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어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각종 불평등과 차별이 심화되고 대물림됨에 따라 수없이 많은 '사회경제적 잉여'와 '쓰레기로 버려지는 삶'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인 2030세대의 경우 부채의 늪과 저임금 단기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을 사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런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고 재기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사회적 자본마저 무너져 내려 빈곤의 고착화와 대물림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자료와 통계를 사용해 여러 가지 분석과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경제위기가 장기화됨에 따라 특별한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거의 모든 연구들이 2030세대의 미래를 암울하고 비관적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회적 자본을 다룬 저자 중에 에릭 우슬러너는 《신뢰의 힘》에서 문명의 진보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인류를 정반대의 결과를 양산하는 이유에 대해 사회적 자본의 핵심인 신뢰의 붕괴를 자세히 다루었다. 그는 수많은 자료와 통계, 인터뷰를 통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모두에서 신뢰의 관계가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고, 이것이 2030세대에게 지옥 같은 삶을 강요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가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절망적인 현실에 갇혀 ‘헬조선’을 외치는 2030세대를 이해하는데 기초적인 지식을 제공해준다. 활기와 도전으로 넘쳐야 할 청춘이 행복한 삶과 발전 가능성으로 연결되지 않고 절망적인 고립와 배제로 연결되는 세상이란, 모든 관계에서 상호 호혜성과 공존의 기반인 신뢰가 깨져버린 현대의 척박함을 보여준다.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개인들 사이의 연계,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신뢰성)’인데, 우슬러너는 ‘신뢰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경제규모는 갈수록 늘어나지만 삶의 질은 갈수록 줄어들고, 인생주기에 따른 기본적인 삶의 경험과 과정을 포기하는 세대로 전락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의 신뢰 증가현상은 미국의 신뢰 감소현상이 세대교체가 아닌 모종의 요인에 의해 초래됐음을 의미한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의 신뢰 증가현상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되살아났다는 것이 반영됐다. 다른 집단, 예를 들어 베이비붐 세대보다 젊은 세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타인을 덜 믿고 미래를 덜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낙관론에는 그들의 소득향상과 함께 공평한 소득분배가 반영되어 있다. 전기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과 이후 세대보다 소득을 더 공평하게 분배받았다. 따라서 그들이 가장 낙관적이고 신뢰 지향적인 것은 당연하다.



지금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불평등과 차별이 심한 나라가 된 미국이지만, 한 때는 최고 세율이 91%에 달하는 등 미국의 역사를 통틀어 성장과 분배가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시기가 있었다. 거의 유토피아에 근접했던 1940~45년 사이에 출생한 전기 베이비붐 세대는 안정적인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으며, 그 덕분에 그 이후의 세대에 비해 정치와 공동체 참여, 종교와 봉사활동 등에 적극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때가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이 가장 좋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전후 체계가 무너지고, 공정한 분배를 담당했던 조세정의가 무력화됨에 따라 상위 1%에 천문학적인 부와 권력이 집중됐고, 그에 따라 중하층의 경쟁이 심화됐고, 적자생존의 시장근본주의가 정치의 영역까지 지배하기에 이르면서(특히 리처드 피트 등의 《불경한 삼위일체》를 보라) 사회적 자본의 핵심인 신뢰가 급격히 악화됐다.



미국인들이 서로를 덜 믿게 되면서 점점 더 작고 동질적인 공동체 안에서 보호막을 두른 채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소수집단, 동성애자, 이민자) 다수에 비해 특혜를 받을까봐 우려하는 것 같다. 호황기에는 점점 커지는 파이가 빈곤과 차별 같은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자ㅡ예로부터 경제적 불안을 느끼면 늘 그랬듯이ㅡ내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립주의와 근본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외국인‧소수집단‧이민자 등이 다수의 복리를 해치는 위험한 이방인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적 신뢰가 개별적 신뢰에 무릎을 꿇어 이제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믿는다.



