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렬 변호사가 마지막 보고서에서 궁찾사와 고발인단의 주요 증거들이 최재성과 김빈 쪽으로 흘러들어갔으며, 문파의 명패를 달고 있는 몇몇 팟캐스트가 이를 이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그들의 지지자들이 반발하는 모양이다. 그럴 수 있다. 너무나 느닷없는 내용이니 그럴 만하다. 그들은 기존 믿음과 다른 정보를 접했을 때 즉각적으로 반발하도록 만드는 소셜미디어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술을 만들면 그 다음에는 기술이 인간을 만든다'는 명제를 고민해보면 그들의 반발을 이해할 수 있다.

 

 

 

 

기술 발전 때문에 인류는 덕도 보았지만 피해도 봤다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이나, 기술이 인류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음을 탁월하게 다룬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 인류가 인공지능과 디지털 혁명으로 치닫고 있는 첨단기술의 발전을 통제하려 해봤자 실패하고 마니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케빈 켈리의 《통제 불능》 같은 책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기술에도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기술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특히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기술과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나노공학과 유전공학 같은 첨단기술은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가치, 믿음과 신념 등을 실현하는데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최후의 테크놀로지다. 예를 들면 영화와 라디오를 밀어낼 것으로 보였던 TV는 고가의 광고와 당량의 협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자금을 쓸 수 있는 자본과 권력에 유리하며, 같은 이유로 해서 정부 같은 절대권력과 거대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유시장경제에 가장 적합한 테크놀로지다. 바보상자라는 비판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TV를 밀어낼 것으로 보였던 정보통신기술의 정화인 인터넷과 소셜미디어(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등)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으며, 사용비용이 값싸기 때문에 아웃사이더 정치인과 소규모 정당, 가난한 서민들에게 유리한 테크놀로지라고 주장된다.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바이두 같은 초국적기업과 네이버, 야후, 다음 같은 포털 등이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이 개인의 인식과 행위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이런 주장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수많은 관련 전문가와 지식인들, 현장의 목소리를 종합하면 2,045년에는 두 개의 주장 중 최종승자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경우 그들의 주장보다 최소 수십 년은 더 걸릴 것으로 보지만ㅡ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돌파해 초지능이 되도 인간처럼 감정이나 의지, 의식이 생기지 않지만, 인류의 종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ㅡ초국적기업의 완승을 막을 방법은 없다. 사이버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우리 모두는 빅데이터의 규모를 늘려주는데 일조하는 것을 멈출 방법이 없다. 

 

 

해서,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편향된 정보와 단편적 지식, 자신의 믿음이나 신념에 맞아떨어지는 '바이러스성 콘텐츠'(루머와 가짜뉴스, 음모론 등)에 노출되는 횟수가 많을수록 기존의 확증 편향이 강화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울러 빛의 속도로 쏟아지는 정보와 뉴스, 바이러스성 콘텐츠 때문에 즉각적이고 피상적이며 폭력적인 확증 편향된 반응을 보여주도록 만드는 테코놀로지의 특성에 휘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표퓰리즘의 득세는 이것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김어준과 아이들'의 성공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동일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해온 필자도 이런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디지털 시대를 살아야 하는 모든 개인이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 급진적 선동가, 저질 언론, 나쁜 자본 등의 연합공격에서 공정한 정의를 실현하고, 종국적으로는 인간이란 종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켜 온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키는 일이다.  

 

 

소셜미디어 사용자는 (나와 이정렬 변호사 포함해) 자신의 믿음과 신념, 기호, 기대에 반하는 정보나 뉴스, 콘텐츠를 접했을 때 한 호흡 거르는 것을 습관화하지 않으면 수많은 실수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최재성와 김빈, 문파 팟캐스트의 문제를 언급한 이정렬 변호사의 최종 보고(근거를 내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해를 자초한 부분도 있다)에 울컥한 분들이 그에게 분노의 트윗을 퍼부은 것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셜미디어에 내재된 테크놀로지의 특성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에 중독된 사라들은 (똘끼는 있지만) 판사 출신 청변이라면 나름의 증거 없이 그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하기도 전에 즉각적인 반응부터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디지털 시대의 특징이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기술처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분법적 논리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인간의 아날로그적 특성들이 살아남을 공간이 점점 줄어든다.  

