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에 마르크스는 인식의 출발점에서 몇 가지 전제(대표적인 것이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추상성, 모든 노동이 균질하다는 전제하에 사후적 평등의 근거가 되는 노동가치설, 계급투쟁의 기원이 된 다윈적 역사인식, 유토피아적 세계의 도래가 가능하다는 뉴턴식 우주관 등. 당시에는 뉴턴 이후의 과학은 없다고 할 정도로 뉴턴의 역학은 절대적 영향력을 지녔었다)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찰을 이루고도, 그가 예언했던 절대 다수가 누려야 할 ‘자유의 왕국’이 극소수의 ‘신자유주의 왕국’으로 변질되는데 일조했다.





아니 일조가 아니라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초기에 어떤 규제도 없었기 때문에 산업혁명의 여파는 근대유럽을 착취와 억압이 넘치는 무법지대로 만들었는데, 마르크스가 그 이유를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찾아냄에 따라 그의 성찰은 종교적 영역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아담 스미스가 작은 시장만 보고 자기조정 시장을 추상했기 때문에 온갖 문제들을 양산했듯이, 마르크스도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던 영국의 자본주의에 경도돼 역사의 발전과정이 노동자의 유토피아로 이른다는 결정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자본주의의 경험이 일천했으며, 그 당시까지의 과학적 한계에 갇혀 있었지만 이는 문제가 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마르크스는 다윈적 역사인식과 뉴턴식 우주관에 경도되는 바람에 역사의 발전과정이 거듭되는 계급투쟁에 의한, 최종적으로는 무계급사회에 이른다고 봤다(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역사결정론은 자본주의가 극에 이르면 자유의 왕국에 이른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성과들은 미래는 무엇으로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맞물려 자본주의적 착취가 종말에 이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마르크스적 계급투쟁을 거꾸로 뒤집어버린 지배엘리트(특히 전통의 금융‧산업권력)에 의한 반동의 역사이자 권위주의적 통치로의 회귀가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명박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박근혜의 ‘줄푸세’처럼, 신자유주의는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극소수의 가진 자들이 더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 덜 가진 자들의 것들을 탈취하는 과정이다.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식 복지국가나 국가개입이 자연법칙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내세워 적자생존의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도,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을 뒤집어 ‘자유의 왕국’과 정반대의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주기적인 공황을 불러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용해 위기를 조장하고 ‘쇼크요법(IMF 구제금융)’을 강제하는 것도 마르크스적 계급투쟁을 뒤집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하면 1, 2차세계대전 이후 평등과 공존, 상생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발전국가 모델의 핵심이었던 평생고용 체제 때문에 상위 1%의 부와 권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를 뒤집기 위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대상으로 반동의 계급혁명을 감행해 부와 권력을 회수한 것이 신자유주의 40년이고,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마르크스가 하늘에서 가슴을 치며 통탄할 노릇이다.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신보수주의 세력(뉴라이트)들이 19세기에 유행했던 자유방임 시장경제(어떤 규제도 없었고, 노조도 없었으며, 국가의 개입은 원천차단됐던)를 전면에 내세운 채,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평생고용 체제를 파괴한 것도 이 때문이며, 이를 위해 경찰력과 감시권력을 극대화한 권위주의적 정부를 선호했고, 정경유착과 회전문 인사로 집권을 이어가야 했다(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각종 불평등을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과정인 사회주의에 비해, 신자유주의가 개인적이며 환경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극복하는 과정인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도 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던 불평등은 자유를 제한하고 침식하는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나라일수록 불평등이 늘어나고 정의와 도덕, 윤리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도 필연의 과정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고 했지만, (바우만의 주장이 옳다면) 견고한 자본주의는 녹았지만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내부로부터 무너진 자본주의는 더욱 유연하면서도 무엇이라도 쓸어버릴 수 있는 상위 1%의 ‘액체의 형태’로 변형돼 세상의 모든 부분을 신자유주의화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석학들마다 다른 것도 이 때문이지만,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통치의 방법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막강해졌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줄이고 다른 세상을 만들려는 다양한 저항운동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하위 90%에게 ‘유동하는 공포’를 양산하는 체제로 거듭날 수 있었다(비어있는 9%는 체제의 간수로 별도의 군을 이루고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9.09 09:19 신고

    변수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마치 마르크스나 애덤스미스가 잘못내린 결론처럼.... 저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결국 자멸의 길을 걸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09 17:39 신고

      앞으로 10년 안에 거대한 전환이 일어날 기반이 생겨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파국을 면치 못합니다.
      지구온난화와 환경 오염, 물부족 등의 공격이 20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성장 자체를 하면 안 됩니다.
      소비를 줄이고 지금보다 매우 많이 불편해져야 합니다.

  2. 耽讀 2015.09.09 12:38 신고

    자본주의이든 공산주의이든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에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지요.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었느냐는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5.09.09 17:46 신고

      그래서 공부하고 토론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는 것은 가치가 없고 쉽게 사라집니다.
      우리는 실천하고 반성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09.10 07:59 신고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알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11 01:04 신고

      네, 저도 제가 공부한 것들을 하나의 주제로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4. 천상명월 2015.09.10 16:36 신고

    언제나 현실과 타협하는 저는...정말 어려운 용어에 .. 작게만 느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5. 청공(靑空) 2015.09.11 07:39 신고

    간결하게 핵심을 짚어주시는 글 잘 보았습니다. 항상 쓰신 글에 감탄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가 그 형태와 목적이 유동적일 수 있는 이유는... 특정한 이론체계라기보다는 그 실상이 자본권력을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경제발전의 이유를 기술발달과 환경적 요인와 같은 구체적 근거에 의해 설명하기보다 자유 경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설명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가변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선 글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다수의 시민의 해방을 드셨는데요. 푸코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 이유는.. 인간은 문제에 직면해서 그걸 보아야만 바뀌고, 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결국 인류문명은 그 끝을 보게 되겠죠. 아니면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되거나요..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인류의 문제를 위한 해독제(Antidote)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독일식의 질서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범주에 속하지만..)가 답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답은 독일만을 위한 답이지, 현재 봉착한 문제를 위해 고안된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답이 안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깊게 생각하기에는 제가 아는 바가 적고, 또 그에 대해서 밝지 못하네요. 얼른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 늙은도령 2015.09.11 16:29 신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십니다.
      신자유주의는 권위적인 정부가 권위적인 재벌과 함께 시장근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새워 부를 독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공공의 자산을 민영화시키는 것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국가 전체를 민영화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지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사회주의를 제대로 발전시키고 현대에 맞게 수정한 것이 나와있더라고요.
      그것을 민주주의와 엮으면 충분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은 너무 상황이 심각해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집중해야 하고요.
      국민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제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기를 바랍니다.

