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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에게, 그 두 번째



유럽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통곡부터 할 것이다.”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인류가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성장과 풍요를 위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규정한 다음에 생긴 말입니다. 16~17세기에 걸쳐 이런 생각이 굳어졌고 19세기에 최고조에 이릅니다. 이런 인식의 변화를 이루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3인의 인물과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격하시킨 베이컨의 선언

 

먼저 3인의 인물부터 말하겠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프란시스 베이컨이고 다른 한 명은 데카르트이며, 나머지 한 명은 헤겔입니다. 먼저 전문적인 실험처럼 과학적인 경험과, 과학의 언어인 수학적 지식이 부족했지만, 과학기술의 미래를 정확히 내다는데 탁월한 식견을 지녔던 베이컨이 신의 섭리가 담겨 있는 자연을 숭배나 공존의 대상에서 이용과 지배의 대상으로 만든 유명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쇄기는 조야한 발명품이고, 대포는 이미 익숙한 물건이었고, 나침반은 벌써 이전부터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 물건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나는 학문에 있어서,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또 다른 하나는 재정, 무역 그리고 항해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던 것이다......우리는 말로만 자연을 지배할 뿐 자연의 강압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의 인도를 받아 발명에 전념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자연 위에 군림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베이컨의 선언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6세기 유럽을 풍비박산 낸 베니스 대지진 때문이었습니다. 베니스 대지진으로 수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수십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자, 신의 은총과 신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자연의 비정함에 대해 극도의 불신이 유럽을 사로잡았습니다. 신은 인간의 삶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자연은 잔혹한 존재여서 관리가 필요하다는 당시의 분위기가 베이컨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결국 베니스 대지진과 베이컨의 선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가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과 확장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동원해 자연을 연구하고, 대지진을 예방하며(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용 가능한 모든 것을 개발과 진보를 위해 사용하게 됐습니다.  

 

 

⊙ 베이컨의 성찰이 불러온 결과

 

이후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하며 이기적인 인간의 경제활동이 시장을 통해 조정을 거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고전파경제학이 대두했습니다. 때맞춰 내연기관을 이용한 산업혁명이 이어지며 경제규모가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천연자원과 원자재를 구하기 위해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착취하고 파괴하는 일이 자행됐습니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위가 모두의 이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착취와 파괴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처음 시작된 런던은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 중국의 스모그와 황사에 버금가는 치명적인 스모그로 몸살을 앓았고, 런던의 템즈 강과 토지들은 죽음의 물과 황폐한 땅이 될 정도로 오염됐습니다. 자연으로부터 천연자원을을 무차별적으로 착취해 대량생산에 돌입한 대가로 런던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진행된 모든 도시들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공중위생의 중요성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도시로 떠난 일꾼 때문에 농촌은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다른 유럽의 도시들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으며,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죽어버린 자연을 살리기 위한 노력들이 본격적으로 진행됐습니다. 덕분에 현재의 유럽이 전 세계에서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철저히 파괴된 자연을 살려낸 거의 유일한 지역으로 남게 됐습니다. 농촌도 정부의 지원금을 통해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았고, 도시에서 나온 세금으로 농촌에 각종 복지혜택을 제공했습니다. 지구온난화가 갈수록 급진성을 띠고 있지만 유럽의 경우 다른 어떤 지역보다 준비가 철저해 피해의 규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근거는 마련했습니다.   

 




대신에 그보다 더 넓은 지역(미국, 아마존 지역, 아프리카, 중국, 인도, 남미와 아시아 국가 등)이 몸살을 앓게 됐습니다. 칼뱅교의 후예들이 이주한 천혜의 신대륙에서는 5천만~1억 명에 이르는 원주민이 학살됨(침략자가 가져온 전염병도 학살이다)에 따라 자연의 파괴와 착취가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미국에서 개발과 성장의 폐해에서 안전한 곳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세일가스의 개발이 본격화되면 환경 오염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늘어날 것입니다.

 

 

특히 세계화에 동합된 국가일수록,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국가일수록 이런 피해에 무방비로 놓이고 있습니다. 근대이성의 산물 중 하나가 자유주의 경제학(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고전파경제학으로 자기조정 시장과 자유무역이 핵심으로, 이는 자유주의의 본성인 자유방임을 추구한다)인데, 이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통해 식민지시대와 현재의 전 구지적 시장체제로 발전하는 동원 인류의 삶은 퇴행을 거듭해 왔습니다.

