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정치적 도덕성도 상실한 대국민 사기당의 일개 국회의원 나부랭이에 불과한 이언주의 망언은, 노동의 가치를 제멋대로 규정하고 차별하고 폄하하는 것들부터 그녀의 망언을 벌해야 하는 이루헤아릴 수 없는 이유들 중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헌법을 부정한 망언이라는 점에서 즉각적인 퇴출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인민(국민)의 통치'를 말하는데 이언주는 이것을 부정했으며, 모든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을 부정했으며, 어떤 차별도 허용되지 않는데 이것도 부정했기 때문에 이언주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언주가 적당히 쓰다 버리면 되는 존재로 격하시킨 그분들은 이 나라를 지탱하는 위대한 여성이자 우리의 어머니이며 나와 같은 국민이자 시민이라는 점에서 대국민 사기극의 주역인 이언주감히 비하하거나 폄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대한민국에서 적당히 쓰다 버려도 되는 존재가 있다면, 국민소환제가 없어서 임기 4년을 채울 수 있는 국회의원 뿐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은 국민(지역구민)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쓰다가 마음에 안들면 버리면 되는 존재입니다.



인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이유로 발생하는 불평등한 탄생을 극복하기 위해 평등이라는 대단히 실현하기 힘겨운 가치를 위해 투쟁해왔으며,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이자 민주주의의 역사입니다. 인류가 추구하고 확장해온 자유라는 것도 평등에 대한 공통의 합의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공민권에서 정치권을 거쳐 사회권으로 발전한다는 마샬의 성찰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말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적용된 역사와 같다는 토크빌의 성찰도 이것 때문에 나왔습니다.



민주주의와 동행하기보다는 파괴하기 일쑤인 자본주의(최악의 단계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자유주의)가 인류와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촛불혁명입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단군의 말씀부터 '민심이 곧 천심'이며 '내가 곧 하늘'이라는 위대한 정신을 계승한 것이 촛불혁명입니다. 이언주의 망언은 5천 년 우리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의 최악의 망언입니다. 





민간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은 노동자를 포함해 인류를 종말론적 상황으로 몰고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정부 주도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인공지능과 나노공학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의 묵시론적 폐해를 아주 조금이라도 줄이고 늦추는 절대과제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최대치이고 미래의 인류에게 4차 산업혁명의 파국적 결과를 막지 못한 종말론적 범죄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이자 절대의무입니다. 



이밖에도 숱한 이유들로 해서 이언주는 퇴출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대국민 사기당의 국회의원 나부랭이의 망언을 처벌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할 가치도 없는 국가로 전락합니다. 동네아줌마가 없으면 어떤 동네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네아줌마라는 위대한 존재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급식을 책임지는 분들이 없으면 우리의 교육이 무너집니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는 모두의 어머니들입니다.



이언주의 망언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의 망언을 또라이 국회의원의 일탈로 치부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민주주의, 헌법을 넘어 인류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마저 부정한 이언주를 극형(국민이 정한다!)에 처해도 모자란 것은 우리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써 살아갈 수 있는 첫 번째 이유이자,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위한 우리 모두의 책무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7.07.10 20:33 신고

    새정치가 이런 것이라면 헌정치가 낫습니다.
    안철수는 왜 함구하고 도망다니고 있는지도 이해가 안됩니다.

    • 늙은도령 2017.07.10 20:41 신고

      검찰 수사가 나올 때까지 버티겠다는 것이지요.
      그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최대치입니다.

  2. merryjanet 2017.07.11 02:06

    여당대표의 '머리자르기' 표현은 궁물당이 대동단결해서 온 언론을 다 헤집어놓고,
    거기다 자유당 바른당까지 동조해서 원점을 흐리며 국민의 85% 지지를 받는 대통령을 흔들어대려 하는데,
    이언주의 못된 망언은 이대로 시간흐르기로 보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이언주가 한 발언은 저기서 끝난 게 아니예요.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모든 노동자들이 총궐기해야할
    일입니다.
    "그 아줌마들이 뭔데? 그냥 동네 아줌마거든요,
    그냥. 사실 옛날 같으면 그냥 아줌마들 이렇게 해 가지고 조금만 교육 시켜서, 시키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돈 좀 주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건데…
    솔직히 말해서 조리사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냥 어디 간호조무사보다도 더 못한 그냥
    요양사 정도라고 보시면 돼요..."
    이언주가 마구 비하한 조리사, 간호조무사, 그리고 요양사들이 그 작은 소득에서 혈세를 떼내어
    이언주의 세비에 보태주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이언주는 여태 받아먹은 세비 모두 토해내고, 뱃지를 당장 떼어야... 그래야 이게 나라입니다.

    • 늙은도령 2017.07.11 04:03 신고

      이언주의 망언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녀의 인식은 계급사회를 인정하는 반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인 최악의 발언입니다.
      말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확실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7.07.11 09:09 신고

    미친 X입니다

    미친X 이라는 소리도 했다죠..방송에선 차마 이야기를 못하더군요

  4. 과유불급 2017.07.11 12:24

    이언주 특유의 말투를 빌어자면 국물당 얼굴마담입니다. 박지원 흑기사 자처하는 강연재 변호사와 함께

    • 늙은도령 2017.07.11 14:53 신고

      맞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도를 넘은 것이지요.
      국물당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땅의 정치 발전을 위해.

  5. 진인사대천명 2017.07.11 15:43

    거의 제2의 나경원인 듯 합니다...노동에 대한 생각이 이 정도면 솔직히 자한당으로 가도 될 것 같습니다. 애초에 국민의당에 재벌편인 mb계가 꽤 있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충격이네요. 안철수의 사상도 이언주와 크게 다르지 않겠죠?

    • 늙은도령 2017.07.11 17:37 신고

      비슷하다고 봅니다.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이언주의 인식에 대한 글은 별도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6. 강종화 2017.07.11 19:03

    국내 에있는 쓸모없는 국개의원 말듯지말고 시선들을 국외로 돌리십시요 방송삼사 쓰레기 방송사입니다 우리끼리 서로 싸우게 하는 방송사가 진정필요 한가요 드라마도 안봅니다 쓰레기 역사관 심기위해서 가즌 현혹 질로 사실 외곡 하지요 사대 주의를 채택한 과거는 쓰레기이고 지워버려야할 역사입니다 " 그역사로 인하여 우리가 현재 까지 고통을 받고 이용당하고 있어요"

    • 늙은도령 2017.07.11 23:00 신고

      MBC는 정상화가 아니라 검찰조사가 필요합니다.
      공영방송에 대한 글은 이번 주 내로 올릴 생각입니다.

  7. 현정아 2017.07.20 08:57

    이언주 별로 안좋아하는디 동네아줌마가 뭐 어때요 머 자괴감드는 언사인가 ?
    요즘 2년제 초중고고 과정다니고 고딩출신이라고 자부하며 즐거운 비명에 몰려다니는 동네아줌니들 과 어르신네들 엄청많은디 동네아줌마에 대해 왜이리 시끄러븐지 ㅎㅎㅎ



제왕적 권력이 주어진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은 형용모순 같지만 반권력적이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다양한 정치체제를 검토한 끝에 삼권분립의 중요성을 밝혀냈지만, 그것은 경험에 의존한 형식적인 분류라는 한계어서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주의체제가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균형과 견제가 제일 중요한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세계화시대에 접어들어 국가의 역할이 늘어남에 따라 행정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거의 모든 권력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쏠려 있는 남북분단과 제왕적 대통령제의 대한민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준 통치행위란 지독할 정도로 반권력적이어서 너무나 민주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최대한 분산시켰고, 군림하는 통치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쳤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필자가 아는 한도에서 볼 때, 근현대사를 통틀어도 노무현처럼 통치한 지도자는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만일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가 인류가 선택한 최선의 체제라면, 그래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정부의 목적이 국민의 안전과 행복, 존엄한 삶의 질을 위해 정치적 자유와 참여를 최대한 보장하고, 사회경제적 평등을 위해 기득권의 반칙과 특권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면,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은 민주적 권력이 어때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어떤 결정을 하기 전에, 그것의 결과가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통치권력의 행사라면 귀를 열고 들으려 했고, 치열한 열린 토론(박근혜의 수석비서관회의처럼 받아쓰기란 존재할 수도 없었다)을 통해 균형 잡힌 합의에 이르려 했다. 보다 많은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들으려 했고, 최대한 국민의 언어로 말함으로써 소통을 강화하려 했다. 통치에 방해가 된다 해도 권력의 감시자로서의 언론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감수했다. 





