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다중》의 2부에서 다룬 것들 중에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이 정도의 요약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1부에 이어 오늘의 2부를 먼저 읽고 《다중》을 구입해 읽으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제가 현대 유럽의 신좌파 사상가의 지적 리더격인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을 1, 2부로 나누어 요약한 것은 아직도 마르크스의 교리를 내세우며 기득권화하고 있는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 같은 상급노조들의 경직성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대형사업장노조가 귀족노조화된 상황에서 이미 보수 기득권화한 한국노총은 상급노조가 아닌 이익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민주노총만이라도 비물질노동이 일상화한 현대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편성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임금문제로 파업을 한 뒤, 노사협상으로 자신들의 목표가 일부 달성되면 파업을 접고 현장으로 돌아가는 대형사업장노조의 귀족적이고 이기적인 행태는 노동운동 전체를 물먹이는 최악의 행태입니다. 



대한민국이 왜 가장 신자유주의적 국가인지 이해하려면 양대노총과 대형사업장노조들의 파업과 임금인상, 자기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길들여져 동일 사업장에서 동일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과 임시직, 파견직 노동자들을 자신의 임금상승을 위해 이용하고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귀족노조화하고 있는 대형사업장노조는 철저한 이익집단에 불과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21세기의 좌파 철학자 중에 가장 왼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스피노자에 집중하는 이유도 마르크스의 자본만으로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좌파사상도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추며 발전하고 변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중》과 《제국》, 《전복적 스피노자》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책이《다중》이니 꼭 구입해서 읽어보면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대한 이해가 늘어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이해를 원하는 분들은 세 권 다 읽어보시면 최소한 유럽의 신좌파가 어디를 향고 가고 있는지, 그 철학적 기반과 현실인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같으면 마르크스나 레닌의 부활이라며 길길이 날 뛸 것입니다, 자신들의 체제가 우파 전체주의에 가깝기 때문임을 극구 부인하면서요. 최소한 미국 유학파 출산 파워엘트들틀이 한국에 들여온 것들을 중심으로 하면, 가장 악마적인 것이 미국적인 것입니다.   




   




제2부 다중



다중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다양한 사회적 주체이다. 다중의 구성과 행동은 정체성이나 통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한다...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지배하는 살아 있는 살이다.



우리가 인종의 차이나 젠더의 차이가 없는 세계를 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인종과 젠더가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 즉 그것들의 권력의 위계들을 결정하지 않는 세계, 차이들이 자유롭게 자기들을 표현하는 세계를 원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다중을 향한 욕망이다...다중은 공통된 것에 기초하여 자신의 생산적 형상을 발전시키면서, 제국을 꿰뚫고 나가 자신을 자율적으로 표현하고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위험한 계급들



노동의 공통되기


다중은 계급적 개념이다...계급은 계급투쟁에 의해 규정된다. 물론 사람들이 - 머리카락 색깔, 혈액형 등등에 따라 - 계급들로 묶일 수 있는 무수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계급들은 집합적인 투쟁의 노선들에 의해 규정된 계급들이다.



계급은 진정, 경제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삶정치적 개념이다. 더욱이 우리가 삶정치적인 것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또한 노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임금노동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일반적인 창조적 역량들에 준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빈자는 이 계급관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이다.



다중 개념은 노동의 형식들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의거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형태들이 사회적으로 생산적이다...비물질노동의 또 다른 주요 형태를 ‘정동적 노동’이라고 부른다. 정신적 현상들은 정서들과는 달리, 정동들은 신체와 정신에 똑같이 관계한다. 사실상,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정동들은 유기체 전체에 담겨 있는 삶의 활력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며, 신체의 일정한 상태를 사유의 일정한 양태와 함께 표현한다. 그래서 정동적 노동은 편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



선진국들에서 정동적 노동의 중요성이 증대됨을 보여주는 한 가지 지표는, 고용주들의 교육, 태도, 인격 그리고 (주요한 숙련기술들을 갖춘 피고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친 사회적’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태도와 사회적 숙련기술들을 갖춘 노동자’는 정동적 노동에 능숙한 노동자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모든 비물질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 여전히 물질적임을 강조해야 한다...비물질적인 것은 그 생산물이다. 