 

 

이런 인류의 퇴행이 가능했던 이유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현재와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최대 4~5년 후에는 정치체제가 무너지던 경제체제가 무너지더 둘 중 하나의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며, 비관적인 상황을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박근혜의 줄푸세는 스티글리츠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가장 경계하는 최악의 신자유주의 정책입니다.    

 

 

첫째, 시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았고,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둘째, 정치 시스템은 시장 실패를 바로잡지 못했다. 셋째, 현재 경제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공정하지 않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 공업 국가들이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이 세 가지 주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다. 불평등은 경제 시스템의 불안정을 낳고, 이 불안정은 다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여러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사상 최초의 경제학이 농산물의 국제무역을 다룬 중농주의였듯이, 사실 최초의 시장도 정의의 시장으로 공정가격을 형성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없게 각종 규제가 생겼고, 그것 때문에 가장 가난한 사람이나 가장 부자난 생필품은 같은 가격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보라). 이것이 자유주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경제학까지 연이어 더해지며 자연을 회생불능한 상황까지 몰고 갔습니다.



한국의 경우 서울고 수도권에 모든 발전과 자본이 집중투입됨에 따라 지방은 서울과 수도권의 내부 식민지로 전락했고 농천의 파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출발점이 농촌의 젊은이들을 도시로 빼내기 위한 새마을운동이었음은 지금의 6070세대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갑자기 편리해진 몇 가지 혜택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부유하게 한 것 같지만, 그 대가가 수십년에 걸쳐 농촌을 파괴했음은 자작농의 전멸과도 같은 결과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농촌을 이끌 젊은 세대가 없어 외국에서 사람을 수입해와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런 공멸의 위험은 거의 전적으로 이런 근대이성에서 출발했으며, 그 시작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산업혁명의 무분별한 확장에 있습니다.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유럽의 선진국을 휘몰아쳤던 것도 산업혁명의 어두운 면이고, 직업을 잃고 환경까지 나빠진 노동자들의 당연한 대응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 제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이어받았는데, 이들이 진행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현대에 더욱 분명해진 베이컨 성찰의 폐해

 

진보와 성장을 위한 개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미래의 비전을 찾고자 했던 필립 맥아이클의 《거대한 역설》을 보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명확히 보여줍니다.미국식 대량 소비 경제를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면 지구 같은 행성이 여러 개 필요하다...우리가 알고 있는 개발 모델은 자기 파멸적 모델인 것이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존 그레이가 《추악한 동맹》에서 미국은 자체적인 경제활동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미국이 현재의 소비수준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외부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2003년 4월 현재 그 규모는 하루 14억 달러씩 늘고 있다”고 밝힌 것처럼, 미국 국민의 소비를 지탱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천문학적인 빚이 쌓이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래서 필자가 미국이 만악의 근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만 120조달러(비공식적으로 따지면 300조달러도 될 수 있다)에 지어진 허상인 이유도 미국의 과소비를 전 세계가 떠받쳤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과소비를 지탱하려면 지구 같은 행성이 5~6개가 필요할 정도인데, 이것 때문에 각국은 미국의 채권을 사거나, 천문학적인 달러를 보유하거나, 일방적인 덤핑 판정 등을 통해 수십조에 이르는 벌금을 내고,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그들의 무기를 반강제적으로 사들입니다.

 

 

이런 현상을 걱정한 아이젠아워 대통령은 퇴임사에서 군수산업체를 경계사는 사임문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는 이들이 창출해낸 폭력시장의 규모가 지구온난화와 빈부의 양극화로 점점 거대한 경제시장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일으키는 전쟁은 거의 금융업자가 일으키기 때문에 그들의 시장은 무한히 넓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국방비를 대납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했습니다.


 

이 거대한 군사 조직과 대규모 방위산업체 간의 결합은 미국에겐 생소한 경험이다. 그 전체적인 영향력, 즉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는 정신적 영향은 모든 도시, 모든 주의 의회, 연방정부의 모든 기관에서 느껴진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 내포된 중대한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노력, 자원, 생계 모두가 관련되어 있고, 사회의 조직 또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군산복합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들이 부당한 영향력을 획득하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 잘못 주어진 권력의 재앙적 번성은 이미 시작되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전 세계의 부는 0.1%의 금융업자(유대인이 대부분이다)에게 집중되고, 그들의 주변에서 세계화를 진행하고 이끄는 1%의 슈퍼리치와 국제적 엘리트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1%가 소유하고 있는 자산은 전체 자산의 45%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이를 상위 10%로 넓히면 전체 자산의 90%까지 늘어납니다. 며칠 전에 발표된 것에 따르면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보다 2배나 크다고 합니다.       