 

 

그럴 수 있다. 그런 반응이 디지털시대의 본질이며, 하루가 다르게 인간 고유의 영역마저 정복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에 자리를 내주는 인류 퇴행의 증거다.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를 예견해 '월가의 현자'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탈레브의 《블랙스완》만 봐도ㅡ수없이 많은 뇌과학과 양자역학, 행동경제학, 진화심리학 분야의 연구와 책들을 봐도ㅡ통념과는 달리 인간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 동물이다. 뇌에서 처리되는 90% 이상이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양뇌(좌뇌와 우뇌)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가자니가와 다마지오의 책들을 보면, 이성적 사고를 주관하는 좌뇌와 감정적 반응을 대변하는 우뇌의 분리 때문에 둘의 견해를 조율해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또는 절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CEO 뇌'(또는 '이야기 짓는 뇌')가 있다고 했는데, 소셜미디어에 중독되면 이런 진화의 산물도 말짱도루묵이다. 좌뇌와 우뇌는 뇌간으로 갈라져 있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양이와 개를 보는 것 같은 외부의 자극에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최근에 들어 모든 사람들이 수없이 듣고 있는 인공지능은 좌뇌와 우뇌에서 시냅스로 연결되는 수십억 개 뉴런들의 신경망 네트워크를 모방했기 때문에, 디지털 연산이 핵심인 컴퓨터와는 달리 '인간이 잘하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학과 확률의 알고리즘'이다. 인공지능이 일자리의 종말을 넘어 인류의 종말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는 이런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이며, 따라서 그것의 산물인 소셜미디어에 많은 사람들이 휘둘리는 것을 이상하게 받아들일 일도 아니다.

 

 

이정렬 변호사가 그렇게 말한 데는 나름의 이유와 증거가 있을 터, 그것을 확인하면 될 일이다. 아니면 최재성과 김빈, 문제의 팟캐스트들이 반대의 이유와 증거를 내놓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궁찾사의 반론에도 충분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문파라는 큰 마당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런 정도의 충돌이나 의견불일치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민주주의는 그런 과정을 보장하는 행동규범이기도 하다. 촛불혁명을 주도한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이 정도 갈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제 멋대로 사는 것에 나름의 가치를 두는 사람들 아닌가? 남에게 나의 신념이나 특정 태도를 강요하지 않고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되, 문프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라고 믿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과 아주 작은 돈만 물 쓰듯이 하는 일당백의 정의로운 꼴통들 아닌가? 실수와 잘못도 하지 않는 자, 인간도 아니다.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과하지 않는 자, 인간은커녕 동물 중에서도 최악이다(어떤 털보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P.S. 좌뇌가 이정렬 변호사, 우뇌가 궁찾사 운영진, CEO 뇌가 문파라면 얼마나 좋을까? 참고로,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 LP판, 턴테이블, 카세트 테이프, 책 등처럼 아날로그적 제품들의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라이브 공연의 증가도 이런 현상 중 하나다. 첨단기술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발상의 전환 같은 사업적 아이디어를 찾고 있는 분들이라면 참고해볼 만한 책이다.   

  1. 카사바 2018.12.15 01:36

    ㅎㅎ아직 멀었지만, 이제 조금은 선생님의 글이 이해가 됩니다 😄

  2. 5n2_human 2018.12.15 08:12

    항상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능력있고 좋은 사람들이 계시는 우리문파가 자랑스럽습니다. 고먑습니다.



세르주 라투슈의 《탈성장사회-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를 보면 소비사회에서 학교와 교육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내용이 나옵니다. ‘탈성장’은 이반 일리치와 카스토리아디스, 장 피에르 뒤피 등이 개념화한 것으로, 경제주의, 경제 성장, 공급주의와 빚의 경제학 등이 만들어낸 지속 불가능한 소비사회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생태주의 시민운동입니다.





