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최저임금은 6030원이다. 인상률이 정해졌을 때, 노사 양측에서 그런 데로 적정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하고, 쓰레기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인상률이 너무 높아서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을 한단다. 그렇다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최저임금의 적정선은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해도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이래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모든 근로자의 연봉도 올라가는 것일까?
우리는 최저임금과 관련해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기업(특히 중소기업) 측에서는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직원 전체의 월급이 올라가 인건비 부담이 경영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고 울상이다. 노동자 측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을 최저임금이 보장하지 못한다고 울상이다. 정작 최저임금의 인상에 따라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 및 저임금, 임시직 노동자들의 요구는 배제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최저임금에 적정선은 없는 것일까? 최저임금의 적정선을 판정하는 기준들이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따라서 이번 인상률이 적정한 것일까, 아니면 턱없이 부족한 것일까? 아르바이트나 일용직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이 제대로 적용될까? 인건비에 부담을 느낀 중소기업은 외국인노동자를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굳건히 자리 잡은 나라이다. 헌데 우리가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여러 글에서 밝혔듯이 부정적 세계화의 주범인 신자유주의가 79년과 80년에 걸쳐 영국과 미국에서 대처와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급속도로 퍼진 경제 사조인가?
단언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실체, 변화와 파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무한경쟁을 일상화하는 신자유주의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태어나 보니까 전통이나 관습, 일상의 환경처럼 신자유주의는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적응하면 그만일 뿐 알고자 하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위 88%로 대표되는 우리는 매일같이 당하고 휘둘리며, 저들이 촘촘하게 쳐놓은 여러 개의 그물망(통치 메커니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최저임금도 그들이 쳐놓은 그물망 중에 하나이며, 각자도생이라는 자발적 노예를 대량으로 만드는 최고의 수단 중 하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최저임금이 생각보다 많이 올라도 그것 또한 시장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술의 하나일 뿐이다.
이 3권의 책만 읽어도 신자유주의의 학문적 이해가 정립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자유주의 경제학(자유방임을 모토로 하는 중농주의 경제학으로 고전파 경제학이라고 한다)을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된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에 그 원형이 있다. ‘가능한 한 최대의 경쟁을 그러나 최소한의 계획’을 모토로 하는 질서자유주의는 적극적 자유주의,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권위적인 정부가 방해되는 것들을 가지 쳐주는 선별적 개입의 자유주의라고도 한다.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무정부적 자본주의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에서 분리된 자유주의 경제학이 정치의 내부에 자리하면서 탄생한 통치술의 총합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가격이 핵심)으로서의 자유시장 메커니즘을 국가의 모든 부분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교육과 결혼, 가족 같은 지극히 사적인 것들마저 시장경제의 종속변수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경제화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절대 시장경제라는 존재의 기초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시장경제의 주체인 기업이 시장경제를 통해 영원히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기업 위주의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교환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시장 메커니즘을 가격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경쟁을 극대화했다.
이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국가의 권력과 법률, 선별적 규제를 동원해 시장경제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에 개입해서 시장경제가 가장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자유방임이 아닌 적극적 자유주의나 개입적 자유주의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세상을 시장경제화해서 상위 1%에게 하위 99%의 부를 이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권위적인 통치권력이다.
신자유주의는 미래의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시장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을 재교육해서 경쟁을 확장하고, 법률과 규율 및 규범을 통해 모든 인간을 시장경제에 종속된 존재로 만든다. 시장경제에서 탈락한 자들은 경쟁의 법칙에 따라 굶어죽을 수도 있다. 경쟁력이란 자신의 책임하에 갖춰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는 개인의 책임일 뿐이며 공짜 점심은 없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주축인 기업(그중에서도 오너와 최겨영영진, 대주주들로 구성된 사측)을 위해 정부의 개입을 최대화하고 최적화하는 궁극의 권력이다. 가격과 경쟁이라는 두 개의 메커니즘을 통해 기업 중심의 시장경제를 최대한 활성화하고, 경쟁 메커니즘을 교란하는 독점기업의 출현을 제한하고 해체(IMF 때 한국의 재벌을 해체하려고 했던 이유)하며, 필요하다면 최저임금을 올려서라도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만든다.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돈들이 상위 1%에게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개인을 천부인권을 지닌 시민이 아니라, 기업적 입장에서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쟁력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경제적 착취의 대상으로 본다.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 경쟁력을 지닌 채 시장경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든다. 개인은 채용되기 위해 인적자본(능력자본)으로서의 경쟁력 제고에 전념해야 하며, 이것 때문에 선행교육과 스펙의 중무장이란 무한경쟁의 포로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가 부모나 가족, 사회나 정부가 개인에 투자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장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업도 시장경제의 주체이지만,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에서 도태하지 않도록 더 높은 경쟁력을 창출해야 한다. 그에 따라 임금이 올라가거나 고용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기업과 개인에게 끊임없는 혁신이 주문되며,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는 만큼 그에 따라 예비 노동자와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도 계속해서 올라간다.