 

 

21세기 최고의 현자로 떠오른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인류의 성장을 견인해온 제조업 중심의 무거운 경제가 막을 내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무너져 내려, 아직은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수 없는 금융과 정보통신 및 서비스 분야처럼 가벼운 경제와 뒤엉켜 액체처럼 유동적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세계경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극도의 불확실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초국적기업의 관점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이 양극화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며, 그럴 경우 세계는 극도의 혼란과 공포로 넘쳐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우만은 이어진 저서에서 자시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는데,  바로 그 책인《유동하는 공포》에서 극대화된 불평등과 불확실성의 피해가 개인에게 돌려지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글로벌 경제 세력의 하녀든 아니든, 국가란 쉽게 사표를 쓰고ㅡ과연 누구 앞으로?, 짐을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그 영토 내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에도 책임을 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온전한 면, 다른 세력ㅡ국내와 국외 세력 모두, 어느 경우든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ㅡ에 대해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굴복하기도 하는 면이야말로 그 핵심적 기능인 법질서 유지와 경찰 업무 기능을 보존할 뿐 아니라 확대, 강화할 수 있게 해주는 면이다. “시장을 더욱 개방해, 그 경계가 공적 영역까지 스며들어 오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정부는 시장 실패나 외부 효과 같은 시장이 인식하기를 거부한 문제의 청구서를 집어 든다. 그리고 시장의 힘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패배자들을 위한 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시장의 힘을 규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방적인 ‘부정적’ 세계화ㅡ즉 비즈니스, 범죄 또는 테러리즘의 세계화, 그러나 정치와 사법 기구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ㅡ앞에 국가가 항복하는 일은 그 대가로 사회 불안과 붕괴를 가져왔다. 이로써 인관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지면서,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덧없는 것이 되고, 집단에 대한 열의와 연대성은 깨지기 쉽고 폐지가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 결과 국가에는 사회복지국가를 수립하고 유지하며 운영하는 일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 주어지게 된다. 규제가 없어진 시장과 부정적 세계화의 결과로 이따금 일어나는 실패 같은 것이 아니라, 매일처럼 발생하는 평범한 일에서 정부가 짊어져야만 하는 사회적 부담이 계속해서 늘고 있으며, 그것도 점점 빠르게 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과 인도가 이들의 뒤를 이어받는 중인데, 이들 후발국가들이 유럽과 미국의 전철을 똑같이 밟으면 인류는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촉발된 장기침체의 결과가 구체화되는 2050년을 전후로 해서, 지구의 역사상 6번째로 일어나는 종말에 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결과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남길 것입니다. 근대이성에서 본격화된 시장의 탐욕을 털어낸 지구의 역사는 계속되겠지만.   

 

 

◉ 신의 존재를 격하시킨 데카르트의 선언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격언을 알고 있습니다. 근대이성을 정립한 최초의 인물인 데카르트는 신의 섭리(자연과 인류의 존재를 주재하고 있다고 알려진)에 대한 부정을 이루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회의적 방법을 통해 끝없이 성찰을 이어간 이래 신의 뜻이나 영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오직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이성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영혼과 육체에 앞서는 이성(성찰의 정수)의 가치만을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인류는 신의 창조물인 자연과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존재로 격상됐습니다. 즉 기독교가 말한 신의 섭리에 의한 우주와 자연, 인간의 신인동형설에서 벗어나 이성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것(인간의 노동까지)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은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의 확장을 견인했고, 온갖 규제를 통해 정의의 시장을 구축하려던 중상주의에서 벗어나 최초의 정치경제학인 자유방임적이고 자기조절 능력이 있는 시장 경제의 탄생을 앞당기게 됐습니다.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선언한 근대이성의 위대함은 종교에 억압받던 과학과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견인했고, 인류는 자연법이 아닌 사물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팽창과 경쟁의 시기로 접어듭니다.