이런 결과는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인종차별이 심해지고 있고, 각종 총기사고, 증오범죄, 10대 출산율, 이혼율, 자살률, 정신질환자, 아동사망률, 빈부격차, 부정부패, 탈세 등이 높아진 것도 미국사회를 지탱해주던 사회적 자본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정치의 극한대립은 이런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고, 이제는 공공연히 두 개의 미국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미국의 사회적 자본을 이렇게까지 망쳐놓은 것은 정경유착과 상위 1%가 부와 권력, 기회를 독점하는 신자유주의가 미국의 정치와 재계를 장악한 다음에 일어났다.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졌고,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났고, 압축성장의 폐해가 폭발하고 있는 이명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갈수록 청년실업자가 늘어나고, 저임금 비정규직만 늘어나는 현실까지 감안하면 2030세대의 절망과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미국은 주에 따라 다르지만, 지역 단위의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은 일정 수준 이상은 작동하고 있어 저복지 국가인 한국에 비교하면 2030세대의 절망과 분노는 약한 편이다.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의 《평등이 답이다》를 보면, 미국의 50개 주 중에서 사회적 자본이 높은 주일수록, 즉 소득불평등이 적고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진 주일수록 행복지수가 높게 나온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결론을 내놓았고, 이는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진실이다. 



서울의 강남에서 강북, 분당과 죽전, 평촌과 일산 등의 신도시 순으로 대학진학과 직업의 종류 등이 결정나는 한국의 상황은 미국은 비교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지역과 부에 의한 차별이 너무나 심한 편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아니고 욕이 나온다. 최근에는 개천마저도 썩은 물과 녹조로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일 만큼 열악해졌다. 



따라서 소득향상이 좋았고 소득분배가 공평했던 시절에 열심히 살아온 5060세대들이 모든 것이 나빠진 2030세대들을 비판하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들이 받고 있는 압력이 얼마나 큰지, 그런 것들부터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지난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국가와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피상적으로 보지 말고 근본적이고 깊이,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기제까지 자세히 봐야 한다.



특히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한 칼 폴라니의 성찰처럼, 사회의 일부분이었고 정치의 하위개념이었던 경제ㅡ특히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장경제가 자원의 희소성을 내세워 상위 1%의 리그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과 사회적 자본의 붕괴가 각각의 세대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시대의 피해자이지만 극단적 폭력을 선택한 일베가 자유(책임이 따른다)와 자유방임(책임을 거부한다)을 구별하지 못하는 극우적 버전의 2030세대라면, ‘헬조선’을 외치는 2030세대는 정치적 자유의 출발점인 사회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적 버전의 잉여들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선진복지국가는 사회주의적 가치가 반영된 복지와 사회안전망, 사회적 자본이 잘 갖추어진 나라들이다.

  


사회적 자본과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각종 수치가 OECD 가입국 중에서 최악으로 나오는 한국에서 이제야 ‘헬조선’을 외치는 2030세대가 나온 것은 오히려 늦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아직은 소수이고, 지향점이 확실하지 않고, 어디로 흘러갈지, 어떻게 살아갈지 예상할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와 이명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작용인 것만은 확실하다.



벗어날 수 없는 먹이사슬과 한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들의 절망과 분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의 질이 보장돼야 해소될 수 있기 때문에, 극도로 우경화된 대한민국에서 권력의 편에서 서서 상대적 약자들에게 폭력과 차별, 혐오와 배제를 가하는 일베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죽창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들의 절망과 분노, 외침을 한국사회가 제대로 반응하고 포용하지 않으면 파국적 결말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base 2015.08.07 19:26

    역사적으로 국민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짐으로 일부 세력 또는 민중에 의해 개혁이나 혁명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던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이 그러한 징후를 보이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듭니다. 단지 먹거리만의 문제가 아닌 현대병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고있은 아픔이 진정 안타깝습니다.