  6. 백순주 2015.09.12 10:53 신고

    약속 지켜드리려고 열어는 보았으나 도령님과 대화를 나눌 능력은 멀었나 봅니다. 열심히 읽은 것이 아까워 댓글에 손은 댔습니다.
    행복한 주말보내세요.
    저는 벌써 주말은 글을 쉬려고 합니다. 매일 발행이 힘겨워졌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12 15:32 신고

      네, 그렇게 조절해야 합니다.
      이게 매일 글을 올리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풀어놓으면 그 다음부터가 문제가 됩니다.
      길게 보셔야 합니다.



필자는 두 가지 의미에서 푸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하위 90%의 부를 상위 1%에게 이전(거꾸로 된 재분배)하는 정치경제적 과정인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스스로 무너지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푸코는 이것을 절감했던 것 같다.





많은 학자들은 모든 권위를 해체하던 푸코가, 해체작업이 뛰어날수록 자신이 지적 권위자로 자리 매김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없어 오랫동안 침묵했다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푸코는 모든 권위를 해체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권력의 구조와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최후의 권력을 대면할 수 있었고, 통치술로의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침묵했던 것이다.



필자가 보는 푸코의 침묵은 방향의 급전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삶에 대해ㅡ그것이 뭐라고 불리건 간에ㅡ인류의 해방에 대해, 진정한 구원에 대해 얘기하고자 (프랑스 특유의 지적이고 언어적인 유희를 벗어내기 위해) 이루어진 공백이란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에 갇혀 있고, 이것을 정리할 수 있어야 지적공동체의 첫 발을 뗄 수 있다.



나머지는, 오랜 침묵을 깨고 내놓은 《성의 역사》시리즈에서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맞서려면 각각의 개인이 저항의 지평선을 넓히는데 참여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배려와 자아 성찰 및 해방이다. 모든 개인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때, 그래서 자신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해방에 이르며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푸코의 삶정치).





푸코의 성찰처럼, 각각의 개인이 칸트(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탐구한 뒤, 역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고, 공존의 세상을 위한 방법까지 사유와 실천의 영역을 넓혔다)와 니체(대략적으로 말하면 칸트 류의 성찰에 이르러 인간으로서 최고에 이른 자가 초인이며, 그는 그 자체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며 정의로운 세상의 창조자다)가 혼합된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면 극소수가 독점하는 권력과 승자의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자발적 노예가 되지 않은 한 진정한 자유인을 속박할 수 있는 권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하위 90%가 소비를 줄이면 상위 1%도 무너지듯이. 마르크스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도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모든 자유인과 투쟁할 수 있는 권력과 승자란 존재할 수 없으니, 푸코는 체제를 뒤집는 혁명(맹자가 오래 전에 천명했던)보다 어떤 체제도 무력하게 만드는 개인의 해방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그렇게 폭력이 없는 혁명을 이루려했다. 그가 루소나 마르크스보다 칸트와 니체에서 희망을 본 것도 이 때문이다(공자와 맹자를 공부한 다음에 칸트와 니체를 보면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칸트에서는 인사상을, 니체에서 예사상을 볼 수 있다. 묵자는 홉스를 닮았다. 그는 강력한 주권을 가진 국가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근대적 인류, 즉 시민(추상화된 개념적 존재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와 대비되는 존재로써)은 침해불가능하고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지닌 평등한 존재며, 국가란 이것을 충족시키는 존재라는 것이 자유주의의 본질인데, 이것이 말의 성찬을 넘어 근대 이후의 현실에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유재산이 보장될 때 자유주의의 실현이 가능한데(그렇다고 무한대의 재산축적을 가능하게 만든 로크까지는 가지 마시라), 마르크스가 온갖 저작들에서 밝힌 것처럼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로는 무한대의 자본축적이 가능한 사적독점 때문에, 폴라니가 여러 저작들에서 밝힌 것처럼 자기조정 시장이란 허구의 아이디어가 초래하고 있는 종말 때문에, 자유주의가 꿈꾸었던 민주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나마 근대적 시민의 탄생과 함께 했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사회주의와 짝을 이루었던 시절에만 자유주의의 이상을 상당한 수준까지 실현할 수 있었다. 단군조선의 홍익인간과 동학의 인내천의 교집합과 너무나 닮은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적 성향을 지닌)에서만 시민적 덕목인 자유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평등하게 주어질 수 있었다



특히 좌우 양쪽의 버전이 있으며, 시대의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자유주의가 하위 90%의 부와 공공의 영역으로 나두었던 국가의 부를 상위 1%라는 지배엘리트(이들은 이익의 독점이라는 공통의 이해를 공유하기 때문에 계급적 특성을 띤다)에 이전하는 반동의 과정(상위 1%가 주도한 역계급투쟁)이라는 점에서, 부의 재분배를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제도들을 되살려내는 일이 시급하다.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맞서기 위한 푸코의 성찰은 대단히 중요하며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추상적 관념에 머물렀던 시민의 재구성은 시급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논의만 무성했지 제대로 구현되지도 못했던 시장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교합, 생태학적 고려에서 나온 다양한 문화의 병존을 되살려낼 필요성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최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2015.09.08 07:40

    비밀댓글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09.08 08:13 신고

    저에게는 난해하긴하지만
    정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08 19:29 신고

      너무 쉽게 풀면 글이 너무 길어져서....
      조금씩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것이 될 것으로 봅니다.

