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박스에 들어있는 인용문들은 러셀 J. 달톤의 《시민정치론》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달톤은 이 책에서 고도성장기를 지나 저성장 시대로 접어든 선진 산업민주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여론(공중의 가치 변화)과 정당(시민의 정치 참여)의 변화를 다루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이끄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친 시대적 변화의 결과이지만, 글박스에 담은 것은 의무교육의 형태로 제공되는 양질의 공교육과 질높은 대학교육의 영향력입니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한 주입식이고, 부모와 조부모의 재산과 직위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는 차별의 현장이자 선행학습의 경연장이며, 대학의 입학생에게 요구하는 살인적인 스펙들의 바다이자, 기업의 몫이었던 신입사원 교육까지 개인과 가족에게 넘겨 신용불량자 양산과 중하위층 파산의 주범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교조와 깨어있는 교사들, 혁신학교, 대안학교들이 이런 교육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공교육의 후진성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땅의 1020세대들은 이대생의 투쟁과 소녀상지킴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청소년행동주의, 박근혜 퇴진과 부역자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등에서 보듯이 1020세대들은 교육적 환경의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팟캐스트, SNS, 정당과 정치인과의 직접 교류 등을 통해 무한퇴행 중인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를 바로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정당을 압박하고 정부를 비판합니다.



대한민국은 광복과 함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번성하기 쉬운)가 강제로 이식됐으며, 이승만부터 박정희를 거쳐 노태우까지 독재정부가 집권을 독식했기 때문에 기성세대들의 민주주의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부마항쟁과 4.19혁명, 5.18민주화항쟁과 6.10민주항쟁 등으로 독재정부의 반민주성에 제동을 걸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지금의 1020세대들이 태어나고 자란 노무현 참여정부에 들어서야 실질적 민주주의를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선진 산업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일반화된 시민주권에 눈을 뜬 것입니다. 





빠른 반응성, 자아 실현, 자기 노출, 유연한 가치, 진보적 성향, 자유주의적 감수성(개인주의), 이슈지향적 정치참여, 일상에서의 민주주의, 플래시몹과 다양한 방식의 집회와 항의 같은 축제로서의 혁명(재미 이데올로기), 성공지상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탈물질주의,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물의 권리를 중시하는 생태민주주의, 사회적 평등, 성적 평등, 젠더 정치, 소수자의 인권 보장, 핵에너지 반대 등을 표방하는 이들은 경제성장과 안정된 경제, 국가안보, 질서유지, 범죄와의 전쟁 등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기성세대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60년대 민주주의를 확대했던 '위대한 세대'와는 달리 그 이후의 세대들은 전통의 공동체 참여와 정치결사체 활동의 약화, 지속적인 투표율 하락 등을 이유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퍼트남과 프랭클린, 데이몬 등도 있지만, 더 많고 더 좋은 교육을 받은 1020세대들에게서 '비선거적'인 정치참여 행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게이트'와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1020세대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해 왔고, 그 빈도와 적극성에서는 기성세대를 뛰어넘습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행복한 가족'이라는 성공의 보편적 공식에 따라 살기만 해도 고도성장의 일원으로 부를 늘려갈 수 있었던 기성세대들과는 달리, 그런 것들이 모조리 무너진 상황에서 태어난 1020세대들은 그들 스스로 삶을 개척해가야 했습니다. 성공의 보편적 공식이 무너졌으니 각자의 선택과 행위는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미래가 불투명하다 해도 물질적 풍요를 일정 수준 이상 누리고 있는 1020세대들은, 장시간노동과 가족 부양을 위한 자발적 복종, 자아 실현의 포기 등을 물질적 이득과 바꾸었던 기성세대보다, 삶의 관습적 가치들을 포기(N포세대)하더라도 자아 실현과 행복 추구, 적극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정치 참여를 선택한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졌듯이 세대도 달라졌습니다. 



