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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

늙은도령이 본 근현대사ㅡ현대성의 탄생6


결국 지난 250년 동안 인류는 지구 곳곳에 널려 있는 석탄을 이용하는 기술이 내연기관을 탄생시켰고,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의 엔진 노릇을 톡톡함으로써 노동분업(포드의 자동차 생산방식, 포디즘)의 1차 소비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석유의 다양한 이용과 전기전자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포스트포디즘(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고, 환경규제를 피해 전 세계적 재편성된 생산체제)의 2차 소비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이어 생산품(특히 모바일기기와 문화 콘텐츠)를 한 번 만들면 무한복제가 가능한 첨단통신기술의 발달로 지적재산권과 특허전쟁으로 중무장한 초국적기업들의 3차 소비 팽창을 들어설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제 각 지역 고유의 생명으로부터 추출한 유전자와 원소들을 특허권으로 독점해, 지역 고유의 치료법과 먹거리에서도 악마의 특허료를 받아내고 있다.      



이렇게 전 지구적 지배세력에게 무한대의 탐욕만 독점시켜준 채, 근대이성은 무한경쟁과 효율성의 신화인 폭력적인 현대성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했다. 부국들의 이익 독점을 위해 만들어진 OECD 가입국 중 각종 불평등이 가장 심한 미국과 한국에서 현대성의 폭력성이 극단에 이른 것도, 정부가 무한경쟁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무차별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국민 대다수의 삶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성이 폭력성을 띠게 된 것은 이것 말고도 또 다른 과학기술적 발전이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신에 의한 인간 구원의 확실성에 의문을 제공한 천체 망원경의 발전으로, 인류가 우주도 개척해서 경제적 부를 계속해서 늘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은 제시되지 않은 채,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다루어지는 방식으로 근대이성이 장담한 영원한 진보에 대한 환상만을 더욱 강화시켰다.  



물론 이 덕분에 우주공학과 관련된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각종 입자가속기 같은 수천억에서 수조, 수십조가 들어가는 각종 프로젝트들이 진행됐다. 투자 대비 경제성을 최고로 치는 현대성의 주창자들은 전 세계에서 수백~수천조 이상 들어간 우주공학으로부터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은 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각국의 정부들이 막대한 투자비를 투입한 것은 상위 1%의 배만 불려주었을 뿐 인류의 삶에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주공학의 발전은 현대성의 폭력성을 높여주는 두 번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한 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인류의 공멸을 걱정해야 하는 대량살상무기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과 소련과 미국 및 일본에서 폭발한 핵발전의 확산이다. 단 두 개의 원자폭탄과 핵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성물질의 파괴력은 인류로 하여금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기술에 의해 인류가 공멸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핵폭발과 핵융합으로 대표되는 무한대의 에너지는 근대이성이 선언한 무한한 진보를 이끌 핵심적인 과학기술로 포장됐지만, 지난 70년 동안 일어난 단 몇 개의 사건을 통해 인류는 정반대의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무한대의 에너지를 창출하는 핵폭발과 핵융합이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멸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과학기술임이 밝혀졌다. 이때부터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친구이기보다는 적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지만, 전 지구적 지배세력의 탐욕에 밀려 공멸을 두려워해야 하는 아노미적 현상 속으로 빠져들었다(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보라).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압승으로 끝난 소련과 동독의 붕괴와, 우주 개척과 무한대의 에너지 창출을 견인할 과학기술의 발전에 고무된 일부 지식인들은 《근대의 종언》이나,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문학의 종언》, 《탈산업사회의 도래》와 《문명의 붕괴》 같은 성마른 선언들을 우후죽순으로 내놓으며 인류를 현혹시켰다. 이들의 선언을 이용해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내세운 세력들이 영국과 미국을 거쳐 전 세계적으로 정권을 잡기 시작했다.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쥔 신자유주의 통치세력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진 1989년을 기점으로 해서 근대이성의 마지막 저항선인 복지국가의 이상마저 조금씩 녹여서 공기 중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견고하게 구축된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무너져내려 공기 중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격문이 거꾸로 뒤집혀버린 것이다. 마르크스는 전 지구적 지배세력의 종말을 예언했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며 마르크스의 추상적 예언을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40년 동안 전 지구적 지배세력들이 추진한 부정적 세계화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축적한 전 지구적 특권그룹은 모든 대항세력(노조와 시민단체)을 무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담보하고 새로운 발전 동력을 제시해야 할 전통의 국가 역할마저 시장 논리에 반하지 않도록 조정하고 축소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로벌 경제 세력의 하녀든 아니든, 국가란 쉽게 사표를 쓰고(과연 누구 앞으로?), 짐을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그 영토 내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에도 책임을 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온전한 면, 다른 세력ㅡ국내와 국외 세력 모두, 어느 경우든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ㅡ에 대해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굴복하기도 하는 면이야말로 그 핵심적 기능인 법질서 유지와 경찰 업무 기능을 보존할 뿐 아니라 확대, 강화할 수 있게 해주는 면이다. “시장을 더욱 개방해, 그 경계가 공적 영역까지 스며들어 오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정부는 시장 실패나 외부 효과 같은 시장이 인식하기를 거부한 문제의 청구서를 집어 든다. 그리고 시장의 힘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패배자들을 위한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시장의 힘을 규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방적인 ‘부정적’ 세계화ㅡ즉 비즈니스, 범죄 또는 테러리즘의 세계화, 그러나 정치와 사법 기구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ㅡ앞에 국가가 항복하는 일은 그 대가로 사회 불안과 붕괴를 가져왔다. 이로써 인관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지면서,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덧없는 것이 되고, 집단에 대한 열의와 연대성은 깨지기 쉽고 폐지가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 결과 국가에는 사회복지국가를 수립하고 유지하며 운영하는 일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 주어지게 된다. 규제가 없어진 시장과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로 이따금 일어나는 실패 같은 것이 아니라, 매일처럼 발생하는 평범한 일에서 정부가 짊어져야만 하는 사회적 부담이 계속해서 늘고 있으며, 그것도 점점 빠르게 늘고 있다.



바우만의 성찰은 매우 적절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들이 남아 있다. 명쾌하게 근대의 종말을 선언하기에는 여전히 근대적 잔재들이 세계의 중심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베이컨의 4개의 우상비판과 데카르트의 사유 예찬, 흄의 회의하는 이성에서 시작된 합리적 이성의 근대는 자연의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난 예측 가능하고 안정된 체제ㅡ최고의 주권으로서의 국민국가와 중앙 집중화된 행정을 담당하는 거대관료조직과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시민의식이라는 세 개의 축이 근간인ㅡ에 대한 믿음이 변함없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근대에 이루어진 고전물리학적 성찰이 제공한 모든 것이 질서 잡힌 상태ㅡ뉴턴의 만류인력에 근거하고,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완성된ㅡ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런 세 개의 축에서 구축된 합리적 이성ㅡ거의 대부분 합리적이지 않았지만ㅡ이 주조해낸 합리적인 이성과,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관조를 폐기시킨 과학에 대한 맹신은 폭력성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는 기술-경제적 발전의 신화와 함께 현대성의 핵심에서 떠날 기색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