  3. 참교육 2015.09.08 11:18 신고

    각개인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때...?
    참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사실으 현대인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잊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걸 깨어난다는 것은 사실 혁명보다 어렵지 않을까요? 너무 비관적인가요? 제가?

    • 늙은도령 2015.09.08 19:31 신고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소화해서 적절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배려가 먼저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배려하려면 성찰하고 진실돼야 하고,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저항해야 하거든요.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4. 백순주 2015.09.08 12:55 신고

    하고자 하시는 일을 시작하신다니 감축드립니다. 건강조심하시면서 이루시길 바랍니다. 100번까지는 못 읽어도 다녀가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08 19:38 신고

      최대한 쉽게 써야 하는데 그러면 길이 마냥 길어집니다.
      그래서 일단 압축적인 글로 시작했습니다.

  5. 앨리스 2015.09.08 19:26

    '지적공동체' 라는 것을 아직 저는 잘 모르지만 도령님의 활동을 지지하는 열열한 애독자가 될 것입니다ㅎㅎ^^
    제 짧은 소견과 경험으로는 무엇이든 완성된 후에 하려면 시간이 기다려 주지 않는것 같습니다.
    나아가면서 세상과 소통하면서 더 성숙되고 성찰되어지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읽는 공부로 평등과 상생의 진리에 도달하고 그 실천으로 매일 글을 쓰시는 도령님은
    정말 대단한 현자임에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저는 작은 봉사를 하면서 또 도령님의 글을 읽으며사회를 알아가고 있는데요^^;;
    사랑이든 봉사든 그냥 되어지는 것은 없고 자꾸 연습을 해야만 잘 할 수 있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소개하시는 많은 책속의 이론가들의 사회인식과 이론은 결국 그 사람의 의식수준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그 누가 높은 의식으로 이 세상을 구할것인가......

    • 늙은도령 2015.09.08 19:40 신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주인입니다.
      그런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배려는 타인의 배려도 퍼져가고 자기 사랑은 타인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강해지고 충실해지면 세상 어떤 권력도 우리를 건들지 못합니다.
      각자가 진정한 시민이 될 때 세상은 변합니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고요.

  6. 고나 2015.09.08 20:00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렵지만 열심히 정독해 보겠습니다 ~

  7. base 2015.09.08 21:18

    수고하십니다. 노무현대통령께서 말씀하신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생각나네요. 요즘 주변을 보니 더욱 더 위축되고 암울해 보이는데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글로 애국하시고 준비하시는 일이 큰 열매를 맺기를 바람니다. 건강에 주의하시고..

    • 늙은도령 2015.09.09 01:56 신고

      네, 건강 때문에 글과 병행할 생각을 햇습니다.
      혹시라도 오프라인 모임이 원할하지 못하면 이렇게라도 풀어가야 하니까요.

  8. 덕산 2015.09.10 19:03

    요즘 글만 읽고 갔는데.. 오늘은 찬찬히 정독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주 인사드리지 못하지만 공감은 항상하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늙은도령님

  9. 청공(靑空) 2015.09.11 07:16 신고

    오늘의 유머에서 늙은도령님의 글을 알게 되어 이렇게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근 십년의 세월동안 공부가 업이었고, 지금은 공부하기 위해서 해외로 나와있건만..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늙은도령님의 글을 보면서 세상을 보는 내 눈도 이렇게 깊어지고 밝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전공분야만큼이나 식견이 탁월해야 하고, 그보다 먼저 바른 뜻과 정신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모로 좋은 가르침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변화를 포착하지는 못하겠지만... 늦지 않은 시간 내에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기술의 발달을 통한 발전과 위기 극복에는 한계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행태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지속가능한 발전 또한 없고...
    생활을 가능케하는 사회환경과 자연환경을 파괴시킬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개인의 해방, 인류의 해방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여러가지 접근과 실천이 요구되겠지만,
    무엇보다 교육의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근대 이후 가장 정체되어 있는 부분이 어쩌면...
    교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체제를 위해 구조화된 교육이 아닌 진정한 지성과 자유의 전달이 가능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성과의 가시성, 그에 따른 예산 확보 및 필요성 설득의 어려움, 그리고..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이러한 교육에 적합한 교육자와 교육체계의 구성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제 문제의식은 제가 발전시켜야 할 문제이지만, 한 번 말씀하시는 시대의 문제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떨까하고 적어보았습니다.

    올려주시는 글 열심히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글로서 함께해주시길 기원합니다.

    • 늙은도령 2015.09.12 15:48 신고

      교육의 중요성은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합니다.
      님의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의 교육은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며 구축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이제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성장과 개발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은 인류의 파멸을 불러올 뿐이지요.
      성장보다는 인간 중심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철학 등을 되살려야 할 때입니다.
      교육이 체제를 유지하는 하부구조에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열린 교육으로 바뀌면 어떨까 합니다.
      지구온난화, 발전과 개발의 폐해, 인간성의 상실, 소비지상주의의 문제 등을 가르치고, 자연과 함께 하는 공존과 상생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창의성을 살려주고 다양함의 가치를 알려줘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선택과 공동체 구성이 가능할 수 있도록 미래의 주역에게 열린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보다 환경친화적이고 생명친화적이어야 합니다.
      윤리적 과학과 기술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교육은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어서 저는 가급적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꾸준히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다룰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때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0. 하늘이 2015.09.11 18:03