그는 내부의 반발이 극에 달했던 연정을 한나라당에 제의할 만큼, 야당과의 대화와 소통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못한 대한민국 정치사회적 문화에 어떻게 해서든 민주적 절차를 정립하려 애썼고, 그것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탄핵도 받아들였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느리고 시끄럽고 힘들지만, 그럴 때만이 다양한 국민의 소리가 통치자에게 가장 잘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발전하고 넓어지며 성숙된다. 제왕적 권력이 주어진 최고 지도자가 통치행위에 있어서도 민주적 원칙을 지키고, 투명성의 확보를 위해 모든 기록을 전자화하고,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많은 기록물을 남겨 후대의 평가와 비판에 열린 자세를 취했다. 특권화된 기득권의 반칙과 특권과 타협하지 않았고, 박정희 유신독재시절부터 이어져온 기업들의 통치자금을 받지 않음으로서 한국 특유의 관치(정경관유착)에 종지부를 찍었다(이것을 조중동이 삼성공화국으로 변질시켰다). 



이 바람에 유수의 재벌과 대기업들의 경영진들과 정치브로커들이 시골양반이었던 노건평을 찾아가 바람을 넣었고, 거의 다 실패하고 말았지만 권양숙 여사에게 줄을 대기 위해 온갖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필자가 가장 슬프게 정의한 '노무현의 역설'이 바로 이것이며, 이런 반권위적 통치 방식 때문에 퇴임해 일반 농민으로 돌아온 바보 노무현을 통한의 죽음으로 몰고간 조중동과 국정원, 정치검찰이 '노무현 죽이기'의 프레임으로 악용할 수 있었다.                   

                                                              




노무현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믿었고, 다중지성의 진화와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의 조직된 힘을 믿었다. 그에게는 늘 사람이 먼저였고, 퇴임 이후에도 이런 삶의 진성성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필자는 국민국가가 탄생한 이래 노무현 같은 최고지도자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제왕적 권력에 스스로 제한을 뒀고, 권력 집행의 민주적 절차를 실질적인 면으로까지 확대한 거의 유일한 지도자였다.

 

 

필자가 노무현에게서 본 것은 성숙된 민주주의에 적합한 미래의 지도자였다. 대통령으로서의 공과를 넘어 그를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 확대라는 인류사의 목표를 지향했던 미래의 지도자를 봤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최고지도자로서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실천했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 확대를 견인할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가 지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를 믿었고 사람사는 세상의 도래를 믿었다.

 

 

이명박근혜 8년 동안 이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지만, 국정화에 반대하고 위안부협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청춘과 효녀연합 등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엘리트의 문제였을 뿐 시민들에게는 더욱 강렬한 요청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노무현의 죽음, 용산참사와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고 행동하면서 국민이 깨어나고 있다. 소녀들이 들었던 탄핵반대 촛불을 그들이 이어받아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다. 상식과 원칙, 정의와 평화, 공존과 상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외치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떠났다 해도 보내지 않았기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시공간을 초월해 2016년의 혹한에서도 횃불처럼 되살아나고 있는 청춘과 시민들의 열망이며, 잠시 가슴에 담아두었던 노무현 정신의 발화이다. 대체 이들에게 민주주의가 아니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반골 2016.01.25 22:48

    노무현 대통령님이 그립습니다.

  2. 오종민 2016.01.26 00:22

    늦은밤 술한잔사고있는데 그때 지켜드리지 못한것이 천추의 한이 되네요 그리 갑자기 가실 줄이야

    • 늙은도령 2016.01.26 00:30 신고

      그러게요.
      정말 그렇게 힘들어했을 때 힘이 되주지 못했습니다.
      잊지 맙시다.
      기억하고 행동합시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 보루임을 증명합시다!!

  3. 공수래공수거 2016.01.26 08:49 신고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 버립니다
    잊어서는 절대 안될것입니다

    기억할것을 너무 많이 만들어 주는 이 정권,,
    빨리 없어져야,,

  4. 耽讀 2016.01.26 10:25 신고

    만약 김대중-노무현-이해찬-문재인 이 나라 대통령을 이어갔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5. 참교육 2016.01.26 20:18 신고

    우리국민들이 어쩌다 이정도의 대통령도 만들지 못하는지 ... 통탄할 일입니다.

    • 늙은도령 2016.01.27 00:36 신고

      천민자본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한 것이 문제지요.
      먹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라는.....
      물론 국민을 그렇게 만든 것도 저들이지만.

  6. 모도 2016.01.27 11:37

    좋은 글 감사합니다.

  7. 치버 2016.01.27 20:32 신고

    사진을 보니 눈물이 나네요...

  8. 조현갑 2016.01.28 18:44

    사람 노무현을 좋아했던 이기에...
    또 이른글들에 딴지거는 이들, 매도하는 이들, 모욕하는 이들이 신경써이고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후손들은, 역사는 노무현 당신을 잊지않고 사랑할것입니다.

    • 늙은도령 2016.01.28 19:55 신고

      박근혜까지 물러나면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 얼마남지 않았으니 노통을 자랑하셔도 됩니다.

  9. 노란풍선 2016.03.04 20:59

    진짜보고싶다 저어~~어린이들한테 밀짚모자 내려놓고 인사하는 저분 우리는왜?이리도 복이없어서 저런분을 빨리보낸건지?

    • 늙은도령 2016.03.04 21:16 신고

      네, 정말 국민에게는 고개를 잘 숙였던 분이었어요.
      그분을 너무 일찍 보내드렸어요.



찰스 비어드는 ㅡ 합중국 정부를 비롯한 ㅡ 모든 정부는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 정부는 지배집단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 헌법은 이런 이해에 봉사하도록 의도된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경고했다. 


                                                                           ㅡ 하워드 진의 《미국의 민중사 1》에서 인용




이명박을 밀어내고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에 오른 박근혜와 청와대의 얼라들, 십방시, 문고리3인방 등의 다양한 별명을 갖고 있는 현대판 환관들에 의해 탈선을 거듭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퇴행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만의 리그는 하위 99%의 이익을 최상위 1%에 이전하는 반동적 계급혁명인 신자유주의를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려는 탐욕의 정치일 뿐이다.





모든 기득권 언론이 밀어주고 있는 안철수 신당과 유승민으로 대표되는 합리적 보수(대한민국에서 이것이 가능할지는 차치하더라도)가 손을 잡는다 해도 그들은 정체불명의 중도를 내세워 보수우파 기반의 시장자유주의 천국을 추구할 뿐이다. 시장자유주의 정당이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이 부정적으로 쓰인 이후에 새롭게 개명한 것에 불과하다.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넘쳐흘러 세습하기도 힘든 극소수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의 정치와 경제, 교육과 복지를 할 뿐이다. 유럽과는 달리 미국의 민주주의체제를 강제 이식당한 한국의 경우, 조세정의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중시하는 좌파적 가치를 거부하는 한 지배엘리트들을 위한 기득권의 민주주의를 대표할 뿐이다. 안철수가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나 정당과 연대하지 않겠다는 것은 헬조선도 이해하지 못한 정치철학의 부재를 보여준다.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백인 지배엘리트(WASPㅡ백인 앵글로색슨 청교도)의 시선이 아닌 원주민(인디언), 가난한 백인, 하인, 노예, 여성(여성 흑인노예는 삼중의 피해를 당했다), 이주민의 시선에서 보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철저히 지배엘리트를 위한 불평등의 역사였다. 미국은 이런 체제를 신흥국에 강제로 이식시켰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모토가 '우리가 한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한 대로 해'였다.





이것이 한국에 곧바로 이식되는 바람에 친일부역을 통해 부와 권력을 챙긴 자들과 미국 유학파, 군부 엘리트, 언론엘리트 등이 권위주의 보수와 반공, 경제성장을 공통분모로 견고한 지배계급을 형성하게 됐다. 그 다음의 과정은 좌파적 가치의 축소와 퇴출로 점철된 불평등의 역사였고, 기득권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안철수의 보수우파적 정체성도 여기에 근거한다. 



