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죽음이 살아남은 이에겐 돌이킬 수 없는 가해가 된다는 의미”라며 “이 문장이 수없이 공유됐다는 건 그만큼 공감하는 마음이 많았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진실의 무게는 피해자가 짊어지게 됐고 피해자 중심주의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려하던 2차 가해도 범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KBS는 이명박근혜 9년 동안의 행태가 부끄러웠던지 정치적 중립, 객관적 보도, 균형잡힌 접근 운운하며 기계적 균형에만 집착합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대변하겠다며 일방적 담론(그들만 알고 시청자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그들의 시선, 즉 카메라 각도)을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반이 여성이고 그 여성들이 모두 다 피해자인양 몰아가는 KBS의 일방적 담론은 특정 계층의 이익만 대변하는 전체주의적 보도의 느낌마저 듭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남은 이에겐 돌이킬 수 없는 가해가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죽음을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헌데 이런 일방적인 접근은 고 박원순 시장이 피해자에게 보복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릴 만큼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인이자 파렴치한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듯이 평생을 선하고 옳은 일을 해오면서 살아온 박 시장이었음에도 단 한 명의 피해자에게 보복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악랄한 인간이었단 뜻입니다.
KBS 이소정 앵커의 클로징 멘트는 성공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자신이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온갖 비난에 시달릴 것을 참지 못해 죽음으로 도피해버린 비겁한 인간이자 자신의 목숨값으로 피해자에게 보복이나 가하는 인간 말종이란 뜻도 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깎아내려야 피해자와 성폭력 희생자들의 인권과 치욕이 회복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으로 피해자가 받을 고통의 몫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이런 글도 2차가해가 될 수 있음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재련 변호사와 그녀와 함께 시민단체가 보여주는 정치적 여론몰이 행태와 비교할 때 KBS 이소정 앵커의 클로징멘트는 고상함을 차용한 비열하기 짝이없는 부관참시이자 사자에 대한 영혼살인입니다. 남은 사람인 피해자의 고통이 큰 만큼 남편이자 아버지의 황망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유가족과 박원순 시장에게 도움을 받은 모든 시민들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인지,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형사법상 밝힐 수 있는 한계도 있는 상황에서 진실의 일단이라도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면 KBS의 가치가 땅바닥으로 처박히기라도 한답니까? 이소정 앵커의 클로징멘트를 들으며,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로 일반명사처럼 되버린 <블랙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의 <행운에 속지마라>에서 나온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리스의 현자였던 솔론을 인용하며, '비대칭문제'라는 확률에 대한 대중과 경제학자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 다룹니다. '비대칭문제'란 '실패의 대가가 지나치게 클 경우, 아무리 자주 성공을 거두어도 소용없다는 뜻'이라고 탈레브는 말합니다. 전작보다 더욱 시니컬해진 저자의 성찰이 폐부를 칼로 찌르는 것처럼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저는 이소정 앵커의 클로징 멘트를 무작정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헌데 탈레브의 성찰에 기대 세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앵커는 '수없이 많이 공유'라는 말을 썼는데 '수없이 많은 공유'의 기준이 어느 정도의 숫자인지요?
만 번의 공유요? 십만 번의 공유요? 이소정 앵커는 '수없이 많은 공유'의 기준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진실의 무게'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요? 성추행의 정도도, 횟수도, 기간도, 실제 일어난 일들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이 진실인지요?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나요? 누군가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있나요? 사실도 아닌 진실의 기준은 무엇인지요?
마지막으로 '피해자 중심주의'가 절대적 선인지, 어디부터 피해자 중심주의가 시작되는지, 어디가 넘어서는 안되는 경계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일치된 합의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그것은 남은 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남성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될 테니까요.
작년 말, 어머님의 돌아가신 이후의 저도 이런 '비대칭문제'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의 죽음'이라는 너무나 큰 사건 때문에 그 이후 아무리 열심히 살며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기도해도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머님 생전에 '엄마 죽으면 난 어떻게 살지? 나도 따라 죽을까?' 이런 말들을 수없이 되풀이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후 정작 잘만 살고 있어서 하루하루가 죄스럽기만 합니다.
어머님 생전보다 건강이 좋아진 것도 죄스럽고, 자주 찾아뵙기 위해 서울로 왔다는 핑계를 대면서 3주에 한 번도 동작동 국립묘지를 가지 않은 것도 죄스럽기만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어머님이 좋아했던 음식을 먹을 때나 어머님처럼 등이 굽은 할머님들을 볼 때마다 죄스러운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그런데도 살아가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썼던 시에서 '죽음은 남은 자의 것일지도 모른다' 표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그런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모든 역사와 존재하는 것과의 완벽한 단절을 뜻하는 실존적 사건인 죽음이란 지극히 정치적인 경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영상에서 그녀의 성찰을 풀어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남은 자의 입장이 아닌 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반대로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개인적 경험의 차원에서는 그런 변화가 너무 힘겨운 일이지만, 하늘에 계신 어머님이 행복하려면 저도 죽음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여성을 너무나 좋아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여성의 미와 덕성, 지능, 능력, 재치, 유머, 인품 모두에 긍정적인 페미니스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모든 여성들의 개별성과 매력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권에 민감하고, 그들의 피해에 더욱 민감합니다. 그들의 성취와 성공, 희생과 배려에 기쁘고 고맙기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제 어머님을 기억하는 방식이며, 제 조카들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예, 그래요, 저는 지독할 정도의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을 키우기 위해 늙어버린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는 멍청하고 한심한 놈입니다. 누구를 비판할 때는 정확한 기준과 증거를 상당 부분 확보한 다음에 하려는 것도 이땅의 남성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해서 이소정 앵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피해자가 받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완벽히 파악할 수 없지만, 죽을 때까지 회복할 수 없는 실패를 몇 번이나 경험한 저로써는 고 박원순 시장에 대한 이런 식의 여론몰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나중에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자에 대해 말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클로징 멘트는 정말로 일방적인 폭력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fSZYS0O5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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