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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트럼프 역설, 민주주의의 종말로 이어질까?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보면, 리얼리티쇼와 프로레슬링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지만, 정치적으로는 '듣보잡'에 불과했던 트럼프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놀라운 변ㅡ긍정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고 온통 부정적인 내용만 가득한 변화로 이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하려면 디지털 기술이 불러온 정치 환경와 언론 환경, 시민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살펴봐야 하는데 디지털 기술에 이해부족으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은 연구자는 거의 없다. 책의 3부에서 이를 다뤄보려고 하는데 관련 연구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통신사업을 했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추상적인 접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ㅡ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두 저자는 인종 차별에 기대 양당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공화당과 민주당이 이념과 종교를 기준으로 극단적인 대립이란 정치적 양극화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트럼프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기준으로 공화당의 남부와 민주당의 북동부로 나뉘었던 양당 체제가) 1965년 이후로 시작된 정당 재편과 함께 유권자 집단 역시 이념을 기준으로 재편되었다. 거의한 세기 만에 처음으로 이념이 곧 정당의 정체성이 되었다. 즉, 전반적으로 공화당은 보수주의를, 그리고 민주당은 진보주의를 상징하게 되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주당의 공화당은 더 이상 이념적 '빅텐트'가 아니었다. 민주당 내 보수주의 인사, 그리고 공화당 내 진보주의 인사가 사라졌고, 그에 따라 정당 간 공통분모도 줄어들었다. 상원과 하원 의원들 대부분 상대 당 인사보다 정당 내 동료와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게 되면서 정당 간 협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정당 노선에 따라 표결에 임했다. 유권자 집단과 그들이 선택한 대표가 점차 동일 '캠프'로 수렴되면서, 정당 간 이념 차이는 더욱 선명해졌다……민주당이 왼쪽으로 이동한 거리보다 공화당이 오른쪽으로 이동한 거리가 훨씬 더 멀다……정당 재편은 진보와 보수 대결을 넘어서 나타나고 있다. 정당 지지자 집단의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특성이 크게 바뀌면서 정당은 이제 단지 서로 다른 정책적 접근방식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공동체 문화와 가치를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다……민주당이 점차 소수민족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모했던 반면, 공화당은 백인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남았다. 또한 공화당은 개신교의 정당이 되었다. 개신교 집단은 특히 1970년대 말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요한 계기는 1973년 연방대법원의 낙태 합법화 판결이었다……1960년대만 해도 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백인 개신교 집단은 서서히 공화당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반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점차 비종교적인 성향을 드러냈다……다시 말해 미국의 두 정당은 이제 인종과 종교를 기준으로 확연히 분열되었다. 세금이나 정부 지출과 같은 일반적인 정책 사안에 비해, 인종과 종교는 더욱 극단적인 적대감을 낳는 양극화 동인이다."

 

 

P.216~219의 내용을 추가할 것. 그래서 뒤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할 것.  

 

 

       

 