    항상 깨어 있는 의식으로 주인된 자리에 있을려고 노력합니다 ᆞ도령님이 하시고자하는 지적공동체 응원합니다 ᆞ

    • 늙은도령 2015.09.12 15:49 신고

      네, 감사합니다.
      아주 작은 출발이라도 꾸준히 키워갈 생각입니다.
      건강만 허락하면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영화의 짜임새를 별도로 한다면, 저출산‧고령화의 필수적인 결과인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다룬 세 개의 영화가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와 웨인 크래머의 <크로싱 오버>,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이 그것입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크로싱 오버>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 풀어내는 관계로, 영화의 짜임새가 허술하고 어지러운 블랙버스터에 가깝습니다. 한 편의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했던 것이 패인이지만,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그리 녹녹치 않은 문제로 부각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노예제도를 부활시킨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며, 경제가 나빠지자 노예해방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 싸게 부려먹었던(노동유연화의 기원) 나라가 미국임을 고려하면, 불법이민과 다문화가 ‘아메리칸 드림’에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자 또다시 그들을 내치고 있는 미국 특유의 DNA가 <크로싱 오버>에는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으로만 평가하는 미국 백인의 시각에서 제작된 <크로싱 오버>를 압축하면, “중산층 이상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저임금 노동자로 써먹던 노동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고, 치러야 할 비용과 대가도 그만큼 커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싱 오버>가 미국 특유의 위선이 스크린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그랜토리노>는 한 발 더 나아가 미국 백인 노동자가 이민과 다문화의 피해자가 됐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돈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가벼워진 미국의 변화가 마뜩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미국적 가치의 핵심인 가족도 불편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와 수구 사이에 위치한 미국 백인의 시각으로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풀어갑니다. 곳곳에 폭력을 배치해놓고, 그 폭력에 맞서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토리노>를 통해 자신의 본질이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는 <더티 해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영화에는 이민과 다문화가 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됐는지 전혀 다루지 않은 채,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시각에서만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어린 베트남 이민자 남매와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은 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극대화하기 위한 드라마적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파시즘적 속도로 달려가는 미국의 변화는 은퇴한 백인 노동자에게 야만적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먼 파시즘적 속도에 맞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의와 노동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희생적이어서 영웅적으로 그려지는 자신만의 구원의식이자 현실도피적 결단입니다.   



하지만 한 쪽의 시각만 반영된 정의와 가치는 부분적인 정의에 불과할 뿐임에도, 반폭력적 메시지를 언제나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그려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강박관념은 은퇴한 백인 노동자가 미래의 화해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비극적 희생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제조업을 포기하고 아이디어와 금융산업 위주로 돌아선 시대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민자 폭력조직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극적 결말이 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위대함에 크게 감명받을 터이지만, 바로 그 마지막 장면이 그 이상의 폭력을 담아낼 수 없다는 반동적인 메시지 때문에 가장 폭력적입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것이 폭력을 유발하는 극단적 선택이라면 거기에는 진실된 의미의 정의도, 진정한 화해도, 반성적 구원도 없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려낸 반폭력적 저항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적 저항은 일체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서 양화가 악화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랜토리노’는 미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1972년형 포드사 중형차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자존심이자, 갈수록 퇴색하고 있는 미국 특유의 ‘빌어먹을’ 애국심을 상징합니다. 은퇴한 미국 백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랜토리노>는 잘 만든 영화이며, 이민과 다문화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고든 수작입니다.



하지만 은퇴한 백인 노동자를 들어내면 <그랜토리노>는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데 앞장 선 나치의 선동적인 영화를 떠올립니다.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최상위 0.1%를 다룬 《슈퍼클래스》에서도 미국의 슈퍼엘리트(특히 부시 부자의 행정부에서 일했던 고위관료들)와 어울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는 보수적인 미국 백인의 이데올로기를 가감없이 드러낸 폭력적 영화입니다. 동시에 미국적 보수화가 일반화된 이명박근혜 정부의 7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각이 얼마나 보수화됐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백인과의 결혼은 국제결혼이고 중국 동포나 동남아인과 결혼하면 다문화 결혼이 되는 것부터 보수적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는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든 것이 나쁠 때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크로싱 오버>와 <그랜토리노>에 비하면, <로나의 침묵>은 유럽에서도 심각한 국가적 사안으로 떠오른 이민(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를 절대적 약자인 이민자의 입장에서 그려낸 명작입니다.



‘모든 것에 값이 매겨져 있는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과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로나의 침묵>은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이자, 일단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탈출할 방법이 없음을 영상미학으로 보여줍니다. 소비사회는 돈이 없고, 소속이 없지만 삶의 매 순간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멸시킬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의 폭력적 허구성을 해부했다면, 다르덴 형제는 <로나의 침묵>을 통해 ‘자기조정 시장’의 필연적 결과인 소비사회의 파국적 종말을 그려냈습니다.





허리우드 키드였던 필자는 허리우드 영화의 포로였고, 지금도 비슷한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민과 다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관한 한 <그랜토리노>와 <크로싱 오버>를 <로나의 침묵>과 비교해보면 문화적으로도 미국에 종속된 대한민국의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샤를리 에브도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갈수록 늘어나는) 테러도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닌, 프랑스의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불법이민과 다문화 문제가 탐욕의 소비사회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혼란과 인간성 파괴의 냉혹한 현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자본주의적 탐욕입니다.



앞의 두 영화를 본 분이라면 다르덴 형제의 철학이 녹아있는 <로나의 침묵>도 보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시간적 여유가 되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인에게 말을 건네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39번째 편지 : 로나, 침묵의 소리’를 꼭 읽어보면 현대의 소비사회와 부정적 세계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저녁노을* 2015.01.27 06:48 신고

    하나도 보질않은 영화네요.
    함께 살아가는 우리이길 바라는 맘입니다.

    잘 보고가요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저도 우연히 보게 된 영화들입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를 원래부터 좋아해서...

      물론 다른 영화들도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을 뿐이지요.

  2. 공수래공수거 2015.01.27 08:31 신고

    저도 영화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생소한 영화들입니다

    다운 로드가 가능한지 한번 찾아 보겟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0 신고

      로드가 다 가능한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팬으로서의 세월이 40년이라....