필자가 '시민정치론'을 접하기 전까지는,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세월호유족과 함께 416세대들을 지켜보기 전까지는, 소녀상 지키기와 국정교과서 반대에 나선 청소년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대생의 투쟁과 승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성주군민과 김포시민의 대정부 투쟁에 감동하기 전까지는,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목격하기 전까지는 1020세대들의 탈정치화 현상과 민주주의의 축소를 걱정했습니다. 공통점을 찾기 힘들어, 또는 기업의 마케팅전략의 일환으로 정의된 X세대라 했던 3040세대에 비해서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그런 걱정과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고, 시대에 뒤떨어진 먹물들의 비관적 전망인지 알게 됐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하는 지표와 통계, 연구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만, 생각과 경험의 눈높이를 1020세대에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니, 그곳에서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전혀 다른 증거와 현상들이 넘칠만큼 많았습니다. 빛과 어둠 중에서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민주주의는 위기일 수도 있고, 기성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래 멈춰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이런 상반된 현상을 목도한 학자와 세대들은 각자의 증거와 목소리를 높이겠지만, 최소한 필자에 한해서는 희망의 일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386세대인 필자는 상상도 못했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시민주권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박근혜-이재용 게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배엘리트들과 정당정치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지만, 이대생의 투쟁과 촛불집회 등은 민주주의의 부활을 말합니다. 





어느 세대나 경제적 안정은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가치이지만,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경제성장에 목매지 않는 시민주권 행동주의자들의 등장은 반갑기만 합니다. 현재의 이념분포에 따르면 보수적 성향의 유권자가 많다고 해도, 매년 진보적 성향이 강한 몇십 만 명의 청소년들이 유권자로 진입하기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구시대의 악습과 폐해들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진보적이지만 이념의 포로는 아니며, 자유주의적(개인주의)이어서 권위주의적 위계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젊은 유권자의 증가는 무한경쟁의 물질주의에 매몰된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를 가치 지향의 탈물질적인 직접민주주의로 탈바꿈시킬 것입니다. 



우리의 공교육이 모든 과목에서 서열을 매기고 차별을 조장하고 개성을 죽이고 기업의 부속품을 배출하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지옥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성과 자질을 찾아내 다양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서구의 교육(대표적인 것이 핀란드)처럼 변할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헬조선과 정반대에 위치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박스는 창의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는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심층적으로 풀어낸 달톤의 《시민정치론》에서 발췌한 것이니, 1020세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육은 학습하는 내용으로 인해 가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대 서구의 교육시스템은 일반적으로 참여, 자기표현, 지적인 이해와 같은 가치들, 그리고 다른 탈물질적 목표들을 강조한다. 현대적 대학 교육의 자유주의적 지향은 사회적 관점들의 확장을 장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교육의 효과는 세대 효과와 중첩된다. 젊은이들이 나이 든 세대보다 교육을 더 잘 받았다젊고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 사이에 탈물질적 가치들이 집중된다는 점은 이러한 경향에 추가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탈물질주의자의 퍼센티지가 증가할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좀더 젊고 더 탈물질적 세대들이 나이 든 물질주의자 세대들을 교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총체적인 교육수준이 계속 증대되면 탈물질적 가치들에 대한 지지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이 점은 탈물질주의자들이 물질주의자들도보다 정치에 더욱 적극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또한 탈물질주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들의 숫자가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클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중요하다. 실제로 미래의 엘리트 집단ㅡ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ㅡ사이에서 탈물질적 가치들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개인들이 성공적으로 경제, 사회, 정치적 지도자의 위치에 진입하면 변화하는 가치들의 효과는 당연히 강화될 것이다.



1999년의 유럽가치서베이는 물질주의자들이 좋은 임금수준과 일의 안전성을 직업에서 중요한 성격적 요소로 꼽은 반면에 탈물질주의자들은 창의력 사용의 기회를 얻는 것, 유용한 직업을 갖는 것, 편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과 같은 목표들을 꼽았다고 알려주었다. 많은 비즈니스 분석가들이 직업윤리의 쇠퇴를 한탄하지만 사실 직업윤리가 새로운 목표세트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탈물질적 신조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지위에 부여된 권위를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위를 확인해야 한다. 오늘날의 부모들 특히 탈물질주의적인 보모들은 자식을 교육할 때 훨씬 더 독립성을 강조한다. 사회적 삶과 정치적 삶의 여러 측면들에서 공중의 행태는 점점 더 스스로 방향을 결정하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늘어나는 독립심은 소비자들 사이에 브랜드 이름에 대한 충선심의 감소와 투표자들 사이에 정당에 대한 충성심의 쇠퇴 현상으로 반영되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은 더 큰 자유와 개별성에 대한 요구를 반영한다. 이것은 패션, 소비자 취향, 사회적 행태, 대인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가치변화의 과정은 종교적 가치와 성적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물질주의자들은 경제적 안전에 대한 관심에 덧붙여 혼외정사, 낙태, 동성애와 같은 성 관련 이슈들에 대해 구속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탈물질주의자들은 기득권 정치가 종종 간과했던 새로운 정치적 이슈 세트ㅡ환경의 질, 반핵 에너지, 젠더 평등, 제한된 소지자중심주의ㅡ를 옹호한다. 



