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과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장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전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이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피엔스》가 인류의 역사를 다룬 이전의 책들과 구별되는 것은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공학(나노봇 포함)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지적 창조물은 인류에게 지난 40억 년 동안 이루어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바로 이 시점에서 유발 하라리는 모두가 알고 있어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행복'을 들고나왔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행복'이냐 하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공학이 창조해낼 미래ㅡ그때까지 인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말해 그때까지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다면ㅡ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적용되지 않는 세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로봇공학은 신의 창조를 대체할 것이며, 사물의 법칙도 바꿀 것이며, 인간을 우주적 차원에서 영생(죽지 않는 것과 다른)이나 무적의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다.



헌데 인간이 그런 존재에 이르면 정말로 행복해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영원히 사는 나는 행복할까? 인류가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순서가 앞일수록 행복할까? 돈이 있어야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적은 돈으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사람부터 순서가 결정되면 인정할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은 끝도없이 이어질 수 있다. 



이전에는 갈망만 했던 것들이 현실이 됐고, 되고 있고, 될 것으로 보인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유인원이었던 인류가 신에 근접하는 존재(유전적 조작이나 사이보그 포함)가 되는 것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100년 정도를 보는데, 우리는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세월호유족 중의 일부나, 단원고 생존학생들이 1000년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들은 세월호참사의 비통한 기억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가 1000년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국가와 민족, 인종, 성, 젠더 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혼과 출산, 가족은 무슨 의미를 지닐까? 부와 성공, 철학과 종교, 인문학과 사회학은 어떤 역할을 할까? 창조와 사물, 우주의 법칙에 통달한 인공지능이 모든 발전을 주도할 텐데, 인간은 1000년 동안 무엇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까?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주장한 것처럼 인류는 과거만 회상하며 사는 존재가 될까? 





인류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극단적 불평등과 차별을 감수해야 했지만, 1000년을 사는 존재가 되면 똑같은 '자유'를 위해 똑같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까? 무엇에 의미를 두고 무엇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일까?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면, 결국 자유보다 개개인의 행복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라는 자유의지는 죽는 존재에게만 절대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부처는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만, 인공지능과 유전공학, 로봇공학의 도움을 받은 인간은 (100년을 사는 존재였을 때보다는 줄어들겠지만)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서 1000년을 살아야 한다. 그 오랜 시간을 불행하게 산다면 그것만큼 지옥 같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부터 행복에 천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의외로 자기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기 일쑤다. 일할 권리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지금에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다. 이런 상태에서 일을 거의 하지 않고 1000년을 사는 존재가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남들보다 잘살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왔다. 평등을 중시했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도 최종 목적지는 자유였다. 인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행복을 찾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내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지 않는다면 《사피엔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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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수래공수거 2016.08.24 08:22 신고

    저의 행복 기준은 "마음의 갈등이 없는것 "입니다^^

  2. 등대지기. 2016.08.24 08:50 신고

    사피엔스에 관한 글을 쓰셨군요 ~

    참 어려운 책인데.. 견문을 넓히려면 이런 종류의 책도 읽어야겠죠

    • 늙은도령 2016.08.24 15:28 신고

      재미있더군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부담없이 읽기에는 최고였습니다.



저를 기준으로 할 때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는 발터 벤야민입니다.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그것에 실패하자, 47세라는 이른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 유대계 독일인이었지만, 그가 남긴 사유의 결과물들은 너무나 독창적이고 뛰어나서 모든 산문들이 아름다운 시처럼 다가옵니다. 



그가 남긴 저작들은 상당한 집중을 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유들로 가득해서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자의 능력까지 포함해서 볼 때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분들은 《베를린의 어린 시절》과 《일방통행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는 꼭 보셨으면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예전에 이른바 종교들이 그 답을 주었던 것과 똑같은 걱정, 고통, 불안을 잠재우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다(자본주의는 한 번 빠져들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교환의 과정이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이외에는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이다. 정치마저도 민생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최상의 가치로 자리잡는다).



현재 상태에서 이 자본주의의 종교적 구조에서 세 가지 특성만큼은 인지할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순수한 제의종교로서, 어쩌면 지금껏 존재했던 가장 극단적인 제의종교일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직접적으로 제의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시장경제가 유일한 통로로 이를 거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교리도 신화도 모른다. 제의의 이러한 구체적 성격과 연관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두 번째 특성인데, 즉 제의의 영원한 지속이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꿈(희망)도 자비도 없는 제의를 거행하는 일이다. 그 속에는 ‘평일’이란 것이 없고, 모든 성스러운 치장의 의미, 경배하는 자의 극도의 긴장이 펼쳐지는 끔찍한 의미에서의 축제일이 아닌 날이 없다(끝없는 혁신과 신제품을 요구하는 무한경쟁을 떠올리면 된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바로 그러하다).



세 번째 특성으로 이 제의는 부채를 지운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추측건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제의의 첫 케이스이다. 이 점에서 이 종교체제는 엄청난 운동의 추락 과정 속에 있다. 죄를 씻을 줄 모르는 엄청난 죄의식은 제의를 찾아 그 제의 속에서 그 죄를 씻기보다 오히려 죄를 보편화하려고 (한다)(자본주의는 신용창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에 최후에 남는 것은 빚이다).



이 자본주의라는 종교운동의 본질은 종말까지 견디기, 궁극적으로 신이 완전히 죄를 짓게 되는 순간까지, 세계 전체가 절망의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견디기이다. 그것은 이러한 절망의 상태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존재의 개혁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인 점에 바로 자본주의가 지닌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요소가 있다(자본주의는 돈이 되는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무한한 진보란 종말로 가는 길이다).



자본주의라는 종교의 네 번째 특성은 그것이 신의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 그 신이 지은 죄의 정점에서 비로소 그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억압된 것, 죄스러운 생각은 아직 해명되어야 할 깊은 유비관계에서 보자면 바로 무의식의 지옥이 그 이자를 지불하는 자본이다(자유시장 배후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ㅡ칼뱅주의에서 뿐만 아니라 나머지 정통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입증되어야 할 테지만ㅡ서구에서 기독교에 기생하여, 종국에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의 기생충인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자본주의는 끝없는 확장을 추구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선교방식과 유사하다). 



걱정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탈출할 길이 없는 상태는 죄를 지우는 상태이다. ‘걱정들’은 이 탈출구 없음의 죄의식을 나타내는 지표다.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종교 개혁기에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흥기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했다보기보다, 기독교 자체가 자본주의로 변형되었다(무한경쟁을 부추기며 국가나 기업 같은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는 자본의 행태를 보라. 미국과 유럽의 역사와 대형교회의 행태를 보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인식하기 위해, 원래 이교가 최초에 종교를 ‘상위의’ ‘도덕적’ 관심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관심으로서 파악했다는 점, 달리 말해 이교는 오늘날 자본주의처럼 그것의 ‘이상적’ 또는 ‘초월적’ 성격에 대해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자본주의가 물질만능주의와 소비지상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떠올려보라.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타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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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용투자자 2014.09.17 07:41 신고

    십일조를 없애면 한국 교회가 바로선다는 말이 낭설이 아닌 듯하네요 ^^

    • 늙은도령 2014.09.17 07:45 신고

      발터 벤야민의 성찰은 마르크스를 능가합니다.
      그의 성찰이 47세에 그친 것이 인류에게는 커다란 손해였습니다.
      정말로 위대한 석학이었습니다.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는 평론집으로서는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아웃사이더들을 분류해서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인데, 긍정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이를 풀어냈습니다. 윌슨이 24세에 이 책을 출판했는데, 당시에는 문학계를 뒤흔들며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이후에는《아웃사이더》에 근접할 만한 책은 내놓지 못했습니다. 데뷔작이 최고의 작품이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의 책만으로도 콜린 윌슨은 '아웃사이더'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관점과 저의 관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돌하는 까닭에 그의 아웃사이더 분석을 모두 다 수용할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 논객을 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는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또한 주요 작품들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인용된 문장들은 최고라 할 만합니다. 



가능하면 책을 구입해서 보시면, 글을 쓰실 때 인용할 수 있는 문장들이 너무나 많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회자되는(콜린 윌슨은 최고는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최고라고 봅니다) 또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인 《황야의 이리》와 《유리알 유희》를 함께 읽으면 아웃사이더에서 성인의 수준까지 성찰의 수준을 높여간 위대한 소설가들의 아름다운 얘기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문학의 최고봉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세 편의 고전들은 매우 어려우니, 문학적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은 분들만 도전하시는게 나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우리나라에는 콜린 윌슨 같은 젊은 평론가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그의 박학다식함과 메모 습관은 모든 글쓰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세를 보여줍니다.   








1장  맹인의 나라

 

 

아웃사이더란 언뜻 보면 사회문제다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다.

 


나는 너무 깊게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중에서)

 


아니잘못이다그것은 진실이 아니다이러한 말들은 어느 것이나 다 죽은 것이다그 말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의 강렬함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며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무력한 말일 뿐이다(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중에서)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이 아닌 진리에 따른 것은 아웃사이더의 속성인데이는 자기가 본 것이 진리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진리의 편에 선다는 이상은 모든 세기의 문학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명백한 특징이 된다.


 

아웃사이더에게는 세상이 합리적인 것도질서정연한 것도 아니다...그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아웃사이더는 혼돈이 적극적인 것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2장 – 무가치한 세계

 

『침묵의 동맹』 속에서 샤르뜨르는 그가 가장 자유롭게 느꼈던 것은 전쟁 중에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끊임없는 배반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고 쓰여 있다말할 것도 없이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자유는 의미의 강렬함이며그것은 살아남으려고 하는 의지를 인간에게 불러 일으키게 하는 극한상황에 나타나는 것이다.


 

전후의 헤밍웨이는 크레브스 상병의 입장이 되어 이미 죽어버린 과거와 아마 사후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미래 사이를 방황한다.


 

죽음에 의하여 궁극적인 부정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기분은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기분에 비하여 성숙한 깨달음이었다...죽음과의 만남은 생의 무의미함즉 무 그 자체와의 만남인 것이다남아 있는 유일한 가치는 바로 용기다『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인간은 파멸할 수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사자(死者)의 자연사>에서 스코틀랜드 탐험가 밍크 파크의 말이 그 책 머리에 실려 있다사막의 한 가운데서 목이 말라 실신한 지경이었을 때 파크는 몇 떨기의 꽃을 보고는 후딱 정신을 차린다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식물을 창조하고도 양분을 공급하여 완성으로 이끄는 존재가 자기 모양대로 창조한 인간의 고난을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에 용기를 얻은 그는 계속하여 전진해 나갔고곧 물을 발견한다


 

더구나 그 동물들이 요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기 몸의 고생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노새들이 만약 입을 열수 있다면그 고경을 덜어줄 누군가를 찾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ㅡ 사자에 관한 첫 번째의 발견은갑자기 죽게 된 자는 동물과 같이 죽는다고 하는 사실이다......나는 잘 모르겠지만대부분의 사람은 인간답게 아니라 동물처럼 죽는다.....그래서 지금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이른바 휴머니스트의 죽는 모습이다그들의 고귀한 퇴장을 보고 싶은 것이다......이 구절이야말로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휴머니스트에게 주는 그의 해답이다



자유는 그 전제로써 자유의지를 요구하는데이것은 자명한 이치다그렇지만 의지가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기가 있어야 한다동기가 없는 곳에는 의지도 없다. 또한 동기란 바로 신념의 문제다...자유란 결국 현실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그렇지만 아웃사이더는 그 비현실감 때문에 근원에서부터 자유와 차단되어 있다비현실의 세계에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강하하면서 도약하는 것과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다.


 

잔돈처럼 마음대로 주머니에 구겨 넣을 수  없는 신념을 발견했던 사람은 내가 처음은 아니오


 

도덕적 공백 상태(파멸을 의미함)를 올리버는 다음과 같은 상징으로 표현한다. 

ㅡ 포탄이 알버트가 아니고 나를 스쳤는데나의 시계가 고장났다흔들어보자 잠시 동안 갔지만태엽이 끊어져버렸다나는 자신이 이 이상 나이를 먹지 않고죽을 때가 되어도 무언가 때늦은 이상한 대단원이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용기와 규율이 남아 있었다.



인간은 일관된 존재가 아니며어제와 내일과는 똑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인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순간에 살며의지력을 함부로 발휘하지 않는다또 의지를 움직였다가도 곧 그 노력을 단념하든지아니면 당초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무엇인가 다른 것에 주의를 돌려버린다어떤 강렬한 의식 상태를 잠깐 보았지만자기로서는 어떻게 하여도 그것을 꽉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자각한 시인이 심한 절망을 느끼는 것도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병에 걸린 영혼인 국외자에게는 이 신세계가 공포감을 일으킨다그것은 축음기의 레코드같이 부자유스럽게 홈을 따라 도는 기계문명의 상징인 것이다.


 

아웃사이더는 세기말까지에는 유토피아가 확립된다는 것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근시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아무튼 아웃사이더 역시 자기가 살고 있는 토양에서 양분을 섭취하고 있는 한그 세기의 아들임을 면치 못하리라.

 


ㅡ 건강한 얼굴로도 여자를 끌 수 없다면창백한 얼굴로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J. 서클링)

  


그러나 젊은 베르테르가 등장하여 심정상의 혁명을 일으킨다.

 


세계가 창조된 것은 인간의 정신적 요구에 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양자의 차이는 현저하다리얼리스트적 아웃사이더는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그러나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는 꿈에서조차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그가 외치는 것은 어디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진리가 그 무엇임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함께 낭만주의적 아웃사이더가 된 다른 한 시인의 말을 빌리면).



ㅡ 백만 인의 입술이 찾는 것

어디엔가 틀림없이 실체로 존재하려니.(W.B. 예츠의 <그늘진 바다중에서)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다......자기실현을 이룩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그러나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구한다어떤 자는 부지런히어떤 자는 게으르게모든 인간은 탄생의 유물인 진흙과 알의 껍질을 끝까지 몸에 지녀 나른다.”


 

ㅡ 미래는 투명하리만큼 밝고 질서가 잡혀 있어야만 했다.(H. 헤세의 <데미안중에서)


 

혼돈을 직시해야만 한다진정한 질서가 오기 전에 혼돈으로 내려가야만 한다...타락이 필요한 것이며인간은 선악과를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불교 경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식별하기를 거부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아웃사이더는 한평생 심한 치통을 앓는 자와 같이 자기중심적이다.


 

한 인간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부분은 죽은 부분에 불과하여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그 이외의 부분즉 무조건의 의지인 것이다의지는 본질에 선행한다그러나 우리의 부르주아 문명은 개성을 그 기초로 한다개성이 우리의 주요한 가치인 것이다


 

인간은 완성된 피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으로부터의 도전이며구원을 받는 만큼 두려움도 느는 머나먼 가능성이기도 하다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아직 단거리가 답사된 데 불과하며그것도 가공할 고초와 희열이 뒤따른 것이었다이 가능성은 오늘은 처형대내일은 기념비가 될 소수의 경우에도 그러한 것이다.


 

황야의 이리는...필사적으로 자아에 매달리고 필사적으로 인생에 매달리는 것이 영원한 죽음으로의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그는 잊으려 결심하고 있다.”



<황야의 이리>에서 헤세는 아웃사이더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즉 자기가 비참한 것은 자기가 자칫하면 타협하게 되어 온건하고 문명적인 부르주아의 영역을 취하려 하는데 원인이 있는 것이며자기의 구제는 열광과 냉정정신과 자연이라는 양극단의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 비현실성이 고통을 주기 시작할 때 그것을 통절히 느끼는 것이다그러나 그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보통의 세계는 그 가치를 잃는다마치 오랫동안 와병 중인 인간에게 일상생활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은 악몽과 같기도 하며 화면이 텅 비어 있는 스크린 같기도 하다.



꿈을 꾸고 있다고 몽상할 때에는 바야흐로 꿈에서 깨고 있는 것이다고 노발리스는 말한다나비가 된 꿈을 꾸었으나자기가 나비가 된 꿈을 본 인간인지 혹은 인간이 된 꿈을 본 나비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장자였다.


 

살아라힘껏 살아라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헨리 제임스의 <사절들중에서)


 

사자(死者)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이 휠씬 낫다는 것뿐이다.”(엘로이 프레커)

 

 

4장 – 자제의 시도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생활의 문제다문학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쓰는 것은 진실의 왜곡이다......작가는 지상(紙上)에서 최대의 극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는 본능이 있지만이 소재가 소용없게 되거나 이미 그 이상 발전시킬 수 없는 한도까지 이용되어버리면 작가는 새로운 방법을 선택한다......그 이유는 간단하다즉 어느 한도를 넘으면 아웃사이더 문제는 단순한 사고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그것은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인 것이다......아웃사이더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기를 아는 것이다


 

전쟁에서 T.E.로렌스는 새로운 시야를 얻었다더 현명해지기는 했지만 조금도 행복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과민한 인간에게 과중한 체험이 겹쳐져서 동기 또는 원동력의 원천이 고갈하는 현상...이후 17년간의 로렌스의 행동은 아웃사이더에게는 당연히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천재가 갖는 건전한 자부를 결하고 있었던 점이 로렌스의 생애를 비극적 낭비로 끝나게 했던 근본 원인의 하나다.


 

ㅡ 이 책을 읽고 나니 가슴이 아프다이 책을 쓴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지만그는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자기가 자기 스스로는 아니다(He is not himself). 이 사람은 를 발견했지만그것은 진실된 는 아니었다내가 어떻게 될까 나는 마음 쓰지 않는다이 사람은 행동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교류가 전혀 없는 것이다이 사람은 생명이 흐르는 파이프()에 지나지 않는다대단히 훌륭한 파이프임에는 틀림없으나진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혜의 일곱 기둥』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예언자에 대한 로렌스의 공감이 역력하게 보인다사막의 순수함이 상징이 되고인간적인 것으로부터 해방의 상징이 된다.


 

ㅡ 우리는햇빛이 오감을 깨우지만 밤새 사고에 지친 지력은 아직 잠자리에 있는 어느 맑게 갠 새벽녘에 출발했다이러한 아침에는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사이에세계의 소리와 향기와 색채가 사고를 통과하지도 않고 사고에 의해 전형화되지도 못한 채개개의 것으로 인간에게 직접 부딪쳐온다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충만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며창조에 의도나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ㅡ 내가 정신적인 자살을 연기했던 것은 단순한 유약함 때문이었다나의 두뇌 속에 있는 이 용광로의 불을 서서히 꺼가는 일그것이 자살이었는데.......나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사상은 발전시켰지만 나 자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다내게는 창조를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웃사이더에게 필요했던 것과 똑같이 로렌스에게도 필요했던 것은경험이 매우 격렬한 것이어서 타협에 기초한 문명의 부적절함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폭력이 비현실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ㅡ 반란에는 휴식처란 있을 수 없고환희의 배당도 지불되지 않는다정신은 감각의 부속물이며 감각이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어내고 일보전진할 때마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먼 모험보다 깊은 고난보다 심한 고통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감각은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다느껴진 감정은 정복된 감정이며표현됨으로써 매장되어버린 죽은 체험인 것이다.



ㅡ 비물질적인 것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관계되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시간이나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정신이 육체보다도 훨씬 빨리 늙기 때문이다인류는 고된 일로부터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동기가 마비된...황야의 이리는 돌아갈 길은 없다......전진을 계속하여 죄와 인생에 보다 깊이 빠져들어가는 길이 있을 뿐이다고 했다... “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어떠한 길도 똑같다고 하는 스트로드의 입장(처럼)...“진실을 말해버리자면내가 들을 수도 있고 볼 수 있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로렌스가 증오했던 것은 육체정신감정의 전부가 만들어내는 복합체일 뿐이며그의 생의 본능 주위에 항상 질식을 일으키게 하는 모포를 쌓아 올린 그 자신에 관한 관념일 뿐이었던 것이다

 


문명 사회에 태어났던 그들은 그 물질적인 행복관을 거부하고 사막에 은둔한다다시 세상에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현세부정을육체적인 안녕에 대한 정신의 강렬함을 설교하기 위해서다. 아웃사이더의 비참함은 말하자면 치아가 나는 시기에 있는 예언자의 고통인 것이다.


 

패배는 불가피하며 인생이란 먹이가 달린 함정이다는 고흐의 말은 먹이를 다시 물어야 할 필요에서 벗어나가기 위해 자살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는 불행히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할 방향을 잘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로렌스와 공통된다...그는 로렌스와 함께 아웃사이더의 문제에 수련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그에겐 이것이 이미 지력의 수련은 아니다그의 의지력은 감정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돌려졌다...둘은 다 실패했는데...로렌스가 너무나 많이 생각한 것과 똑같이 고흐는 너무나 많이 느꼈던 것이다한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느꼈으며또 한 사람은 느끼지 않고 생각했다.


  

ㅡ 그의 동작은 공전의 것이었다관중은......화석인 양 굳어버렸다말하자면 그는 피카소의 작품 <게로니카>의 무용화라 할 만한 발레 춤을 춘 셈이다.(로몰라 니진스키『니진스키』중에서

 


니진스키의 인생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장은 내 처를 비롯한 전 인류의 인생은 죽음이다고 한 말이다어느 날 밤 산책을 마친 후 휘황한 호텔 앞을 지나갈 때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ㅡ 나는 이러한 곳에서 영위되는 인생이 죽음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인간은 즐거워하고 신은 탄식한다그는 인간의 허물이 아니다.