  3. 꼬장닷컴 2015.01.27 08:40 신고

    본문과 관계없는 댓글 죄송합니다만..
    크린트 이스트우드 정말 오랜만인데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무튼 오늘 권하신 영화/책 기억해 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봐야 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2 신고

      네, 합리적 보수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말 멋있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합리적을 떼려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너무 보수적 관점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4. 耽讀 2015.01.27 10:02 신고

    다문화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이 새겨야 할 영화 같습니다. 우리 역시 백인만 외국인으로 생각하고 동남아와 흑인은 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 판단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3 신고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적 차별은 같은 피부일 때 더 강한데, 세계화시대에서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면 그것이 더욱 심해집니다.

  5. 달빛천사7 2015.01.27 10:39 신고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주에 보죵 좋은하루되세염.

  6. 덕산 2015.01.27 12:31

    그랜토리노라는 영화를 봤던 기억으로는 감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뭔지모를 불편함이 있었던것이 기억이 나네요.
    우선 내 주위에 있는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의 위치를 한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7 17:14 신고

      네, 인간을 인간으로 볼 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집니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없앴지만 너무나 많은 계층을 만들어 차별을 세분화했습니다.


극심한 혼란과 분열로 무정부적 상태에 이른 대한민국의 문제들은 보수우파의 경험과 단절의 삼중적인 모순에서 발생하고 있다. 첫 번째로 경험의 관점에서 보면, 극단적인 혼란과 분열은 해방 이후 권위주의와 군부독재 시절에 이룩한 압축성장과 자본주의의 전성시대ㅡ이것도 최근의 연구를 통해 빚의 확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ㅡ에 대한 구보수의 일방적인 향수가 IMF 환란을 극복해낸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들을 부정하면서 발생한다.



또한 IMF 환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신보수와 구보수 간의 정치경제적 권력투쟁이 경험상의 차이를 드러내며 또 다른 형태의 혼란과 분열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 모두는 4.19운동과 광주민주화항쟁 및 6.10항쟁으로 이어져온 민주주의의 결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IMF 환란을 극복한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를 모두 다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하지만 산업화 세력과 신자유주의자로 나뉘는 이들의 근본적인 경험의 차이는 바우만이 말한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와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와의 차이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승만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식민지근대화론과 권위주의적 독재에 대한 구보수의 긍정과,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민주화 세대의 신보수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들은 민주정부 10년 동안 무섭게 성장한 진보좌파의 세력화에는 공통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구보수는 참여정부의 4대개혁입법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반감을 가진 반면 신보수는 이에 대해 조금은 유연한 편이다. 구보수와 신보수의 차이 중에 나이나 세대를 들먹이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글이미지 인용



이명박 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 내에서도 이들의 경험적 차이는 다양한 정책과 지향점에서 갈등과 혼란을 야기시켰고, 주류와 비주류라는 위치 변동만 있었을 뿐, 이들의 갈등과 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족벌언론들도 이런 갈등과 혼란을 부추기기도 하고, 그들에게 불리할 때는 맹수처럼 달려들기도 한다.



헌데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단절이다. 구보수나 신보수나 할 것 없이 2008년 미국의 금융 대붕괴에서 시작돼 전 세계적인 경제 대침체로 이어지며, 자본주의체제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자 공통의 경험이 뿌리 채 흔들리는 단절에 직면했다. 그들은 근대이성이 현대성을 이루며 확고해진 무한한 진보와 결과의 낙관론에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세계화의 긍정성을 찰떡같이 믿었지만, 신자유주의 40년의 현실이 극도의 불평등과 지구온난화라는 종말적 현상들로 귀결되자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주가 돼 자신들까지 종말의 위험에 처하게 할지는 몰랐다. 작금의 상황이란 그들이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그들이 찰떡같이 믿어온 것들이 뿌리부터 무너지는 것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행태를 결정해온 기회주의자들이 단 하나의 탈출구도 주어지지 않을 때 경험하는 공황상태와 거의 동일하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들을 밀고 나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니 어마어마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들은 후자를 택했고,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며 갈 데까지 가보자는 자포자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처럼.



이 두 권의 책은 연달아 읽으면 현대 정치에 대한 이해를 늘릴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과 뉴턴의 만류인력에 의해 기존 질서와 체제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해야 하고, 다윈의 진화론과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의해 적자생존의 법칙들이 유효해야 하는데, 현재의 상황이란 두 개의 축이 모두 다 무너지고 있다. 정치권력이란 보잘 것 없이 찌그러들었고, 초국적기업과 거대 언론의 도움 없이는 현재의 지위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좌파 특유의 정책도 복사해서 사용해야 한다. 



국정원의 대선 불법 개입과 세월호 참사에 이어, 끊이지 않는 대형 사고들과 GOP 총기난사사건과 각종 폭력사건들이 속출하고, 건축물 붕괴와 초미세먼지의 습격 및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싱크홀과 동공처럼 난개발의 후유증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자, 이들은 현대성의 단절이 가하는 전방위적 압박과 습격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현재의 무정부 상태는 여기에 기인한다. 단순히 세월호 참사 때문만이 아니다. 



구보수건, 신보수건 경험과 단절의 이중적인 모순에서 발생하는 인지부조화에 단기적인 반응밖에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해도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일사분란한 질서의 효력이란 과거의 경험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한국의 우파들이 제왕적 대통령과 과반수 이상의 의원들을 확보한 상태에서도 국정 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들은 정치를 비즈니스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치가 비즈니스화 됨에 따라 정부의 업무 중 상당 부분이 민영화됐기 때문에 정치 본연의 기능이 상실됨을 깨닫지 못했다. 이런 권력의 민영화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적독점 집단과 거대 언론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보수우파들이 느끼는 정치권력의 무력함은 자신이 자기 무덤 판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이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진보좌파의 가치와 정책들을 피상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끌어다 쓰는 바람에, 선거에서는 승리했을지언정 정작 자신의 정체성이 파괴되고, 갈수록 무력해지는 정치권력의 헤게모니 때문에 실패한 자들이 돼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보수우파는 더 이상 스스로의 논리나 가치로 서있을 수 없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변질됐고, 국가의 공권력을 빼면 사적독점의 집단들과 거대 언론의 도움없이는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힘들어졌다.



