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찾사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써 깨어있는 시민들은 혜경궁 김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정렬 변호사가 있는 동안을 통해 진행하고 있는 궁찾사의 소송은 저를 포함해 1,437명이 국민소송단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 소송인단의 1차 추가모집에 1,500 명 정도가 참여했고, 2차 추가모집으로 총 5,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할 것으로 보이며,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정렬 변호사의 트윗들과 궁찾사의 국민소송인단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트친이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소송인단의 숫자에 경찰도 많이 놀라는 눈치인가 봅니다. 저는 소식을 받는 위치에 있느라 정확한 진행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두 분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혜경궁 김씨의 정체를 밝히는 수사는 느리지만 내실있게 진행 중인 것 같습니다. 증거가 많을수록 재판에 유리하기 때문에 놓친 것들이 있는지 전자기록을 끌어모으고 있고요. 



소송인단의 노력으로 경찰의 수사 속도도 빨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김부선에게서 관련 내용을 제일 먼저 취재한 김어준과 주진우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릅니다. 경찰 수사가 그들에게까지 이르면 더 이상 도망갈 구멍이 없으니 그때까지라도 침묵으로 시간을 끌려는 것 같습니다. 김용민, 김갑수, 이동형, 진중권, 서명숙, 미디어오늘 기자 등이 이재명을 감싸고 도는 것에 비해 직접 당사자인 이들의 침묵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나꼼수 시절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주류 기득권에 진입한 김어준과 주진우이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기만 할 것입니다. 잃을 것이 많아지거나 그런 것들을 수중에 넣는 방법이 떳떳하거나 깨끗하지 못했다면 더욱 두렵겠지요. 하자투성이 이재명이 당선되면 한 숨 돌릴 줄 알았는데, 전해철에 이은 궁찾사의 소송까지 더해진 것과 함께 인격과 성품이 워낙 바닥인 이재명이 연이은 실족을 거듭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겠지요. 





국민소송인단의 일인으로써, 소송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노통을 통해 사람사는 세상의 일단을 처음으로 경험한 우리는 사람이 먼저인 문프의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합니다. 그를 찬양하고 우상화해서 아니라 문프의 성공을 통해 상식과 원칙, 정의와 평화, 야심과 배려가 넘치는 사람사는 세상에 이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문프 임기 동안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기틀이 확고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평화협정 체결이 문프의 임기 내 체결되면 최상이겠고, 3통 문제가 해결돼 남북경협이 본격화될 수 있으면 현재의 이익이 아닌 후손의 미래를 위해서 최상일 터이고요. 궁찾사를 비롯한 문파는 상식을 얘기합니다. 칸트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종합적으로 비판한 다음에 내놓은 『판단력 비판』을 통해 정립해놓은 'common sense'(세계시민정신의 근간,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는 선험적 종합판단에서 나온 '선한 의지'로 귀결된다)의 21세기 버전인 노통과 문프의 상식을 이성적 판단과 실천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수 있는 것이지요. 문파는 이재명과 김어준처럼 권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이런 힘겨운 싸움을 이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혜경궁 김씨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 바로 상식을 찾아가는 길이고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볼 생각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P.S. 3편에 이르는 칸트의 비판 시리즈는 세 개의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순수이성 비판』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고, 『실천이성 비판』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판단력 비판』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모든 철학의 주제인 존재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 질문은 이성적 인간의 삶을 고찰한 것이며, 세 번째 질문은 이성적 인간의 능력를 고찰한 것입니다.



제 능력으로 세 편의 책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기억나는 것도 별로 없다), 이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칸트는 플라톤 이래로 하늘에 머물러 있던 철학(형이상학)을 인간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근대의 최대 업적인 개인의 발견은 칸드의 철학이 없었으면 껍데기에 불과했을 것이며, 시민사회를 발견하고 정립한 헤결에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칸트는 모든 자유주의자의 나침반 같은 존재입니다. 

 

바른정당 의원 13명이 국정농단과 강간미수범의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갔습니다. 용으로의 승천을 말했으나 실제는 지렁이에 불과했음을 증명한 이들의 비루한 회귀에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와 역주행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민주주의였던 아테네의 아고라는 모든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주장을 겨룰 수 있었고, 공통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아고라라는 광장에 모든 시민이 모일 수 있을 만큼 소규모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영토, 인구, 주권'으로 구성된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아테네식 민주주의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영토가 커진 만큼 인구가 늘어났고, 추구하는 이익과 이해관계가 복잡해졌기에 모든 시민이 참여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최초의 근대 민주주의국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으로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국가들이 시민을 대표할 대의자(국회의원)를 뽑아 국가의 운영을 맡기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루소가 '인민의 주권은 누구에 의해서 대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프랑스 인권 선언 제3조는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그 국민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조직이나 어떠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위임받지 않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며 대의민주주의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미 헌법을 만든 매디슨의 주장처럼 '정치적 지혜를 가진 것으로 공인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정부의 권력을 위임하는 것만이, 넓은 지역에 분포한 국민 전체를 위한 진정한 이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엘리트적 요소가 강한 대의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다만 프랑스 국민회의(1791년)에서 "어떤 지역의 대표자로서 지명된 사람은 그 특정 지역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전국의 대표자인 것이며,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의 압력이나 주문을 강제받을 수 없다"고 규정한 것처럼, 전국의 지역구에서 뽑힌 국회의원들은 자신을 뽑아준 지역구민에게 직접적인 의무를 지지 않으며, 그들의 특수이익을 반영하도록 강요되지도 않아야 합니다. '인민의 통치'를 기본으로 민주주의의 원형이 대의민주주의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려면 이것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지독히 이상적이어서 현실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민의 요구와 이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역구 하나만으로도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상황ㅡ그 이유는 먹고 살기에도 바쁜 시민들이 매일같이 만들어지는 법령, 조례, 규칙, 시행령 등을 살펴보며 일일이 투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ㅡ에서 재선을 목표로 하는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민의 요구와 이익에서 자유로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성주구민을 욕보이는 자유한국당 양아치들은 예외지만!).    

 

 

 

 

이 때문에 현대의 지역구의원들은 지역구민의 요구와 이익을 국회에 반영해야 하는 반응성, 개개인이 헌법기관으로서의 국민을 대의해야 하는 대표성, 직업정치인으로서의 연임을 목표로 하는 연임성을 모두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역구의원들은 국민 전체를 대의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지역국민의 요구와 이익을 대의하지 못하면 자신의 정치생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지역구의원들은 재선에 성공하려면 지역구민과 연결돼 있는 지역의 조직과 당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촛불혁명에 화들짝 놀라 새누리당에서 나와 바른정당을 창당한 의원들이 다시 자유한국당으로 기어들어간 것은 이런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 아무리 훌륭해도 지역구민과 조직, 당원들의 수준이 낮거나 각각의 요구와 이해가 다르면 재선은 불가능한 데, 철새 같은 바른정당 의원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지역, 세대, 계층, 직종, 성별, 학력, 선호 등등 온갖 이유로 나누어진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대의민주주의의 현실적 한계와 지역구 특성이 바른정당 의원들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직접민주주의를 꿈꾸었던 루소가 '인민은 투표일만 주인이고, 다음날부터는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며, "만약 신들로 이루어진 인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정부는 민주주의적일 수 있다. 그러니까 완벽한 정부는 인민에게는 가능한 것이지 않다"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 환장할 노릇은 미 건국의 아버지와 프랑스대혁명의 주도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정치적 지혜를 가진 것으로 공인된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지역구민과 당원의 이익과 요구, 자신의 재선에만 매몰된' 양아치·조폭 같은 놈들이 국회의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의 끝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엇비슷하게 평등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면서 자신의 영혼을 좀먹는 째째하고 진부한 쾌락들을 추구하는" 인민들로 해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로 빠질 수 있다며,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명제를 정립했습니다. 여기에 자신의 재선만 생각하는 국회의원들로 넘쳐나는 대한민국이라면 헬조선으로의 몰락은 다영한 것 아니겠습니까? 

 

 

 

 

노무현을 부관참시는 것으로 표를 긁어모으고 있는 홍준표의 자유한국당으로 14명의 바른정당 의원들이 회귀한 것을 대놓고 욕할 생각은 없습니다. 안보와 국익마저도 자신의 재선을 위해 악용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린하고 폄훼하는 자들을 계속해서 뽑아주는 유권자들이 있는 이상 그들을 욕해봤자 그 자리를 채울 놈들도 똑같은 자들일 수밖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칸트가 말한 개인, 즉 자유를 완벽히 향유할 수 있어 자치가 가능한 개인을 기준으로 하지만 그것은 이상일뿐 현실에서는 각종 제약들이 개인들을 권력의 떡고물에 얽매이게 만듭니다. 

 

 

5월 9일의 투표에서 압도적인 정권교체에 실패한다면 거기에 맞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박정희가 다시 살아나고 박근혜의 재기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당선되는 세상이니 한국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촛불혁명은 그 자체로 의미있고 위대한 여정이었지만, 그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슬아슬한 정권교체라면 그것에 맞게 촛불시민의 꿈을 재조정하고, 되살아난 기득권과 다시 한 번 힘겨운 싸움을 이어갈 수밖에요.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통합이란 없습니다. 각가의 개인들, 그들의 집합인 다양한 공동체와 집단, 정당 간의 갈등이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나 전체주의로 넘어가니까요. 갈등을 인정할 때, 민주주의는 그로부터 바람직한 성과물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오직 국민(유권자)의 수준이 깨어있어 행동하는 시민에 이르면 인민의 통치라는 본래적 의미로서의 민주주의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으며, 박근혜와 홍준표로 대표되는 지긋지긋한 70년 적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재인-대통령

#압도적-정권교체

#홍준표가박근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둘리토비 2017.05.03 00:02 신고

    저는 이 말밖에 할 수 없네요.

    "이게 뭡니까!!"

  2. 다온맘 2017.05.03 01:40

    안민석 의원말이 정답입니다. 위장이혼! !
    으이구. . 아무리 정치철새라지만 정말이지 이건 아니네요. 저도 유승민 후보를 찍지는 않아도 응원합니다. 최소한 남은 바른정당 의원들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보수로 남아주길 바랍니다. 그나마 제 지역구 의원인 주호영은 남았네요. 이걸 좋아해야 할 일 인지. . ㅎ ㅎ
    오늘도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늙은도령 2017.05.03 02:40 신고

      이번 사태로 촛불시민들이 다시 결집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자멸할 모양입니다.

      위장이혼이 정답이지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3. 공수래공수거 2017.05.03 09:33 신고

    정치 철새들입니다
    황영철은 또 번복할듯..아마 원내교섭단체 정족수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ㅋ

    • 늙은도령 2017.05.03 15:08 신고

      정치라는 것이 타락하면 끝이 없습니다.
      정치철학이 없으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4. 참교육 2017.05.03 17:52 신고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아이들 장남도 아닌 그것도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는 분들이 저능아 수준입니다.
    금방 한 입으로 한말을 도루 줏어 넣는 이 정신질환자같은 이 사람들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친박핵심인사들이 재입당을 반대하고 있다니 정치계의 미아신세도 몇 나올 것 같습니다.

    • 늙은도령 2017.05.03 18:08 신고

      그럼에도 저들을 찍어주는 유권자들이 있으니 답이 없지요.
      저는 유권자들이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들이 저런 미친 짓거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좋아라 하는 유권자들 때문입니다.