근대와 현대 민주주의의 원조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에서 민주 정치의 기존 문법을 모조리 파괴하고 있는 트럼프의 당선과 과거로의 폭력적인 역주행을 선택한 브렉시트 가결에서 보듯 민주주의는 의의로 허점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확산과 승리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발생하는 위기와의 동행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의 민주주의 역사는 수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허점을 메울 집단적인 성찰을 모든 세대와 시민에게 제시해주지 않는다. 경쟁하는 어떤 체제보다 생명력이 높지 않았다면 여러 번 무너졌을 위기에 처한 적도 적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위기를 달고살면서도 어떻게든 위기를 넘겨내는 데는 도를 텄지만 또다른 위기의 도래를 막을 수 없는 본질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위기에 항상 노출돼 있는 것이 어떤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역설로 작용하지만 인류의 삶을 급변시키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폭발적인 질주로 인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아직도 수많은 정치학자들이 민주주의는 장점(다양성, 개방성, 투명성, 유연성, 반응성 등)이 곧 단점(즉흥적인 반응과 충동적인 행위, 물질주의적 시기심, 단기적이고 이기적 이익 추구, 근시안적 역사관, 극단적 개인주의, 도덕적 해이 등)이기도 한 체제이자, 플라톤의 비판처럼 우중에 의한 다수의 폭정으로 변질되기도 쉬운 행동규범이며, 완성된 형태가 없는 유동적인 체제라고 말하고 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이런 낙관론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민주주의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는 것도 동전의 양면처럼 단점과 장점이 혼재함으로써 서로를 상쇄하거나 충격을 완화시키기 때문이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동시다발적 변화는 민주주의의 지속성이 위협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던 민주주의가 위기와 극복(그럭저럭 버텨나가거나 땜질식 적응으로 대처하는 것) 사이에서 끝없이 표류하면서도 긍극의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이런 본질적 속성이 극단적 표퓰리스트의 득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 1권과 2권에서 헌법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돌아가는 미국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면밀하게 살펴본 후, 그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심통과 변덕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에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순간이 도래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일축했던 예언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궁극의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토크빌의 냉혹한 평가는 모든 선진민주국가에서도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조증 같은 호들갑과 두려움을 표출하며 위기에 집중하지만, 적당하거나 임시방편적 해결책을 찾아내면 위기의 본질과 근원까지 파고드는 일을 멈춰버리는 정신의 가벼움과 당장의 이익과 쾌락으로 재빠르게 돌아가는 속물근성은 어떤 민주주의도 궁극의 진리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디지털 기술로 중무장한 디지털 세대의 출현으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터넷이 불러온 변화는 대단하지 않았고, 정보통신기술은 언론과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제외하면 인류의 삶을 크게 바꾸지도 못했지만(<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의 내용을 주로 다룸), 밀레니엄 세대의 등장과 소셜미디어의 약진과 맞물리면서 천지개벽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잠재력을 확보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갈수록 심화되는 불평등과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전과는 다른 규모로 이끌어가고 있다. 민주주주의 단점이 장점으로 뒤바뀌는, 그래서 민주주의의 실패가 성공으로 뒤바뀌는 경우가 속출했던 과거의 사례가 미래에도 적용된다는 보장이 사라져가고 있다. 성공과 실패의 이중적인 변증법은 민주주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처럼 작동하면서도 그로부터 확고한 지혜를 끌어내지는 못하는 한계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표퓰리즘 선동가와 정당들이 이전의 경험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핏빛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득세에 대한 반발도 커지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성찰도 빠르게 퍼지고 있다. 표퓰리즘의 득세는 이전에도 있었다며 과거의 경험에서 그들의 폭주를 막아낸 승리의 기억들을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외치고 있다. 표퓰리즘의 득세를 빠르게 진행되는 탈민주화 과정으로 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도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분석은 민주주의의 성공, 즉 더 높은 단계의 민주주의로 가는 민주화 과정으로, 느리게 진행되지만 실패, 즉 더 낮은 단계의 민주주의로 역행하는 탈민주화 과정으로 빠르게 진행된다는 정치학자 틸리의 주장에 근거한다. 그는 특정한 체제에서 국가와 국민의 정치적 관계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평등이 더욱 강화되고, 보호의 수준이 더욱 높아지고, 구속력 있는 상호협의의 정도가 더욱 올라가면 민주화된다고 정의하고, 이런 네 가지 요소가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면 특정 체제가 탈민주화된다고 정의하는데,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화와 탈민주화의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주화의 정도가 높을수록 국가의 능력도 강화되며, 탈민주화의 정도가 높을수록 국가의 능력도 떨어진다. 민주화의 정도가 높은 고능력 정치 체제에서는 국가 관료가 특정한 행위를 할 때마다 시민의 자원, 활동 및 인적 관계망에 높은 수준의 긍정적 영향을 창출하며, 저능력 정치체제 하에서는 국가 관료가 아무리 이러한 요소들에 영향을 주려해도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찰스 틸리의 《위기의 민주주의》를 보라). 

 

 