 

나는 육체에 깃들인 신이다누구나 이와 같이 생각하기는 하나아무도 이 생각을 쓸 줄 모른다.” 그리고 신은 두뇌 속의 화염이다.” 니진스키의 끊임없는 슬픔의 하나는그가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그의 처 역시 이른바 천박한 사색가에 불과하여 인생 표면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그는 천성적으로 묵고형이며자기 내부 깊숙이 인퇴하여 정력을 일점에 결속한 후 자기표현에 의해 그것을 풀어버렸다.


 

나는 지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육체를 통하여 느낀다 – 니진스키

나는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신을 통해 통찰한다 – 로렌스

나는 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통해 통찰한다 – 고흐


 

성적인 오르가즘에서 나는 신이다하는 감정을 느낀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는 것으로 같은 감정을 체험하는 일은 드물며어떠한 지능 활동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예는 더욱 드물다윌리엄 제임스는 말한다.


 

ㅡ 알코올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멀쩡한 때 냉엄한 현실과 준엄한 비평정신에 의해 땅바닥에 짓눌렸던 인간의 신비적 측면의 기능이 알코올에 의해 자극받게 되는 데 있음이 틀림없다. 


 

아웃사이더에 관한 한 고도로 발달한 감성보다 강대한 지능을 갖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흐의 마지막 말 불행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는 말에 대해 이 긍정의 태도를 균형짓는 일이것이야말로 아웃사이더의 문제다이는 이미 철학문제가 아니라 종교문제기 때문이다.

 

 

5장 – 고뇌의 역  

 


낙관적이어서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평소 불행의 경계선 양지 쪽에 살며비관적이고 우울한 심정의 소유자는 그 반대편어둠과 근심의 세계에 산다.(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체험의 제상』 중에서)


 

아웃사이더는 변종이 아니라 낙관적이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보다 민감한 인간...아웃사이더는 어떤 내면적 긴장에서 출발...페시미즘(비관론)의 입장으로 되돌아온 셈...

 


ㅡ 심술궂은 아이들이 파리를 놀리듯/신은 사람을 놀리며 장난 삼아 죽인다(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글로스터의 2)


 

이것은 결국 인생의 불확실함을 말하는 것이며지금 들이킨 숨을 다시 뿜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사람이 어찌 목적이나 신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의문인 것이다.

 

 

어떠한 신념을 갖든 그것이 자기에게 닥치는 운명과 무관하다는 이 공포는 곧 실존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근거다동시에 어떠한 신의 배려나 숙명을 믿는 것이 모든 종교와 대부분의 철학의 필수적인 기본 조건임을 암시하고 있다...인생이란 한낱 고독한 나그네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종교의 근본 이념은 자유다...공포의 순간은나에겐 아무런 자유도 없다는 느낌에 휩쓸리는 순간이다힌두교와 불교의 경전에서 말하는 속박이란 기독교의 죄에 해당되는 말이다이는 적어도 죄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귀결이라 간주되고 있다종교에 있어 필수적인 기반이 되는 것은자유는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이다...아웃사이더의 문제란 결국 자유의 문제다...죽음에 직면하여 현실을 발견할 때 자기의 인생이 비현실적이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다.  

 


한쪽 극단은 신다른 쪽 극단은 불행우주는 신과 불행 사이에 걸쳐진 영원한 긴장이다.(실천적 아웃사이더였던 니진스키의 입장에서 보면)

 


지성을 중시하는 성실성 때문에자기허무에 대한 보상으로써 구세주의 피를 받아들일 수 없다.(사르뜨르의 부언

 


아웃사이더는 자유를 희구한다그는 한 번 태어났을 뿐 범속인이 자유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이것이 아웃사이더가 드물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며마치 한 소대 가운데 발이 맞는 것은 자기뿐이라 주장하는 사병과 같은 생각이다.

 


카프카의 <단식하는 광대>는 가장 명확히 아웃사이더적 입장을 나타낸 작품이다...인생에 대한 식욕의 결여 – 이것이 그의 문제다. 모든 인간의 행위엔 이와 동일한 허무의 낙인이 잇따른다

 


ㅡ 나는 기도합니다너무도 많이/자신과 논쟁하고 자신에게 설명할 문제를 잊게 하소서......( T.S.엘리엇의 <재의 수요일중에서)


 

이것이야말로 아웃사이더가 이룬 궁극적인 것이다그는 무신앙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한다...즉 내가 생각할 수도몽상할 수도 없는 신앙적 태도를 꾸미지 않고도 어느 때고 어거지로 그것이 내게 닥쳐올 수 있다고 대답한다


 

니체 일생의 일모든 가치를 무가치화하려는 일에 덤벼들었던 행동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충동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한다...그는 기독교의 이념을 지지하지 않는다...그는 그것과 대치할 신앙의 체계를 갖고 있었다.


 

ㅡ 기독교라는 것이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내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그러나 그것이 구제의 필요를 뜻하는 것이라면 존중할 만하다.


 

모든 위대한 인간은 자기의 이상을 연출하는 배우라는 경구는 모든 인간은 잠재적인 영웅이고 천재며 다만 무기력함이 인간을 평범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그의 고유한 종교심은 어떠한 희생도 꺼리지 않는 진리에의 의지진리를 사랑하는 나머지 젊은 광기였다.


 

짜라투스트라는 소리 높이 외친다 ㅡ “내 가르침을 들어라하늘의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지 마라자유로이 머리를 들어라대지에 의의를 부여하는 대지의 머리를.” 이것이 니체의 긍정 철학의 시발점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군중의 하나가 소리쳤다. ‘이 줄타는 광대의 얘기는 실컷 들었다이젠 실물을 보여다오.’ 그러자 군중은 일제히 짜라투스트라를 조소하기 시작했다...짜라투스트라는 명상한다. ㅡ 인간의 생명이란 불가해하고도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한 놈의 어릿광대에 의해 죽게 될 수도 있다니.


 

블레이크 – 어리석음을 끝까지 추구하면바보도 끝내 현명하게 된다.


 

로렌스나 고흐는 암중모색하던 인물이었으나 니체는 그렇지 않았다. – 두려운 것은 상승이 아니라 낙하다손은 위로 뻗는데 눈은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는 그 절망...... 내 의지는 인간에게 매달린다나는 사슬로 나 자신을 인간에게 잡아맨다내 몸이 초인을 향해 자꾸 끌려오기 때문이다한편 나의 다른 의지 역시 초인을 지향한다.


 


제6장과 제7장, 제8장은 생략합니다.  

 


 

9장 – 회로에서의 탈출

 

 

감정과 감각이 무수한 유성처럼 자아에 격돌할 때 비전의 인간은 자기의 마음이 물레방아를 회전시키는 물의 흐름과 같다는 점을 깨닫는다세계에 넘치는 활동성 그 자체를 오싹오싹 느끼는 것이다...지금의 세계는 무한히 큰 힘이 상호 충돌하고 있는 전장으로 보인다그리하여 비전의 인간은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다세계가 동적이라는 것그리고 자기의 영혼도 동적이라는 것그것을 알아차린 그는 사물의 표면만을 바라보며 낙담하는 대신에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력의 작용을보다 충실한 생명을 목표로 하는 의지의 활동을 본다보통의 경우 이 의지는 숨어 있어 의식적인 마음을 제멋대로 움직여준다의식적인 마음은말하자면 물질 세계에 내던져져서 거기에서 제멋대로 꾸며낸 일관성이라든지 불변성의 개념에 의해서 가능한 한 기분 좋은 잠을 탐내려고 한다대개의 경우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접촉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거기에서 당연히 최소한도의 노력으로써 최대의 안락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의식적인 마음의 목표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우리가 편의상 아웃사이더라고 관습적으로 부르는 사람들로의식의 부분과 무의식의 실체가 밀접하게 접촉되어 있어서 그 의식적인 마음이 보다 충실한 생명을 찾는 욕구즉 부르주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안락이라든지 안정이라고 하는 것에 너무 뜻을 두지 않는 욕구를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아웃사이더가 이룰 수 있는 것의 하나는 자기 내부에 숨어 있는 힘을 통해 그 고투를 원조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발견하는 것이며만약 아웃사이더가 이러한 내적인 힘을 막연하게 밖에 깨닫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힘을 보다 명료하게 의식하고힘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아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웃사이더는 최초에 이렇게 말한다-“나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고독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한새로운 체험은 불가능하다강렬한 갈등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붓다는 단식을 하고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그것을 계속했다어느 날 개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그는 기슭으로 기어올라갈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결국 늘어뜨려져 있던 가지에 매달려서 익사를 면했는데이때 죽음 일보 직전의 체험에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는다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은 보다 긴 생명이지 생명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이렇게 깨닫자 그는 당연한 식사를 하기로 결심하고동시에 바라는 결과를 얻는 수단으로서 자기 자신의 예민한 상상력과 식별력에 의지하기로 한다...붓다가 오랜 명상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유의 경지열반에 도달하여 대오각성하고 자기실현을 완성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환희가 존중되었던 것은 그 배후에 의지의 생명력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며만약 단순한 고행 혹은 의식적인 과제로서 이러한 체험을 하려고 하면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뿐이며 오히려 해롭게 될 위험이 있다문제는 어디까지나 의사다.

 


자각이라는 것은 일보 물러서서 자신(창유리)’과 본인이라는 별개의 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갑자기 그리고 영원히 죽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에크하르트가 사람은 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그렇지만 신도 또한 인간 없이는 살지 못한다인간 없이는 신은 자신의 존재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고 말했을 때 그는 주관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아무리 절대적이고 엄격한 두뇌의 진리일지라도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진리일 수 없다


 

종교를 고쳐 규정하기 위하여는 제일보로서 낡은 가치에서 곰팡이를 털어버리고 인간이 최초로 그것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자세를 포착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흄은 현재의 휴머니즘기의 종언을 예언했다이 휴머니즘 시대는 흄의 지적대로 르네상스가 일어나서 절대적인 한정론인 원죄설이 파기됨과 동시에 시작되었는데흄이 믿기로는 원죄설을 파기한 것은 모든 방면에 있어서 명석한 사고를 흐리게 하고 감상적인 낙관주의에 채색된 사고법을 날뛰게 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ㅡ 새로운 반휴머니즘의 관념은 중세 정신의 단순한 재현일 수 없다휴머니즘 시대는 과학적 성실성을 만들어내 사상과 행동의 자유라는 개념을 육성했다이것은 금후에도 남을 것이다.


 

휴머니즘은 정신적인 나태의 별명에 불과하다즉 수학이나 물리학의 세계를 상대로 하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종교의 범주에 관해서는 머리를 썩이려 하지 않는 과학자나 논리학자가 채용하는 애매하고 불충분한 신조그것이 휴머니즘이다이런 종류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종교 범주의 윤곽이나 그 파생물을 명료하게 하고 포착하기 쉬운 것으로 하는 것만이 필요할 뿐르네상스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잡동사니를 분류하는 것을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쇼의 이 말에 『성찰』 속에서 종교의 감상성을 훈계하고 있는 흄의 얘기를 덧붙여 균형을 맞추도록 하자.

ㅡ 나에게는 전통에의 향수도 공손한 존경도 없고안젤리코의 기분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없다종교를 옹호하는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것에 환희작약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잡담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중요한 것은 누구도 마음 쓰지 않는 것즉 원죄설을 필두로 하는 갖가지 교리다인간은 어떠한 의미에서 있어서든 완벽한 존재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비참한 물건이면서도 완벽함은 이해할 수 있다이상과 같은 이유로 나는감상 때문에 감히 교리를 훌륭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위해서라면 감상을 감수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만약 현대 문명이 자멸하기 전에 흄이 말한 새로운 종교의 시대가 탄생한다면그것을 위해서는 문명 세계 전체의 참여를 필요로 할 만큼의 지적인 창조와 진통이 불가피하게 될지는 모른다이 책에서 기술한 이외에도 아직도 많은 장애가 남아 있다. ‘문명이 직면하는 문제는 앞 주의 일요신문 표제처럼 객관적으로 소화ㆍ흡수할 수 있는 종교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인데개인 문제는 어느 세대에도 그 정반대임에 틀림없다.


 

자기보존의 본능이 내면 확대의 고통에 반항하고정신적인 태만에 기울기 쉬운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파도같이 높아져가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손으로 만진 체험의 양을 한정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존재의 민감한 부분을 그것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드러내 보이며어떻게 하든지 전체로서 사물을 보려고 고투하는 것그것이 개인에게 맡겨진 문제다개인은 이 긴 노력을 아웃사이더로서 시작한다그리하여 성자로서 마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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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다중》의 2부에서 다룬 것들 중에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이 정도의 요약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1부에 이어 오늘의 2부를 먼저 읽고 《다중》을 구입해 읽으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제가 현대 유럽의 신좌파 사상가의 지적 리더격인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을 1, 2부로 나누어 요약한 것은 아직도 마르크스의 교리를 내세우며 기득권화하고 있는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 같은 상급노조들의 경직성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대형사업장노조가 귀족노조화된 상황에서 이미 보수 기득권화한 한국노총은 상급노조가 아닌 이익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민주노총만이라도 비물질노동이 일상화한 현대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편성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임금문제로 파업을 한 뒤, 노사협상으로 자신들의 목표가 일부 달성되면 파업을 접고 현장으로 돌아가는 대형사업장노조의 귀족적이고 이기적인 행태는 노동운동 전체를 물먹이는 최악의 행태입니다. 



대한민국이 왜 가장 신자유주의적 국가인지 이해하려면 양대노총과 대형사업장노조들의 파업과 임금인상, 자기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길들여져 동일 사업장에서 동일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과 임시직, 파견직 노동자들을 자신의 임금상승을 위해 이용하고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귀족노조화하고 있는 대형사업장노조는 철저한 이익집단에 불과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21세기의 좌파 철학자 중에 가장 왼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스피노자에 집중하는 이유도 마르크스의 자본만으로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좌파사상도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추며 발전하고 변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중》과 《제국》, 《전복적 스피노자》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책이《다중》이니 꼭 구입해서 읽어보면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대한 이해가 늘어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이해를 원하는 분들은 세 권 다 읽어보시면 최소한 유럽의 신좌파가 어디를 향고 가고 있는지, 그 철학적 기반과 현실인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같으면 마르크스나 레닌의 부활이라며 길길이 날 뛸 것입니다, 자신들의 체제가 우파 전체주의에 가깝기 때문임을 극구 부인하면서요. 최소한 미국 유학파 출산 파워엘트들틀이 한국에 들여온 것들을 중심으로 하면, 가장 악마적인 것이 미국적인 것입니다.   




   




제2부 다중



다중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다양한 사회적 주체이다. 다중의 구성과 행동은 정체성이나 통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한다...다중은 다양함을 유지하고 내적으로 차이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다.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지배하는 살아 있는 살이다.



우리가 인종의 차이나 젠더의 차이가 없는 세계를 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인종과 젠더가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 즉 그것들의 권력의 위계들을 결정하지 않는 세계, 차이들이 자유롭게 자기들을 표현하는 세계를 원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다중을 향한 욕망이다...다중은 공통된 것에 기초하여 자신의 생산적 형상을 발전시키면서, 제국을 꿰뚫고 나가 자신을 자율적으로 표현하고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위험한 계급들



노동의 공통되기


다중은 계급적 개념이다...계급은 계급투쟁에 의해 규정된다. 물론 사람들이 - 머리카락 색깔, 혈액형 등등에 따라 - 계급들로 묶일 수 있는 무수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계급들은 집합적인 투쟁의 노선들에 의해 규정된 계급들이다.



계급은 진정, 경제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삶정치적 개념이다. 더욱이 우리가 삶정치적인 것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또한 노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임금노동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일반적인 창조적 역량들에 준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빈자는 이 계급관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이다.



다중 개념은 노동의 형식들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의거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형태들이 사회적으로 생산적이다...비물질노동의 또 다른 주요 형태를 ‘정동적 노동’이라고 부른다. 정신적 현상들은 정서들과는 달리, 정동들은 신체와 정신에 똑같이 관계한다. 사실상,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정동들은 유기체 전체에 담겨 있는 삶의 활력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며, 신체의 일정한 상태를 사유의 일정한 양태와 함께 표현한다. 그래서 정동적 노동은 편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



선진국들에서 정동적 노동의 중요성이 증대됨을 보여주는 한 가지 지표는, 고용주들의 교육, 태도, 인격 그리고 (주요한 숙련기술들을 갖춘 피고용자들이 필요로 하는) ‘친 사회적’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태도와 사회적 숙련기술들을 갖춘 노동자’는 정동적 노동에 능숙한 노동자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모든 비물질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 여전히 물질적임을 강조해야 한다...비물질적인 것은 그 생산물이다. 



가사노동은 실제로 청소와 요리 같은 반복적인 물질적 업무들을 필요로 하지만, 또한 아이들 사이에, 가정에 그리고 공동체에 정동들, 관계들, 소통 및 협력의 형식들을 생산하는 것을 수반한다. 정동적 노동은 사회적 관계들과 삶형태들을 직접적으로 생산한다는 점에서 삶정치적 생산이다...실로 고도의 정동적인 구성요소를 갖춘 노동은 대개 여성화되어, 권위를 덜 부여받으며 보수도 덜 받는다.



더욱이, 정동적 생산이 임금노동의 일부가 될 때, 그것은 극히 소외적인 것으로 체험될 수 있다. 정동적 노동자는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 - 매우 친밀한 어떤 것 -을 고객과 상사의 명령에 의해 팔고 있는 것이다. 소외는 언제나 공자 노동자들의 착취를 이해하기에는 취약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여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노동 - 정동적 노동뿐만 아니라 지식 생산과 상징적 생산 - 으로 간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영역에서, 정말이지 착취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개념적 열쇠를 제공해준다.



일반적으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는 생산조직을 일관작업의 선형 관계에서 분산된 네트워크들의 무수한 불확정적인 관계들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보, 소통, 협력은 생산의 규범이 되며, 네트워크는 그 지배적인 조직형식이 된다...그러므로 생산의 기술적 체계들은 생산의 사회적 구성과 밀접하게 상응한다. 한쪽에서는 과학기술적 네크워크들이, 다른 쪽에서는 사회적 주체들의 협력이 작동한다. 이 상응이 노동의 새로운 위상학을 규정하며, 또한 착취의 새로운 실천들과 구조들을 특징짓는다.



저물어가는 농민세계


수출지향적 단일작물 농업은 불가피하게 대규모 생산과 소유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적 집단화는, 세계시장을 위해 생산하는 농업노동자 부대를 고용하는 거대한 농업생산 단위들을 갖춘, 실질적인 토지독점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져왔다. 이것의 외부에는, 생존을 위해 소유한 토지가 없거나 불충분한, 점증하는 수의 농촌빈민들이 남게 되었다.



(그 경제적, 문화적 측면 다음으로) 농민은 또한 정치적 형상이다. 아니 오히려 많은 이론적 입장들에서는 정치의 성격을 박탈당한 비정치적 형상이다. 농민형상의 비정치성이 의미하는 바는, 농민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고 고립되어 있으며, 반작용을 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자신의 자율적인 정치적 행위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농촌의 농민에 비해 도시의 노동계급에게 커다란 정치적 이점을 제공했던 소통의 회로들은 또한 노동의 조건이 달랐던 데 기인한다. 공동의 기계를 둘러싸고 팀을 이루어 작업하는 산업노동자들은 협력과 소통에 의해 규정되며, 이렇게 해서 능동적이 되고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을 지도하고 농민을 대변했을 때, 그것은 분명히 항상 농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이 비극적인 역사는 한 주체가 예속적인 타자를 대변하는 일의 (설령 그 타자가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당함과 무서운 결과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우리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삶의 특이한 형식들이며, 그와 동시에 공통적인 전지구적 실존을 공유한다. 다중의 인류학은 특이성과 공통성의 인류학이다.



인도의 두 이탈리아인


특이성을 인식하자마자 공통된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이성들은 소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 능력은 특이성들이 공유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두 개의 눈, 열 개의 손가락, 열 개의 발가락을 가진 신체를 공유한다.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삶을 공유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착취의 체제를 공유한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의 공통적인 꿈을 공유한다. 더욱이 우리의 소통, 협동, 협력은 실존하는 공통된 것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번에는 공통된 것을 생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된 것을 매일 만들고 또 만든다.



빈자의 부(또는, 우리는 빈자들이다!)


빈자들,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집이 없는 사람들 등등의 계층들은 실제로 사회적 생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계와 종속의 무수한 메커니즘들에도 불구하고, 빈자들은 끊임없이 삶과 생산의 엄청난 힘을 표현한다...빈자가 제국의 전지구적 질서의 희생자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빈자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니라 동시에 강력한 행위자들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빈자가 사회적 생산의 과정들에 점점 더 포함되는 만큼, 그들은 모든 전통적인 노동하는 계급들과 더불어 공통적인 조건에 참여하는 계층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잠재적으로 다중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빈자가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노동에 종사하게 된 것, 농업에서 빈자가 차지하는 점점 더 핵심적인 역할, 그리고 대규모의 이주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이동성 등은 이 과정이 이미 얼마나 높은 정도로 전개되었는지를 증명해준다.



산업예비군에 대한 이런 낡은 이론들은, 기업들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세계 이곳저곳으로 일을 옮기며 일종의 노동 ‘덤핑’을 함으로써 국가들 사이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커다란 차이에서 이득을 보는 지구화시기에 다시 등장한다. 선진국들의 노동자들은 공장들이 문을 닫고 자기네 일들이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위협을 끊임없이 받으며 살아간다.