  5. 수원아재 2017.05.04 09:34 신고

    저들이 모여 당하나 만들면 될것 같습니다. 당명은 '낙동강 오리알당'


오늘의 썰전에서 필자의 관심을 빨아들인 것은 '정의'에 대한 전원책의 경험고백과 이에 대한 유시민의 반박이었습니다. 연인원 1600만 명이 참여한 촛불집회의 시대정신이 '정의의 실현'이었기 때문에 최근에 들어 정의론에 관한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은 까닭에 매우 짧은 에피소드였지만 저에게는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필자는 정치철학으로써의 정의론에 집중했지만, 전원책의 에피소드에서 나온 짧은 토론이 모든 정의론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의적절했습니다.       





자신이 변호하던 피의자가 집행유예 기간에 문제를 일으킨 것을 알게 된 후,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 검사와 판사에게 이실직고하고 재판에서 패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하며 무죄를 받아낼지 고민하다가 '정의 실현'의 차원에서 고백했다고 말한 전원책의 말에 유시민이 잘못했다고 반박하며 정의에 관한 짧은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유시민은 변호사의 역할 중에 정의의 수호자라는 것이 있어서 이실직고했다는 전원책에게, 그렇게 하면 제 역할을 못한 검사와 판사가 면책을 받은 것이라서 정의 실현에 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유시민은 재판에서 피의자의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검사와 판사의 몫이지 변호사의 역할이 아니라며, 자신이라면 무죄를 받아낸 후 관련 사실을 파악하지 못해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리지 못한 검사와 판사가 책임지도록 만드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했습니다. 축구와 야구에서처럼 오심도 경기의 일부이듯이 변호사와 검사, 판사 등으로 이루어진 재판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면 유시민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의로인으로부터 변호비용을 받는 변호사와는 달리 검사와 판사는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기 때문에 서류상에 나온 사실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검사와 판사라면 이후의 재판에서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시민의 주장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다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정의론이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남성 위주로 구축된 것ㅡ페미니즘 철학자들 덕분에 배려라는 개념을 더한 정의론은 더욱 발전했고 공정해졌고 보편화됐다ㅡ이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다만 일사부재리 원칙에 의해 해당 피의자를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유시민의 주장은 보편적 차원에서의 정의론에 반할 수도 있습니다. 해당 재판이 1심이라면 항고를 해서 이를 바로잡을 수 있지만, 최종심이었다면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변호사는 의뢰인으로부터 해당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진술받았다는 전제 하에서 변호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유죄의 증거를 알게 됐다면 이를 검사와 판사와 공유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을 위한 일이어서 전원책의 행위가 정의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론은 이렇게 완벽한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의 영역에서 가족을 거쳐 사회와 국가,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소크라테스학파 때문에 거의 모든 정치철학이 인간이 아닌 신처럼 고귀하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흘러갔지만, 칸트에 의해 신에게서 인간으로 내로온 이래, 수많은 정치철학은 개인과 사회, 국가, 남녀, 인종 간의 공정하고 공평한 자원 배분과 욕구 충족에 따른 자아 실현,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불평등과 차별 및 혐오, 반칙과 특권이 만연해 있는 헬조선으로써의 대한민국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었던 지난 5개월 간의 평화적인 시민불복종과 정치혁명은 인류가 꿈꾸어온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하는 위대한 여정이었습니다. 촛불집회를 관통했던 시대정신이 정의 실현으로서의 적폐청산과 국가개조였던 것도 정치철학적으로 접근하면 민주주의의 최고 단계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썰전에서 아주 짧게 언급됐지만, 전원책과 유시민이 다루었던 정의에 관한 에피소드는 어떤 후보의 시대정신을 선택할 것이냐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었습니다. 정권교체가 필수라면 당근, 문재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권 인수기간이 없다는 조기대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당이 발의한 '인수준비위 허용법안'마저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시민이 차기정부의 책임총리로 콜업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이고요. 



P.S.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사회주의에 이른 다음, 계급이 사라진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인 '자유의 왕국'으로서의 공산주의에 이른다는 역사결정론(유물론적 변증법) 때문에 마르크스가 정의에 무관심했던 것을 트집잡아 정의가 보수의 가치라는 세간의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유가 최고의 가치이며 침해불가능한 권리라고 주장한 J.S.밀이나 《웰던》과 <시민불복종>의 저자 조지 소로, 심지어는 칸트마저도 당시에는 진보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정의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며, 한국의 보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耽讀 2017.04.07 07:44 신고

    정의는 '절대'개념이 아니죠.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민주주의에 반하고 인간존엄성에 반하면 분명 잘못된 것이지요.
    군사반란자 전두환도 정당을 이름을 '민주정의당'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정의는 정권교체-적폐청산-민주주의 회복 아닐까요?

    • 늙은도령 2017.04.07 16:31 신고

      그렇겠지요.
      정의는 여러 차원에서 보는 것이니,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정의는 그런 것이겠지요.

  2. 공수래공수거 2017.04.07 09:24 신고

    보질 못했는데 다시 보기를 통해서라도 봐야겠네요
    저도 유시민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변호사는 우선 의뢰인을 우선해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7.04.07 16:34 신고

      정의는 그래서 상대적인 개념일 때가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것이지요.



최초의 알고리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윤리학》에서 나온 것처럼, 최초의 논리학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서 나왔다. 바로 이 삼단논법에 따르면 박근혜와 김종인은 부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연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진리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통설의 수준에서 보면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부부나 연인은 닮기 마련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으로 박근혜와 김종인의 관계가 부부는 아닐지라도 연인을 가능성이 높다는 첫 번째 증명을 진행해보자. 1단 : 부부나 연인은 닮기 마련이다. 2단 : 박근혜는 사드 배치를 반대할 것이면 대안을 내놓으라고 했고, 김종인도 사드 배치를 반대할 것이면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3단 : 따라서 박근혜와 김종인은 (정치적으로) 부부나 연인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는 두 번째 증명을 해보자. 1단 : 부부나 연인은 닮기 마련이다. 2단 : 박근혜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 나라를 일궜다며 대한민국의 소유권(여왕이나 절대군주처럼 통치)을 주장했고, 김종인은 다 망해가는 더민주를 자신이 살려냈다고 소유권(새대표가 뽑혀도 자신이 정한 사드 당론은 바뀌지 않는다고 못 박음)을 주장한다. 3단 : 따라서 박근혜와 김종인은 (반민주적인) 부부나 연인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증명을 해보자. 1단 : 부부나 연인은 닮기 마련이다. 2단 : 박근혜는 지난 총선에서 '진실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국회의원의 기준을 제시하며 사적공천을 자행했고, 김종인은 더민주의 대권후보가 대통령이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지 제시하겠다며 박근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3단 : 따라서 박근혜와 김종인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부부나 연인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여왕이나 절대군주인양 행세한 박근혜가 새누리당을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박살냈듯이, 김종인은 자신의 정한 대선후보의 자질까지 거론하며 더민주를 박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당대회를 성황리에 치러내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자신의 뜻에 반한다고 당권주자들까지 폄훼하는 발언으로 전당대회 흥행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대선후보가 자신이 제시한 기준에서 벗어나면 같은 방식으로 폄훼할 수 있다. 





심지어 이 발언은 사드 배치 철회와 공론화과정, 국회 동의를 요구한 문재인을 또다시 물먹인 것을 넘어, 사드 배치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지 않은 후보를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것이어서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 임시대표에 불과한 자가 새대표가 뽑혀도 사드 배치 찬성이라는 당론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당민주주의를 완벽히 부정하는 월권의 발언도 서슴지 않는데, 소속 정당의 대선후보를 폄훼하는 발언을 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칸트가 말했듯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외부의 적은 대비할 수 있지만, 아무리 약하더라도 내부의 적(정확히는 친구)은 대비할 수 없다. 사드 배치에 관해 각자의 견해가 다를 수는 있다. 그것 때문에 날카롭게 대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면 안되는 말이 있고, 넘어서도 안되는 선이 있다. 김종인은 너무나 자주 이런 것들을 무시한다. 김종인을 제어하지 못하면 내년 대선에서는 호남을 잃은 총선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손혜원은 김종인과 문재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문 전 대표가 (김 대표에게)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겠어요? 둘이 서로 배려하고 양보해야 되는 것인데 한 쪽만 계속하고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안 될 것 같아요. 김 대표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데, 노인은 변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전당대회에서 누가 대표가 되던 손혜원의 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6.08.08 09:16 신고

    김종인 생각만 해도 꼴 보기 싫은 사람입니다
    더민주당에서 안 보면 제일 속이 시원한 사람중의 한 사람입니다 ㅋ

    • 늙은도령 2016.08.08 09:17 신고

      저도요.
      이제는 이적질도 서슴지 않네요.
      어떻게든 확실하게 경고해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2. 참교육 2016.08.08 11:16 신고

    3단논법으로 풀어내는 두 사람의 관계 참 재미 있네요. 그런데 박근혜만 보면 밥맛 떨어지는데 최근에는 한사람 더 늘었습니다. 진짜 뭄씻어야겠습니다.

  3. 1 2016.08.08 16:56

    간찰스 사라져서 편해졌던 마음이 늙다리 하나 굴러들어오는 바람에 에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그만 집에가서 손주들 하고 놀아주며 여행이나 다니고 그리 좀 살지 왜 버티고 앉아서 꼬장을 부리나

    • 늙은도령 2016.08.08 16:59 신고

      김종인은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는 친미, 반공이란 사고가 굳어져 있고,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이 광적으로 강해 사사건건 딴지를 걸 것입니다.
      이번에 전당대회에 김종인이 밀어주는 자가 당선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4. 2016.08.08 23:40

    비밀댓글입니다



손혜원 당선자가 친노에 관한 글을 올렸습니다. 늙은도령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친노라는 사실을 숨겨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는 손 당선자의 글에 상당한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주 내내 약을 먹어도 설사가 멎지 않는 악성장염에 시달리느라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지만, 친노에 대해 얘기한 손혜원의 글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손 당선자는 유시민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친노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고 했는데, 노무현의 가치를 수용한 저 같은 친노가 노통을 지켜주지 못한 슬픔에 우을증에 걸렸다는 유시민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정치권 밖에 있는 친노는 조금은 다른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자가 친노를 대표하지도 대표할 수도 없지만, 정치를 업으로 삼지 않는 저와 같은 친노는 조중동의 프레임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친노로 지칭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의 가치를 정치철학적으로 말하면,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정의한 '일반의지'와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정의한 세계시민의 '공통감성'(Common Sence)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루소는 모든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반의지'를 통해 정의로운 세상을 꿈꿨고, 칸트는 '공통감성'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다면, 노무현의 상식은 반칙과 특권이 사라진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기 때문입니다. 



필자 같은 친노는 노무현에게서 인류사를 관통하는 보편타당한 상식을 봤습니다. 친노가 보기에 노무현의 상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돈과 권력, 태생과 지역 등에 따라 서열과 계층, 신분이 나뉘고, 그에 따라 반칙과 특권, 부패와 비리, 차별과 배제가 난무하는 힘 쎈 자들의 불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평등해서 자유로운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선한 의지로서의 상식 말입니다.



필자가 다양한 분야의 책들과 논문들을 읽었으면서도 지식인이나 지성인을 자처하지 않는 것도 제왕적 권력이 부여된 대통령에 오른 이후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노무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릇의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이 작아서 노무현을 따라하는 것이 너무나 힘겹지만, 필자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 사는 세상'의 일원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에 노무현의 가치를 실천하는 친노라는 사실을 숨길 하등의 이유도 없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신자유주의 천국에서 친노로 산다는 것은 세월호 희생자를 잊지 않는 팔찌를 손목에 끼고,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는 리본과 뱃지를 가슴에 달고,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스티커를 자동차에 붙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손혜원은 가장 슬픈 친노가 유시민 같아서 그에게 열광한다고 했지만, 필자 같은 친노는 노무현의 가치를 가장 잘 대변하는 유시민이 고맙고 자랑스러워 그에게 열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손혜원은 가장 아픈 친노가 문재인 같아서 그에게 의지한다고 했지만, 필자 같은 친노는 노무현의 가치를 운명처럼 받아들인 문재인이 고맙고 자랑스러워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손혜원이 주시하겠다는 친노는 노무현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을증에 걸렸다 해도, 5월이 오면 세상 곳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가치와 정신이 스치는 바람에도 묻어오기에 가슴이 뛰고 벅차오르기도 합니다. 



