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삼위일체’가 주도한 이런 과학의 궤도 이탈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과학이론(또는 결과물)이 나왔을 때 다른 과학자들이 그것을 실험하고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도 부정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대체할 다른 과학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정상과학의 위치에 들어선다는 정상과학론을 구조화했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과학이론이 나오면 똑같은 과정이 과학계 내부에서 진행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 한층 진전된 정상과학이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렇게 정(기존의 정상과학)-반(반대 또는 대립되는 과학 이론의 등장)-합(과학적 검증을 통해 다시 정립된 새로운 정상이론, 이것이 다시 ‘정’이 되고 변증법적 발전이 지속된다)의 순환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해 과학혁명은 영원히 지속되는 영구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하늘에 별이 빛나는 한, 우리가 하늘을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고 모든 장애물들을 돌파해나갈 것이다.



과학의 부정적 입증에 철저하게 파고든 칼 포퍼와는 달리 토마스 쿤이 공식화한 계몽의 변증법적 해석에 따라 과학혁명은 영원한 발전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쿤이 무한대의 발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언젠가는 과학의 진보도 한계에 이를 것이라 했지만ㅡ이것에 관해서는 포퍼도 마찬가지다ㅡ이는 자신이 정립한 과학혁명의 패러다임 이론과도 모순에 처한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극에 이르면 내부로부터 붕괴해 유토피아(자유의 왕국)에 이른다는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물론 이런 방식에 대해 닐 포스트먼은 《테크노폴리》를 통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진술의 조건을 검증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은 정반대다. 과학적 진술은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 진술과 구분된다. 과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깨닫는 능력이다”라고 주장하며 칼 포퍼의 이론에 반박을 표하기도 했지만, 세상이 다시 뒤집히는 지금에 와서는 포퍼의 주장이 정확했던 것 같다(장하석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과학철학에 접근하기에 대단히 좋은 길을 제시한다). 



어쨌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패러다임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분야로 넓혀져, 과학혁명에 대한 맹신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돈이 되는 모든 것은 전문화된다’고 말한 것처럼, 비전문가에 대해 또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과학자들과 대안과학자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전문성이라는 높은 장벽을 구축한 과학자들은 그들만의 천국에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었다(하고 있고, 할 것이다).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이 탄생시킨 진보의 과정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면서 지적 모순을 바로잡을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런 배타적 독점권(파벌을 이루는 모든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은 높아졌고, 부작용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데 쉬워졌으며, 문제의 해결도 같은 부류의 과학자들이 도맡아 처리했다. 또한 과학연구가 대학과 기업으로 넘어감에 따라 반드시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과학자들의 목을 조여 왔다. 투자비용은 계속 늘어나는데 확실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황우석 교수와 만능세포 발견과 취소를 거듭한 일본의 젊은 과학자처럼 완전하지 않는 연구결과를 조작해서 대규모 사기를 벌이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한국 교수들의 학위논문을 전수조사 하라,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지니!). 





이들은 인류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들이 일정한 부작용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과학자가 책임을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중립적인 면책특권을 이용해 부작용이 속출하는 연구결과물들을 대량생산과 전문서비스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어떤 것이든 시장 시스템으로 넘어가면 오직 한 가지 목적, 이윤만 추구되기 때문에 부작용들의 확산과 축적은 막을 도리가 없다. 시장이 알아서 다른 것들로 대체할 때까지 악순환은 계속된다.