전통 좌파라기보다는 진보적 자유주의에 가까웠던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도 IMF 환란을 극복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구축하느라 좌파적 가치의 구현에는 상당 부분 한계를 보여줬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좌파 신자유주의(학술적으로 말하면 자유시장에 근거한 시장사회주의)에 가까웠고, 최악의 복지를 한두 단계 끌어올리는데도 기득권의 저항에 힘겨워했다.



노무현 정부 말에는 시장자유주의 우파의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목도하면서 복지와 사회안전망 확충에 힘썼지만, 골수 시장자유주의 우파인 이명박이 대통령에 올라 대기업과 토건족 일변도인 ‘비즈니스 프랜들리’라는 역주행을 선택했다. 전국을 공사판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며, 지구온난화와 슈퍼엘리뇨 때문에 뜻밖의 효용가치가 생긴 4대강공사와 묻지마 퍼주기의 전형인 자원외교가 대표적이다.  





박근혜는 한술 더 떠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줄푸세’를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부터 이어져온 노조 파괴, 규제 완화, 노동유연화는 물론 복지 축소, 연금 삭감, 그린벨트 해제, 부자감세와 서민증세, 최악의 노동개악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시장자유주의 우파(신자유주의)의 천국으로 만드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세습자본주의와 금권과두정치로 대체됐고, 불평등과 차별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심화됐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좌파적 가치가 필요할 때 이명박근혜 정부는 역주행을 선택했고, 민주정부 10년 동안 힘겹게 구축한 절차적 민주주의와 복지 및 사회안전망을 휴지조각처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대란, 백남기씨에게 가해진 테러, 치욕적인 위안부협상, 노동개악의 강행 등은 이명박근혜 8년의 산물이다. 국민의 목숨과 존엄보다 기업의 이익(오너 일족과 최고경영진에 속하는 고위임원, 대주주의 이익 등을 말한다)이 중요한 시장자유주의 우파정부의 역주행의 결과다. 추락하는 한국이 다시 살아나려면 아래로부터의 혁신과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좌파적 가치의 핵심이다.





자본주의는 태생부터 우파적이었고, 신자유주의는 극단적 시장자유주의 우파의 산물이다. 정치와 경제가 혼란에 빠졌을 때 가장 잘 돌아가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폐단이 끝이 없음을 말해준다.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하게 만든 2008년 월가 발 금융대붕괴가 발생하기 전까지 전 세계가 우경화됐던 것도 시장자유주의 우파의 최대 걸림돌인 좌파적 가치를 말살했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탈당을 전후로 해서 비주류 탈당파들이 야권을 콩가루집단처럼 자중지란에 빠져들게 만든 것도 진보 진영에서조차 좌파적 가치가 범죄시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역사의 정의를 팔아먹고, 노동자를 국민으로 여기지 않고, 미국과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것도 좌파적 가치를 실현할 정당이 현실정치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나쁜 점만 부각되는 시대로 접어든 현재, 시장자유주의 우파의 폭주를 막고 민주주의 본연의 가치로 돌아가려면, 완벽한 정치적 자유와 평등, 침해불가능한 천부인권, 조세정의와 부의 재분배를 통한 불평등 해소, 공존과 상생을 기본으로 하는 좌파적 가치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야성도, 정체성도 잃어버린 야당이 혁신을 한다니, 다른 무엇보다도 좌파적 가치의 복원부터 선언하라.





민주주의의 한 축인 평등을 지향하는 자유는 진보 이상의 것, 무력혁명을 제외한 전통 좌파의 인본주의적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 매진해야 한다. 그것만이 부와 기회와 위험의 불평등에 시달리는 하위 90%의 삶을 시장자유주의 우파의 권위주의적 폭주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니. 민주주의와 자유의 실현, 존엄한 삶과 공존의 세상은 모든 국민의 경제적 평등이 일정 수준에 이를 때만 가능하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7.04 06:36 신고

    콩가루 집안 싸움이 일어나는 좋은 기회에서 야당도
    이를 공격못하는 똑같은 상황이라 참 안타깝습니다

    공격에서 기회를 놓치면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곧이어
    실점하는법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04 21:03 신고

      문재인이 더 강력하게 나가야 하는데 자신이 대표로 있을 때 당이 분당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열린우리당의 경험이 뼈져리게 남아 있기 때문인데, 그때와 지금은 다르기 때문에 생각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2. 참교육 2015.07.04 07:30 신고

    트위트와 페이스 북에 공유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이 악마들의 마취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란 그림의 떡입니다.

    • 늙은도령 2015.07.04 21:48 신고

      네, 제발 깨어났으면 합니다.
      속지 말고 무엇이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제공하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3. 耽讀 2015.07.04 09:37 신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조각할 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경제부총리를 김종인이 아니라 김진표를 임명한 것입니다. 그 때 김종인을 경제부총리에 임명하고 청와대에 들어간 이정우 경북대교수와 정태인과 함께 경제정책을 이끌었야 했습니다. 노무현정부 경제정책도 이명박근혜보다는 아니지면 큰 물줄기는 신자유주의였습니다.

    • 늙은도령 2015.07.04 21:51 신고

      네, 좌파 신자유주의였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좌파적 버전이 있는데 그것을 선택한 것이지요.
      임기 말에 신자유주의의 붕괴를 목격하며 비로소 눈을 떴는데 이명박이 이를 완전히 망가뜨렸습니다.

  4. 구름바다 2015.07.10 06:00

    절대적으로 공감하고 찬성하는 바입니다.
    우리에게 현재 필요한 것은 보다 선명하고 강력한 야당의 색깔이죠.
    어느 누가 말 했듯이 현재 새누리당의 권력욕의 화신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리할 때만 약자처럼, 사람처럼 쇼를 할 뿐
    그들이 힘을 가졌을 때는 악마와도 같은 탐욕의 화신 그 자체의 짐승이란 걸 보여 주죠.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더 확실히 깨닫고 깨어 나게 하기 위해서
    보다 강력한 메세지를 던지는 야당의 선명한 색깔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합니다.

    • 늙은도령 2015.07.10 15:04 신고

      야당이 좌파적 가치를 강화해야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진보적 가치만으로 부족합니다.
      최악에 이른 신자유주의를 파괴하려면 좌파적 가치가 필요합니다.
      이 상태로는 안 됩니다.

  5. 어라라 2015.07.29 00:55

    뭔가 잘못 알고 계신거 같습니다. 한국이 자유주의 내지는 거기에서 파생된 신자유주의를 철학으로 가진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명박때도 그렇지만 박근혜 정부는 계획경제 철학에 가까운 정책만 펴고 있습니다. 4대 개혁이라는것도 마거릿 대처가 했던것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개혁입니다. 제가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이명박 정부는 중도적 성향이었고. 박근혜정부는 중도 좌파 내지는 좌파 성향이 강합니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작은정부/개인의자유/자유로운경제활동/사유재산보호등의 기본 베이스는 똑같고. 신자유주의는 거기에 선별적 복지같은 정부의 역할을 조금더 추가한 수준입니다.

    마지막 kbs1 사진에 하이에크 나오는건 '커맨딩 하이츠'라는 미국 공영방송을 국내에 방송한겁니다.
    만약 커맨딩 하이츠를 1~6편 다 보셨다면 지금 한국이 우파가 아닌 좌파 정권이라는걸 아실수 있습니다. 전부 계획경제의 산물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우파가 없습니다. 새누리가 우파 정당이라 생각하면 잘못알고 있는겁니다. 저도 자유주의자로서 새누리를 보자면 좌파에 불과합니다. 신자유주의 철학을 가졌다면 절대로 단통법,도서정가제같은 정책은 절대 만들수 없는 규제정책이거든요.