    • 늙은도령 2015.08.07 19:57 신고

      네, 병리현상이 자꾸 커지네요.
      하지만 헬조선은 일베와는 달리 기득권에 반하는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일베는 권력에 손잡고 폭력과 차별, 혐오를 조장하지만 헬조선은 더 이상 피해를 입지 말자는 것이기에 젊은이들의 정서를 보여줍니다.
      여론을 움직이는 여론환경이 변하기를 바랍니다.

  2. 아이스킹 2015.08.08 02:08

    제가 느끼는 대한민국은 차이를 만드는 집단과 차이를 극복하려는 두 그룹의 충돌이라고 봅니다. 다수가 극복 할 수 없는 격차로 고통 받지만, 다수가 차이를 만드는 정당에 투표를 합니다. 이 괴리를 선명하게 알리고 누가 격차를 계속해서 만드는지 명확하게 각인 시켜야만 젊은 이들이 희망을 이야기 하고, 정의를 말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할 겁니다.

    • 늙은도령 2015.08.08 02:41 신고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언론은 광고로 돌아가기 때문에 차별을 만드는 자들의 요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방법은 하나입니다.
      혁명에 준하는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세력화밖에 없습니다.
      정치철학이 확고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런 정치세력이 나와야 합니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는 한 이 세상을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참여하고 연대하지 않은 한 답이 없는 것이지요.

  3. 공수래공수거 2015.08.08 08:26 신고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분노의 정치 세력을
    언제쯤이면 볼수 있을까요?
    젊은 혁명가가 나와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8.08 17:12 신고

      네, 그래야 합니다.
      정말로 젊은 정치인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4. 참교육 2015.08.08 12:42 신고

    자본이 만드는 세상은 막가파 세상입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은 청년들이 깨어날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5. 호빵멘 2015.08.11 23:45 신고

    요즘 헬조선이란 말이 나와서 뭔가 했는데 작성자님 글을 읽고 모두 해소했네요.
    정말 핵심을 잘 집어 주신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트윗으로 퍼 갑니다...

    • 늙은도령 2015.08.12 00:06 신고

      답답한 내용이지요.
      어떻게 인류가 여기까지 왔는지, 대한민국이 이렇게도 형편없는 국가가 됐는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기업총수의 가석방 필요성을 언급하자,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했다. 경제활성화을 위해 천문학적인 민간투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최 부총리는 "기업인이라고 지나치게 원칙에 어긋나서 엄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것은 경제살리기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들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은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재계 관계자도 "3분기 기업 실적이 크게 악화되는 등 경제가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서 투자와 고용의 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기업의 투자와 고용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오너들이 경제활성화를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사법기관의 선처가 절실한 시기’라고 화답했다.



경제활성화를 위해 무려 41조원을 풀겠다고 공언한 최 부총리는 민간의 투자가 기대에 못 미치면 국가재정만 악화시켜 새누리당의 정권재창출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를 피하려면 기업의 투자가 절실한데, 경제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재벌들이 선뜻 투자에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은 이미 상당 액수를 투자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또 받아내기도 힘들다. 특히 그룹 총수가 감옥에 있거나, 보석으로 풀려났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재벌들이 부총리의 강공 드라이브에 화답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쯤에서 정부와 재벌들 간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 나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추론도 아니다.



                                           김승연 한화회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음



현재 2년 이상의 수감생활이 남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이재현 CJ그룹 회장, 사기 혐의로 구속 수감된 구본상 LIG 넥스원 부회장, 수술 때문에 보석으로 나온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재판 중인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재판을 앞두고 있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등은 정부와 흥정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전의 사례들에 기반한 필자의 추측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법무부가 대통령에 추천한 가석방대상이나 연말에 있을 대통령 사면 및 재벌총수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제민주화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렸고, 증세지만 본격적인 증세는 아니라는 희한한 궤변을 내세워 서민증세를 결정한 정부가 경제활성화ㅡ정권 재창출의 핵심ㅡ를 위해 무엇인들 못할 것인가?