가사노동은 실제로 청소와 요리 같은 반복적인 물질적 업무들을 필요로 하지만, 또한 아이들 사이에, 가정에 그리고 공동체에 정동들, 관계들, 소통 및 협력의 형식들을 생산하는 것을 수반한다. 정동적 노동은 사회적 관계들과 삶형태들을 직접적으로 생산한다는 점에서 삶정치적 생산이다...실로 고도의 정동적인 구성요소를 갖춘 노동은 대개 여성화되어, 권위를 덜 부여받으며 보수도 덜 받는다.



더욱이, 정동적 생산이 임금노동의 일부가 될 때, 그것은 극히 소외적인 것으로 체험될 수 있다. 정동적 노동자는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 - 매우 친밀한 어떤 것 -을 고객과 상사의 명령에 의해 팔고 있는 것이다. 소외는 언제나 공자 노동자들의 착취를 이해하기에는 취약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여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노동 - 정동적 노동뿐만 아니라 지식 생산과 상징적 생산 - 으로 간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영역에서, 정말이지 착취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개념적 열쇠를 제공해준다.



일반적으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는 생산조직을 일관작업의 선형 관계에서 분산된 네트워크들의 무수한 불확정적인 관계들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보, 소통, 협력은 생산의 규범이 되며, 네트워크는 그 지배적인 조직형식이 된다...그러므로 생산의 기술적 체계들은 생산의 사회적 구성과 밀접하게 상응한다. 한쪽에서는 과학기술적 네크워크들이, 다른 쪽에서는 사회적 주체들의 협력이 작동한다. 이 상응이 노동의 새로운 위상학을 규정하며, 또한 착취의 새로운 실천들과 구조들을 특징짓는다.



저물어가는 농민세계


수출지향적 단일작물 농업은 불가피하게 대규모 생산과 소유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적 집단화는, 세계시장을 위해 생산하는 농업노동자 부대를 고용하는 거대한 농업생산 단위들을 갖춘, 실질적인 토지독점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져왔다. 이것의 외부에는, 생존을 위해 소유한 토지가 없거나 불충분한, 점증하는 수의 농촌빈민들이 남게 되었다.



(그 경제적, 문화적 측면 다음으로) 농민은 또한 정치적 형상이다. 아니 오히려 많은 이론적 입장들에서는 정치의 성격을 박탈당한 비정치적 형상이다. 농민형상의 비정치성이 의미하는 바는, 농민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고 고립되어 있으며, 반작용을 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자신의 자율적인 정치적 행위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농촌의 농민에 비해 도시의 노동계급에게 커다란 정치적 이점을 제공했던 소통의 회로들은 또한 노동의 조건이 달랐던 데 기인한다. 공동의 기계를 둘러싸고 팀을 이루어 작업하는 산업노동자들은 협력과 소통에 의해 규정되며, 이렇게 해서 능동적이 되고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을 지도하고 농민을 대변했을 때, 그것은 분명히 항상 농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이 비극적인 역사는 한 주체가 예속적인 타자를 대변하는 일의 (설령 그 타자가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당함과 무서운 결과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우리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삶의 특이한 형식들이며, 그와 동시에 공통적인 전지구적 실존을 공유한다. 다중의 인류학은 특이성과 공통성의 인류학이다.



인도의 두 이탈리아인


특이성을 인식하자마자 공통된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이성들은 소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 능력은 특이성들이 공유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두 개의 눈, 열 개의 손가락, 열 개의 발가락을 가진 신체를 공유한다.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삶을 공유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착취의 체제를 공유한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의 공통적인 꿈을 공유한다. 더욱이 우리의 소통, 협동, 협력은 실존하는 공통된 것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번에는 공통된 것을 생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된 것을 매일 만들고 또 만든다.



빈자의 부(또는, 우리는 빈자들이다!)