노무현의 사진만 봐도 눈가가 축축해지는 사람들이 친노라고 해도, 바로 그런 지극한 그리움과 신뢰 때문에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박정희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만들어진 신화의 크기 만큼 그에게 갇혀있어서 미래(와 미래세대)에 닫혀있지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화도 바라지 않기에 함께할 수 있으며 미래(와 미래세대)에도 열려있습니다. 



노무현의 가치는 '인민(시민, 국민)의 통치'를 구현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민주주의의 이상과 동일합니다. 서구의 석학들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절망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의 성찰에 동의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실천하는 친노는 굳이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한 근원적이고 정치철학적인 질문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필자 같은 친노는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성공과 좌절'을 똑바로 응시하기 때문에, 조중동스럽고 새누리당스러운 방법으로 승리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고, 김종인의 반민주적 행태에 분노했던 것입니다. 이명박근혜 8년 동안에도 노무현의 가치와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참담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이념이자 체제이기 때문에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노무현의 성찰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친노이기 때문입니다.

  


손혜원에게는 유시민이 가장 슬퍼 보이고 문재인이 가장 아파 보이는 친노이지만, 필자 같은 친노는 유시민과 문재인에게서 노무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슬픈 유시민의 말에 열광하고, 아픈 문재인의 운명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노무현은 비극적으로 생을 달리했지만, 문재인과 유시민, 안희정, 천호선, 김경수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필자 같은 친노와 악착같이 깨어있으려는 시민들과 대한민국의 희망인 미래세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는 그런 과정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것이며, 새롭게 거듭날 것입니다.  



친노가 되고자 하는 손혜원 당선자의 방문에 보다 좋은 글로 화답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지만, 악성장염에서 벗어나면 노무현과 문재인과 유시민이 공유했던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글로 오늘의 아쉬움을 만회하고자 합니다. 친노라는 단어가 이땅의 특권층과 조중동의 연합이 만들어낸 낙인이라고 해도, 그것에 주눅들지 않고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더없는 슬픔과 아픔에 빠져들지 않으며, 끝내는 일어나 노무현의 가치를 실현해낼 사람들이 친노라는 것을 깨닫게 됐을 때 손혜원 당선자도 친노가 될 수 있습니다.   



Welcome to 친노!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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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친노 2016.05.09 22:24

    저는 12년 총선과 대선에서 패배하는 것을 보며 문재인과 친노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했었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을 지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문재인과 친노로는 정권교체가 힘들것이라고 생각했죠. 안철수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지만 대선에서 당선되었다면 설마 박근혜보다 대통령직수행을 못했을까 하는 참담한 가정도 해보게 되고... 이번 총선을 통해 문재인 대세론이 형성될 수 있었는데 호남이 국민의당 지지로 넘어가 버리고... 당연히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하지만 너무 아쉽습니다. 아무튼 이번 총선 승리를 통해 노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되고 있어서 희망이 보입니다. 저 또한 참여정부와 친노의 과만 극단으로 강조하는 논리에 물들어 흐려진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mangrove 2016.05.10 13:29

      저도 사실 두 번의 대선 실패에 대한 원인을 좀 더 정확히 알고 싶다는 생각 입니다. 그저, 당차원에서 지원이 부족하고 현재 궁물당으로 넘어간 인간들이 적쟎게 영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고요.

  3. 박창현 2016.05.09 23:36

    쾌차 하시구요...
    친노라는 말보다 노빠..
    문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4. 하늘이 2016.05.10 00:21

    도령님의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는것 같습니다 ᆞ또 다시 건강이 악화 되셨군요ᆞᆞ저도 누구보다 많이 아파 봤기 때문에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압니다ᆞᆞ
    내가 없으면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ᆞ
    얼른 쾌차 하시길 바라며 전화 한번 드리겠습니다 ᆞ

  5. 우기수아 2016.05.10 13:39

    얼른 쾌차하세요~열씨미 읽고 공부하려합니다~^^

  6. 2016.05.10 19:13

    비밀댓글입니다

  7. 얼맘 2016.05.10 23:27

    제가 친노인 것이 전 자랑스럽습니다

  8. 좋은 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건강하셔서 더 행복해지시면 좋겠습니다

  9. Chris (크리스) 2016.05.13 05:00 신고

    빨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10. 둘리토비 2016.05.17 01:11 신고

    주위에서 대놓고 노무현 전대통령을 욕할 때 욱! 했습니다
    왜 아직도 입에 달고 평가하며 언론에서 끊임없이 친노,비노로 이슈화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전 노무현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구분되는 친노,비노 이런 표현이 넘 싫습니다~~~

    늙은도령님의 쾌차를 기원합니다

  11. 동우 2016.05.24 12:33

    오늘 아침 종편의 한 진행자는 "
    손혜원 당선자의 페이스북의 "국민의당, 어차피 봉하에 갈 거면 그냥 조용히 계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발언에 관해,
    불편해하는 기색으로 손 당선자에게 "나서지 말라"는 투로 비꼬는 듯한 발언을 하더군요.

    몇 몇 패널들은 추모식과 노무현 대통령에게 더 심한 표현도 하던데,
    최소한 예의라곤 없는, 사람들로 보이더라구요.

  12. 엽락귀근 2016.05.24 17:15

    좋은 글 넘 감사합니다. 조중동매 종편, 새누리, 이명박근혜, 새누리 2중대 쓰레기들이 뭐라해도, 우리 아이들이 바라마지 않는 희망찬 나라는 친노가 부활할때,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몸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13. 사람 2016.05.26 22:08

    친노여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14. 타임제로 2016.05.28 09:57

    친노라 할 수 없는 일반인이지만 노무현 전대통령님의 사진만 봐도 눈가가 축축해짐은 숨길수 없네요....좋은글 자주 읽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15. 알랙 2016.05.28 10:21

    노무현 트라우마 치료제 곧나온다

  16. 김지영 2016.05.28 10:22

    선생님...
    건강하세요~
    선생님의 글을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습니다!
    감사드려요..

  17. 김나행 2016.05.28 11:59

    손의원님 페북에서 선생님 글 접했습니다.
    말은 생각을 대변한다고 하는데
    말주변이 없어 표현하지 못 했던 제 생각을 시원하게 표현하신 선생님 글 공감합니다.
    공유해가겠습니다.
    쾌차하세요

  18. 미영 2016.05.30 22:51

    정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위로 받고 가요. ㅠㅠ

  19. 쇠북울음 2016.06.27 19:28

    우리는 아직도 노짱으로부터 위로받고 있습니다.

    해년마다 5월이면 노란 리본과 바람개비가 봉하마을을 물들이는 축제같은 제사를 모실 때면 또 다시 가슴뭉클한 위로를 받습니다.
    A.링컨을 뛰어 넘는 노 무현 대통령과 한 시대를 함께 뜨거운 숨을 쉬었고,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것만으로 지금도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5월이 지나고 다음 해 5월이 올 때까지 늘 되새김질 합니다.
    "그래, 5월 23일은 노짱께서 [탐욕과 반칙의 매판역도들에 대한 명예전쟁을 선포]하신 날이야!"
    "그래, 그 날을, 노란 바람개비를, 노짱을 잊지 못하는, 나는 늘 깨어있는 [친노]란 말이다!"

  20. Michael 2016.07.14 13:32

    잘 읽었습니다. 점심먹은게 언치지않을까 먹먹해진 가슴으로 위로받습니다.
    빠른콰유를 기원합니다. 그가 많이 보고싶습니다...

  21. 소나무 2016.09.01 10:58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습니다. 또 갑자기 눈물이 핑도네요....

    • 늙은도령 2016.09.01 11:13 신고

      이제 1년 4개월 남았습니다.
      문재인을 당선자로 만들어 노무현의 한을 풀어야지요.

 

 

 

호남과 광주의 위대함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지난 70년을 희생해왔으면서도 그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만델라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했고,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바람을 태풍으로 키웠음에도 호남인들은 '예산폭탄'과 희생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5.18광주민주화항쟁 동안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범죄와 약탈, 난동 등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민정신의 승리였다.

 

  

 

 

그런 호남이, 민주정부 10년의 버팀목이었던 호남이, 그 중심에서 진보 진영에 승리의 DNA를 심어주었던 광주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정치인들에 의해 야권 분열의 진원지로 떠올랐다. 마치 호남과 광주를 판돈으로 추악하고 파렴치한 한 판의 정치도박이 벌어지는 듯하다. 이놈도 저놈도 호남과 광주의 맹주를 자처하고, 호남과 광주의 민심을 거론하며 문재인 대표의 사퇴와 만신창이가 된 친노(야권을 분열시키는 조중동의 프레임)의 퇴장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낡은 진보 청산'과 '우측으로의 이동'으로 대표되는 외연확대, 정체불명의 끊임없는 혁신과 광주정신의 부활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낡은 진보'란 이분법적 사고를 가졌고, 그래서 싸가지 없는 진영논리에 갇혔으며, 패거리를 이뤄 패권주의(친노에게만 적용되는)를 지향하는 운동권 출신이며,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과 신보수주의자(뉴라이트)들을 정치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끌어준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무엇인가》에서 많이 보던 것들이다. 이들의 상대적 절충주의는 평등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식물상태로 만들었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독재가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안철수와 김한길, 박지원 등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중도로의 외연확장, 합리적 보수와의 연대라는 점에서 호남과 광주를 판돈으로 한국판 '제3의 길'을 갈 모양이다. 전 세계가 부정적 세계화로 귀결된 '제3의 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안철수 신당에 합류하는 자들은 정반대로 가겠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상위 5%에 하위 95%의 부를 이전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천국이 됐으니 그 흐름에 편승하겠다는 뜻이다. 

 

 

 

 

세상 누구도 호남과 광주의 선택을 비판할 자격과 권한이 없으므로 이들이 호남과 광주의 선택을 받는다면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우측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 호남과 광주가 지켜온 가치와 정신과 정반대에 위치하지만, 이들이 호남과 광주에서 기득권을 형성한 터줏대감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문재인이 호남과 광주에 아무리 호소한들 이들의 기득권을 넘어설 수 없다. 

 

 

결국 호남과 광주의 선택이 야권의 미래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호남과 광주가 원하는 변화와 혁신이 '제3의 길'이라면 한국의 우경화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프랑스혁명에서 구체화된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민주적 정의와 가치가 최소화되고,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을 울부짖는 자유방임 시장경제가 세습자본주의와 권위주의적 독재로 고착화되는 것이다.

 

 

칸트가 말했듯이 외부의 적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지만, 친구나 동료의 이름으로 내부에 숨어있는 적은 막을 방법이 없다. 호남과 광주의 선택이 가장 지혜로울 때 대한민국은 갈수록 우측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이 이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6.10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구름바다 2015.12.24 01:47

    부디 지금까지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최선을 다 해 왔던
    호남인들의 명석한 판단으로 가장 좋은 선택을 해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비록 민주화의 힘이 오로지 호남에서만 일어 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날 다른 곳에서 보여지는 지역주의에 기댄 민주화의 쇠퇴가 없는
    호남의 살아있는 민주의 혼을 다시 한 번 믿고 기대해 봅니다.

    올바른 선택으로 진정한 야성을 일깨우는 선택의 본보기를 보여 주기 바랍니다 !