 

 

자연에 대한 군림과 신의 섭리에 우선하는 이성을 선언한 이 둘의 성찰은 직간접적으로 근대국가를 지배했고, 인류 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다윈의 진화론과 헤겔의 변증법에 영향을 미칩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승자만이 진화한다는 잘못된 신화를 창출했고,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주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는 최악의 오판을 인간의 인식에 깊숙히 뿌리내릳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 다윈의 진화론의 탄생과 그 영향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윈의 진화론은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조성한 근대이성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다윈이 이 둘의 저작들에 근거해서 진화론을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지식세계는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다윈도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성이 최고라는 생각은 인간을 자연의 적자로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것이 진화론의 이론적 기반이 된 것입니다.    

 

 

적자생존을 통해 인간의 만물의 영장에 올랐다는 다윈의 진화론(최근에 들어 다윈의 진화론은 상당 부분 무너졌습니다. 다윈보다 먼저 진화론을 완성한 월리스의 환경적응에 의한 진화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폐기처분됐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도 부활했습다. 제3의 과학에서 '후생유전학'을 제시했다)을 허버트 스펜스가 사회진화론으로 변형시켜 백인의 우월성을 당연시 여기는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지 팽창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런 제국주의적 행태들이 정치경제학을 지배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차별적인 조치들과 궁극적으로는 파시즘(우파 전체주의로 발전)의 출현으로 이어집니다. 칼 마르크스와 칼 슈미트 및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정치철학자들의 저작들을 자양분으로 우파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좌파에서는 스탈린의 소비에트가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의 극단적인 결과물로 등장합니다.

 

 

히틀러는 홀로코스트를 통해 600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일본과 손잡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탈린은 굴락이라는 강제수용소에서 수백~수천만에 이리는 러시아 인사들을 학살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근대이성에서 출발했고, 헤겔이 정식화해냈고,다윈과 뉴턴의 생물학과 물리학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학문적 배경 하에 독일과 러시아의 유능한 과학자와 기술공학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근대이성의 결과물이 자연과 인류의 대량 학살로 이어진 것입니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극우와 극좌는 상통하며, 이들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들만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입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정치에서도 극단적인 대립이 늘어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대가인 페인 골드버그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 히틀러의 광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근대이성이 발전시킨 과학과 기술, 학계와 종교, 거대 관료제 등이 만든 국가 차원의 총체적인 범죄임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대학살은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골드버그의 성찰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세월호 참사도 깊이 파고들면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는] 현대 공장 체제의 평범한 확장이기도 했다. 상품을 생산하는 대신 원료는 사람이고 최종 제품은 죽음이었으며, 엄청난 양의 일일 실적이 관리자의 생산 실적표에 주의 깊게 기록되었다. 굴뚝ㅡ현대 공장 체제의 상징ㅡ은 인간의 살점을 태우며 나오는 역한 연기를 뿜어냈다. 훌륭하게 짜인 현대 유럽의 철도망은 새로운 종류의 원료를 공장으로 실어 날랐다. 그것은 다른 화물이 수송되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가스실에서 희생자들은 독일의 선진적인 화학 산업에 의해 생산된 시안화수소산정제에서 발생한 유독 가스를 들이마셨다. 엔지니어들은 화장장을 설계했고, 관리자들은 후진국들이 부러워할 만한 열정과 효율을 지닌 관료 체제를 고안했다. 심지어 전체적인 계획 자체도 빗나간 현대 과학 정신의 반영이었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사회공학의 구상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이런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대한민국은 무려 36년 동안이나 일제 강제합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도 없었습니다. 식민지사관을 주장하는 이병도 교수의 후예들이 즐비한 서울대에서 유독 식민지사관을 추정하는 것이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모두가 오류로 가득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별로 다룰 것이라 여기서 말하지 않겠지만, 세상에 어느 나라가 주권을 36년간이나 뺏겼는데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 어느 나라보다 똑똑하고 신명나는 민족이 우리가 일제의 강제합병 36년이 없었으면 지금보다 몇 배는 잘 살았을 것이고, 6.25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문창극을 신임 총리로 내정한 박근혜 대통령은 그 선택부터 반민족적이고, 청문회를 강행하는 것은 반국민적이며, 그를 임명이라도 하는 날엔 국민적 탄핵에 직면할 것입니다. 무려 36년 간에 걸친 한반도 지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해를 입었는데, 식민지사관을 가진 자가 총리에 내정되고, 김진태 같은 새누리당 의원들은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니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한민족의 정기마저 말살 시킬 모양입니다. 