민주주의가 수많은 도전에 흔들리며, 예상치도 못한 위기로 몸살을 앓는 것도 민주화와 탈민주화를 오고가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인데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이 이를 극대화시키는 모양새다. 정치철학자이자 법학자인 드워킨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다수의 결정이 일방통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수를 포함한 모든 이해당사자간의 토론과 협상을 통해 양보를 이끌어내고 모두의 의지와 선택, 이익이 반영되는 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동반자 민주주의가 아닌 다수의 의지와 선택만 중시하는 다수결 민주주의로 축소할 때 민주주의의 단점이 극대화되고 장점은 극소화되는데 양극화된다. 민주주의의 단점은ㅡ플라톤에서 버크와 토크빌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로 보수주의자들이 견지해온 주장처럼ㅡ국가 또는 해당 체제를 "누가 이끌 것인가에 대한 최종 평결을 경제, 철학, 외교 정책, 환경과학 등에 대한 지식이 없고 이런 분야에 대해 자질을 갖출 만한 시간도 능력도 모자란 수천만의 사람에게 맡기는' 데서 발생하는데, 디지털 기술은 이런 위험을 줄이기보다는 높이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드워킨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성정치가 '똘똘한 중학교 학생들의 토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고 한탄한다(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에서 인용).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주의 핵심이 '국민 자치 또는 다수 통치'에 있는 한 기성정치의 하향평준화는 불변의 진리이자 불편한 진실인데, 바로 이것 때문에 다수의 뜻이 일방통행하는 다수결 민주주의가 가장 낮은 단계의 민주주의로 자리하는 이유가 되고 포퓰리즘의 득세로 이어졌다. 각국의 민주주의 수준이 국민의 수준에 의해 결정되고, 진지하고 숙의된 토론이 없으면 다수의 독재로 귀결되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합법적 절차를 걸친 체제의 결정이 민주주주 후퇴를 넘어 권위주의 독재나 파시즘과 군국주의처럼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체제로 전복되기도 하는 경우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면 표퓰리즘 득세에 대한 이들의 우려가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보수주의자들이 귀족주의의 근대적 변형인 엘리트주의를 강조하고,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온 종교적 가치와 전통, 질서를 보장하는 관습과 규범,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것도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나왔다. 반면에 집단지성의 힘을 믿는 진보주의자들은 다수의 국민이 자신의 일에만 열중할뿐 최종 평결을 최선으로 만드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여력과 열의도 없다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민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며, 다수결 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경향을 드러낸다.

 

 

(주 : 사회적 생산관계라는 자본주의의 하부구조에 종속된 상부구조로써의 정치의 역할을 부정하고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자본주의의 미래를 잘못 예측한 마르크스의 주장에 의존했던 진보ㅡ특히 구좌파ㅡ의 바람과는 달리 중산층에 진입한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를 지지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다니얼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 등을 참조하라. 마르크스 비판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의 예언이 틀렸음을 웅변해주는 것으로는 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를 참조하라. 칼 폴라니, 한나 아렌트, 울리히 벡, 토마 피케티 등도 마르크스의 예언이 틀린 이유와 실제적 증거들을 다루었다. 마르크스 비판은 별도의 글로 다룰 것이다.) 

 

 

문제는 이런 두 가지 관점이 서로의 타협점을 찾아 사회통합을 이루는 것으로 가지 않고 상대를 적으로 여긴 채 승자독식을 외치면 민주주의는 상시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국민적 피로와 정치혐오만 키우고 누적시킨다. 밀리면 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진보와 보수는 극단적으로 충돌하거나 상대와의 토론를 요식행위로 전락시키고 상대를 비방하고 저격하는 악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양보와 타협, 협상을 통해 정치적 합의에 이르는 고능력 민주국가에 이르는 꿈이란 장자의 꿈속에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단점이 강화되고 장점이 약화되면 '너 죽고 나 살자'로 대표되는 정치의 극단적인 양극화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알고 싶다면 유벌 레빈의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을 보라. 도식적인 구별은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전쟁》을 보라. 촛불혁명 이후를 조망한 책으로는 박세길의 《두 번째 프레임 전쟁이 온다》를 참조하라).

 

 