    • 늙은도령 2015.07.29 02:05 신고

      신자유주의는 19세기의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그런 식으로 움직였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특히 통치술로의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는 다릅니다.
      현실의 신자유주의는 상위 1%는 사회주의를 하지만 하위 99%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로 내모는 것입니다.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되 정부의 개입을 경쟁 강화와 규제 완화처럼 친기업적이고 친자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특정 사업에 대해 국가독점을 인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편하기 때문이며, 세금으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좌파적 버전도 있고 우파적 버전도 있습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 등은 학술적 의미의 신자유주의에 불과하지 권력관계의 신자유주의에 들어오면 내용이 달라집니다.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점은 미셀 푸코만이 아니라 촘스키, 삭스, 크루그먼, 스티글리츠, 최근에는 피케티까지 수없이 많은 석학들이 분석했고요.
      무한경쟁을 강자에게는 적용하지 않으면서 약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현실의 신자유주의입니다.
      정부와의 관계는 필수이고요.
      정경유착, 회전문 인사 등 현실상의 신자유주의는 수없이 많은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미식 신자유주의만이 아니라 독일식과 그 변형태인 한국과 일본의 신자유주의도 공부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처럼 이론 상의 신자유주의는 현실에서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필요한 것이고, 대신 친자본적이고 친기업적이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정치경제학적 이데올로기를 넘는 현실적 통치술에 대한 것입니다.
      단순히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6. 어라라 2015.07.29 01:21

    지금 한국은 큰정부/정부치출증가/국가부채증가/공무원증가/관료주의/반자유주의정책/무상복지/케인즈주의 등등
    신자유주의의 이론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처럼 대놓고 정부가 사기업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유화 하지는 않았지만.
    규제와 더불어 국민연금의 막강한 자금으로 정부가 슬슬 기업들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어찌보면 다른형태의 국유화죠. 거기다 정부가 대놓고 기업들에게 혁신하라 일자리 만들어라 주문하고 명령하는 상황입니다. 은행은 왜 돈 안푸냐고 성내고 등등 이건 절대 우파적 가치가 아닙니다. 가짜우파입니다. 신자유주의 철학에는 절대 이런 방식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부의 이런 반시장 계획경제적 철학은 전체주의나 공산주의의 길로 들어선다고 반대하는 곳이 신자유주의 입니다. 지금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새누리조차 좌파라고 비난하고 있는상황입니다. 저역시도 그렇고요. 계속 이렇게가면 2030~40년사이에 한국은 국가가 파산할지 모른다고 아주 걱정하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7.29 02:12 신고

      공무원 증가도 신자유주의와 항상 대척점에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 내 기업의 영역을 늘리면 공무원 증가는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대척점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지출증가도 신자유주의에 반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프리드먼의 공급학파가 주장하기도 했고요.

      어떤 공무원 증가냐를 봐야 합니다.
      어떤 부처는 공무원을 줄이고, 그 부처에 반하는 인사를 임명하고, 그래서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그것을 살펴야 합니다.

      반자유주의정책도 이론상의 신자유주의에만 반하지 현실의 통치술로 신자유주의와는 반하지 않습니다.

      즉 신자유주의는 통치술로 봐야 합니다.
      줄푸세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입니다.
      국민은 일방적 법치주의로 억압하고, 규제를 풀고, 특정 복지 등을 줄이는 것이 신자유주의 통치술의 핵심입니다.

      이명박은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붕괴되는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세금과 온갖 방식의 채권을 발행해 신자유주의 세력들에게 돈을 갖다 바쳤기에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반하지 않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좌파버전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혼동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상위 0.1%를 위해 99.9%를 털어가는 것입니다.
      이론은 기본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7. 김종현 2016.01.04 15:49

    좌중지란--->자중지란



북한은 좌파 전체주의 국가입니다. 이 땅의 보수(=수구)세력은 북한이 공산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정치경제학적으로 100% 틀린 말입니다. 지금껏 전 세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진 적은 없습니다. 파리코뮌의 ‘공산주의선언’에 나오는 공산주의가 아닌, 스탈린의 소비에트나 모택동의 중국이나 김일성 북한 등으로 대표되는 것은 유사 공산주의, 즉 좌파 전체주의입니다.





좌파 전체주의의 특징은 부와 권력을 독점한 최상위 0.1~1%가 야만공권력을 동원해 초법적 통치를 하는 것에 있습니다. 전체주의는 관료제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소수의 엘리트가 국가 전체를 통치할 수 있게 되면서 등장했습니다. 헌법이나 법률은 요식상의 것들에 불과하고 통치자의 뜻과 기분이 곧 모든 것의 기준이 됩니다.



김일성 일족이 통치하는 북한이 좌파 전체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우파 전체주의의 대명사인 히틀러의 나치와 도조 히데키의 군국주의가 대표적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체주의에 속합니다. 김일성 일족의 북한은 이것과 정반대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헌데 장자와 벤야민의 말처럼 극과 극은 통합니다. 우파 전체주의나 좌파 전체주의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라는 차이를 빼면 너무나 유사하게 돌아갑니다. 이런 전체주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 권위주의 독재입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우파 전체주의(특히 일본의 군국주의)와 구별하기 힘든 점도 이 때문입니다.



이 세 개의 체제가 교집합을 이루는 곳에 선동정치와 검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치의 전체주의 체제가 굴러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괴벨스의 선동정치와 모든 분야에 적용된 검열입니다. 이 둘은 한 쌍이어서 언제나 함께 움직이며 전체주의적 통치와 권위주의적 독재를 최대화합니다.



선동정치는 이명박이 무더기로 허가한 종편 중 TV조선과 채널A가 보여주는 안보와 증오상업주의의 광기와 극단적 편향성을 떠올리면 무방합니다. 일베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고조에 이르면 통치자의 생각과 의지가 곧 모든 가치와 규범을 결정합니다. 선동정치는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되는 일방통행의 통치수단입니다.





검열은 그와는 반대로 외부에서 내부로 파고드는 정신의 통치수단입니다. 선동정치가 통치자의 뜻을 퍼뜨려 피통치자를 일체화시키는 것이라면, 검열은 통치자의 뜻에 반하는 개인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일체의 저항과 변화를 무력화시키는 억압과 착취의 통치수단입니다. 검열이 최고조에 이르면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말살됩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제 상영작의 ‘사전 심의’와 독립영화 검열을 동시에 추진하려다 영화계의 반발에 직면해 유보하기로 했습니다. 단지 유보했을 뿐인 영진위의 검열논란은 부산영화제에서 현 정부에 비판적인 <다이빙벨>이 상영된 것을 계기로 은밀하게 추진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진위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비법) 제29조 1항 단서조항 ‘영화상영등급분류 면제 추천에 관한 규정’과 예술영화전용관 지원사업 방식을 개정해 영진위나 정부, 지자체가 주최·주관·지원·후원하는 영화제 등에서 정부 비판적인 영화가 상영될 수 없도록 만들고, 독립영화를 사전 검열하겠다는 것이어서 지독히 전체주의적 발상입니다.





실제로 영진위는 의 이런 행태 때문에 지난달 22~27일 열린 독립영화상영관 인디스페이스의 기획전 ‘2015 으랏차차 독립영화’에 상영등급 심의 면제를 위한 추천을 취소해,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김선 감독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와 정부에 비판적인 김정근 감독의 <그림자들의 섬>과 박배일 감독의 <밀양 아리랑> 등 총 세 편의 영화가 상영되지 못했습니다.



영진위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박근혜 정부를 위해 권위주의 독재와 전체주의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사전검열에 나선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초법적 발상이라 카카오톡 검열과 MBC경영진의 권성민 예능국 PD의 해고가 맞닿아 있습니다. 필자가 앞선 세대의 허사로서는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준 <국제시장>에 보수세력이 집착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도 이런 움직임 때문이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뉴스들을 보면 이것이 북한의 소식인지 대한민국의 소식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경제적 평등에서 나온 정치적 자유를 최대화하는 경향이 있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알리는 대단히 위험하고 폭력적인 경고음입니다.



