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이라는 것이 평범한 대중들을 얼마나 냉정하고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이도록 만드는지, 또한 얼마나 그들에게 단일성과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몸에 걸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을 민간의 일상생활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도록 만드는 이 죽음의 제복은, 그것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몸을 국가에 팔았다는 표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ㅡ T.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기둥》에서 인용
가장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가 다수의 독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다수결 민주주의라는 의미에서도 소수자의 인권과 자유를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다. 모든 개인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바로 그 이유로 하나로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소수자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중요하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재의 판결도 이런 의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문프가 임명한 헌법재판관들이 없었거나, 북한의 위협을 극대화시켜 먹고사는 자한당 정부의 헌재였다면 위헌 판결이 지속됐을 수도 있었지만.
군복무가 국민의 의무인 나라에서 총을 들 수 없다는 종교적·양심적 신념 때문에 수많은 범죄자를 양산했던 반인권의 시절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문프의 탁월한 지도력과 공동 번영이라는 신뢰의 비전 때문에 북한과의 극한대치도 눈 녹듯이 사라진 평화 무드까지 더하면 천지개벽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북한의 비핵화는 아직 멀었지만, 그래서 평화 무드가 언제라도 제자리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남아있지만 소수자를 보호하는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거대한 문턱을 넘은 것은 확실하다.
헌데 '교정시설 36개월 합숙'을 골자로 한 국방부의 대체복무제 안을 내놓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국방부의 안을 '징벌적이고 차별적으로 그리고 행정편의적으로 디자인한 것'이라며 '반인권적이니 최악이니 국방부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느니' 하면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양심의 자유'라는 보편적 인권이자 헌법상의 기본권을 내세워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물에서 꺼내주자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격이다.
이들의 비난이 옳다면, 소수자의 인권과 자유를 보호하고 지켜주려면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줘야 하는 모양이다. 절대 다수의 상대적 박탈감과 역차별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비난은 수많은 청년들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군대가 체질인 사람들을 빼면, 어떤 청년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군복무에 바치고 싶겠는가? 소수자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상대적 박탈감과 역차별을 삼키면서 총을 들어야 하는 청년들은 다수라는 이유 때문에 침묵해야 하는가?
인권운동은 인류의 위대한 자산이지만, 그것이 다수자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상대적 박탈감 같은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양심의 자유'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권리이기 때문에 지켜주는 것이지, 특별한 신념을 가진 것이 대단하다고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의 '양심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절대 다수의 희생과 헌신을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전형적인 사례다. '양심의 자유' 때문에 국방의 의무를 거부한 청년들에게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함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공평에 관한 문제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면 어떤 국가도, 어떤 공동체와 사회도 존립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는, 아니 어떤 정부의 국방부라고 해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을 병역의 의무에 바친 절대 다수의 청년들을 위해 존재하지 '양심의 자유'를 내세워 병역의 의무를 거부한 소수의 청년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국방부의 입장에서는 절대 다수의 청년들 입장에서 대체복무제 안을 만들어야 하지 소수의 청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기 위해 대체복무제 안을 만들 수는 없다.
전 세계적으로 우파 표퓰리즘 세력들이 득세하고 폭주하게 된 이유의 핵심에는 수많은 종류의 소수자를 보호하고 우대하기 위해 절대 다수의 상대적 박탈감과 역차별을 무시하고 비판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이며 법적인 결정이 자리한다.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써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덕목이자 규범이며 사회적 합의다. 이것에는 추호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의 이익을 취하는 형태로 진행돼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자의 이익을 위해 다수자를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의 삶의 질을 위해 무한대의 복지를 제공할 수 없듯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없다. 억압과 차별을 받았다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고 소수가 다수에 의한 차별의 근거가 될 수도 없지만, 그 이유로 해서 절대 다수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삼키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소수와 다수가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요구는 지나치다 못해 뻔뻔할 지경이다.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기레기들이 더욱 나쁜 놈들이지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어준 패거리의 손혜원 구하기와 그 역풍에 대해 (3) | 2019.01.27 |
---|---|
여성을 극단적 페미로 만드는 언론 보도에 대해 (0) | 2019.01.23 |
사립유치원 비리와 집단반발의 본질에 대해 (0) | 2018.11.22 |
이수역 사건, 신자유주의와 디지털기술의 슬픈 자화상 (1) | 2018.11.16 |
이인규를 강제귀국시켜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4) | 2018.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