빈자들,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집이 없는 사람들 등등의 계층들은 실제로 사회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계와 종속의 무수한 메커니즘들에도 불구하고, 빈자들은 끊임없이 삶과 생산의 엄청난 힘을 표현한다...빈자가 제국의 전지구적 질서의 희생자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빈자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니라 동시에 강력한 행위자들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빈자가 사회적 생산의 과정들에 점점 더 포함되는 만큼, 그들은 모든 전통적인 노동하는 계급들과 더불어 공통적인 조건에 참여하는 계층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잠재적으로 다중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빈자가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노동에 종사하게 된 것, 농업에서 빈자가 차지하는 점점 더 핵심적인 역할, 그리고 대규모의 이주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이동성 등은 이 과정이 이미 얼마나 높은 정도로 전개되었는지를 증명해준다.



산업예비군에 대한 이런 낡은 이론들은, 기업들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세계 이곳저곳으로 일을 옮기며 일종의 노동 ‘덤핑’을 함으로써 국가들 사이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커다란 차이에서 이득을 보는 지구화시기에 다시 등장한다. 선진국들의 노동자들은 공장들이 문을 닫고 자기네 일들이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위협을 끊임없이 받으며 살아간다.



첫째, 산업노동자들이 더 이상 밀집되고 정합적인 통일체를 형성하지 않고 오히려 비물질적 패러다임에 의해 규정되는 네트워크들 안의 여러 노동형태들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는 의미에서 ‘산업정규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둘째, 노동능력이 사회적 생산과정들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예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사회적 분할선도 생산적 노동자들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고,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적 노동을 가르는, 언제나 의심스러웠던 맑스주의적 구분은 이제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자신의 가난의 조건들에 반대하는 빈자들의 투쟁들은 강력한 항의들인 동시에 삶정치적 힘의 긍정 - 비참한 ‘소유’보다 더욱 강력한 공통적 ‘존재’의 드러남 - 이기도 하다...빈자들의 오늘날 투쟁들은 더욱 포괄적이고 삷정치적인 특징을 띠며 전지구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생산에 참여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빈자들의 부이다...언젠가는 이 공통적인 생산성을 정치적 기회들로 담아내야 한다. ‘보장소득’에 대한 요구가 그것이다.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계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비물질노동의 패러다임에서는, 그리고 생산이 점점 삶정치적이 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경제적 논점들은 점차 의미가 없어진다. 



악마적 다중들: 도스토예프스키가 성경을 읽다


다중은 하나이자 다수이다. 다중의 불명확한 수는 질서의 이 모든 원리들을 위협한다. 이러한 책략이 악마의 일이다.

다중과 관련해서 정말 무서운 것은, 그 수의 불명확함 - 다수임과 동시에 하나임 - 이다...그러나 다중은 레기온이다. 다중은, 서로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소통하고 협력하고 공통적으로 행동하는, 셀 수 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추기1> 방법 : 맑스의 발자국을 따라



각각의 시기는 사회적 현실과 사상의 다양한 요소들을 구조화하는 하나 또는 여럿의 공통적인 형식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어 각각의 시기의 이 공통적인 형식들, 즉 동형체들은, 미셀 푸코가 다양한 근대적 훈육 제도들의 공간적인 분포와 구조에 대한 자신의 연구들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는, 감옥이 공장을 닮고, 공장이 학교를 닮고, 학교가 병영을 닮고, 병영이 병원을 닮는 것 등등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모두 푸코가 훈육적 패러다임에 연결시키는 공통적인 형식을 공유한다. 



이와 달리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둘러보는 모든 곳에서 네트워크들 - 군사조직들, 사회운동들, 사업편제들, 이주유형들, 소통체계들, 생리적 구조들, 언어관계들, 신경전도체들 그리고 심지어는 개인적 관계들 -을 본다. 그것은 네트워크들이 이전에 주변에 없었다는 것도 아니며 두뇌의 구조가 변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네트워크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 우리의 방식들을 규정하기에 이른 공통적 형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들이 비물질적인 생산 패러다임의 명령을 받는 협력적이고 소통적인 관계들의 조직형식이라는 것이다. 이 공통적 형식이 출현해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경향이 바로 시기를 규정하는 바의 것이다.