로널드 드워킨는 《민주주의는 가능한가》에서 "미국 정치는 끔찍한 상태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극렬하게 의견이 갈린다. 테러와 안보, 사회정의, 정치와 종교, 어떤 사람한테 판사 자격이 있는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그냥 의견 충돌 정도가 아니라 양쪽이 상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치의 협력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미국 정치는 전쟁의 양상에 가깝다"며 한숨을 토한 것도 정치적 양극화가 미국의 민주주의가 작동불능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정치적 관용과 상호존중이 사라진 정치판이란 정글보다 못한 살육과 파괴의 전쟁터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정치적 양극화는 미국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에서 발견된다. 전 세계적으로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들이 득세하게 된 것도 이런 정치적 양극화가 토론과 합의라는 민주적 공론장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미국 공화당의 실세였던 뉴트 킹리치가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면서 극단적인 정치의 양극화는 미국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영국에서 대처의 집권과 미국에서 레이건의 집권은 (시대적 맥락과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만) 정치적 양극화의 초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고, 이후의 정치를 생사가 결정되는 전쟁터로 변화시킨 전환점이었다. 냉전은 끝났지만 분열의 양상은 국내정치로 자리를 옮겼으며 물리적 거리가 줄어든 만큼 격렬해졌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지속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장점들은 흔적을 감췄고 단점들만 거리를 활보했다. 사회주의와의 체제대결에서 승리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연합이 곳곳에서 침몰하며 위기의 경고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거에서 지면 무조건 반대만 외치는 이런 정치의 양극화로 인해 민주적 토론과 구속력 있는 합의가 불가능해진 현재, 미국과 유럽처럼 선진민주국가의 정치학자들과 보수적이거나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 가운데는 민주주의의 영속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민주주의보다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여전히 강한 프랑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독일 등의 선진민주국가에서도 민주주의의 종말을 얘기하는 학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구적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권위주의나 군사독재의 망령들이 되살아났으며, 보호무역과 이민자·외국노동자 배척, 백인우월주의·인종차별주의, 남녀차별를 옹호하거나 동성애와 낙태, 보편적 복지, 공교육 확대 등에 반대하는 극단적 정치인과 정당들이 득세하면서 민주주의 위기론과 종말론이 힘을 얻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정치엘리트와 제도적 차원의 문제일뿐 시민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계속해서 커졌다고 주장하며, 이를 견인하는 디지털기술의 발달 덕분에 민주주의의 미래를 낙관하는 정치학자들도 있다. 이들은《조용한 혁명》의 로날드 잉글하트, 《디지털 민주주의》의 피파 노리스, 《시민정치론》의 러셀 달톤 등이다. 표상만을 볼 때 민주주의는 무한퇴행을 거듭해온 것 같지만 그 아래로는 참여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열망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디지털민주주의와 시민주권 행동주의(정치행동주의 또는 시민개입주의라고도 한다)로 대표되는 이런 거대한 흐름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고히 할 터였다. 박근혜(권위주의적 표퓰리스트)를 끌어내린 촛불혁명은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기념비적인 정치혁명(비폭력 시민불복종)이지만,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의 득세라는 현실을 앞에 두고 이들 역시 위기의식을 공유할 수밖에 없으리라.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귀결된 이후(1989년) 개인의 권리와 경제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다수의 의지와 정치적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서로의 단점을 각각의 장점으로 상호보완하면서 민주주의(정확히는 '개인 권리 존중과 국민 자치의 독특한 조합'인 자유민주주의와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본주의 연합)의 승리가 확정되는 듯했으나(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보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에 따른 불평등과 양극화, 그것의 직접적인 결과인 저출산과 고령화, 갈수록 강화되는 저성장과 복지 축소, 새로운 빈곤층을 양산하는 성장의 역설 등으로 대표되는 지난 30년의 역주행이 이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었다. 파티는 짧았고 승리는 보잘 것 없었으며 착각은 치명적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지난 30년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멀어지면서 자유민주주의(자유주의적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 364p 인용할 것)는 작동불능의 상태까지 내몰렸다. 60년대까지는 소수파에 불과했던 신자유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들은 억만장자의 통큰 후원 하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주의를 공격(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했고,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공격(반민주주의적 자유주의)함으로써(주 : <불경한 삼위일체>와 <불의란 무엇인가>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인용할 것) 케인즈식 정부 개입(큰정부)과 복지국가를 무력화시켰다. 이들의 주도 하에 경쟁하는 다른 체제들에 대해 영원한 승리를 달성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연합은 뿌리까지 흔들렸고, 지속적인 여진에 따라 서로로부터 멀어져갔다. 진공을 싫어하는 정치의 속성상 그들이 갈라진 공간으로 정치의 양극화와 디지털기술에 의존해 지지자를 늘리는데 성공한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들이 들어섰다.   

 

 

상대를 적이자 악으로 규정하는 표퓰리즘의 특성상 대중의 여론은 상대의 숨통을 조르는 칼이며 선거는 상대의 숨통을 끊는 창이라 할 수 있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승자독식의 정치경제학이 정치의 양극화를 견인하고 번창시켰다. 극단적인 진영논리와 배타적 이념대결은 전속력으로 마주보고 달려드는 두 대의 기차와 다름 아니었다. 반칙과 불법이 난무하는 선거의 분열상과 정치의 양극화는 하나의 나라를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색깔로 분열시키고 갈라놓았다. 그 결과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자유를 죽이는 행위로 가혹한 구조조정과 대규모 정리해고를 몰아붙일 수 있었다)'와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평등을 죽이는 행위로 중하위층을 죽이는 복지 축소와 긴축재정, 공기업의 민영화를 몰아붙일 수 있었다)'이 등장해 자유민주주의를 뿌리에서부터 부식시키며 정치의 양극화와 이념적 분열상을 극대화시켰다(주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보완은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추가할 것).