많은 분들이 현재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는데, ‘탈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육과 학교에 대해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합니다. 이들은 각종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정신질환과 만성질환, 자살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대지의 사막화, 물 부족 등을 초래하는 소비사회로부터 벗어나려면 교육과 학교가 전복적일 만큼 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려서부터 TV와 스마트폰, PC, 야외광고판 등의 고도로 첨단화된 상업광고에 노출되는 아이들은 학교에 진학해서도 미디어에 노출되고, 경제성장과 소비사회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고 회로가 단절되고, 유도된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소해야만 - 욕구는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므로 과소비와 소비중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살아갈 수 있는 소비자(=생산자)로 키워집니다. 학교와 교육이 모두 다 점령당한 것이며, 그래서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사회-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주체 형성을 기조로 하는 학교는 일조의 딜레마에 직면한다. 학교는 현재 모습 그대로의 사회, 즉 경제 성장과 치열한 경쟁을 중심 가치로 하는 이 사회에 청소년들을 적응시켜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반드시 나아가야 할 사회 - 탈성장 사회 - 를 준비하도록, 즉 소비주의적인 파괴에 저항하는 능력을 지닌 시민의 형성을 위해 청소년을 교육해야 하는 것인가. 학생은 장차 지적이고 혁명적인 실업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소외된 생산자=소비자, 즉 ‘문명화된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학생은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질서를, 적어도 그 가장 유해한 측면을 극복하거나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이용하고 발달시키는 동시에 사회에 최소한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 학교 제도 - ‘사회 질서에 종속을 조장하는 요소와 해방을 촉구하는 잠재적 요소가 동거하고 있는 제도’ - 의 책임은 어떤 것일까. 교육자에게 요구되는 곡예 같은 훈련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의 신랄한 비판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교육은 ‘고용 가능한’ 노동자의 양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경제, 경제 성장, 소비라는 이름의 종교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의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소수 엘리트가 극히 생산적으로 변해가고 대다수 대중은 규율을 준수하는 소비를 배울 필요가 있는 사회에서 학교는 그 사회의 일부가 된다.” 


시장 민주주의의 퇴폐함은 필연적으로 제도의 타락을 초래한다. 오늘날 학교는 경제 성장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고 진보에 대한 믿음을 주입시킨다. 유치원부터 대학 그리고 평생 교육에 이르기까지 교육 제도의 공식적인 일부는 상식을 벗어난 초대형 기계를 위해 원활하게 움직이는 톱니바퀴를 만든 것이다(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와 《성장을 멈춰라》,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을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고민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탈출구를 모색하고 실천하며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탈성장’의 모토가 대안의 모색이 아닌 대안의 모태이듯이, 다양한 형태의 대안교육들이 미래를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울리히 벡이 경고한 대로 우리는 ‘초위험사회’에 돌입해 있고, 신자유주의는 그런 위험사회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탈취의 체제입니다. 지배엘리트를 구축하는 상위 1%가 9% 정도에 이르는 체제의 간수의 도움을 받아 하위 90%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언론의 소유와 함께) 교육과 학교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지속이 불가능한 현 체제를 비폭력적으로 전복하려면, 교육과 학교의 중심인 교사들이 분명한 시대적 이해와 사명,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소비자 육성 세력과 사고력을 저하시키는 기술에 저항해야 합니다.” 교육과 학교가 차별을 공고히 하는 지배의 수단과 장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더 이상 미루면 기회는 없습니다.





성장과 대규모 개발, 과학기술의 고삐 풀린 폭주, 타락한 정치의 직무유기, 진보의 낙관론, 자연의 풍요를 자원의 희소성으로 탈바꿈시킨 경제학(극소수에게 무한대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해준 경제학)이 창출한 문명의 역설이 '초위험사회'로 귀결된 지금, 인류가 6번째 종말에서 탈출하려면 우리의 인식이 급진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성장을 얘기하는 것은 지독히 무책임한 것이며, 공멸의 순간을 앞당기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가진 자들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겠지만,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버려지고 죽어갈 사람들을 생각하면 '탈성장'과 '성장 없는 풍요'의 긴급성과 전면성에 대해 얘기하고 떠들어야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공수래공수거 2015.09.14 08:26 신고

    숫자 놀음 하는 성장..
    피부에 와 닿는건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성장인지..

    • 늙은도령 2015.09.14 17:06 신고

      지금은 성장이 아닌 파괴입니다.
      성장보다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먼저입니다.
      망가진 지구를 살리는 것도 시급하고요.

  2. 앨리스 2015.09.14 09:34

    아이를 키우는 입장으로 너무나 공감되고 걱정되고 걱정되는 시대입니다.
    도령님의 추천으로 읽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주더군요.
    실제 요즘 아이들은 생각을 귀찮아 하고 많이 하지 않아요 그것이 가장 충격적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늙은도령 2015.09.14 17:08 신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인간은 진화의 산물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나갑니다.
      교육도 거기에 맞춰 아이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제발 무엇이 인간의 미래를 바꿀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기술 혁신은 개인 및 집단의 복지증대를 낳는다. (탈숙련화, 실업이나 이직의 위험, 건강 위험과 자연파괴 등의) 그 부정적 효과들은 이러한 생활수준의 향상 속에서 언제나 정당화되었다.