맑스는 노동과 가치의 관계를 양의 상응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한다. 추상적 노동 시간의 일정한 양은 가치의 양과 같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규정하는 이 가치법칙에 따르면, 가치는 노동시간이라는 측정가능하고 동질적인 단위들로 표현된다. 맑스는 마침내 이 관념을 노동일과 잉여가치에 대한 자신의 분석에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 법칙은 유효하지 않다. 노동의 시간적 통일성이 가치의 기본적 척도가 되는 것은 오늘날에는 맞지 않다. 



우리의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역량들은 언제나 우리의 생산적 노동보다 -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 - 보다 더 위대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한다.



노동과 가치는, 살아가기와 생산하기가 구분 불가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에서 삶정치적이 되었다. 삶이 생산과 재생산의 행동들에 의해 완전히 뒤덮이는 한에서 사회적 삶 전체는 하나의 생산적 기계가 된다...비물질적이고 삷정치적인 생산의 패러다임 안에서 보이는 가치의 이 새로운 자질들은 모든 전통적인 설명 메커니즘을 침식한다...착취이론은, 이 적대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노동자들이 조직을 하고 자본주의적 통제를 거부하는 기초로서도 기능하는, 자본이 노동자들에 일상적으로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야 한다.



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며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금융자본은 미래에 돈을 걸며, 우리의 공통적인 미래의 생산적인 역량들의 보편적 표상으로 기능한다.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을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



노동과 권력의 전지구적 분할을 관리하는 것은, 전지구적 생산과 부에 대한 명령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이 쓸 수 있는 하나의 무기이다...‘빈자’는 사회 일반을 그 토대에 의해서 정의되는 분리 불가능한 전체로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이다...노동이 창출하는 부는 박탈된다. 이것이 그 적대의 원천이다. 하지만 산 노동은 부를 생산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유지한다이것이 산 노동의 힘이다. 적대와 힘의 이러한 결합 속에서 혁명적 주체성이 형성된다.



경제학은 만일 자신이 하나의 학문이고자 한다면,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더 가까운 어떤 것으로 되돌아가는 모든 사회적 삶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경제학은 삶정치적 학문이 되어야 한다. 아마르티아 센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공학은 윤리학이 되어야 한다.



제2장 신체에 관하여



전지국적 인종차별


현대의 ‘공화주의적’ 논자들의 일부는 근대적인 정치제도들을 국가의 경계를 너머로 확대하고 전지구적 입헌질서를 통해 세계주의적인 협치를 확립하고,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정치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민주적인 다중은 하나의 정치적 신체일 수 없다. 적어도 근대적 형태의 신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중은 신체의 유기적인 통일을 거부하는 특이한 살과 같은 어떤 것이다.



현 정치공백기에도 마찬가지로 다수의 새로운 권력구조들이 존재한다. 결코 무대를 떠나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권력 자체이다...국가들은 정치공백기에 계속해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기능들의 대부분을 수행하지만, 다른 한편 자신들이 점점 더 봉사하게 되는 새로운 전지구적 권력에 의해 변형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등가교환은 가난한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이 세계시장에서 부단히 과소평가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실상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에게 보조금을 주는 셈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더욱이 이 불평등 체계들은, 특정한 정치적 조건들 아래에서 자본주의적 지배의 전체 발판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는, 자본주의 발전의 내부모순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적 지구화는 가능한 가장 나쁜 방식으로 - 전세계 나라들의 노동관계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의 부당한 메커니즘들을 세계 전역에 만연시킴으로써 - 이 문제를 해결해냈다.