민주주의는 태생적 불평등을 정치와 사회의 힘으로 평등하게 만들어가는 체제인데 박근혜 정부 3년차에 접어들면서 이에 역행하는 것들이 속출함은 국민의 저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임을 말해줍니다. 평등에서 나오는 자유란 부단히 노력을 통해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기 일쑤여서 공기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2.04 07:12 신고

    민초들은 아직도 독재나 유신교육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민주주의 반대를 공산주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등장한 그 어떤 체제나 이념도 완전하지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측히 금융자본주의는 이대로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자유도 평등도 주인이 지켜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2.04 12:27 신고

      너무 기초적인 상식조차 없다 보니까 맨날 당하는 것이지요.
      기본적인 것만 정확히 알고, 내 권리와 의무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알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너무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이 없습니다.
      사회와 예술, 철하고, 도덕, 체육 등 다방면에 걸친 교육들이 활성화돼 아이들이 자신의 맞는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2. 耽讀 2015.02.04 08:08 신고

    민주주의 반대가 전체주의죠. 전체주의는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 늙은도령 2015.02.04 12:29 신고

      네, 사실 공산주의는 경제적 관념이었어요.
      정치를 거의 무력화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현대국가는 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이 그때 그때의 경제적 상황과 맞물리며 공산주의적 요소나 사회주의적 요소, 시장경제 자본주의적 성격을 차용해 씁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5.02.04 09:17 신고

    사전검열을 실시한다는것은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인
    행태입니다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2.04 12:29 신고

      유신시대를 방불케합니다.
      알게 모르게 고위층들은 극우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4. 꼬장닷컴 2015.02.04 09:37 신고

    사전검열..
    그래야 안심이 놓이는 정부
    우리는 구린 게 많다는 광고죠.

    • 늙은도령 2015.02.04 12:30 신고

      예술을 검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놈의 정부가 완전히 미쳤어요.

  5. 달빛천사7 2015.02.04 10:54 신고

    요즘 현실이 그래서인지 마음이 그러내요

  6. 바람 언덕 2015.02.04 13:55 신고

    마지막 문장이 와 닿는 군요.
    시민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건데...
    휴우...

    • 늙은도령 2015.02.04 14:32 신고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7. 2015.02.04 14:05

    비밀댓글입니다

    • 늙은도령 2015.02.04 14:34 신고

      저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늘 들려서 많은 것을 보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일본은 연구할 필요가 너무나 많은 나라라 일본 관련 블로그를 많이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님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됐고, 여러 가지가 흥미를 유발시켜 매일 방문하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8. 건는다산 2015.02.05 10:28 신고

    삼청교육대학교 설립되는거 아닌가모르겠어요

    • 늙은도령 2015.02.05 15:30 신고

      허허허...
      정말 개판입니다.
      대한민국의 보수화가 독재의 망령들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건,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이건 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 있다. 그것은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하는 물리학이다. 우주와 삼라만상의 생성과 소멸을 탐구하는 물리학은 정치·경제·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도움을 준다.



특히 현대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대물리학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현대물리학의 핵심인 양자역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양자역학을 이루는 원리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베타원리가 대표적인데, 둘 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이 두 개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민주주의 이해에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입자가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입자가 특정할 수 있는 위치로 측정될 때는 질량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같은 입자들은 언제나 동일한 질량을 가진다, 평등의 개념처럼.



헌데 입자는 질량적 성질인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을 지니고 있다. 운동량은 에너지가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즉, 입자가 운동량으로 측정될 때는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동으로 이해된다, 자유의 개념처럼.





입자는 이렇게 특정한 위치를 가질 수 있는 질량적인 성질과 특정한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는 운동량인 에너지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렇다 보니 특정한 위치로서 입자를 측정하려 하면 운동량에 문제가 생기고, 운동량으로 측정하려면 위치에 문제가 생긴다.



결국 만물을 이루는 입자는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할 수 없는 불확정한 존재로만 측정이 가능하다. 이것이 불확정성의 원리다. 위치를 고정하려 하면 운동량에 문제가 생기고, 운동량을 고정하려 하면 위치에 문제가 생긴다. 둘 중에 하나라도 고정하면 입자는 존재할 수 없다.



입자가 지니는 이런 두 가지 성질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은 지속적인 측정을 통해 확률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입자에 인위적인 변화(정치)를 주려면 측정의 횟수를 통해 편차를 최대한 줄인 다음에 질량적 성질을 지닌 위치에 에너지를 가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러하다. 질량적 성질인 평등과 에너지적 성질인 자유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있다. 평등에 치우지면 자유가 침해받고, 자유에 치중하면 평등이 침해받는다. 둘은 하나이면서도 서로 성질이 다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중에서 자유를 강조한 것이다. 자유의 확대는 평등의 축소를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온갖 불평등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평등이 커질수록 민주주의는 축소되고 과두정치나 금권정치로 넘어간다.



불평등이 우주와 자연의 법칙이자 원리라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모든 존재의 근본인 입자의 차원에서도 자유(운동량)와 평등(위치)은 분리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성질이다. 어느 하나가 강조되면 입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민주주의도 무너진다.





다윈과 월리스의 진화론을 봐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핵심 원리가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 원리다. 생태계의 균형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류가 민주주의를 지배적 원리로 받아들였다면, 자유와 평등을 분리해서 보면 안 된다.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평등을 인정하면, 민주주의는 고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불평등의 체제인 과두정치나 금권정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불평등에 맞서 싸워야 한다. 불평등은 자유마저 죽이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등급을 매겨 신용을 창출하는 빚의 경제학이 불평등을 확대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상극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1. 중용투자자 2014.10.08 07:57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법대로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본을 바탕으로 법위에 군림하려고 드는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자유와 평등이 난도질 당하는 듯합니다.

    • 늙은도령 2014.10.08 17:41 신고

      지금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근혜는 국정은 운영할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 저기서 개판인 것이 자주 목격됩니다.

  2. 참교육 2014.10.08 10:33 신고

    저는 많이 어렵습니다.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연과학을 공부해야한다는 얘기가 왜 나왔는지 알만합니다.

    • 늙은도령 2014.10.08 17:44 신고

      쉽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어려웠나 보네요.
      원래 헤겔, 마르크스, 다윈 같은 사람도 뉴턴역학에서 이론이 출발점을 삼았습니다.
      물론 프랑스대혁명도 영향을 주었지만....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그냥 정치 사회학적으로 생기는 줄 아는데 사실은 과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는 양자역학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4.10.08 10:54 신고

    저에게도 어려운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도령님의 해박한 지식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 늙은도령 2014.10.08 17:45 신고

      허허허...
      더 쉽게 쓰면 양자역학적으로 틀린 것이 돼 이 정도 수준에서 맞춘 것인데 어려웠나 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가 사상이나 이념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궤변들이 가능한 것이고요.

  4. 바람 언덕 2014.10.08 11:33 신고

    양자역학 이론에서 민주주의를 뽑아낼 수 있다니...
    정말 도령님...
    졌습니다, 졌어요...

    쵝오...

    • 늙은도령 2014.10.08 17:47 신고

      원래 헤겔, 마르크스, 다윈 등도 뉴턴역학에서 사상적 기본원리를 끌어왔습니다.
      예전에는 자연과학자가 정치철학과 사상가 역할도 했습니다.
      우리가 과학적 근거를 정확히 이해하면 궤변을 늘어놓는 수구세력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요즘 기본적인 내용들을 글로 올리고 있습니다.

  5. 태봉 2014.10.10 12:17

    이런 물리학 이론을 통해서 정치철학에 접근하는 원리를 보고 많이 배워요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4.10.10 18:14 신고

      사실 근대이성과 정치 및 사회학 등은 모두 다 뉴턴역학에 절대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을 통해 배우는 것도 상당합니다.

  6. 소피스트 지니 2014.10.19 10:18 신고

    좋은 글입니다.
    평소에 양자역학을 좋아라하는 저에게 참 즐거운 글이네요.
    자유와 평등을 불확정성의 원리로 설명하신 부분은 신선하네요.



앞의 글에서 ‘fuck your money(외부의 권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다루었는데,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까지 올라간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적 영역인 아고라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평등함을 보장했다.





