체성마저 약화되고 혼란은 가중됐다. 계파의 난립이 강화된 것도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누가 대표가 되더라도 정치적 리더십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고, 이는 대여 투쟁이나 협상에서 연전연패로 이어졌다.



또한 고착화된 이념구조인 4 : 3 : 3도 진보세력을 대변하던 새정연의 쇄락으로 인해 4 : 4 : 2로 변화될 조짐마저 강화되고 있다. 새정연이 진보적 가치를 강화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된 정치적 리더십을 제시할 수 있으면 계층구조의 변화 때문에 진보의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음에도 새정연은 정반대로 간 것이다.

외연 확장은 고사하고 정치적 영향력만 급속도로 떨어졌다.





이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참사 초기에 국민이 보여준 분노의 분출은 자본과 권력의 탐욕에 대한 사회경제적 평등과 민주주의의 강화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참사 초기에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조중동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여야 모두에게 떠넘김으로써 정치적 프레임 설정해 전력을 다한 것이 이 때문이며, 그 결과는 정치적 접근의 원천봉쇄였다. 



새정연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첫 번째 요인이 다음 글에서 다룰 두 번째 요인에 휘둘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행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세월호 유족과 새정연은 이렇게 갈라졌고, 박영선 대표의 연이은 실족이 이어지며, 제1야당의 몰락이 역사상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좌측에 있는 진보정당들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새정연의 중도보수화는 진보 진영 전체를 무너뜨린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능함과 그에 대한 정치적 무책임이 겹쳐져 일어난 퇴행이었다. 중도와 합리적 보수를 놓고 새누리당과 일전을 불사한다면 고정지지층마저 잃게 되는 필패의 과정일 수밖에 없었고, 전략적으로도 이길 수 없었다. 



                                     


  1. 중용투자자 2014.09.19 08:22

    넘어야 할 산들은 많으나 이번기회에 바닥을 잘 다져서 위기극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

    • 늙은도령 2014.09.19 14:59 신고

      네, 이번 연재를 시작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것을 뒤로 미루고 이것에 집중해 글을 쓴 후 추가로 조사를 한 다음에 출판할 생각입니다.
      모든 순서를 바꿀 생각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09.19 13:04 신고

    언론이 제일 무섭습니다

    • 늙은도령 2014.09.19 14:58 신고

      종편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러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런 다음에 MBC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그러면 자연히 무너집니다.
      방송부터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