문제는 막심 탈레브가 《블랙스완》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는 극도로 세분화되고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의 타당성과 윤리적 방법에 대해 사전에 검사할 수 없고, 당연히 연구의 결과물의 장단점과 문제점을 생산단계 이전에 확인할 수 있는 지적검증부대(벡이 말한 대항과학이나 대안과학 또는 대안전문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문제의 결과물이 알려진 것보다 부작용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경우(토지 오염과 사막화, 이에 따른 물 부족 사태와 생태계 파괴, 미세먼지 같은 스모그의 일상화, 지구온난화와 각종 기상이변, 무조건 인재인 파멸적인 원전 폭발과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는 공포와 스트레스의 폭발적 증가 등)에도 리콜조치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또한 제품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과학자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과학은 그림자 영역 속으로 들어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전 예방이라는 최상의 방법은 이윤 추구에 굴복해 영원히 취해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정치만이 아니라 전문화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만연되고 제도적으로 고착화된다. 지금 기업의 연구소에서, 또는 기업의 의뢰로 개인연구소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적 영역을 보호해주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상의 체제가 되며, 삼권분립이라는 정부 구조가 책임의 분산을 자초하거나 유발하는데 일조했다. 문제가 발생해도 합법적 면죄를 받거나 최소한의 형량과 벌금으로 과학의 부정적 결과는 모든 제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비자가 입은 피해는 (거의) 보상받지 못한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상은 과학자들이 연구의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위험과 위협을 조직적이고 객관적으로 해석’해 부작용에 대해 투명하게 밝혔는지, 아니면 ‘경시하거나 은폐했는가’로 판정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과학적 결과물을 독점하는 산업자본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이것조차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 상태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힌 것처럼, 무분별한 과학적 결과물의 산업화와 서비스화에 따라 부와 위험의 불평등이 중첩되는 사회계급이 발생했고, 공통된 계급의식과 연대의 가능성이 없는 개인화된 이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비대칭적 종말에 무방비상태로 놓여 졌다는 경고가 속출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오염과 중독에 대한 기준치는 개별적으로 제시되고, 그 기준치의 근거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눈으로 보이고 만성질환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음에도 숫자의 제시는 개별 기준치들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접촉하는 가운데 모든 기준치들의 총합은 개인의 인체에 축적되고 있다. 이는 과학적 부작용을 전체 인류를 상대로 한 자연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인체가 과학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했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의해 공인된 그래서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침묵의 암살자가 등장한 것이다.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종교입문서나 헌법 같은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쿤의 주장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과학혁명에서는 소득 못지않게 손실도 따르며, 과학자들은 손실에 대해서는 유독 맹목적인 경향을 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혁명을 통한 진보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을 결정하는 과정과 권위의 성격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공식화, 즉 과학에서 힘은 곧 정의라는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그리고 특히 비전문적 권위가 패러다임 논쟁의 조정역을 한다면 그들 논쟁의 결과는 혁명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과학적 혁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존재 의미는 어느 특별한 유형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선택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 있다. 과학이 존속되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 사회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가는 과학 활동에 대하여 인류가 보인 이해력의 부족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모든 문명의 기술, 예술, 종교, 정치체제, 법률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문명의 이러한 영역들은 우리들의 문명에서만큼이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었던 문명만이 가장 원초적인 과학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 지식의 대부분은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지역, 다른 시대는 과학적 생산 활동이 나타나는 그런 특별한 과학자 사회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학은 스스로 과학화됐다. 일체의 도전과 자기성찰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위계적 학제와 권위주의적 파벌 속에서 ‘과학에 대한 비판, 진보에 대한 비판, 전문가에 대한 비판, 기술에 대한 비판’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과학의 진보를 믿지 않는 자들과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정신병자나 비합리적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칼 포퍼가 말했듯이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진리에 도달한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서로 경쟁하는 가정들과 그 가정들이 실험적 증거를 거쳐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에 관한 정보”에 불과한데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진리로 확정이나 된다는 듯이 그들만의 리그에 안에서 과학적 정의는 물론 사회적 정의와도 거리를 넓혔고, 스스로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을 평균 이상의 소득과 승진, 명성으로 대체해버렸다. 





과학은 또한 인간 구원에 대한 최종적 믿음을 종교로부터 빼앗아 갔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인류 해방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한 과학자집단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과학자집단이, 그러나 둘은 지향하는 결과에서는 동일한 비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방법에 대해 극단적 논쟁에 돌입하지만, 비전문가들은 논장의 밖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신자유주의가 번성한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진리의 도움을 받는 활동에서 진리없이 활동’했으며 ‘내적으로 과학은 더 이상 의사결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는 위험의 전 지구적 확산이었고, 유일한 성과물이란 ‘탐욕의 삼위일체’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윤을 쌓아준 것이다. 