 

 

영원할 것 같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미래를 인도할 체제에서 멀어져갔다. 영국의 브렉시트에 이은 트럼프의 당선은 정치적 양극화가 자유민주주의를 작동불가능하게 만들었음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의 저자 데이비드 런시먼 식으로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확정된 바로 그때 위기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장점이 곧 단점이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는 실패를 담보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누구도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경쟁자가 사라진 자유민주주의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스포츠카였다. 냉전의 대가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무차별적으로 터져나왔다. 정치인과 정당의 토론을 안방으로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한 텔레비전은 정치인의 이미지와 스타일만 부각시켰으며, 정치의 가십화와 오락화만 가속화시켰다(주 : 리처드 생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와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에서 인용할 것).

 

 

냉전이 정점에 달했을 때 소련이 나토회원국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유권자의 낮은 정치수준에 맞춰 인기영합적인 정책과 실행불가능한 공약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미국인의 절반이 9.11 테러의 비행기 납치범 중에 이라크인이 믿을 만큼 국민의 무지가 높은 점을 악용해 극단적인 표퓰리스트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려된 것이다. 미국의 선거가 TV드라마 수준에 맞춰 진행되는 것도, 정치인의 정치 자문들이 유권자를 무지한 군중으로 다루라는 조언을 늘어놓는 것도 정치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표퓰리스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후보들의 TV토론에서 선동과 차별, 증오와 혐오의 발언들이 난무하는 막장드라마가 펼쳐지는 것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극단적인 이분법과 자극적인 언어의 마술사인 표퓰리스트에게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브루스 애커만과 제이스 피시킨의 《숙고의 날》을 보라).

 

 

언론의 저질 오락화와 양극화를 동반한 정치적 양극화는 선거의 분열상을 극대화시키는 것과 함께,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다. 표퓰리스트의 발언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일수록 기성정치인과 정당, 정부와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불만만 가중시켰다. 선의의 정치는 사라졌고 그놈이 그놈이라는 유권자의 편견와 정치혐오만 강화시켰다. 민주공화국의 부식은 갈수록 빨라졌고 법치주의와 법앞의 평등은 유전무죄 무전무죄로 대치됐다. 사회 정의와 정치적 올바름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고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세대간 전쟁으로 비화했다. 경제성장이란 특정 계급을 위해 나머지 계급을 약탈하는 것으로 변모했고, 부와 기회가 세습됨에 따라 조건의 평등이란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은 종적을 감추었다. 실패가 개인화됨에 따라 가족과 사회안전망이 빠르게 해체됐고 세대와 세대 사이만큼 보수와 진보진영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들어앉았다.

  

 

달라진 것은 도전자의 유형ㅡ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소외받고 버림받은 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표퓰리스트ㅡ뿐이다.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47~73년(길게는 30년대 초반에서 70년대 후반까지) 동안 자유민주주의는 복지국가 구축에 성공함에 따라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장밋빛 미래에 대한 온갖 약속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고도성장이란 지극히 한시적인 시기에만 가능한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보라). 고도성장이 불가능해진 세상이란 모든 부분에서 빠르게 늘어나는 불평등과 양극화, 환경 파괴, 자원 고갈, 기상 이변, 청년실업 증가와 중년 파산, 노인 빈곤 등으로 얼룩진 실패의 연속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으며, 하이에크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향하는 '노예로의 길'이었다.  

      

 