대통령만 외국에 나가면 별 희한한 일들을 다반사로 벌이는 비정상의 정부가 문제의 재벌들로부터 얼마의 투자를 끌어낼지, 그것이 내수경제를 살리고 경제활성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부자증세처럼 제도적인 방식으로 풀지 않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상화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반칙이 아닌 원칙, 편법이 아닌 상식, 특권이 아닌 기본이 살아있는 나라다. 한국보다 훨씬 못 살지만, 불평등이 적을수록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현 정부가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준다(출처 : 구글이미지 인용).  



                                          


  1. 중용투자자 2014.09.26 07:54

    허참. 절도범을 가석방시켜주고 그들에게 절도범확산을 막기위한 대책을 세워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 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재벌에게도 오히려 엄하게 법을 집행하고 사내유보금 과세 등 세금부터 제대로 걷는게 우선시 되야 할 듯합니다.

    • 늙은도령 2014.09.26 16:56 신고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정당하고 공정하게 일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 나라가 모든 면에서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2. 공수래공수거 2014.09.26 09:48 신고

    특히 수많은 서민들을 울린 대기업 총수들은
    그 죄를 충분히 더 받아야 합니다

    • 늙은도령 2014.09.26 16:57 신고

      네, 그래야 합니다.
      총수가 없다고 망할 회사라면 애당초 망할 회사였을 것입니다.
      이번의 발언은 투자를 왕창 늘리라는 것으로 회사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물론 보수화된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도 경제성장과 선진국 진입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은 마치 경제성장을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면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와 병폐들이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럴까? 정치철학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양당의 정치인들이 말하는 선진국들의 상황이 유토피아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기만 할까?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이 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를 보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수없이 많은 저자들이 인용하는 저서로서 출판된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연구결과다. 저자들이 현재의 선진국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는 이제 배를 채우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더 이상 최우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시민들은 어떻게 더 먹을까가 아닌, 어떻게 덜 먹을까를 고민하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뚱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동력이던 경제성장은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그 임무를 마쳤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평안과 행복이 증대되던 시대도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가 더 부유해질수록 스트레스와 우을증 및 각종 사회문제가 장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긴 역사의 여정에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대규모 개발 위주의 성장담론이 전 지구적 시장구축과 함께, 금융과 정보통신 및 지적재산권 중심의 '고용없는 성장'의 패러다임에 이르면서 선진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진보의 동력이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 곳곳에서 진행된 대규모 개발의 역설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인류는 물론 지구 생명체들은 여섯 번째 종말을 걱정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분석틀을 이용해 진행한 연구에서 경제성장에 따른 행복과 기대 수명이 1인당 GDP(국민소득) 약 2만5천 달러에서 평평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행복과 기대 수명이 일어나는 국민소득 수준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는 결과도 보여줬다. 이는 모든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현상으로, 우리의 국민소득이 늘어난다 한들 국민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대 수명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지수로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득불평등의 증가, 스트레스 지수의 상승, 만성질환 및 정신질환의 급속한 증가, 10대 임신율과 낙태율 증가, 청년과 노인의 자살율 증가,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확대, 범죄율아 사회적 비용의 증가, 마약과 약물중독의 증가, 계층이동성의 폭락, 저축률의 하락과 소비지상주의, 가족의 해체와 1인가구의 증가, 외모지상주의와 성형의 확대, 신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부상 등이다. 