이런 고대 아테네의 평등 개념은, 모든 인간이 침해불가능하고 양도불가능한 기본권인 ‘생명, 자유, 재산’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평등하다는 현대의 평등 개념하고는 다르다. 도리어 아테네 시민들은 인간이 계급과 재산, 능력 등에서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공적 이익을 논의하는 공간인 폴리스에서 자신의 견해를 펼칠 수 있는 평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치열한 논쟁이 필수적인 정치가 작동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끄럽고 지루하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야만 공정하고 공평한 정치적 합의에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치철학 때문에 강제성이 있는 법을 통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정치적 평등을 제공하는 인위적인 제도인 폴리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는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법이고,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국민의 아우성이 통치자에게 가장 잘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의회의 기원을 고대 폴리스에서 찾는 것도 이런 아테네 고유의 정치철학을 배경으로 한다. 법이 보장하는 인위적인 공적 영역인 폴리스에서는 참여자들의 완전한 평등 속에서 폭력이 배제된 치열한 토론을 만들어내는 말(토론을 통한 정책 결정)과 그것을 통해 결정된 합의를 실천(정책 집행)함으로써 폴리스 전체에 이익이 되는 공적인 합의(정치)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폴리스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재산과 노예를 소유하고 있어 독립적인 삶이 가능한 경제력을 지닌 개인으로 한정됐고, 플라톤에 의해 아테네의 정치철학이 꽃도 피우지 못했지만,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폴리스에서 다루어야 하는 공적 사안들이 사적인 불평등과 권위 때문에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하면, 공적 이익이라는 공통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다시 말하면 정치가 이루어지는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동일한 개념이었다. 정치 참여가 경제적 독립을 이룬 자유로운 시민들에게만 주어졌지만, 바로 그런 경제적 독립에서 나오는 자유가 폴리스에서의 정치과정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더구나 아고라로 대표되는 정치의 광장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 공통의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됐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이런 고대 아테네의 정치철학과 실천을 기반으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처럼 정치 참여가 제한된 사람들이 피와 목숨과 과세를 대가로 시민권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정립됐다. 자연법사상에서 발전한 근대의 평등 개념 등이 더해지면서 현재의 민주주의에 이르렀다.



헌데 공적 영역에서의 인위적인 평등을 보장한 것이 정치 참여자들의 경제적 독립(fuck your money)에 근거한 폴리스의 법과 제도였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법(성문법과 관습법)에 의해 정립된 정치제도와 사회제도 때문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커지고, 기득권 위주의 언론권력이 등장하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가 불투명하고 불평등하게 됐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평등이 일정 수준 이상 전제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퇴행하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각종 폭력혁명과 1, 2차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시민권 확대를 통해 폭력이 배제된 현대의 민주주의를 이룩했지만, 신자유주의 40년 만에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정치 참여의 핵심인 자유의 실질적 행사가 제한됨에 따라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보다 못한 수준으로 퇴행했다. 절대군주제에서처럼 여론은 집권세력이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민주적 선거들은 4~5년 동안 국가를 지배할 임기직 행정가를 뽑는 것으로 요식화됐다.



정치가 자유로운 토론과 그것을 통해 결정된 공적 합의를 실천하는 것에서 세습권력의 기반이 되는 경제력의 크기에 따라 좌지우지되면서, 자유와 평등이 하나로 응축된 1인1표가 1원1표로 둔갑해버렸다.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진 시장경제 하에서 경제력은 곧 권력의 원천이라 민주주의는 금권정치라는 과두정치로 변질됐다.



앞의 글에 이어 오늘의 글까지, 두 편으로 나눠 ‘fuck your money'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설명한 이유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현대의 민주주의를 지탱하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하기 위함이었다.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에서 기원한 민주주의는 자유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불평등이 커지면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각종 불평등을 강화하는 정치를 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은 민주주의(특히 기득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유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커질수록 민주주의의 축소되고 퇴행된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독재시대의 산업화세력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이 바탕이 돼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며,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킨 공로가 자신들에게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 진리로 보편적 진리를 대체하는 것이라 참이 될 수 없지만, 부분적 진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일베충과 알밥, 서북청년단들이 좌빨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비판해야 할 정치인과 정당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정치를 자행하는 정치인과 정당이지, 사회경제적 평등을 요구하는 정치인과 정당 및 시민들이 아니다. 일베충과 알밥, 서청들은 차라리 독재시대가 낫다는 자들과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다음 글에서는 현대물리학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루고, 그 다음에는 민주주의를 축소시키는 대중매체의 테크놀로지(미디어정치의 근간)에 대해 다룰 예정인데, 그에 앞서 거칠게나마 ‘fuck your money'에 내포된 민주주의의 원리를 다룬 것은 이 땅의 진보가 지금보다 더 무너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아니 되찾고,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 이래 이 땅의 서민과 노동자를 대변해온 진보 세력의 대오각성과 분연한 부활을 기대하면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10.07 11:22

    사회경제적 평등이 유토피아적 발상이 되어버린 난국입니다.

    • 늙은도령 2014.10.07 11:38 신고

      미국만이 혁명에 성공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빈곤의 절박성이나 역사의 필연성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고력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은 그것 때문에 일어났지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가장 위대한 혁명인 것은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는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철학자들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매우 어려운 문제라 쉽게 풀어쓴 글입니다.

  2. 바람 언덕 2014.10.07 12:12 신고

    도령님의 글을 정말 읽으면서 공부가 되는 글이네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글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와 경제,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해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건강만 하세요...
    ^^

    • 늙은도령 2014.10.07 12:24 신고

      네,님도 건강하세요.
      좋은 글을 통해 많은 분들에게 좋은 성찰의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3. Konn 2014.10.07 21:08 신고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상태에선 절대로 사회적 평등이란 없죠, 특히 경제적 상태에 따라 더 많은 권력이(심지어 초법적일 수도.) 모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 늙은도령 2014.10.07 21:54 신고

      네, 그래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비폭력 혁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근혜와 최경환이 임기를 마칠 때쯤이면 이 나라가 얼마나 망가져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 전에 막아야 하는데 야당은 능력이 안 되고 방송은 장악된 상태로 국민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정치철학이 확실한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정당만 믿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습니다.



진보좌파는 자신의 정체성(이념)을 사회와 국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방임 시장경제, 대중매체 등이 만들어낸 결과들이 소수의 기득권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절대다수의 비기득권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이를 최소화하거나 극복하는데 정치적 목표를 둔다.



민주주의와 대중매체가 보편화된 20세기 후반부터 사실상 폭력적 혁명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좌파는 정치행위를 통해 이념적 가치인 다양한 방식의 차별을 줄이고 부와 기회의 불평등을 줄여야 했다. 폭력 혁명의 필요성을 놓을 수 없었던 좌파의 투쟁방식은 설 자리를 잃게 됨에 따라, 진보라는 투쟁방식의 정치적 변화를 선택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그냥 시장의 확대에 불과하다)가 더해지자, 이념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이루어졌다. 공동체나 지역 단위의 공론장은 국가 전체와 세계를 거의 동시에 보여주는 대중매체의 속도에 의해 무너졌다. 인식의 출발점인 시각적 단위가 커지면 전통의 공동체는 너무 작아서 무의미해진다.



기본적으로 대중매체의 테크놀로지는 현실의 피폐함보다는, 꿈이나 희망처럼 좋아 보이는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 대세(특히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라마와 각종 쇼, 연예인 스캔들 등)를 이루고 있는 것 등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대중매체는 전파를 타는 콘텐츠가 시청자를 중독(인터넷은 재접속)시킬 수 있어야 이익을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중매체는 시청자와 이용자들이 보기에 좋은 것, 재미있는 것, 복잡하지 않는 것 그래서 깊은 생각 없이 표피적인 인스턴트 쾌락에 빠져들게 하는 것들을 양산한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치열한 토론과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한 정치적인 것들마저 몇 초 만에 판단할 수 있는 즉시성을 띠어야만 대중매체를 탈 수 있다. 시청자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인터넷과 SNS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단문 위주의 재잘거림인 트위터나, ‘좋아요’에 따라 글의 가치가 정해지는 페이스북, 말의 결핍을 불러오는 카카오톡 등은 정치의 몰락이나 정치철학, 즉 이념이 추구하는 것을 질식사시킨다. 정치는 늘어나지만 이념적 정체성은 희박해진다.



무엇보다도 정치의 본질인 말(토론)이 메시지와 영상, 단문 등으로 대체됨에 따라 상징조작이 일상화됐고, 욕망과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선거의 승리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정치의 역할에서 치열한 토론과 냉혹한 현실 인식이라는 공익을 창출하는 과정이 힘을 잃었다.



