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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문파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비판의 저열함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많이 하락한 이후로 좌파와 진보진영을 대표한다고 타인이 아닌 자신이 주장하는 일단의 지식인들이 문통과 문파를 싸잡아 비판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김우창이나 강준만처럼 제법 대접받는 교수부터 최장집, 한홍구, 홍세화 등등이 있고, 그들보다 수준이 떨어지니는 진중권과 서민처럼 <조국 흑서>를 쓴 사이비들도 있다. 

 

물론 <조국 백서>를 쓴 저자들처럼 세상의 변화를 아예 도외시한 채 70년대식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구좌파적 권위주의에 물든 사이비 지식인들도 있다. 그들이 보수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도 위계서열과 알량한 엘리트주의에 빠진 것 때문인데, 이들의 얕은 지식과 뻔뻔함도 문통과 문파를 비판하는 지식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홍익학당의 윤홍식도 그런 면에서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동서양 철학을 섭렵하고 거의 모든 종교를 섭렵했다는 윤홍식이 그런 지식과 성찰로써 문파를 분란세력으로 재단하는 모습이란 그의 공부와 성찰이 얼마나 표피적인지 말해준다. 하버마스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김우창 교수도 젊었을 때의 날카로움을 잃었고, 아직도 계급의식에 목매고 있는 최장집 교수는 조직이자 기구로써의 계급정당적 접근과 공화적 대의로써의 근대민주주의에서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한홍구는 역사학자로써는 인정받아야 마땅하지만, 정치로 넘어오면 리영희식 세계관에 취해 길을 잃곤 한다. 민족주의적 역사의식과 구좌파적 성향은 수구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형 민주주의의 사회주의적 버전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강제로 파묻힌 역사의 진실ㅡ복수의 개념까지 이어질 때가 수두룩하다ㅡ을 밝혀야 하며, 민족의 통일을 무엇에도 우선하는 한홍구의 한계는 1세대 민주화세력의 공통적 한계이기도 하다. 

 

 

노빠들을 대표하는다는 몇몇은 문파가 문통을 절대화한다고 비판했지만 그 또한 각각의 표상들이 그들의 직관에서는 하나의 현상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이니 하고 싶은 것 다해!'라는 표어를 천만 문파의 프로파간다인양 오해한 이들은 대통령과 최대로 해도 청와대만을 되찾은 문통의 임기 동안 온갖 기득권의 저항이 가열차게 진행될 것을 알기 때문에, 문통에 힘을 실어주는 표상이라는 것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문파는 문통을 절대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성공을 절대화하고 싶었다. 그것의 불가능함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렇게라도 마음을 모아줘야 일정한 수준이라도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이명박근혜의 9년 동안 철저하게 체감했기 때문이다. 노빠의 시조이자 본류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문통의 통치방식과 정책들을 오해했듯이, 문파 역시 오독한 것이다. 이들이 비판한 문파라는 현상은 각자의 경험에 근거한 지성개념의 영역에 속할 뿐, 진정한 비판과 성찰로 가는 이성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한다.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정립한 비판방식으로 보면 그들이 틀린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들은 천만 문파를 대표하는 것처럼 왜곡된 현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철저하게 경험에 의존하는 지성개념에 갇혀버렸다. 경험적 직관은 인간을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놓는 이성의 능력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에서 출발했다 해도 더 높은 차원의 초월적 이성비판에 이르지 못하면 각각의 개인적 경험에서 전체를 추론하는 비약과 이율배반의 모순추리를 남발하게 된다. 

 

원조 노빠를 자처하는 이들의 문파 비판은 그런 수준에 머물러있다. 노통과의 정치경험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때의 경험에 의존하는 단편적인 분석에 머물러있으면 그들은 천만으로 늘어난 문파의 성장과 다양성, 개별적 독립성과 연대적 참여의식의 진화를 따라올 수 없다. 어려운 표현이라 많은 분들께는 어렵겠지만 저들이 노통과 함께할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비판근거가 얼마나 일천하며 개인적 직관에 사로잡혀 있는지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홍세화, 진중권, 서민 등은 수준이 너무 떨어져 비판의 대상도 되지 못하지만 관종의 성향이 허경영에 버금가고 권력에의 의지가 니체보다 강한ㅡ그러면서도 추하기가 그지없는ㅡ이들의 궤변과 비판의 저급함은 천만 문파를 단 하나의 집단으로 매도하는 범죄에 한치의 주저함도 보여주지 않는다. 천만이란 숫자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 볼 수 없음을 말해주는데 그들은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하나로 묶어버린다.