 

                                                  

 

 


이런 부정적 현상들은 개인과 계층 및 지역 간의 소득불평등이 심한 선진국일수록 발생 빈도가 높았고, 일본과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처럼 소득불평등이 적은 나라일수록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줬다.특히 신생아 사망율과 범죄율, 10대임신율과 낙태율, 부의 불평등이 가장 크고, 의료비지출 대비 효율이 가장 떨어지는 미국과 영국이 최하위에 자리했다. 두 나라는 신자유주의(무정부적 자유주의)가 가장 발달한 선진국이며, 대부분의 지수가 후진국에 버금가거나 떨어지는 것도 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부유한 국가에서 생기는 문제가 사회가 충분히 부유하지 못하기 (혹은 너무 부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 내에서 사람들 간의 물질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 내에서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기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절대적인 불평등이 문제가 되지만, 부유한 나라에서는 상대적인 불평등이 개인의 행복과 기대 수명 등에 나쁜 영향을 주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의 51개주도 똑같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소득불평등이 가장 적은 뉴햄프셔주와 가장 큰 뉴욕주를 비교하면 거의 모든 지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최악의 주는 세계금융의 본산지인 뉴욕주이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피케티가 사용한 자료도 상당 부분 이 사이트에서 나왔다.

 



결국 1인당 GDP가 25,000~27,000달러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을 3~4만달러에 이른다고 해도 소득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건강과 사회문제 등을 다룬 수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부유한 국가일수록 "사회 전체를 가로지르는 불평등의 정도"에 따라 행복과 건강, 기대 수명 등에서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 수없이 많은 통계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종합한 결과,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공동저자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미국의 뉴햄프셔주와 뉴욕주를 비교한 것과 같은 지수와 통계들을 사용해 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스웨덴과 일본을 비교했다. 

 


스웨덴에서는 평등이 재분배를 지향하는 세금과 보조금, 그리고 큰 복지국가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국가 소득의 비율로 보면 일본의 공공 사회 지출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아 스웨덴과 대비를 이룬다. 일본은 재분배보다는 세금이나 보조금 '이전의' 소득이나 시장 수입이 평준화되어 있어 더 높은 수준의 평등을 달성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는 소득 차가 적다. 그러나 그 밖에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더 큰 평등은 세금이나 보조금을 통해 불평등한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지만, 세금과 보조금 이전 총소득을 평준화해 재분배 필요성을 더는 방식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했다. 각종 부조리와 불평등이 넘쳐나던 시절의 샤르트르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했다. 그의 말대로 타인은 지옥일 수도 있고, 반대로 천국일 수도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세상에선 각종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사회관계의 왜곡과 스트레스 때문에 타인이 지옥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인식과 태도를 바꿔 경쟁보다는 공존과 상생에 눈을 돌릴 때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다.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 지역사회와 국가 차원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했을 때는 타인은 결코 지옥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도 지친 몸과 허해진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가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자유는 이런 공동체가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 성장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전환, 그것이 인류가 6번째 종말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자유방임적 경쟁이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한다는 것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결론이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 관심법'은 최악의 입법이며, 대한민국을 1%의 수중에서 하위 99%가 피터지게 싸우게 만드는 최악의 악법들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ttangke 2014.07.20 12:43

    좋은 글 생각 정확한 지식이 참 좋네요~~
    사막 속에서 금은보화를 찿은 기분입니다~
    티스토리 구독을 하고 십습니다~~ 초대해 주실거죠?
    (hschainav@naver.com) 좋은 하루 되시고~~ 감사합니다^^



빠른 이동(시간)을 통해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현대의 권력이 되면서 특정 지역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수많은 중하위층 사람들은 개인으로서의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위험에 처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격이 매겨짐으로서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직업을 찾아 전국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직업의 이동성은 가족의 해체만이 아니라 결혼의 유무, 주거의 형태, 자녀의 교육 등에서 연쇄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탄생부터 경쟁력을 지니게 된 개인(흔히 1%라 한다)은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어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리며, 상시적인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중하위(전체 인구의 90% 정도)에 위치한 개인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도 누릴 수 없을 뿐더러, 언제 단행될지 모르는 구조조정(노동유연화)에 상시적인 해고와 실업의 스트레스에 놓이게 된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경쟁의 정도가 심할수록 사회적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오고 행복지수는 낮게 나온다.