첫째, 산업노동자들이 더 이상 밀집되고 정합적인 통일체를 형성하지 않고 오히려 비물질적 패러다임에 의해 규정되는 네트워크들 안의 여러 노동형태들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는 의미에서 ‘산업정규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둘째, 노동능력이 사회적 생산과정들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예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사회적 분할선도 생산적 노동자들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고,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적 노동을 가르는, 언제나 의심스러웠던 맑스주의적 구분은 이제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자신의 가난의 조건들에 반대하는 빈자들의 투쟁들은 강력한 항의들인 동시에 삶정치적 힘의 긍정 - 비참한 ‘소유’보다 더욱 강력한 공통적 ‘존재’의 드러남 - 이기도 하다...빈자들의 오늘날 투쟁들은 더욱 포괄적이고 삷정치적인 특징을 띠며 전지구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생산에 참여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빈자들의 부이다...언젠가는 이 공통적인 생산성을 정치적 기회들로 담아내야 한다. ‘보장소득’에 대한 요구가 그것이다.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계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비물질노동의 패러다임에서는, 그리고 생산이 점점 삶정치적이 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경제적 논점들은 점차 의미가 없어진다. 



악마적 다중들: 도스토예프스키가 성경을 읽다


다중은 하나이자 다수이다. 다중의 불명확한 수는 질서의 이 모든 원리들을 위협한다. 이러한 책략이 악마의 일이다.

다중과 관련해서 정말 무서운 것은, 그 수의 불명확함 - 다수임과 동시에 하나임 - 이다...그러나 다중은 레기온이다. 다중은, 서로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소통하고 협력하고 공통적으로 행동하는, 셀 수 없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추기1> 방법 : 맑스의 발자국을 따라



각각의 시기는 사회적 현실과 사상의 다양한 요소들을 구조화하는 하나 또는 여럿의 공통적인 형식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어 각각의 시기의 이 공통적인 형식들, 즉 동형체들은, 미셀 푸코가 다양한 근대적 훈육 제도들의 공간적인 분포와 구조에 대한 자신의 연구들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는, 감옥이 공장을 닮고, 공장이 학교를 닮고, 학교가 병영을 닮고, 병영이 병원을 닮는 것 등등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모두 푸코가 훈육적 패러다임에 연결시키는 공통적인 형식을 공유한다. 



이와 달리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둘러보는 모든 곳에서 네트워크들 - 군사조직들, 사회운동들, 사업편제들, 이주유형들, 소통체계들, 생리적 구조들, 언어관계들, 신경전도체들 그리고 심지어는 개인적 관계들 -을 본다. 그것은 네트워크들이 이전에 주변에 없었다는 것도 아니며 두뇌의 구조가 변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네트워크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 우리의 방식들을 규정하기에 이른 공통적 형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들이 비물질적인 생산 패러다임의 명령을 받는 협력적이고 소통적인 관계들의 조직형식이라는 것이다. 이 공통적 형식이 출현해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경향이 바로 시기를 규정하는 바의 것이다.



맑스는 노동과 가치의 관계를 양의 상응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한다. 추상적 노동 시간의 일정한 양은 가치의 양과 같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규정하는 이 가치법칙에 따르면, 가치는 노동시간이라는 측정가능하고 동질적인 단위들로 표현된다. 맑스는 마침내 이 관념을 노동일과 잉여가치에 대한 자신의 분석에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 법칙은 유효하지 않다. 노동의 시간적 통일성이 가치의 기본적 척도가 되는 것은 오늘날에는 맞지 않다. 



우리의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역량들은 언제나 우리의 생산적 노동보다 -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 - 보다 더 위대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한다.



노동과 가치는, 살아가기와 생산하기가 구분 불가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에서 삶정치적이 되었다. 삶이 생산과 재생산의 행동들에 의해 완전히 뒤덮이는 한에서 사회적 삶 전체는 하나의 생산적 기계가 된다...비물질적이고 삷정치적인 생산의 패러다임 안에서 보이는 가치의 이 새로운 자질들은 모든 전통적인 설명 메커니즘을 침식한다...착취이론은, 이 적대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노동자들이 조직을 하고 자본주의적 통제를 거부하는 기초로서도 기능하는, 자본이 노동자들에 일상적으로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야 한다.



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며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금융자본은 미래에 돈을 걸며, 우리의 공통적인 미래의 생산적인 역량들의 보편적 표상으로 기능한다.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을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



노동과 권력의 전지구적 분할을 관리하는 것은, 전지구적 생산과 부에 대한 명령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이 쓸 수 있는 하나의 무기이다...‘빈자’는 사회 일반을 그 토대에 의해서 정의되는 분리 불가능한 전체로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이다...노동이 창출하는 부는 박탈된다. 이것이 그 적대의 원천이다. 하지만 산 노동은 부를 생산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유지한다이것이 산 노동의 힘이다. 적대와 힘의 이러한 결합 속에서 혁명적 주체성이 형성된다.



경제학은 만일 자신이 하나의 학문이고자 한다면,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더 가까운 어떤 것으로 되돌아가는 모든 사회적 삶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경제학은 삶정치적 학문이 되어야 한다. 아마르티아 센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공학은 윤리학이 되어야 한다.



제2장 신체에 관하여



전지국적 인종차별


현대의 ‘공화주의적’ 논자들의 일부는 근대적인 정치제도들을 국가의 경계를 너머로 확대하고 전지구적 입헌질서를 통해 세계주의적인 협치를 확립하고,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정치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민주적인 다중은 하나의 정치적 신체일 수 없다. 적어도 근대적 형태의 신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중은 신체의 유기적인 통일을 거부하는 특이한 살과 같은 어떤 것이다.



현 정치공백기에도 마찬가지로 다수의 새로운 권력구조들이 존재한다. 결코 무대를 떠나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권력 자체이다...국가들은 정치공백기에 계속해서 자신들의 전통적인 기능들의 대부분을 수행하지만, 다른 한편 자신들이 점점 더 봉사하게 되는 새로운 전지구적 권력에 의해 변형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등가교환은 가난한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이 세계시장에서 부단히 과소평가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실상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에게 보조금을 주는 셈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더욱이 이 불평등 체계들은, 특정한 정치적 조건들 아래에서 자본주의적 지배의 전체 발판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는, 자본주의 발전의 내부모순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적 지구화는 가능한 가장 나쁜 방식으로 - 전세계 나라들의 노동관계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의 부당한 메커니즘들을 세계 전역에 만연시킴으로써 - 이 문제를 해결해냈다.



노동, 가난 그리고 착취의 전지구적 분할들의 지형학은 정치적으로 구성된 위계들의 변화하는 모태이다...가난과 질병은 인구 통제의 간접적인 도구들이 된다...가난한 인구들이 전 세계의 선진국들과 후진국들 모두에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특히 위기인 것이다...근본적인 위기는 전지구적 인구의 색깔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만일 수가 많은 것이 권력이라면, 모든 인구들의 재생산은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보스로의 여행


전세계의 경제적 정치적 관료적 엘리트들은 항구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 질서와 규제 없이는 경제시장도 존재할 수 없다는 오래된 교훈을 입증한다...경제시장은 항상 반드시 사회시장 안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정치적 구조들 안에 심어진다. 국가통제에서 자유로운 시장들이나 무역을 주장하는 자들은 실제로 더 적은 정치통제를 요구한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종류의 정치통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에 반대하는 노동의 투쟁들은 회유하고 패배시키기 위해 정치통제가 요구되고 있다. 모든 노동협상 뒤에는 정치권력과 그것이 가진 무력행사의 위협이 있다. 만일 정치적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노동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는 무력 사용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시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전지구적 경제에서 조인된 사업 계약들의 대부분은 국민국가들에 의해 비준되지 않고 단순히 다국적 초국적 기업들에 봉사하는 법률회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기업과 그 법률 회사가 국제적이고 심지어는 전지구적인 국제상관습법 체제를 발전시키고 그럼으로써 지구화를 규제하는 규범적인 과정을 수립하는 만큼, 바로 그 만큼 자본은 일종의 ‘정부 없는 전지구적 통치’ 형식을 가장 약한 형태로 창출하는 것이다...여기에서 법률은 자본을 규제하는 외부적인 강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들 사이의 협정의 내적 표현이다. 이것은 실로 일종의 자본주의적 유토피아다.



WTO에서는 각각의 국가가 한 표씩을 가지고 있는 반면, 세계은행과 IMF는 투표권이 화폐 기부금에 비례하는 방식의 이상한 ‘1달러 1표’ 체제를 가지고 있다...IMF가 경제 전문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반면 세계은행과 UN의 원조 기관들에서 일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NGO 단체의 것과 유사한 사회복지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IMF는 아마도 초국적 경제기구들 중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일관된 기구일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IMF는 사실상 세 개의 주요 축들 - 무역의 지구화, 시장의 금융화, 생산회로들의 전지구적 통합 - 사이에서 자신의 임무를 변경했다...따라서 IMF는 (이제는 포스트포드주의적이며 탈근대적인, 그리고 다중의 삶정치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새로운 전지구적인 사회적 생산형식들을 금융 메커니즘을 통해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키는 책임을 맡고 있다. 



IMF의 기본적인 기획은 국가들로 하여금 케인즈주의적인 사회 프로그램들을 버리고 통화주의적인 정책을 채택하도록 규제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재정적으로 취약하고 가나한 경제들에게, 공공복지에 대한 최소한의 지출, 공공산업과 부의 사유화, 공공부채의 절감을 포함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공식을 명령한다.



IMF는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더 위협이 되는 나라(아르헨티나처럼 아마도 계급투쟁의 요소들이 강한 나라)에는 엄격한 긴축경제의 조건들을 부과할 수 있으며, 전지구적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나라(터키처럼 현재 중동에서 제국적 질서를 구축하는 데서 필수적인 부분으로 기능하는 나라)에는 그러한 명령들을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거대 정부가 돌아왔다


9월11일 이후 위기는 자본이 주권적 권위를 배후에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지를 금세 떠올리게 했다. 시장질서와 위계에 심각한 균열들이 일어날 대마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진실을 말이다...군사적 행위와 경제적 이익 사이의 주요한 연결고리는, 그 어떤 개별 국가의 이익으로부터도 추상된, 훨씬 더 일반적인 분석수준에서만 존재한다. 군사력은 세계시장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들을 보장해야 한다.



케인즈주의 아래에서는, 국민국가 노동계급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중재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제공함으로써 안정성과 경제성장을 뒷받침했으며, 그 과정에서 생산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확대되었다. 그와 달리, 이제 우리가 보는 주권의 형식들은 자본과 노동의 갈등관계를 협상하기 위한 어떠한 중재 메커니즘도 없이 완전히 자본을 위해서만 존재한다...타키투스가 말한 바처럼, 공화국이 가장 부패한 상태가 될 때 법률들은 가장 많이 늘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법률이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부패를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부패는 체제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내놓아진 생명


재산이 무형적이 됨에 따라 모든 기존의 보호 메커니즘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주권적 권위의 담지체가 확대된 보호 노력들을 할 필요가 생긴다...그것들을 가치 있게 만드는 복제가능성이 바로 그것들의 사적 성격을 위협하는 바의 것이다.



특허를 받은 유일한 동물 유형인, 온코마우스(종양 생주), 뒤퐁은 개별 생쥐들을 연구도구로서 판매하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측면은 뒤퐁이 단순히 개별 생주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쥐 유형 전체를 소유한다는 점이다...가장 복잡하고 다툼이 많은 영역들 중의 하나는 유전정보의 소유권과 관련된다...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유기체는 특허권을 부여받을 수 없지만, 반면에 과학자들이 그것에서 도출하는 정보는 인간 발명의 결과이기 때문에 특허권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물 유전정보의 소유권과 관련한 경우들도,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종자와 식물 변종들의 사적 소유도 이와 같은 논리에 따라 결정되며, 마찬가지로 비물질노동에 기초를 둔다...이 판례는 명백하게 노동에 준거한다. 식물들, 식물 변종들 그리고 생식세포질(즉, 종자 안에 암호화된 유전정보)은, 만일 그것들이 연간 노동의 생산물들이고 그래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면, 사적 소유에 적합해지는 것이다.



주요한 논점은 인간들이 자연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공통적이기를 그치고 있다는 것, 자연이 사유재산이 되어가고 있으며 오로지 새로운 소유자들에 의해서만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두 단계로 된 법적 논리이다. 생명형태들이 코드에 의해 규정되고 코드가 생산하기 때문에, 코드를 생산한 사람이 생명형태들을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유화 - 지식, 정보, 소통 네트워크, 정동적 관계, 유전적 코드, 자연자원 등등에 대한 사유화 - 에는 뚜렷하게 바로크적, 신봉건적 특징이 있다. 다중의 상승하는 삶정치적 생산성은 사적 전유 과정들에 의해 약화 저지되고 있다...협동적이고 소통적이며 공통적인 지식 생산 과정은 다른 모든 비물질적 삶정치적 생산 영역들을 똑같이 특징짓는다. 



자본주의적 사유재산권들은 생산자의 개별적 노동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더 집단적이고 협력적인 생산형식들을 끊임없이 도입한다. 노동자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생산된 부가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는 것이다. 이 모순은 비물질노동과 비물질적 재산의 영역에서 점점 극단적이 된다. 사유재산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가치 있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사적으로 소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부분적으로 어리석게 만든다. 



경제학자들은 결코 지치는 법 없이 우리에게, 재화는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는다면 효율적으로 보존될 수도 활용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진실은, 우리 세계를 이루는 대다수는 사유재산이 아니며 우리의 사회적 삶은 오로지 이 덕분에 기능한다는 것이다...언어들, 발화 형식들, 몸짓, 갈등 해결 방법들, 사랑의 방식들 그리고 대다수의 삶의 경험들이 공통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호작용하거나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룩한 지식, 정보 그리고 연구 방법들의 축적이 공통적이지 않다면, 과학은 멈추고 말 것이다. 



3장 다중의 자취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는 상이한 본성들을 가진 많은 개별적 신체들로 구성되어 있는바, 그 각각은 고도로 복합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중들의 다중은 하나의 신체처럼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살의 괴물스러움


공동체 실천들은 한때 좌파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폭력들 - 광포한 축구 팬 클럽들에서 카리스마적인 종교 숭배자들에 이르는, 스탈린주의적 교조주의의 부활에서 다시 불붙은 반유대주의에 이르는 - 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는 공동체의 공허한 그림자들이 되었다...좌파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과거의 강력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자주 무의식적인 반사작용과 같은 낡은 몸짓들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떠받치곤 했던 낡은 사회적 신체들은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없다.



다중의 살은 순수한 잠재력이자 형성되지 않은 삶의 힘이며, 이런 의미에서 부단히 삶의 충만함을 목표로 삼는, 사회적 존재의 원소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다중의 살은 사회적 존재를 계속해서 확장하는 원소적 힘이다. 바람과 바다와 대지를 붙잡아 이용하려 시도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가 붙잡는 정도를 초과한다. 그래서 정치적 질서와 통제의 관점에서 볼 때, 다중의 원소적 살은 미치게 할 정도로 파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적 신체의 위계적 기관들 속으로 도무지 포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괴물들의 침입


질 들뢰즈는 인류 내부에서 괴물을 인식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종을 변화시키고 있는 동물이다...정말이지 우리는 어떤 괴물들과는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어떤 괴물들과는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우리는 다중의 괴물스러운 표현들을 이용해서, 인공적인 삶의 변이들이 상품들로 변환되는 것에 도전하고 자본주의적 권력이 자연의 변형들을 판매용으로 내놓은 것에 도전하며 지배 권력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우생학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괴물들의 새로운 세계는 인류가 자신의 미래를 거머쥐어야 하는 세계이다.



공통된 것의 생산


공통된 것의 생산의 핵심 개념을 습관에서 수행으로 이동시킨 1990년대에 출현한 이 새로운 신체 이론들은, 신체를 배제하고 성적 차이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철학과 정치학이 전통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남성 신체를 규범으로 여기게 되며 여성의 종속화를 유지하고 숨기게 되기 때문에 ‘신체를 기억해야’한다는 낡은 금언을 뛰어넘는다. 페미니즘은 신체와 필연적으로 모순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신체가 여성 억압의 현장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적 특유성이 페미니즘적 실천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성은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러 ‘여성’의 성적 신체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일상적인 삶에서 여성들이 수행하고 남성이 남성성을 수행하는 식으로, 또는 몇몇 일탈적 성행위자들이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수행하면서 규범들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젠더 수행성은 습관과 마찬가지로 수행은 고정불변의 자연이나 임의적인 개별적 자유를 의미하지 않으며, 이 둘 사이에 놓여있는, 협력과 소통에 토대를 둔 일종의 공통적인 행동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공통된 것의 이러한 실천들이 사회적으로 광범하게 확산되고 경제적으로 중심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자유로운 표현과 공통의 삶에 기초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창출을 위한 기획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다중의 기획이 될 것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넘어서


반테러와 대항반란의 논리에서는, 사실상, 안보가 결국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사적인 것’은 정말이지 존재하지 않는다. 안보는 공통된 것의 절대적 논리이거나, 아니면 정말이지 공통된 것 전체를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왜곡이다...사유화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사회적인 것에서는 모든 것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정부 감시와 통제에 노출시키는 것이 경향을 이루며, 경제적인 것에서는 모든 것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소유권에 종속시키는 것이 경향을 이룬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체제들이 확립한 (다중이 운동들이 맞서 싸우는) 법률적 틀들과 맞설 필요가 있다. 이러한 법률적 틀들은 (물, 공기, 땅 그리고 복지국가 시기에 국가의 기능으로 만들어졌던 건강관리와 연금을 포함하는 삶의 관리를 위한 모든 제도와 같은) 공적 재화들의 사유화 기획, 그리고 또 어쩌면 더욱 중요한 것으로 (통신 및 여타 네트워크 산업들, 우편 서비스, 공공 운송, 에너지 시스템 그리고 교육을 포함하는) 공적 서비스들의 사유화 기획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공적 재화들과 서비스들이 국민국가의 수중에 있는 근대적 주권의 바로 그 토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반이익’ 또는 ‘공공이익’ 개념을, 이러한 재화들과 서비스들의 관리에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공통이익은, 국민국가의 법률적 도그마를 창조한 공공 이익과 대조적으로, 사실상 다중의 생산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공통이익은 국가의 통제 속에서 추상화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인, 삶정치적인 생산 속에서 협력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재전유된 일반 이익이다. 즉, 그것은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일반 이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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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의 기획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전지구적 민주주의 사회를 요구하며 그것을 성취할 수단 또한 제공해줍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에서 21세기 유럽의 신좌파를 이끌고 있는 네그리와 하트의 공동저작으로,  20세기말에서 지금까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에 대한 정치적 정의를 담은 연속 기획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다중》의 1부에 나오는 내용 중 중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올립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부정적 세계화의 지배세력에 대항하여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네그리와 하트의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책을 구입해서 읽으면 미셀 푸코에서 딜뢰즈와 카타리, 데리다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른 신좌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길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제일차적인 장애물은 전지국적 전쟁상태이다...전통적으로 민주주의는 전쟁 기간 동안에는 유예되었고, 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권력은 강력한 중앙집건적 권위에 일시적으로 위임되었다...전쟁은 일반화된 특징을 띠면서 모든 사회적 삶을 질식시키고 그 자신의 정치적 질서를 강요한다.



현대의 전지구적 질서가 모든 국민국가들의 평등한 참여에 의해서 혹은 심지어 UN의 권위 하에 있는 다자적 통제의 모델 속에서처럼 일단의 엘리트 국민국가들에 의해서 유지될 수 없으며 또 그러한 방식으로 특징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역적, 민족적, 그리고 지역적 선을 따르는 엄격한 구분과 위계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의 전지구적 질서를 정의한다.

한 얼굴에서 제국은, 통제와 항상적 갈등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통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위계와 구분의 네트워크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킨다. 



지구화의 두 번째 얼굴은,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사람들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다르게 남아 있으면서도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공통성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다중 역시도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차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표현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네트워크로, 우리가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살 수 있는 마주침의 수단들을 제공하는 네트워크인 것이다...다중에서는 사회적 차이들은 서로 다른 상태로 남아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소통하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중을 노동계급과 구별해야만 한다. 노동계급이라는 개념은 배타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제1장 짐플리치씨무스



예외들


전통적으로 국제법에 의해 이해된 전쟁이 주권을 가진 정치적 독립체들 사이의 무력분쟁이라면, 내전은 단일한 주권 영토 내부에서 주권적인 또는 비주권적인 전투부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력분쟁이다. 이 내전은 이제 일국적 공간 내부에서가 아니라 전지구적 영역을 가로질러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국적 공간이 이제 더 이상 주권의 효과적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분쟁들 중의 어떤 것이 제국 전체를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쟁들이 전지구적 제국 체제 속에 존재하며 그것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다시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2001년9월11일에 있었던 미 국방성 건물과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은 이 전지구적 상황을 창출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공격은 우리로 하여금 전지구적 상황의 일반성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른다.



주권국가들 사이의 제한된 갈등에 국한된 전쟁의 시공간이 쇠퇴했기 때문에 전쟁은 다시 널리 퍼져서 사회적 장 전체에 흘러넘치는 것으로 보인다. 예외상태는 항구적이고 보편적이 되었다. 예외는, 대외 관계와 국내 관계 모두에 스며들면서, 규칙이 된 것이다.