가격 대비 경쟁력에서 뒤처지는 기업은 도태되고, 그 자리에는 다른 기업이 들어서며, 한 기업 내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부서는 구조조정의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시적 구조조정은 이런 과정을 통해 정당화된다. 신자유주의가 위험을 등지고 사는 삶, 위험과 함께 하는 삶을 장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에 투자해야 하고 창업도 마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린 노동자와 노동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관리도 국민의 세금을 독점하는 정부가 맡아야 한다. 그들이 시장경제에 해가 되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무한경쟁의 시장경제 메커니즘에 포획될 수 있도록 각종 부조와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시장경제에 해가 된다면 부조와 복지비용의 관리를 통해 도태시켜도 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의 활성화가 목적이기 때문에 생필품을 구입하던, 대박이나 창업 및 안정적인 정규직을 꿈꾸며 공부를 하던, 다시 시장경제에 뛰어들기 위해 병을 고치던,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본소득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최상의 결과를 창출한다. 좌파의 논리라도 시장경제에 도움이 되면 얼마든지 수용한다(좌파 신자유주의의 기원).
세계화를 추진하는 이유도 시장경제의 활성화 때문이다. 가격과 경쟁의 메커니즘에서 도태되는 분야에는 적정한 수준의 보조금도 묵인한다. 그것이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의 틀을 해치지 않는다면 품목별, 국가별 예외조항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공황이 도래하던, 경기침체가 길어지던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허용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기본 틀만 유지하면 된다.
이렇게 지구를 상위 1%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업 위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목표다. 전 지구적 시장을 구축하는 부정적 세계화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다. 인구 조절을 위해 공중위생의 확대도 필요하고, 각종 자선사업도 장려된다. 기업 위주의 시장경제만 유지될 수 있다면, 이익의 일시적인 감소도 감내할 수 있다. 판돈을 키우는 일은 너무나 쉬워서 그것 때문에 고민할 이유란 없다(영원히 지속되는 경제위기란 없다).
임금의 평균값으로 계산하던,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계산하던 최저임금 또한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노동자들을 시장경제 하에 두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다윈의 진화론과 뉴턴의 역학, 정부의 개입과 언론의 동원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시장경제는 자기조정 능력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영원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일정 시대를 풍미한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공동체나 조직, 사회나 국가에 의해 자유라는 것이 출현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진화해온 시장경제의 총화이자 통치의 기술이다. 그래서 좌파 신자유주의도 가능하며, 우파 신자유주의도 가능하다. 인류의 삶 속에서 시장경제가 절대적 요소라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신용시스템이 2008년 금융위기의 수준을 넘어 완전히 무너지면 모를까?
하지만 최종대부자로서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벗어나려면 기차에서 뛰어내리던지, 기차에 탑승하고 있던지, 아니면 기차를 멈추던지 세 개의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파헤친 푸코가 말년에 그리스철학의 핵심주제인 자기배려라는 가장 근원적인 성찰로 돌아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뛰어내리려 했던 것이다.
내가 시장경제의 부속품이라면, 그런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기배려에 최대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내가 정말로 소중하다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연결만 유지해야 한다. 시장경제에 속하지 않은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최저임금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최저임금이란 시장경제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최하의 마지노선으로 주어지는 생존임금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신자유주의는 지구라는 차원에서 자원의 한계와 자연의 반격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들이 말한 무한한 성장이란 끝없는 퇴행이었으며, 시장경제마저 위협하는 최악의 메커니즘이었다. 생산과 소비의 확대라는 면에서 전체 인구로서의 인류를 관리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정보통신기술과 자동화 등의 확장으로 소비를 위축시키는 고용없는 성장이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구온난화까지 급진성을 띠려고 한다. 이런 총체적 위험 때문에 최저임금으로 대표되는 생존임금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수준에서 한참 부족하게 됐다. 신자유주의는 실패했지만 시장경제는 유지돼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존선 근처에서 각자도생을 위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 한다. 최저임금 속에 숨어 있는 첫 번째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최저임금에 숨어 있는 두 번째 진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본소득제의 기원과 효과, 정당성에 대해 (2) | 2016.01.30 |
---|---|
구조적 부정의의 피해자, 하우스와 랜트푸어 (4) | 2016.01.30 |
이종걸, 삼성을 돕고 박근혜표 경제법안을 통과시키자고? (8) | 2016.01.20 |
이명박근혜 8년, 지옥에 들어선 한국경제 (17) | 2016.01.10 |
위안부협상 끝내자마자 노동개악 들고나온 박근혜 (16) | 2015.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