 

                                         <불평등의 대가>의 예고편에서 캡처

 


미셀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특징이 개인으로 하여금 '위험을 등지고 사는 삶'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소득을 예상할 수 없는 개인들은 늘 움직일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가볍게 만들어 두어야 한다. 저축이나 보험 등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편화되고 있다.

 

 

특히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것으로 불확실한 아주 짧은 미래의 습격으로부터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된다. 모든 개인은 '다음 번 통고가 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상태에서 직업을 유지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경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문자메시지나 메일의 형태로 도착해 있는 해고통보에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다. 개인은 아무리 소비에 매달려도 불안하고, 만족을 하려고 해도 불안한 마음에 만족은 소비를 할수록 멀어져 간다. 

 

 

직업이 안정된 시대의 개인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만족을 늦출 수 있었지만, 소비 중독과 소비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아예 만족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오늘의 사치품을 내일의 필수품으로 만드는 일만 중요하다. 이는 무거운 경제의 시대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재의 상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성 때문에 과거와는 명백히 다르다. 바우만은 새로운 현대성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인 《액체근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밟는 길에 끝이 있다는 믿음, 역사적 변화에 획득 가능한 목적인이 있고 미래의 어느 날, 내년이든 다음에 올 지복천년에서든 완벽한 상태, 살기 좋은 어떤 사회,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정되던 면면의 전부 혹은 일부가 실현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환상)이 오늘날 점차 붕괴되고 급속히 기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후반까지 좌와 우 모두는 그들이 주장하는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파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수요와 공급이 확고한 균형을 이루는 완전한 자유방임의 시장경제가 모든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 믿었다. 좌파는 칼 마르크스가 말한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 모든 우연과 분쟁, 불명확함이 사라진 자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 믿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은 좌우가 동일하게 희망했다. 

 


                                            디스토피아ㅡ설국열차에서 인용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좌우의 믿음과 희망도 진보와 보수의 전망과 주장도 모두 다 틀렸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처럼 견고한 것은 녹아내렸지만, 그것이 기화돼 허공 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용암처럼 녹아 있는 액체 상태로 접어들었다. 어떤 것도 녹여버릴 수 있고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기에 더 위험해졌고 더 불확실해졌고 더 막강해졌다. 고체의 견고함은 무너뜨릴 수 있지만 액체는 어떤 힘에도 전체를 유지한 채 자유자재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우의 꿈을 완전히 뭉개버린 이런 체제의 액체화는 산업사회가 탄생한 시기부터, 신자유주의가 영국과 미국,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후부터는 되돌릴 수 없는 필연의 과정이었다. 과학기술과 첨단 정보통신기기의 발전으로 공간을 압축하는 시간의 우위가 확고해지면서 자본의 입장에서 견고한 체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 무거운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던 게임의 룰이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변화는 근대화의 과제와 책임의 규칙이 폐지되고 사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전체 인간 종의 집단적인 자질이자 자산인 인간의 이성으로 수행해야 할 일로 여겨졌던 것들이 개인 차원의 과감성과 정력에 맡겨져 분해(개별화)되고 개인적 관리와 개인적 재능과 수완의 집행 영역으로 남겨졌다.  

 

 

 

공동체의 행복과 풍요를 지탱하던 사회의 역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개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개인의 자기 권리 주장은 강해졌지만, 이는 자유의 과잉과 함께 책임의 개인화를 공고히 했다. 이제는 모든 개인이 액체화된 세상의 불확실성에 맞서 홀로 싸워야 하고, 실패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직업의 이동성 확대는 공동체와 사회의 근간인 가족의 해체를 불러왔기 때문에 사회에 진입한 개인은 모든 결정과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경영의 신으로 칭송받던 피터 드리커는 "더 이상의 사회적 구제는 없다"고 선언했고, 마거릿 대처는 한술 더 떠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공짜 점심은 없다"며 기반이 해체된 개인들에게 무한경쟁이 초래하는 불확실성의 책임을 떠넘겼다. "사회적으로 위험과 모순은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그것들을 해결할 의무와 필요는 계속 개인 차원의 문제가 되어 갔다."  