  2. 참교육 2015.12.24 04:46 신고

    광주정신을 오염시키는 추악한 인간들의 반란입니다.
    광주를 살려야 하는데 개인의 이익을 위해 광주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좁은 안목으로 보면 역사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그러나 역사는 정의의 편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3. 협궤 2015.12.24 05:08

    호남이 그들 호구인줄 아나보죠? 선거때만 이용하고 선거끝나면
    나몰라라하는 작금, 전라도만 가난하게 살고 있네요.

    • 늙은도령 2015.12.24 19:29 신고

      전라도는 농업지대가 많은 것도 있지만, 현대사 70년 중 60년을 새누리당이 집권했습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전라도에 가장 많은 정부 지원이 있었지만 60년을 10년만에 만회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것이니....

  4. 공수래공수거 2015.12.24 08:28 신고

    며칠전 광주 518기념관에 다녀 왔습니다
    그때의 자취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탄압했던 무리들의 뿌리가 지금 여권임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걸 느꼈습니다

  5. 耽讀 2015.12.24 08:47 신고

    1980년 전두환에 저항한 광주, 2002년 노무현을 선택한 광주. 그리고 2015년 12월 광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시민'들은 같은 정신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정치인은 다릅니다. 2015년 광주 정치인들은 5.18을 팔고 있습니다. 새누리 수구와 별 다르지 않으면서. 언론들도 날뛰고 있습니다. 광주시민들이 35년 전 그 정신을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0여일이 대한민국이 희망이 있는 나라인지 가름할 것입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미래를 결정할 진짜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12.24 19:31 신고

      네, 이번에 승리하지 못하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야권이 호남 없이 생각할 수 없듯이 호남인들의 지혜로운 판단을 기다릴 밖에요.

  6. 바람 언덕 2015.12.24 12:40 신고

    그래도 호남유권자들은 언제나 위대한 선택을 해왔습니다.
    이번에도 그 분들의 선택을 믿어 봐야지요.

  7. 민초® 2015.12.25 02:39

    위대한 생각만으로 빵을 얻을 수 없다..
    얻으려은 치열한 욕심과 투쟁,
    누가 이기겠는가,
    세상 엔 정의 를 봐 줄 신은 그 아무대도 없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오늘!..

    • 늙은도령 2015.12.25 02:55 신고

      민주주의는 떠들고 행동하는 만큼 답해줍니다.
      먼저 주는 적이 없지요.
      그래서 대단히 어려운 게 민주주의입니다.



필자는 두 가지 의미에서 푸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하위 90%의 부를 상위 1%에게 이전(거꾸로 된 재분배)하는 정치경제적 과정인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스스로 무너지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푸코는 이것을 절감했던 것 같다.





많은 학자들은 모든 권위를 해체하던 푸코가, 해체작업이 뛰어날수록 자신이 지적 권위자로 자리 매김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없어 오랫동안 침묵했다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푸코는 모든 권위를 해체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권력의 구조와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최후의 권력을 대면할 수 있었고, 통치술로의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침묵했던 것이다.



필자가 보는 푸코의 침묵은 방향의 급전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삶에 대해ㅡ그것이 뭐라고 불리건 간에ㅡ인류의 해방에 대해, 진정한 구원에 대해 얘기하고자 (프랑스 특유의 지적이고 언어적인 유희를 벗어내기 위해) 이루어진 공백이란 생각한다. 필자는 여기에 갇혀 있고, 이것을 정리할 수 있어야 지적공동체의 첫 발을 뗄 수 있다.



나머지는, 오랜 침묵을 깨고 내놓은 《성의 역사》시리즈에서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맞서려면 각각의 개인이 저항의 지평선을 넓히는데 참여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배려와 자아 성찰 및 해방이다. 모든 개인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때, 그래서 자신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해방에 이르며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푸코의 삶정치).





푸코의 성찰처럼, 각각의 개인이 칸트(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탐구한 뒤, 역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고, 공존의 세상을 위한 방법까지 사유와 실천의 영역을 넓혔다)와 니체(대략적으로 말하면 칸트 류의 성찰에 이르러 인간으로서 최고에 이른 자가 초인이며, 그는 그 자체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며 정의로운 세상의 창조자다)가 혼합된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면 극소수가 독점하는 권력과 승자의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자발적 노예가 되지 않은 한 진정한 자유인을 속박할 수 있는 권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하위 90%가 소비를 줄이면 상위 1%도 무너지듯이. 마르크스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도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모든 자유인과 투쟁할 수 있는 권력과 승자란 존재할 수 없으니, 푸코는 체제를 뒤집는 혁명(맹자가 오래 전에 천명했던)보다 어떤 체제도 무력하게 만드는 개인의 해방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그렇게 폭력이 없는 혁명을 이루려했다. 그가 루소나 마르크스보다 칸트와 니체에서 희망을 본 것도 이 때문이다(공자와 맹자를 공부한 다음에 칸트와 니체를 보면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칸트에서는 인사상을, 니체에서 예사상을 볼 수 있다. 묵자는 홉스를 닮았다. 그는 강력한 주권을 가진 국가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근대적 인류, 즉 시민(추상화된 개념적 존재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와 대비되는 존재로써)은 침해불가능하고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지닌 평등한 존재며, 국가란 이것을 충족시키는 존재라는 것이 자유주의의 본질인데, 이것이 말의 성찬을 넘어 근대 이후의 현실에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유재산이 보장될 때 자유주의의 실현이 가능한데(그렇다고 무한대의 재산축적을 가능하게 만든 로크까지는 가지 마시라), 마르크스가 온갖 저작들에서 밝힌 것처럼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로는 무한대의 자본축적이 가능한 사적독점 때문에, 폴라니가 여러 저작들에서 밝힌 것처럼 자기조정 시장이란 허구의 아이디어가 초래하고 있는 종말 때문에, 자유주의가 꿈꾸었던 민주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나마 근대적 시민의 탄생과 함께 했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사회주의와 짝을 이루었던 시절에만 자유주의의 이상을 상당한 수준까지 실현할 수 있었다. 단군조선의 홍익인간과 동학의 인내천의 교집합과 너무나 닮은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적 성향을 지닌)에서만 시민적 덕목인 자유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평등하게 주어질 수 있었다



특히 좌우 양쪽의 버전이 있으며, 시대의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자유주의가 하위 90%의 부와 공공의 영역으로 나두었던 국가의 부를 상위 1%라는 지배엘리트(이들은 이익의 독점이라는 공통의 이해를 공유하기 때문에 계급적 특성을 띤다)에 이전하는 반동의 과정(상위 1%가 주도한 역계급투쟁)이라는 점에서, 부의 재분배를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제도들을 되살려내는 일이 시급하다.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맞서기 위한 푸코의 성찰은 대단히 중요하며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추상적 관념에 머물렀던 시민의 재구성은 시급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논의만 무성했지 제대로 구현되지도 못했던 시장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교합, 생태학적 고려에서 나온 다양한 문화의 병존을 되살려낼 필요성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최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2015.09.08 07:40

    비밀댓글입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5.09.08 08:13 신고

    저에게는 난해하긴하지만
    정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08 19:29 신고

      너무 쉽게 풀면 글이 너무 길어져서....
      조금씩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것이 될 것으로 봅니다.

  3. 참교육 2015.09.08 11:18 신고

    각개인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때...?
    참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사실으 현대인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잊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걸 깨어난다는 것은 사실 혁명보다 어렵지 않을까요? 너무 비관적인가요? 제가?

    • 늙은도령 2015.09.08 19:31 신고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소화해서 적절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배려가 먼저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배려하려면 성찰하고 진실돼야 하고,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저항해야 하거든요.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4. 백순주 2015.09.08 12:55 신고

    하고자 하시는 일을 시작하신다니 감축드립니다. 건강조심하시면서 이루시길 바랍니다. 100번까지는 못 읽어도 다녀가겠습니다.

    • 늙은도령 2015.09.08 19:38 신고

      최대한 쉽게 써야 하는데 그러면 길이 마냥 길어집니다.
      그래서 일단 압축적인 글로 시작했습니다.

  5. 앨리스 2015.09.08 19:26

    '지적공동체' 라는 것을 아직 저는 잘 모르지만 도령님의 활동을 지지하는 열열한 애독자가 될 것입니다ㅎㅎ^^
    제 짧은 소견과 경험으로는 무엇이든 완성된 후에 하려면 시간이 기다려 주지 않는것 같습니다.
    나아가면서 세상과 소통하면서 더 성숙되고 성찰되어지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읽는 공부로 평등과 상생의 진리에 도달하고 그 실천으로 매일 글을 쓰시는 도령님은
    정말 대단한 현자임에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저는 작은 봉사를 하면서 또 도령님의 글을 읽으며사회를 알아가고 있는데요^^;;
    사랑이든 봉사든 그냥 되어지는 것은 없고 자꾸 연습을 해야만 잘 할 수 있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소개하시는 많은 책속의 이론가들의 사회인식과 이론은 결국 그 사람의 의식수준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그 누가 높은 의식으로 이 세상을 구할것인가......

    • 늙은도령 2015.09.08 19:40 신고

      우리 모두가 세상의 주인입니다.
      그런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배려는 타인의 배려도 퍼져가고 자기 사랑은 타인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강해지고 충실해지면 세상 어떤 권력도 우리를 건들지 못합니다.
      각자가 진정한 시민이 될 때 세상은 변합니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고요.

  6. 고나 2015.09.08 20:00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렵지만 열심히 정독해 보겠습니다 ~

  7. base 2015.09.08 21:18

    수고하십니다. 노무현대통령께서 말씀하신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생각나네요. 요즘 주변을 보니 더욱 더 위축되고 암울해 보이는데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글로 애국하시고 준비하시는 일이 큰 열매를 맺기를 바람니다. 건강에 주의하시고..

    • 늙은도령 2015.09.09 01:56 신고

      네, 건강 때문에 글과 병행할 생각을 햇습니다.
      혹시라도 오프라인 모임이 원할하지 못하면 이렇게라도 풀어가야 하니까요.

  8. 덕산 2015.09.10 19:03

    요즘 글만 읽고 갔는데.. 오늘은 찬찬히 정독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주 인사드리지 못하지만 공감은 항상하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늙은도령님

  9. 청공(靑空) 2015.09.11 07:16 신고

    오늘의 유머에서 늙은도령님의 글을 알게 되어 이렇게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근 십년의 세월동안 공부가 업이었고, 지금은 공부하기 위해서 해외로 나와있건만..
    아직도 공부를 하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늙은도령님의 글을 보면서 세상을 보는 내 눈도 이렇게 깊어지고 밝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특히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전공분야만큼이나 식견이 탁월해야 하고, 그보다 먼저 바른 뜻과 정신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모로 좋은 가르침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변화를 포착하지는 못하겠지만... 늦지 않은 시간 내에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기술의 발달을 통한 발전과 위기 극복에는 한계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행태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지속가능한 발전 또한 없고...
    생활을 가능케하는 사회환경과 자연환경을 파괴시킬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개인의 해방, 인류의 해방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여러가지 접근과 실천이 요구되겠지만,
    무엇보다 교육의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근대 이후 가장 정체되어 있는 부분이 어쩌면...
    교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체제를 위해 구조화된 교육이 아닌 진정한 지성과 자유의 전달이 가능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성과의 가시성, 그에 따른 예산 확보 및 필요성 설득의 어려움, 그리고..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이러한 교육에 적합한 교육자와 교육체계의 구성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제 문제의식은 제가 발전시켜야 할 문제이지만, 한 번 말씀하시는 시대의 문제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떨까하고 적어보았습니다.

    올려주시는 글 열심히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글로서 함께해주시길 기원합니다.

