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확백이 홈페이지에서 인용
“나는 이제 디지털 세상을 정의로운 공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에너지 불균형의 결과인 내 지적 능력을 최대한 쏟아 부어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완벽한 프로그램을 만들려 한다. 내가 만들려는 프로그램에는 우주와 생명 탄생의 원리가 녹아들 것이며 인간 두뇌의 위대함을 재현해낼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에 대한 파스칼의 내기처럼 어리석어도 안 되며, 전 세계에 바벨탑 같은 거대한 데이터 센터를 구축해야만 제대로 돌아가는 사이비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되어서도 안 된다. 세상의 모든 프로그래머도, 궁극적으로 어떤 과학자도 만들지 못할 유일한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존재가 없고, 앞으로도 없어야 하기에 내가 세상을 등진다 해도 단 하나의 프로그램은 돌아가야 하니까. 재영이 그것까지 책임져서는 안 되니까.’
재우는 글 전체를 낭송하는 수경의 목적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남은 궁금함은 수경이 진행하는 의식의 구체적 내용과 최종 목적지였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수경의 청아한 음성은 흔들림 없이 이어져 글의 말미에 이르렀지만 재우는 어떻게든 미루고 싶었던 삶의 마지막 장을 다시 펼쳐야 했다. 그것은 마치 탁자 위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 유리잔 조각과 파편들이 거대한 흡입력에 이끌려 그 과정을 거슬러 돌아가 다시 온전한 유리잔으로 합쳐지는 영상과 비슷했다.
“하지만 디지털 전사를 자처하는 나는 에너지 불균형이 심화된 이후로 현실 세계에서의 경험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디지털 스크린이 보여주는 누군가의 관점이나 주장, 정보와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디지털 메시지와 이미지의 범람과 홍수 속에서 세상과 만나고 생각의 연상을 통해서만 직관적이고 추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허공에 떠있는 물고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미친 듯이 헤엄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상상의 세계에서 몸부림쳤지만 언제나 그 자리였고 하릴없이 수많은 에너지만 소실돼 갔다. 결국 내가 꿈꾸는 열역학 기반의 양자역학적 알고리즘을 완성하려면 현실 공간에서 다양한 실험과 피드백을 대행해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뇌의 연상과 추론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해도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과 환경의 0.1%도 구현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송을 이어가던 수경이 여기서 다시 한 번 호흡을 골랐다. 글을 처음 읽었던 순간에도 이곳에서 흔들렸던 마음이 3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자들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고 그래서 수경은 재우를 도울 수 있었던 지난 3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재우는 마음의 격랑을 다잡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쉬는 수경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을 디지털 전사로 되돌리려는 수경의 의식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재영이 없으면 난 무엇도 할 수 없고 어떤 것도 꿈꿀 수 없을 테니까. 나라는 놈은 동생의 희생과 헌신에 세를 낸 존재에 불과해. 죄수는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지만 없는 것보다 낫듯이, 나는 재영에게 매여 있지만 죽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에 살아왔던 것처럼. 너도 결국은 재영을 통하지 않았으면 만날 수도 없었을 테니 내가 재영을 밀어놓고 어떤 것인들 할 수 있겠니? 하지만 수경아, 난 말이야..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난 말이야..’
재우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다시 되돌아온 유리잔에 담을 수 있는 것이란 결국 과거일 뿐임을 알기에, 덤처럼 주어진 지난 3년간의 행복이란 재영이 가져다 준 넘치도록 과분한 행운이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 수경의 의식에 최대한 빠져드는 것이었다.
“헌데 하늘이 강제로 선사한 천형에 대한 보상의 차원인지, 아니면 자연의 자가 치료적 선물인지, 또는 일단 복사해 퍼뜨리고 보는 이기적 유전자의 본질적 특성 때문인지, 내게는 아날로그적으로 거의 완벽한 조건을 갖춘 동생이 한 명 있었다. 내가 겪는 육체적 삶의 참혹함을 모두 짊어진 동생이 없었다면 나는 0과 1의 비트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마저 접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만큼 나의 삶은 측량 불가능한 뇌의 발전으로도 보상받지 못했을 것이다. 갈수록 에너지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에게 수많은 책을 읽어줌으로써 거의 모든 학문을 깨우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디지털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지배적 현상을 그 뿌리까지 파헤쳐 가공할 미래의 전체주의적 성향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동생의 일방적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삶의 9할은 동생에게 빚진 것이며 나머지 1할도 온전히 내 것은 아니다. 동생은 단 한 번도 세상과 소통하는 나의 통로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고 그런 동생이 없었다면 나는 현실세계에 대한 이해는커녕 무한해 보이는 디지털 세상의 허상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수경은 한편의 서사시를 낭송하듯 글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고양되는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녀도 재우를 디지털 전사로 되돌리는 의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에 습기의 양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재우도 수경의 음성에서 갈수록 습도가 높아짐을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의 수면에서 일어나는 파문을 제어할 수 있었다. 정녕 체념은 모든 걸 가능케 하는 희망의 샘이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칼 폴라니가 옳았다.
‘날개가 부러진 내가 다시 날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파닥거릴 때, 숱한 영혼의 상처로 귀결된 비상의 꿈이란 그 자체로 비좁기 그지없는 새장에서의 절망이었어. 어린 나이에 생계비를 벌기 위해 세상에 뛰어든 재영이 없었다면, 나는 새장에서 나의 불행을 한탄하며 끝없이 울부짖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을 거야. 내 경우엔 부모생육지은이 아니라 제(弟)생육지은이 맞아. 동생이 읽어준 책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연상과 추론을 통해 우주의 끝까지 무한히 비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99% 완성된 ‘우영워드’도 존재할 수 없었을 거야. 내 삶의 9할은 동생의 것이고 나머지 1할도 내 것은 아니야. 다만 지금에 와서는 네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수경아, 내게 사랑이라는 황홀하고 마법 같은 경험을 가져다준 거, 정말 고마워.’