 

이성보다 앞서는 손가락의 난동을 참지못하는 일부의 키보드워리어를 문파의 전형으로 규정지어 버리면, 이들 같은 비판도 가능하다. 일반화의 오류에도 들지 못하는 이들의 비판은 비판의 논리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현실적 근거를 1% 정도의 극렬문파ㅡ뇌보다 손가락이 빠른 키보드워리어ㅡ에 두고 있다. 용감무쌍하게 99%를 배제시키며 1%가 전체라고 우기는 이들의 초월적 비약은 초월철학을 정립한 칸트라도 혀를 내두를 판이다.   

 

최소한 라이프치니와 벤야민의 단자론에 대한 이해가 있었더라도 이런 막가파식 비판을 할 수 없다. 몇 발 더 나아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 따르면, 천만 문파를 자신의 직관에 다가온 대표적 표상인양 포장해, 99%의 현상은 무시한 채 1%라는 극소수의 행태를 표상적 감성화로 하나의 계열로 묶어버리고, 그에 따른 형식적 범주화를 통해 제멋대로 비판하는 엿장수 맘대로의 변증학적 추리를 서슴지 않는다.

 

천만 문파의 표상적 잡다를 각자의 실체에 하나하나 연이어 덧붙이지 않은 채, 감성적 비약을 통해 하나로 묶어버리는 이런 오류추리의 변증학은 이성에 따른 초월비판으로 들어설 수 있는 근거를 단 하나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문파에 대한 저들의 비판은 조건적인 소수의 경험적 예로써 무조건적이고 초월적인 신이라는 존재를 실체화시키는 논리적 비약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1%가 99%보다 진실이라는 저들의 주장은 경험의 크기(양)나 질의 밀도에서 터무니없는 궤변이자 왜곡일 뿐이다.     

 

 

감성적 지성개념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이들의 비판(1%의 키보드워리어의 행태에 근거한)은 그것의 확장을 이끌 수 있는 연장적이면서도 기연하는 상기(깨어있는 시민의 가치연대로써의 99%의 문파의 이성적 성찰에 근거한)로써 반성적 비판을 이끌어내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시공간에 천만 문파를 가둬놓은 채, 실체로써의 실재성을 제멋대로 부여한 채 이율배반으로 가득한 가상적 변증학을 마구마구 풀어댄다.

 

이들의 오류추리들은 모순대당(두 개 중 하나는 참이고 나머지는 거짓인 명제)의 이율배반으로 가득해, 칸트가 그렇게도 경멸했던 잘못된 변증학(생각하는 내가 실존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가능하게 한 근원적 원인이자, 원인을 일으킬 뿐 자신에게는 귀속시키지 않는 전능한 신이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는 대다수의 엉터리 형이상학)의 전형이다. 프랙털 이론(전체는 부분을 이루는 단위와 거의 비슷하게 구성된다는 이론)을 들이댄다 해도 현실에서의 하나는 하나일뿐 전체가 아니다.

 

칸트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비판은 이성의 영역으로 초월하는 어떤 확장도 불가능한 결함투성이의 단견들이어서 자신의 논리적 근거를 신적 초월성에 일치(노통을 독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시키지 않는 한 어떤 객관적 근거도 가질 수 없다. 철학적으로 난해한 용어들을 모두 다 거둬내 쉽게 말하면, 1%의 키보드워리어가 나머지 99%를 대표한다는 주장이어서 철학의 수준에서도, 상식의 수준에서도, 심리적 수준에서도 어떤 논리적 근거도 가질 수 없는 사상누각이란 뜻이다.  

 

이들의 비판은 모두 지성개념에 머물러 있다. 즉 자신의 좁고 선급하며 편향된 경험적 추론에만 의존해 있다. 얼치기와 사이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들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치열하고도 꼼꼼하며 끈질지게 정립한 순수 이성의 개념화, 즉 이념적 초월분석으로 분석하면, 양자터널링에 의한 양자얽힘 만큼 우주 탄생의 인플레이션적 폭발에 비견될 정도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갈 수 있다는 이들의 비판은 허공 중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바벨탑을 보는 듯하다.