                                                                       구글이미지에서 인용



이들은 작금의 혼란과 분열을 일소하기 위해 권위주의 독재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초국적기업과 거대 자본 및 족벌언론도 이런 퇴행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방임 시장경제란 국가의 혼란이 크고, 사회적 불안이 클수록 최대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어느 나라나 공통적인 현상으로, 신자유주의에 내포된 필연적인 과정이며, 바로 여기서 세 번째 모순이 발생한다.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인 한국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혼란과 갈등으로 국민이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유령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파의 해석이 온갖 논리적 모순과 오류에 빠져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TV토론에 나오는 보수우파의 패널들을 보면 시정잡배보다 못한 자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분명 우파의 위기이자 정체성의 붕괴가 분명한 시기이며, 개입주의와 자유방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한국판 시장경제의 위기이기도 하다. 더 이상은 기회주의적인 땜질식 처방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며, 장기적으로 집권세력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지금보다 더 큰 불법들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혁명의 기운으로 폭발할 때 보수우파가 설 수 있을 자리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승리했고 집권했지만 그것이 불안할 정도가 된 것이다. 승자의 역설, 그것이 한국의 보수우파가 처한 정신적 아노미현상이자 세월호 유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이다. 문제는 한국의 진보좌파도 비슷한 위기와 모순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다음 글ㅡ언제 올릴지 알 수 없지만ㅡ에서는 거의 전멸의 수준에 이른 한국의 진보좌파의 위기와 해체를 다루면서, 그들의 무능력과 조급함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못지않게 참여민주주의의 위기와 퇴행 및 축소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됐다는 사실을 다루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에서 무정부적 자유주의(미국식 신자유주의)로 퇴행한 미국에서의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완벽하게 제시했던 프랑스혁명이 전체주의의 한 형태인 공포정치로 변질된 과정과 이유에 대한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   

  1. 참교육 2014.08.22 07:40 신고

    새누리를 비롯한 우리나라 보수란느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이해관계로 방황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친일 혹은 수구 기득권세력이 아니겠습니까?
    보수의 청체성을 찾는다는 것 부터가 웃기는 일입니다.

    • 늙은도령 2014.08.22 17:54 신고

      새누리당에 있는 자들이 보수우파의 본 모습을 갖추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보수우파들은 합리적인 분들이 많아요.
      저와 이념적으로 많은 토론을 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새누리당에 합리적 보수우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새누리당 내에 있는 악질 친일 부역자 후손들을 걸러내야 합니다.
      그러면 진보좌파도 새롭게 구축될 것입니다.
      지금의 진보좌파는 너무 공부도 부족하고 미래 비전도 제시 못하니 그들의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2. 새 날 2014.08.22 10:58 신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3. 태봉 2014.08.22 14:49

    공부 잘 하고 갑니다^^

  4. 영감 2014.08.27 13:48

    세상이 평평하다는 말이 있죠.
    세계 경제가 개방되어서 우리의 경쟁상대가 아프리카에도 있고 남미, 아시아 어디든지 있어요.
    그래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불가능한 상상의 이념이 되었는데도 우리 민족은 순진한 모양입니다.
    국가가 적정한 통제를 통해 소수의 경제집중을 막아야 하는데
    다국적 거대기업을 제어할 수 없으니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고요.
    친일 부역자를 걸러내려고 하면 더욱 발광하게 되고 서민들만 힘들어질거예요.
    아쉽지만 면죄부를 주고 잊어버리는게 낫습니다.
    나쁜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다보면 정신병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피폐해집니다.
    늙은도령님께서 쓰신 것처럼 신자유주의 경제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수 진보 모두의 과제일 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4.08.27 14:37 신고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요합니다.
      허나 완벽한 체제는 없는데 체제를 타락시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악질적인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 0.01%밖에 안 됩니다.
      헌데 그들이 우리나라의 핵심부에 있어요.
      그들이 나쁜 짓을 못하게 하는게 중요합니다.
      그냥 조용히 살라고....


어떤 책들은 감히 서평을 쓰는 것조차 누가 되는 것들이 있다. 책의 첫 장에서부터 끝장에 이르는 동안 온몸을 관통하는 지적 선율과 시대를 관통하는 성찰에 지상의 언어가 모두 초라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 시대의 지식과 경험을 빌렸으되 영원 불멸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여기 이 책이 그렇다. 칼 폴라니의 몸을 빌어 1944년에 쓰여진 《거대한 전환》은 책의 부제처럼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유럽에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 책이 2009년에 이르러서야 한글로 번역된 것은 미스터리 그 자체라 할만하다. 이 책과 함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으면 인류의 근현대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몰락하는 시점에서 자기조정 시장(시장경제)과 그것을 떠받드는 사상과 이념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이 책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운명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던 것들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먼저 이 책의 94페이지를 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시장 근본주의자와 신자유주의 핵심으로 모든 시장정보가 공개되는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면 최고의 효율성을 이루어 인류 전체가 풍요로워진다는 아이디어)의 문제를 이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한 문장이 있었던가? 인간을 노동으로, 자연을 토지로 변환시킨 자기조정 시장은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인간 욕구를 파괴해버리고 단 하나만을 남겨놓는 사탄의 맷돌처럼 애초부터 자기조정 시장이란 아이디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허구였다. 



자신이 정식화했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애덤 스미스의 자기조정 시장이란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처럼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어도 실현될 수 없다. 시장에 주어진 모든 정보를 검토한 후 거래를 하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사인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원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허구의 아이디어인 자기조정 시장이 경제체제의 축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호황은 없었고 주기적인 공황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없어서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을 말한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칼 폴라니처럼 자기조정 시장의 본질을, 그 화려한 유혹의 이면에 자리잡은 탐욕과 착취의 시스템을 낱낱이 밝혀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조차도 이익을 둘러싼 자본과 계급 간의 투쟁에만 집중했을 뿐, 자기조정 시장이 가지고 있는 파국적 결말의 필연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23가지》에서 말한 것처럼, 지구에 대해 선입견이 없는 외계인이라면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자기조정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시장 경제란 선진국과 초국적기업 및 기업집단 간의 불평등한 거래를 숨기기 위한 허구의 개념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는 선입견이 있는 인간이 보더라도 자기조정 시장이란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핵심임을 알게 됐다.     