전지구적 전쟁상태


정치가 전쟁의 연속이라는 주장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점은, 그것이 각각의 사회의 내부와 외부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권력에 준거한다는 점이다. 미셀 푸코는, 정치권력의 사회평정 기능은 이 근본적 세력관계를 일종의 조용한 전쟁 속에 부단히 되새기고 그것을 다시 사회적 제도 속에, 경제적 불평등의 제도 속에, 그리고 심지어는 인격적·성적 관계의 영역 속에 새기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이 새로운 종류의 전쟁이 가져오는 결과들 중 하나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전쟁의 한계가 불확정적이 되었다는 것이다.사회적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한 전쟁은 어떠한 끝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권력과 폭력의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행사를 의미하게 마련이다...이리하여 전쟁은 치안활동과 실질적으로 구분할 수 없게끔 되었다.



세 번째 결과는 전투의 당사자들이나 적대의 조건들에 대한 생각의 재정향이다. 적이 추상적이고 무제한적인 만큼, 우방과의 동맹 역시 확장적이고 잠재적으로는 보편적이다...정의 개념은 어떤 특수한 이해관계를 넘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보급하는데 기여한다...정의는 근대적 전쟁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



테러리즘의 모든 정의들에 수반되는 문제는 핵심 원리를 누가 정의하느냐에 따라, 예를 들어 무엇이 합법 정부인가, 인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쟁의 규칙이 무엇인가 등을 누가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 정의들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교의와 테러리즘과의 전쟁의 일국적 얼굴은 거의 완전한 사회적 통계를 목적으로 하는 체제이다...우리는 이런 식의 통제 방법의 변형에 매우 강력한 사회적 변형과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속하지 않는다. 전쟁은 언제나 엄격한 위계와 복종을 요구하며 그리하여 민주주의적 참여와 논쟁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유예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전쟁상태가 전과는 달리 우리의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이 되었다면, 민주주의의 유예 역시 예외가 아니라 정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삶권력과 안보


독재와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고문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소명에 의해, 다른 하나는 소위 필요성에 의해서 말이다. 예외상태의 논리에 따르면, 고문은 권력의 본질적이고 불가피하며 정당한 기술이다...절멸과 고문의 부정적인 테크놀로지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권력의 구성적 특징이다. 전지구적 전쟁은 죽음을 가져와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삶(생명)을 생산하고 규제해야 한다.



안보는 군사 및/또는 치안활동을 통해 능동적이며 항구적으로 환경을 형성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안보 관념은, 가장 보편적이고 전지구적 수준에서 사회적 삶을 생산하고 변형하는 과제를 떠맡고 있다는 의미에서, 삶권력의 한 형태이다...이 법적 규약들은 복잡한 사회들에서는 무엇보다도 민주적 표현을 위한 대리자의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기능을 하는 기능적 체계들이다.



정당한 폭력


인권담론은 그것에 기초한 군사적 개입 및 법적 행위들과 더불어 국민국가들이 자기의 국내 영토에 행사하는 폭력조차 탈정당화하는 점진적 운동의 일부였다. 쇠퇴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들이다...테러리즘에 대한 안정적이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는 일의 어려움은 정당한 폭력에 대한 적절한 관념을 확립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코소보에서 ‘인도주의 개입’ 이후 인권과 관련된 다수의 입장은 이제 인권의 이름으로 폭력을 옹호한다. 이 폭력은 도덕적 근거 위에서 정당화되며, UN군의 푸른 헬멧에 의해 수행된다...(국제 형법이 단지 최소한의 강제 메커니즘만을 가진 몇 안 되는 조약들과 협정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제 형법을 적용하려는 대부분의 노력들은 효과가 없었다. 도덕은 각각의 동물이 다른 관점과 판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 폭력, 권위 그리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견고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다른 가치들의 타당성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러한 구조는 즉각 붕괴한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법의 상당한 쇠퇴와 그를 대처하는 전지국적 혹은 제국적 법 형식의 대두를 보여준다. 이 사법의 적용이 얼마나 선별적인지, 가장 힘없는 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얼마나 자주 기소되는지, 가장 힘센 자들이 저리는 범죄가 얼마나 자주 기소되는지, 가장 힘센 자들이 저지른 범죄들이 얼마나 드물게 기소되는지 인식해야 한다.



추밀고문관, 사무엘 헌팅턴


과도한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를 병들게 했으며 결국에는 ‘민주적 질환상태’를 불러왔다고 그는 역설적으로 주장했다. 헌팅턴의 복음은 이후에 사실상, 복지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파괴를 위한 하나의 길잡이로 기능했다...헌팅턴은 전지구적 질서와 전지구적 갈등을 조직하는 선들이, 즉 국민국가들을 동맹국 진영과 적국 진영으로 선별하는 블록들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용어들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문명’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여기에서 주권자들의 ‘비밀스런 조언자’는, 정치집단들을 융합적 공동체로 주조하고 권력실재를 영적 실체들 속에 위치시키는, 낡은 반동적 가설을 이용한다. 그는 문명들이라는 환영을 불러내어, 문명들 속에서 정치의 기본적인 친국-적 분할구도를 재배치하는 거대한 도식을 찾아냈다...이러한 맥락에서 실제로 문명충돌이라는 가설은 세계의 현재상태에 대한 서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명시적인 처방, 전쟁을 위한 소집, ‘서방’이 실현해야만 하는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제2장 역반란들



새로운 전쟁의 탄생


전쟁은 응집된 거대위협에 맞선 방어에 방향을 맞추기보다는 확산되는 작은 위협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적의 전반적인 파괴에 집중하기보다는 적을 변형하고 심지어 생산하는 경향이 생겼다. 전쟁은 인위적으로 통제되는 것이 되었다. 거대 강대국들은 전면적인 대규모 전투보다는 오히려, 베트남이나 라틴아메리카에 미국이 개입하고 아프카니스탄에 소련이 개입하는 것처럼, 고강도의 치안행위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강도의 치안행위는 종종 저강도 전쟁과 구분되지 않는다. 



1970년대 초에 일어난 전쟁의 형식과 목적의 변화는 전지구적 경제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형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1971년 미국 달러가 금본위제와 고리를 끊은 때와 1973년 제1차 석유위기가 일어날 때의 중간쯤에서 ABM협정이 조인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때는 화폐 및 경제생산의 헤게모니가 공장에서 더욱 사회적이고 비물질적인 부분들로 이동해 간 시기였다.



이 삶권력의 탈근대적인 전쟁은, 전쟁이 늘 경제적 생산과 결합되었고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단단히 결합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생산에서 일어난 변화들과 매우 분명하게 연결된다...탈근대 전쟁은 경제학자들이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이라고 부르는 바의 특징들을 많이 드러낸다. 그것은 이동성과 유연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지성, 정보 그리고 비물질노동을 통합한다. 그것은 지구의 표면을 가로질러 외부 공간의 극한까지, 그리고 대양의 심층까지 군사화를 확장함으로써 힘을 증폭한다.



사실상 새로운 생산적인 테크놀로지들이 로랑 뮈라위가 ‘번성하는 확산’ - 전세계에 걸친 모든 종류의 무기들의 불가항력적인 증가 - 이라고 부르는 것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왔다. 군산복합체의 실체.



전쟁은 삶을 파괴해야만 할 뿐만 아니나 삶을 창조하기도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군산복합체’보다는 ‘군생복합체(military-vital complex)’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군사에서의 혁명


‘군사에서의 혁명(RMA)'......새로운 군인들은 살상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피정복 주민들에게 삶의 문화적, 법적, 정치적 규범들과 안보 규범들을 명령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삶권력의 활동 범위를 구현하는 이러한 군인의 신체와 두뇌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만 한다...그와 같은 군인은 사회적 노동의 강렬한 집적을 나타내며, 또한 가치 있는 상품을 나타낸다.



RMA는 경제적 생산의 형상들을 전쟁터에 투사한 것으로서 사회적 노동의 최근의 변형에 해당하는 것을 군사 분야에서 앞서서 구현하고 실현해본 것이다. 그리하여 전쟁은 테크놀로지적 관점에서는 가상실효적이 되었으며, 군사적 관점에서는 비신체적이 되었다...하지만 RMA와 관련된 이 기술주의적 전쟁관에는 중대하면서도 점증하는 모순들이 존재한다.



전쟁의 공포가 없다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동기가 그만큼 덜 생기며, 끝이 없는 전쟁은 궁극적인 야만이다. 미군의 신체는 살고 적군의 신체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싸우는 당사자들 중 한쪽에게만 전쟁을 종식시킬 동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권력이 전쟁에서 결코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 권력이 전쟁을 종식시킬 어떤 동기를 갖겠는가?



군은 ‘민간 군사 청부업자들’, 즉 훈련과 신병 모집을 담당하고 전쟁터의 안팎에서 다양한 지원과 작전 기능을 제공하는 (종종 전직 육군 장교에 의해 운영되는) 기업들의 활용을 점점 늘리고 있다...이런 식의 청부 계약은 돈으로 고용하는 지원부대와 돈으로 고용하는 군인들, 즉 용병들 사이의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용병과 애국자


일반인들이 더 이상 무장력을 구성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군대가 더 이상 무장된 민중이 아닐 때, 그때 제국들은 몰락한다...오늘날 전쟁은 근대 초기에서와는 다르게 수행된다. 용병대장의 형상은 종종 기술자의 형상을 띤다. 그것은 새로운 무기, 소통 체계 그리고 통제 수단을 발전시키는 여러 산업들에 연결된 사람의 형상을 띤다.



부패로 이르는 이 길은 미래에로 이를 수 있는 한 가지 경로일 뿐이다. 또 다른 경로는 조국에 대한 사랑, 즉 ‘아모르 빠뜨리애(amor patriae)의 재탄생이다. 이것은 민족주의나 인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우리는 새로운 다윗의 형상, 비대칭적 전투의 승자로서의 다중, 새로운 종류의 전투원이 되는 비물질적 노동자들, 저항과 협력의 세계시민적 브리꼴뢰르(손재주 있는 사람처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이런저런 사물들을 이어 붙여서 무엇인가를 조립해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를 구축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숙련기술의 잉여를 제국적 권력에 대항하는 공통적 투쟁의 구축에 던져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진정한 조국애이며, 국가 없는 사람들의 조국애이다. 이 조국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다수의 공동협의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으며 다중의 공통적 욕망을 통해 결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비대칭과 전역적 지배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의 한 가지 본질적인 특징은 중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 힘은 하나의 중심적 원천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거나 혹은 심지어 여러 중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정확하게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가변적이고 불규칙하게 그리고 불확정적으로 분산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의 또 다른 본질적인 특징은, 네트워크가 내부와 외부 사이의 안정적인 경계들을 끊임없이 침식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네트워크가 언제나 모든 곳에 부재가 불확정적이 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네트워크들은 어떤 순간에는 도처에 나타나고 다른 순간에는 허공으로 사라진다...떼를 추적해 잡는 것은 매우 어렵다.(그래서 경찰들이 채증한다. 스마트폰과 CCTV는 제국 최고의 무기다).




제3장 저항



저항의 우선성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특질과 특징이 노동의 다른 형태들을, 그리고 사실상 사회 전체를 변형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전체 노동 시장으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는 비물질노동의 계약 조건들과 물질적 조건들은 노동 일반의 지위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비물질노동은 (엄밀하게 경제적인 도메인이라는 그 제한된 영역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생산 및 재생산에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비물질노동은 또한 직접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을 생산한다. 사회적 삶형태들은 창출하는 것에 정향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물질노동은 삶정치적이다. 그래서 비물질노동은 더 이상 경제적인 것에 제한되지 않으며, 직접적이고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힘이 된다. 



비물질노동은 오직 공동으로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점점 새롭고 독립적인 협력 네트워크들을 창안한다. 사회의 모든 측면들과 관련을 맺고 그것들을 변형시키는 비물질노동의 능력과 비물질노동의 협력적인 네트워크 형식은, 비물질노동이 다른 형태들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두 가지 매우 강력한 특징들이다. 이 특징들은, 오늘날 항구적이고 전지구적 전쟁상태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들에 생기를 불어 넣은, 다중의 사회적 구성의 예비적 밑그림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저항의 계보학을 인도하는 첫 번째 원리는 역사적 필요 - 즉 특수한 형태의 권력과 전투를 벌이는 데에서 가장 효과적인 저항 형태 - 와 관계된다. 두 번째 원리는 저항의 변화 형태들과 경제적 사회적 생산의 변형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응을 제기할 것이다. 세 번째 원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리킨다. 각각의 새로운 저항 형태는 이전 형태들의 비민주적인 특질들을 극복하고 훨씬 더 민주적인 운동들의 연쇄를 창출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네트워크 투쟁들을 창안하기


‘민중’은 지배적 국가 권위를 대체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주권 형태이다...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민중이란 말은 단지 지배적 권위를 타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구실로서 기능한다...노동자들은 자본과 국가의 폭력이 초월적 권위에 의존하는 반면, 자신들의 계급투쟁의 정당화가 자신들의 고유한 이해관계와 욕망들에만 기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계급투쟁은 자신의 정당화를 위하여 어떠한 주권적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정당화의 내재적 기초의 근대적 모델이었다.



연쇄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일련의 저항운동들과 해방운동들의 형식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노동력 및 사회적 생산형식들에서의 변화와 상응하는 것이었다...이 운동들은 인터넷과 같은 테크놀로지들을 조직화 하는 도구들로서 채택할 뿐만 아니라, 이 테크놀로지들은 그들 나름의 조직적 구조들을 위한 모델들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네트워크 조직은 그 요소들과 소통 네트워크들의 지속적인 복수성에 기초를 둔다.



세계화포럼에 반대하는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그때 이후로 일어난 이러한 주요한 사건들에서 가장 놀라운 요소들 중의 하나는, 일찍이 우리가 서로 다르며 심지어는 모순적이기까지 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단들이 공통적인 행동을 이루어냈다는 점이다...이것이 우리가 거쳐 온 역사이다. 그것은 많은 점에서 쓰라린 패배로 가득한 비극적 역사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해방에 대한 욕망을 미래를 향해 뻗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들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대단히 풍부한 유산이기도 하다.



떼 지성


분산된 네트워크는 떼를 이루어 자신의 적을 공격한다. 무수한 독립적 힘들이 모든 방향에서 특정 지점을 가격하고 나서 주위 환경 속으로 다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네트워크는 떼 지성을 지니고 있다...떼 지성은 근본적으로 소통에 기초하고 있다...갖가지 다양체의 소통과 협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집합적 지성이다.



삶권력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구조들과 관계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로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서로 생산할 것인가 하는 사회적 내용들의 문제이기도 하다...생산의 지배적 형태가 아이디어, 지식, 소통방식, 관계와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비물질노동에서, 생산은 전통적 의미의 경제의 경계들 너머로 흘러넘쳐 문화, 사회 그리고 정치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



이러한 종류의 생산을 ‘삶정치적’이라고 부를 것이다...삶권력은 주권적 권위로서 사회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여 자신의 질서를 부과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삶정치적 생산은 사회에 내재적이며, 협동적인 노동형태들을 통해 사회적 관계들과 형식들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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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포퍼가 말한 것처럼 "국가의 과업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개인의 자유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시민들에게 허용될 수 있는 자유의 정도를 정확하게 결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발전을 퇴행시키고 있는 국가와 거대 자본의 폭력과 사적독점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 국가의 이익이란 미명 하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야만공권력의 부활을 용납한다면 영원히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하는 자유방임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국가에 의한 공적독점이 사적독점보다 위험하다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 시장경제를 통치의 영역까지 확대재생산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어떤 상황으로 몰고갔는지를 조금만 돌아봐도 이는 명백하게 드러난다. 1940년대 중후반에 푸라이부르크 학파가 정립한 질서자유주의(사회적 시장경제)가 미제스와 하이에크를 통해 밀턴 프리드먼으로 이어지면서 무정부적 자유주의로 치달았던 것도 규제 없는 자유방임이 무한경쟁을 유도해서 공적독점을 사적독점으로 대체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란 제도가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래서 사방이 벽으로 막힌 제한된 개념이다. 무제한적인 자유, 즉 책임에 대한 면책을 당연시 여기는 자유방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란 정글을 재현하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삶과 사회의 조건으로 정착시킨다. 이런 자유방임을 내세워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 불량배의 항변에 어떤 재판관이 "당신 주먹을 마음대로 놀릴 자유는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의 코가 어디 있는가에 따라 제한된다"고 말한 것이 자유의 한계를 말해준다. 




칼 슈미트가 국법이 정지하는 곳인 예외상태를 제외하면, 국가의 공권력 사용도 기본적으로 이것에서 출발하며 여기서 멀리 나갈 수 없다. 경찰이 쌀개방에 항의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농민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두 명의 농민이 죽자,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통해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 했던 말도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플라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권위주의적 통치자에게서는 절대 들을 수 없었고, 지금도 듣지 못하고 있는 그런 진심어린 사과 말이다. 


저의 이 사과에 대해서는 시위대가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힘들게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의 사기와 안전을 걱정하는 분들의 불만과 우려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식을 전경으로 보내 놓고 있는 부모님들 중에 그런 분이 많을 것입니다. 또 공권력도 사람이 행사하는 일이라 자칫 감정이나 혼란에 빠지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인데,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이와 같은 원인된 상황을 스스로 조성한 것임에도 경찰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공직사회 모두에게 다시 한번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이 땅의 보수세력들이 매일같이 빨갱이라 욕하며 부관참시도 수없이 당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최대한도로 실천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공권력의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도, 그 필요성을 인식했으며, 따라서 공권력을 사용할 때 어떤 기준이 적용돼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줬다. 플라톤보다 반세기 정도 앞서 살았던 페리클래스의 연설(다음 글로 올리겠다)을 인용하며, 칼 포퍼가 "민주주의란 '국민이 지배해야 한다'는 무의미한 원리에 의해서는 철저히 규명될 수 없고, 이성과 인도주의적 신념에 기초한다"고 말한 것도 노 대통령의 사과문과 일맥상통한다.



칼 포퍼가 우파 전체주의의 기원을 플라톤에서 찾은 것은, 국가를 절대적인 주권을 소유한 유일한 자로 정의한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나치의 공법학자이자 모든 전체주의적 독재자의 교본인 《정치신학》의 저자 칼 슈미트, 인류 문명의 종착점이 완벽한 폐허라며 허무주의를 주장해 나치의 등장에 일조한 《존재와 무》의 하이데거 등이 플라톤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이 플라톤에 있다는 비판은 한나 아렌트만이 아니라 위대한 석학인 벤야민과 아도르노와 바우만 등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가 경제 발전의 유일한 법칙으로 계급투쟁론을 들고 나온 것도 플라톤의 《국가(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아무리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의 나라이고, 또 하나는 부자의 나라이다. 그리고 이 두 나라는 서로 전쟁을 벌인다"라고 말했다. 계급투쟁론의 기원도 플라톤에서 시작된다. 그의 이분법적 삼단논법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권위적이며, 종종 일방적인 결론을 유도해낸다. 



이데아의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일체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 플라톤의 '억제된 국가'는 전체주의의 원형으로 이어지고, 개인에 대해 사회나 체제, 국가의 우위를 명백히 한다. 언제나 정에서 출발해 반이 나타나고, 정이 반을 반영해 합으로 가는, 그리고 그 합이 다시 정이 되면서 언제나 현존하는 체제가 선한 것이 되는 헤겔의 변증법도 플라톤의 사상에 기원하고 있다. 이렇게 보수(정확히는 기득권)의 철학을 가장 완벽하게 정립한 헤겔은 물론, 마르크스도, 크라우스도, 레닌도, 히틀러도 플라톤에 사상적 기원을 두고 있다.        



이런 플라톤의 사상과 정치철학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에서 볼 수 있고, 특히 묵자의 사상에 이르면 동양의 플라톤이 떠오를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정치가》와 《국가》, 《법률》 이전의 플라톤의 저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보면 일부일처제를 중심으로 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공자의 사상과 '맹모삼천지교'로 유멸한 맹자의 사상이 수없이 나온다는 사실이다(특히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 시리즈인 《앎의 의지》, 《쾌락의 활용》, 《자기배려》를 참조할 것). 


인류의 철학과 역사를 지금부터 기원까지 거꾸로 찾아가다 보면 서양과 동양의 사상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푸코에서 많이 배웠다는 네그리는 《제국》에서 지배세력에 대해 언제나 대항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전체주의란 존재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전체주의는 일정 시점에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닌 영원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지금도 실존하는 국가(제왕적 권력을 허용하는)의 형태 중 하나이다. 


좌우가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단 하나의 지점인 자유의 왕국으로 귀결되는 것도 플라톤이 정립한 최선의 국가, 즉 억제된 국가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의 주장을 극대화하거나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좌우의 유토피아는 동전의 양면처렴 연결돼 있다. 벤야민이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과 푸코가 국가란 본질적으로 개인화하는 경향과 전체화하는 경향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또한 철학자가 지닌 이성의 힘을 과신했던 플라톤에서 출발해 칸트와 헤겔을 거치는 과정에서 완성된 근대이성이 현대성을 이루었고, 그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의 굴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밝힌 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도 좌우의 전체주의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완벽한 평등과 완벽한 자유방임은 단 하나의 가치만 인정하기 때문에 전체주의체제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자유의 왕국과 하이에크의 무정부적 자유주의는 과정과 수단만 다를 뿐 결과에서 있어서는 동일하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보다 깊은 성찰을 원하는 분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창조적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죠지프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보라)로 다루겠지만,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국가에 의한 공적독점이 신자유주의의 번성으로 사적독점으로 대체되는 현실에서 우파 전체주의를 비판한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울림은 현재진형행이라 할 수 있다.    