 

 

안창호와 김구 선생님, 안중근과 윤봉길 의사, 이청천 장군과 유관순 누나가 하늘에서 통곡할 노릇입니다. 아무리 정권의 안정이 중요하더라도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은 물론 이 땅의 조상들까지 욕 보였던 문창극을 총리로 내정한 박근혜 대통령은 그에 대한 대가를 영원히 치러야 할 것입니다. 필자의 부모님 모두 일제시대와 6.25를 모두 경험한 분들로 이번 총리 인선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이 땅에서, 한 분은 저 하늘에서.

 

 

 

⊙ 베이컨과 데카르트를 원조로 하는 근대이성의 참혹한 결과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서 말한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도 이런 참혹한 결과로부터 나왔습니다. 20세기 최고의 현자인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인류의 성장이 얼마나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분명하게 밝혔고, 자본주의가 종교의 교의처럼 교조적이고 폭력적인 이유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물론 칼 폴라니와 미셀 푸코도 이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파헤쳤습니다. 어쨌든 근대이성에 관한 모든 것은 헤겔의 변증법으로 통합돼, 무한히 진보하는 역사의 탄생과 함께 ‘신은 언제나 승자와 함께 한다’는 보수적인 정치의 전형으로 거듭납니다(이 내용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우주의 법칙이 뉴턴의 역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는다면 구태여 신의 섭리와 신에 의한 구원에 목을 맬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둘러쌓고 있던 종교와 윤리라는 족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종교는 정치와 야합에 그들의 확장에 이용했습니다(최근에 유행처럼 번지는 인문학 열풍과 영성 운동, 정치와 종교의 야합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연구될 수 있었고 그것이 돈이 된다면 국가적 차원의 지원도 받게 되었습니다. 뉴턴이 꿈꿨던 현재의 미국 MIT 같은 과학과 공학 위주의 대학과 연구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마침내 신과 자연의 시대에서 인간과 이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며, 성장에 대한 비전이 분명해졌습니다.

 

 

닐 포스트만은 《테크노폴리》에서 베이컨이 인류의 문명과 지식에 끼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최근의 온갖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과학만능주의(이것도 별도의 글로 다룰 것입니다)가 순수했던 베이컨의 성찰을 통해 비롯됐다는 아이러니를 말해주기 위합입니다.

       

 

《학문의 진보》에서 베이컨은 발명가들을 위한 대학이라는, 마치 매사추세츠(MIT)와 유사한 대학의 설립구상안까지 들려준다. 베이컨은 정부가 발명가들에게 실험과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해 주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학술 저널과 국제 학회를 주관한 일도 있다. 그는 과학자들 간의 완전한 협동을 꾀하였는데, 이는 티코 브라헤,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이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노출시키지 않고 최대한 숨길 방법을 찾고 있었기에, 이러한 발상은 그들을 무척이나 놀라게 했을 것이다. 베이컨은 또한 과학자들이 쉽게 대중을 위한 공개강연에 나설 수 있도록 충분한 보수를 보장하라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발명품의 활용방법을 계몽시키는 것 역시 발명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가 과학 사업을 바라보던 시각은 현대인의 안목 그대로였던 것이다. 즉 조직화되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공적인 의무를 지니고, 인류가 삶의 조건들을 개선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베이컨의 선언과 데카르트의 이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성찰이 칸트에 의해 완성되면 18~19세기를 종횡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류는 진보와 성장의 무한함을 믿게 되었고, 결과의 낙란론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각종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부작용들이 제대로 단죄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고, 인류는 극도로 병들어 있습니다. 만일 지구온난화가 급진현상을 띠게 되면 인류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한한 진보와 성장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이제는 버려야 할 때이며, 공존과 상생의 지혜를 짜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미래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현실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에 정부와 국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들이 태어났더니 지옥이었더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유럽과 미국이라는 두 개의 선진국 집단의 이익을 위해 회복하기 힘든 희생을 치렀는지 모릅니다. 대한민국의 압축성장과 민주주의의 확립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뿐, 속으로는 회복불가능한 피해를 입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미래세대가 불행해지는 성장과 진보란 절대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 실패의 기준입니다.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출현하는 등 압축성장의 결과는 지구온난화와 함께 미래세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위험과 짐만 넒겨버리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