과학은 이제 자신을 반성적으로도 비판적으로도 바라보지 않으며, 돌아오는 이익과 승진에의 욕망, 목을 조여 오는 연구자금의 사슬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세속화됐으면서도 진리의 담지자이자 지배자로서의 역할은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책임이 사라진 곳에서 연구방법과 부정적 결과에 대해 윤리적으로 고민할 과학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서의 파벌은 경제학에서의 파벌보다 더욱 심하다는 사실은 여러 과학자들의 고백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과학도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한 채 현실에서 멀어진 것도 이런 파벌의 부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벡의 지적처럼, 과학의 결과물을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과 다양한 종의 멸종 같은 파괴적인 결과들이 속출하는데도 불구하고, 산업적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과학은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들을 제거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다시 산업화해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이윤 창출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움직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원인은 애매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고, 각종 실수와 문제의 변형을 시장의 활성화에 내맡기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과학실천에서 ‘학습과정은 체계적으로 단축되며 저지’됨에 따라 각종 질환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인류는 당뇨병, 암, 심장병, 우울증, 비만, 호르몬 장애, 자살 충동 같은 문명질환의 무방비상태로 놓인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문명질환들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화의 동력이 창출된다. 결국 “더욱더 많은 영역에서 산업은 문제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무시한 채 자신이 이차적으로 유발한 문제들에서 이윤을 얻고 있다.” 부작용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변하면서 과학은 갈수록 무오류성의 신화를 대중으로부터 압박받으면서도, 과학이 도달할 무오류성 때문에 모든 부작용들을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는 과잉전문화에 매몰되면서 ‘한없이 뒤로 후퇴하는 자가동학적 진보의 신화’를 연일 써나가고 있다. 




1986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위험사회》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적 부작용의 원인을 이차적인 산업화의 동력으로 삼는 과정을 가장 일반적인 화학산업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지만 나치가 아우슈비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살충제와 미국이 베트남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의 땅으로 만들겠다며 무차별적으로 퍼부은 네이팜탄과 고엽제가 화학산업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장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화학산업은 유독폐기물을 생산한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해결책’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폐기물 문제가 지하수 문제로 되는 것이다. 화학 및 여타 산업들은 음료수의 ‘정화장치’를 판매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서 이윤을 얻는다. 이러한 정화장치로 거른 물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경우에는 약을 먹으면 되며, 따라서 그 ‘잠재된 부수효과’는 정교한 의료체계를 통해 차단하고 연장된다. 이런 식으로 과잉전문화의 정도에 따라 문재해결과 문제생산의 사슬이 형성되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이차적 결과라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금 완전히 ‘확증한다.’ ‘객관적인 제약들’과 ‘자기 동학’이 발생하는 원형구조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그 협소함, 방법과 이론에 대한 그 이해, 그 경력 사다리 등에서 과잉전문화된 인지적 실천의 모델이다. 극한까지 추진된 분업은 이차적 결과, 그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이 ‘운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현실 등의 모든 것을 생산한다. 과잉전문화는 자기확증하는 순환 속에 결과의 운명론을 집중시키는 능동적인 사회적 실천모델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구글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디지털 세대이거나, 과학자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를 이룬다. 저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또한 돈 때문에 사악하지 말자는 구글이 가장 사악하게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글의 두 창업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구글의 사악함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엔지니어적 상상에 미쳐 있는 두 사람이 인류가 가야 할 새로운 세상을 안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의 창업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구글의 역사라는 것도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구글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새로운 인류를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작금의 현실을 만들었고, 구글의 미래가 결코 인류의 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터넷 중독과 함께 최근에 들어서는 스마트폰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돈 앞에서 사악하지 않겠다는 구글 창업자의 다짐은 이미 주주들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행태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변질을 가져 왔다.  

 

 

기술은 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이 꿈꾸는 최종 목적지는 기술이 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임을 두 창업자와 최고경영자는 끝까지 부인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쌓여 기술이 적이 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외우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주문한다. 기술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은 기술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 책과 함께 《죽도록 즐기기》와 《테크노폴리》,  《구글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함께 읽으면 균형잡힌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때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성찰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다.   

 

 

 

 

 

인간의 뇌가 지닌 놀라운 복잡성

 

다른 모든 세포들과 마찬가지로 뉴런들 역시 보편적 기능들을 수행하는 핵과 체세포를 지니고 있으나 촉수같이 생긴 축색돌기, 수상돌기라는 부분을 지니고 있어 전자파를 받고 보내는 역할을 한다.

 

뉴런이 활동할 때 파동은 체세포에서 축색돌기 끝으로 흐르는데, 이 돌기에서는 신경전달물질이 분출된다. 이 신경전달물질은 오늘날에는 시냅스라고 불리는, 프로이트가 접촉 장벽이라고 명명했던 곳을 지나 흐르다가 이웃 뉴런의 수상돌기에 들러붙는다.