                                                                      ㅡ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에서 인용




걷잡을 수 없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인간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괴시킬지도 모른다. 기술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기술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정신적 과정들과 사회적 관계들을 뿌리 채 흔들어놓는다.


                                                                  ㅡ 닐 포스트만의 《테크노폴리》에서 인용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보면 그가 지적재산권의 대부분을 독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아리스토텔레스가 나머지 소유권을 가졌다. 이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대단히 불행한 일이었다)을 빌려, 발명의 신인 테우스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타무스 왕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보급해 번영을 누리라고 말하는 얘기가 나온다. 각종 발명품에 대해 타무스 왕이 테우스에게 묻고 답하는 가운데 문자에 이르렀고 둘의 견해는 완전히 갈린다. 테우스는 문자가 이집트인들의 지혜와 기억력을 눌려줄 것이라고 했지만, 타무스 왕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발명가의 모범이 되는 테우스여, 기술의 발명자는 그 기술이 장차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를 판정할 수 있는 최선의 재판관이 될 수 없습니다. 문자의 아버지인 당신은 자손들을 사랑하여 발명해 낸 그 문자에 본래의 기능에 정반대되는 성질을 부여한 셈입니다. 문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이 잊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위해 내적 차원에 의존하기보다 외적 기호에 의존하게 되는 탓이지요. 당신이 발견한 것은 회상의 보증수표이지, 기억의 보증수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라면, 당신과 제자들은 사실과는 상관없이 지혜에 대한 명성을 계속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적절한 가르침 없이도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실제로는 거의 무지하다 할지라도 지식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지혜 대신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장차 사회에 짐만 될 것입니다.



모든 지식과 정보가 축적됨에 따라 검색을 통해 어느 곳에서나 광속으로 접속할 수 있는 정보사회(감시사회)에서 타무스 왕의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기술의 본질에 관해 분명한 성찰을 전해준다. 닐 포스트만의 성찰처럼 ‘기술은 한 번 도입되기만 하면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 자체의 예정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채택할 때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특히 기술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타무스 왕의 성찰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기술의 영향력은 의견이나 개념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술의 영향력은 인식의 방식을 꾸준히, 아무런 저항 없이 바꾸어놓는데 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이 만든 도구인 기술에 어떻게 지배되는지 말해주었다. 



한나 아렌트 또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조건이 인간이 만든 기술의 산물인 인공세계에 의해 반대로 조건 지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혁명적으로 달라졌지만, 동시에 진화의 과정을 역행하고 있는 우리의 삶의 행태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특히 상당한 돈이 있어야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고급기술은 모든 인류의 갈등들 사이에서 극소수의 승자와 강자에게 소화해내기 힘들 정도의 전리품을 안겨주지만 절대다수의 패자와 희생자에게는 절망과 죽음을 안겨주기 때문에 그 도입의 단계에서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해서 철저히 따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Ⅱ》에서 말한 대로 과학과 기술을 독점한 ‘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만악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기술은 사용 방식에 따라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되며,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도 동의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등장을 역사의 필연으로 봤고, 그 끝에 이르면 노동자의 생산성이 최고조에 이르러 투입 대비 이익이 제로에 이르러 더 이상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착취가 사라지는 ‘자유의 왕국’이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무한 변신을 예상할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였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착취되고 사물처럼 거래되는 제품으로 전락해 극단적 소외에 빠져드는 노동자의 삶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결론을 내리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마르크스의 문제점을 가장 잘 지적한 칼 폴라니의 설명처럼, 그는 여러 곳에서 자신이 세운 ‘준거틀’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보여줬지만, 소수의 자본가의 수중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노동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휴머니즘의 산물이었다. 아무튼 기술의 발전이 ‘탐욕의 삼위일체’에 의해서 극소수의 승자에 봉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서, 기술에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며,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에서 결론으로 내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사용의 결정과 그 결과에 따라 우리의 적일 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는 우리의 친구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애초에 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도가 없었다면 내 아이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를 사용할 일도 없을 것이다. 만일 대양을 횡단하는 선박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친구는 항해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며 자연히 마음 졸이며 그의 소식을 전보로 전해들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유아 사망률의 감소가 그 비율만큼 출산을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어떤 면에서 보든 우리가 위생학이 발전하기 이전보다 아기를 더 잘 기른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생활 여건 역시 악화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고 기쁨이 없으며 비참하기 그지없어 오직 죽음만을 바라고 산다면 오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런 프로이트의 절망은 지구온난화가 일상화되고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수록 더욱 현실적인 울림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출산율의 저하는 산업사회의 발전 단계에서 처음부터 내재된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노인들의 수명 연장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임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세대 간의 전쟁은 갈수록 첨예해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손자와 손녀일수도 있는 젊은이들을 비난하고, 젊은이들은 그들의 조부모일수도 있는 어른들을 비난하며 심지어는 폭력적 언사도 퍼붓고 있다. 