위싱턴에서 열리는 지구온난화, 원전의 안전, 젠더 평등에 관한 토론들은 유럽 국가들의 수도에서 열리는 것들과 밀접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슈들의 주창자들은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교육을 잘 받았으면 탈물질주의자다. 가치변화는 정치적 참여에도 영향을 미친다. 탈물질적 가치들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 직접 참여하도록 자극한다. 그 장소가 학교든, 일터든, 정치과정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탈물질주의들은 물질주의자들보다 정치에 더 관심이 있으며, 그러한 관심을 정치적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더 크다.  



일부 국가에서 탈물질주의자들의 투표 참가율은 종종 낮게 나타났다. 한 가지 이유는 기성 정당들이 탈물질적 이슈들을 포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탈물질주의자들은 선거와 대부분의 정당들처럼 공식적인 위계적 절차와 조직들에 회의적이다. 그 대신 탈물질적 가치들은 시민의 솔선, 항의, 그리고 다른 형태의 직접행동에 대한 참여를 자극한다…이러한 비당파적 참여기회들은 탈물질주의자들에게 정치에 그들의 가치 정향과 들어맞는 좀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한다. 대부분의 탈물질주의자들은 좀더 요구수준이 높은 형태의 정치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도 갖추고 있다.



물질적 가치들의 영속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지만, 공중의 가치들이 변하고 있다…전통적인 물질적 패턴의 영속성을 보여주는 거의 모든 사례의 경우에도 탈물질적 가치를 반영하는 반대 사례가 나타난다. 거의 모든 시민이 경제활성화를 위해 지역적 관청을 상대로 로비하는 가운데도 다른 쪽에서는 성장이 녹지의 상실 또는 삶의 질 악화를 의미한다고 걱정을 한다. 가치의 다양성은 시민정치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정치토론은 단순한 합의적 목표들에 도달하는 수단뿐만 아니라 목표를 정의하는 일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 가치변화의 이슈들이 바뀌고 있다. 환경보호, 개인의 자유, 사회적 평등, 참여, 삶의 질에 대한 관심들이 경제와 안보 이슈들로 채워진 전통적인 정치 아젠다에 추가되었다…탈물질주의자들은 대의민주주의의 구조화된 선거정치를 덜 포응할 가능성이 있다. 대신 그들은 직접참여와 새로운 직접민주주의 형태들의 주창자다. 이는 다양한 공익집단들을 포함하고 있는 적극적인 시민사회에 추가로 더해지는 역할이다.   




#새누리가박근혜다
#박근혜하야하라

#바른정당도박근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둘리토비 2017.01.15 01:11 신고

    학생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적극적으로 응원합니다~
    당연히 표현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고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엄연한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시민의 목소리이고 인격체입니다~

    • 늙은도령 2017.01.15 06:43 신고

      지금의 청소년들은 예전의 청소년과 다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선거연령은 낮춰야 하며, 자신을 대표하는 시민으로서 대접해줘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고령화시대의 보수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2. jeremy 2017.01.15 18:38

    탈물질화에 대한 가치가 그 중심인 것 같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삶의 질이 보장된다는 조건이 필연적으로 제기될 듯 싶습니다. 현재를 사는 젊은 세대들이 가치관과 사회 또는 기성세대가 주입했던 성공의 잣대가 서로 급격하게 충돌하면서 해결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들의 대화에서, 반기문의 말처럼, N포세대라 불리우는 젊은 세대에게 닥쳐온 문제들이 그저 '노오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단정짓는다면 끝없는 평행선을 달릴 것입니다. 따라서 기성세대는 이러한 세대간 단절을 해결해주고 세대간 화합을 이뤄내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젊은이들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줄 때, 건강한 시민의식들은 더욱 더 꽃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성세대의 현재 누리고 있는 몫을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에게 일정부분 나눠주고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 늙은도령 2017.01.15 19:52 신고