조금은 길지만,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마지막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시간이 되는 대로 좌파 전체주의(이른바 역사주의)를 비판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요약한 뒤, 철학자이기 전에 과학자였던 칼 포퍼의 한계에 대해서도 다루어 볼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에는 몇 가지 오류와 편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플라톤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다. 플라톤의 사회학적 진단이 우수했을지라도, 그 자신의 발전은 그가 대항해서 싸우고자 했던 악보다도 그가 추천했던 치료법이 더 나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치적 변화를 억제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소위 닫힌사회의 순진함과 아름다움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천국에서의 꿈은 지상에서의 실현될 수 없다일단 우리의 이성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비판력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상, 개인적인 책임의 요구와 더불어 지식의 증진을 위해 조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부족적 마술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국가로 되돌아갈 수 없다. 지식의 열매를 먹은 자는 천국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부족주의의 영웅적 시대로 돌아가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종교재판에, 비밀경찰에, 낭만화된 깡패행위에로 가는 것이 더욱 확실해진다. 이성과 진리를 억압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가장 야만적이고 포악한 파괴로 끝내고 말 것이 확실하다. 

자연의 조화된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길 전체를 다 가야만 한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꿈꾼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일, 인간다움과 이성과 책임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위축되어 버린다면, 용기를 잃어버리고 긴장에 찌들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은 단수한 결정을 분명하게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강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사회로의 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사용하여 안전과 자유를 위해 계획하면서ㅡ이 계획은 우리가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야만 한다ㅡ미지의 세계,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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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4.07.31 19:04 신고

    우리는 어쩌더 박근혜 같는 대통령을 만나 유시시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시대 유신대통령... 불행한 국민입니다.

  2. 진흙속의연꽃 2014.08.01 08:08 신고

    벤야민의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이런 논리가 물론 정치에도적용되겠지요.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꿈쩍도 않는 보수세력과 약자에의 편에 서서 바꾸어 보려는 진보세력이 극과 극이긴 하지만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득권’입니다. 권력을 쟁취한다는 것은 결국 기득권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국민의 정부5년과 참여정부 5넌 합쳐서 10년간 기득권을 누려본 사람들은 보수기득권과 다름 없는 ‘진보기득권세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3자의 입장에서 멀리서 내려다 보듯이 보면 다만 정권이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밥에 그 나물이듯이 그 얼굴에 그 얼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야당이 참패하였는데 통쾌하다”는 타이틀의 기사를 보았습니다.일부 진보세력 중에는 같은 편에 총질하는 듯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권만 잡으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허동준의 난동이나 일부 진보기자 또는 블로거 들, 그리고 일부 진보네티즌들의 글을 보면 진보의 가치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보수층에 노불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진짜 보수가 보이지 않듯이 진보세력 역시 마찬가지라 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권이 바뀌어도 새로운 기득권 세력의 탄생 그 의미 이상이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현재의 보수기득권세력 보다는 약간 좋아지겠지요. 앞으로 총선과 대선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보수층의 산업화 세력, 그리고 짱돌 던지던 진보세력의 시대가 아닌 제3의 세력을 고대하는 이유입니다.


자신들과 그들의 정신을 권위와 편견의 감독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소망이다. 그들은, 오랜 전통이든 새로운 전통이든, 자유와 인간다움과 합리적 비판의 기준에 맞는 전통은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확립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단지 확립된 것이거나 그저 전통적이기만 한 절대적 권위는 거부하는 열린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통치의 책임을 인간적 권위나 초인간적인 권위에 전적으로 지워버리려고 하지는 않으며,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불 같은 성격의 교수였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처나는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최근에 들어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은 초기 기독교의 원형을 제공했으며, 좌우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 플라톤에 대한 비판서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지성사는 플라톤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할 정도로 플라톤이 서구 문명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최고봉을 이루지만, 그들이 미친 영향의 거대함은 19세기 중반까지 서구 유럽의 정부와 문명을 소수의 엘리트(귀족이나 선민의식의 형태로 나타난다)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교육과 종교가 이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이는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됐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모든 것의 기원, 즉 순수 그 자체이자 완전한 상태인 절대적 존재 혹은 형상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철학자가 완벽한 고독의 상태에서 깊은 성찰에 들었을 때 불연듯 보게 된 신의 모습이자 깨달음의 정화가 이데아(형상 이론이 여기서 나온다)다.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막에 들었던 고행의 순례자가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몽롱한 가운데 환영이나 환청처럼 보거나 들은 것이 신이 섭리나 우주의 법칙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체험이자 유일무이한 경험이어서 철학자는 완벽한 순수체인 이데아란 존재를 느낄 수 있거나 볼 수 있지만, 말이나 글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경험한 철학자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철학자는 이런 성찰에 이르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이데아의 경이를 체험할 수 있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완전한 상태인 이데아의 세계를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이데아와 최대한 비슷한 사회(이데아의 세계, 천국에 있는 국가)로 인도할 수 있다. 이데아란 어떤 티끌도 없는 순수하고 완벽한 상태(형상)이기 때문에 이데아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타락하거나 부패하거나 악에 가까워진다. 





즉 이데아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화'라는 몰락이 법칙이 플라톤이 정립한 이데아론의 핵심이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악한 것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모든 변화는 악하다'라고 한 것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데아로부터 멀어지는 변화인, 모든 부패와 몰락이 도덕의 타락에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는 인종의 퇴화와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심지어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완전한 국가에 신념을 '모든 사물'의 영역까지 확대"해서 "일상적인 사물이나 부패하는 사물의 모든 종류에도 그에 대응하는 부패하지 않는 완전한 것이 있다"는 형상 이론이나 이데아 이론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주적 차원에서 인간사를 거쳐 사물의 차원까지 적용되는 거대한 몰락과 부패의 법칙이 완성됐고, 그의 사상과 정치철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부패의 우주적 법칙이 인간사에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막고 악의 번성을 저지하기 위해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체험한 철학자는 동굴에서 나와 사회(당시에는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말함)를 구원해야 한다포퍼의 주장처럼, "플라톤은 역사적 운명의 법칙, 부패의 법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지탱되는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붕괴될 수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일반적인 부패의 법칙이 정치적 부패를 몰고 오는 도덕적 부패로 나타나는 것과 똑같이" 이데아를 체험한 위대한 법률가(철인왕)의 "이성의 힘과 도덕적 의지로 이 정치적 부패의 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변화가 없는 이데아의 세계를 이 땅에 실현하면 '악이 없는 최선의 국가이자 완전한 국가, 즉 황금시기의 국가이자 철인왕에 의해 일체의 변화가 '억제된 국가'인 천년왕국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철학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특히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를 통해 이를 이룩해야 한다. 이런 플라톤의 정치철학ㅡ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과 《정치의 약속》에서 발전적 변화를 추동해 후대에게 넘겨주는 정치의 역할과, 불평등하게 태어났지만 평등을 향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인 정치적 자유와, 어떤 척박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억제한 플라톤 때문에 그에게서 시작된 정치철학이 그에 의해서 끝났다고 비판했다ㅡ은 철인왕(이데아를 경험한 철학자, 현자)에 의한 통치를 최고의 체제로 자리매김시켰다. 


철인왕ㅡ플라톤은《정치가》에서 철인왕을 자신이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에 이른 철학자라고 했고, 공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ㅡ에 의한 일체의 변화로부터 멀어진 '억제된 국가'가 최선이자 최상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자유와 발전적 변화가 원천차단된 닫힌사회이며, 하나의 지도원리가 사물의 세계(길거리에 널려 있는 돌 하나)까지 지배한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나치즘, 즉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작용했다(이것이 나치의 전체주의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추적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억제된 국가'는 위계서열이 분명한 계급사회를 이룬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우월한 종족이 열등한 종족을 지배하는 인종적 차별도 허용된다. 물론 플라톤이 말한 계급사회는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사회와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그 시대의 지배적 체제를 이루는 지배계급이 그 이하의 계급, 특히 노동계급을 무한 착취하지만, 플라톤은 지배계급의 착취에 제한을 둔다. 이는 '억제된 국가'의 안정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특권계급들의 착취를 제한하려는 이런 경향들조차도 전체주의에 상당히 공통되는 요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전체주의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닫힌사회, 즉 집단이나 부족의 도덕이며,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집단적인 이기주의"라고 말한 칼 포퍼의 지적은 정확하다.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의 이익에 해가 되는 어떤 것도 선하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으며,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도 집단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이는 일종의 공생을 위한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산에 방점이 찍힌 성장담론을 이룬다)이기도 하지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우리 조상의 홍익인간에 비하면 그 수준이나 방식이 저급하고 제한적이며 일방적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선량하며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행위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이익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최종 지배자인 단 한 사람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이익은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나눌 때 가장 크지만,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그리고 후대에 세습하고 있는 소수의 집단에게 가장 많이 돌아가며,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자가 가장 많이 취하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이런 경험은 더욱 강화돼,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 함께 공존이나 상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행위의 기반인 개인의 기본적이고 평등하고 인도적인 자유도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양도불가능하기 때문에 침해불가능한 시민의 기본권이 제하받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이 중첩되고 강화되면 권위주의 독재가 등장하며, 플라톤의 주장대로 하면 '다른 시민을 해치지 않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기본 목적이 성립될 수 없다. 


즉,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국가는 가능한 한 균등하게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되, 자유의 동등한 제한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은 넘어서"면 안 된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무력화된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과도하게 제한받게 되면, 모든 권력이 시민에서 나오는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우파 전체주의는 늘 이런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 등이 모두 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를 무력화시켰다(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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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은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쓰여진 우리시대의 명저입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예언했다 해서 유명해진 월가의 현인인 탈레브가 자신의 현장 경험 속에서 어떤 것들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해 블랙스완과도 같은 거대한 문제를 야기하는지 그 이론적 근거에 대해 밝힌 것입니다.

 

 

한 때 이 책의 시의성과 인기도에 비해 독자들의 이해의 폭이 적어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한 책이지만 그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요약해 봤습니다. <블랙스완>은 분명 우리에게 좋은 판단을 해주게 만드는 훌륭한 책입니다. 저의 요약을 읽은 다음에는 반드시 책을 사서 읽어 보십시오.

 

 

이곳에 요약한 것 이상의 내용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많이 나오고, 솔직히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세계의 지적 세계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최소한 세상의 거짓에 대해 속고 당하지 않는 헛똑똑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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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새의 깃털이 주는 교훈 

 

검은 백조는 다음 세 가지 속성을 지니는 사건이다. 첫째, 검은 백조는 극단값이다. 극단값은 과거의 경험으로는 그 존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대영역 바깥에 놓여 있는 관측값을 가리키는 통계학 용어이다. 극단값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과거의 경험으로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검은 백조는 극심한 충격을 안겨준다. 셋째, 검은 백조가 극단값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존재가 사실로 드러나면, 인간은 적절한 설명을 시도하여 이 검은 백조를 설명과 예견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모르는 것  

   

검은 백조 원리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2001년의 911일에 테러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만 있었다면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비즈니스의 어느 영역에서나 적용된다...인간의 투기 활동에서 수익은 일반적 기대 수준에 반비례한다...알고 있는 것에서는 어떤 위험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빈껍데기 전문가 

  

극단값을 예견하지 못하는 것은 곧 역사의 진행방향을 예견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의미한다. 역사에서는 특이한 사건들이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오류가 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예측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그것은 어떤 희귀한 사건에서는 대체로 잃을 것은 거의 없지만 얻을 것은 많기 때문이다. 

 

 

배우는 법을 배워라

 

실패와 관련된 또 한 가지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아는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무는 보지만 숲

은 보지 못하는 격이랄까. 

 

우리가 쉽사리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인간은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만을 머리에 우겨 넣는다...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얕잡아 본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통념과 달리 많은 증거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적게 생각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생각하고 있나를 생각하는 순간일 것이다.

 

 

또 다른 배은망덕

 

텔레비전은 공정한 매체가 아니라 검은 백조에 눈을 감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우리 인간은 얼마나 껍데기에만 집착하는 족속인가.  

 

인생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사건

 

정규분포를 나타내는 종모양의 곡선을 전제로 추론을 전개하는 대부분의 사회 연구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정규분포란 큰 편차를 무시하거나 다룰 수 없는데도 마치 우리가 불확실성을 길들이고 있다는 확신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런 따위를 GIF,  거대한 지적 사기(Great Intellectual Fraud)라 부른다.

 

 

플라톤과 헛똑똑이

 

플라톤적 도식이 어디서 오류를 빚을지 사전에 알 수 없고, 이로 인한 실수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플라톤적 태도가 복잡한 현실과 만나는 폭발성 있는 경계지대를 플라톤 주름지대(Platonic fold)라고 부른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간극이 넓어서 위험한 지점, 바로 그곳이 플라톤 주름지대다. 검은 백조는 바로 이곳에서 잉태된다.

 

 

 

1  한 경험론적 회의주의자의 도제 시절

       

 

별이 총총한 밤

 

암흑이 도래하면 유일한 위안은 하늘을 쳐다보는 일뿐이다.

 

 

역사는 기어가지 않는다, 비약한다

 

인간의 마음은 거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고 갖가지 현상을 풀이해낼 수 있는 반면에 예견 불가능성은 일절 용납하지 못한다...얘상 밖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어날 수 있다...우리는 뒤돌아보는 쪽으로 발달된 거대한 기계라는 것, 인간은 자기 기만에 탁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친애하는 베를린 일지: 뒤로 가는 역사에 대하여

 

사건은 왜곡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중요한 것은 사건의 실행이 아니라 사건의 기술이다.

 

 

끼리끼리

 

편 가르기의 자의성, 편 가르기가 만들어 내는 전염 효과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사상 이러한 편 가르기가 얼마나 빈번하게 뒤집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효율적 시장 이론에 따르면, 시장 가격은 모든 가용 정보를 자동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유가증권 거래에서 수익을 거둘 길이 없다. 공표된 정보는 특히 사업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가격은 그러한 모든 정보를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쇼는 어디에서 벌어지는가?

 

회사의 경영자라는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유시장 체계의 힘이다.

 

 

퍽 유어 머니

 

퍽 유어 머니(Fuck your money)라는 말이 있다...멋대로 펑펑 쓰고 살 만큼은 안 되지만, 월급에 목을 매지 않고 새로운 직업을 선택할 자유를 줄 만큼은 되는 돈이다. 그것은 돈에 영혼을 파는 것을 막아 주며, 외부의 권위어떤 외부의 권위든 간에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해준다.

 

 

3  투기꾼과 창녀

 

 

  

최선(혹은 최악)의 충고

 

작가와 제빵사의 차이, 투기꾼과 의사의 차이, 사기꾼과 창녀의 차이를 알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조금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추가적인 노동이 전혀 없이도 수입을 열 배, 백 배 늘릴 수 있는 직업과 하나를 더 얻을 때마다 그만큼의 (유한한 자원인) 시간과 노력을 또 투입해야 하는 직업-다시 말해서 중력에 종속된 직업-의 차이다.

 

 

자가증식성에 주목하라

 

자가증식하는 직업을 선택하라는 충고는 나쁜 충고였다. 자가증식하는 직업은 성공하는 경우에만 좋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직업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첫 번째 범주는 평범한 것, 평균적인 것, 중도적인 것에 의해 추동된다. 여기서는 평범한 것이 집단적으로 과실을 얻는다. 다른 한 가지 범주에서는 거인이 되거나 난쟁이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극소수는 거인이 되고, 절대 다수는 난쟁이가 된다.

 

 

 

자가증식성의 출현

 

녹음의 효과는 엄청난 불평등을 초래한 발명이었다. 공연을 재생하고 반복할 수 있기 때문에 시골 피아니스트들은 최저 임금에 허덕이며 별 재능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죽은 호로비츠가 살아 있는 피아니스트들의 밥줄을 빼앗은 셈이다.

 

진화는 자가증식성이 있는 것이다. (행운에 의해서든 생존경쟁에 의해서든) 승자의 자리를 차지한 DNA는 베스트셀러나 대박 음반처럼 자기 자신을 복제하여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다른 DNA는 소멸하게 된다. 

 

불평등은 약간 나아 보이는 자가 파이 전부를 차지할 때 발생한다.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는 이런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 이 분야에서는 재능이 성공을 낳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재능을 낳는다.

 

아트 드 배니에 의하면, 우리가 흔히 재주라고 말하는 것이 실은 사후에 부여된 속성이라는 씁쓸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영화가 배우를 만들며, 또 영화의 성공을 만드는 것도 비선형적 행운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의 성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일종의 감염 현상이다. 

 

 

참으로 이상한 극단의 왕국 

 

극단의 왕국에서는 불평등이 극심해서 하나의 관측값이 불균형한 비율로 전체에 충격을 가한다. 사회적 사건들은 대부분 극단의 왕국에 속한다...돈은 그저 숫자다!

 

 

극단의 왕국과 지식

 

평범의 왕국에서 자료를 바탕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은 정보가 주어짐에 따라 빠르게 증가한다. 그러나 극단의 왕국에서 지식은 느리게 증가하며 축적된 자료와 어긋나기 일쑤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극단적이다.

 

 

무엇이 사건을 지배하는가

 

평범의 왕국은 우리가 집단적인 것, 진부한 것, 명백한 것, 예상되는 것의 지배를 견뎌야 하는 곳이다. 반면에 극단의 왕국은 우리가 단 하나의 것, 우발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예상치 못한 것의 난폭한 지배에 내맡겨져 있는 곳이다.

 

극단의 왕국이 곧바로 검은 백조를 뜻하지 않는다. 희귀하고 심대한 결과를 초래하지만 예측 가능한, 특히(통계학자, 경제학자, 정규분포곡선 찬양론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에) 그런 사건들에 늘 대비하고 있는 사람들, 그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예측 가능한 사건들도 있다. 그것들은 유사 검은 백조다.

 

 

 

 

4  천 하루째 날에 살아 있기

 

 

칠면조의 교훈

 

관찰을 통해 얻어진 일체의 지식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과거에 내내 통했던 것이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며,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운 것은 최선의 경우에 쓸모 없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파국을 낳는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사람들은 자신들을 깜작 놀라게 만든 돌발 사건이 발생한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돌발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예견하려고 한다.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보지 못한다. 앞선 사건이 전례가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검은 백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과거의 관찰을 미래를 결정짓는 것, 혹은 미래를 표상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바보 되기 훈련

 

은행업은 보수적이지 않다. 파국적인 큰 손실의 가능성을 양탄자로 덮어 버림으로써 현상적으로는 훌륭하게 스스로를 기만해 왔다. 이른바 보수적인 은행들은 이윤이 생길 때는 자신들이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위기에 빠지면 그 비용을 우리 납세자가 낸다.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는 수익의 수준을 알 수 없다...따라서 경영자들은 위험을 은폐하고 수익과 수익률을 조작함으로써 회사의 주인인 주주들을 속인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비극이다.

 

 

검은 백조는 지식에 상대적이다

 

검은 백조가 뭘 모르는 젖먹이들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물론 LTCM 사람들처럼 사람들에게 검은 백조는 출현할 수 없다는 확신을 심어 줌으로써 과학으로 오히려 검은 백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과학이 보통 시민을 젖먹이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시간의 척도가 아니라 상대적인 척도로 사태를 관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검은 백조는 효과를 발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반면에, 부정적인 검은 백조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건설보다 파괴가 훨씬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들, 종교의 벗

 

어떠한 사건도 무한한 수의 가능한 원인들을 가질 수 있다...단언하건대, 소양 없는 학위는 재앙을 낳는다.

 

 

칠면조가 되긴 싫어!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젖먹이가 되지 않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 현업종사자다!...눈을 감은 채 길을 건너지는 말라는 것이다.

 

 


5
 
 확인 편향의 오류

 

 

검은 백조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 출현할 가능성이 없다는 증거가 있다는 혼동하기 십상이다. 두 명제 사이에는 엄청난 논리적 거리가 있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에서는 그 거리가 매우 좁아지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둘을 쉽게 혼동한다.

 

거의 모든 테러리스트는 모슬렘이다라는 명제와 거의 모든 모슬렘은 테러리스트다라는 명제는 다르다. 고정관념의 불공정함 역시 왕복 여행의 오류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보수주의자들이 모두 멍청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멍청한 사람들이 대부분 보수주의자라고 말했을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항변하며 했던 말이다. 우리의 통계적 직관은 미묘한 변화가 커다란 차이를 낳는 복잡한 환경에 맞춰 진화해 온 것이 아니다. 

 

 

모든 주글이 부글인 것은 아니다

 

 

표본수가 클수록 안정적인 값을 보이며 장기적인 평균값으로부터의 변동이 적어진다는 것은 통계학의 기본에 속한다. 스포츠 클럽에 가서 경우 2층밖에 안 되는 곳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곧장 운동기구로 향하는 사람들이 이런 영역 특정적인 전형이다.