기술-경제적 발전이 진행될수록 인류는 인식과 삶의 태도 차원에서도 급격히 퇴보하면서 배타적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가장 많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 기술 발전에 따른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총기 사고 등으로 연간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이승을 등지거나 장애인이 되고 있다는 통계가 쏟아져 나온다. 민간 보험을 통해 그 피해를 일부라도 만회한다고 해도 이 또한 기술 발전의 피해자인 개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민간보험마저 들 수 없는 사람들은 어디서 하소연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시계의 발명으로 인간을 시간의 노예와 결과로 평가하는 과정으로 정착한 방식이라도 해도, 기술 발전의 성과를 1년 단위로 나눠서 평가해보면, 한마디로 1년 단위의 고과를 따지면 기술 발전의 결과가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고들을 축적해 거대한 홀로코스트를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례까지 감안한다면 인류 해방을 약속한 기술 발전 덕분에 인류는 상시적 전쟁상태라는 무차별적인 폭력의 심연 속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기술 발전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는 추세라 어제까지의 기술적 경험과 지식들이 오늘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내일에는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퇴물로 취급되는 내가 현실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제까지 확실하고 견고해 보였던 모든 것들이 사회와 삶의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며 오늘의 공포로 엄습해 온다. 내일에는 모든 것들이 불확실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한 지속적인 것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리처드 세넷이 《개성의 부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순간적인 충동과 단기적 행위로만 가득한, 지속적 일상과 습관을 결여한 삶을” 유지해야만 한다. 





언제든지 어제까지 유효했던 것들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며, 오늘의 결정이 내일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그 결과 넘칠 만큼 주어진 자유를 소유한 개인은 “이정표 하나 없고 온통 자신이 헤쳐가야만 하되, 그 결과가 어찌 될지 전혀 확신이 없는 상태로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이 잔뜩 도사린 길을 가며 이런저런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공포에 질린 채 무기력한 존재로 한없이 위축된다. 끝없이 땅을 파면서 안전한 곳을 찾아가는 두더지가 그 과정 속에서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가 오늘날의 파편화되고 소비에 집착하는 너와 나, 철저히 개인 단위로 분리된 우리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 대해 질 딜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그들의 공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참담한 고백을 해야만 했다.



파편화된 존재의 신화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 파편들은 마치 원래의 온전한 상태와 똑같은 하나의 일체로 모아 붙이기 위해 마지막 한 조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고대 조각상의 파편들과 마찬가지이다. 한때 존재했다는 근원적 총체성 혹은 미래의 어느 날 우리를 맞이할 최종적 총체성 따위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없다.