      노오오력을 강조하는 것은 기성세대, 특히 성공한 자들의 주장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옛날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지요.
      지금의 청춘은 노오오력을 안해서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 노오오력을 너무 많이 해도 다음이 없어서 힘든 것이지요.
      이것 때문에 청춘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탈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삶의 행로를 바꾼 것입니다.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행복한 삶이라도 꾸며가겠다는 것입니다.
      소비를 최소화하되, 비경제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정치를 택한 것이지요.
      그들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7.01.16 08:38 신고

    무엇보다도 기성정치인의 장에 젊은 세대들이 들어 가야 합니다
    20대 30대 국회의원이 나와야 하고 전문 위원으로의 참여도 필요합니다
    다음 국회에는 반드시 그랬으면 합니다

    • 늙은도령 2017.01.16 14:51 신고

      네, 그들은 과소대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국회에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문재인은 아직도 호남을 모른다



위에 링크한 기사는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이관후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필자는 여러 편의 글에서 스쳐가는 방식으로 진보매체들의 한계와 고리타분함을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비판은 가급적 자제했습니다. 문재인이 '질서있는 퇴진'을 전제로 더민주를 수권능력이 있는 정당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상황에서 괜한 분란만 자초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던 더민주의 추락을 막고 반등에 성공한 문재인 전 대표가 김종인을 총선의 선장으로 영입한 이후에는 더더욱 조심스러웠습니다. 문재인이 어떤 경로와 이유로 김종인을 영입했는지 알 수 없었던 필자로서는, 김종인이 보여준 퇴행적 행태(필리버스터 조기중단, 오만방자한 야당통합, 셀프공천, 청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례대표 학살공천, 당무거부, 모욕적인 방식의 정의당과의 선거연대 파기 등)를 비판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습니다. 



필자의 눈에는 확실했던 총선 승리가 연기처럼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건강까지 악화됐지만, 필자는 총선 한 달 전에 새누리당의 과반수 붕괴를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사실상의 박근혜 탄핵으로 드러난 총선 민심 참조). 총선이 끝난 후에는 선거 결과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글을 올렸고, 광주·호남의 반문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루트를 가동해 일정 수준의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표본집단이 너무 적기 때문에 필자의 판단에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호남홀대론과 반문정서를 다룬 것들이라면 모조리 검색해 꼼꼼히 살펴봄으로써 모집단의 신뢰성을 높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프레시안>에서 이번 기고를 접하게 됐습니다. 정희준, 김욱, 장은주, 윤중대 등이 펼친 패권주의 논쟁을 접한 후 <프레시안>은 꼴도 보기 싫었는데, 호남홀대론과 반문정서를 다룬 이관후의 기고를 보게 됐고, 미루고 피했던 비판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관후는 더민주가 정당투표에서 3위로 밀렸기 때문에 국민의당에게 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국민들(유권자도 아닌)이 더민주에게 제1야당으로서 파산 선고를 내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습니다. 이관후에게는 정당표에서 3위로 밀린 것이 지역구에서 1등한 것을 무력화시키고도 남는 모양입니다. 그에게는 유권자들의 교차투표와 세대별 투표에 영향을 미친 온갖 요인들과 승자독식의 소선구제는 언급할 가치도 없나 봅니다. 





그는 또한 '더민주가 '전라도당'이라는 색채가 엷어졌기 때문에 전국전당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관후에게는 경북과 광주·호남은 전국에 들어가지 않는 모양입니다. 초딩보다 못한 자의적 해석은 '더민주의 비전은 호남을 버릴 때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됐다'는 것까지 마구 달려갑니다. 이 정도면 정신병자의 수준에 이르렀다 할 수 있습니다. 한국현대사와 제1야당의 역사를 모조리 부정하는 이런 단세포적 분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제멋대로의 비약만 가득한 이관후의 주장은 '기실 호남은 호남 출신의 대표를 당선시키고자 한 적이 없고, 대의명분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으며, 집권능력만 본다'는 낡아빠진 논리로 호남 비하(비열한 말장난)까지 나아갑니다. 그는 김종인을 영입한 사람이 문재인이라는 것은 빼놓은 채, 김종인의 오만방자한 닥질 때문에 3월초까지 호남에서 앞서 있었던 지지율을 모두 다 까먹었다고 주장(이 부분은 필자도 동의)합니다. 