전후세대와는 달리 고도성장의 과실과 자유민주주의의 달콤함을 누려보지 못한 세대들이 늘어나고 축적됐다. 특히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해진 자식세대인 밀레니엄 세대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충성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보다 못한 내일에 벌거벗겨진 채 던져진 이들의 불만과 분노, 절망과 두려움은 기존 체제를 뒤엎어버리겠다는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들의 책임전가와 감언이설, 거짓말에 힘을 실어주었고, 이민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과 인종과 여성에 대한 차별적 발언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나라마다 기성 정치인과 정당, 언론을 비판할 근거와 환경이 다름에도 '배신당한 다수와 경멸하는 소수자들'의 좌절과 절망, 분노와 증오를 선동하고 음모론과 가짜뉴스에 근거한 표퓰리즘의 수사학(차별과 분열, 증와와 혐오, 책임 전가와 치졸한 복수의 말들로 가득하다)은 디지털기술에 의존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설득력 있게 다루었듯이, 타락할대로 타락한 언론들의 자사이기주의와 선정적 상업주의, 극단적 진영논리와 이념 대결은 디지털기술을 이용한 대안언론들의 부상과 난립을 초래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표퓰리스트를 대변하도록 만듬에 따라 기존의 역학관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베네스엘라, 칠레, 러시아, 그리스, 스페인, 터키, 필리핀, 인도, 헝가리, 폴란드, 뉴질랜드, 네덜란드, 스웨덴,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영국, 미국, 브라질 등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표퓰리스트 정치인과 정당들이 권력을 잡거나 무서운 속도로 부상해 주요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편화, 디지털언론·팟캐스트·쇼설미디어의 대중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존 주디스의 《표퓰리즘의 세계화》에서 인용문을 찾아 추가할 것).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기존 정당과 언론들이 극단적 표퓰리스트를 걸러내는 필터링 역할을 하지 않으면 신자유주의자와 극우주의자들이 주도한 브렉시트가 가결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트럼프 같은 최악의 표퓰리스트가 권력을 잡을 수 있다. 다수의 선진국 중 하나로 전락한 영국이야 그렇다 해도, 세계 최강 미국에서 최악의 표퓰리스트를 걸러내지 못했다는 것은 인류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당선은 민주주의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작냈으며, 미국의 민주주의가 작동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음을 웅변한다. 건국자들의 헌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의 규칙과 규범을 짓밟아버린 트럼프의 언행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음을 말해준다.    

 

 

백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수의 독재를 막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미국 헌법(메디슨, 해밀턴, 존 제이의 《연방주의자 논설》을 보라)의 허점들과 인종차별에 의해 유지된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거대양당(공화당과 민주당)과 뉴욕타임즈, CNN, 워싱턴 포스트 등의 거대언론들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상대를 적이 아닌 동반자로 인정하는 관용과 상호존중이라는 보이지 않는 규범을 포기한 채 머독의 폭스와 인터넷언론처럼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며 필터링 역할ㅡ루즈벨트의 대법원 장악 저지와 닉슨의 탄핵 추진이 대표적인 예ㅡ을 엿바꿔 먹었기에 트럼프의 당선이 가능했다.

 

 

거대양당과 거대언론들이 필터링을 통해 트럼프라는 극단적 정치인을 걸러냈다면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반발을 불러왔겠지만, 미국 민주주의가 작동불능의 상태까지 내몰리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미국이 예외국가이자 유일제국에서 악의 축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클린턴에 대한 불만이 트럼프 당선에 비견될 만큼 혐오스럽고 꺼려지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토머스 프랭크의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웬디 브라운의 《민주주의 살해하기ㅡ보수주의자의 은밀한 공격》에서 인용문을 찾아 추가할 것).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은 동일한 사건으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전형적인 예인데, 이를 바로잡는 것이 전체주의와 사회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유민주주의가 앞으로도 유효할 수 있느냐에 대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브렉시트를 찬성한 영국인과 트럼프에게 표를 준 미국인은 저학력 백인노동자만이 아니다. 이들보다 더 많은 표를 준 집단은 전통의 중상류층과 밀레니엄 세대들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복지가 세계화와 자동화, 이민자, 해외노동자 등에 의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자식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는 부유층(나이로는 60대 이상, 학력으로는 대졸 이하)이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주도한 세계화와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잃을 가능성이 높아진 중장년층과 자유민주주의로는 해답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풀어줄 수 있다면 권위주의체제와 군사독재라도 상관 없다는 밀레니엄 세대들도 브랙시트와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지지 연합의 한편은 미국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신물이 난다고 공언하는 부유층, 대체로는 노년의 유권자였고, 다른 한편은 더는 잃을 게 없다고 믿는 가난하고 홀대받는 유권자였다. 그러니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신들의 개인적 환경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가진 게 거의 없어서 자신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에도 무관심한 사람들의 조합이었다……(브랙시트에 찬성한) 단절된 이들은 자기 집도 있고 후한 연금제도에서 혜택을 본, 나이가 많은 유권자들로, 이들 가운데 다수가 평생 동안 보수당을 지지해 왔다. 고립된 이들은 보다 젊은 청년, 윗세대가 누린 혜택을 자신들은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목격한 이들이었다. 이 있음직하지 않은 동맹의 양편을 잇는 고리 하나는 고등교육, 정확히 말해 그것을 받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즉 브렉시트 투표 패턴을 결정한 가장 큰 단일 요인은 대졸 여부였다. 영국에서 60세 이상 인구 가운데 대졸자는 거의 없다. 현재 18세에서 30세 가운데 거의 절반이 대졸자이지만(이들은 자신들이 지식 경제의 혜택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절반은 아니다(데이비드 런시만의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에서 인용)."