 

그 결과 세포 안에 새로운 전자파를 발생시킨다. 이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들 사이에서 이곳저곳으로 흐르면서 뉴런들은 서로 소통하고 복잡한 세포의 통로를 따라 전자 신호의 전달을 감독한다. 사고와 기억, 감정들은 모두 시냅스를 통한 전기화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인간의 두개골 안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존재하는데, 이 뉴런들은 1밀리미터도 채 되지 않는 것에서부터 몇 피트에 이르는 것까지 그 길이와 모양이 다양하다.

 

                                                                   

 

각각의 뉴런에는 많은 수상돌기들이 달려 있는데, (축색돌기는 하나만 존재한다) 축색돌기와 수상돌기의 끝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그만큼 많은 시냅스의 통로가 존재한다.

 

아직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한데 결합시키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인격을 결정하는 복잡한 회로 속으로 이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뇌의 물리적 작동 방식에 대한 인류의 지식 확대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 있는 오래된 가정이 하나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생물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은 성인의 뇌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우리의 뉴런은 아직 말랑말랑할 때인 어린 시절에는 회로와 연결되지만 이 회로는 성인기에 이르면 고정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관점에 따르면 뇌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유사하다. 유년기에 어떤 틀에 맞춰진 모양이 만들어지면 최종적인 모양으로 재빨리 굳어버리는 식이다. 20대가 지나면 새로운 뉴런은 전혀 생성되지 않고 새로운 회로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일생 동안 새로운 기억을 계속 저장하지만 (그리고 오래된 것들 일부는 잃어버린다) 성인기에 거치게 되는 유일한 구조적 변화는 신체가 노화하고 신경세포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느린 속도의 쇠락에 불과하다.

 

제임스는 "흐르는 물은 더 넓고 깊게 진행하면서 스스로 수로를 만들어낸다.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흐를 때는 이전에 스스로 파놓은 길을 따라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부 물체에 대해 받은 인상들은 우리 신경 체계 속에서 적합한 길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이 같은 살아 있는 통로들은 한동안 막혀 있다가도 비슷한 외부 자극을 받을 경우 되살아난다"고 했다.

 

                        
  

우리의 뇌는 변할 수 있는가?

 

머제니치는 잘린 신경조직이 재생되는 과정에서 생긴 혼란을 뇌가 스스로 재정비했음을 알아차렸다. 손의 신경에서 발생한 재배치와 일치하도록 동물의 신경 통로 역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머제니치 이후 30년에 걸친 더 많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다 큰 영장류의 뇌에 광범위한 가소성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그는"이들 결과는 감각 체계를 일련의 내장된 기계 구성으로 보는 시각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선언했다.

 

뇌의 가소성은 접촉에 의한 감각을 좌우하는 체성감각의 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었다. 결국 우리의 모든 뇌 회로는 감각, 시각, 청각, 동작, 사고, 학습, 인식 또는 기억 등 어느 것에 관여하든 변할 수밖에 없다. 널리 인정받던 지식도 언젠가는 버림받게 된다.

 

 

 

 

 

 

 

 

뇌의 가소성

 

올즈의 관찰에 따르면 "뇌는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과거 방식을 바꿔 스스로를 새롭게 정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뇌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재정비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지고 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시냅스의 풍부한 화학 물질 안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뉴런 사이의 미세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극도로 복잡하지만 신경 통로에 경험을 등록하고 또 기록하는 다양한 화학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감각을 경험할 때마다 뇌 속에 있는 일련의 뉴런들은 가까이에 있을 경우 아미노산 글루타민산염과 같은 시냅스상의 신경전달물질을 교환하면서 결합한다.

 

같은 경험이 반복될 경우 뉴런 사이 시냅스 간 결합은 보다 농축된 신경전달물질의 배출과 같은 생리학적 변화나, 기존 수상돌기와 축색돌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시냅스 끝부분에 새로운 뉴런의 생성을 이끌어내는 등의 해부학적 변화를 통해 더욱 강력해지고 많아진다.

 

시냅스들의 연결은 또다시 생리학적해부학적 변경의 결과, 특정 경험에 반응하면서 약화된다. 우리가 살면서 배우는 내용은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포 간 연결 부위에 담겨 있다. 연결된 뉴런의 끈은 우리 사고에 있어 진정 살아 있는 통로를 형성한다. 신경가소성의 역동성은 "불꽃이 동시에 이는 세포는 철사처럼 한데 묶인다."

 

캔델은 군소의 아가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습에 의한 행동 변화는 외부 자극을 느끼는 감각뉴런과 아가미를 움직이게 하는 동작뉴런 사이에 있는 시냅스의 연결이 점진적으로 약화됨과 동시에 일어난다."