  


                                                   일본 제1원전 폭발


 

이런 위험과 책임의 개인화는 공동체의 해체와 사회의 몰락을 부추겼고, 사회적 연대의 기초가 되는 유사한 고충을 토로하고 개선하거나 구제받을 방법이 사라졌다. 개인들이 느끼는 고충는 "전부 더하여 공동이 대의명분의 합으로 이끌어가지도 못한다." 산재하는 고충은 다른 개인들도 똑같은 고충에 시달리면서도 홀로 맞서고 있다는 잔혹한 동화만 들려줄 뿐이다. 이로써 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시민으로서의 연대는 불가능해졌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공공의 힘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희망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은 두 가지 뿐인데, 그 하나는 개개인이 자기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인권을 지켜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것이 평화 속에서ㅡ실제 범죄자이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강도나 성도착자, 거지, 그 밖의 다른 불쾌하고 유해한 이방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통해 개인의 신체와 재산의 안녕을 수호해줌으로써ㅡ추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적의 힘이 사라지자 사적인 것들이 공적 공간을 점령하게 되었고, 공적 이익은 사적 이익으로 대체됨에 따라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세월호참사도 이런 과정이 심화되면서 일어난 비극이다. 인간의 생명이나 존엄성은 사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수많은 인재와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취해지지 않고 해당 사고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보상문제로 넘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의 모든 진보가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한 중심부가 주변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이었듯이, 근대이성이 탄생시킨 '액체근대'라는 현대성은 무한한 진보는커녕 부정적 세계화를 추동하는 세력과 집단에게 무한대의 승자독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세월호도 일본에서 폐기 처분될 운명이었으나 청해진해운으로 대표되는 이익집단에 의해 수입됐고, 정경유착을 동원한 규제 완화를 통해 위험천만한 증축을 감행할 수 있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사고 나는 시점만 남아 있었던 세월호처럼) '무거운 자본주의' 호에 올라탔던 승객들은 선장의 갑판 위에 오를 수 있는 선택받은 일부 선원들이 목적지로 배를 몰고 갈 것이라 믿었다(이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승객들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통로마다 큼지막한 글자로 내걸린 규칙들을 익히고 준수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써도 되었다...반면 '가벼운 자본주의' 항공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실이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가 어디로 날아가고 어디에 착륙하며 누가 공황을 선택하는지, 또한 도착할 때까지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규정이라는 것이 있기도 한 것인지 등등의 정보를 '자동운항'이라고 적힌 정체 모를 블랙박스로부터 얻을 방도가 전혀 없다는 공포를 경험할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이 초래한 공포에 짓눌려 시민의 연대의식은 초라하게 찌그러들었고, 사회의 점진적인 해체를 불러온 위험의 개인화는 자본과 노동이 적대적 공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에서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자본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자본은 국가라는 경계 안에 노동을 남겨둔 채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며 경박단소한 가벼운 경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유동하는 공포'가 바로 이것이다.


 

세월호참사는 《액체근대》의 도래로 인류의 모든 삶과 관계에 스며든 불확실성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란 《유동하는 공포》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됨에 따라 공적 영역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된다. 거대한 심연에 갇힌 개개인은 과잉 소비를 통해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게 된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이웃이란 직업과 자녀 교육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들로 보일 뿐이어서 더 이상 스위트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타인이 유동하는 공포로서 다가온다. 



이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소비 중독과 소비지상주의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공적 영역의 사적인 것에 의한 식민지화와, 공적 이익을 다루었던 정치의 실종 및 힘겨운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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