이때 이탈한 광주·호남 유권자의 정당표가 국민의당으로 옮겨가면서 기사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는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석수가 6~7석에 그쳤다면 지금과 같은 세력을 과시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관후의 김종인 비판에는 100% 동의하지만, 그것이 국민의당 비례대표 당선자 절반으로 줄었다면 '지금과 같은 세력을 과시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지 논리적 정합성을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양자역학적 정치경제학이 세를 넓히는 2016년에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도 제시하지 않는 논리적 허술함이란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관후의 막가파식 논리 전개가 여기에서 그쳤다면 그래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김종인이 국민의당을 도왔다'는 제대로 된 비판에서 '광주가 원한 것이 부산에서 새누리당과 처절하게 싸우는 것이었기에, 문재인은 광주를 무시했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문재인이 김홍걸과 광주를 방문했을 때, 한 할머니가 '호남을 믿고 부산에서 더 힘써주세요'라는 피켓을 들고나왔는데, 이것을 광주 전체로 확장하면 이런 결론은 가능합니다. 이관후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 있는지 '오마이TV'가 동행취재한 영상을 아무리 돌려봐도 이런 결론의 근거가 될 만한 추가적인 내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관후는 이런 결론을 토대로 문재인의 광주방문이 호남의 민심 이반으로 이어져 국민의당의 광주·호남 독식을 초래했다고 주장합니다. 대단히 조중동스러울 따름입니다. 



이관후는 부산의 결과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수많은 여론조사업체들이 새누리당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터무니없는 선관위의 규제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시점에서 발표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이관후의 주장과 정반대로 나옵니다. 객관적인 데이터와 통계마저 무시하는 그의 결론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명제가 떠오릅니다. 그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근거는 다음과 같은 21일자 <전남일보>의 주장입니다.

     


"문 전 대표의 (호남순례를) '김홍걸 마케팅'으로 평가절하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문 전 대표가 냉랭한 호남 민심을 만회하기 위해 김 위원장을 '정치적'으로 앞세운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또 문 전 대표가 호남참패에도 불구하고 자중하거나 반성하는 모습 대신 자신의 대권에만 의식한 행보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관후는 한글 공부부터 다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판이 있다'와 '지적도 있다'는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을 말하는 표현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가 기고의 모든 부분에서 논리적 비약을 일삼았던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비판하기 위함이라도 '이 정당의 지지율은 총선 직전 불과 한 달 사이에도 큰 폭으로 움직였고, 우연히 선거 직전에 상승했을 뿐'이른 것에서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여론조사기관의 수준이 형편없다고 해도 '우연히 선거 직전에 상승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손발이 오그라들어 읽는 제가 창피할 정도였습니다. 필자는 여론조사결과가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전문가에게 자문까지 구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총선이 끝난 후 많은 여론조사기관들이 내놓은 제대로 된 결과들은 절대로 '우연히'라는 단어로 폄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기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관후는 '여소야대를 만드는데 야당에서 잘 한 사람은 거의 없고, 이 지경의 여야 정당들을 두고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국민이 위대했다'는 사탕발림 뒤에, '국민들은 야당이 국회를 장악해서 한국사회의 문제를 좀 주도적으로 해결해보라고 기회를 주었으며, '헬조선'이라는 한국사회의 불평등, 고령화, 일자리와 복지 문제에 대해 청와대와 여당이 잘 대처를 못했다고 평가했고, 미덥지는 않지만 야당이 한 번 해보라'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이번 글을 정독한 분들이라면 눈치챘을 것입니다. 이관후는 기고의 초입에서 '국민들이 더민주에게 제1야당으로서 파산 선고를 내린 것'이 총선 결과라는 주장했으면서도, 정반대의 결론으로 글을 마치는 용감무쌍한 전복적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의 논리적 모순은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호남은 오로지 집권능력만 본다는 통념에 근거해 문재인과 안철수가 손잡고 정권 교체를 이루라고 합니다. 