 

의학과 관련된 글에서 흔히 사용하는 NED라는 단어는 질병의 증거 없음(No Evidence of Disease)의 약어다. END, 질병 없음의 증거(Evidence of No Diease)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보적인 추론 오류 때문에 의학이 위험을 초래한 사례는 인류사에 수두룩하다.

 

 

증거

 

내가 소박한 경험주의라고 부르는 정신 작용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신이 말하는 세계, 자신이 그리는 세계를 확인해 주는 사례들만 찾는 선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들 덕분에 발전이 있었다.

 

 

부정적 경험주의

 

어떤 명제가 참인지를 반드시 알지 못하지만 어떤 명제가 거짓인지 알면 소박한 경험주의를 피할 수 있다...단 하나의 악성종양만 발견되어도 암이 있음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나 악성종양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암이 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1,000일간의 시간이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 못하지만, 단 하루의 시간이 당신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다.

 

 

수열 실험

 

인지과학자들도 확증해 주는 증거만 찾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연구해왔다. 그들은 이러한 약점을 확인 편향이라고 불렀다.

 

어떤 규칙을 검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규칙이 통하는 사례들을 찾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이 규칙이 통하지 않는 사례들을 찾는 방법이다. 진리 여부를 확인하는 데는 반증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하다. 

 

일단 우리의 마음에 하나의 세계관이 자리 잡으면 그 세계관을 확증해 주는 사례만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생긴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견해를 더욱 정당화하는 역설이 생겨나는 것이다. 슬프게도 확인 편향은 우리의 지적 습관과 담론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지식의 문제의 핵심은 확증 증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평범의 왕국으로

 

현대사회는 한마디로 극단의 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지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오늘날 검은 백조가 출현하는 영역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6  이야기 짓기의 오류

 

 

내가 원인 찾기를 거부하는 원인에 대하여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요약하기를 좋아하고, 단순화하기를 좋아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환원시키기를 좋아한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는 인간의 확대해석, 날것의 진실보다 압축된 이야기를 편애하는 경향과 연관이 있다. 이 오류는 세계에 대한 표상을 심하게 왜곡시키는데, 희귀한 사건과 관련해서 특히 심각해진다.

 

이야기 짓기의 오류는 연쇄적 사실들을 억지 설명이나 논리적 연결고리, 즉 화살표에서 벗어나서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가리킨다. 설명은 사실들을 엮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보다 기억하기가 용이해지며, 납득하기가 용이해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했다는 느낌이 증폭되는 그 순간, 이러한 습성은 과녁을 빗나간다.

 

 

좌우 반구 분리증이 말해 주는 것들

 

좌우 반구 분리증(뇌의 좌반구와 우반구가 별개로 작용하는 증상)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일련의 유명한 실험은 해석 활동의 자동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물리적 증거, 즉 생물학적 증거를 제공해 준다.

 

좌우 반구 분리증 환자들은 뇌의 좌우 반구 사이에 아무런 연결조직도 없기 때문에 서로간에 정보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좌뇌는 패턴 인식을 수행하는 부위가 존재하는 곳으로, 언어가 패턴 인식적 속성을 갖고 있는 한에서만 좌뇌가 언어를 관장한다.

 

좌뇌와 우뇌의 또 다른 차이는 우뇌가 새로운 것을 다루는 곳이라는 점이다. 우뇌는 일련의 사실들(개별적인 것, 즉 나무들)을 보는 반면에 좌뇌는 패턴(일반적인 것, 즉 숲)을 지각한다.

 

의미와 개념을 집어넣으려는 인간의 성향은 개념을 구성하는 세부사항들에 대한 지각을 차단한다. 그래서 좌뇌 활동을 억제하면 좀 더 사실적이 되는 것이다

 

해석 작용을 피하기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뇌 기능이 종종 지각의 바깥에서 작동한다는 것이 그 열쇠다. 마치 호흡처럼, 해석 작용은 자동화된 통제력 바깥의 다른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동시적으로 행해진다.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의 법칙

 

의식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데에는 압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패턴, 즉 연쇄의 규칙을 발견하면 더 이상 전체를 다 기억할 필요가 없다. 패턴만 저장하면 된다.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단순화를 강요하는 바로 그 조건이 세계를 실제보다 덜 무작위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다. 검은 백조는 단순화 작업에서 버려지는 부분이다.

 

 

좀 오래된 것들의 기억

 

기억 속의 사건을 떠올릴 때, 사건들의 실제 순서가 아니라 재구성된 사건의 순서를 떠올리는 이 단순한 무력함이 실제 역사보다 되돌아본 역사를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게 만든다.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이 최신 사건을 기억하면서 이전의 기억에 이를 덧붙여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기억은 견고하고 불변이며 서로 단단히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 짓기에 들어맞는 쪽으로 정보를 사후에 선택함으로써 기억이 더욱 생생해지는 것이다.

 

 

정밀하고 세세한 분석이 만능인가

 

혈통을 따지는 일은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 줌으로써 인과관계를 채워 넣으려는 우리의 속성을 만족시켜 준다...경험적으로 볼 때, 민족성보다는 성별이나 계급, 직업 따위가 한 사람의 행동에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만 재미있으면 그뿐이다. 안타깝지만, 사실 검증 부대는 있을 수 있지만 지적 검증 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백조에 대한 맹목

 

희귀한 사건에도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검은 백조다. 둘째는 이론틀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검은 백조다. 첫 번째 검은 백조는 과대평가되고, 두 번째 검은 백조는 과소평가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어떤 사건을 인지하고 일단 입에 올리면 가능성이 낮은 사건도 과대평가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손실이 적을 사고에 대비하는 보험 선호 경향이라 불렀다. 이는 가능성이 적되 충격은 더 큰 사고에 대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확률이 희박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실제보다도 더 낮게 평가한다.

 

 

직감의 힘

 

스탈린의 말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숫자다. 통계란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테러리즘보다 더 무서운 살인자는 환경 재앙임에도 우리는 테러리즘에 더 분노한다. 우리는 자연이 몰고 오는 피해보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피해에 더 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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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순주 2015.09.21 08:45 신고

    정말 이 책에 애정이 깊으신군요. 군데군데 흥미롭습니다. 요약이 힘드셨을텐데 정성스럽습니다.

  2. 로욤 2016.11.22 17:13 신고

    구글에서 헛똑똑이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이 포스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을 알게 되었네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이 블로그의 다른 포스팅들도 읽어볼만 한 글들이 많군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구글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디지털 세대이거나, 과학자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를 이룬다. 저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또한 돈 때문에 사악하지 말자는 구글이 가장 사악하게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글의 두 창업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구글의 사악함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엔지니어적 상상에 미쳐 있는 두 사람이 인류가 가야 할 새로운 세상을 안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의 창업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구글의 역사라는 것도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구글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새로운 인류를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작금의 현실을 만들었고, 구글의 미래가 결코 인류의 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터넷 중독과 함께 최근에 들어서는 스마트폰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돈 앞에서 사악하지 않겠다는 구글 창업자의 다짐은 이미 주주들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행태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변질을 가져 왔다.  

 

 

기술은 적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구글이 꿈꾸는 최종 목적지는 기술이 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임을 두 창업자와 최고경영자는 끝까지 부인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쌓여 기술이 적이 된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외우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주문한다. 기술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은 기술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 책과 함께 《죽도록 즐기기》와 《테크노폴리》,  《구글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함께 읽으면 균형잡힌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때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성찰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다.   

 

 

 

 

 

인간의 뇌가 지닌 놀라운 복잡성

 

다른 모든 세포들과 마찬가지로 뉴런들 역시 보편적 기능들을 수행하는 핵과 체세포를 지니고 있으나 촉수같이 생긴 축색돌기, 수상돌기라는 부분을 지니고 있어 전자파를 받고 보내는 역할을 한다.

 

뉴런이 활동할 때 파동은 체세포에서 축색돌기 끝으로 흐르는데, 이 돌기에서는 신경전달물질이 분출된다. 이 신경전달물질은 오늘날에는 시냅스라고 불리는, 프로이트가 접촉 장벽이라고 명명했던 곳을 지나 흐르다가 이웃 뉴런의 수상돌기에 들러붙는다.

 

그 결과 세포 안에 새로운 전자파를 발생시킨다. 이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들 사이에서 이곳저곳으로 흐르면서 뉴런들은 서로 소통하고 복잡한 세포의 통로를 따라 전자 신호의 전달을 감독한다. 사고와 기억, 감정들은 모두 시냅스를 통한 전기화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인간의 두개골 안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존재하는데, 이 뉴런들은 1밀리미터도 채 되지 않는 것에서부터 몇 피트에 이르는 것까지 그 길이와 모양이 다양하다.

 

                                                                   

 

각각의 뉴런에는 많은 수상돌기들이 달려 있는데, (축색돌기는 하나만 존재한다) 축색돌기와 수상돌기의 끝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그만큼 많은 시냅스의 통로가 존재한다.

 

아직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한데 결합시키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인격을 결정하는 복잡한 회로 속으로 이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뇌의 물리적 작동 방식에 대한 인류의 지식 확대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 있는 오래된 가정이 하나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생물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은 성인의 뇌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우리의 뉴런은 아직 말랑말랑할 때인 어린 시절에는 회로와 연결되지만 이 회로는 성인기에 이르면 고정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관점에 따르면 뇌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유사하다. 유년기에 어떤 틀에 맞춰진 모양이 만들어지면 최종적인 모양으로 재빨리 굳어버리는 식이다. 20대가 지나면 새로운 뉴런은 전혀 생성되지 않고 새로운 회로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일생 동안 새로운 기억을 계속 저장하지만 (그리고 오래된 것들 일부는 잃어버린다) 성인기에 거치게 되는 유일한 구조적 변화는 신체가 노화하고 신경세포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느린 속도의 쇠락에 불과하다.

 

제임스는 "흐르는 물은 더 넓고 깊게 진행하면서 스스로 수로를 만들어낸다.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흐를 때는 이전에 스스로 파놓은 길을 따라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부 물체에 대해 받은 인상들은 우리 신경 체계 속에서 적합한 길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이 같은 살아 있는 통로들은 한동안 막혀 있다가도 비슷한 외부 자극을 받을 경우 되살아난다"고 했다.

 

                        
  

우리의 뇌는 변할 수 있는가?

 

머제니치는 잘린 신경조직이 재생되는 과정에서 생긴 혼란을 뇌가 스스로 재정비했음을 알아차렸다. 손의 신경에서 발생한 재배치와 일치하도록 동물의 신경 통로 역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머제니치 이후 30년에 걸친 더 많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다 큰 영장류의 뇌에 광범위한 가소성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그는"이들 결과는 감각 체계를 일련의 내장된 기계 구성으로 보는 시각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선언했다.

 

뇌의 가소성은 접촉에 의한 감각을 좌우하는 체성감각의 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었다. 결국 우리의 모든 뇌 회로는 감각, 시각, 청각, 동작, 사고, 학습, 인식 또는 기억 등 어느 것에 관여하든 변할 수밖에 없다. 널리 인정받던 지식도 언젠가는 버림받게 된다.

 

 

 

 

 

 

 

 

뇌의 가소성

 

올즈의 관찰에 따르면 "뇌는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과거 방식을 바꿔 스스로를 새롭게 정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뇌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재정비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지고 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시냅스의 풍부한 화학 물질 안에 그 비밀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뉴런 사이의 미세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극도로 복잡하지만 신경 통로에 경험을 등록하고 또 기록하는 다양한 화학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감각을 경험할 때마다 뇌 속에 있는 일련의 뉴런들은 가까이에 있을 경우 아미노산 글루타민산염과 같은 시냅스상의 신경전달물질을 교환하면서 결합한다.

 

같은 경험이 반복될 경우 뉴런 사이 시냅스 간 결합은 보다 농축된 신경전달물질의 배출과 같은 생리학적 변화나, 기존 수상돌기와 축색돌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시냅스 끝부분에 새로운 뉴런의 생성을 이끌어내는 등의 해부학적 변화를 통해 더욱 강력해지고 많아진다.

 

시냅스들의 연결은 또다시 생리학적해부학적 변경의 결과, 특정 경험에 반응하면서 약화된다. 우리가 살면서 배우는 내용은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포 간 연결 부위에 담겨 있다. 연결된 뉴런의 끈은 우리 사고에 있어 진정 살아 있는 통로를 형성한다. 신경가소성의 역동성은 "불꽃이 동시에 이는 세포는 철사처럼 한데 묶인다."

 

캔델은 군소의 아가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습에 의한 행동 변화는 외부 자극을 느끼는 감각뉴런과 아가미를 움직이게 하는 동작뉴런 사이에 있는 시냅스의 연결이 점진적으로 약화됨과 동시에 일어난다."

 

"시냅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훈련만으로도 그 강도에 있어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양육의 결과물이지 천성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이 군소 실험은 캔델이 말한 대로 "양쪽의 시각이 각자 가치를 지니며, 사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임을 밝혀냈다.

 

우리의 유전자는 뉴런들 사이의 연결, 즉 어떤 뉴런이 다른 뉴런과 언제 시냅스 간 연결을 형성하는지에 관해 상당 부분을 지정한다. 유전적으로 정해진 이 같은 연결들은 칸트가 말하는 선천적 원형, 즉 뇌의 기본적 구조와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이 같은 연결의 힘, '장기적 효력'을 규제하며 로크가 말한 대로 사고의 재형성과 '새로운 형태의 행동에 대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자들의 상반되는 철학은 시냅스에서 공통분모를 찾는다.

 

뉴욕대학교의 신경과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시냅스와 자아』라는 책에서 천성과 양육은 실상, 같은 이야기라고 적었다. 양쪽 모두는 궁극적으로 뇌의 시냅스 조직 형성을 통해 정신적ㆍ행동적인 영향을 받는다.

 

                                

    

세포는 유연하다. 경험과 환경, 필요에 의해 변한다...어떤 사람이 실명을 할 경우 시각적 자극을 처리하던 뇌의 부분, 즉 시각 피질이 그냥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즉각 정보 처리를 위한 회로에서 채워진다.

 

또한 이 사람이 점자를 배울 경우 시각 피질은 촉각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처리하는 새로운 임무를 띠게 된다...뉴런의 준비된 적응력 덕분에 청각 감각과 촉각은 시력을 잃은 데 따른 피해를 완화하기 위해 더욱 예민해진다.

 

 

뇌는 우리가 사고하는 대로 바뀐다

 

우리의 뇌조직이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많은 것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진화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여러 번 사고를 반복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뇌를 안겨주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행위가 뇌 속에 의미 있는 물리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동물의 뇌에 관한 이 도구들이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집게를 가지고 실험을 실시했던 연구자들에 따르면 원숭이의 뇌는 현재 이 집게들이 손가락인 것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사고 형식이 우리 뇌의 모양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놀라운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실험자들의 뇌는 순수한 상상, 즉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행동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도 변화했다...우리는 신경학적으로 우리가 사고하는 그대로 변하고 있다. 

 

 

가장 바쁜 자의 생존

 

뇌의 특정 회로가 육체적 또는 정신적 행동의 반복을 통해 강해질수록 회로는 해당 행동을 습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도이지가 관찰한 신경가소성의 역설은 이 가소성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정신적 유연성이 결국은 우리를 '고착화된 행동' 속에 가둘 수 있다는 것이다.

 

뉴런들을 연결시키는 화학적으로 활성화된 시냅스들은 실상 이 뉴런들이 형성한 회로를 계속 작동시키고 싶어 하도록 우리를 조정한다.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만큼이나 빨리 우리의 뉴런을 파고든다. 피스쿠알 레온은 "유연한 변화가 꼭 주어진 문제에 대한 행동적인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가소성은 발전과 학습의 구조임은 물론이고 병적 증상들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환자가 자기 증상에 더 집중할수록 이 같은 증상은 더 깊이 신경 회로에 각인된다. 최악의 경우 사고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통증을 느끼도록 훈련시킨다. 많은 중독 증상들 역시 뇌에 있는 유연한 통로들이 강해지면서 더 악화된다.

 

어떤 경우에는 아드레날린의 사촌격이라 할 수 있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도파민과 같은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형성이 특정 유전자를 살리거나 죽이는 결과를 낳으면서 결국 약을 더욱 갈망하게 만든다. 이는 특히 살아 있는 통로에는 치명적이다.

 

뉴런과 시냅스는 우리 사고의 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뇌의 유연성이라는 특성 속에 지적 쇠퇴의 가능성이 이미 내재해 있는 셈이다.

 

 

뇌가 생각하는 뇌 

 

이는 내가 인터넷 사용이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고 염려하기 시작했을 때 느낀 바와 같다. 나는 처음에는 이 같은 생각을 거부했다. 단순한 도구에 불과한 컴퓨터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깊이,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틀렸다. 신경과 학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뇌와 뇌를 통해 가능한 사고 변화는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이는 개개인뿐 아니라 하나의 종으로서 인류 전체에도 적용되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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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물론 보수화된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도 경제성장과 선진국 진입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은 마치 경제성장을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면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와 병폐들이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럴까? 정치철학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양당의 정치인들이 말하는 선진국들의 상황이 유토피아처럼 풍요롭고 행복하기만 할까?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이 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를 보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수없이 많은 저자들이 인용하는 저서로서 출판된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 시대의 고전 반열에 오를 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연구결과다. 저자들이 현재의 선진국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는 이제 배를 채우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더 이상 최우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시민들은 어떻게 더 먹을까가 아닌, 어떻게 덜 먹을까를 고민하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뚱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동력이던 경제성장은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그 임무를 마쳤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평안과 행복이 증대되던 시대도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가 더 부유해질수록 스트레스와 우을증 및 각종 사회문제가 장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긴 역사의 여정에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대규모 개발 위주의 성장담론이 전 지구적 시장구축과 함께, 금융과 정보통신 및 지적재산권 중심의 '고용없는 성장'의 패러다임에 이르면서 선진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진보의 동력이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 곳곳에서 진행된 대규모 개발의 역설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인류는 물론 지구 생명체들은 여섯 번째 종말을 걱정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분석틀을 이용해 진행한 연구에서 경제성장에 따른 행복과 기대 수명이 1인당 GDP(국민소득) 약 2만5천 달러에서 평평해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행복과 기대 수명이 일어나는 국민소득 수준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는 결과도 보여줬다. 이는 모든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현상으로, 우리의 국민소득이 늘어난다 한들 국민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대 수명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지수로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득불평등의 증가, 스트레스 지수의 상승, 만성질환 및 정신질환의 급속한 증가, 10대 임신율과 낙태율 증가, 청년과 노인의 자살율 증가,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확대, 범죄율아 사회적 비용의 증가, 마약과 약물중독의 증가, 계층이동성의 폭락, 저축률의 하락과 소비지상주의, 가족의 해체와 1인가구의 증가, 외모지상주의와 성형의 확대, 신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부상 등이다. 


 

                                                  

 

 


이런 부정적 현상들은 개인과 계층 및 지역 간의 소득불평등이 심한 선진국일수록 발생 빈도가 높았고, 일본과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처럼 소득불평등이 적은 나라일수록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줬다.특히 신생아 사망율과 범죄율, 10대임신율과 낙태율, 부의 불평등이 가장 크고, 의료비지출 대비 효율이 가장 떨어지는 미국과 영국이 최하위에 자리했다. 두 나라는 신자유주의(무정부적 자유주의)가 가장 발달한 선진국이며, 대부분의 지수가 후진국에 버금가거나 떨어지는 것도 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부유한 국가에서 생기는 문제가 사회가 충분히 부유하지 못하기 (혹은 너무 부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 내에서 사람들 간의 물질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 내에서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기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절대적인 불평등이 문제가 되지만, 부유한 나라에서는 상대적인 불평등이 개인의 행복과 기대 수명 등에 나쁜 영향을 주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의 51개주도 똑같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소득불평등이 가장 적은 뉴햄프셔주와 가장 큰 뉴욕주를 비교하면 거의 모든 지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최악의 주는 세계금융의 본산지인 뉴욕주이다. 

 

 

            www.equalitytrust.org.uk에서 인용, 피케티가 사용한 자료도 상당 부분 이 사이트에서 나왔다.

 



결국 1인당 GDP가 25,000~27,000달러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을 3~4만달러에 이른다고 해도 소득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건강과 사회문제 등을 다룬 수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부유한 국가일수록 "사회 전체를 가로지르는 불평등의 정도"에 따라 행복과 건강, 기대 수명 등에서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 수없이 많은 통계와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종합한 결과,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공동저자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미국의 뉴햄프셔주와 뉴욕주를 비교한 것과 같은 지수와 통계들을 사용해 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스웨덴과 일본을 비교했다. 

