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이 정점을 찍었던 1987년 7월 9일, 이한열의 영정사진을 들고 출발한 선발대가 시청 앞 분수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후발대의 마지막 학생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국민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전두환의 광기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던 분노의 후발대는 아직 출발도 하지 못했는데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으로 하나 된 염원이 백만 번의 전달을 통해 시청 앞까지 어어졌습니다.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시청 앞 분수대까지 단 하나의 단어만이 살아서 떠돌았습니다.
민주주의!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죽음이었고, 살아있는 자의 부채였고, 싸워야 하는 이유이자 의무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할아버지와 할머니부터, 중고등학생들과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아이까지, 계층과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은 그들은 군부독재의 살인행위를 더 이상의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학생들의 머리를 향해 발사되는 독재살인마의 최루탄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오직 하나만을 외쳤습니다.
민주주의!
그날에는 가난이나 부를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념이나 지역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가난해서 부끄럽지 않았고, 부유해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두 대학생의 죽음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동료와 선후배, 시민들의 피와 땀, 희생과 죽음이 강물처럼 흘렀고,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해일처럼 일어났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아도 행진은 멈추지 않았고, 어디서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당시의 우리는 자유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랐고, 평등의 이름으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랐고, 정의와 박애의 이름으로 모든 차별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헌법에 나온대로 국민이 모든 권력의 원천이고 나라의 주인이라면, 두 대학생의 죽음에 담겨있는 시민주권과 역사의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름 모를 약자들의 역사를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난무하는 최루탄과 무력진압을 뚫고서 단 하나의 단어를 외쳤습니다.
민주주의!
그리고 30년이 흘렀습니다. 6.10항쟁은 촛불혁명으로 되살아났고, 우리 모두는 공기처럼 주어진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공정한 출발과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평등은 좁힐 수 없는 불평등으로 대체됐고, 공존과 관용은 무한경쟁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우리는 그것마저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는 시청 앞 분수대에 이른 선발대의 외침이 백만 명을 거쳐 출발도 못한 후발대의 마지막 한 명에게 전해졌지만, 오늘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로 전국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날에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복사판인 전두환 군부독재의 ‘4.13 호헌조치’를 민주주의로 대체했지만, 오늘에는 촛불시민의 힘으로 독재자의 딸을 몰아냈으며 민주정부 3기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날에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보증하고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대통령직선제와 87헌법을 받아냈다면, 오늘에는 '민주주의를 형식으로 만들어버린 극단의 불평등을 해결하겠다'는 시민주권의 목적을 문재인 대통령의 입을 빌어 분명하게 천명했습니다.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의 주역이었으며, 《신좌파의 상상력》의 저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의 촛불집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라는 말은 한동안 각국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공허한 수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촛불시위를 불러온 십대 중고등학생들은 1960년대 당시의 신좌파들이 그랬듯이 평범한 대중들의 집합적 지성이 지배엘리트들의 지성보다 낫다는 것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라는 단순한 진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87혁명의 후예들인 촛불시민들은 지난 4개월 간의 시민혁명을 통해 전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이한열과 박종철이 목숨으로 찾고자 했던 자유와 동일합니다. 역사는 때로 퇴행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언제나 깨어있고 행동하는 시민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인 사회체제이자 행동규범입니다. 촛불혁명으로 되살아난 6.10항쟁의 주인공도 2017년의 여러분들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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