    • 늙은도령 2015.09.12 15:48 신고

      교육의 중요성은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합니다.
      님의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의 교육은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며 구축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이제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성장과 개발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은 인류의 파멸을 불러올 뿐이지요.
      성장보다는 인간 중심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철학 등을 되살려야 할 때입니다.
      교육이 체제를 유지하는 하부구조에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열린 교육으로 바뀌면 어떨까 합니다.
      지구온난화, 발전과 개발의 폐해, 인간성의 상실, 소비지상주의의 문제 등을 가르치고, 자연과 함께 하는 공존과 상생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창의성을 살려주고 다양함의 가치를 알려줘야 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선택과 공동체 구성이 가능할 수 있도록 미래의 주역에게 열린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도 보다 환경친화적이고 생명친화적이어야 합니다.
      윤리적 과학과 기술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교육은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어서 저는 가급적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꾸준히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다룰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때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0. 하늘이 2015.09.11 18:03

    항상 깨어 있는 의식으로 주인된 자리에 있을려고 노력합니다 ᆞ도령님이 하시고자하는 지적공동체 응원합니다 ᆞ

    • 늙은도령 2015.09.12 15:49 신고

      네, 감사합니다.
      아주 작은 출발이라도 꾸준히 키워갈 생각입니다.
      건강만 허락하면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인용한 어느 생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만물의 척도로 존재했던 시간을 24시간으로 환산하면 마지막의 2초에 불과하며, 문명화 기간은 그 마지막 1초의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류는 그 찰나 같은 시간 동안 진보의 이름으로 고삐 풀린 과학기술과 모든 분야의 전문 지식을 총동원해 지구상의 모든 자원과 노동을 착취해 지구를 공멸의 위기로 내몰았다.





생물다양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지구에 존재했던 종들의 90% 이상이 그 마지막 2초 동안에 멸종됐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을 속출시키고 있는 지구온난화도 그 임계점인 2℃ 상승에 근접해가고 있다(하랄트 벨처의 《기후전쟁》을 보라). 예측불가능해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전 지구적 재앙은 국가의 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차별화되고 순차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도 인류가 대오각성 하는 것을 근거로 한 것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이산화탄소가 불러올 지구온난화의 사회적 비용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5배 이상 크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대륙과 국가, 사회, 계급,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상 최고의 빈부격차가 벌어진 이유를 설명한 후에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몇 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심각한 전망을 내놓기까지 했다. 자크 아탈리는 10년 전에 이런 현상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인간적인 길》을 내놓았고, 많은 지도자들이 ‘제3의 길’도 가보았으나 상황은 그들이 생각하고 바랐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보수 경제학자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을 통해 부의 불평등이 어떻게 심화됐는지 방대한 자료와 지독히 간단한 공식으로 입증했다. 



토마스 만 이래로 끈질기게 인류를 유혹하고 현재의 문제에 한 발 물러서게 만드는, 우리 모두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언제나 자본과 권력이 선취해 자신의 신무기로 만들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에게는 나쁜 결과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유토피아가 보여주는 달콤함이란 미래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라는 현실도피의 한 형태로 나타나거나 억압과 착취에 순응하도록 만든다(특히 네그리의 《혁명의 만회》와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래리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를 보라).





대체 인류 역사의 마지막 2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그 2초의 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근의 250년 동안, 더 정확히 말하면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수인 부정적 세계화(신자유주의)의 3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기에 인류의 문명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성장과 개발이 꾸준히 이루어진 인류 진보의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있어 인류는 비대칭적 종말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까?



영원한 진보를 추동하는 과학과 기술-경제적 관점이 어떻게 테크노폴리화 되면서 세상을 파국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지 살펴볼 때 우리는 그 이유의 일단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직선적인 성장만 인정하는 지배와 착취의 사회철학이자 사회공학인 계몽의 변증법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소외가 급진적 자살관이나 자아의 완전한 고립과 타자에 대한 적대적 배척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개발은 왜 진행될수록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높아지는지, 개발의 결과가 지구적 차원의 퇴행으로 이어지는지, 이런 부정적 사례들이 가시적인 형태로 널려 있는데 왜 시민이라는 계몽된 인간들은 동물적 쾌락과 철저한 순응에 빠져드는지, 그런 악순환의 고리와 구조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분명 세상은 발전해왔다고 하는데 인간 생존의 조건인 삶의 궁핍함과 초라함은 자기 파괴적 단계에 이르렀으니, 그 모순된 현실(개발의 역설)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인류가 저지른 일은 인류가 아니면 풀어낼 수 있는 존재가 없고(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보라), 과거에 대한 반성적 고찰 없이 매번 처음일 수밖에 없는 현재를 미래에 투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성장과 개발은 파괴적 결과로 이어지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를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를 이토록 망쳐놓은 인류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대반격 앞에서 빈곤과 결핍의 중하위층부터ㅡ물론 상류층도 피해를 면할 수 없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다ㅡ회복 불가능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근원적인 모순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파멸을 피하려면 과학과 기술-경제적 발전과 관료제 등에 의해서 진행되는 진보의 신화인 근대이성의 기원부터 시작해 최근의 30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해체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에서 살펴봐야 한다. 동시에 국가의 전체화하는 경향과 개인화하는 경향을 살펴봐야 하고, 푸코로 대표되는 사건 위주의 단절과 분절, 충돌과 상호연관 및 권력 작동으로서의 통치술의 변천과 같은 미시적 접근,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와 피케티 교수가 《21세기 자본》에서 다룬 것처럼 거시적인 접근도 해야 한다. 


 

특히 독일에서 시작돼 영국과 미국에서 변형된 시장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살펴봐야 하고, 타락한 방송과 신문을 대체하고 있는 포탈의 역할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미국이라는 방패막이를 이용해 거대금융집단과 초국적기업들, 미국의 NSA와 CIA처럼 각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이 인류를 감시하고 지배적 이익을 유지하려는 빅데이터 구축과 그것의 군사와 외교와 통상 및·경제적 활용에 대해 고민을 하고, 그에 따른 프라이버스 침해 문제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이런 일들은 사회적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지만, 최소한 고발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시사회의 등장은 현재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구글과 똑같은 꿈을 꿨던 필자가 장담할 수 있다). 개인의 행동이 예측되기 시작하면 감시사회는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의 내밀한 삶 깊숙이 파고들어 전제적 행태를 보일 수 있고, 최소한 경제적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악의 근원인 미국의 연방정부(연방준비제도를 포함한)를 장악하고 있는 전 지구적 통치엘리트와 UN 및 각종 국제기구와 국제사법제도, 월가와 런던의 금융 세력들, 이들의 그림자로 전체를 조율하고 있는 극소수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과 모든 것을 쇼로 만들어버리는 대중매체와 영상산업, 권력과 자본의 시녀와 나팔수 역할에 충실한 언론(특히 방송)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자아와 전체를 통일시켜ㅡ이것은 책략이라는 술수가 내재해 있는 이성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이고, 후대에 의해 위대한 칸트의 관념론이 비판받은 이유다ㅡ이성의 지배를 공고히 한 칸트의 관념론을 넘어, 주체와 객체에 대한 치열한 공방 속에서 더 이상 생각을 밀고나갈 수 없어서, 계몽에 의해 완성된 시민인 자아(주체와의 차이에서 나오는 특수성의 담지자)에 대해서 전체로서의 사회(또는 체제로서의 객체로 보편성과 영원성의 담지자)의 우위를 선언한 헤겔의 변증법적 낙관론, 오직 노동자의 구원에만 집중해 자본에게 세계를 석권하는 길을 열어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 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5년, 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 사회를 바라볼 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세계사적 사건인 스탈린의 굴락과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일본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탄과 홀로코스트의 발전된 재현인 베트남전쟁, 소비지상주의와 ‘테러와의 전쟁’을 증거를 조작(한국의 국정원처럼 미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조작하고 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부시와 블레어가 요구했던)해서 제멋대로 선언한 9.11사태에 대한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 폭력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이자 우월한 인종으로서의 백인의 천국을 꿈꾸는 신보수주의자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또한 미국의 악마성을 가장 잘 드러낸 2008년 신용붕괴와 대마불사를 확인한 천문학적인 보조금 지급, 무기력한 유럽을 상징하는 장기적인 경제위기, 독일의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제3제국을 떠올리게 만드는 뒤집혀진 유럽, 역사의 비극은 더 큰 단위로 되풀이될 뿐이라는 3.11 일본 제1원전 폭발, 군국주의적 재무장을 통해 1등 국가로 재도약하려는 아베의 광기어린 부활, 부정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세력의 힘이 너무나 미약함을 입증한 시애틀 세계화포럼 반대시위와 2012년의 ‘성난 사람들’의 ‘점령하라 운동’의 초라한 결말 등에 내재돼 있는 인류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부정적 세계화에 적극적인 나라일수록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과 그들의 그물망이 지구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커졌고 촘촘해졌으며 가벼워졌고 그래서 그만큼 유연해졌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곳곳에서 지구온난화가 심해짐에 따라 더욱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기상이변과 사막화, 물 부족 사태와 바다 산성화, 전 방위적인 생태계파괴 등이 파시즘적 속도로 이루어낸 무차별적인 개발과 성장의 역설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성장하고 개발할수록 지구는 파괴되고 불평등이 늘어난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봉포스트 2015.01.19 20:48 신고

    아..유익하면서도 재밌네요.
    잘 읽다 갑니다!

  2. 참교육 2015.01.19 21:20

    자멸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자연파괴에 대한 보복이 곧 밀어 닥칠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 늙은도령 2015.01.19 22:15 신고

      자업자득이지만, 상위 1%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구온난화의 피해가 극단화되지 않는 한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1%에서 대부분의 생존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에도......

  3. base 2015.01.20 01:55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도령께서 영화평을 하신 어느 시점에 제가 '설국열차'를 언급했더니 마르크스로 답변하시더군요. 그런데 요즘 점점 더 그 영화가 생각난는지 모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그래야 훌륭한 글로 애국하시고 저 같은 사람이 살 만한 가치와 의미와 희망을 가지거든요. 오늘 한 잔 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1.20 02:50 신고

      설국열차의 엔진은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신성한 엔진이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말하고요.
      맨 뒷 칸에서 앞 칸으로 가는 과정은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계층의 피라미드를 거슬러 올라가는 혁명을 말합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가 포함돼 있는데 그 핵심에는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내재돼 있습니다.

      님의 댓글을 보니 설국열차에 대한 감사평을 길게 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한 번 시도해볼 가치가 있어 보이네요.

  4. 공수래공수거 2015.01.20 08:47 신고

    제 수준을 뛰어 넘는 글이십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수 없고 이기려 하는 방법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라고 저 나름대로 이해합니다^^

    • 늙은도령 2015.01.20 13:42 신고

      네, 공존이 중요합니다.
      공생과 함께요.
      과학기술의 발달이 미진할 때는 크게 일을 벌이면 안 되는 것이지요.
      이 글은 출판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조금 어렵습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정치적 판단이 선악을 가리는 것이 아닌, 선호의 문제와 인간 본성에 자리한 공통감각인 양심에 따른 실천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정치적 판단을 취미와 비슷한 것으로 파악한 칸트는 보편적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천적 판단이 보편적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천적 판단보다 힘을 얻을 때 세계는 영원한 평화(《영구평화론》)를 이룰 수 있다고 봤습니다. .