 


다시 209페이지를 보자.



시장 패턴이라는 것은 잠재적으로 오직 그것에만 따라오는 고유한 동기, 즉 물물교환과 교역이라는 동기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종의 특별한 제도를 따라 창출할 수 있으니, 그 특별한 제도가 바로 시장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경제 체제를 시장이 통제할 경우 전체 사회 조직을 압도해버릴 만한 결과가 나오는 이유이다.


 

합리적인 인간의 자유롭고 이기적인 이익 추구 행위가 자기조정 시장의 중재하에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애담 스미스의 선언이 있은 후, 인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돈벌이에 나설 수 있었다. 자기조정 시장의 아이디어, 즉 자유주의 경제가 순식간에 전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데이런 이익 추구의 무한경쟁은 전세계를 초토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거의 10년 단위로 되풀이되는 경제공황과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자원, 더욱 심해지는 지구온난화와 대지의 사막화, 토지의 대규모 오염, 물 부족 사태, 천연자원의 고갈, 미세먼지의 범람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일본의 제1원전 폭발과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폭주는 지구의 반발을 불러와서 인류를 종말로 내몰고 있다.


                                                       2008년 금융 대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결국 칼 폴라니의 분석처럼 자기조정 시장이란 유한한 지구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아이디어에 불과하며 금융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실물경제를 담보로 한 거대한 지적사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파괴적인 자기조정 시장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사회의 근간인 상호성과 재분배의 회복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역할을 하는 사회의 회복, 바로 그것이 칼 폴라니가 제시하는 해답이며 지속 가능한 경제의 실현이다.


 

마지막으로 603~604페이지를 보자.



따라서 사회의 발견은 자유의 종말일 수도 있고 그것의 재탄생일 수도 있다...인류는 더욱 성숙해질 것이며, 복합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갖춘 채 존재할 수 있다...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셈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천혜의 땅에 세워진 미국의 경제가 무너지고대부분이 선진국인 유로존이 위기에 직면한 현재,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그 원인과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성경 같은 책이다. 회의 재발견, 그것만이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는 미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칼 폴라니가 육화된 노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 폴라니의 성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위험사회》는 《거대한 전환》 못지않은 책이다.



현대의 상황을 유동하는 액체로 정의한 바우만의 성찰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맥을 같이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푸코의 성찰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칼 폴라니의 작은 오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인류가 물보다 싼 석유를 대체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칼 폴라니의 성찰이 바우만의 성찰보다 더 유효할 수 있다.     



신주유주의 이후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일반 국민은 물론 이 땅의 지도자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읽고 또 읽어야 하는 보물 같은 책이다아울러 이 땅에서 진보좌파의 이름으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들 중에 합리적 자유주의, 즉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학자와 통상관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과 노동 개혁, 금융 개혁과 관치 경제 탈피는 진정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했지만 그 결과가 자살률 1위의 무한경쟁 사회, 내수가 없는 수출 중심의 일방적 경제,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기본적 사회안전망의 부족, 보편적 복지제도의 미비, 1000만 명을 육박하는 비정규직, 거의 4000조에 이르는 부채로 넘쳐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는 것이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다음에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새로운 대학민국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국가 개조의 맨 처음에 칼 폴라니의 성찰이 주요함은 《거대한 전환》이 증명해주고 있다. 

  1. 태봉 2014.07.19 18:03

    좋은 글,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 백승준 2015.03.24 03:17

    좋은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 늙은도령 2015.03.24 04:32 신고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금은 어렵더라도 끈기있게 읽다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길 것입니다.


 IMF와 세계은행, WTO라는 불경한 삼위일체를 앞세워 빈국의 돈을 부국의 자본과 기업으로 빨아들이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회복불능의 벼랑 끝에 몰렸다 해도 아직 그들의 공복을 달래줄 먹이감은 세계 도처에 넘칠 만큼 남아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자기조정 시장’이란 완전한 시장과 완전한 정보, 완전히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허구의 논리이다.





정부에 의해서도, 재벌에 의해서도, 독점기업에 의해서도 시장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의 불완전함이 만들어낸 전 세계적 차원의 사적독점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에 의한 공적독점보다 더 큰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무한경쟁에서 나오는 부의 독점과 소득불평등을 허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빨아들인 뒤 돈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내보내는 ‘사탄의 맷돌’을 영원히 돌리려고 한다.


 

거의 모든 규제를 거부하고 자유방임적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다자간 무역협정에서 벗어나 쌍방 간, 또는 소수의 국가나 지역 간의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배타적인 방식을 통해 투자자와 초국적기업, 상대적 우위에 있는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장경제 밖에 있던 사회와 공동체 및 가족마저 경쟁의 논리로 덧칠하니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장논리에 따라 재구축됐다.



그 결과 가난한 국가의 빈곤은 더욱 심해졌으며 물질적 가치에 우선해 삶과 환경을 망가뜨렸고 민주주의를 저해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패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기준이 된 것은 조금만 노력해도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언덕 위의 도시’이자 축복 받은 천혜의 대지인 미국에서조차 극도의 불평등을 초래한 것도 모자라 전 세계를 대공황으로 몰고 갔다.



 


인류와 자연이 밑바닥을 드러내며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을 ‘자기조정 시장’이 이제는 디지털 세계인 사이버 공간으로 침투해 영원한 확장을 실현시키고 있다. 가족과 사회라는 최후의 보루로 지탱되던 아날로그 세계를 초토화시킨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산물인 ‘사탄의 맷돌’이 이제는 디지털 공간마저 하나씩 점령해가고 있다. 이들이 전면에 내세운 것은 지적재산권이라는 배타적인 권리로 사이버공간의 본질적인 가치마저 부식시키고 있다. 