이때부터 세상의 보수화가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욕망과 쾌락에 대한 상징조작이 난무하는 미디어정치가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상대와 치열한 토론을 거쳐, 보다 유리한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갈수록 피곤한 것이 된다. 즉 쿨하지 못한 것이 정치가 됐다.



사회경제적 평등이 전제될 때 ‘자유의 왕국’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좌파의 이념(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이 있는 국가의 특성과 함께 봐야 한다)은 무용지물이 됐다. 태생과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방임적 자유를, 법이나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로 제어하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이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



헌데 이런 인식이 대세를 이루면서 강준만류의 오류가 발생한다.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 제도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전제를 이룬다. 이런 현실 인식은 현재가 최선의 결과이고,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가장 보수적이다.





‘정치가 타협’이라는 강준만의 진단은, 폭력 혁명이 불가능해진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좌파적 이념을 정치적으로 풀어보려는 진보진영에게 끝없는 양보라는 정치적 타협을 강제하는 올가미로 작용했다. 신자유주의와 미디어정치의 약자인 진보진영이 좌파적 가치를 실현하려면 기득권을 인정하는 ‘싸가지’부터 갖춰야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에 대한 이해가 생긴 이래, 이념의 다른 말인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탄생과 함께 결정된 불평등을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 공익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후천적인 평등을 이루는 것이었다. 동서양과 종교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행동의 황금률이나 사회적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근대이성이 '계몽의 변증법'으로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를 욕망과 쾌락의 실현에 방점을 두면서 이념적 분할이 이루어졌다(프랑스혁명도 이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시민권의 확대와 현대적 의미의 역사도 이때를 전후로 해서 이루어지고 정립됐다. 언제나 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했던 정치가 공평, 공정, 정의, 평등의 구현이라는 철학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달라진 것이란 과학기술의 발전과 대중매체의 보편화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발전뿐이었다. 공간을 시간으로 점령하는 세계화란 이 두 가지의 지원 하에 정치에서 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이념을 배제시키는 과정이었다. 마키아벨리적 추문을 정치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것도, 정치를 마케팅으로 바꿔버린 미디어정치다. 한국의 경우 언론인(특히 기자와 앵커)이 정치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매체가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강준만식의 진보 비판이란 그 자체로 보수화를 의미한다. 대중매체가 주도하는 미디어적 시각에서 보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보의 정답인데, 그것을 이루는 방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이라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수준이 높다고 정치가 이념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차별을 조장하는 엘리트주의가 부활하고, 노력보다 능력이 중시되고, 결과의 평등을 강제하는 것들이 갈수록 힘을 잃는 부정의로 가득한 현실에서 국민을 계몽시키면 정치와 민주주의의 수준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강준만식의 진보 비판과 시대 진단은 그저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언어적 유희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치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사후적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모든 개인이 또 다른 시작을 할 때, 다음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출발을 할 때, 공정하고 공평한 경쟁과 공존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에 의해 균형과 견제가 가능하도록 사회와 국가를 제도화하고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되, 어쩔 수 없이 참사가 일어나면 가장 민주적인 대처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게 인류가 민주주의를 지배적 체제로 선택한 이유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삶에 찌들어 있도록 만들어, 풀뿌리 민주주의조차 불가능하도록 만든 것이 20세기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이루어진 타협이란 우파적 가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달라진 것이란 20세기 후반보다 모든 면에서 불평등이 늘어나 풀뿌리 민주주의는커녕, 자식의 죽음을 대중매체를 통해 생중계로 보았지만 부모들이 목숨을 건 단식이 아니면 진상규명에조차 다가갈 수 없는 정치적 타협을 가장한 야합이 늘어난 것이고, 진보 지식인을 자처했던 자가 타협하라고 유족들에게 대목을 박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정치적 타협과 투쟁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철저하게 보수화되고 재봉건화된 세상에서 진보가 싸가지라도 없으면 무엇으로 버틴단 말인가? 진보에게 싸가지 없다고 욕하기 전에 진보를 싸가지 없게 만드는 대중매체와 극단의 불평등이 초래한 현실의 부정의함부터 제대로 인식하라. 역사상 최고의 추문으로 유명해진 마키아벨리적 접근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싸가지 없는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싸가지다.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가 말이라는 것을 되살려내고, 보수진영은 애초부터 정체성이 없어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기회주의적인 집단이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욕망과 쾌락을 잘게 나눠 분할해서 지배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인류가 선택한 민주주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 평등을 보장하기 때문이며,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최종적 결과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최소화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에 필요한 것은 이념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며, 유시민처럼 싸가지가 없어도 정치의 본질이 말에서 출발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행동은 말보다 일관성을 유지하기 쉽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자유방임 시장경제,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각종 불평등을 양산하고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았다는 것이 판명난 지금, 보수가 토론을 피하고 대중매체를 동원해 상징조작에 전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 비판에 적용해야 할 것을 강준만 교수는 진보에게 적용했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대중매체 인터뷰와 기사와 칼럼 등을 기준으로 하면. 즉 강준만은 더 이상 진보 지식인이 아니라 보수 지식인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아니, 더 나빠졌을 뿐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선 아우성치며 시끄럽고 싸가지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10.01 08:50

    진보,보수,중도 이런 프레임에 가둬두고 판단을 한다면 어떤 사람도 피해갈 수 없을 듯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유심히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 태봉 2014.10.01 11:20

      제 개인적인 생각은 약간 다릅니다 이 세상은 결국은 각자가 프레임을 통한 세계를 보고 경험합니다 그래서 중요한건 프레임의 내용인 이념적 가치관,세계관의 정확하고 바른 정립이 우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재벌 ,정치,미디어권력 등 기득권세력에 의해서 중도,보수,진보라는 개념이 잘못 인식되고 있습니다 늙은 도령님이 말씀하였듯이 가치와 보존,국익추구가 보수일진데, 사익에 눈이 먼 수구를 보수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프레임에 대중들은 쇄뇌되어 있어서 그들은 그들을 잘 이용해 먹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각자의 개인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님의 말씀처럼 수구는 사적이익에 몰빵하므로 수구는 수구식으로 행동일치가 가장 잘되나 봅니다ㅋ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넘이 재잘거렸습니다

    • 늙은도령 2014.10.01 22:31 신고

      이념적 깊이란 말과 행동의 일치를 불러옵니다.
      최소치가 아니라 최대치로요.
      정치적 기술만 늘뿐, 이념적 이해가 부족하면 정치는 언제나 기득권의 놀이터가 됩니다.
      국회에 다양한 계층의 정당이, 다양한 이해가 충돌하는 집단의 일원이 진입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합의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헌데 거대 양당체제에서는 둘만의 이해만 일치하면 됩니다.
      아무리 첨예하게 대립해도 그들만의 이익만 왔다갔다 하는 것이어서 그 과정에 국민이란 없습니다.

    • 늙은도령 2014.10.01 22:34 신고

      그럼요, 태봉님.
      이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확고한 실천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기득권이 만든 논리인 타협이 최상인줄 압니다.
      보수는 바꾸지 말고, 최대로 해도 기존의 것들을 바탕으로 한 혁신을 주장합니다.
      이미 벌어진 차이는 줄어들지 않거나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진보는 이것을 정치과정을 통해 줄이고, 줄이고, 그러다가 역전도 가능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념적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승자와 강자의 세상만 계속됩니다.

  2. 지나는독자1 2014.10.02 09:58

    늙은도령님, 또 다른 지식인, 운동가들은 말고, 시민단체도 말고, 지금 야당 정치인들은 야당이 중도층 표를 얻어 집권"하려면 반드시 강교수 이야기를 새겨들어야 할 듯.... 싶네요. 진보가 되었건 좌파가 되었건 싸가지가 없으면 다른 건 몰라도 '집권'은 절대로 못합니다. 강교수 말은 쉽게 말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쟤들은 더 심하잖아'라고 말하는 건 집권하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게 또 강교수 말이라고 봐요.^^

    • 늙은도령 2014.10.02 14:17 신고

      강준만의 진단은 단기적 승리를 위한 하책입니다.
      강준만은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이라고 하면서, 국민을 끌어올리야 한다는 방법으로 방법적 접근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또다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솔직히 보수와 진보 모두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방법적으로는요.
      그래서 결국은 이념, 즉 가치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강준만의 진단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그는 기본적인 것을 놓쳤습니다.
      기본이 흔들린 성공은 일시적이고 어쩌면 영원히 집권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진보보고 보수를 따라 하려면 절대 못 이기지요.
      진보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강준만은 반대로 풀었습니다.