 

"시냅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훈련만으로도 그 강도에 있어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양육의 결과물이지 천성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이 군소 실험은 캔델이 말한 대로 "양쪽의 시각이 각자 가치를 지니며, 사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임을 밝혀냈다.

 

우리의 유전자는 뉴런들 사이의 연결, 즉 어떤 뉴런이 다른 뉴런과 언제 시냅스 간 연결을 형성하는지에 관해 상당 부분을 지정한다. 유전적으로 정해진 이 같은 연결들은 칸트가 말하는 선천적 원형, 즉 뇌의 기본적 구조와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이 같은 연결의 힘, '장기적 효력'을 규제하며 로크가 말한 대로 사고의 재형성과 '새로운 형태의 행동에 대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자들의 상반되는 철학은 시냅스에서 공통분모를 찾는다.

 

뉴욕대학교의 신경과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시냅스와 자아』라는 책에서 천성과 양육은 실상, 같은 이야기라고 적었다. 양쪽 모두는 궁극적으로 뇌의 시냅스 조직 형성을 통해 정신적ㆍ행동적인 영향을 받는다.

 

                                

    

세포는 유연하다. 경험과 환경, 필요에 의해 변한다...어떤 사람이 실명을 할 경우 시각적 자극을 처리하던 뇌의 부분, 즉 시각 피질이 그냥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즉각 정보 처리를 위한 회로에서 채워진다.

 

또한 이 사람이 점자를 배울 경우 시각 피질은 촉각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처리하는 새로운 임무를 띠게 된다...뉴런의 준비된 적응력 덕분에 청각 감각과 촉각은 시력을 잃은 데 따른 피해를 완화하기 위해 더욱 예민해진다.

 

 

뇌는 우리가 사고하는 대로 바뀐다

 

우리의 뇌조직이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많은 것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진화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여러 번 사고를 반복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뇌를 안겨주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행위가 뇌 속에 의미 있는 물리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동물의 뇌에 관한 이 도구들이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집게를 가지고 실험을 실시했던 연구자들에 따르면 원숭이의 뇌는 현재 이 집게들이 손가락인 것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사고 형식이 우리 뇌의 모양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놀라운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실험자들의 뇌는 순수한 상상, 즉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행동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도 변화했다...우리는 신경학적으로 우리가 사고하는 그대로 변하고 있다. 

 

 

가장 바쁜 자의 생존

 

뇌의 특정 회로가 육체적 또는 정신적 행동의 반복을 통해 강해질수록 회로는 해당 행동을 습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도이지가 관찰한 신경가소성의 역설은 이 가소성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정신적 유연성이 결국은 우리를 '고착화된 행동' 속에 가둘 수 있다는 것이다.

 

뉴런들을 연결시키는 화학적으로 활성화된 시냅스들은 실상 이 뉴런들이 형성한 회로를 계속 작동시키고 싶어 하도록 우리를 조정한다.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만큼이나 빨리 우리의 뉴런을 파고든다. 피스쿠알 레온은 "유연한 변화가 꼭 주어진 문제에 대한 행동적인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가소성은 발전과 학습의 구조임은 물론이고 병적 증상들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환자가 자기 증상에 더 집중할수록 이 같은 증상은 더 깊이 신경 회로에 각인된다. 최악의 경우 사고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통증을 느끼도록 훈련시킨다. 많은 중독 증상들 역시 뇌에 있는 유연한 통로들이 강해지면서 더 악화된다.

 

어떤 경우에는 아드레날린의 사촌격이라 할 수 있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도파민과 같은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형성이 특정 유전자를 살리거나 죽이는 결과를 낳으면서 결국 약을 더욱 갈망하게 만든다. 이는 특히 살아 있는 통로에는 치명적이다.

 

뉴런과 시냅스는 우리 사고의 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뇌의 유연성이라는 특성 속에 지적 쇠퇴의 가능성이 이미 내재해 있는 셈이다.

 

 

뇌가 생각하는 뇌 

 

이는 내가 인터넷 사용이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고 염려하기 시작했을 때 느낀 바와 같다. 나는 처음에는 이 같은 생각을 거부했다.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컴퓨터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깊이,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틀렸다. 신경과 학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뇌와 뇌를 통해 가능한 사고 변화는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이는 개개인뿐 아니라 하나의 종으로서 인류 전체에도 적용되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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