민주주의는 이런 면에서 칸트가 꿈꿨던 이상향에 가장 근접합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좋은 것을 추구하는 공통감각인 양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인간일수록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한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 현대의 민주주의입니다. 도덕과 숭고한 어떤 것인 양심에 따라 행위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절대다수를 이룰 때 민주주의가 가장 잘 작동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완결된 결과에 대한 선악을 판단하는 법적 판단이 결과를 이루어가는 과정인 정치적 판단과 같을 수 없음도 여기에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 구성원의 이성적 판단을 믿지 않으면, 그래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기본권에 제한을 가하면 독재를 거쳐 전체주의로 접어듭니다. 민주주의가 분출하는 목소리들로 시끄러울 때 가장 잘 돌아가는 것도 법적 선악의 판단이 아닌 시민의 정치적 판단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하는 현대 민주주의는 법적 판단을 통해 정치적 판단이 위축되거나 제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사의 자유를 표현의 자유와 동등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결사의 자유가 최종적으로 정당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국가에서는 법적 판단을 통해 정당을 해산하지 않습니다.





독일과 터키에서 법적 판단으로 제도권 정당을 해산 이래,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를 채택한 어떤 나라도 정당해산을 법적 판단에 맡기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의 나치를 경험한 유럽에서도 극우정당이나 극좌정당을 법적 판단을 통해 해산하지 않은 것도 국민의 판단을 믿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권력의 힘이 작용하기 일쑤인 법적 판단을 통해 정당을 해산하기 시작하면 시민의 정치적 권리는 극도로 위협받게 되고,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민주주의를 법의 지배를 수단화하는 권력의 수중에 떨어뜨립니다. 이는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욕보이는 행태입니다.



독재의 부활이나 회귀를 막기 위해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헌법재판소가 이념적 편향성을 지닌 인물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국민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 것은 그들의 판결문에 나온 통진당의 행태와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공안적 시각으로 보면 모두가 잠재적 빨갱이이고 어떤 정당이라도 해산이 가능합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법치주의)는 자유와 평등과 등치관계입니다. 둘은 상호견제와 균형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이를 통해 상호보완과 협력이 가능해집니다. 법의 지배가 강화될 때 민주주의는 축소됩니다. 여기에 더해서 법의 지배에 권력의 영향이 커지면 그것이 바로 독재며 전체주의입니다.



법적 장치를 이용해 정치적 판단을 내린 정부와 헌재는 국민을 욕보임으로써 민주주의를 파괴했습니다. 유신시대의 특기이자 전가의 보도였던 공안정국이 부활했습니다. 국가권력기관들이 떼를 지어 선거에 관여해 불법을 남발하더니, 이제는 부분적 사실로 전체를 재단해버리는 전형적인 사이비들의 방식으로 제2야당의 위치에 있는 원내정당을 해산시켜버렸습니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통진당이 원내에 진출한 원죄가 제1야당에 있다고 하니, 똑같은 논리를 적용해 해산시켜버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유신독재의 부활을 넘어 우파 전체주의를 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정부와 헌재가 손잡고 파시즘적 속도로 해내고야만 통진당 해산은 현대 민주주의국가에서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사례로 자리잡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산업화만 한 나라가 됐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4.12.23 08:59 신고

    지금 우리 국민들은 교묘한 독재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산업화도 후퇴하고 있습니다

  2. 넛메그 2014.12.23 13:59 신고

    칸트의 보편의지 개념을 빌려오셨는데 바꾸어 보면 이번 결정에 대해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지요. 또 지금의 헌재를 구성한 것도 국민 다수의 대표성을 가진 의회다수당과 집권수반입니다.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도 다 중요하지만 그건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는 한 민주주의 내의 법적 테두리 내에서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석기 등이 헌법에 명시된 민주적 가치를 부정하는 목적과 행위를 가졌던 건 이미 드러난 사실이고, 더 중요한 건 통진당 스스로가 그것을 당 차원의 행위였다고 변호한 사실이죠. 통진당은 충분히 위헌정당으로 판단될 여지를 남기고 있었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23 19:09 신고

      칸트의 원전을 읽어보세요;
      거기에 다 나와 있으니;
      그의 책을 보면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수 있는지 나와 있으니까요.
      보편의지는 칸트보다는 루소에 더 정확한 개념이지요.

      통진당을 좋아하지도, 대변할 생각도 없지만 정치적 해산이 답이지 독재식의 이념적 편향석으로 푸는 것은 죽어도 반대입니다.

    • 넛메그 2014.12.23 23:12 신고

      제 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셨나보네요. 사법독재 같은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칸트를 인용하신 건 알겠는데, 막상 통진당 해산 결정에 국민 중 60% 이상이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거든요. 헌재가 국민 정서에 반하는 판단을 한 게 아니라는 거죠. 8:1과 60%, 수치상 갭은 있지만 오히려 민의를 반영하는 쪽에 가깝지 않나요. 그렇게 따지면 칸트의 보편이성을 빗대도 통진당 해산 결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3. 넛메그 2014.12.23 14:09 신고

    아 참고로,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사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주제입니다. 순수한 학술적 의의보다는 서구 패권주의에 의해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부각된 이론이기 때문이죠. 최근에는 네오콘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는 게 이 이론입니다.

    • 늙은도령 2014.12.23 19:12 신고

      어떤 책이든 나쁘게 활용하면 나빠집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도, 하이데거의 허무주의도 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패권주의라도 그것이 평화를 담보한다면 얼마든지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지요.
      일본이 그랬고 한국도 어느 정도는 따라잡았으니까요.
      네오콘의 뿌리가 하태경 같은 자들입니다.
      네오콘의 이론적 토대는 샤무엘 헌팅턴이지 칸트는 아닙니다.
      그들은 칸트가 생존했던 시대의 프러시아의 상황이 좋을 뿐이죠.
      지들이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 넛메그 2014.12.23 23:28 신고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차용한 서구의, 정확히는 네오콘의 패권주의란 전쟁 개입을 불사하고서라도 전세계(주로 제3세계겠지요) 민주주의화 시키자는 겁니다. 때문에 매파의 중동 군사개입 같은 걸 뒷받침해주는 이론이죠. 누가 따라잡고 할 게 아니고요. 아 그리고 저는 칸트가 네오콘의 이론적 토대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네오콘의 뿌리가 스트라우스라는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4.12.24 00:07 신고

      스트라우스의 기원은 슈미트와 하이데거에 있습니다.
      또한 네오콘은 스트라우스만이 아니라 어빙 크리스톨도 있고, 하이데거의 변종도 있습니다.
      청교도 근본주의자가 핵심에 자리하고 있고요.
      스트라우스는 네오콘의 이론적 근거의 하나일 뿐이고 실천적 행태는 크리스톨과 청교도 근본주의에 있습니다.
      물론 진정한 출발점은 윌슨에게 있지요, 군산복합체를 창시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직접 사서 읽어보세요.
      그가 살았던 시대와 국가가 어떠했는지, 그래서 그의 영구평화론이 왜 판단력비판에서 나온 사유의 유희이고, 취미와 같은 형태의 것인지, 정치적 판단과 미학적 판단의 연관성은 어떤 것인지, 정치적 판단과 법적 판단은 무엇이 다른지 등등을.
      그러면 당신의 댓글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 테니까요.
      인터넷에 떠도는 잡다한 정보에 기대지 말고요.
      칸트의 원전이 읽기 어려우면 그것보다 조금 쉽게 풀어낸 것들도 많이 있으니 찾아보시고요.
      그나마 접근이 쉬운 것은 한나 아렌트일 것이고, 네오콘에 대한 이해는 많이 나와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번역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를 보면 네오콘의 정신적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 정화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상 끝입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토론합시다.
      일일이 답글을 달아서 설명하기에는 제 체력이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 넛메그 2014.12.24 00:54 신고

      글쎄요, 제가 웹서핑을 토대로 댓글을 달만큼 자신감이 넘치진 않아서요. 제가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복전을 정치학을 택했을만큼 제가 따라다녔던 교수님이 정치철학 전공자셔서 그쪽에 대한 강의를 많이 듣기도 했고 관심도 많이 가졌습니다. 마침 들었던 내용이 나와서 반가움에 언급을 한거였고요. 제 댓글이 그렇게 잘못된 내용 같지는 않은데요.

  4. 나뭇꾼 2014.12.23 17:09

    에휴....
    한숨만 나오네요
    그래도 이런 얘기하면 조그만 식당같은데서 노인네들한테 얻어마기 딱 좋지요
    언젠가 춘천 기차타고 가는데 옆자리 앞자리 앉아 얘기하고 가던 노인네들 그네 얘기들으면서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모 종교에서 교주보타 더 높게 모시던것 같더군요
    이후 가급적 대중교통에서 노인네들 자리 양보 않합니다

    • 늙은도령 2014.12.23 19:14 신고

      그런 노인들은 인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른으로서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경험을 후대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니까요.
      늙으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받아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을 비극으로 본 《오이디푸스》의 작가 소포클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말할 수 있는 어떤 의미보다도 낫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것은 일단 태어났으면 왔던 곳으로 가능한 한 빨리 되돌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지고 와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태어났으면 빨리 죽는 것이 태어나지 않는 것 다음으로 좋다고 말할 정도니 소포클래스가 보는 인생이란 비극 그 자체입니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삶에 충실하고, 뜻하는 바를 이룬다 해도 인생이 비극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한계까지 탐구한 위대한 철학자 칸트도 인생이란 “최상의 인간조차도 속 태우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집행유예와 같은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죽는 인간의 삶과 정신(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 도구적 이성 등)을 사유하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위대한 성찰에 이른다한들 인생이 행복일 수는 없겠지요.



철학은 반드시 죽는 존재인 ‘나-자아’라는 ‘인간-주체’를 보편적 개념인 ‘인류-역사’라는 종으로 확대함으로써 불멸성을 획득하는 사유의 과정이자 결과이지만, 철학자는 보편적 진리나 인류의 유토피아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산고의 고통에 비견되는 치열한 사유를 이어가야 합니다.



사유의 결과는 말이나 언어로 표현되는데, 치열하고 엄밀한 사유 때문에 “표현은 사유와의 씨름에 지치고 사유는 표현 때문에 녹초가 되지만, 표현은 사유를 통해 자체의 우연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철학적 결과물은 하나도 허투루 나올 수 없으며 정말로 고독한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철학자의 삶은 고독하고 힘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치밀하고 복합적으로 짜진 각고의 사유를 통해 나온 이론이나 진리와 사상이 반대가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 대가일수록 그 후대에 의해 가혹할 정도로 집중포화를 받습니다. 종교와는 다른 철학은 절대적 사유란 독과 같은 것이어서 폐쇄적이면 안 되기 때문에 쇄도하는 반대담론과 일전을 치러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앞의 철학적 결과물은 퇴출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철학자에게 인생이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상이며, 평생이 집행유예의 기간처럼 괴로울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인류라는 추상적 개념을 통해 영원히 이어질 종으로서의 인간과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류를 고양시키지만 자신의 삶은 정반대의 고독 속으로 빠져들어야 합니다.







건강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고 있는 저로서는 지금의 삶이 보너스로 주어진 삶이라 생각했기에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을 생각하면 온갖 생각과 상념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특히 지적공동체를 이루어보겠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암세포를 다 잡았지만 내일 찍을 MRI를 통해 암이 재발되거나 전이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온다 해도 이런 정도의 건강이라면 지적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지적공동체를 이루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판입니다. 암을 한 번 이겨냈지만, 생각보다 몸이 많이 약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을 뽑은 것이 정윤회 문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아픈 동안 정치에서 잠시 멀어진 채 철학책들을 집중으로 읽었고, 그 동안 뇌 속에 방치해두었던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검진결과가 좋게 나오고 체력이 회복되면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글로 올길까 합니다.



대가는 아니더라도 대가로 향하는 모험을 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글과 생각과는 다른 새로운 주제의 글들을 쓰고자 합니다. 경제는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어 세계가 공멸을 벗어나는데 합의할 때(향후 6~8년)까지 최악으로 향할 테니, 어떤 글도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생존이 중요합니다. 살아남아야 합니다. 소비를 줄이고, 최소한의 돈이라도 저축해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만족을 몇 년 뒤로 미루고 생존에 유리한 것을 확보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파국의 시기에 죽어도 좋다는 사람은 지금처럼 소비해도 됩니다.