노동, 가난 그리고 착취의 전지구적 분할들의 지형학은 정치적으로 구성된 위계들의 변화하는 모태이다...가난과 질병은 인구 통제의 간접적인 도구들이 된다...가난한 인구들이 전 세계의 선진국들과 후진국들 모두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특히 위기인 것이다...근본적인 위기는 전지구적 인구의 색깔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만일 수가 많은 것이 권력이라면, 모든 인구들의 재생산은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보스로의 여행


전세계의 경제적 정치적 관료적 엘리트들은 항구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 질서와 규제 없이는 경제시장도 존재할 수 없다는 오래된 교훈을 입증한다...경제시장은 항상 반드시 사회시장 안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정치적 구조들 안에 심어진다. 국가통제에서 자유로운 시장들이나 무역을 주장하는 자들은 실제로 더 적은 정치통제를 요구한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종류의 정치통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에 반대하는 노동의 투쟁들은 회유하고 패배시키기 위해 정치통제가 요구되고 있다. 모든 노동협상 뒤에는 정치권력과 그것이 가진 무력행사의 위협이 있다. 만일 정치적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노동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는 무력 사용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시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전지구적 경제에서 조인된 사업 계약들의 대부분은 국민국가들에 의해 비준되지 않고 단순히 다국적 초국적 기업들에 봉사하는 법률회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기업과 그 법률 회사가 국제적이고 심지어는 전지구적인 국제상관습법 체제를 발전시키고 그럼으로써 지구화를 규제하는 규범적인 과정을 수립하는 만큼, 바로 그 만큼 자본은 일종의 ‘정부 없는 전지구적 통치’ 형식을 가장 약한 형태로 창출하는 것이다...여기에서 법률은 자본을 규제하는 외부적인 강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들 사이의 협정의 내적 표현이다. 이것은 실로 일종의 자본주의적 유토피아다.



WTO에서는 각각의 국가가 한 표씩을 가지고 있는 반면, 세계은행과 IMF는 투표권이 화폐 기부금에 비례하는 방식의 이상한 ‘1달러 1표’ 체제를 가지고 있다...IMF가 경제 전문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반면 세계은행과 UN의 원조 기관들에서 일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NGO 단체의 것과 유사한 사회복지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IMF는 아마도 초국적 경제기구들 중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일관된 기구일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IMF는 사실상 세 개의 주요 축들 - 무역의 지구화, 시장의 금융화, 생산회로들의 전지구적 통합 - 사이에서 자신의 임무를 변경했다...따라서 IMF는 (이제는 포스트포드주의적이며 탈근대적인, 그리고 다중의 삶정치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새로운 전지구적인 사회적 생산형식들을 금융 메커니즘을 통해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다. 



IMF의 기본적인 기획은 국가들로 하여금 케인즈주의적인 사회 프로그램들을 버리고 통화주의적인 정책을 채택하도록 규제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재정적으로 취약하고 가나한 경제들에게, 공공복지에 대한 최소한의 지출, 공공산업과 부의 사유화, 공공부채의 절감을 포함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공식을 명령한다.



IMF는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더 위협이 되는 나라(아르헨티나처럼 아마도 계급투쟁의 요소들이 강한 나라)에는 엄격한 긴축경제의 조건들을 부과할 수 있으며, 전지구적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나라(터키처럼 현재 중동에서 제국적 질서를 구축하는 데서 필수적인 부분으로 기능하는 나라)에는 그러한 명령들을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거대 정부가 돌아왔다


9월11일 이후 위기는 자본이 주권적 권위를 배후에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지를 금세 떠올리게 했다. 시장질서와 위계에 심각한 균열들이 일어날 대마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진실을 말이다...군사적 행위와 경제적 이익 사이의 주요한 연결고리는, 그 어떤 개별 국가의 이익으로부터도 추상된, 훨씬 더 일반적인 분석수준에서만 존재한다. 군사력은 세계시장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들을 보장해야 한다.