 


스웨덴에서는 평등이 재분배를 지향하는 세금과 보조금, 그리고 큰 복지국가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국가 소득의 비율로 보면 일본의 공공 사회 지출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아 스웨덴과 대비를 이룬다. 일본은 재분배보다는 세금이나 보조금 '이전의' 소득이나 시장 수입이 평준화되어 있어 더 높은 수준의 평등을 달성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는 소득 차가 적다. 그러나 그 밖에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더 큰 평등은 세금이나 보조금을 통해 불평등한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지만, 세금과 보조금 이전 총소득을 평준화해 재분배 필요성을 더는 방식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했다. 각종 부조리와 불평등이 넘쳐나던 시절의 샤르트르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만했다. 그의 말대로 타인은 지옥일 수도 있고, 반대로 천국일 수도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세상에선 각종 불평등이 만들어내는 사회관계의 왜곡과 스트레스 때문에 타인이 지옥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인식과 태도를 바꿔 경쟁보다는 공존과 상생에 눈을 돌릴 때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다. 가족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 지역사회와 국가 차원의 사회가 제대로 작동했을 때는 타인은 결코 지옥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도 지친 몸과 허해진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가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자유는 이런 공동체가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 성장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전환, 그것이 인류가 6번째 종말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자유방임적 경쟁이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사회경제적 평등에 기반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창출한다는 것이 《평등이 답이다(THE SPIRIT LEVEL)》의 결론이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 관심법'은 최악의 입법이며, 대한민국을 1%의 수중에서 하위 99%가 피터지게 싸우게 만드는 최악의 악법들이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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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tangke 2014.07.20 12:43 신고

    좋은 글 생각 정확한 지식이 참 좋네요~~
    사막 속에서 금은보화를 찿은 기분입니다~
    티스토리 구독을 하고 십습니다~~ 초대해 주실거죠?
    (hschainav@naver.com) 좋은 하루 되시고~~ 감사합니다^^


어떤 책들은 감히 서평을 쓰는 것조차 누가 되는 것들이 있다. 책의 첫 장에서부터 끝장에 이르는 동안 온몸을 관통하는 지적 선율과 시대를 관통하는 성찰에 지상의 언어가 모두 초라해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한 시대의 지식과 경험을 빌렸으되 영원 불멸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


 

여기 이 책이 그렇다. 칼 폴라니의 몸을 빌어 1944년에 쓰여진 《거대한 전환》은 책의 부제처럼 우리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유럽에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 책이 2009년에 이르러서야 한글로 번역된 것은 미스터리 그 자체라 할만하다. 이 책과 함께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으면 인류의 근현대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몰락하는 시점에서 자기조정 시장(시장경제)과 그것을 떠받드는 사상과 이념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이 책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운명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던 것들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먼저 이 책의 94페이지를 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시장 근본주의자와 신자유주의 핵심으로 모든 시장정보가 공개되는 완전경쟁이 이루어지면 최고의 효율성을 이루어 인류 전체가 풍요로워진다는 아이디어)의 문제를 이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한 문장이 있었던가? 인간을 노동으로, 자연을 토지로 변환시킨 자기조정 시장은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인간 욕구를 파괴해버리고 단 하나만을 남겨놓는 사탄의 맷돌처럼 애초부터 자기조정 시장이란 아이디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허구였다. 



자신이 정식화했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애덤 스미스의 자기조정 시장이란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처럼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어도 실현될 수 없다. 시장에 주어진 모든 정보를 검토한 후 거래를 하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하다.노벨경제학상 수상사인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원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허구의 아이디어인 자기조정 시장이 경제체제의 축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호황은 없었고 주기적인 공황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없어서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자기조정 시장의 허구성을 말한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칼 폴라니처럼 자기조정 시장의 본질을, 그 화려한 유혹의 이면에 자리잡은 탐욕과 착취의 시스템을 낱낱이 밝혀낸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조차도 이익을 둘러싼 자본과 계급 간의 투쟁에만 집중했을 뿐, 자기조정 시장이 가지고 있는 파국적 결말의 필연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23가지》에서 말한 것처럼, 지구에 대해 선입견이 없는 외계인이라면 주류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자기조정 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시장 경제란 선진국과 초국적기업 및 기업집단 간의 불평등한 거래를 숨기기 위한 허구의 개념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는 선입견이 있는 인간이 보더라도 자기조정 시장이란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핵심임을 알게 됐다.     

 


다시 209페이지를 보자.



시장 패턴이라는 것은 잠재적으로 오직 그것에만 따라오는 고유한 동기, 즉 물물교환과 교역이라는 동기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모종의 특별한 제도를 따라 창출할 수 있으니, 그 특별한 제도가 바로 시장이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경제 체제를 시장이 통제할 경우 전체 사회 조직을 압도해버릴 만한 결과가 나오는 이유이다.


 

합리적인 인간의 자유롭고 이기적인 이익 추구 행위가 자기조정 시장의 중재하에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는 애담 스미스의 선언이 있은 후, 인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돈벌이에 나설 수 있었다. 자기조정 시장의 아이디어, 즉 자유주의 경제가 순식간에 전세계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인데이런 이익 추구의 무한경쟁은 전세계를 초토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거의 10년 단위로 되풀이되는 경제공황과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자원, 더욱 심해지는 지구온난화와 대지의 사막화, 토지의 대규모 오염, 물 부족 사태, 천연자원의 고갈, 미세먼지의 범람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일본의 제1원전 폭발과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폭주는 지구의 반발을 불러와서 인류를 종말로 내몰고 있다.


                                                       2008년 금융 대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결국 칼 폴라니의 분석처럼 자기조정 시장이란 유한한 지구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아이디어에 불과하며 금융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실물경제를 담보로 한 거대한 지적사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파괴적인 자기조정 시장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사회의 근간인 상호성과 재분배의 회복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역할을 하는 사회의 회복, 바로 그것이 칼 폴라니가 제시하는 해답이며 지속 가능한 경제의 실현이다.


 

마지막으로 603~604페이지를 보자.



따라서 사회의 발견은 자유의 종말일 수도 있고 그것의 재탄생일 수도 있다...인류는 더욱 성숙해질 것이며, 복합 사회 안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형상을 갖춘 채 존재할 수 있다...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셈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천혜의 땅에 세워진 미국의 경제가 무너지고대부분이 선진국인 유로존이 위기에 직면한 현재,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그 원인과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성경 같은 책이다. 회의 재발견, 그것만이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는 미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21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근대》에서 칼 폴라니가 육화된 노동에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 폴라니의 성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위험사회》는 《거대한 전환》 못지않은 책이다.



현대의 상황을 유동하는 액체로 정의한 바우만의 성찰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맥을 같이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푸코의 성찰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칼 폴라니의 작은 오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인류가 물보다 싼 석유를 대체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칼 폴라니의 성찰이 바우만의 성찰보다 더 유효할 수 있다.     



신주유주의 이후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일반 국민은 물론 이 땅의 지도자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읽고 또 읽어야 하는 보물 같은 책이다아울러 이 땅에서 진보좌파의 이름으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자들 중에 합리적 자유주의, 즉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학자와 통상관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과 노동 개혁, 금융 개혁과 관치 경제 탈피는 진정한 의미의 신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대통령이 이 나라를 통치했지만 그 결과가 자살률 1위의 무한경쟁 사회, 내수가 없는 수출 중심의 일방적 경제,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기본적 사회안전망의 부족, 보편적 복지제도의 미비, 1000만 명을 육박하는 비정규직, 거의 4000조에 이르는 부채로 넘쳐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주하는 기차를 멈추는 것이지,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다. 그런 다음에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새로운 대학민국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국가 개조의 맨 처음에 칼 폴라니의 성찰이 주요함은 《거대한 전환》이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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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봉 2014.07.19 18:03 신고

    좋은 글,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 백승준 2015.03.24 03:17 신고

    좋은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 늙은도령 2015.03.24 04:32 신고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금은 어렵더라도 끈기있게 읽다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길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예전만큼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경제규모도 예전보다 수백 배 이상 커졌습니다. 1인당 GDP도 30,000만 달러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현 대통령은 '줄푸세'를 통해 임기 내 40,000만 달러에 이르는 기반을 다지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달콤한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집니다. 경상수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나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런 모순된 경향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세계화의 부작용을 다룬 몇 권의 책을 중심으로 모순의 기원을 파고들어갈까 합니다. 《블랙스완》,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 《롱테일 경제학》을 중심으로 노력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모순을 밝혀보겠습니다. 이 책들의 저자들은 너무나 당연해 의심해본 적이 없는 보편적인 진리가 부분적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 예로서 2008년 금융위기와 중후장대한 무거운 경제를 대체해가고 있는 가벼운 경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단 하나의 증거만으로 이전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세 권의 책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2030세대들은 이전의 세대들보다 더욱 공부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 세 권의 책은 그 기원과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기도 합니다. 



 

 

먼저 세 명의 저자는 불평등의 기원과 그의 심화를 밝히기 위해 마테효과(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 마저 잃어버리라, 사악한 경제학자들이 성경에서 찾아낸 부익부빈익빈의 근거)와 파레토 법칙(모든 공동체에서 전체를 먹여살리는 것은 뛰어난 20%의 엘리트다, 차별의 근거와 엘리트주의로 악용)과 파레토 최적(사회와 시장참여자 모두에게 최적의 이익이 주어진 상태. 따라서 추가적인 자신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손해를 피할 수 없는 상태. 문제는 이런 완벽한 균형상태가 여러 가지여서 코에 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된다. 이것 때문에 합리적 시장이나 시장의 균형가설에서 출발한 모든 시장이론이 실패한 것이며, 반면에 모든 이에게 최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경제학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우스 종형곡선의 왜곡과 오류(쓸모없는 부분이라고 무시된 종형곡선의 양쪽 하단에서 직선처럼 길게 늘어진 부분-롱테일-이 실제로는 하위 99%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가우스 곡선은 간과했다는 것으로, 프랙털이론과 롱테일경제학의 학문적 근거를 제공)부터 파고듭니다. 저자들은 따르면 이 세 가지가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고 상호 강화되면서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초장기 경제불황과 1929년에 시작된 선진국 중심의 경제대공황보다 더욱 심각한 경제대침제기를 초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2008년 미국 월가와 런던 금융시장 발 금융 대붕괴(정확히는 신용의 대붕괴)에 의해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미국식 무정부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가 한계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슈퍼리치들도 상당한 돈을 날려버렸지만, 거의 전 재산을 날린 중하위층의 타격은 회복불능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음에도 유대인들이 수십 년째 이사장을 맡고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우리의 한국은행과는 달리 민간은행이다)는 부자들의 금고를 다시 채워주고, 무한대의 돈놀이를 할 수 있는 미국 중심의 신용 체계가 무너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이를 위해 연방준비제도는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실시했고, 슈퍼리치와 상위 10%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날린 손실을 만회했지만, 나머지 90%는 빈곤의 악순환 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이 바람에 선진국의 주식시장은 금융 대붕괴 이전을 넘어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천문학적인 재산을 날린 슈퍼리치들은 금융 대붕괴 전보다 더욱 부유해졌습니다. 자본주의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공황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하위층의 지갑을 털어 만회하곤 했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은행과 금융시장을 오가며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밀어붙인 것입니다.

 

 

무제한 양적완화 때문에 천문학적인 유동성이 시중에 풀렸지만, 이것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은행과 금융업체를 살리고 주식시장을 띠우는데 사용됐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동자의 소득을 보장하는 실물경제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지만, 슈퍼리치와 상위층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낙수효과는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오죽하면 세상이 1%의 부자와 99%의 가난한 사람으로 나뉘었다는 말들이 전세계를 회자하겠습니까? 미 연방준비제도의 무제한적 양적완화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고,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이라도 찾아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공존과 상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일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됐습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소득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노동자들은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놓고도 다투어야 할 상황까지 내몰리게 됐습니다. 평균수명이 늘은 만큼 매년마다 노동시장으로 편입되는 새내기들과 피터지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 것입니다.  

 

 

허면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수없이 많은 일자리도 없애버린 2008년의 금융 대붕괴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던 것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성경에 나오는 문구를 차용한 마테효과와 파레토의 법칙부터 살펴봐야 합. 우선 가우스 이론에 근거한 통계가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밝힌 《블랙스완의 도움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월가의 현인, 탈레브는 《블랙스완》에서 “확률과 수학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실 세계의 근소한 수리적 변화는 정규분포곡선으로 대표되는 완만한 무작위성으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가증식하고 거친 무작위성으로 추정된다. 수식화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이 아니라 만델브로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이란 뉴턴역학이나 다윈의 진화론,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처럼 선형적으로 돌아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이것에 관해서는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인데, 원체 방대한 내용이라 최소 4~5편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습니다). 만델브로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역학의 기반을 이루는 두 개의 원리에 대해 짧게 다뤄보겠습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비약을 통해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내는 양자역학의 근간이 되는 두 가지 원리는 불확정성 원리와 베타원리입니다. 

먼저 불확정성의 원리란 물질과 반물질이루는 기본입자들이 질량을 지닌 입자의 성질을 띠면서도 동시에 운동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형태인 파동의 성질도 띠어서 어느 하나를 파고들면 나머지가 무너지기에 우주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불확정한 상태로 머문다는 원리입니다(입자물리학적으로 보면 게이즈장 이론).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빛이 입자이면서도 파동이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론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됐습니다.

 

 

두 번째인 베타원리는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닌 입자나 에너지가 서로를 밀어낸다는 원리입니다. 우주를 이루는 모든 기본입자들이 다차원적으로 압축돼 있던 특이점에서 거대한 폭발(빅뱅)이 일어나면서 우주가 창조된 것도 이 원리가 바탕이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우주를 만들어낸 기본법칙인데, 이런 양자역학의 원리들을 통해 우주가 뉴턴역학에 의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뉴턴역학의 붕괴는 다윈의 진화론을 차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물론, 헤겔의 변증법에 기초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도 무너뜨렸습니다. 우파의 신화로 자리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좌파의 신화로 자리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류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적 비약(진화를 추동하는 돌연변이가 이에 속한다)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예측가능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뉴턴역학과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쓸모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물리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시되고 있는 초끈이론(양자역학과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합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통일이론의 핵심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과학란에서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이 양자역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들이 채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금융위기를 예언해 유명세를 탄 블랙스완의 저자 탈레브는 이 두 가지 이론에 근거해 가우스 정규분포곡선(뉴턴역학의 핵심인 작용과 반작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에 따라 통계를 작성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는지 2008년 발 금융시장 대붕괴을 통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선형방식을 따르는 기존의 통계수치는 현실의 변수들을 모두 다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인 편향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책의 제목인 '블랙스완'은 인간이 발견한 백조들이 모두 다 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검은 백조는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고, 수천 년 동안 이런 믿음이 강화되다가 어는 동물학자가 검은 백조를 발견함에 따라 수천 년 된 믿음이 단 한 번에 무너져내린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사항에 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성찰처럼 인간은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인류 문명에 최악의 선물을 남긴 플라톤의 주름지대에 관한 내용은 별도의 글로 다루겠습니다).   



실제로 인간은ㅡ집단도 마찬가지이지만ㅡ자신의 성향과 기호, 경험과 환경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필요한 쪽의 의견만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로 구별되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경우에는 이런 확인 편향의 오류가 심각하다 못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 간에도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이런 확인 편향의 오류 때문에 가우스 정규분포곡선(위가 홀쭉하고 밑이 넓은 종 모양의 곡선)에 경도된 주류 경제학자들은 2008년의 금융시장 대붕괴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의 양극화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자기조정 능력이 있는 완전시장을 방해하는 국가의 개입이나 과잉된 규제, 초국적기업의 담합과 내부거래, 경제정책의 일관성 부족,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정치인 등이 문제라고 합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합니다. 애당초 보이지 않는 손이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면서요.


   

주류 경제학과 현장과의 차이를 확인 편향 오류 등으로 설명한 탈레브는 부의 양극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마태효과를 얘기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는 마태복음 13장 12절에 나오는 내용인데,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것이며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질 것이라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우화에 불과합니다. 



낮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예수가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하늘에 가면 더욱 대접을 받는다는 뜻에서 한 말을 주류 경제학자들이 부의 양극화가 시장경제의 발전 도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경제현상이라고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는 중에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피살된 것을 전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부수적 피해라고 말한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음이미지에서 인용


 

이번에는 부의 양극화를 최초로 밝혀낸 파레토의 법칙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였던 파레토는 빈부격차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몇 세기에 걸쳐 국가들의 부와 소득에 대한 다량의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만델브로브트는 프랙털 이론과 금융시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는 한 축에는 소득 수준을, 그리고 다른 축에는 그 소득 기준을 가진 사람 수를 표시해 놓고 그래프용지 위에 데이터 차트를 그리자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동일한 그림이 그려졌다. 사회는 빈자 대비 부자의 비율이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완만히 기울어지는 <사회적 피라미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닥은 매우 두껍고, 부자 엘리트들이 속해 있는 위는 매우 얇은 <사회적 화살>에 더 가까웠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철저히 분석한 파레토는 소득 분포가 가우스의 정규분포곡선(종형곡선)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의 부의 대부분을 소수의 부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화 된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법칙에 따르면 억만장자가 억대의 돈을 버는 확률이 가난한 사람이 만원을 버는 확률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20 : 80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득불평등이 더욱 커지면 1 : 99 사회도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2008년 금융위기가 가져다 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파레토에 의해 마태효과가 공식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물론 최근의 기준으로 보면 파레토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보여줬습니다. 파레토가 개인적으로 구할 수 있는 국가의 자료가 일부 유럽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고, 통계와 분석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티핑포인트》와 함께 80대 20법칙을 넘어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롱테일 경제학의 도움을 받아 보겠습니다(가우스 이론에서 벗어나 프랙털 이론을 따른 이유는 삼성전자의 어닝쇼크, 미래의 먹거리가 문제야를 참조하십시오). 이 책의 저자 크리스 엔더슨은 미국의 속담을 인용하며 “만일 단 몇 명만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을 갑부가 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가우스 곡선의 꼬리 부분이 무한히 길어지면 종형을 이루는 머리와 몸통 부분을 넘어설 수 있다.



이는 단 몇 명이 갑부가 된다한들 한 국가의 부나 전 세계의 부를 모두 독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갑두들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많은 부가 가우스 종의 곡선에서 ⅹ측 부분과 평행하게 이어지는 긴 꼬리(롱테일) 부분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류들의 시장경제의 규모보다 그것에서 잘려나간 꼬리 시장의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이것을 양성화할 수 있으면 가벼운 경제의 도래가 가능하며, 부의 양극화도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소수에게 소득이 집중되는 부의 양극화는 《롱테일 경제학》의 주장도 무효로 만들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부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중산층의 수는 계속해서 줄고 있고 하위층과 극빈층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게다가 인간 수명의 연장은 종의 차원과 개인의 차원에서는 축복일지 모르지만, 정치경제적인 면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는 상황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고령화 추세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출산율이 세계에서 최저로 떨어지며,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지고 계층의 이동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2030세대가 오죽하면 삼포세대라는 말로 회자되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중산층이 무너져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하층민은 극빈층으로 떨어진 2008년 이후에는 부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빨라지고 있습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다보스 포럼에서 전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초국적 기업의 총수와 거대 금융 자본가, 세계적 언론기업과 각국의 정치지도자, 국제기구 책임자와 급진적 지식인들의 모여서 공공연히 자유시장 자본주의 실패를 얘기하는 것(이것도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쇼비지니스에 불과하다)도 이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인류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릅니다.  



최근에는 허리우드 영화관계자들이 최고의 영화로 뽑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히로인인 비비안리가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부의 양극화가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는 오늘에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도 믿기 어려울 판입니다. 기존의 시장경제로는 부자들의 재산을 늘릴 수 없어서 폭력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늘고 있고, 빈곤의 거버넌스(마이크로 파이낸스라고 알려진 미소금융을 말함)를 통해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지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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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좌파게티 2014.10.17 11:41 신고

    아고라에 이어 블로그에서도
    명료한 글과 좋은 책들...
    소개 잘 받고 갑니다. ..
    시간나는대로 탐독해야 겠네요...



죠셉 콘래드의 <어둠의 핵심>은  위대한 명화인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 되었던 소설입니다.

선원이었던 죠셉 콘래드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라고 할까요?

제국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고전 중 하나입니다.

너무나 멋진 문장들이 많아 어지러울 지경이지요.

그 중에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분들이나, 멋진 문장으로 이루어지 글을 쓰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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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강물에도 변화가 찾아와 그 평온함은 차츰 빛을 잃으며 점점 더 심오해졌다. 이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통하는 수로의 고요한 위엄을 보이며 펼쳐져 있던 넓은 옛 강은 여러 시대에 걸쳐 양쪽 둑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한 후 이제 저무는 날을 맞아 아무런 동요 없이 휴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존엄한 강물이 한번 찾아왔다가 영영 사라지고 마는 짧은 하루의 그 생생한 열기 속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기억이라고 하는 장엄한 빛 속에 잠겨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야말로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의 운명만큼이나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이 세상이 창조되던 날부터 우리 남성들과 만족스럽게 공존해 온 모종의 괘씸한 사실이 툭 튀어나와서 그 여자들의 세계를 모두 허물어뜨리고 말 테니까.


 

삶 속의 죽음처럼 흐르는 강 안팎에서도 진행 중이었다네...그것은 마치 악몽을 해명할 실마리들을 찾아 지겨운 순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들은 나로부터 6인치도 떨어지지 않게 가까이 지나가면서도 나를 힐끔 쳐다보는 일조차 없었는데 그건 불행한 야만인들이 보이는 그 철저하고 죽음 같은 무관심이었어.


 

그늘 속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마치 어떤 연옥의 암흑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졌다네. 가까이에 여울이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물 소리가 끊임없이 밀려와서 사람의 숨소리나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그 숲 속의 음울한 정적을 신비로운 소리로 가득 채우고 있었어. 그건 마치 허공으로 쏘아 올린 지구가 질주하며 내는 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리게 된 것 같았어.


 

일정 기간의 고용 계약이라는 합법적 수단으로 해안 각처에서 끌려온 후 자기네 체질에 맞지 않는 환경에 내던져진 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다가 지금은 병이 들어 비능률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니까 작업장에서 기어나가 그늘에서 쉬도록 허락되었던 거야. 이 죽어가는 형상들은 이제는 공기처럼 자유로워졌지만 한편 공기처럼 엷은 존재들이기도 했어. 