전세계 상위 10%에게 60~90%의 종합소득세를 누진적으로 물리고, 대기업의 법인세를 올려 전세계적 경쟁을 완화시키지 않는 한 6~8년 후의 파국은 종말의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회복불능의 상태 말입니다. 경제에 대해 다른 어떤 정책도 현재의 사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류는 종멸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정치권은 포기했습니다. 특히 새누리당이 재집권하면 정치는 돌아보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인간적으로 문재인을 믿지만 그를 비토하는 세력이 너무나 거대해 그가 노무현 같은 기적을 이루어낼 에너지를 분출해낼지 자신이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 다음의 정부는 제2의 IMF를 겪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보수성이 새누리당으로 하여금 다양한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박근혜 조차 그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자업자득이지만 할 말 다했죠. 서민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정부와 양당의 합의는 신생정당의 출현이 간절함을 말해줍니다.







이런 현실에서 덤으로 주어진 삶을 살고 있는 저는 하늘이 허락해 건강을 회복시켜준다면, 지금까지의 글과는 달리 당파성에서 벗어나 철학적 성찰을 기반으로 한 각종 기득권과의 싸움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부디 형편없는 인생이고 삶이지만 주의 은총이 있어 건강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는 분명 세 번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생각보다 건강 회복이 더디고 장과 허리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허리상태는 침을 계속 맞으면 좋아질 것 같은데 체력이 버텨주지 못해 오히려 역효과를 받습니다. 침치료는 접었고 일단 암이 재발되거나 전이가 없다는 것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힘들더라도 운동량을 늘려 체력을 회복하고 동시에 허리치료에 집중하면 내년 2월초부터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실패와 좌절, 고통과 병으로 보낸 시간이 장장 40여년이라 정말 내가 건강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아득합니다.



저의 후원자인 동생도 이번 정기인사에서 삼성을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잔인한 기업의 말도 안 되는 경영권 승계 때문에 수많은 삼성맨들이 맨붕상태입니다. 참 지독한 기업입니다. 물론 애플에 비하면 덜하지만, 지금의 삼성은 애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동생이 삼성을 떠나면 저의 융단폭격이 강행될 것입니다.



1월 말쯤에 서울 광화문이나 강남역에서 후원자 모임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도 하고, 지적공동체의 대체적 줄기와 여러분들의 뜻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아프더라도 반드시 참석할 테니 어떤 분이라도 광화문이나 강남역에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으면 대신해주셨으면 합니다.



계약금이 필요하면 보내드릴게요. 그때 만나서 이러저런 서로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모두 연말 잘 보내시고 2014년의 마지막 달도 보람차게 보내십시오. 안산합동분양소에 한 번 가봐야 하는데...

세월호 아이들 때문에 2014년은 분명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죽음이 대한민국을 바꾸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며 그들의 사회적응에 따뜻하게 맞아줘야 합니다. EBS에서 ‘가족의 쇼크’로 세월호 부모님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반영했는데 많이 울었습니다.



인간은 망각이 동물이지만 선택적 기억은 더욱 선명히 커갈 수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을 잊지 말고 그들의 삶에 기도를 하면서 작은 도움이나 됐으면 하네요. 세월호 참사는 분명 대한민국을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의 몫이고, 이를 위해서는 보다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시대를 관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다음 번 글로 올리겠습니다. MRI 등이 힘들어 며칠 후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산다는 것, 즉 인생이란 비극인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출발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더더욱 비극입니다. 현대사회가 만들어놓은 신제품을 통한 순간순간의 만족을 통해 그런 만족이 영원히 될 것 같다는, 죽음을 회피하는 방식의 삶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헤겔이 비판했던(추종하기도 했던) 칸트를 푸코와 하버마스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계몽적 이성에 적대적 이성을 대립시켰던 니체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그것을 현대에 맞게, 비로소 이 시대에 맞게 풀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1월말이면 제 공부가 어느 정도 끝에 이르러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 지적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ㅡ그것이 성공을 거두던, 실패하던ㅡ글쓰기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저 스스로도 하나의 이론과 체계를 갖추고 보편적이고 독창적인 철학적 체계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독주분들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해드리고,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모여서 토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헤겔을 헤겔좌파와 헤겔우파적 관점에서 보는 것을 넘어 마르크스적 관점과, 칼 폴라니,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하버마스와 무엇보다도 벤야민과 푸코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데리다와 라캉 등은 아직 제가 공부가 부족한 상황이라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적공동체를 이루면 그 다음의 일은 잘 진행될 것을 자신합니다. 솔직히 모임을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게 제 주특기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단단해지면 그 이상도 가능하니 한 발 한 발 목표를 향해 나갔으면 합니다. 사회적 기업의 형태로 발전시킬 수도 있고 대안언론이나 공부방 등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적공동체를 구성하면 제가 제일 게으르고 문제가 가장 많겠지만, 그래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아무튼 저를 믿고 기다려주시는 분들게 깊은 고마운 마음을 보냅니다. 이 상태로 2주 정도 지나면 건강도 나아질 것 같아, 어느 분이든 용인에 오시면 제가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시고, 서민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이 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1. 공수래공수거 2014.12.01 08:29 신고

    쾌차하신 소식만 기다리겠습니다

  2. 박창식 2014.12.01 13:49

    참으로 절절하게 아픔으로 오는 글을 읽으며
    우선은 님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이미 기둥째 흔들리는 이 나라에 희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포기해서는 안되겠지요.
    힘내시길 바랍니다.

  3. 덕산 2014.12.01 15:40

    요즘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회현상을 보면서..
    어떻게 까지 여기까지 내몰렸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요즘 기업들도 살빼기를 하고 있는지라.. 회사 일을 보는것만으로도
    넘 바쁘게 지내네요.

    무엇보다 빨리 건강회복하시여 여러가지 지식 나누어 주시길 기다려봅니다.

  4. 여강여호 2014.12.01 19:42 신고

    지금은 다른 생각은 다 덮어두셨으면 합니다.
    건강부터 빨리 회복하셔야지요.
    죽음이라는 표현이 많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건강 완전하게 회복하시고 좋은 글로 뵈었으면 합니다.

  5. 바다구름 2015.01.06 06:40

    부디 건강을 회복하시고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처럼
    열심히 또 정확하게 세상을 해부하는
    좋은 글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6. 하늘이 2015.02.12 12:00

    어제 즐겨 찾기에 도령님을 올려 놓았습니다.
    도령님의 글을 읽으면 제안에 본성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다른방법으로 세상을 힐링하고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숨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려고 노력합니다.

    사람안에 신성을 깨우는 작업~
    항상 귀한글 감사드리며 건강 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7. 도락산송이 2016.01.26 13:07

    모든 버섯은 항암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표교버섯을 햇볓에 말려서 음식에 넣어 먹으면 최고라고 합니다. 버섯을 매일 조금씩 드세요
    마늘도 좋습니다 통째로 익혀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통씩 드세요 (껍질을 까서 마늘을 통째로 음식에 넣어 익혀서 드세요)
    지난번 얘기한 봉지커피 발효식초 계피가루를 해서 드셔 보세요 010-5464-7160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중요 합니다
    날이 풀리면 운동삼아 곡괭이를 가지고 가까운 산에 조금씩 하다가 한두시간씩 산나물 도라지 더덕 같은걸 캐서 드세요
    못 캐면 운동 잘 했다고 생각 하시고, 이렇게 하면 큰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도 자연 치유 됩니다
    제가 집을 나와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가끔 내려 오시라고 하겠는데요

    • 늙은도령 2016.01.27 00:42 신고

      네, 운동량을 늘리고 있습니다.
      알려주신 것을 하기 위해 계피를 구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연재하고 있는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는 16~17세기 사이에 발아해서 19세기에 최고조에 이른 근대이성이 인류 문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다루는 문명 비판서입니다. 우리가 현대성이라 하는 것도 근대이성이 배출한 산물이기 때문에 근대이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헌데 인류에게 미래의 희망을 얘기했던 근대이성이 내놓은 결과란 인류 문명의 퇴행이었고, 현대성으로 넘어간 뒤에는 총체적 종말을 향한 최악의 결과ㅡ비인간적인 문명ㅡ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세상을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지옥도를 그리는 것 같아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정도입니다.



많은 분들이 연재하고 있는 내용을 읽는 것 같지 않지만, 소수의 독자라도 제 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틈나는 대로 근대이성과 현대성의 철학적 이해를 제공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라 쉽게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대이성의 탄생부터 시작해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철학과 사회학, 과학적 개념들을 설명할까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연작으로 기획했던 책 중에서 5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정기후원을 받기로 마음을 정한 이상 이곳에 먼저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내도 상당히 어려울 수 있으니 근현대의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근현대 철학을 다루는 가운데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학파의 철학도 일부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동양의 철학들(6권의 목표입니다)도 일부 다루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몇 백 권의 책을 더 읽어야 하지만, 근대이성에서 현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필요한 책을 거의 다 섭렵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근대이성의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산물인 계몽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계몽적인 기획이 너무 강해 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계몽의 철학부터 다루어 보겠습니다. 위험을 등에 지고 살 만큼 불확실성이 커진 세상에서 계몽만큼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대이성의 산물인 계몽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베이컨과 데카르트, 파스칼, 칸트, 니체, 라이프니치, 헤겔,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 중에서도 칸트는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으며,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정한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대까지의 서양철학이 일체의 변화ㅡ기독교 유일신의 선험적 모델인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ㅡ를 타락으로 본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각주였다면, 칸트는 변화의 끝을 정함으로써 그것을 끝내버린 철학자입니다. 칸트에게서 이상적인 삶을 구축하는 계몽철학이 나온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인식(認識) 및 실천(實踐)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先驗的) 형식에서 찾고, 사유(思惟)가 존재(存在)를, 방법(方法)이 대상(對象)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의 영역에서 찾고,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위의 인용문은 위키피디아에 나온 칸트에 대한 설명의 일부인데, 이는 너무나 도식적이고 형이상학적이어서 계몽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서 아래의 인용문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내용으로, 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칸트를 다루고 있어 우리의 출발점으로는 제일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계몽의 철학을 변증법적으로 다룬 이 책은 ‘계몽’을 다룬 (제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 책을 중심으로 칸트가 정립한 계몽철학을 다루되, 푸코와 아렌트의 도움을 더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해 최대한 쉽게 풀어보도록 하겠지만, 그 출발은 조금 어렸습니다.



게다가 이번 글을 아래의 인용문을 올리는 것에서 그칠까 합니다. 제가 인용문을 쉽게 풀기 전에 한 번 읽어 보시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가 다음 글에서 이 인용문을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계몽철학이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 설명에 반박도 할 수 있을 터이고요.



계몽은 칸트에 따르면 “스스로에 기인한 미성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인데,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는 오성”이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오성이다. 이 말은 즉 자신의 독자적인 일관성을 근거로 인식을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은 오직 오성과 이의 합목적적 사용이다." 이성은 “오성 행위의 목표로서 어떤 집합적 통일체”를 설정하는데 이것이 “체계”다. 체계는 개념의 위계질서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다.


라이프니츠나 데카르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합리성’이란 “좀더 높은 유와 좀더 낮은 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체계적 상관관계를 완수하는” 데 있다. 인식의 “체계화란 하나의 원리에 입각한 수미일관성이다.” 계몽이란 의미에서 ‘사유’란 통일적인 학문적 질서를 만들어내고 원리들ㅡ이것이 자의적으로 설정된 공리이건, 내재적인 이념이건, 최상의 추상화이건 관계없이ㅡ로부터 사실 인식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논리의 법칙”들은 질서의 내부에 가장 보편적인 관계들을 만들어내며 이 관계들을 정의한다. 통일성이란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모순율은 체계의 핵심이다. ‘인식’이란, 원리들 밑에 다른 일체를 포섭함으로써 성립한다. 인식이란 체계 속에 분류해 넣는 판단과 동일한 것이다. 체계적이지 못한 사유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거나 권위적인 사유다. 


