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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세력의 몰락과 부활을 위해

양자역학으로 보는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건,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이건 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 있다. 그것은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하는 물리학이다. 우주와 삼라만상의 생성과 소멸을 탐구하는 물리학은 정치·경제·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도움을 준다.



특히 현대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대물리학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현대물리학의 핵심인 양자역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양자역학을 이루는 원리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베타원리가 대표적인데, 둘 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이 두 개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민주주의 이해에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입자가 위치와 운동량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입자가 특정할 수 있는 위치로 측정될 때는 질량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같은 입자들은 언제나 동일한 질량을 가진다, 평등의 개념처럼.



헌데 입자는 질량적 성질인 위치와 동시에 운동량을 지니고 있다. 운동량은 에너지가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즉, 입자가 운동량으로 측정될 때는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동으로 이해된다, 자유의 개념처럼.





입자는 이렇게 특정한 위치를 가질 수 있는 질량적인 성질과 특정한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는 운동량인 에너지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렇다 보니 특정한 위치로서 입자를 측정하려 하면 운동량에 문제가 생기고, 운동량으로 측정하려면 위치에 문제가 생긴다.



결국 만물을 이루는 입자는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할 수 없는 불확정한 존재로만 측정이 가능하다. 이것이 불확정성의 원리다. 위치를 고정하려 하면 운동량에 문제가 생기고, 운동량을 고정하려 하면 위치에 문제가 생긴다. 둘 중에 하나라도 고정하면 입자는 존재할 수 없다.



입자가 지니는 이런 두 가지 성질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은 지속적인 측정을 통해 확률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입자에 인위적인 변화(정치)를 주려면 측정의 횟수를 통해 편차를 최대한 줄인 다음에 질량적 성질을 지닌 위치에 에너지를 가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러하다. 질량적 성질인 평등과 에너지적 성질인 자유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있다. 평등에 치우지면 자유가 침해받고, 자유에 치중하면 평등이 침해받는다. 둘은 하나이면서도 서로 성질이 다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중에서 자유를 강조한 것이다. 자유의 확대는 평등의 축소를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온갖 불평등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평등이 커질수록 민주주의는 축소되고 과두정치나 금권정치로 넘어간다.



불평등이 우주와 자연의 법칙이자 원리라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모든 존재의 근본인 입자의 차원에서도 자유(운동량)와 평등(위치)은 분리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성질이다. 어느 하나가 강조되면 입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민주주의도 무너진다.





다윈과 월리스의 진화론을 봐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핵심 원리가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 원리다. 생태계의 균형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류가 민주주의를 지배적 원리로 받아들였다면, 자유와 평등을 분리해서 보면 안 된다.



공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평등을 인정하면, 민주주의는 고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불평등의 체제인 과두정치나 금권정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불평등에 맞서 싸워야 한다. 불평등은 자유마저 죽이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등급을 매겨 신용을 창출하는 빚의 경제학이 불평등을 확대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상극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