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영워드

우영워드 ㅡ 인사이더1






재영은 유선전화로 짧게 통화한 X를 만나기 위해 세 번이나 장소를 바꿔야 했다. S신문사의 내부문제를 고발하겠다는 X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만남을 두 번이나 번복했기 때문이다. 재영은 X를 설득하느라 도로 위에서 1시간 반 이상을 서성거려야 했다. 재영은 그 과정이 마치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insider〉를 연상케 했다. 1996년 묘국의 CBS 방송사는 시사프로그램 <60Minutes>에서 묘국 3대 담배회사의 하나였던 브라운&윌리엄슨의 개발자이자 부사장으로 재직한 적이 있던 제프리 위건드가 회사가 저지른 불법행위(매출을 늘리려고 담배에 암모니아 화합물을 넣어 흡연자의 중독성을 강화시켰음)에 대한 의회 증언에서 회사 임원들이 허위증원을 했다는 리포트를 했는데, 방송사 경영진이 방송 시작 직전에 프로그램 방영을 취소시켰다. CBS 경영진이 방송을 취소시킨 이유는 자문 변호사들과 특히 자문역을 맡았던 캐던이 위증에 대해 리포트를 한 위건드가 담배회사 퇴사 시 ‘비밀 보호 각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방송이 나가면 CBS가 담배회사로부터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손해배상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면의 진실은 조금 달랐다. 당시에 CBS를 소유하고 있던 로스 사가 웨스팅하우스에 CBS를 매각하려 했기 때문에 담배회사로부터 소송을 당하면 매각 가격이 하락하거나 매각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의회에서 위증을 한 담배회사 임원중에 앤드루 티시는 로스 사의 대주주인 로렌스 티시의 아들이자 로스 사의 자회사인 또 다른 담배회사 로릴러드의 사장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방송을 막아야 했다.

방송이 취소된 리포트 내용은 ‘배너티 페어’라는 소규모 언론사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지만 그 반향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내부고발을 한 위건드는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아내와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마이클 만 감독이 1999년에 영화화한 것이 <insider>였는데, 이를 통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줬으나, 그때에는 이미 “미국 텔레비전에서 탐사 저널리즘은 거대 기업의 이익에 희생”되었고, 미디어 합병을 주도한 복합기업들의 이익 때문에 감시견으로써의 언론은 이미 고사 직전에 이른 상태였다. 어쨌든 러셀 크로가 연기한 위건드가 X라면, 이 사건에 대해 가장 상세한 보도를 한 그로스먼이 자신이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대한민국에서도 몇 번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회사나 조직이 승리했다. 하물며 폭로의 대상이 절대적 세력인 거대 언론사라면 내부고발자는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으면 폭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파워엘리트들의 ‘이너 써클’의 위력이자 기득권의 힘이며 대한민국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넘지 못할 벽은 없어!”



재영은 스스로를 다짐하며 2시간에 걸친 마라톤 경주 끝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3대의 CCTV가 설치돼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분할된 화면이 잘리는 곳에 약속 장소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재영은 그간의 취재에서 사건 현장이 촬영된 CCTV 화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각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자일 가능성이 높은 X 또한 취재 경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CCTV에 『1984』에 나오는 텔레스크린(영상감지장치가 달려 있어 개인을 집 안에서도 감시할 수 있는 ‘빅브라더’의 최대 무기)처럼 구굴이 개인용PC에 내장된 마이크로폰을 이용해 개인이 TV에서 어떤 드라마와 버라이어티쇼, 리얼리티 프로그램, 광고 등을 선호하는지 알아내는 ‘오디오 지문인식’ 시스템과 인공위성으로 지구 전체를 촬영하는 구글어스에다가 거리를 실제로 찍은 스트리트뷰까지 더해지면 어떤 숨바꼭질도 불가능하겠지만, 어쨌든 재영이 생각하기에 X는 용의주도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아니면 이미 내부고발에 따른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르는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 정도까지 조심하는 거지?’