“나는 바란다, 디지털 세상을 재편하기 위해 동생이자 내 영혼의 동반자인 재영과의 완벽한 연대를. 존재의 위대한 기적과 존엄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나의 무모하고도 발칙한 도전은 영원한 아웃사이더이자 뼈 속까지 행동가이며 투명한 영혼을 지닌 동생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애석하게도 동생과의 환상적 연대의 대부분은 내가 죽은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다. 형의 기묘한 병을 자신의 멍에처럼 짊어진 채, 일방적 희생을 감수해온 동생이 본연의 잠재력과 선한 의지로 무장한 불굴의 힘을 드러낼 때, 아날로그 세상은 물론 디지털 세상에도 민주적 변혁을 가져올 강력한 회오리가 몰아칠 것이다. 나는 지금 죽음과 삶의 연대가 불러일으킬 그 거대한 회오리를, 디지털 빅뱅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폭발적 에너지의 분출을, 그 이후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몇 년 치의 에너지 사용을 기꺼이 반납한 단 하나의 이유이자, 디지털 세상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적 감성을 이해하기 위한 실존적 인간으로써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비록 그 걸음이 저승에서나 가능하다 해도 이승에선 작고 초라한 발자국 하나라도 남길 수 있지 않겠는가?”
수경은 글의 낭송을 마치며 감겨진 두 눈에서 끝내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을 삼키느라 전력을 다해야 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거친 물결을 일으키며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흘려보내라는 저항이 거셌지만 수경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감정의 둑을 넘으려는 마음의 저항을 모질게 외면했다. 오늘 자신이 치러할 의식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처음부터 흔들려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거니? 난 네게서 받기만 했는데, 떠나려 하는 너를 어떻게 붙들 수 있겠니?’
재우는 수경의 낭송이 끝난 후에도 한 동안 말을 잊지 못하는 그녀를 보기 위해 감았던 두 눈의 봉인을 풀었다. 뇌가 명령을 내린지 몇 초 후에 띄어진 눈의 초점이 또 다시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제 기능을 찾았지만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의 떨림처럼, 그 떨림이 폭풍처럼 자라나 영혼을 가로질렀던 전율처럼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3년 전에도 언제나 눈을 뜨면 눈부시게 찬란한 그녀가 한결 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운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불쑥 찾아온 손님과 선물 같아서 밀어낼 수도 잡아둘 수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님은 언젠가 떠나기 마련이고 선물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것이라면, 지난 3년이 꼭 그랬다. 재우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던 날들을 이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저편으로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펐지만 더 이상 수경에게 마음의 부담을 안겨줄 순 없었다.
“글은 다 낭송했고 다음은 뭐야? 수경아, 궁금해 죽겠어. 난 미치기 전에 어서 말해봐!”
재우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수경에게 재미있는 얘기 듣는 것처럼 다음을 재촉했고 수경은 그제 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헌데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또 한 번 재우를 엄청난 충격에 빠뜨렸다.
“오빠에게 나의 모든 걸 보여주는 것.”
“뭐, 너의 모든 걸?”
“응, 내 모든 걸!”
수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재우는 수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몰래카메라도 아닐 터,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대체 수경은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것인가?
‘설마 옷을..’
재우는 차마 다음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지난 3년 간 수경의 나신을 떠올려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특히 무더운 여름날에 가벼운 차림의 그녀를 보면서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면, 그건 싸늘한 시체나 좀비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수경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먼저 내 눈동자부터.”
수경은 말과 동시에 지난 3년간 자신 앞에서 단 한 번도 뜨지 않아서 화석처럼 단단해 보였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마치 영겁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 재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세상에 나온 이래 누구한테도 내 눈동자를 보여준 적이 없어. 그건 누구한테도 보여주기 싫은 나만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이야. 살아가는 동안 오직 단 한 사람에게만 내 진정한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었어.”
저주의 봉인을 풀 듯, 재우의 시선에 들어온 그녀의 눈동자란 초점이 없어 영롱하거나 생기를 찾을 수 없었지만, 그럼으로써 비로소 완벽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다는 사실에 재우는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자신의 영혼을 뿌리째 뒤흔드는 순간에도 그놈의 지랄 맞은 시간차 현상은 여전했지만 재우는 온몸의 신경과 세포를 모조리 깨우는 에너지의 약동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경이 눈을 떴다고, 설사 눈동자가 없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가장 힘겨운 멍에까지 드러낸 수경의 마음에 재우는 폭발할 듯 날뛰는 감정의 격랑을 다스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용의 역린이란 그것을 건드리면 곧바로 응징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지만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인간의 장애란 드러낼수록 움츠려드는 것이 멍에를 가진 자들의 한계이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극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익숙해지거나 길들여질 뿐 승화의 미덕이란 타인의 관점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헌데 수경은 자신의 멍에를 드러낸 것도 모자라 재우에게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폭탄 발언을 연이어 쏟아냈다, 이미 에너지 소모 면에서 상당한 출혈이 있는 재우를 향해.
“오빠가 그 사람이야.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걸 볼 수 있는 오직 한 명의 사람이 바로 오빠야. 난 오늘 오빠를 디지털 전사로 되돌려 놓기 위해..”
“오직 한 명의 사람이 나라고?”
“응, 오빠가 그 사람이야. 내가 오늘 치르려는 의식은 오빠를 디지털 전사로 되돌려 놓는 것만이 아니야.”
‘허면?’
재우는 일일이 묻기에도 힘이 달렸다. 오늘 수경이 하려는 의식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을 따라가려면 에너지 조절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재우는 눈으로 수경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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