 

그가 말을 마칠 때마다 그 표정이 나타나서 마치 자기가 방금 한 말에 봉인을 함으로써 그 흔해빠진 어구의 의미마저 절대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으로 비치게 하는 듯했거든...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그는 특유의 미소로 그 말을 봉인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관리하고 있던 암흑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리는 것 같았어.


 

대지 속의 그 작은 공지를 둘러싸고 있던 말없는 밀림은, 마치 악이나 진실처럼, 무언가 위대하고 정복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내게 엄습해 왔으며, 이 어처구니없는 침입이 종식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는 듯했어.


 

왜냐하면 세상에 그 어떤 꿈 이야기도 꿈 속에서 느낀 것을 그대로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야. 발버둥치는 반항의 떨림 속에 혼재하는 그 부조리함, 놀라움 및 당혹감이라든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 바로 꿈의 본질이겠지만, 이런 것을 어떻게 이야기 속에 옮길 수 있겠는가......


 

우리 일생에서 그 어떤 특정한 시기의 삶에 대한 지각을 옮길 수는 없다구. 그 삶의 진실, 그 의미 그리고 그 오묘하고 꿰뚫는 본질을 구성하는 것 말이네. 그걸 전달하기는 불가능해. 우리는 꿈을 꾸듯이 살고 있으며, 그것도 혼자서......


 

강가의 무거운 밤 공기 속에서 인간의 입을 통하지 않고 저절로 형성되고 있는 듯하던 그 이야기가 내게 불어넣고 있던 희미한 불안감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될 만한 하나의 문장, 하나의 낱말도 놓치지 않으려고 경청하고 있었다.


 

그는 짧은 지느러미발처럼 새긴 팔을 펴고 숲이며 샛강이며 진흙이며 강이며 하는 것들을 모두 끌어안을 듯한 몸짓을 하는 것이었네.그것은 마치 햇빛 비치는 대지의 얼굴 앞에서 불경스럽게 팔을 저어 밀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라든가 숨어 있는 악령이라든가 그 핵심에 들어 있는 심오한 암흑을 향해 배반적 호소를 표하는 듯한 몸짓이었네.


 

그들의 뒤에서 그 두 그림자는 기다랗게 자란 풀 위로 천천히 끌려가면서도 풀잎을 하나도 꺾지는 못했어.


 

살다 보면 우리에게 짬이 전혀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도 이따금 과거가 회고되듯이 그렇게 과거가 우리에게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는 법일세. 과거는 불안하고 소란하기만 한 꿈의 형태로 찾아왔으며, 식물과 물과 정적으로 구성된 기이한 세계의 그 압도적인 실체 사이에서 경이롭게 기억되었지. 이 생명체의 정적은 평화로움과는 조금도 닮지 않고 있었네. 오히려 그것은 어떤 헤아리기 어려운 의도를 감싸고 있는 달랠 수 없는 세력이 지닌 정적이었어. 그래서 그 정적은 마치 복수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 후에 나는 그 정적에 익숙해졌고 그걸 더 이상 볼 수도 없었고 또 볼 시간도 없었지.


 

단순히 표면적인 일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다 보면, 표면 뒤의 실체, 바로 그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네. 내면의 진실은 감추어져 있는데, 그건 다행이지. 다행이야. 그러나 그것이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사뭇 느낄 수는 있었지. 그 신비로운 정적이 내가 벌이는 보잘것없는 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자주 느낄 수 있었단 말일세.


 

밤이며 이따금 커튼처럼 둘러선 밀림 뒤쪽에서 북소리가 강으로 울려와서 첫새벽이 될 때까지 마치 우리의 머리 위를 선회하듯이 허공에 희미하게 걸려 있었어. 그 북소리가 의미하는 것이 전쟁인지 평화인지 아니면 기도인지를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도 없었지. 새벽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것은 대지에 내려앉은 싸늘한 정적이었어. 나무꾼들은 잠이 들었고 그들이 지펴놓은 불은 나직이 타고 있는데 불이 붙은 나뭇가지가 탁탁 튀는 소리에 우리는 놀라곤 했어. 우리는 어떤 선사시대의 대지, 그것도 어떤 미지의 유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대지 위를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우리는 마치 어떤 저주받은 유산을 멋모르고 소유했다가 결국은 깊은 고뇌와 잇따른 고통을 대가로 치른 후 굴복하고 만 최초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네.


 

그러나 배가 강의 한 만곡부를 허덕거리며 돌 때면 별안간 우리는 미동도 하지 않는 무거운 나뭇잎 장막 아래로 골풀 담장, 뾰족한 초가 지붕, 터져 나오는 함성, 검은 팔다리의 소용돌이, 집단적인 손뼉소리, 발 구르는 소리, 흔들리는 몸통, 굴리는 눈알 따위와 마주치곤 했어. 이 검은색의 영문 모를 광기의 가장자리에서 기선은 느린 속도로 끙끙대며 기어가고 있었어...우리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세계가 우리와는 시간적으로 너무 멀어서 우리가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우리가 태초의 밤, 아무런 흔적이나 기억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시대의 그 캄캄한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 땅은 이 세상의 땅같이 보이질 않았어. 우리는 정복당한 괴물이 족쇄를 차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었거든. 그러다가 거기서 괴물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거야...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동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생각이 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인간의 마음은 무슨 생각이든 할 수 있는 법이야. 왜냐하면 모든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과거까지 그 속에 모조리 들어 있기 때문이야.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기쁨, 두려움, 슬픔, 헌신, 용기, 분노가 있겠지만,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진실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옷을 벗어버린 진실이지. 바보들이야 입을 벌리고 몸을 떨고 있겠지만, 용감한 인간이라면 진실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네...원칙이란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 몸에 걸친 옷이라든가 예쁜 천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몸을 세차게 흔들기만 해도 그 천은 떨어져나가게 되지...물론 바보는 그저 겁을 먹고 있기 때문에 또 더러는 까다로운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안전할 수 있어...이 모든 일 속에는 표면적인 진실이 충분히 들어 있어서 나보다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네.


 

읽던 것을 중단한다는 것은 마치 단단한 옛 우정의 안식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같이 느껴진단 말이야.


 

그 놈의 것이 어느 순간에 멎어버릴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숨을 죽이고 동력륜의 날개가 물을 차는 소리를 하나하나 아슬아슬하게 듣고 있었어. 그건 마치 사람의 목숨이 이제 막 꺼지려는 촛불처럼 깜박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았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한 채 무시해 버리는 것들이 사실 무슨 문제가 되었겠는가?...이따금 우리는 번뜩이는 섬광 같은 통찰을 얻게도 되지. 그러나 그 일의 본질은 표면 아래 깊숙이 가려져 있어서 내 인식 범위라든가 내 간섭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일세.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따진다면 이 세상의 나머지 부분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구. 아무데도 없었어. 없어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이었지. 작은 속삭임이나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청소되어 버렸던 거야...사람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인해 경련을 일으켰고, 손은 가볍게 떨렸으며, 눈은 깜박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들은 아직도 태초의 시간을 살고 있었고, 그래서 말하자면 자기네에게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는 체험이라고는 전혀 물려받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무언가 그들을 제약하는 힘, 즉 개연성을 거역하며 작용하는 인간의 은밀한 힘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어. 나는 관심을 재빨리 첨예화시키며 그들을 바라보았지.


 

그 당시 나는 그 검둥이들이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과 마주 서서 마치 깊은 바다에 생기는 물거품이나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비밀의 표면에 이는 잔물결을 바라보듯 그 사실을 눈부시게 바라 보고 있었네.


 

극단적인 슬픔도 궁극적으로는 격렬하게 발산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냉담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아...... 


 

그건 마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무에게 흔들리지 말라고 명령한 격이었어.


 

그가 뻐끔뻐끔 파이프를 빨아들일 때 얼굴은 마치 작은 불길이 규칙적으로 깜박이는 가운데 밤의 어둠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 같았다. 성냥불이 꺼졌다.


 

한 커다란 북에서 울려오는 단조로운 고동소리로 인해 허공에는 무엇으로 감싼 듯한 충격과 지속적인 진동이 가득했었어.검고 평평한 벽처럼 둘러선 숲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혼잣말로 음산한 주문을 외우는 끈질긴 저음이 벌집에서 번져오는 벌들의 붕붕거림처럼 들려와서 마치 마약처럼 아직도 잠이 덜 깬 내 감각에 이상한 효력을 던지고 있었지.  


 

이제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되어버린 그의 지쳐빠진 두뇌에는 망령 같은 이미지들이 출몰하고 있었어. 재산과 명예의 이미지들이 그 고귀하고 고매한 표현력이라는 탕진되지 않는 천부의 재능 주위를 비굴하게 맴돌고 있었던 거야...원래의 커츠가 침투해 들어갔던 그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악마적 사랑과 비현세적인 미움은 이제 원시적 감정을 만끽하며 거짓된 명성, 헛된 탁월성, 겉으로 보기에 성공과 권세로 여겨지던 그 모든 것을 탐하고 있던 그의 영혼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있었어.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그 눈은 촛불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온 우주를 감싸 안을 듯이 활짝 뜨고 있었고, 암흑 속에서 고동치고 있는 모든 심장들을 침투할 수 있을 만큼 꿰뚫고 있었어. 


 

화려한 외양과 무서운 실체에 대해 싫증낼 줄 모르는 그림자, 밤의 그늘보다 더 어두우며 화려한 달변을 숨기고 있는 주름진 천을 고귀하게 걸친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되살아났던 거야...심장의 고동처럼 감싸여진 소리를 규칙적으로 울리는 북소리 같은 것들이, 다시 말해 만물을 정복하는 어떤 암흑의 심장이 그의 환영과 더불어 그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했어.


 

그 구름 낀 저녁의 슬픈 빛이 모두 그녀의 이마로 숨어버린 듯이 그 방은 더욱 어둡게 보였어.


 

나는 그녀와 그를 똑 같은 시간에 보고 있었던 거야. 그의 죽음과 그녀의 슬픔 말이네. 그가 죽은 바로 그 순간에 그녀의 슬픔을 보는 듯했어.


 

그녀의 그 금발 머리카락은 허공에 남아 있던 잔광을 모두 포착한 듯 금빛을 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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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봉 2014.07.19 18:41 신고

    와우 대단합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찬탄이...대신 이해할려고 하니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네요 ^^ ㅎㅎ


죠셉 콘래드의 소설 『로드 짐』에 나오는 명문장들을 일부만 모았습니다.

제국주의 시절의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룬 소설로 주인공이 여러 가지 면에서 저와 비슷한 아웃사이더입니다.

선원이었던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제국주의 시대의 야만을 글로 옮겼는데, 최근에 와서는 당시의 유럽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죠셉 콘래드의 소설들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지만 요즘 소설과는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현대소설의 시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의 소설에는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표현들이 참 많습니다.

글을 쓰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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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외면적으로 내세우는 것들의 은밀한 진실...

 


위험도 직접 목격되지 않을 경우에는 인간의 생각 속에서 불완전하고 막연할 뿐이다.

 

 

죽음과 형제 관계에 있는 잠 앞에서는 모두들 평등했다.

 

 

잠을 자는 무리 위로 미약하지만 꾸준한 한숨 소리가 이따금 떠돌았다. 어지러운 꿈에서 발산되는 소리였다.

 

 

어쩌다 흘깃 보게 된 흐릿한 진리를 근거로 하나의 철학 체계를 펼치려는 사상가처럼 백치 같은 둔중함을 보이고 있었다.

 

 

짐은 그를 바라보다가 마치 마지막 이별을 한 뒤처럼 결연히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마치 그의 정령이 흘러간 시간 속으로 날갯짓하며 들어간 후 그의 입술을 빌려 과거로부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념이라니! 그것은 떠돌이요 방랑자로서 우리 마음의 뒷문을 찾아와 두드리고, 우리의 자질을 조금씩 앗아가며, 이 세상에서 점잖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게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수해야 하는 몇 가지의 단순한 관념에 대한 믿음을 부스러기마저 얼마쯤 가져가 버리기도 하지.

 

 

그의 몸은 당겼다 놓은 하프의 현처럼 팽팽하게 떨리더군.

 


그 심한 떠벌림 속에 그런 논리의 실오라기가 들어 있다니.


 

삶의 가혹함이 그의 자기만족적인 영혼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었던 것은 마치 바늘을 가지고서 바위의 반질반질한 표면에 아무런 흠집을 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인간의 내면적 존재의 품위를 위해서는 육신의 단정함을 위해 옷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겠나.

 

 

한 문장이 지니는 힘은 그것이 구성하는 의미와 논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법이야.


 

내가 볼 수 있도록 그가 허용해준 자신의 모습은 짙은 안개 속의 갈라진 틈으로 흘깃 보이는 풍경들 같았어. 그 생생하지만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세부 광경의 조각들은 한 지역의 전체적인 경치에 대해서 조리 있게 알 수 있도록 해주진 않아.그 조각들은 호기심을 부추기기만 했을 뿐 충족시켜 주지는 않았어. 그 조각들은 그 지역에 대한 방위 잡기라는 목적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까. 대체로 말해서 그는 나를 오도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는 죽어도 좋다고 체념했을지 모르나, 더 이상 공포의 상황을 겪지 말고 일종의 평화로운 몽환 상태에서 조용히 죽고 싶었을 거야.죽으려고 모종의 준비를 하는 사례는 그리 드물지 않겠지만, 뚫을 수 없는 결심의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람들이라도 질 것이 뻔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사례는 보기 어려운 법이야.


 

희망이 줄어들면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욕구는 점점 더 강해져서 결국은 삶의 요구까지 정복해 버리게 되지...턱없이 큰 세력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이라면 그걸 잘 알고 있지. 이를테면 난파선에서 구명정으로 빠져 나온 사람들이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들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자연의 힘이나 군중의 우둔한 포악함에 대항해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걸 알고 있을 거라는 말일세.


 

그는 나를 상대로 말하는 것이 그저 내 앞에서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어. 어떤 보이지 않는 인격체랄까, 자기와는 적대적이면서도 자기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파트너랄까. 자기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또 하나의 존재랄까. 뭐 그런 상대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던 거지.



즉 제 나름의 요구를 하고 있는 평판 좋은 사람들과 제 나름의 절박함을 겪고 있는 평판 나쁜 사람들에게 다 같이 공평해지려면, 그 논쟁에서 판정을 내린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인데도 말이야...나는 모든 진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관행이라든지 허위의 본질적 성실성을 바라보도록 요구 받고 있었던 거야. 그는 한꺼번에 모든 면을 향해 호소하고 있었지.

 

 

귀에는 익지만 일그러진 소리로 들리는 이름들이라 마치 여러 시대에 걸쳐 말없는 세월의 손길이 그 이름들 위에 작용한 것 같더군.

 

 

세월이 그를 따라잡고는 앞질러 버렸던 거지. 세월은 몇 가지 초라한 선물을 남긴 후 그를 절망적으로 뒤쳐지게 해버렸던 거야.

 

 

그의 무의식적인 얼굴은 언뜻 지나가는 경멸, 절망과 결의의 표정들을 차례로 반영하고 있었어. 마치 마법의 거울이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비현세적 형상들을 반영하는 것 같더군.

 

 

환자의 병상 곁에서 밤을 세워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영혼이 쥐어짜는 희미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거야.

 


그는 암담하고 절망적인 대양의 기슭에 서 있는 외로운 사람처럼 거대한 어둠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던 거야.

 


말은 세월을 통해 멀리까지 옮겨가며, 허공을 나는 총알처럼 파괴를 가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것치고 그런 종말감 말고 따로 무엇이 있겠는가? 끝장! 종결! 이런 강력한 말들이 생명의 집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운명의 그림자를 쫓아낼 수 있는 거야...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정말이지 희망은 있어. 그러나 두려움 또한 있는 법이야...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죄뿐인데도 그가 자기의 불명예를 너무 심각히 여긴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해...그는 너무 섬세하고 섬세해서 아주 불행했던 거야.

 

 

그 사념이 어둠 속의 물웅덩이처럼 아른거리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만, 그 깊이를 헤아리기 위해 접근하는 데 대해서는 절망하고 있었지.

 


그의 상처 입은 영혼이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깡총거리며 퍼덕이다가 어떤 구멍에 빠져 결국은 영양실조로 조용히 죽어가는 동안, 그가 늘 하던 대로 일상의 중요 용무를 보며 먹고 마시고 자는 데 필요한 생계비를 나는 그의 속에 억지로 쥐어주었지.

 

 

백분의 일이라는 가능성 말이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늘 그 백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가능성이거든.

 

 

그 여린 날개의 청동색 광채라든지 하얀 선이라든지 화려한 무늬에서 그는 마치 다른 무엇을 보고 있는 듯했는데, 그건 죽어서도 손상되지 않은 화려함을 보여주는 여리고 생명 없는 나비의 조직만큼이라 쉽게 손상될 수 있으면서도 파괴는 거역하는 어떤 무엇의 이미지였어.



인간도 놀랍긴 하지만 걸작은 못 돼...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인간이 나타난 것처럼 보일 때가 가끔 있어. 인간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데도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인간이 모든 곳을 갖고 싶어 할까?


 

그는 등불이 밝게 비치는 곳을 벗어나서 불빛이 희미하게 테를 이루고 있던 가장자리를 거쳐 결국은 아무 형상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더군. 그 몇 발짝이 마치 이 구체적이고도 어지러운 세계로부터 그를 데리고 나간 것처럼 기이한 효과를 내고 있었어. 키가 큰 그의 형체는, 마치 그 실체를 박탈당한 것처럼, 허리를 굽힌 불명확한 동작으로, 보이지 않는 물체 위를 소리 없이 떠돌고 있었거든. 그가 실없는 관심을 쏟으며 영문 모르게 바쁜 모습을 엿보이고 있던 그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먼 거리로 인해 부드러워진 채 굵고 엄숙하게 굴러오는 듯하더군.


 

그의 일생은 고귀한 이념을 위한 희생과 열정 속에 시작되었고 그 후에 여러 종류의 길이며 낯선 길을 따라 참으로 먼 여행을 해왔지만, 어떤 길을 걸을 때건 비틀거림이 없었고 따라서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할 일도 없었지. 그때까지 그는 늘 옳았어. 그게 유일한 길이었음을 의심할 수는 없지.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무덤과 함정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광대한 평원은 흐릿한 빛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시경 속에서 아주 황량하게 보였고, 마치 여러 갈래 불길로 가득한 심연으로 둘러싸인 듯이 가장자리는 동그랗게 밝았지만 그 중심은 그늘져 있었어. 드디어 내가 침을 깬 것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자신보다 더 로맨틱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서였어.

 

 

내게 보인 것은 그가 확고한 걸음걸이로 뒤쫓고 있던 그의 운명이라는 실체와, 미천한 환경에서 시작한 후 열정, 우정, 사랑, 전쟁 같은 그 모든 고양된 로맨스의 요소들을 넉넉히 누렸던 그의 일생뿐이었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마치 자기네를 불안정하게 삶에 묶어두는 밧줄이 다른 사람의 밧줄보다 더 길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방향으로든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법이야.


 

욕망이라는 괴이한 고집이 그들로 하여금 온갖 형태의 죽음을 무릎 쓰고 했었지



불굴의 죽음이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목숨을 세금 걷듯이 앗아가는데도 교역을 갈망하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만 했어.


 

단지 탐욕 때문에 인간이 그처럼 집요한 목표에 매달릴 수 있고 그처럼 맹목적으로 끈질긴 노력과 희생을 할 수 있었다는 건 참으로 믿기 어려울 지경이야.

 

 

그 모든 정복, 신임, 명성, 우정, 사랑 같은 것들은 그를 지배자로 만든 동시에 사로잡힌 몸으로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야...그는 일종의 격렬한 이기심과 경멸적인 애정을 가지고 그 땅과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더군.

 

 

승전의 도덕적 효과는 그를 갈등에서 평화로 인도했고 죽음을 거쳐 사람들의 가장 깊숙한 내면 생활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하지만 햇빛 아래 펼쳐진 대지의 어둠은 속을 헤아릴 수 없이 영속하는 안식의 외양을 지니고 있었어.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으나 자기네가 거둔 성공이나 소중히 지키고 있을 만큼 우둔하지 못하고, 결국은 불우한 일생의 역정을 마치고 마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어.

 

 

이따금 그녀가 우리와 함께 앉아 있을 때면 작은 주먹으로 부드러운 뺨을 누르면서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 마치 우리 입에서 나오는 낱말 하나하나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을 가지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우리의 생존이 다른 사람들 위해 필요하되,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알게 될 경우 우리 각자는 여느 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유령이 나올 듯한 폐허에서 사랑이 맹세를 교환하는 기사와 소녀처럼 삶의 재앙이 던지는 그림자 아래서 만나 함께 살게 되었던 거야. 그런 이야기를 위해서는 별빛이면 충분했어. 그 빛은 너무 희미하고 아득해서 그림자의 형상을 드러낸다든지 강 건너편 기슭을 보여줄 수도 없을 정도였어.

 

 

이처럼 한 망령의 마력에 이끌린 가엾은 인간이 또 다른 유령으로부터 엄청난 비밀을 짜내려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것은 이 세상의 열정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어떤 와해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