재영은 제보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의 더욱 증폭됐다. 그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후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건물 안은 어두웠다. 마치 그 자체로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재영은 어둠의 핵심에 앉아 있는 X를 한 눈에 찾을 수 있었다. 무모하리만치 진실을 파고들었던 기자 본능과 수없이 단련해온 직감이 X를 향해 꿈틀거렸다. 재영은 빛의 방향에서 어둠의 영역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가 X에게 다가갈수록 어둠은 뒤로 밀려났지만 공간이 생기자마자 순식간에 그 공간을 다시 채웠다. 그것이 어둠의 힘이리라, X는 햇빛을 후광처럼 달고 오는 재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재영의 걸음 하나하나에서 내부고발에 따른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티끌만한 생명의 단서를 찾기라도 하듯이.



“M방송국의 김재영입니다.”

“앉으시죠.”



나지막한 재영의 말에 X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은 채,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톤으로 자리를 권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서 마치 어둠의 일부분이 된 듯했다. X는 빛의 세계에서 다가온 재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떤 경우에도 방송을 내보낼 수 있습니까?”

“내용에 따라서요.”

“불가능하다는 말로 알겠습니다. 오늘 만남은 없던 걸로 합시다.”



재영의 답에 X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나가버릴 태세다. 재영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당신의 제보와 상관없이 S신문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갈 것입니다. 그쪽에서 내부비밀을 자료를 건네주시면 가는 길이 상당한 힘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방송 가능성이 더 줄어든다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네요? 오늘 우리는 만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X가 재영이 걸어온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것은 빛의 세계인, 냉혹한 현실로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이게 당신의 제보와는 상관없이 제가 추진하고 있는 취재기획안 초고입니다.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오픈하지 않은 것인데, 보고 나서 말씀하시죠?”



재영이 탁자 위에 복사물 하나를 놓은 후 오른 손으로 X를 향해 밀었다. 제목이 인쇄돼 있어야 할 첫 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제목을 결정하지 못할 정도로 최신의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제보의 내용에 따라 제목이 결정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직감적으로 상당한 폭발력을 지닌 제보가 분명하다고 판단한 재영이 일생일대의 도박을 선택했다.



“...”



창밖의 햇빛을 응시한 채 아무 말 없이 서있던 X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재영이 내민 복사물을 집어 들어 한 동안 첫 장의 제목 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 속에서 간간이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날카롭게 일었다. 재영은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이렇게까지 섬뜩할 수 있음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입에 침이 마를 정도의 긴장감을 다스려야 했다. 10여 분의 시간이 10여 년처럼 흘렀을까, X가 재영의 준 취재기획 초안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몇 가지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진행사항을 봐가며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X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말투를 유지한 채 가지고 온 봉투 하나를 재영에게 건넸다. 재영은 그제야 X가 몇 개의 봉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그에 맞는 시나리오를 세워둔 것이 분명했다. 재영은 X에게서 오랜 경험에서 나온 용의주도함은 물론 반드시 고발을 방송시키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기초 자료입니까, 아니면 각기 다른 제보 중 하나입니까?”

“둘 다 입니다.”

“알겠습니다. 추후의 연락은?”



재영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운 것 같기도 했고 예상외로 가벼운 것 같기도 했다. 모호한 무게였다.



“명함에 나온 것 말고 다른 핸드폰이 있습니까?”

“없습니다만..”



재영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X의 질문에 하나의 단어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대포폰?’

“그럼, 이 폰을 쓰시죠.”



X가 재영에게 위치추적이 불가능한 구형 핸드폰 하나를 건넸다.



‘역시! 정말 주도면밀한 자야.’

“대포폰이군요? 그쪽의 전화만 받을 수 있는?”



재영의 빠른 추리에 X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X는 거의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재영의 취재기획안은 물론, 그것에 못지않은 순발력까지 갖춘 재영에게서 미약하지만 희망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10분 정도 이곳에 더 있다 나오시기 바랍니다.”



X는 마지막까지 주도면밀함을 잃지 않았다. 재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X가 자신보다 경험 면에서 분명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철저한 주류의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거대 신문사의 내부고발자가 된다면 X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재영은 문득 자신의 목표가 담겨 있는 취재기획안의 무모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의 10분의 시간이란 예상보다 길기도 했고.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