 

 

이런 면에서 볼 때 민주당 관계자와 자유주의 운동가들이 '노동계급과 하층계급 백인들의 선거 참여가 확대되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것'은 적절했다 할 수 있다. '그들은 (세계화와 자동화의 최대 피해자인 노동계급과) 하층계급 백인들이 낙태할 권리와 적극적 차별 시정 정책을 반대하며, 공립학교에서도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무제한적인 총기 소유를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매튜 크린슨과 벤저민 긴스버그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에서 인용). 민주당 관계자와 자유주의 운동가들은 트럼프의 출현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의 핵심 지지층 절반이 이들과 겹친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지만, 민주당 지지층이 정치와 선거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에 비해 공화당 지지층이 넓어졌던 것은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인터넷과 함께 했으며,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을 보고 말을 하고 관계를 만들며, 최근에는 쇼셜미디어로 중무장한 밀레니엄 세대들의 분노와 절망도 공화당 후보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으며, 긍극적으로는 표퓰리스트 정치인의 득세에 일조하는 결과로 이어질 터였다. 디지털 낙관주의자들은 이런 분석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으로 그들의 주장(또는 희망사항)은 상당 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중년 파산'의 당사자로써 인터넷과 쇼셜미디어 사용이 능숙해진 4050세대의 분노와 절망도 또다른 자양분이며, 정치적 양극화를 세대간 전쟁으로 확장시킨 디지털전사들인데 이들의 활약 덕분에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패가 예상됐던 2018년 중간선거 결과는 트럼프에게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와 분열상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디지털민주주의와 쇼셜미디어'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특히 이번 중간선거의 핵심이슈가 트럼프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오바마케어의 축소였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다(전체 유권자의 42%가 오바마케어의 축소를 핵심이슈로 선정했다). 더욱 두렵고 절망적인 것은 좁게는 미국의 유권자들이, 넓게는 전 세계 민주국가의 유권자들이 드럼프에게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인식이다. 드럼프이 등장에 경악하고 실소했다가 지속적인 지지율 상승에 설마설마하며 현실을 부정하다가 그의 승리를 지켜봐야 했던 것을 넘어 드럼프의 표퓰리즘과 막장정치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가 《정치의 약속》에서 "우리가 사막의 조건에서 고통받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인간적이며 여전히 본래적이다. 위험한 것은 사막의 진정한 거주자가 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는 일'이라고 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이번 중간선거로 입증된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 정부도 극도로 흥분하거나 위험한 상태에서는 폭력적이 되거나 심지어 잔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드물게 발생해 짧은 기간에 끝나버린다…그런데 민주국가에서 위협이 될 억압의 종류는 지난 시대에 존재했던 것과는 다를 것이다. 현대인의 기억 속에는 그 표본이 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방금 말한 모든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옛날말인 전제정치나 폭정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못할 것이다. 즉 위와 같은 사실은 새로운 사실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것을 어느 정해진 단어로 명명할 수는 없겠고, 단지 어떤 정의를 내리도록 해야 할 것 같다(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2권에서 인용)."

 

 

초기 미국사회를 둘러본 후 토크빌이 미래의 미국시민에게 남긴 이런 경고가 수백년의 세월을 격해 2018년의 미국에서 정확하게 재현된 것이 이번 중가선거의 결과는 아닐까.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미국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꿰뚫은 토크빌이 끝끝내 찾지 못한 단어는 '표퓰리즘 독재'가 될 것이며, 그가 내리고자 했던 정의는 제국의 종말에 내재된 잔인하면서도 압도적인 폭력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억만장자인 트럼프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오미 클라인의 《NO로는 부족하다》와 데이비드 프럼의 《트럼프공화국》, 피터 자이한의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에서 다룬 내용들을 조합하면 보다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클라인은 《NO로는 충분하지 않다》에서 신자유주의의 최종전사인 트럼프의 목표가 충격요법(IMF가 칠레와 아르헨티나, 한국 등에 강요한 구조조정, 긴축재정, 대규모 해고, 복지 축소, 공기업의 민영화, 금융시장 개방 등처럼 가혹하고 잔인하며 일방적인 조치들)을 많은 나라들에 적용할 수 있도록 경제대공황을 일으키고, 지구온난화에 가속도를 붙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ㅡ전통의 동맹에게도 관세폭탄을 남발하고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키우는 것을 넘어 환율전쟁으로까지 확대하려 하고, 사우디와 러시아와의 합작으로 석유가격을 계속해서 올림으로써 세계경제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가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국과 인도 등의 석탄 사용을 늘리도록 만든 것에서 클라인의 주장은 일정 수준 이상의 설득력을 얻는다. 국내의 어떤 언론도, 관련 전문가와 학자들도 말하지 않지만 미국은 40달러 전후의 세일가스와 2008년 금융붕괴의 피해를 국민과 전 세계로 돌린 천문학적인 구제금융과 무제한 양적완화 덕분에 뜻밖의 호황(일본도 마찬가지)을 누리고 있지만, 그런 호황이 영원할 수 없기에 경제대공황을 일으키는 것이 단기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ㅡ이번 중간선거의 결과가 트럼프의 승리로 해석된다면, 그래서 미국이라는 최강국의 모든 자원을 제멋대로 써버리고 전통의 동맹국에까지 위압적인 수단을 동원해 자신과 가족, 측근의 이익만 챙기려고 한다면 문제의 심각성은 계산불가능한 영역에 접어든다. 