케인즈주의 아래에서는, 국민국가 노동계급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중재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제공함으로써 안정성과 경제성장을 뒷받침했으며, 그 과정에서 생산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확대되었다. 그와 달리, 이제 우리가 보는 주권의 형식들은 자본과 노동의 갈등관계를 협상하기 위한 어떠한 중재 메커니즘도 없이 완전히 자본을 위해서만 존재한다...타키투스가 말한 바처럼, 공화국이 가장 부패한 상태가 될 때 법률들은 가장 많이 늘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법률이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부패를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부패는 체제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내놓아진 생명


재산이 무형적이 됨에 따라 모든 기존의 보호 메커니즘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주권적 권위의 담지체가 확대된 보호 노력들을 할 필요가 생긴다...그것들을 가치 있게 만드는 복제가능성이 바로 그것들의 사적 성격을 위협하는 바의 것이다.



특허를 받은 유일한 동물 유형인, 온코마우스(종양 생주), 뒤퐁은 개별 생쥐들을 연구도구로서 판매하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측면은 뒤퐁이 단순히 개별 생주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쥐 유형 전체를 소유한다는 점이다...가장 복잡하고 다툼이 많은 영역들 중의 하나는 유전정보의 소유권과 관련된다...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유기체는 특허권을 부여받을 수 없지만, 반면에 과학자들이 그것에서 도출하는 정보는 인간 발명의 결과이기 때문에 특허권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물 유전정보의 소유권과 관련한 경우들도,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종자와 식물 변종들의 사적 소유도 이와 같은 논리에 따라 결정되며, 마찬가지로 비물질노동에 기초를 둔다...이 판례는 명백하게 노동에 준거한다. 식물들, 식물 변종들 그리고 생식세포질(즉, 종자 안에 암호화된 유전정보)은, 만일 그것들이 연간 노동의 생산물들이고 그래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면, 사적 소유에 적합해지는 것이다.



주요한 논점은 인간들이 자연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공통적이기를 그치고 있다는 것, 자연이 사유재산이 되어가고 있으며 오로지 새로운 소유자들에 의해서만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두 단계로 된 법적 논리이다. 생명형태들이 코드에 의해 규정되고 코드가 생산하기 때문에, 코드를 생산한 사람이 생명형태들을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유화 - 지식, 정보, 소통 네트워크, 정동적 관계, 유전적 코드, 자연자원 등등에 대한 사유화 - 에는 뚜렷하게 바로크적, 신봉건적 특징이 있다. 다중의 상승하는 삶정치적 생산성은 사적 전유 과정들에 의해 약화 저지되고 있다...협동적이고 소통적이며 공통적인 지식 생산 과정은 다른 모든 비물질적 삶정치적 생산 영역들을 똑같이 특징짓는다. 



자본주의적 사유재산권들은 생산자의 개별적 노동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더 집단적이고 협력적인 생산형식들을 끊임없이 도입한다. 노동자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생산된 부가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는 것이다. 이 모순은 비물질노동과 비물질적 재산의 영역에서 점점 극단적이 된다. 사유재산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가치 있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사적으로 소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부분적으로 어리석게 만든다. 



경제학자들은 결코 지치는 법 없이 우리에게, 재화는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는다면 효율적으로 보존될 수도 활용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진실은, 우리 세계를 이루는 대다수는 사유재산이 아니며 우리의 사회적 삶은 오로지 이 덕분에 기능한다는 것이다...언어들, 발화 형식들, 몸짓, 갈등 해결 방법들, 사랑의 방식들 그리고 대다수의 삶의 경험들이 공통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호작용하거나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룩한 지식, 정보 그리고 연구 방법들의 축적이 공통적이지 않다면, 과학은 멈추고 말 것이다. 



3장 다중의 자취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는 상이한 본성들을 가진 많은 개별적 신체들로 구성되어 있는바, 그 각각은 고도로 복합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중들의 다중은 하나의 신체처럼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살의 괴물스러움


공동체 실천들은 한때 좌파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폭력들 - 광포한 축구 팬 클럽들에서 카리스마적인 종교 숭배자들에 이르는, 스탈린주의적 교조주의의 부활에서 다시 불붙은 반유대주의에 이르는 - 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는 공동체의 공허한 그림자들이 되었다...좌파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과거의 강력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자주 무의식적인 반사작용과 같은 낡은 몸짓들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떠받치곤 했던 낡은 사회적 신체들은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없다.