다양한 첨단기술의 발전에 따라 의사와 환자 간의 문진과 진단, 시술과 수술 등의 일체의 의료행위를 철저히 경제 논리에 의거하는 미국의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성의 폭력적 행태가 사회의 모든 곳에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행정조치(국회의 동의가 필요없는 가이드라인)라는 편법을 동원해, 모법인 의료법을 무력화시키며 강행되고 있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의 논리도 결국 자본과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의 정당화와 극대화에 있다. 



국가권력기관들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의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의 60~70%와 야당, 의사협회와 보건노조, 시민단체들이 반대하는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를 강행하는 것은 경기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의 생명마저 돈의 논리에 넘겨버리는 최악의 통치행위라 할 수 있다. 의료민영화와 영리화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도 어긋난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각종 규제가 신설되고, 초국적기업과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을 제한하고 있음에도, 유독 근대이성에 사로잡혀 성장만 외치는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는 자신의 임기 동안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 폐해는 다음 정부와 미래세대에게 전가된다. 시대에 역행하는 각종 정책들, 규제의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분별한 철폐, 온통 장미빛으로 색칠된 ‘통일은 대박’이라는 미래비전은 치적에 대한 지도자의 본능적 욕망과 미래에 대한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대체 불가능한 경제학자로 지칭되는 조지프 스트글리츠마저 경제성장이 온기가 국민들에게 흘러내리는 낙수효과가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치기 어린 지도자와 정부 및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방송들의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직 '결과의 낙관론'을 퍼뜨려 국민들을 집단적인 최면상태로 빠뜨리는 것은 현대성의 폭력성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여론몰이는 특히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세대에게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텔레비전과 함께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미디어세대들은 텔레비전이 전해주는 특정 정보에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신뢰를 드러낸다. 미국의 교육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방송학자였던 닐 포스트만은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성찰없는 미디어세대'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 《죽도록 즐기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다.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다...이제 텔레비전은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까지 지시하는, 초 매체적 지위에까지 올랐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편향된 방송을 즐겨 시청하는 50대 후반부터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메시지가 사실ㅡ심지어는 진실ㅡ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이란 도구(정확히는 텔레비전을 작동시키는 배후의 테크놀로지)가 가치중립적이라고 확고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특정 방송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생각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빛의 속도로 반응하며,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인식의 활동을 일상생활과 여론조사와 투표소에서 분출시킨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세월호 유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 중인 장소에서 맞불시위를 벌이거나, '자식 팔아서 그만큼 챙겼으면 됐지'라며 짐승보다 못한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이들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거기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관계가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닐 포스트먼은 이런 인지부조화와 길들여진 인식의 편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크놀로지와 매체의 관계는 두뇌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두뇌처럼 테크놀로지는 일종의 물리적 기관과 같다그리고 정신과 같이 매체는 물리적 기관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하나의 테크놀로지가 특정한 상징부호를 사용할 때나 사회적 위상을 차지할 때그리고 경제적ㆍ사회적 정황 속에 슬그머니 자리잡을 때그 테크놀로지는 하나의 매체로 변모한다테크놀로지는 그저 하나의 기계장치에 불과하지만매체는 기계장치로 인해 생성되는 사회적ㆍ지적 환경과 같다는 뜻이다물론 뇌처럼 테크놀로지는 나름대로 태생적인 편향성을 갖는다바로 이 때문에 경우에 따라 테크놀로지가 쉽게 접목되기도 하며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따라서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테크놀로지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와 발견은 가치중립적이어서 윤리나 도덕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 자체로 과학적 행위가 가치중립적이라는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것이어서 논리적 모순에 빠져드는 것처럼, 카메라가 제한된 각도에서 찍은 것만 볼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제한된 각도 밖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은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의 편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폐허와 쓰레기장도 카메라 각도와 편집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고,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텔레비전에 길들여진 미디어 세대들은 모든 방송 콘테츠가 광고와 협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고가의 텔레비전 광고비와 거액의 협찬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조직, 단체)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않는다. 방송사들이 먹고 살려면 이들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와 뉴스를 내보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자본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며, 소수의 상류층의 삶을 지향하는 매체이자 테크놀로지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고민해보지도 않는다.   



게다가 미디어 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매스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는 메타포'라고 말했다. 이는 메시지를 생산하는 '테크놀로지마다 제 나름대로의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젠다'라는 단어에 내포된 의미가 정치적이라는 것처럼,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가 그 시대의 지배적 세력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익에 봉사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악의 초국적 언론재벌 머독



맥루한은 또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미디어가 전하는 정보(콘텐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미디어는 결국 인간을 그 이전의 인간과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지닌 존재로 변화시킨다. 맥루한은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를 "기술(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이미지 조작(상징 조작)을 통해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없이"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맥루한이 텔레비전이 내보내는 콘텐츠가 "정신의 감시견을 따돌리기 위해 도둑이 미끼로 던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현대성을 대표하게 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텔레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모든 잠재력을 영상기술로 끌어낼 수 있었"고 정치적 편향성이나 권력 편향성을 지닌 매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수백 수천만 가지의 동영상에 인간은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 되는, 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의 결여로 확장됐고, 심지어는 뇌의 퇴행을 야기하는 유전적 변화ㅡ리처드 도킨스는 이 유전자를 밈이라고 명명했다ㅡ까지 초래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 적용된 테크놀로지는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팔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말보다는 이미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을 선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부정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것들은 넘쳐날 정도로 많고, 이런 것이 쌓이면 시청자의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가 텔레비전이라는 무대를 통해 상영되는 모습을 본떠 점차 각색"되는 일도 가능해진다.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며,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종적인 결과는 낙관해도 좋다는 근대이성이, 1,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현대성으로 넘어가며 선택한 지배적 체제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에 따른 승자독식을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였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인류를 자연과 신의 수중에서 해방시켜주고 빈곤과 질병에서 구원해주겠다고 공언한 근대이성은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사라진다. 무한한 진보와 함께 근대이성이 약속한 것이 '자유와 평등, 박애와 관용, 정의와 평화'의 왕국이었다는 것마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성은 이렇게 폭력성과 선정성, 즉시성과 오락성을 띨 뿐 어떤 진지한 담론과 토론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류는 그렇게 현대성을 확대재상산하는 주류 매체인 텔레비전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전쟁과 테러, 대형사고와 유명인사의 부패와 스캔들, 엽기적인 범죄와 함께 잘 만들어져 섹시함으로 흘러넘치는 아이돌들의 온갖 몸짓들과 모든 이슈를 오락거리처럼 다루는 콘텐츠 처리방식에 따라 가치의 판단기준이 왔다갔다 하는 아노미 현상에 빠져들게 됐다. 



이를 극대화시킨 것이 모든 콘텐츠에 따라다니는 가장 감각적이고 유혹적인 광고의 범람이다. 인류는 이제 광고 없는 공간을 찾기 힘들게 됐고, 이제는 광고에 순응돼 그것이 전하는 현대성의 다양한 욕망과 쾌락행위에 사로잡힌 포로이자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다. 눈이 가는 모든 곳에는 어김없이 광고가 걸려있고, 손을 뻐치는 모든 곳에는 광고에서 본 욕망들이 실체를 드러낸 채 기다리고 있다. 필요한 것은 돈이거나, 즐기고 난 다음에 갚는 플라스틱 신용과 전자 신용이다. 



현대성이란 이렇게 즉시적인 욕망과 쾌락의 추구를 창출해낸다. 소비자로 정체성이 재규정된 인간은 어제의 귀중품이 오늘에는 필수품이 돼야 한다. 욕망은 뒤로 미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족시킬 수 없어 돈을 버는 대로 소비하려 달려가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순간적이고 즉시적인 불만족과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폭력적 요소를 가미하게 되고, 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주차 문제를 놓고 살인도 일어나게 된다. 폭력적 성향으로서의 현대성이 온갖 공포를 양산하고, 타인은 언제나 지옥인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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