 

 

사실 트럼프의 선거전략은 단순했다(p.37). 클라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트럼프의 당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p.36, p.249에서 인용). 《NO로는 충분하지 않다》를 통해 클라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압축하면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여서 그녀의 주장이 틀리기만을 바랄뿐이다(p.21~22).   (트럼프의 즉흥성이 문제가 되는 이유ㅡ롤스의 <정의론> p.103~104) 

 

 

프럼은

 

 

자이한은

 

 

다소 과격하고 과장돼 보이는 이들의 주장에 진실의 일단이 담겨있다면 상상하는 그 무엇보다 더욱 나쁜 참담한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 같은 표퓰리스트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정치적 도구와 기관, 법률과 규제와 규범 등을 무력화시키기 전까지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시민들의 민주적 대변자이자 타락하고 부패한 기득권의 청소부를 자처하는데, 이런 도덕적 말의 독점에 중독된 유권자들이 만만치 않은 지지세력으로 견고해졌음을 지방선거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이들의 심리적 해제와 동조화가 빨라지고, 그에 발맞춰 지지자의 숫적 확장이 지속되면 트럼프의 재선 확률은 급격하게 올라갈 수 있다. 이번 중간선거로 공화당 내에 적극적인 지지세력을 구축한 것이 공화당 장악으로 이어지면 재선 확률은 또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트럼프의 재선이 현실이 되면 더 이상 자신의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는 트럼프의 역습이 전 세계에 쓰나미처럼 덮칠 것이다. 진도 9를 넘는 트럼프발 정치적 대지진이 지구를 뒤흔들면 지구온난화의 급진화에 버금가는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금고를 가득채워줄 트럼프발 경제대공황과 측근들의 배를 불려줄 정치적 도발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3차세계대전까지는 아니더라도 트럼프와 그 일족, 측근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세계를 지정학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전쟁들이 인류를 지옥으로 내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는 항상 상상하는 그 이상을 보여줬기 때문에 모든 시나리오가 트럼프의 책상 위에 놓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맨앞에는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전력투구 중인 문재인 정부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가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다.    

 

 

 

트럼프를 볼 때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난다. 문재인 대통령을 볼 때도 그렇지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헌법을 유린하고, 인간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 여성을 희롱하고 이민자와 소수민족을 경멸하고, 인종차별 발언을 남발하고 정치를 타락시킬 때마다 정반대에 위치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난다(청문회스타인 노무현, 트럼프는 클라인의 p.48, 75). (나는 노무현에게서 미래의 지도자를 봤다를 활용할 것).    

 

 

"저는 사상의 완결성을 인정하지 않는 쪽입니다. 모든 사상은 소중하지만, 모든 사상은 완결성을 인정할 때 절대주의가 되고 사람에 대한 지배와 속박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상은 인정하지만 절대적인 사상은 인정하지 않는 쪽입니다. 사상이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존경할만한 사상이 있다면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민주주의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자기 이론의 근거, 자기 가치의 근거에 대해서 스스로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그리고 그저 관념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실로서 업적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위대합니다(노무현 2006년, '정치기획위원회 오찬 발언, 김종철·조기숙 외 《노무현의 민주주의》에서 재인용)."

 

 

(오늘은 여기까지. 초고라 상당히 많은 부분이 추가되고 보다 쉽게 다듬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