이성은 오직 체계적 통일성이라는 이념, 즉 개념적으로 고정된 상관관계에 기여할 뿐이다. 사람들이 붙잡고 싶어 하는 모든 ‘내용적 목표’란, 그것이 이성의 통찰일지라도 계몽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광기나 거짓, 합리화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희석시키기 위해 인간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을 내보이면서 갖은 애를 쓴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란 “보편자로부터 특수자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보편자와 특수자가 같은 성질이라는 것은 칸트에 의하면 “순수 오성의 틀”에 의해 보증된다. 이 말은 즉 지각 작용을 이미 오성에 일치하게 구조화하는 지적 메커니즘의 무의식적 작용을 일컫는 것이다. 주관적 판단이 행하는 사물의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물이 자아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사물에는 객관적 질로서 오성이 이미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틀이 없다면, 즉 간단히 말해 지각 작용에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인상도 개념으로 나아갈 수 없고, 어떤 범주도 실례와 어울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체계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수렴하는 사유의 통일성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학문이 의식하고 있는 과제는 이러한 ‘사유의 통일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중용투자자 2014.09.04 10:16

    '서양철학자들은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나누어진 마르크스 사관으로 보는데 이는 우월감에서 오는 것이다' 는 도올 선생의 말이 생각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1 20:53 신고

      마르크스가 아니라 많은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죠.
      유럽 중심주의적 표현인 것은 확실합니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출발은 둘 다 비슷합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석이 들어가면서 많이 달라졌기도 했지만, 그 근본에는 경제규모의 확장을 불러온 근대이성이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라 함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이 가장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유대인의 신용창출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만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근대이성은 뉴턴역학에 의해 지독히도 단순화된 우주의 법칙을 지구의 법칙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거대한 체제의 견고함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동시에 문명의 지속성을 확신시키고, 시간의 발견과 궤를 같이하는 역사를 등장시킬 수 있었다.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평등한 노동에 대한 소유와 자유(방임)의 상대적 우위, 끝없는 팽창의 대항개념으로 발생한 민족성과 영원한 투쟁을 유발하는 계급의식의 출현, 신을 끌어들인 로크의 소유개념(구획 짓기)과 스미스의 교환시장의 발견 등이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중요한 목록들이다.



근대이성의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유개념과 교환시장의 정립으로 독점적인 부의 축적과 과시적 소비를 통한 ‘구별 짓기’의 저급한 욕망, 일체의 것들을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 모든 종교와 정치가 지닌 영향력을 다 합친 것과 거대해진 매스미디어의 발전, 이에 편승해 거의 모든 영역을 상업화하는데 성공한 소비지상주의의 확립까지 현대성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근대이성은 인류의 문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베이컨과 데카르트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해 그 모양을 드러낸 근대이성은 폭력적인 현대성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 탄생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21세기의 14년을 관통하며 인류 문명의 불확실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플라톤과 헤겔, 고전물리학과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격문은 분업과 거대관료제의 등장으로 사유하는 인간에서 착취 받는 동물(고도의 숙련도 필요 없는 단순작업)로 전락한 노동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산업사회의 발전단계에서 불확실성이 최대화되는 단계로 접어드는 시작에 불과했다. 



노동과 적대적 공생을 유지했던 자본은 과학의 발전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노동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끊고 국경을 넘나들며 홀로 독주할 수 있게 됐지만, 노동은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노동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더욱 열악한 조건으로 빠져들었다. 자본은 정규직 위주의 노동을 분해해서 비정규직과 임시직의 노동으로 격하시킴과 동시에 전업주부라는 것을 상류층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생산의 주체였던 노동이라는 것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자본의 일방적 우위로 하여 퇴근 이후에도 계속되는 무한대의 재생산을 강요받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가족간의 경계선이 무너졌고, 생산의 주체로서의 노동의 형태도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까지 확대됐다. 노동자에게는 사적인 공간이 사라져버린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간접적인 노동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됐다. 



결국 모든 노동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노동가치설’은 노동자 뿐만 아니라,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까지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제대로 된 노동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잉여노동자들이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려 있으니, 노동가치설은 무노동 무임금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들어서는 유노동 무임금의 처지까지 내몰리는 가족 구성원들도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며, 이는 정규직이라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자본주의의 태생적 모순과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적 노동생산성이 최후에 이르는 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자유의 왕국’이 이루어진다고 예언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추상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무지와 정치와 문화, 매스미디어의 발전으로 전 지구적 지배 세력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낭만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전복을 꿈꾸는 노동자의 연대는 개별 사업장 내에서도 사라져 버린지 오래됐다.  






푸코가 촘스키와의 대화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폭력적 혁명을 통해 집권을 하면, 오랜 기간 동안 탐욕의 질주를 거듭한 자본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의 악순환이 한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걱정도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입증됐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다중》, 《전복적 스피노자》 등을 통해, 네트워크처럼 집합했다 유령처럼 사라지는 다중ㅡ각자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목적을 위해 연대하는ㅡ의 등장을 예견했지만 이 또한 마르크스에서 스피노자로 갈아탄 것 이상의 결과들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계 노동자들의 연합은 부정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시위로 되살아나는 듯했으나, 2001년 이후로는 분노한 사람들의 행진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점령운동의 붐을 일으켰던 2008년의 금융 대붕괴의 결말도 슈퍼리치의 배만 불려준 채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더 이상 게릴라전은 유효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희망의 이름으로 절망만 쌓여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위대한 분투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 뿐, 영원히 도래할 수 없는 환상의 나라로 판명됐다. 그의 예언대로 자본주의적 진화의 본질적 모순 때문에 내부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고 분열된 틈새를 용접하고 부식된 부품을 가라치우며 보수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 그의 예언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압축된, 또는 유동하는 액체 상태의 현대란 어디로 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극도의 혼란과 공포만 양산하고 있다. 



근대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헤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정반대에 위치한 경제학자가 아닌, 진행경로가 다를 뿐 목적지는 동일한 고전경제학자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노동이 자본의 암묵적 동조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학문적 업적에 그쳤을 뿐이었다.이것 때문에 언제나 중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고, ‘제3의 길’이라는 엉망진창의 이데올로기도 등장할 수 있었다. 



개인과 단위별 노동생산성이 최고에 이르면,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접어든다는 생각이 한 동안 만연했고,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사실인 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의 최종 목적지는 시장에 들어오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의 비교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에 완전시장을 통해 각각의 공급은 최적의 수여에 할당되는 평등사회로 접어든다는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도 같은 지점에 이르기 때문에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무계급사회’가 도래한다고 주장했으니, 이를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놓고 보면, 둘의 차이란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자기 조절능력이 있는 자유 시장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모든 노동을 동등하게 평가하는 노동가치설을 폭력적으로 실현시켜 자본주의의 종말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맬서스)의 경우에는 노동착취와 잉여생산을 피할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의 합리적인 행위가 불러오는 부수적인 피해로 봤을 뿐이고, 노동의 가치를 시간의 절대화로 환원한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그런 부수적인 피해를 본질적인 절대악으로 봤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어느 주장을 따르더라도 현대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근대이성의 잔재들은 영원한 진보의 과정에서 사라질 수 없는 침전물임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근대이성이 완벽하지도 않았고, 합리적이기보다는 비합리적이었다.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이성의 정언명령은, 그것이 동시에 따라야만 하는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고 탈선될 수 있는 것이어서 칸트적 개념과 사유의 차원에서만 찬란하게 빛날 뿐이다.  







이에 따라 세상은 현대성이 내포한 폭력에 의해 온갖 피해와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장경제에 포함되는 순간부터 반이성적인 것들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의 대부분을 무효로 돌릴 만큼! 이제는 평범해진 바우만의 성찰처럼,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무한한 진보와 결과의 낙관론이 추동해낸 경제성장이란 불평등을 양산하는 이데올로기였으며, 그의 부작용으로 생긴 참혹한 결과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며 온갖 종말적 문제들을 끝없이 축적하고 있다.



진보의 결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정치의 타락이나 몰락, 정부의 친시장적 경향이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지목한다. 또한 자본의 노예로서 경제적 안락함에 함몰된 시민정신의 타락이나, 소비지상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물신화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심지어 국가와 사회에 만연한 범죄와 비리와 부패에 분노하며 차라리 독재시절이 낫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자들도 세계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부자들은 늘어나는 재산을 감당하지 못해 온갖 첨단장비로 무장한 채 공권력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자신의 성을 쌓았고,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에 만연된 폭력과 공포(확인해 보면 자본과 언론이 과장한 것이지만)에 질려 앞선 세대들이 힘겹게 얻어낸 소중한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초인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폭력적인 좌파라며 가난한 자들까지 성을 내며 집단 린치를 가한다. 



원본에 대한 탐독도 없고, 지적 성찰에 대한 부단한 노력도 없이, 검색과 인용으로 이루어진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보편적 허위를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지식인들의 타락은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접게 만든다. 이들은 멘토와 힐링과 인문학 열풍에 편승해 혼란을 가중시키며 ‘탐욕의 삼위일체’를 강화하는 첨병역할로 빠져들고 있다. 또한 세계적 특권그룹과 그들에 기생해 있는 지역의 지배엘리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실정이다. 



이런 퇴행의 현상들은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OECD 회원국들에서 공히 일어나고 있다.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과 맹신이 불러온 이런 참혹한 결과는 낙수효과라는 지상 최대의 거짓말을 불변의 진리로 끌어올렸고, 특히 성장과 개발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최근에 들어 성장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회자되고 있는 분수효과ㅡ중하위층의 지갑이 든든해야 상위층의 지갑이 더욱 채워지며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경제이론ㅡ마저 거의 작동한 적이 없었다. 



만일 현대판 분서갱유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허락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경제학과 실험실 위주의 결과를 현실에 적용하느라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기 일쑤인 심리학과,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와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형편없는 자기계발서들은 모두 태워버려야 한다. 이제 현대성이 값을 매기는 지식은 땀을 흘려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는 부단한 사고를 통해 성찰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지금-당장 소비할 수 없는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으므로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것들이 됐다.  



이런 즉각적인 만족만을 최고의 가치로 탄생시킨 폭력적인 현대성의 유일한 지배자에서 이제는 수많은 피해자의 하나로 전락한 예외국가, 미국의 좌파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 만들기》의 저자 리처드 로티가 다음과 같이 호소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미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그의 호소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들었어도 행동하지 않아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져가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아이들이 정말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게 키워야만 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우리가 더럽힌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사람들보다 무려 열 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정작 우리가 두드려대는 그 키보드를 만드는 제3세계 사람들보다 무려 백배나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아이들이 바로 먼저 산업화된 나라들이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보다 백배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반드시 일찍부터 자신들이 누리는 그 행운과 다른 아이들이 누리는 행운 사이에는 많은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배우게 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바로 그러한 불평등들이 신의 의지도 아니고 경제적인 효율성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니라 오히려 분명 피할 수 있는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가능한 빨리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끔 해야만 합니다. 그 어떤 누구라도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이 과식하는 동안 굶주리게 되는 일은 결코 없게 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1. 유머조아 2014.08.21 12:28 신고

    깊은 철학이 배인 글 잘 읽고 갑니다~~

  2. 참교육 2014.08.21 12:58 신고

    복사해 뒀다가 두고두고 읽어야겠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 태봉 2014.08.22 09:07

    좋은 말씀 백배 공감하고 느끼고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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