다중의 살은 순수한 잠재력이자 형성되지 않은 삶의 힘이며, 이런 의미에서 부단히 삶의 충만함을 목표로 삼는, 사회적 존재의 원소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다중의 살은 사회적 존재를 계속해서 확장하는 원소적 힘이다. 바람과 바다와 대지를 붙잡아 이용하려 시도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가 붙잡는 정도를 초과한다. 그래서 정치적 질서와 통제의 관점에서 볼 때, 다중의 원소적 살은 미치게 할 정도로 파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적 신체의 위계적 기관들 속으로 도무지 포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괴물들의 침입


질 들뢰즈는 인류 내부에서 괴물을 인식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종을 변화시키고 있는 동물이다...정말이지 우리는 어떤 괴물들과는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어떤 괴물들과는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우리는 다중의 괴물스러운 표현들을 이용해서, 인공적인 삶의 변이들이 상품들로 변환되는 것에 도전하고 자본주의적 권력이 자연의 변형들을 판매용으로 내놓은 것에 도전하며 지배 권력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우생학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괴물들의 새로운 세계는 인류가 자신의 미래를 거머쥐어야 하는 세계이다.



공통된 것의 생산


공통된 것의 생산의 핵심 개념을 습관에서 수행으로 이동시킨 1990년대에 출현한 이 새로운 신체 이론들은, 신체를 배제하고 성적 차이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철학과 정치학이 전통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남성 신체를 규범으로 여기게 되며 여성의 종속화를 유지하고 숨기게 되기 때문에 ‘신체를 기억해야’한다는 낡은 금언을 뛰어넘는다. 페미니즘은 신체와 필연적으로 모순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신체가 여성 억압의 현장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적 특유성이 페미니즘적 실천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성은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여성’의 성적 신체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일상적인 삶에서 여성들이 수행하고 남성이 남성성을 수행하는 식으로, 또는 몇몇 일탈적 성행위자들이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수행하면서 규범들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젠더 수행성은 습관과 마찬가지로 수행은 고정불변의 자연이나 임의적인 개별적 자유를 의미하지 않으며, 이 둘 사이에 놓여있는, 협력과 소통에 토대를 둔 일종의 공통적인 행동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공통된 것의 이러한 실천들이 사회적으로 광범하게 확산되고 경제적으로 중심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자유로운 표현과 공통의 삶에 기초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창출을 위한 기획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다중의 기획이 될 것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넘어서


반테러와 대항반란의 논리에서는, 사실상, 안보가 결국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사적인 것’은 정말이지 존재하지 않는다. 안보는 공통된 것의 절대적 논리이거나, 아니면 정말이지 공통된 것 전체를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왜곡이다...사유화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사회적인 것에서는 모든 것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정부 감시와 통제에 노출시키는 것이 경향을 이루며, 경제적인 것에서는 모든 것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소유권에 종속시키는 것이 경향을 이룬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체제들이 확립한 (다중이 운동들이 맞서 싸우는) 법률적 틀들과 맞설 필요가 있다. 이러한 법률적 틀들은 (물, 공기, 땅 그리고 복지국가 시기에 국가의 기능으로 만들어졌던 건강관리와 연금을 포함하는 삶의 관리를 위한 모든 제도와 같은) 공적 재화들의 사유화 기획, 그리고 또 어쩌면 더욱 중요한 것으로 (통신 및 여타 네트워크 산업들, 우편 서비스, 공공 운송, 에너지 시스템 그리고 교육을 포함하는) 공적 서비스들의 사유화 기획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공적 재화들과 서비스들이 국민국가의 수중에 있는 근대적 주권의 바로 그 토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반이익’ 또는 ‘공공이익’ 개념을, 이러한 재화들과 서비스들의 관리에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공통이익은, 국민국가의 법률적 도그마를 창조한 공공 이익과 대조적으로, 사실상 다중의 생산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공통이익은 국가의 통제 속에서 추상화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인, 삶정치적인 생산 속에서 협력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재전유된 일반 이익이다. 즉, 그것은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일반 이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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