이런 참담한 고백을 한 사람들이 이제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지만, TV라는 ‘바보상자(또는 ‘탐욕의 삼위일체’의 판도라 상자)’에 길들여진 아날로그 세대는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TV가 보여주는 오늘의 뉴스와 각종 콘텐츠의 오락성과 상업성, 해피엔딩과 즉물적 쾌락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그들은 작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날로그 세대의 막내인 필자도 한 동안 이런 혼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와 사회, 부모가 요구하고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온 그들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의 유동성이 너무나 생경해 존재의 근원까지 뿌리 뽑히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제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그들은 누가 기술을 독점하고 있으며 세상을 이렇게 만든 TV 화면 뒤의 지배자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생각하려 않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들은 닐 포스트만이 《죽도록 즐기기》에서 말한 것처럼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압축성장이 가져다 준 확고부동한 믿음, 그 기간 동안 가족의 해체가 시작됐으며 부모 공양과 자식의 교육과 결혼에 들어간 돈 때문에 땅을 팔고 집을 옮겨 다녔고, 이제는 노후도 대비하기 힘든 정도로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굶주림에 대한 위협에서 해방됐다는 진보의 허상이 불러온 마법에 갇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고,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당연한 것이며, 박정희의 독재 시절에 이루어진 압축성장과 이를 주도한 대기업 덕분에 지금의 호사(?)를 누리게 됐다는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두지 않는다. 자신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인지, 국가의 경제규모가 커진 만큼 자신의 재산도 비례해서 늘어났는지, 왜 자식들과 손자와 손녀들과 떨어져 살며 명절 때에나 간신히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지, 그들은 명문대를 나오고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왔는데도 취직하지 못하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 죽어라고 따라가려고 했던 미국이 외국의 돈으로 흥청망청 살다가 전 세계를 경제대공황으로 내몰면서 자신은 부도국가의 처지로 전락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려 36년간의 일제 강제합병의 침탈과 착취에서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왜 한반도가 민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쪽으로 잘리게 됐는지, 스탈린식 사이비 공산주의의 확장을 6.25전쟁 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빼앗기고 있는지(이것을 다루려면 한 권의 책도 모자라다. 미국의 도움을 받는 것은 곧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첩경임을 고백한 《경제저격수의 고백1, 2》가 가장 무난하다) 따져보지 않는다. 북한의 공산주의라는 것이 국가파시즘의 형태를 띤 전체주의 국가이며, 이익 추구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 인정하는 미국의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 때 실시한 기초노령연금이 박근혜 정부가 개정한 기초연금보다 수령액이 5~6년만 지나면 역전된다는 것도, 자신의 자식과 손자/손녀들은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르는 손해를 본다는 것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여성 대통령의 리더십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은 여성들을 차별하는 정책과 친기업적이고 친부자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박정희 시대의 압축성장이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오히려 그 당시에 이루어진 각종 불평등들의 원천들이 미래세대의 불행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1. 참교육 2015.06.21 10:34 신고

    인간적이지 못한 모든 문명은 인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불행을 만들어 내는 인간의 지혜가 인류를 불행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 늙은도령 2015.06.21 17:32 신고

      네, 기술-경제적 접근이 인류를 더욱 망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요즘입니다.
      인류는 발전할수록 종말에 근접하니 이런 경향을 어떻게든 늦추거나 막아야 합니다.
      헌데 이런 대세를 뒤집을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2. 달빛천사7 2015.06.22 07:00 신고

    한주의 새로운 시작이네여 즐거운 한주 되세여

  3. 耽讀 2015.06.22 07:59 신고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경남진주에서 경기수원까지 매주 기차를 탔습니다. 월요일은 진주에서 수원, 금요일은 수원에서 진주.
    그 때 통일호가 있었습니다. 무궁화호는 한 번씩 탔지만 거의 통일호였습니다. 시간은 7시간쯤 걸렸습니다.
    기차를 타면 계절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주씩 변해가는 바깥 풍경은 경이로움입니다. 무엇보다 팔도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사투리를 다 들 수 있었죠. KTX는 계절변화도, 구수한 사투리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기술문명 편리함이지만, 사람냄새와 자연냄새를 빼앗았습니다. 더 빠른 기차가 또 나오겠지요.

    • 늙은도령 2015.06.22 15:05 신고

      인간에게 더욱 많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을 빼면 기업만 떼 돈을 버는 것이지요.
      철도 같은 인프라는 결국 산업체를 위한 사업으로 변했습니다.

  4. 『방쌤』 2015.06.22 12:32 신고

    무조건 빠르게 가고, 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는 아닌데 말이죠
    우리가 간과하거나 잊고 살아가는 것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조금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증을 가져봐도 답은 너무 뻔하게 보이는 것들인데 말이죠
    기술-경제적 성장과 접근을 막을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조화는 필요하다 생각되네요

    • 늙은도령 2015.06.22 15:08 신고

      우리는 물질적 편리함만 중시하는데 이는 산업체의 시각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 것입니다.
      공공성이 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비지상주의와 물질만능은 신제품들의 홍수 속에 빠지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5. 프리뷰 2015.06.22 17:05 신고

    요즘 메르스 때문에 걱정이네요.
    빨리좀 진정되었으면 합니다.

    • 늙은도령 2015.06.22 17:15 신고

      잠복기에 있는 슈퍼전파자가 문제이고, 최초의 감염자가 낙타가 아닌 인간으로부터 옮겨진 것이라면 변이가 일어났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럴 경우 풍토병이 되거든요.

  6. 최홍대 2015.06.22 20:05 신고

    적당히 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한데 말이에요. 한국은 정신적으로 성숙하기 전에 너무 경제가 빨리 커져서 문제가 많은것같아요.

    • 늙은도령 2015.06.22 21:12 신고

      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압축성장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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