결국 '도로 새정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이관후의 최종결론입니다. 살다살다 이처럼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기고는 처음 봅니다. 필자가 경향신문 구독을 끊은 것이 정희준의 형편없고 광기어린 친노비판 때문이었는데, '패권주의 논란'에 이어 이관후의 기고까지 접하며 <프레시안>도 완전히 끊어야 할 판입니다. 김종인은 즉각 사퇴하고 사과를 해야 하며, 박경미 당선자도 사퇴해야 한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나 극단적입니다.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이라는 이관후가 이번 기고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지만, 글쓰기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도 지키지 못한 이따위 글로 누구를 설득하고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매체에 기고를 하고 어떤 내용을 담던 개인의 자유고 존중해야 하지만, 사실관계 확인도 부족하고 기본적인 수준의 퇴고도 거치지 않은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글은 자신의 얼굴에 침뱉기를 넘어 <프레시안>의 수준까지 땅바닥에 처박는 일입니다.   



필자가 노무현의 정신을 공유하는 친노이고, 문재인의 열성지지자라 해도 이처럼 허접한 글은 분노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통하는 분석이 저기에서는 통하지 않는 상호모순적 이중성이 이번 총선이 결과라고 해도 전문가의 분석글마저 논리적 모순과 비약을 보인다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관후의 정치적 성향을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진보적 성향을 지녔다면 사유의 깊이를 늘리고, 쓰레기 같은 책이나 사설에 근거하지 말고, 보다 충실한 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학자를 자처한다면, 객관적인 데이터와 호남의 결과에 미친 다양한 변수들을 다 살펴본 다음에 글을 써야지, 강준만류의 저질 정치평론을 논리적 근거를 삼거나 자신의 희망사항만 나열하는 그런 글들은 피했으면 합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진보가 분열을 일으킬 만한 요인은 모조리 나왔기 때문이며 최신 과학기술에서 보여주는 성취들은 진보가 일치단합하지 않는 한 인류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제발, 세상을 다양하고 통섭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그노시스 2016.04.24 13:39

    귀한글 감사히 보고있습니다.
    프레시안도 이관후따위의 수준이지요.

    • 늙은도령 2016.04.24 17:56 신고

      정말로 문제입니다.
      진보매체들이 돈이 부족해서인지, 콘텐츠가 형편없습니다.
      이관후의 기고는 글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것이어서 기절할 노릇이었습니다.
      프레시안에 올리는 글이니 그렇게 막섰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서강대학교 정치연구원의 수준이라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진보학자들의 멈춰버린 성장을 질타했습니다.
      이들은 최근의 책과 연구만이 아니라 고전부터 모든 것들을 공부하고 성찰해야 하는데 지극히 좁은 영역의 지식 가지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니 수준이 형편없을 수밖에요.

      특히 강준만류의 '싸기지진보'론은 저질이다 못해 자해의 수준입니다.
      비판의 철학적 깊이가 너무나 형편없어서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내던졌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무엇이 싸가지인지, 진보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유권자들의 변화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고루하고 편협하고 교조적인 비판만 늘어놓으니 안철수가 이렇게 과포장되는 것이지요.

      이런 자들을 모조리 쓸어내야 하는데...
      에고, 건강의 문제 때문에 조금씩만 하고 있습니다.
      진보는 발전적 해체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조립해야 합니다.

  2. 耽讀 2016.04.25 08:49 신고

    이관후 다른 글도 보니 알 것 같습니다. 비난만 할 줄 알지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자질도 없는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교수들 글입니다. 교수들이 행정과 정치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앉았을 때 무능합니다. 이관후도 그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호남을 파악하는 눈과 능력 조차 없고, 민심을 읽는 자질도 없습니다.
    민심은 이관후도 심판했습니다.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 늙은도령 2016.04.25 16:34 신고

      글 자체도 모순투성이고 오류투성이입니다.
      이런 자들이 진보학자라고 떠들어대니 한심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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