 

이들에 대한 비판을 더욱 학문적으로 치밀하게 펼칠 수 있지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써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를 위한 글에서 그렇게 먹물적인 모습까지 보일 필요는 없으리라.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의 최대치에 이르는 방법론을 정립한 위대한 칸트가,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도덕법칙이자 상식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실천이성 비판>으로써의 의무와 당위를 이들의 비판에서 찾아낼 방법이란 단 하나도 없다, 도대체가! 

 

 

초월철학을 통해, 즉 이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당위와 윤리로써의 도덕법칙이 나오는데, 천만 문파를 하나의 집단으로 우겨넣는 폭력적인 짓거리는 상식의 수준에서도 오류추리에 해당한다. 천만의 문파에는 대깨문도 있을 것이며, 극히 일부의 문슬림도 있을 것이다. 행동이 앞서는 격렬 문파도 있을 것이고, 뒤에서 후원하고 응원하는 수없이 많은 99%의 문파들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즉 1945년의 해방 이래, 헌법적으로는 임시정부와 3.1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써 깨어있는 시민들이 존재하고 대를 이어 이어져 왔다. 위기 때마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뒤바꿔온 이들은 건국 이래, 오로지 한국전쟁을 빼면, 가장 큰 규모와 가장 다양한 종류의 외부충격을 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극복하고 있고,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신뢰의 근거로써 함께했다. 

 

1%의 극렬문파와는 다른, 노통의 삶과 죽음, 지식소매상이자 스피커로써 유시민 이사장(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의 도움을 받아 문통과 함께하는 99%의 진성문파는 양자요동하는 지혜이자, 직간접적 참여의 파동으로 실존하는 정치사회적 연대의 원천이다. 문파의 진정한 힘은 여기에 있지, 1% 정도의 키보드워리어적 공격성과 무도함에 있지 않다. 진성문파는 지켜볼 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외부충격에도 불구하고 문통이 너무나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시장도, 다음 대통령도 천만 문파의 표가 결정한다. 명심하라, 진성문파의 마음을 얻거나 훔치지 못하면 누구도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한다. 침묵하는 문파가 더욱 무서운 법이다. 왜? 그들은 두 번은 실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섭게 깨어있는 그들은 수십억 개의 뉴런이 시냅스로 연결돼 있는 뇌처럼 그렇게 연결돼 있다. 모든 뉴런은 노통의 정신과 문통의 가치이며, 시냅스는 각자의 깨어있음이다. 

 

 

니체의 말처럼, 천년왕국을 기다리며 탐욕과 권태에 쩔어있는 '최후의 인간'은 너희들이지 천만 문파가 아니다. 연대하는 힘이자 관계로써의 문파는 언제나 '시작하는 인간'이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목표한 곳에 이르는, 그곳이 성지이기를 바라기보다 '사람이 먼저'인 '사람사는 세상'이기를 바라는 각각의 개인이자 더욱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향한 최후의 보루이자 가치연대로써의 전체이다. 

 

천만 문파는, 생철학자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증명한 것처럼 노통의 삶과 죽음에서 출발해 문통의 성공적인 퇴임까지 다양한 형태로 갈라지면서도 끝내는 하나로 뭉치는 그런 창조적 진화의 주역들이다. 그들은 늘 현재에 천착하면서도, 돈만 밝히는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의 길에 들어선 노무현의 정신까지 배진, 즉 소급하며,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시민으로 돌아온 문재인이 봉화마을에 돌아와서는 동지이자 친구인 노통에게 퇴임인사를 하며 웃는 순까지지 전진, 즉 나아간다. 

 

문파가 어떻다고? 까불지 마라. 아니, 너 자신을 알라. 너의 무지부터 돌아보라! '권력이 다르면 지식도 다르다'는 푸코의 말도 성찰해 보라! 하버마스의 성찰을 빌리면, '공론장 이동'은 벌써 일어났고, 99%의 문파는 이미 그곳에서 문통의 성공을 위해, 무엇보다도 코로나19의 조기 극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99%의 문파는 네그리와 하트가 말한 반제국적이고 이합집산을 마음대로 하는 '다중'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가치연대이고 도덕법칙으로써의 실천이성이니 말이다! 

 

천만 문파의 출발점은 단 하나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아울러, 언제나 동시에 목적지도 하나다. 반칙과 특권이 사라지고 상식과 원칙이 번성해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먼저인 사람사는 세상이며, 그런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