사람의 모든 행위와 생각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정보라는 형태로 거래되는 곳에서는 인류 모두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기 때문에, 생산을 위한 재투자비용과 자원고갈 및 환경오염 방지라는 사회적 비용 면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디지털 세상에선 독점적 이익으로 귀결되는 ‘자기조정 시장’이 더욱 범람할 수 있다. 특히 정보가 교환되는 모든 곳이 시장인 사이버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실시간으로 거래가 성사되기 때문에 아날로그 시장처럼 대부분의 상행위를 감시하고 규제해 바로 잡기도 힘들다. 



극도로 파편화되고 익명화된 사이버 공간에서 국가와 역사, 전통과 문화, 계층과 계급 간의 협력과 유대란 갈수록 약해지고 퇴색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행위와 접촉은 ‘생각하고 성찰하는 인간의 두뇌’마저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가치가 전자화폐의 이동과 즉각적 쾌락으로 압축되는 ‘디지털 사탄의 맷돌’이 무한증식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민주주의의 바다라는 사이버공간에 나타난 ‘디지털 사탄의 맷돌’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자유방임적 논리’와 ‘생존권에 우선하는 지적재산권’, ‘사생활의 실종’과 ‘인간의 뇌보다 똑똑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내세워 국가와 공동체만이 아니라 전체로써의 사회와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삶마저 더욱 빠른 속도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사이버공간의 본질이 정보 접근의 평등과 자기 표현의 자유, 자율적인 정화 등을 통해 보다 공정한 사회를 창출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세계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저개발국가 모두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인류 전체의 삶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향해야 할 목표라 할 수 있다. 제조업의 발달로 환경과 생태계를 대량으로 파괴하는 일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무게 없는 세상의 도래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먹거리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인류의 능력이면 다음 세대의 먹거리를 찾아낼 것이다.  



세계화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글로벌 불균형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추진되는 방식과 그것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초국적기업의 독과점'에 있다. 각국 정부도 건드릴 수 없는 사적독점을 만들어내는 이 두 가지는 세계의 부와 권력을 1%를 넘어 0.1%의 수중에 넘겨주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부는 수천 배 이상 늘어났지만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빈곤층이 15~20억 명에 이를 정도니 인류는 성장해온 것이 아니라 퇴행해온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런 부정적 세계화의 폐해를 경험한 국가의 시민들과 세계 각국의 시민단체는 자유방임적 경쟁만 줄기차게 외쳐대는 초국적 자본과 기업 및 각국의 통상관료완 거대언론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며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캐치플레이 하에 ‘공정무역’과 ‘사회적 정의’, ‘부의 재분배’, ‘기회와 결과의 평등’을 목 놓아 외치며 크고 작은 실천들을 통해 성공사례들을 축적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무모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현실성을 띠려면 IMF나 세계은행, WTO 같은 국제기구들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아울러 초국적 자본과 기업들도 이익 독점의 탐욕에서 벗어나 자유무역과 국제금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원 독점과 환경오염이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지금보다 적극적인 사회 공헌을 통해 인류의 공존과 상생의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세계 국가는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배타적 자유무역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국내 시장을 키우고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사회 안정망을 강화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세계화는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국가들이 최대한 참여해서 이루어진 국제협약과 민주적인 제도 하에서만 가능하다. 현재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초강대국과 초국적기업 및 거대자본의 일방적 요구를 공존과 공생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아울러 거대 언론들은 극도의 상업화와 선정주의에서 벗어나 ‘권력에 대한 감시견’으로써의 역할을 되살려야만 한다. 지배 엘리트와 집중화된 권력을 감시하는 제4부로써의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이 사적인 이익에 매달리지 않고 공공의 복리에 충실할 때만이 점점 촘촘해지고 상호 연관성이 높아가는 세계화가 더 이상 절대다수의 희생을 담보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병폐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질 것이며, 전혀 예상치 못한 불의의 난관이 닥친다 해도 세계화의 혜택에서 배제된 약자들이 가혹한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생존선 주변에 몰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험에 빠져들거나 아사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래서 그들에게 회생의 발판을 마련해주려면 각국의 언론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권력과 자본의 감시견으로써 본연의 의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어떠한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시민들의 의식과 실천이 선행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구호는 그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발 심리를 희석시키는 역효과만 만들어낼 것이다. 결과가 없는 외침은 최소한의 메아리도 이루지 못하는 법이기에 작은 결실들을 하났기 쌓아나가야 한다.  



또 다른 세상을 만들려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들은 세계화의 과실이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만큼씩 나눠지고 장기적으로는 기회와 노력과 결과의 상대적 불평등이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내가 현재의 불평등한 체제에 탐욕적 이데올로기에 분노하고 연대해 투쟁하지 않으면 우리와 후대를 위한 또 다른 세상도 불가능하다는 것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의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또 다른 삶이 가능하다(Another Life is Possible)’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인가. 절대다수의 난장이들(그 비율이 99%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이 주인이 되는 또 다른 세상을 가능케 하려면 그들의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 완벽한 버팀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적 결정론자, 칼 마르크스처럼 노동계급에 의한 무장혁명과 다수의 독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지난 휴머니스트의 치기 어린 바람이고 여러 층으로 분화된 현대의 계층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분적으로 닫힌 세계인 지구에서 그의 주장을 실현하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돼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가 초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악화로 현실적인 양화를 구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절대다수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전에는 없었던 무질서한 세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아니한 만도 못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혁명의 핵심은 과다한 에너지 소비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비폭력적인 방식을 찾는데 있다.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역사의 전례를 되풀이한다면 어떤 체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영원히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그의 실천에 따라 비약할 수도 있으며 퇴행과 진보 사이에서 요동칠 때도 있다. 무한한 진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지만 보다 많은 인류가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행복을 이룰 수는 있다, 정의와 공정을 향한 우리의 의식과 실천이 선행되기만 하면.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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